특집 | 좋은 말 나쁜 말 그리고 불교

머리말

우리는 격동기(激動期)를 통과하는 중이다. 한국 현대사에 이보다 극적인 상황 전개가 있었던가. 격동기는 우리를 희망과 불안 속으로 몰아넣고, 우리는 이 순간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지난 1∼2년 동안 일어난 우리 사회의 정치적 격변은 진영에 따라 상반된 감정을 낳았다. 한 편이 승리감, 자부심, 아름다움과 환희를 구가(謳歌)하는 동안, 다른 편은 후회, 분노, 공포, 절망감을 느끼면서 원한을 쌓아가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인터넷 공간에는 상대편에 대한 증오, 모욕과 혐오가 난무한다. 50년 뒤에 지금의 한반도 사건들은 어떻게 기록될까? 오늘날의 승자는 영원한 승자로, 패자는 패자로 기록될까? 남북한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고 있을까? 통일이 되어 있을까? 미국과 일본, 중국과는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까? 그때의 역사 기술은 권력과 여론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이런 격동기에 ‘좋은 말 나쁜 말 그리고 불교’에 대해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거친 풍랑 앞에 차라리 묵언수행으로 세상을 조용히 관찰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지만 말은 하기로 했으니, 참말의 조건이나마 구하기 위하여 고타마 붓다(이하 붓다)에게로 돌아가 보자.

초기불교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든 스스로 심신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관찰하고 그 움직임에 개입해서 그것을 조절할 수 있고, 이와 같이 관찰하고 조절하는 능력에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즉 붓다는 지각, 신체의 떨림, 정동, 감정과 느낌을 잘 관찰하면 거기에서 열반(nibbāna)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붓다는 심신의 한 과정이 다른 과정의 조건이 된다는 것, 그 과정들이 한 개인의 마음에 의존하고, 그 마음에서 산출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과정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연기론이다. 그래서 지각에서 생각, 그리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수시로 개입하는 불선(不善, akusala)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고쳐서, 평안(santi)과 열반에 이르게 하고 자비행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 불교의 궁극 목표였다. 이를 성취하면 아라한, 무니, 붓다, 여래라는 인격이 될 것이고, 그들의 말은 참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중생은 변함없이 오온과잉이고, 입에서 나오는 말은 종종 나쁜 말이고, 그 말에 정동과 부정적인 감정이 동반되기가 일쑤다.


1. 중생의 ‘악마’적인 오온과잉 증상

여기에서 ‘악마’라는 단어는 악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붓다의 오온설(五蘊說)을 전하고 있는 초기불교 경전에서 가져온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잘났는지 냉정하게 한번 따져보자. 오온설에 따르면 소위 ‘나’라는 인격은 다섯 요소의 결합체이다. 오온 중에 색(色, rūpa)은 신체, 수(受, vedanā)는 느낌, 상(想, saññā)은 생각이나 분별력, 행(行, saṅkhārā)은 의지, 작위(作爲), 형성력으로, 식(識, viññāṇa)은 의식으로 보통 이해된다. 수가 감정이나 느낌에 가깝지만, 감정을 느낄 때는 보통 생리적인 변화도 수반하므로, 살아 있는 인간의 심신에서는 오온은 연동(連動)하는 것으로 보인다. 증감이 없는 오온의 그림은 다음과 같이 된다.

이 그림은 오온을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평행선으로 설명한다. 〈그림 1〉은 비실제적인데, 하나의 인격은 정태적이지 않고 역동적이기 때문이다. 요한슨이 초기불전에 근거해서 제시한 다음 그림은 보다 실제적이다.

〈그림 2〉에 따르면, 아이가 태어나서 몸과 마음이 성장하면 오온은 증가한다. 고수(苦受)와 낙수(樂受)를 유발하는 대상의 개수가 늘어나는 한편, 고와 낙은 강해지거나 집요해지기 십상이다. 일반 심리학에서는 이런 과정을 정상 발달로 간주하곤 한다. 하지만 불교 심리학은 그것을 과잉으로 보아서, 그 성장과 증가를 바람직하지 못한 축적(取, upādāna)으로 본다. 오온을 보통 오취온(五取蘊)으로 부르는 이유다. 오온과잉은 오취온의 다른 이름이다. 범부가 거룩한 제자가 되어 불교 수행을 시작하자마자 이 과정은 역전되고 오온은 감소한다. 그가 아라한과를 얻게 되면 오온은 정상 크기에 이른다. 그에게 인격 요소들은 여전히 있으나, 어떤 점에서는 텅 비고 실체가 없다. 따라서 중생이 성제자가 되면 〈그림 2〉에서 보는 대로이다.

〈그림 2〉 오온은 보통 증가한다. 하지만 불교 수행을 통해 감소한다.1)

성제자(聖弟子, ariyasāvako)라 불리는 그는 減하고 增하지 않고, 버리고 축적[取]하지 않고(pajahati na upādiyati), 흩어버리기만 하고 묶지 않으며, 꺼버리고 불태우지 않는다.(S Ⅲ. [PTS] 89)

이 구절처럼, 성제자는 색 등 오온을 감소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수행자]의 마음(citta)은 색 · 수 · 상 · 행 · 식으로부터 자유롭고 (더 이상의) 축적 없이 유입[漏]에서 자유롭다.”(S Ⅲ. 46) 그래서 경전에는 훈련된 마음에 대한 여러 표현이 나온다. 먼저 그것은 감정적이지 않고 안정적이다. “고요하고”(vūpasanta, D Ⅰ. 71), “부동(不動)하며”(ānejjappatta, D Ⅰ. 76), “분노하지 않고”(avera, D Ⅰ. 247), “길들여지고 제어되며, 감시되고 억제되며”(danta gutta rakkhita saṁvuta, A Ⅰ. 7), “고뇌가 없다.”(A I. 9) “나는 숲속에서 진에심(瞋恚心, byāpannacitto)과 악의 대신 자심(慈心, mettacitto)이 된다.”(M Ⅰ. 18) 세존의 말이다.

여래에게도 오온은 있다. 하지만 그의 오온은 아주 달라져서 색에 대한 일반적인 규정에서는 벗어났다. “만약 색(色)이라는 말로 여래를 보이려고 한다면, 여래의 이 색(色)은 버려졌다. ……미래 불생(不生)의 것이 되었다. ……여래는 색의 측량을 벗어나(rūpasankhāya vimutto), 바다와 같이 아주 깊고, 무한하고 난량(難量)이다.”(S Ⅳ. 376)

경전의 한 대목은 중생의 오온을 악마(māra)나 장애물, 종기 등 끔찍하게 혐오스러운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다. 오온 하나하나를 ‘살인마’로 부를 정도로, 세존의 말씀은 지극히 엄중하다. 《상응부경전》 Ⅲ. 189 이하에 나오는 라다 경군(經群)에 나오는 묻기를 좋아하는 비구 라다와 세존 사이의 문답이 그런 사례이다.

세존이시여, 악마(māra), 악마라고 하는데, 악마란 무엇입니까?
라다여, 만약 색이 있다면 魔, 殺者, 死者이다. 라다여, 그 때문에 여기에, 색을 마라라고 관하고(passa), 殺者라고 관하고, 사자라고 관하고, 병이라고 관하고, 腫氣(癰)라고 관하고, 가시(刺)라고 관하고, 통(痛)이라고 관하고, 통종(痛種)이라고 관하시오, 이렇게 관한다면 正觀한다(sammāpassanti)고 한다. ……수, 상, 행, 식도 마찬가지이다.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정관합니까?
라다여, 厭患(nibbidā)을 위해 정관한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위해 염환합니까?
라다여, 離欲(virāga)을 위해 염환한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위해 이욕합니까?
라다여, 解脫(vimutti)을 위해 이욕한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위해 해탈합니까?
라다여, 涅槃을 위해 해탈한다.
라다여, 묻는 것이 지나치다. 묻는 데에 한계를 파악하지 못하는구나. 라다여, 범행이 선다는 것은 열반에 들어가고,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을 궁극으로 하는 삶(nibbānapariyosāna)이다. 

악마와 종기 등으로 불리는 색수상행식은 물론 중생의 오온이다. 중생이 오온에 대해 바로 다음에 나오는 대로, 욕(chanda) · 탐(rāga) · 희(nandi) · 애(tanhā)를 가지고 있어서 결과적으로 그것들에 묶여 있다고 세존은 보고 있다. 오온과잉을 정관해서 청산하라는 것, 과잉된 오온을 실체로 보는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을 버리라는 것이다. 과잉된 오온에 ‘나’라는 것은 없다, 그래서 오온무아이다. 오온무아는 자기개조의 명령이다. 자기개조를 할 수 없어서 중생(satta)인 것이다.

중생, 중생이라고 말하는데, 세존이시여, 무엇을 말해서 중생이라고 합니까? 라다여, 색에 있어서, 欲 · 貪 · 喜 · 愛 있고, 여기에 염착(染著)하고(satto), 여기에 전면(纏綿)하기(visatto) 때문에 설해서 중생이라고 한다. 수, 상, 행, 식에 있어서 欲 · 貪 · 喜 · 愛 있고, 여기에 染著하고, 여기에 纏綿하기 때문에 설해서 중생이라고 한다.

욕탐희애, 염착과 전면(계속 얽힘)은 모두, 오온을 쌓아서 결국에는 과잉을 낳는 심리적인 힘 곧 축적하는 힘이고, 이 힘을 조절하지 못하는 자가 중생이다. 


2. 인지와 감정의 혼재

오온설을 포함한 불교 심리설은, 우리의 지각에는 인지적인 차원과 감정적인 차원이 명백하게 구분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다. 즉, 소위 인지적인 차원과 감정적인 차원이 혼재한다고 보는 것 같다. 12연기의 한 고리인 명색(名色, nāmarūpa)이라는 개념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상응부경전》 Ⅱ. 3 이하에 붓다가 수행승에게 한 말로 다음 구절이 나온다.

“수(受), 상(想), 사(思), 촉(觸), 작의(作意, manasikāro, 注意), 이런 것들을 명(名, nāma)이라 한다. 사대종(四大種)과 사대종소조(四大種所造)의 색-이것을 색(色, rūpa)이라 한다.” 촉이 있어서 상(想, 분별)이 생길 경우 거기에 수(受)도 수반된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의 극복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14대 달라이 라마도 인지와 감정의 혼재를 말하고 있다. 그는 먼저 산스끄리뜨어나 전통 티베트어에는 서양 심리학에서 말하는 감정(emotion)이라는 말로 정확히 옮길 수 있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신 모든 정신 상태(all mental states)는 어느 정도까지는 인지적 차원과 느낌의 차원(cognitive and feeling dimensions)을 모두 포함하고, 오변행심소(五遍行心所, five omnipresent mental factors)를 포함한다고 이해됩니다. 그중 하나가 ‘감정(受)’입니다. 나머지 네 요소는 분별(想), 의지작용(作意), 주의 집중(思), 접촉(觸)입니다. 그래서 하나부터 열까지 세는 단순한 인지적 정신과정조차도 몇 가지 종류의 ‘느낌’이나 ‘느낌 톤(feeling tone)’을 갖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달라이 라마는 수를 세는 인지적 정신 과정에도 느낌과 같은 것이 있다고 설명하고, 그 설명을 초기경전과 유식에 나오는 ‘오변행심소’로 옹호하고 있다. 인지와 감정이 혼재한다는 논의는 대승불교에도 보인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원효(元曉, 617~686)의 주석에 따르면, 사람이 행하는 최초의 분별[智相]은 애(愛) · 불애(不愛)의 분별이다. 지상(智相) 곧 ‘지식’의 원형이 애 · 불애, 즉 감정상의 분별이라는 것이다.
현대 과학자 중에서도 인지와 감정의 혼재를 역설하는 사람이 있다. 뇌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 1944~  )가 그렇다. “내가 헤아릴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어떤 사물이나 사건-실재하는 것이든, 기억으로부터 환기된 것이든-에 대한 어떤 지각도, 감정적인 용어로 중립적인 것이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타고난 설계에 따라서든, 학습에 따라서든 우리는 대부분의-아마도 모든- 대상에 대해 감정을 가지고 반응하며 그 뒤를 이어 느낌이 나타난다. 설사 아주 포착하기 어려운 느낌, 너무나 미약한 느낌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다마지오에 따르면, 감정적으로 중립적인 것(emotionally neutral)이 거의 없고, “단계의 구분(distinction of grades)”은 있어서, 아주 약한 감정적 반응에서부터 강렬한 반응 사이에 무수히 많은 단계가 존재한다. 거의 모든 지각에 감정적 반응은 있고, 차이가 있다면 단계의 차이라는 것이다.


3. 십악과 부정적 감정: 시민중생사회의 운명과 희망

중생은 오온과잉이다. 정의로운 전쟁을 했든 촛불혁명을 했든, 행위자가 오온과잉이었다면 전부 중생의 행위다. 오늘날의 시민중생은 아라한에 가까운가, 악마에 더 가까운가? 대답은 우리가 느끼는 욕망과 분노의 강도에 달려 있을 것이다. 《대승기신론》과 원효에 따르면 그렇다. 원효 등이 말하는 장식(藏識)에는 세 가지 특성이 있다. 무명업상(無明業相), 능견상(能見相), 경계상(境界相)이 바로 그것이다. 무명업상이란 무명(또는 不覺)에 의해 생겨난 업상이란 뜻이다. 업상의 대표적인 사례는 욕망과 분노(欲瞋)이다. 욕망과 분노는 앞서 언급했던 애 · 불애 곧 아진(我塵)분별로 이어지고, 이런 분별은 집착과 혐오, 배제와 공격의 시발점이다.

욕망과 분노, 집착과 혐오는 세상의 모든 중생계에 늘 존재해왔다. 《소연경(小緣經)》이 그걸 잘 말해준다. 이 경에 따르면, 중생은 십악(十惡)을 범한다. 십악에는 살생, 도둑질[도절(盜竊)], 음란, 기망(欺妄), 양설(兩舌), 악구(惡口), 기어(綺語), 간탐(慳貪), 질투, 사견(邪見)이 들어 있다. 기망은 속이는 일이고, 양설은 양쪽에 다니면서 이간질하는 일이고, 악구는 욕설하는 것이다. 기어는 진실 없이 교묘하게 표현된 말이고, 간탐은 인색하고 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악구, 기어, 양설은 나쁜 말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공감 조작, 여론 조작이나 댓글 조작은 기망이다. 표현의 자유를 악용한 포털의 수익 창출은 기망이면서 간탐이다. 십악은 결국 오온과잉, 욕진, 애 · 불애, 아진분별, 집착과 혐오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말이 애 · 불애, 아진분별에 근거한다면, 말은 욕설이 되기 전에 이미 폭력적이다. 비핵화와 평화 과정을 둘러싸고 남한에서 찬반양론자들이 주고받는 말은 상대방에게 비수가 되기에 십상이다. 최저임금제도를 두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격렬한 적개심, 전율의 공포, 심한 고통을 겪을 수 있다. 초기경전에는 수시로 발화(發話)를 멈추는 사마디 수행이 강조된다. 《상응부경전》 IV. 217에서 오온의 하나인 행(行)이 언급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붓다는 사마디의 아홉 단계에서 어떤 행이 멈추게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1단계에서는 발화(vācā)가 멈추고, 2단계에선 생각(尋究, vitakka)과 추론(伺, vicāra)이 멈춘다고 한다. 마지막 9단계 상수멸(想受滅)에 이르기까지, 멈춰야 할 모든 작용이 여기에서는 행이다. 행이 줄어들면 오온의 다른 부분도 대개는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말이나 언론 없이, 그리고 정보전달 없이 어떻게 자유민주주의가 가능하겠는가?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오온과잉의 중생들이 모여 사는 공간,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언어폭력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공간으로 보인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악성 댓글, 여론조작도 견뎌야 한다. 이것이 과잉 오온체로 구성된 시민중생사회의 운명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잉의 정도가 낮춰지면, 십악은 좀 줄고, 더 성숙한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다. 그런 희망 이외에 무슨 다른 희망이 있을까?


4. 한국인의 배경감정은 다소 강하다

거의 모든 지각에 필링 톤(feeling tone)이 따라오다가, 그 톤이 더욱 강해지면, 기쁨, 슬픔, 분노, 혐오, 수치와 경멸 등으로 특정된다. 그런데 이런 개인적 사회적 감정 아래에 있는 배경감정(background emotion)이 우리 사회에는 좀 더 강한 것으로 보인다.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감정(emotions-proper)을 배경감정, 일차적 감정(또는 기초 감정), 사회적 감정으로 나누고 있다. 배경감정이란 무엇인가? 일차적 감정이나 사회적 감정 아래에 있으면서 그것들에 영향을 준다. 다마지오는 일차적 감정에 두려움, 분노, 혐오, 놀람, 슬픔, 행복을 포함시키고, 사회적 감정에는 동정, 당혹감, 수치, 가책, 긍지, 질투, 부러움, 감사, 존경, 의분, 경멸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는 배경감정의 사례로서 어떤 사람에게 감지되는 에너지나 열광(enthusiasm), 흥분(excitement), 까칠함(edginess), 고요함(tranquility)을 예시하고 있다. 팔다리 움직임과 관련해서는 강렬한 움직임, 정확하고 빈번한(frequent) 움직임도 배경감정의 표출이고 얼굴 표정, 목소리의 음조(music)와 운율(prosody)도 배경감정의 표현으로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진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마지오의 포개기 원리(nesting principle)에 따르면, 이러한 배경감정 위에 일차적 감정과 사회적 감정이 포개진다.

필자의 가설에 따르면, 한국인은 일본인에 비해 배경감정이 강하고, 이것이 분노, 질투 등의 일차적, 사회적 감정을 더 강하게 느끼게 하거나 표출하도록 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이내믹 코리아, 하나 된 열정(one passion), 하나의 한국(one Korea)이라는 정치적 구호는 배경감정이 일상화되었음을 알려주는 구호이거나, 그것을 강화하는 구호로 보인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분출된 열정과 열광, 수많은 사람이 운집한 촛불집회도 이런 사례의 하나가 될 수 있다. 배경감정의 강렬함은 한국 텔레비전 뉴스 담당 앵커의 높은 어조(tone)로도 표출된다. 일본의 NHK 뉴스 앵커에 비해서 KBS 뉴스 앵커는 톤이 높다. KBS보다는 SBS, 그보다는 종편, 아마 북한 방송 앵커의 어조가 가장 높을 것이다. 남한 방송은 정치적 의도 이외에도 시청률 제고라는 상업적 의도가, 북한 방송은 장기간에 걸친 혁명 수행과 공화국 방어의 의도가 있는 것 같다.

강한 배경감정은 우리 문화의 일부여서, 드라마와 영화에도 드러나는 것 같다. 버스 안에서 불쾌감을 주는 높은 톤의 통화에서도 배경감정은 감지된다. 한반도에서 나는 목소리의 톤이 일본 열도의 그것에 비해 선정적으로 들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강한 열정의 일시적 분출은 국난을 극복하게 하고, 혁명이나 격변을 가능케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열정만으로는 국난이 닥쳐오기 전 항구적인 대책을 냉정하게 강구하지는 못하므로, 열정은 양날의 칼처럼 보인다. 한국과 일본의 심리학자들이 필자 가설의 타당성을 검증해 주면 좋겠다. 

배경감정이 강하듯이, 한국인의 오온은 일본인의 오온에 비해 과잉의 정도가 심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중국인이나 미국인과의 비교는 어떨까? 일본인 사회학자 이토 마모루(伊藤守, 1954~  )는 자신의 《정동의 힘》 한국어판 지은이 서문에서, 인터넷 사회의 도래에 따른 연대, 절단, 증오의 확장이 일본에 있다고 하는데, 현재 진행 중인 한국의 정치적 대변화도 그런 사례에 속한다고 볼 것 같다.


5. 현대문명과 정보사회

1) 시민중생‐현대문명의 산물

집단의 성격은 지역 문화만이 아니라 문명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프랑스 사회학자 타르드(Gabriel Tarde, 1843~1904)가 1901년 〈공중과 군중(Le Public e la foule)〉이란 글에서 편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군중은 기본적으로 신체적 접촉에 의해 형성되는 작은 집단이다. 하지만 현대문명의 산물인 인쇄술, 기차, 전보, 전화가 등장하면서 언론은 엄청난 힘을 갖게 되었다. 그 힘으로 직접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게 되는데, 그 집단이 공중(le public)이다.

그런데 공중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으므로, 이것[공중]의 결속(cohesion)은 전적으로 정신적이다.” 공중은 비인격적 커뮤니케이션-충분한 빈도와 규칙성을 지닌 커뮤니케이션-으로 엮여 있다. 타르드는 이런 저널리즘의 진정한 출현을 [프랑스] 혁명기로 보고 있고, 혁명적인 공중은 주로 파리지앵이었다고 본다. 르봉 박사가 19세기 프랑스를 ‘군중의 시대’로 부르지만, 타르드는 공중이나 공중들의 시대라고 불러야 한다고 한다. 타르드는 한 권의 책을 읽는 사람보다도 신문 하나만 읽는 독자가 더 위험하다고 하고, 바로 거기에 “현대의 위험이 놓여 있다.”고 말한다. 그는 공중이 군중보다 더 동질적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군중은 옆에 서 있는 수없이 많은 구경꾼들-단순히 호기심이 있고, 절반만 연루된 구경꾼들-에 의해 언제나 늘어난다. 그리고 군중은 일시적으로는 붙잡혀 있고 동화되지만, 비일관된 요소들이 하나의 공통된 방향으로 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군중 안에 자신을 상실한 개인보다 신문 독자가 ‘이지적인 자유’를 더 구가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이런 주장에 대해, 타르드는 공중을 묶어주는 유대(紐帶, bond)의 성격을 지적하면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들[공중] 사이의 유대는, 동시에 갖게 되는 확신 또는 정념(passion) 안에, 그리고 수없이 많은 다수의 사람과 하나의 이념이나 소망을 동시에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자각 안에 있다. 이들을 만나지 않고도 이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저널리스트 한 사람의 영향만이 아니라 이들 전체(en masse)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같은 신문을 읽는 독자들은, 서로 확신이나 정념, 이념, 소망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만으로도 유대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공중의 동질성에 대해 타르드는 크게 우려하고 있다. 우리 심신에 가해지는 정보의 양이 많고 강도가 세다면, 현대 정보사회에서 살아가는 시민중생의 오온은 감소가 아니라 증강의 방향으로 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런 논의는 현대 정보사회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2) 현대 정보사회의 비주지주의적 성격과 오온체들의 상호 모방 

최근 일본의 미디어 연구자들도 타르드에 주목해 왔다. 앞에서 언급했던 이토 마모루는 타르드의 모방 개념과 캐나다 철학자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 1956~  )의 정동(情動, affect) 개념을 중심으로, 현대 정보사회의 특성을 논한다. 이토에 따르면, 정보는 인지적인 내용만이 아니다. 그가 쾌나 불쾌, 고통이나 환희, 호오 등을 정보 겸 감정으로 보기 있기 때문이다. 이토는 정동이 의지, 의욕, 믿음으로 결정화된다고도 한다. 그는 라이프니츠, 타르드, 질 들뢰즈의 계보를 거론하면서 운동, 시간, 신체에 주목하는 한편, 마수미가 운동과 정동 개념을 문화이론에 적용해온 사례에 주목하고 있다. 이토는 마수미가 포지셔닝(positioning)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대신 운동(movement)의 관점을 강조한 것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포지셔닝의 관점에서는 텍스트의 ‘의미’만 전경화될 뿐, 영상, 음성, 사운드라든지 신체 사이에서 ‘촉발하고’ ‘촉발되는’ 직접적이고 동적인 운동 작용의 문제는 지워지게 된다. 즉, 기존의 문화연구는 ‘의미’라는 회로를 경유한 매개 작용에만 주목했다. 이때 소리든 영상이든 혹은 리얼한 무엇이든, 늘 운동상태에 있는 (운동과 불가분인) 대상과 신체의 관계, 그리고 그 둘의 동적인 관계에서 생기는 ‘정동’은 잉여로 파악되거나, 문화 서술에서 파괴적 요소를 발생시킨다고 배제되어 왔다. 마수미는 이 점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포지셔닝의 관점이 지닌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마수미에 의하면, 그것은 ‘운동’이라는 개념을 문화이론에 도입함으로써 가능하다. 즉, ‘운동’ 속에서 신체와 문화, 미디어와 신체의 관계를 풀어갈 회로의 발견을 문화이론의 중심주제로 구성하는 것이다.” 이토는 마수미의 이런 운동 개념을 정보 개념에 연결하고 있다.

‘운동’과 ‘지속’ 그리고 ‘정동’이라는 계기와 ‘정보’ 개념을 연결함으로써, 보다 동적인 정보 개념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동’은 한편으로는 환희나 아름다움과 관련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증오나 혐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면서 사회적 배제나 폭력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정동’의 이러한 미디어 매개적인 ‘현대적 방식’을, 새로운 정보 개념을 실마리 삼아 해명하고 싶다.

이렇게 이토의 소망처럼 정보 개념을, 운동, 지속, 정동에 연결하게 되면, 정보는 당연히 주지주의적인 틀에서 해방된다. 정동이 한편으로는 환희, 아름다움, 다른 한편으로는 증오, 혐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배제와 폭력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그것이 동적인 정보 개념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이토는 이런 정보 개념의 선구로서 타르드의 모방 개념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타르드는 정보과정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설명하는 ‘모방’은 분명 정보과정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 즉, 시공간적인 거리를 뛰어넘어 여러 개의 정신 사이에서 작용하는 현상이 모방이라는 것이다. …… 무엇이 전달되고 무엇이 복제된다는 것일까? 무엇을 모방한다는 것인가? 타르드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정신적 경향의 에너지’ 혹은 ‘심리적 갈망의 에너지’인 ‘욕망(désir)’이고, 또한 ‘지적 파악의 에너지’ 혹은 ‘심리적 수축의 에너지’인 ‘믿음(croyance)’이다.
 
여기에서 모방 대상으로 언급된 욕망과 믿음을, 초기불교의 어떤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그것들은 오온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타르드의 공중은 이성적인 판단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이토의 대답은 상당히 중립적이다. 그는 신문의 독자가 ‘밝음’과 ‘어두움’ 두 측면을 함께 갖고 있다고 한다. 즉 타르드가 살던 시대의 독자는 조작되기 쉬운 존재가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력이나 자율성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고 본다. 이토는 다만 신문으로 매개되는 공중 개념에는 자율적이고 이성적인 주체의 이미지만으로는 도저히 포괄할 수 없는 특성을 지녔다는 점, 그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앞서 필자가 말한 대로, 현대 정보사회의 정보가 오온을 증강하는 성향을 지녔다면, 이토의 결론은 다소 낙관적으로 보인다. 타르드의 ‘모방’이란 결국 한 오온이 다른 오온, 아니면 복수의 오온을 모방하는 것이다. 갑이라는 오온체는 을이라는 다른 오온체의 복제품에 불과할 수도 있다. 현대사회의 정동이 권력을 가졌다면 그것은 나마루파의 힘, 반복을 요구하는 취(取)와 행(行)의 힘이라고 해도 된다. 만일 오온의 움직임 배후에 무명의 힘이 작동한다고 보면, 현대의 시민중생은 그만큼 비합리적이다. 마음은 몸과 함께, 마음은 몸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스피노자와 다마지오의 견해다. 몸이, 그래서 마음이 수용하는 정보가 비주지주의적이라면, 시민중생이 쿨한,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6. 붓다가 라훌라에게 준 충고

《숫따니빠따》의 《라훌라경》은 붓다가 출가한 아들 라훌라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고 적고 있다. “다시는 세간으로 돌아가지 말라(mā lokaṃ punar āgami).”고. 만일 라훌라가 이 충고를 정치와 같은 세속사에 관여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숲속에 머물기로 결심한다면 그의 임무는 비교적 단순해진다. 그의 한 몸과 그가 속한 공동체의 청정을 유지하면 된다. 하지만 라훌라가 출가자로서 세속 정치에 관여하려고 한다고 해보자. 그는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할까?

무엇보다도 오온을 정상화시키고 십악도 멀리하면서 참말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춰야 한다.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 사이에서 올바른 인지적 판단도 해야 한다. 만일 오온 정상화 없이 세속에 참여하게 되면, 붓다의 아들로서 자격을 상실하게 되고, 세상을 향상시킬 수도 없게 된다. 자신과 비슷한 오온체를 모방하고, 그런 것들만 양산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의 불자들은 붓다의 이런 충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서로 달라도, 우리가 승가 내의 개인적 삶을 만족시키기 위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일보다는, 국내외 문제와 관련해서 구성원을 만족시키는 해결책을 찾아내기가 훨씬 어렵다는 점에 우리는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결어: 좋은 말, 나쁜 말 그리고 불교의 참말

우리 민족에게는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역사적 정치적 사변이 유달리 많았던가? 그런 사변들이 낳았던 강력한 감정들은 한민족의 문화와 우리 개인의 생리에까지 각인되어 민족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을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소리와 이미지, 그것들로 촉발되는 정동, 감정, 느낌이 너무 강하고 많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전달방식과 우리의 인식에는 감정적인 차원이 차고 넘친다. 정치적인 공간, 비정치적인 공간 가릴 것 없이, 우리는 ‘악마’와 장애물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듯하다. 우리는 스스로 오온과잉의 존재로서, 유사한 오온체와 더불어 살아가면서 서로 공감하며 모방하는 존재이다. 공감과 모방의 내용에는 물론 집착과 혐오도 포함된다. 오온 정상화는 여러 겁(劫) 동안 자신의 심신에 쌓아온 적폐를 청산한 아라한만이 성취할 수 있는 목표로서, 세속 사회에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민주주의란 오온과잉인 시민중생 다수로 하여금 정치적 목표와 절차를 선택하게 하는 제도이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말만 아니라 나쁜 말과 거짓말도 하고, 분노와 혐오를 비롯해서 갖가지 부정적인 감정을 모방하면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붓다에 따르면, 참말의 핵심 조건은 오온 정상화이다. 이 글은 불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글도 아니고 아라한을 위한 글도 아니다. 일반 시민중생에게 할 말은 없지만, 불교를 조금이나마 실천하려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당부 사항이 있다.

첫째, 붓다를 모방해서 오온의 크기를 다소 줄여보라는 것이다. 이는 직접적인 자기개조의 길이다. 둘째, 오온을 좀 줄여서 동지가 아니라 ‘적’을 일부나마 모방하도록 애써보는 일이다. 이는 창조적인 모방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조 · 중 · 동을 주로 읽는 사람은 수시로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한겨레〉나 〈경향신문〉의 독자는 조 · 중 · 동을 가끔 읽어보는 일이다. 상대에 대한 분노나 혐오를 줄이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이 경우 정의와 불의의 이분법보다는 선불선(kusala, akusala)의 태도가 유리할 것이다. 공동체 전체의 구원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먼저 부처님을 모방해서 오온과잉의 정도를 좀 줄이고 ‘적’을 모방하다 보면, 자유민주주의는 좀 더 성숙해지고 한반도에서 자유, 사회 정의, 평화의 꽃이 필까? 정치적으로 다른 진영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는 것 이외에 다른 무슨 대안이 있을까? 그 희망이 아무리 변덕스러운 기쁨을 준다고 해도 말이다. 아니면 부처님을 모방함은 공동체의 정치적인 향상과는 별로 관계가 없고, 단순히 수년 뒤 청산할 적폐를 좀 줄여주는 정도에 불과할까?
아! 그런데 여기에서 하는 이 말은 얼마나 참된 것일까? ■

 

허우성 
경희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미국 하와이대 철학박사. 저서로 《근대 일본의 두얼굴: 니시다 철학》과 역서로 데이비드 로이의 《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 《문명 정치 종교(마하트마 간디의 도덕 정치사상)》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 비폭력연구소 소장, 한국일본사상사학회 회장.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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