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좋은 말 나쁜 말 그리고 불교

1. 머리말

인류 역사가 600만 년이지만, 인간이 지금과 같은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은 고작 20만 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말을 하면서 사회적 협력을 강화하고 문명을 건설하여 인간보다 강한 생명들을 능가하여 지구 생태계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제 생명을 창조하고 인공지능 로봇을 만드는 시대까지 열고 있다.

말은 의사표현을 하고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진리를 표현하고 문명을 전달한다. 하지만, 말은 인간관계를 악화하고 진리를 왜곡하며 문명을 훼손하기도 한다. 거짓말, 막말, 잘못된 말, 이간질하는 말, 뒷공론, 악담, 발림, 언어폭력, 성희롱, 악성 댓글 등은 인간을 기만하고 상처를 주고 본성을 해치고 심지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다. 한국사회에서도 이런 나쁜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에 말의 의미와 기능, 위상, 한계에 대해 천착한다.

2. 말의 개념과 발생

우리의 삶은 말로 시작하여 말로 끝난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고고성(呱呱聲)을 토하고 살다가 종국에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외부와 처음 상호작용을 한 아기는 아빠, 가족, 친인척, 친구, 동료들로 점차 사람들을 확대하여 말을 주고받으며 사회화하고 삶을 영위한다. 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말로 대중의 머릿속에 자신의 정치를 시뮬레이션하여 보여주고, 그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응으로 당선이 되면 그 말들을 현실정치로 구현하며, 그 말과 실제 사이의 격차가 커서 그 말들이 힘을 잃으면 물러난다. 선생, 언론인, 작가, 판검사 등 말로 먹고사는 사람은 당연하지만, 평범한 사람들도 말 없이는 단 하루도 살기 어려우며 주변으로부터 자신의 말이 힘을 잃으면 다시 힘을 얻기 전에는 배제된다.

말이란 “한 대상이 다른 대상에게 생각과 느낌을 발성기관을 통하여 기호로 나타내는 소리”다. 여기서 대상은 주로 타인이지만, 자기 자신, 신, 사물일 수도 있다. 기호는 한마디로 말하여 “사물이나 생각, 느낌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것(aliquid pro aliquo, stand for something else)의 총칭”이다. 한글이나 알파벳은 당연히 기호이지만, 우주 삼라만상 모두가 사물이나 의사를 대체한 것이면 모두 기호가 된다. “애오라지 기호로 구성된 것만은 아니지만, 온 우주는 기호로 충만하다.” 세상 모든 것은 기호이며 그 기호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삼라만상은 의미를 드러낼 때 비로소 존재한다. 하늘의 별은 ‘조국의 독립, 희망, 이상, 영원한 사랑’을 뜻하고, ‘살랑거리는 나뭇잎’은 ‘바람이 불고 있음’ ‘내 마음이 흔들림’을 뜻한다.

사물이 의미를 지닐 때 존재함은 인간이 의미의 장에서 진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앞의 대상을 보며 의미로 가득 찬 세계를 구성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며 무엇인가 지향하고 실천하는 존재다. 인간은 의미가 있는 한 삶을 지속시키며 의미가 사라지는 순간 삶을 마감한다. DNA가 침팬지와 98.6%나 일치하는 인간이 짐승과 구분되는 특성 가운데 가장 빛나는 부분은 의미를 창조하고 해석하고 구성하고 소통과 전달을 하는 능력이다.

인간은 어떻게 1만여 년 만에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을 만들고 생명을 복제하고 지구 지질에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를 만드는 등 거의 신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진화생물학자들은 인간 뇌의 가소성이라 답하고, 인류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은 상대방을 도우면 나도 도움을 받는다는 보상기대에 따른 협력이라고 주장한다. 이것도 영향을 미쳤지만 결정적으로 작용을 한 것은 인지혁명과 이에 따른 의미의 생산과 공유, 전달이다.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의 유전자(gene)는 돌연변이 등 유전자가 자연 및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을 통하여 수십,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하지만, 문화유전자(meme), 특히 의미는 아주 짧은 순간에도 공유, 학습, 전달, 기억에 의하여 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도구에 따라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식으로 인류사를 시대 구분을 한다. 하지만, 도구는 다른 종의 짐승들도 사용한다. 오랑우탄과 침팬지는 지팡이, 우산, 낚시 등 여러 도구를 인간의 학습이나 모방 없이 도구로 사용한다. 뇌가 작은 조류, 두뇌가 나쁜 파충류인 악어마저 도구를 사용한다. 이에 의미의 범주에 따라 인류사를 새롭게 쓸 수 있다. 크게 다섯 단계에 걸쳐 의미 변화가 이루어졌고 인공지능 로봇이 생산된다면, 또 다른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지면 관계상 ‘균형’을 한 예로 설명한다.

● 1단계: 숲 생활기: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600만 년 전~330만 년 전):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신체의 균형
● 2단계: 도구 사용기(전기 구석기): 호모 하빌리스∼호모에렉투스(330만 년 전∼20만 년 전): 도구를 매개로 한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수렵과 채취물의 균형
● 3단계: 언어 소통기(중기 구석기):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20만 년 전∼4만 년 전): 구상적 은유화→예술작품의 균형
● 4단계: 농경혁명 및 정착기(후기 구석기∼신석기):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메소포타미아 문명(4만 년 전∼1만 년 전): 인지적 유동성(cognitive fluidity)+농경혁명→구체적 은유화→살림이나 재정의 균형
● 5단계: 기축시대(BC 600∼AD 600): 붓다, 공자, 예수, 마호메트의 지혜: 인지적 유동성+추상적 은유화→중도(中道), 중용(中庸)
● 6단계: 인공지능시대(2030년대): 강인공지능 로봇의 등장: 인간의 인지 vs. 인공지능 로봇의 인지→양자의 균형과 공생?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인류는 이미 600만 년 전부터 나무에서 생활하면서 직립하였으며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팔과 다리를 움직여 신체의 균형을 유지하는 행동을 했다. 이런 신체적 경험을 반복하면서 ‘신체의 균형’이라는 영상도식을 형성하였다. 신체의 은유는 문명의 발전에 따라 다른 영역으로 횡단하며 유사성의 유추를 심화하였다.

2015년경의 발견에 의하면, 330만 년 전에 소위 ‘로메퀴언(Lome-kwian)’으로 명명된 인류가 최초로 다양한 석기를 만들었다. 케냔트로푸스나 루시의 친척, 혹은 다른 인종이 케냐 북부 투라카나 호수 인근에서 모루, 석핵, 망치 등 다양한 석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러나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전기 구석기시대에는 사바나에서 생활하면서 수렵채취로 생존을 유지하고 종족을 번식했다. 이때 너무 욕심을 부리면 맹수에게 죽거나 성공해도 썩어버리고 너무 적게 가져오면 굶주리는 것을 경험하고 이런 행위도 나무에서 몸의 균형을 잡듯 해야 함을 깨닫고 ‘수렵과 채취물의 균형’으로 의미를 확대한다.

20만 년 전에 인류에게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모두 715개의 아미노산 분자로 구성된 FOXP2 유전자 가운데 …… 2개의 아미노산이 돌연변이를 일으켰고, 그 결과 인간은 혀와 성대, 입을 매우 정교하게 움직여 복잡한 발음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것이다. 이 돌연변이는 20만 년 전에 생겨나 500~1,000세대, 즉 1, 2만 년 동안에 급속히 퍼졌다.” 이후 인간은 본격적으로 언어적 소통을 하며 의사표현을 하고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협력을 하면서 인간보다 강한 존재들을 능가하고 사회를 구성하고 문명을 건설하였다. 이때 본격적으로 도구를 제작하고 예술작품을 만들면서 구상적 영역을 횡단하여 ‘예술작품의 균형’으로 의미를 확대하였다. 당시에 예술작품에서 좌우 대칭이 중요한 미적 요소가 되었다.

후기 구석기시대에 와서 농경혁명이 일어났다. 이로써 단순 채취 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생산노동으로 전환하고, 경제 또한 농업과 목축을 바탕으로 한 생산과 소비의 경제로 바뀌고 교환과 교역이 본격화하였다.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잉여생산물의 축적이 이루어지고 사회적 분업과 직업이 촉진되고 정착 생활, 권력의 차등화가 이루어지고 인구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계급과 도시, 문화와 문명, 종교가 비로소 발생했다. 특히, “인간은 사회를 형성하고 농경을 시작하면서 혈연 이타성(kin altruism)만이 아니라 호혜적 이타성(reciprocal altruism), 집단 이타성(group altruism)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고도의 이성을 바탕으로 맹목적 진화에 도전하여 공평무사한 관점을 증진시키며” 윤리적 이타성 또한 추구했다. 부를 축적하고 경제생활을 하면서 숫자를 만들고 부기를 사용하면서 사치와 검소, 이로 인한 흥망을 겪었으며 이를 통해 재정의 영역을 횡단하여 신체의 균형을 ‘재정의 균형’으로 전환했다.

기축시대(the Axial Age)에 붓다와 공자, 예수, 마호메트에 의하여 종교와 형이상학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고도의 추상적 사유를 하고 이를 체계화하면서 신체의 균형은 형이상의 영역을 횡단하여 욕망과 수행, 해방과 억압 사이의 중도와 중용의 은유로 전환했다. 이후 중도와 중용은 사상의 발전에 따라 그 뜻이 점점 심화하였다.

4차 산업혁명 이전까지 인류는 기계와 생명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기계와 대립되는 생명의 의미, 생명의 가치, 생명성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강(强)인공지능이 더 발달할 경우 이를 응용한 기계가 외부와 상호작용하며 물질대사를 하고 자기복제를 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대응한다면, 더 나아가 인간처럼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위하며 감정마저 가진다면, 그것은 생명과 기계의 구분을 넘어설 것이다. 티맵(T-map)에 장소만 입력한 후 운전자가 그에 종속되는 것에서 잘 나타나듯, 도구가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는 역전이 생길 것이다. 이 시대가 되면 인간과 인조인간의 균형과 조화가 가장 큰 문제로 부상할 것이다.

인류는 자신의 몸과 자연, 온갖 사물이 깊은 연관 관계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인류는 몸에 있는 감각을 통해 자연을 인지하고 몸을 이용하여 걷고 달리고 팔을 뻗어 열매를 따고 사냥을 하였다. 팔과 다리를 확장하여 도구를 만들고, 몸통과 유사한 용기와 집을 만들었다. 인류는 즉자적인 몸을 비유적 의미로 전환했다.

인간은 한 종류의 사물을 다른 사물이나 몸을 통해 이해하고 경험하며 사고를 형성했다. “우리는 몸을 통해서만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 우리 자신, 타인들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이해는 우리의 몸에 의해 형성된 개념들의 관점에서만 틀을 지을 수 있다.” 인류는 그가 서 있는 몸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인식하고, ‘보름달’에서 그처럼 동그란 ‘엄마 얼굴’을 떠올리듯 유사성의 유추인 은유를 통해 몸을 바탕으로 신체를 확장하여 자기 앞의 세계를 인지했다. 본다는 것은 알거나 이해하는 것이다. 남의 말을 청각을 통해 듣고 받아들이기에, 듣는 것은 복종이나 깨달음을 뜻한다. 인간의 말이라면 복종이고, 신의 말씀이라면 깨달음이다. 사냥감이나 그 자취를 후각을 통해 맡기에, 맡는 것은 추적하거나 조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한 것인지 아닌지 혀를 통해 감지하기에 맛보는 것은 시험하는 것이다. 사냥감과 천적을 잘 볼 수 있고 이 때문에 무리에게 이를 알릴 수 있었기에, 높은 것은 기분이 좋은 것이자 능력이나 힘이 있는 자이고 낮은 것은 그 반대다. 앞서면 사냥감과 과실을 먼저 획득할 확률이 높았기에, 앞서서 가는 것은 발전이며 뒤처지는 것은 퇴보다. 그러기에 “말(언어)이란, 세상을 그저 거울처럼 비추어준다기보다 인공물(유물)과도 같이 몸이 세상 속으로 확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인지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떤 것을 그 어떤 것‘으로’ 보는 과정이며, 이것이 바로 메타포적인 이해의 핵심이다.”

인간의 몸이 자연과 상호작용하면서 몸을 통해 활동하고 이 신체적 경험을 반복하면서 영상도식을 만들고 이 영상도식을 메타포의 매개를 통해 구상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에 투사하여 추상적인 것을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이를 더욱 체계화하여 매우 심오한 사고를 형성한다. 인간은 자연과 접촉하고 대응하면서 자연적 지능, 과학기술적 지능, 사회적 지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을 종합하여 세계를 이해하고 의미를 만들고 그것을 서로 공유하고 다음 세대로 전달하였다.

개인적으로 보아도 인간은 의미의 존재다. 어떤 이들은 좋은 옷과 맛난 음식, 안락한 집, 돈, 권력, 쾌락을 멀리하고 오로지 진리, 정의, 신 등의 의미를 구현하기 위하여 목숨을 던지기까지 한다. 여기저기로 행상을 하는 아주머니가 발이 부르트고 수모를 당하는 고통 속에서도 아들이 곧 판사가 되리라는 의미로 인하여 미소 지으며 그 일을 하다가는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자 갑자기 병이 들어 죽었다고 한다. 이런 유의 이야기를 우리는 주변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다.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어두운 하늘에서 맑게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많은 청년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기꺼이 청춘을 불살랐다.

그처럼 인간은 자기 앞의 세계를 해석하며 의미를 캐고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며 이를 지향한 실천을 한다. 단독자로서, 세계내존재로서 세계를 해석하여 의미를 구성하고 결단하고 실천한다. 세계의 횡포와 부조리에 맞서기도 하고 적응하기도 하며 의미를 해석하였고 그 의미를 좇아 자신의 삶을 구성하였다.

3. 말의 의미와 해석

소쉬르 이전의 서양 주류 철학을 한마디로 규정하여 ‘이데아를 향한 끊임없는, 고단한 날갯짓’이었다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닐 것이다. 플라톤에서 헤겔이나 칸트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자들은 이데아, 본질, 실체 등을 규명하기 위하여 고통스러운 사색을 하였다. ‘나무’는 광합성 작용을 한다든가 탄소동화작용을 하기에 ‘나무’인 것이고, 나무는 그 스스로 ‘나무스러움’을 지니고 있으며 나무에 다가가면 나무의 실체를 알아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소쉬르는 이런 실체론적 사유를 뒤엎고 구조적 사유의 지평을 연다. 나무는 나무 안에 없다. ‘나무’는 스스로 아무런 의미도, 본질도 갖지 못한다. 나무는 ‘풀’과의 차이를 통하여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란 의미를 드러낸다. 풀이 없었다면 나무 또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불, 뿔, 풀’이 음운의 차이로 의미가 갈리고 다른 낱말이 되듯, “언어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차이들은 이 자체가 실체가 아니라 구조 자체가 만들어내는 효과다.” 이처럼 체계 속의 각 기호는 다른 기호들과의 차이 하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의미는 기호 안에 내재하지 않는다. 의미는 사물의 본질이 드러난 것도, 주체의 경험이나 이해에 바탕을 둔 것도 아니다. 의미는 차이나 관계에 따라 드러난, 공유된 의미작용 체계의 산물이다.

소쉬르는 이런 구조적 사유에 따라 세미오시스(semiosis)에 대해 이원적으로 해명하였다. 언어기호는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의 결합체이다. 언어기호에서 청각 영상(acoustic image)의 면이 기표이고 개념(concept)의 면이 기의다. 기호가 기표와 기의를 발생시키며 작용하는 것, 또는 기표와 기의를 결합하여 기호를 만드는 것이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다.

언어와 실체, 또는 의미,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관계, 혹은 내적인 관계가 없다. 기표와 기의의 접합은 자의적이다. 언어기호는 자의적이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변성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사회적 체계 안에서 불변성을 유지한다.

인간이 세계를 해석하고 의미를 만들고 이를 삶의 지표로 삼아 결단하는 것에 대하여 필자가 창안한 이론인 화쟁기호학 가운데 화쟁의 의미론 부분을 빌려서 설명을 한다. 의미를 유추하여 형성하는 두 축은 은유와 환유다. ‘별’에서 그처럼 모양이 유사한 ‘불가사리’가 떠오르듯, 사물의 유사성(likeness or similarity)을 통하여 다른 사물을 유사한 것으로 유추하여 의미를 구성하는 것이 은유(metaphor)다. ‘축구’에서 ‘박지성’이 떠오르듯, 사물을 인접성(contiguity)을 통하여 서로 관계있는 것으로 유추하여 의미를 구성하는 것이 환유(metonymy)다. 원효의 화쟁의 원리를 따라 체상용(體相用)과 은유와 환유의 원리를 결합하여 세계의 인식과 그 의미작용을 종합할 수 있다. 우리는 사물과 세계의 현상, 작용, 본질을 통하여 그 사물의 세계로 들어가며 이를 은유나 환유로 유추하여 이해하고 설명한다.

첫째는 품[相]으로, 동그란 보름달에서 ‘엄마 얼굴’, 반달에서 ‘쪽배’, 그믐달에서 ‘눈썹’ 등의 의미를 떠올리듯, 이는 사물의 드러난 모습과 현상을 보고 유사한 것으로 유추하는 것이다. 둘째는 몸[體 1]으로, ‘달이 차고 기우는 것’에서 ‘영고성쇠’ ‘사라졌는데 다시 나타남’에서 ‘순환, 부활, 재생’ 등을 떠올리듯, 사물의 본질을 인지하고 이와 유사한 것으로 유추하는 것이다. 셋째는 짓[用]으로, ‘달이 하늘과 땅 사이를 오고 감’에서 ‘(신과 인간, 천상계와 지상계의) 중개자, 사자(使者)’ 등을 떠올리듯, 사물의 기능과 작용과 유사한 것으로 유추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의미작용이 모두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달의 진정한 의미인 참[體 2]은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달에서 천 개, 만 개의 낱말을 연상하여 그것을 달의 의미로 삼는다 하더라도 달이라는 세계의 실체를 극히 한 부분만을 드러내는 것이며 오히려 환영이거나 왜곡이기 쉽다. ‘참’은 세계의 실체 가운데 실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인간 주체가 파악할 수 없는, 영원불멸한 것이며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의 진정한 실체를 나타낸다.

환유 또한 마찬가지다. ‘달-구름, 별, 천문, 추석, 밤’처럼, 부분과 전체 관계를 가지거나 공간적, 시간적으로 인접한 유추는 품의 환유다. ‘달이 진다’가 ‘시간이 흐른다’처럼 사물의 본질에 인접한 유추는 몸의 환유다. ‘달이 떴다’가 ‘날이 맑다’를 뜻하는 것처럼, 사물의 기능과 작용의 인접성에서 비롯된 것은 짓의 환유다.

몸의 은유는 철학이다. 고대 시대의 중국 사람들은 높은 곳에는 산과 숲이 형성되고 짐승이 깃들고 낮은 곳에는 물이 고이고 물고기가 살며, 물고기가 숲으로 나오면 질식하니 물에서만 놀고 사슴이 물로 들어가면 익사하니 숲에서만 노는 것을 보고서 천지만물의 본질이 ‘높음과 낮음[序]→이에 따라 다름[別]→조화[和]’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멈추지 않고 이를 가정, 사회, 국가의 질서에 그대로 유사하게 유추하였다. 그래서 집에서는 아버지와 자식의 높고 낮음이 있으니, 아버지가 수저를 드신 뒤에 자식이 수저를 들듯이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섬기고 복종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돌보고 보듬는 등 서로 다름이 주어져야 가정이 화목하다고 생각하였다. 나라에서는 낮은 신분의 백성과 신하가 가장 높은 신분에 있는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대신 임금은 사랑과 관용으로 백성과 신하를 돌보고 은혜를 베풀어야 국가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다고 생각하였다.

은유와 환유를 집단적으로 실천하면 의례나 문화가 된다. 고대에 새를 솟대 위에 올리고 샤먼이나 왕이 새의 깃털을 모자에 얹은 것은 ‘새=천상과 지상, 신과 인간의 중개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티베트에서 독수리가 시신을 먹은 후 영혼을 하늘나라로 데려갔다고 생각하고 천장(天葬)을 지낸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남태평양의 몇몇 섬에서는 비행기를 처음으로 본 후에 비행기를 신으로 모셨다. 모두 독수리와 비행기가 하늘을 오고 가는 짓에서 유추한 은유다. 까마귀를 저승사자라고 생각한 것은 까마귀가 썩거나 사체에 많이 모인 것을 목격한 데서 빚어진 환유다.

다음으로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맥락(context)이다. ‘달을 그렸다’라는 간단한 문장의 의미도 맥락에 따라 다양하다. 미술 시간이라는 맥락에서 이 말을 하였다면 ‘지구의 위성을 그림으로 그렸다.’이다. 하지만 그 아이가 시험을 보고 와서 어머니가 몇 점을 맞았느냐는 물음에 그리 답하였다면 이 말의 의미는 ‘0점을 맞았다.’이다. 또 언덕에 올라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네의 맥락에서는 ‘남편을 그리워하였다.’이다. 이처럼 텍스트의 의미는 맥락에 따라 전이한다. 텍스트의 해석이 열려 있다면, 맥락은 이에 울타리를 치고 구체성을 부여한다.

다음으로 해석에 관여하는 것은 수신자/수용자/독자의 가치다. 텍스트를 읽는 주체들은 세계관과 주어진 문화체계 안에서 약호(code)를 해독하여 의미작용을 일으키는데, 주체가 자신의 취향과 입장, 이데올로기, 의식, 태도, 발신자와의 관계 등을 종합하여 어디에 더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텍스트는 크게 나누어 지시적 가치, 문맥적 가치, 표현적 가치, 사회역사적 가치, 존재론적 가치를 갖는다. “절망에 잠긴 내 눈가로 별이 반짝였다.”라는 언술을 예로 들면, 지시적 가치를 지향하면 이 문장을 사전적 의미대로 “절망에 잠긴 내 눈 앞 하늘에서 천체의 일종인 별이 반짝였다”로 읽는다. 문맥적 가치를 지향하면 앞뒤 문맥을 살펴 “절망에 잠긴 내 눈 앞에 벼랑이 보였다.”라고 해석한다. 표현적 가치를 지향하면 “절망에 잠긴 내 눈가로 눈물이 반짝였다.”로, 사회역사적 가치를 더 지향하면 “절망에 잠긴 내 앞에 장군이나 별과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로, 존재론적 가치를 더 지향하면 “절망에 잠겼던 내가 희망을 품었다.”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을 지배하는 구조는 프레임과 세계관이다. 세계관은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집단무의식적 대응양식의 체계이자 의미형성의 바탕체계다. 지배적 세계관, 잔존적 세계관, 부상적 세계관이 있다. 착하게 살아온 누이동생이 중병에 걸린다면, 이는 세계의 부조리(不條理)다.

샤머니즘 시대라면, 이에 문제의식을 갖는 주체는 무당을 찾아가서 주술적인 의례를 행한다. 근대 과학적 휴머니즘의 세계관 시대라면, 문제적 주체는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한다. “달이 높이 떠서 산과 들을 비춘다.”라는 말의 의미가 불교적 세계관에서는 “관음보살의 자비가 귀족과 양민(良民)에게 고루 베풀어지고 있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유교적 세계관에서 이 문장의 의미는 “임금님의 은총이 귀족과 서민(庶民)에게 고루 베풀어지고 있다.”이다. “세계관이 원론적이며 포괄적인 관점을 제시한다면, 프레임(frame)은 보다 각론적이며 구체적인 의제 설정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으로 미분화된 개념 체계다. 세계관은 프레임을 구성하고 프레임은 인식과 행위의 지침이며 전제가 되는 세계관을 구현한다고 볼 수 있다. 세계관과 프레임을 매개하는 것은 다름 아닌 언어다. 다르게 생각하려면 우선 다르게 말해야 한다.”


4. 말의 기능과 한계

말은 이 세계를 명료하게 보여주지 못한다. 말은 진실을 전달하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 왜곡한다. 말은 사람을 맺어주지만 그만큼 갈등하게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언어 자체가 실질을 가지지 못한 채 차이/구조/관계에 의하여 드러나는 것이기에 진리를 재현하거나 전달하는 데 한계를 갖기 때문이다. 둘째, 발신자와 수신자가 다른 현실, 맥락과 구조, 세계관, 프레임에 있을 경우 발신자가 보낸 메시지와 수신자의 해석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소통 과정에서도 잡음, 이데올로기, 권력 등이 왜곡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인류는 언어기호를 통해 세계, 궁극적 진리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트겐슈타인도 처음에는 자동차와 도로 모형으로 어제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듯 언어기호로 진리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림이론’을 폈다. 그러나 그는 언어로는 그럴 수 없음을 깨닫고 “말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라고 말했다. 칸트든, 마르크스든, 하이데거든 언어기호를 통해 궁극적 진리를 표상할 수 있다고 인식했으나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언어의 확정성, 고정성과 동일성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왜 언어기호로는 궁극적 진리를 드러낼 수 없을까?

다음 페이지의 〈그림 1〉과 같은 기호의 삼각형을 생각해보자.

세계에 대해 인간은 어떻게 언어기호를 부여하는가.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인가? 빨강과 주황 사이에도 수천, 수만의 색이 존재한다. 100여 년 전만 해도 주황이란 낱말은 없었다. ‘주황’을 ‘빨강’이라고 하는 것도 오류이지만, ‘주황’을 세분하여 ‘아주 진한 주황’부터 ‘아주 흐린 주황’에 이르기까지 수천, 수만으로 나누어도 실제 색에는 이르지 못한다. 이처럼, 인간은 세계를 그대로는 이해할 수 없기에 이를 범주화한다. 우주 삼라만상은 무한하다. 무한하기에 그대로는 명명과 이해, 전달과 활용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인간은 언어공동체에 따라, 이들의 생활과 문화에 따라, 세계관과 가치관에 따라 객관적 준거[frame of reference]를 통해 범주화[categorization]하여 무한하고 원래 혼돈[chaos]이었던 자연을 구분하여 질서[cos-mos]로 만들고 이에 대해 무엇, 무엇이라 명명한다.

그래야 세계를 구분할 수 있고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하며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무한이고 혼돈인데 사람이 편의를 따라 나누었을 뿐이다. 아무리 언어기호를 발전시켜 범주를 세분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세계 그 자체를 드러내주지 못한다. 그러니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늘 도가 아니며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 이름이 아니다.”라고 하듯, 말로 할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궁극적 진리가 아니다. 분별심으로는 진여실제에 이를 수 없다.

“나는 여배우 가운데 하지원을 가장 좋아한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치자. 왜 하필 하지원일까? 이 문장에서 ‘하지원’의 가치는 ‘고소영’ ‘이영애’ ‘김혜수’ 등 이 문장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되살려 비교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고소영과 비교하여 연기를 잘하기에, 이영애라 하지 않은 것은 착하고 참한 여자만이 아니라 거친 밑바닥 여성의 언행도 능청스럽게 표현해내기에, 김혜수 대신 하지원을 선택한 것은 글래머보다 호리호리하고 매초롬한 몸매의 여자를 좋아하기에 그런 것이란 구체적 사실들이 드러난다. 이렇듯 현전하는 하지원의 가치는 부재한 고소영, 이영애, 김혜수 등을 되살릴 때 비로소 드러나며, 부재한 것은 김희선, 한효주, 전지현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므로 하지원의 의미와 가치는 확정되지 않는다. 이렇듯 기호에는 그 기호가 그것이 되기 위하여 배척했던 다른 낱말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기호의 구조는 영원히 부재한 타자의 흔적에 의해서 나타나며 의미는 현전과 부재와의 끊임없는 교차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의미는 어떤 하나의 기호에 의하여 완전히 현전되는 것이라기보다 현전과 부재 간의 일종의 끊임없는 교차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는 언어기호와 진리가 이(différance)라고 말한다. 불어에서 ‘différer’란 동사의 뜻은 ‘차이가 나다’와 ‘연기가 되다’ 뜻을 지니나 그 명사형인 ‘différence’는 ‘차이’의 뜻만 가지므로 ‘e’ 자를 ‘a’로 대치해서 ‘différance’란 낱말을 만들었다. ‘나무’가 스스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풀’과의 차이를 통해 의미를 가지듯 세계는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차이의 체계일 뿐이다. 그리고 나무의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연, 신과 인간의 중개자’ 등으로 의미를 끊임없이 연기한다. 또 ‘나무’를 ‘쇠’와 대비시키면 이의 의미는 ‘자연, 부드러움’ 등의 뜻을 드러내는 것처럼 한 기호에는 배척했던 다른 낱말의 의미가 흔적으로 남아 있어 서로 ‘대리보충’의 관계를 갖는다. 그러니 기호의 의미, 텍스트의 의미, 궁극적 진리는 동일한 것도,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언어기호는 공간화에 따라 차이가 나고 시간에 따라 지연되어 무의미를 생성하기에, 세계는 이가 드러난 것, 이의 체계 속에 쓰여 드러난 것, 현존과 부재가 끊임없이 교차하여 일어나는 유희에 불과하다.” 세계가 이이고 언어기호의 진정한 속성 또한 이럴진대 사람들은 언어기호에 고정성과 동일성을 부여하려고 한다. 고정되고 동일하지 않은 세계를 고정되고 동일한 언어기호로 표현하려 하니 그것 자체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이의 개념은 노장사상의 ‘도(道)’, 불교의 진여(眞如), 원효의 일심(一心)과 통한다.

불교의 언어관도 이와 유사하면서도 차이를 갖는다. 불교에서는 언어로는 진여실제에 이를 수 없거니와 현실과 사물에 대해서 그 실상대로 말할 수도 없다. 첫째, 궁극적 진리는 언어를 넘어선 것이기에 언어로는 진여실제를 드러낼 수 없다. 둘째, 언어는 자성이 없이 가명이기 때문에 진여실제를 드러낼 수 없다. 셋째, 언어의 이름과 뜻이 연기 관계로 서로 손님처럼 작용하기 때문이다. 넷째 이유는 언어와 세계가 일치하지 않으며 언어는 단지 세계의 실상이 아니라 차이 자체를 재현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불교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이 세계 자체가 연기에 따른 것이고 무상하기에 자성이 없이 공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과 서로 원인과 결과, 조건을 형성하고 상호작용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를 동일성이나 실체라는 틀로 가두어 무엇이라 명명할 수 없다. 무자성이고 공(空)인 세계를 언어로 명명할 수 없으며, 언어 또한 자성이 없이 차이에 따라 연기되므로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세계의 궁극적 실체는 말로 할 수 없고[不可言說], 말을 떠나고 생각을 끊은 것이며[離言絶慮],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不可思議]. “진여(眞如)의 평등함이 언설(言說)을 떠나 있다는 까닭은 모든 언설이 오직 가명일 뿐이어서 진실한 성품이 결여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그 언설이 단지 망념(妄念)을 따르므로 참된 지혜와 떨어져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도리 때문에 (세계의 본체는) 떠나고 끊어져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파악될 수 없다’라고 한 것은 진여의 본체를 드러내는 글귀이다.
그러면 불가사의한 참에 어떻게 이를 것인가. 방법은 크게 보아 세 가지다. 부처님과 가섭의 관계처럼 이심전심(以心傳心)을 통하거나 선정(禪定)을 하는 것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인언견언(因言遣言)의 논리에 따라 언어기호를 방편으로만 이용하는 것이요, 서양의 기호학자들이나 일부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행한 것처럼 언어기호의 원리를 파악하여 텍스트를 해체하여 언어가 왜곡하고 있는 의미를 파헤치고 언어기호와 텍스트 너머의 ‘숨은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달의 실체를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달을 ‘지구의 위성’이라고 하는 데서 떠나 ‘관음보살’이나 ‘감추는 것과 드러나는 것이 동시에 나타난다(隱密顯了俱成門)’라고 할 때 인간은 좀 더 달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때문에 언어도단(言語道斷)과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언어기호의 공성(空性)을 부정만 할 것이 아니다. 언어기호가 세계의 실상 자체를 표현할 수는 없지만, 중생이 세계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도록, 더 정확히 말하여 중생이 존재를 세계 자체로 착각하고 있는 것을 깨우치도록 하는 방편은 될 수 있다. 굳이 비유하자면 장대가 장애이지만 장대를 통해 땅의 굴레를 넘어 잠시나마 비상할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장대높이뛰기에서 장대를 이용하지 않으면 높이 뛰어오를 수 없지만, 장대를 놓아야만 하늘을 비상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하여 세계의 실체가 모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드러내는 만큼 감추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앞에서 논한 대로 아무리 새로운 의미를 밝힌다 하더라도 언어기호로 말하는 순간 이는 세계를 왜곡시키게 되어 있다. 의어(義語)는 순간적으로 존재하며 아무리 실체를 밝힌 것이라 하더라도 곧 문어(文語)로 전락한다. 미당의 국화도 ‘실존’이라는 숨은 실체를 드러냈지만, 이것도 ‘외로운 들국화’처럼 곧 상투적 의미가 되어 국화의 다른 숨은 의미를 감춘다. 장대높이뛰기를 하여 하늘에 오른 비상을 만끽하는 것은 잠시뿐, 설사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하더라도 우주에 다다를 수는 없다. 한번 하늘에 올랐다고, 세계신기록을 달성했다고 눌러앉아 있어야 하는가? 기록이 새로운 장애이듯, 깨달음이 곧 집착이 된다. 끊임없이 화두를, 깨달음을 해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언어는 진리에 대한 장애이자 방편이며, 말은 진실을 드러내는 동시에 감춘다. 소통의 기호학에서 보면, 말이 발신자에 초점을 맞추면 감정표현적 기능(emotive function), 수신자에 초점을 두면 함의적 기능(conative function), 메시지에 초점을 두면 시적 기능(poetic function), 맥락에 초점을 맞추면 지시적 기능(referential function), 접촉에 두면 친교적 기능(phatic function), 코드에 초점을 맞추면 메타언어적 기능(metalingual function)을 수행한다.

말 가운데 은유는 창조의 장, 수사의 장, 해석의 장, 소통의 장에서 작동한다. 은유는 이 네 개의 장에서 억압과 검열의 회피 기능, 존재개시의 기능, 인언견언의 기능, 유희의 기능, 시적 기능, 의미의 공유 및 연대의 기능, 동일화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 중 억압과 검열의 회피 기능, 존재개시의 기능, 인언견언의 기능은 창조의 장에서 일어난다. 유희의 기능과 시적 기능은 수사의 장에서 발생한다. 의미의 공유 및 연대의 기능과 동일화의 기능은 해석의 장과 소통의 장에서 발생한다. 유희의 기능은 수사의 장뿐만 아니라 해석의 장에서도 작동한다.


5. 소통의 왜곡, 나쁜 말의 원인과 대안

말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서 소통되는 것이며 여기에는 세계관, 이데올로기, 신화, 이해관계, 권력, 맥락, 프레임 등이 작용하며 소통을 방해하고 말에 잡음이 끼게 하여 말을 왜곡한다. 철저히 팔정도에 입각하여 바르고 올바른 말만 하더라도, 발신자든, 수신자든 자신이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과 사회문화의 맥락, 자신이 형성하고 있는 세계관과 프레임에 따라 말에 의미를 담고 해석하기에, 이에 따라 의미와 해석이 달라지며, 소통 과정에서도 잡음, 이데올로기, 권력이 소통을 방해하며 왜곡을 일으킨다. 이를 최소화하려면 발신자와 수신자가 서로 상대방의 맥락, 프레임, 세계관을 먼저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코드를 만들고[encoding] 풀어내는[decoding] 원리를 일치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며 말을 왜곡하는 잡음, 이데올로기, 신화, 권력 등을 인식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권력도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주권권력, 훈육권력, 생명권력이 작동하고,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나이, 젠더, 사회적 지위와 집단 안의 서열, 지식 등의 요인이 권력으로 작동한다. 권력은 속성이 없으며 그저 작동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권력은 인간의 연기적 관계망에 작동하는 힘으로 체(體)가 아니라 용(用)이다. 권력은 말을 통하여 작동한다. 박근혜 정권과 대한항공 사태에서 잘 드러났듯이, 국가와 자본은 거시권력의 정점에서 폭력적인 언어로 권력을 작동시키려다가 저항을 받았다.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여러 권력이 작동하기에 사람들이 자신이 유리한 권력은 내세우고 불리한 권력은 숨긴다. 권력에서 갑의 위상에 있는 사람들은 폭력적인 언어를 통하여 을의 위상에 있는 이들에게 권력을 작동하려 한다. 을의 위상에 있는 이들은 이에 굴복하여 복종하거나 침묵하거나 저항을 한다. 저항하는 것은 거짓말, 받아치는 말 하기, 말을 듣지 않기 등이다. 갑에 있건 을의 위상에 있건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을 숨기거나 과장하기 위하여,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손해를 보지 않고 이득을 보기 위하여 거짓말을 한다.

개인의 차원에서는 이성에 의할 때는 이해관계나 목적을 위하여 나쁜 말을 하고, 감정의 차원에서는 이를 억제하지 못할 때 욕을 내뱉는다. 인지과학적으로 보더라도, 거짓말 같은 것은 이성을 관장하는 대뇌피질에서 활성화하고, 욕은 이보다 낮은 단계로 감정과 심장박동, 자율신경을 조정하거나 통제하는 변연계에서 활성화한다. 물론, 분노에도 순기능이 있는 것처럼 거짓말도 타자를 구원하기 위한 좋은 거짓말이 있고 욕 또한 스트레스 해소, 권력에 대한 풍자와 비판, 또래 집단의 유대 강화 등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상대방을 기만하며 수치심과 모욕감, 분노를 야기한다.

이성에 관련해서는 타자를 위하여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윤리적 이타성을 추구하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 바른말, 좋은 말을 위하여 필요하다. 감정에 관련된 나쁜 말의 경우 수행이나 감정의 통제나 절제만이 대안이 아니다. “신경 과학의 최근 연구들은 뇌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입력된 감각적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미리 예상하면서 예측적으로 기능을 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예측 신호는 경험을 안내하고 제한하면서 지각에 영향을 미친다.” “뇌에는 세계가 바로 다음 순간에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한 정신적 모형이 있다. 이 모형은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자 세계와 신체를 바탕으로 개념을 사용하여 이루어지는 의미구성 현상이다. 당신이 깨어 있는 매 순간 뇌는 개념으로 조직된 과거 경험을 사용해 당신의 행동을 인도하고 당신의 감각에 의미를 부여한다.” “공포와 분노는 신체, 얼굴 등의 특정 변화가 감정으로서 의미 있다고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실재한다. 다시 말해 감정 개념은 사회적 실재(social reality)다.”

감정은 외부나 타자의 자극에 대하여 인간의 마음이나 뇌신경세포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를 바탕으로 구성되는, ‘기억된 현재’이다.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자 세계와 신체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예측(prediction)하고 작동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실재한다고 우리가 동의하기 때문에 실재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리고 감정은 오직 지각하는 인간이 있을 때만 존재한다.” “문화 전체가 당신이 형성하는 개념과 당신이 하는 예측에 집단으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옆 사람이 나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을 때 그 고통은 즉각적으로 느끼지만, 그에 대해 화와 욕을 바로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그에 대한 반응을 예측하며 시뮬레이션한 다음에 화를 내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해하고 “괜찮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것을 친교의 표현으로 해석하고 웃기도 한다. 그러기에 감정의 조절과 통제가 능사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말로 표출하기에 앞서서 타자, 타자의 가치관과 문화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내 마음과 몸 안에 눈부처처럼 타자를 상정하고 그를 섬기는 대대적(待對的)이고 화쟁적인 삶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고운 말, 아름다운 말의 바탕이다. 


6. 맺음말

이제 거짓말, 막말, 잘못된 말, 이간질하는 말, 뒷공론, 악담, 발림, 언어폭력, 성희롱, 악성 댓글을 지양하고 부드러운 말, 아름다운 말, 향기로운 말, 진실이 담긴 말, 선플을 가려서 행하려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말이 있기에 사람이 짐승보다 낫지만 나쁜 말을 하는 이는 짐승보다 못하다. 모로코 속담처럼 말로 입은 상처는 칼에 베인 상처보다 깊다. 나쁜 말은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속이거나 화를 미치는 짓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나와 남을 모두 그릇된 길로 이끈다. 나쁜 말은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자 모두의 영혼을 죽이는 행위다. 구업(口業)은 세 사람 모두에게 작동한다.

반면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다. 말은 인격과 지성의 표현이다. 말은 바로 그 사람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비롯하여 경전의 450여 곳이 넘는 곳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은 “여래는 참된 말을 하는 자이며, 실제에 부합하는 말을 하는 자이며, 있는 그대로 말하는 자이며, 속이는 말을 하지 않는 자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이다.”27) 진여문(眞如門)에서는 실제와 일치하면서도 참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그것이 참된 믿음에 의하여 진여(眞如)를 지향하는 말, 타자와 자신을 바른길로 이끄는 말만 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생멸문(生滅門)의 경우 이성적인 차원에서는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윤리적 이타성을 추구하는 삶을 지향하여야 하고, 감성적인 차원에서는 타자, 타자의 가치관과 문화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더 나아가 타자를 섬기는 대대적(待對的)이고 화쟁적인 삶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고운 말, 아름다운 말의 바탕이다.
말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서 소통되는 것이며 여기에는 세계관, 이데올로기, 이해관계, 권력, 맥락, 프레임 등이 작용하며 소통을 방해하고 말에 잡음이 끼게 하여 말을 왜곡한다. 이를 최소화하려면 발신자와 수신자가 서로 상대방의 맥락, 프레임, 세계관을 먼저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코드를 만들고[encoding] 풀어내는[de-coding] 원리를 일치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며, 말을 왜곡하는 잡음, 이데올로기, 신화, 권력 등을 인식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

 

이도흠 /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양대, 동 대학원 졸업. 한국학연구소장, 《문학과 경계》 주간, 민교협 상임의장 등 역임. 주요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등 다수가 있다. 현재 한국기호학회 회장,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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