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섭 동국대 강사

1. 들어가는 말

병술년 새해 한국의 교수들은 한해의 기대와 소망을 담은 4자성어로 ‘약팽소선(若烹小鮮)’을 골랐다고 한다. 이는 『노자』에 나오는 글귀로 ‘치대국약팽소선(治大國若烹小鮮)’이라 하여 “큰 나라를 다스림은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즉 무엇이든 자연스럽게 두면서 지켜보는 게 가장 좋은 정치라는 뜻이다. 신년 벽두부터 신문 지면을 장식한 이 말을 보면 작년 한 해 우리 사회에서 위정자의 말 몇마디에 평상심을 잃고 번뇌에 휘둘리던 사람들이 많기는 했나보다.

위정자의 편에 서서 훈수를 두어보자고 선가의 ‘회광반조(廻光返照)’라 하는 - 밖을 향하던 마음을 안으로 돌이켜 자성(自性) 즉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을 것을 강조한 말도 있더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사회가 ‘내재적 돌이킴〔返照〕’이 아닌 ‘외향적 돌이킴〔回歸〕’에 갇혀 있음은 자명하다. 어쨌거나 변화는 능동적인 이에게는 희망을 피동적인 이에게는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변화의 주체가 되느냐 대상에 그치느냐, 그것은 중생상을 털어내느냐 마느냐의 문제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다. 초고속인터넷망과 PC보급, 이동전화 보급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인프라 구축으로 정보통신 분야에는 가공할 만한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 특히 근래 한국에서의 장례문화는 매장 문화에서 화장 문화로의 전이라는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의하면 화장률은 1954년 3.6%를 시작으로 1991년까지 17.8%로 성장, 37년 동안 14.2%의 증가율을 보였다. 게다가 화장률은 2000년 33.7%, 2002년 42.6%로 1990년대 초반까지의 증가세를 훨씬 뛰어넘은 기하급수적인 폭발적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서울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지난 500여 년 넘게 유지되어 온 매장 중심의 장례문화가 1990년대를 기점으로 화장 중심으로 급격한 변화를 보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화장의 장려와 더불어 잠시 납골이 유행하더니 이제는 10년이 채 되지 않아 나무와 숲을 이용한 수목장(樹木葬)이 떠오르고 있다.

이 글은 장례문화의 역사와 현주소를 통해 요즘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수목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 역시 수목장 등 자연장법이 최상의 대안이라 생각하고는 있지만, 현재의 수목장 유행이 가히 바람직한 현상이지만은 않다는 다소 자기모순적인 주제를 두고 기술되었음을 알린다.

2. 장법의 연원과 변천

장례의식은 종교, 기후, 풍토 등 문화적인 제반 요인이 복합적으로 형성되어진 풍속으로 시대나 민족, 문화 및 신분 등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 장철수는 『옛 무덤의 사회사』를 통하여 죽은 자에 대한 시신의 처리방법을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 육체를 살아있는 그대로 처리하는 것으로 이승의 세계를 단지 저승으로 옮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시체를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꾸미고 썩지 않게 처리하는 것이다. 육체와 함께 넋을 보호하는 상징적인 시설물을 함께 설치하는 장법을 의미하며, 후장풍습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 죽음에 대하여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처리하는 방법으로 죽음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회 혹은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일부 빈민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죽음을 문화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생활조건을 갖추고 있는 사회나 계층에서 나타날 수 있는 장법을 말한다. 셋째, 썩은 살은 없애고 남은 뼈만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은 살보다는 잘 썩지 않는 뼈가 더 오랫동안 남아있기 때문에 생겼을 것으로 추측되며 머리뼈숭배 사상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것에 대해 이융조는 『古文化』를 통해 머리뼈숭배의식에 대해 소개하면서 그것이 주는 의미를 ①죽은 사람의 뼈, 특히 머리뼈에 대한 존경, ②가족원에 대한 경외감정, ③수호신으로서의 역할, ④죽음을 영생으로서의 생존이라는 의미로 기술하였다.
죽은 육신을 땅에 묻는 매장은 가장 보편적이고 오랜 장례풍습 중의 하나이다. 주로 농경사회를 중심으로 행해져 왔으며 망자의 영혼이나 악령을 두려워하여 땅속 깊이 묻거나, 삶의 공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묘지를 조성한 경우와, 사후에도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상으로 영혼과의 교섭을 위해 마루 또는 뜰에 묻거나 하는 경우가 있었다.

제목 그대로 인간 생사에 관한 아주 유별난 보고서인 『저승 - 그곳 문지방을 넘나드는 이야기』1)에는 10만년 전의 네안데르탈인에게도 죽은 가족이나 동료를 위해 시신을 매장하고, 꽃을 바치는 등의 행위를 하고 내세를 믿는 종교적 심성을 갖춰졌을 것이라는 - 다시 말해 장례의식의 기원에 대한 흥미 있는 사실이 엿보인다.

『예기(禮記)』 장의(祭儀)의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반드시 죽고, 죽으면 반드시 흙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일러 혼이라 한다.”2) 라는 대목에서 보이는 ‘귀(鬼)’라는 갑골문(甲骨文)에서 매장의 연원을 찾을 수 있다. ‘鬼’는 ‘田’ 밑에 사람이 꿇어앉은 모양으로 즉, 죽은 사람을 흙〔田〕으로 덮어 매장한 모습을 뜻한다.

『예기』 표기(表記)의 “하도존명사귀경신(夏道尊命事鬼敬神)”이나 “은인상귀(殷人尙鬼)”, “은인존신 솔민이사신 선귀이후례(殷人尊神, 率民而事神, 先歸而後禮)” 단궁상(檀弓上)의 “하후씨용명기(夏后氏用明器)” 등의 기록을 보면 하대와 은대에부터 귀신숭배(鬼神崇拜)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1975년 발굴된 중국 하남성 이리두(二理頭) 유적을 통해서는 각기 묘의 규모와 발견된 가축의 뼈 등 부장품(副葬品)의 내용이 큰 차이를 보이는 것에서 당시 빈부귀천(貧富貴賤)에 따른 장례 정도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하대(夏代)와 은대(殷代)부터 유행한 후장(厚葬)과 순장(殉葬)의 장례풍습은 한반도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황남대총, 양산 부부총, 부산 복천동 고분, 합천 옥전고분, 고령 지산동 고분, 김해 패총 등을 통해 후장의 장례풍습이 가야와 신라에서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고3), 이것은 지증왕 3년(502년)4)에 순장을 법률로 금하는 명이 내리기 전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주지할 것은 과거에는 망자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은 시신을 소중히 다루게 하였고, 그 처리에 있어 단 한번의 장례로 끝나는 단장(單葬)이 아닌 복장(複葬)의 풍습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시신의 피육(皮肉)을 제거하는 1~3년 동안 임시장례기간5)을 둔 후 남은 인골(人骨)을 수습하는 것으로 땅에 묻는 방법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화장은 1~3년이 걸리던 유골 수습기간을 1~2일로 줄이는 장례기간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시간을 줄였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시신을 땅속에 묻거나 혹은 바위나 나무 위에 얹는 초분장 등 기존에 행해지던 자연적 방법의 일차장이 새나 짐승 등 자연을 매개로 수동적인 영혼의 천도였다면, 화장은 ‘불’을 매개로 한 순간적 육탈과 이상세계로의 강제이동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신의 처리에 불이 사용된 의미는 점화원에 의한 산소와 시신의 반응과 처리라는 물리적 특징 외에,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에서 무인도에 남겨진 아이들 중 하나인 랄프가 구조를 기다리며 계속해서 불을 지피던 이유나, 헤라클레이토스가 불을 만물의 근원이라 말한 것이나, 짜라투스트라가 불을 최고의 신이라 칭송한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화장은 삼국시대에 불교의 전래와 함께 전해졌을 것이라 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불교에서는 화장을 다비(茶毘)라고 한다. 이는 팔리어 jhpeti의 음역이며, 다르게는 야순(耶旬), 차유(遮遺) 등으로도 음역되거나 시신을 불태운다는 뜻에서 소신(燒身), 분소(焚燒) 등으로 의역되었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에서 화장법이 널리 행해졌던 것은 아열대지역이라는 환경적 여건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시신이 바로 부패될 수밖에 없는 기후환경적 요인에서 생겨난 위생적 요구가 화장을 보편화시켰을 것이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에 더하여 인도인 특유의 내세 중심의 사유관 등을 통해 사후 육신에의 적은 집착으로 화장이 유행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유추가 가능하다.

기후환경적 여건이나 인도인 특유의 사유에서 시작된 화장법은 불교와도 많은 연관을 맺고 있다. 불교의 경전 속에 죽음에 관한 문제나 시신의 처리에 관한 자료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입세아비담론(立世阿毘曇論)』에는 고대 인도 장법에 소장(燒葬), 수장(水葬), 매장(埋葬), 기장(棄葬) 등의 장례법이 언급되어 있고,7) 『정반왕반열반경(淨飯王般涅槃經)』에는 붓다의 부친 정반왕을 화장하였다고 한다.8) 사분율을 기본으로 계율의 행사를 설명한 『사분율행사초(四分律行事)』에는 장례법의 절차와 함께 붓다와 전륜성왕도 화장을 했음이 언급되어 있고,9) 7세기 후반 의정(義淨)의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10)와 『남해기귀내법전(南海奇歸內法傳)』11)에는 당시 인도 불교계에 화장이 유행하였으며 화장시에 『무상경(無常經)』을 독송하는 등 다비의식의 기원이 보인다.

한국에서는 신석기 유적 중의 하나인 춘천 교동이나, 보령 평라리 유적 등에서 불에 탄 사람의 유골이 발견되는 등 화장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사료에 기록된 불교의 전래기 이후를 그 시작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화장이 승려와 왕, 귀족 외에 일반 서민층까지 행해졌다는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화장이 당시의 일반 서민이 행하기에는 많은 비용이 들고 절차가 번거롭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유추가 가능하다.12)

불교가 한국에 전래되면서 수용된 다비의 시작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에 관한 기록을 그 효시라 할 수 있다.13) 사학자인 정길자는 『삼국유사』등과 함께 탑비문(塔碑文), 묘지(墓誌) 등의 자료를 들어 다비의 정착시기를 논하였다. 출가자의 장례법이 화장 뿐 아니라 자연풍화에 의해 1~3년간 탈육(脫肉)시킨 후 유골을 수습하여 불교식 부도(浮屠)를 세우기도 한 12세기 이전의 시기를 다비와 풍장, 가매장(假埋葬) 등 전통장법의 과도기로 보았으며 12세기 이후를 다비의 정착기로 보았다. 그는 다비 정착의 증거로 조선시대 억불(抑佛)속에서도 출가자의 장례가 다비로 치러졌음에 주목하였다.14)

재가자의 경우 현재 전통 상장의례라 하는 땅에 광을 파고 시신을 모신 목관을 넣는 토광 목관묘의 매장형태와 3년상, 가묘제사와 장자봉사 등의『주자가례』식 방법은 조선시대 중기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정착되었다. 조선시대 국가통치이념이던 유학이 건국 이후 수세기의 세월이 지난 후에야 家禮로 정비되어 정착되었음은 이념과 의례, 그리고 문화와의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아닌 것을 보여주는 실례 중의 하나다.

한국의 장례문화에서 화장이 격리된 것은 비단 조선시대의 유학 탓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일제에도 그 책임이 있다. 일제는 1912년 <묘지, 화장, 화장장에 대한 취체규칙>에 따라 화장장과 공동묘지를 마련해놓고 일률적으로 화장을 강요하여 화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키웠는데, 이것이 한국 전통문화의 해체와 식민지 상황에 맞는 토지이용을 위함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해방 이후로도 한참이 지난 1961년, <매장 및 묘지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그 사이 산업화 과정을 통해 교외로 밀려난 묘지는 망자의 유택이 아닌 국토를 잠식하는 혐오시설로 낙인 되었다. 근대화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조상공경의 명분과 국토의 효율적 이용이라는 실리 사이에서 한국의 장례문화는 심하게 왜곡되었다.15)
이에 대해 김열규는 당대의 한국인이 보이고 있는 죽음의 민속이 첫째로, 문화적ㆍ민속적 동결성을 발견하기가 힘들고, 둘째 아무리 길게 잡아야 두ㆍ세 세대 이전의 죽음과도 일관된 연관성을 발견하기 조차 힘들며, 셋째 뇌사, 자연사, 안락사 등 새로운 개념의 죽음의 도입 등 세 가지 속성으로 우리를 당황케 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16)

명분과 실리와의 갈등 속에 점점 실리에 국민의 무게가 치우치면서 정부는 묘지증가로 인한 국토잠식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2000년대에 들어서 <장사(葬事)등에 관한 법률>을 통해 분묘 1기당 점유면적을 축소하고 매장신고제 등을 포함한 시한부묘지제도를 도입하는 등 매장 위주의 장례문화를 화장으로 유도하고 분묘를 대신하여 납골을 유행시키기에 이르렀다.

정부가 화장을 장려한 이후, 매장에서 화장으로의 전환기에 봉분을 대신하여 추모의 구심점으로 내세웠던 납골은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었다.

납골의 문제점은 무엇보다 일본의 장례문화를 벤치마킹하면서 생긴 부작용이 크다. 집단 납골묘(납골당 등)의 유래는 일본에서 메이지(明治) 무렵 죽은 이를 주거공간에 편입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다. 일본에서 집단 납골묘가 현재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집단화가 철저히 이뤄졌기 때문이며 이것은 일본인의 국민성과도 관련이 깊은 것으로 한국의 경우와는 분명 다르다.

철저한 준비 없이 졸속으로 진행된 납골의 장려는 납골공간 마련에 있어서는 님비현상 등으로 인한 주민반대와 분양사기 등 사업적 문제와 호화 납골묘 등의 문제를 낳았다. 또한 납골 후에는 납골된 유골이 부패하는 기술적 문제, 그리고 납골된 유골의 환류 처리 문제 등이 발생했는데, 이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러한 문제점만을 보아도 이미 산골 문화로의 진행은 예견되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3. 한국 사회와 수목장의 등장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고비로 한국 사회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최종적인 전환을 이루어냈다. 6ㆍ25 동란 이후로부터 그때까지를 한국의 산업화와 경제 성장 엔진이 최고점에 다다른 산업사회라 한다면, 그 후로 탈산업화(deindustrialization)가 진행 중이라 할 수 있다. 고성장 지향의 산업화 이후 후폭풍처럼 닥친 탈산업화 시대는 이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로 규정지으면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17)

탈산업화(혹은 산업공동화)라고 하면 사회가 산업에서 격리된 모습이 상상되기 쉽다. 하지만 산업화가 도시의 환경을 파괴해 왔다면 탈산업화는 도시의 생명을 파괴하는 변화일 것이다. 이런 연유로 탈산업화는 그것과 동시에 환경을 화두로 한 생태사상(ecology)의 유행을 불러오게 되었고 이는 웰빙(Well-being)과 웰다잉(Well-dying)으로 이어졌으며 장례문화에 있어서는 나무를 고인의 유택으로 삼는 수목장을 등장시키게 되었다.

수목(나무)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붓다가 나무 아래에서 깨달았다는 이유로 불교에서는 깨달음과 지혜를 상징하는데, 실제로 뽕나무과의 이 나무는 ‘깨달음의 나무’인 보리수(菩提樹: Bodhi-druma)로 불려진다. 또 원효스님이 태어난 밤나무과의 나무는 공교롭게도 붓다가 열반한 죽음의 나무인 사라수(沙羅樹)와 이름이 같다는 것에서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원리를 설함과 동시에 생명의 기원, 죽음과 재생의 의미를 뜻한다.

유교의 경우에는 나무가 인(仁)을 상징하는데 이는 ‘나무(木)’가 갖고 있는 성품을 질박함과 소박함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사람의 성품에 빗댄 것이다.18)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로 거슬러 가보면 중국에는 귀신이 드나드는 커다란 복숭아나무가 있었다는 이야기, 일본에는 덴구라는 괴물이 살았다는 소나무〔天狗松〕이야기, 특이하게 생긴 나무를 신목(神木)이라 하여 신령이 깃들었다고 믿었다는 전설들이 전해진다.

우리의 민속 중에도 당산나무라 하여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섬김과 동시에 신령의 통로라 믿었고, 저 멀리 북구 신화의 주신 오딘, 인도의 크리슈나, 이집트의 하토르, 인도네시아의 창조인 시라오 등 세계의 많은 신들이 나무에서 태어났거나 나무 자체이거나 나무와 관련이 깊다는 것을 보면 나무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단순한 애니미즘(Animism)의 정도는 넘어선 것 같다.19) 때문에 나무를 무덤으로 삼는 것이 전혀 생경하지만은 않다.

수목장은 화장 후 나무의 주위에 골분을 묻거나 뿌리는 방법을 말하는데 크게 ① 매장형 수목장(Woodland Burial: 樹葬)과 ② 봉안형 수목장(Enshrinment at Tree: 樹木葬), 그리고 ③ 산골형 수목장(Ash Scattering at Tree: 自然葬)으로 나눌 수 있다.20)

첫번째는 말 그대로 시신을 나무 아래 직접 매장한 뒤 그 위에 나무를 심거나 수목 주위에 매장하는 방법을 말한다. 일례로 중국의 경우 ‘빈장혁명(殯葬革命)’이라 불릴 만큼 국가의 강제에 의해 한때 화장률이 100%에 이르렀다고 하나, 현재는 훼손된 산림을 복구한다는 명분하에 (혹은 화장을 피하기 위한 편법의 하나로) 시신을 묻고 그 위에 나무를 심는 수장(樹葬)이 보급되어 마을 야산이나 경작지의 가운데 봉분처럼 솟은 흙무덤 위로 나무가 서 있는 광경이 목격된다.

두 번째 방법은 시신을 화장 후 유골을 별도의 자연분해형 용기에 담아 나무 밑이나 주위에 묻는 것으로 주로 일본에서 행해지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이와테현(岩手) 이치노세키시(一市)의 임제종 ‘쇼운지(祥雲寺)’를 들 수 있다.21) 한국에서는 2004년 9월 임학자인 김장수 고려대 교수의 장례를 통해 독일식 수목장(Baumbestattung)이 소개되면서 세간에 회자되었다.

세 번째는 화장 후 수습한 골분을 수목의 주위나 야산 등에 뿌리는 방법으로 산골(散骨)의 한 형태로서의 방법을 말한다. 수목을 매개로 한 장법이라 하여 수목장의 이름일 뿐 해양에 뿌리는 해양장, 꽃과 함께 뿌리는 화장(華葬) 등 따로 봉안하거나 표식을 하지 않고 산골을 한다는 점은 일체의 자연장법과 같다.

현재 국내에서 사용되고 있는 수목장의 개념은 봉안형과 산골형이 혼재된 양상을 보인다. 봉안을 하는 것과 산골은 분명 그 의미가 다를진데, 관련학자 내지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조차도 구분을 두지 않고 수목장이라면 그저 나무에 골분을 뿌리거나 묻는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4. 수목장의 문제점

수목이 주는 전통적 관념이 대부분 긍정적이고 신비스럽기까지 한 것을 보면 사후의 안식을 수목에 의지하고자 하는 수목장은 거부감이 적을 수 밖에 없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지난 1월 발표된 한국산림정책연구회의 설문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중 수목장에 대해 47.2%가 ‘바람직하다’, 14.7%는 ‘매우 바람직하다’고 응답하여, 절반 이상이 수목장으로 장례를 치루겠다고 답한 것으로 나왔다.
다만 수목장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 유골 자체에 나무뿌리가 근접하는 것을 목염(木廉)이라 하여 꺼리는 풍수지리학적 인식과 수목장 등에 따른 가족해체의 가속 등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수목장으로 치러진 지난 2004년 김장수 교수의 장례는 납골당처럼 음산하던 한국 장례문화에 한줄기 서광을 던져준 듯 했다. 각 언론매체에서는 봇물 터지듯 이를 앞다투어 보도하면서 국민의 관심 역시 한 몸에 받게 되었으며, 이런 호기를 놓칠 새라 보건복지부에서는 서둘러 관계법률의 개정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다음의 문제점들은 수목장이 납골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준다.

수목장은 핵가족화, 개인화의 산물

수목장은 웰빙이나 웰다잉과는 관계가 없다. 핵가족화ㆍ고령화ㆍ개인화된 시대 상황과 부합되어 관심받고 있을 뿐이다. 1990년대부터 스위스에 이어 수목장을 실시하고 있는 독일의 경우를 살펴보자.

독일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교회 또는 마을 근교에 묘지가 있었으나 기존묘역이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매장기간을 30여년 시한부로 정하여 교체매장 제도를 시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청ㆍ장년의 이농(離農)이 심해짐에 따라 종교관과 조상에 대한 의식이 상실되면서 후손들로부터 묘지관리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위탁관리 업체에 경제적 대가를 지불하는 경우도 생겨났지만 근본적 해결이 되지 않자, 독일 정부에서는 수목장(Baumbestattung)을 통해 묘지를 숲으로 대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은 한국도 다르지 않다. 산업화에 따른 도시화, 이농현상 등으로 인한 청ㆍ장년 이탈에 따른 전통의 단절, 장례식장 등의 성행, 화장률의 급격한 증가 등이 바로 그 증거이다. 산업화로 빚어진 농ㆍ어촌 인구의 감소는 이들 지역의 장례를 장례식장으로 이동하게 하였다. 과거 지역공동체 등에서 동원될 수 있었던 인적자원을 대신하여 장례업자를 고용한 유가족이 지불한 대가는 단순한 비용지출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장례의식의 참관인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이것은 전통적 장례의 구조, 절차 등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음을 시사한다.22)

과거 부모상의 경우 3년이던 것이 현재는 3일장으로 단축되었고, 절차상으로도 전통적 상례에 비하여 초종(初終) 단계가 매우 단순화 되고 염습(殮襲)을 전후한 의례도 단순화 또는 소멸되는 경향이 보인다. 일례로 상복은 검은 양복과 팔에 상장을 걸치는 것으로 획일화 되면서 친족간 상복의 구별이 희미해졌는데,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은 시신을 처리하는 실질적인 부분만 남은 채 상징성을 띤 복잡한 의례절차들이 사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처럼 봉분을 만들어 고인을 모시고 자손들이 정기적으로 찾으며 관리해 오던 매장과 같은 방법은 더 이상 환영받을 수가 없어 화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경제적 혹은 생활의 불편함 속에서도 남은 고인에 대한 집착은 납골의 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죽음을 삶에 받아들이는 과정, 즉 죽은 이를 심리적으로 내재화하는 과정이 단순화되어 가는 이러한 현상은 앞서 언급한 장철수의 세 가지 시신처리 처리방법 중 두 번째의 경우와 유사하다. 그가 말한 죽음을 문화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다.

우리는 수목장의 유행에 앞서 자타의 죽음에 대한 자세에 좀 더 솔직할 필요가 있으며, 죽음의 처리를 기능적으로 인식하는 현재에 대한 성찰이 전제되어야 한다. 전통단절 혹은 죽음관의 변형에 대한 표현과 성찰을 터부시하며 생태와 친환경의 단어로 포장한 채 근원적 문제에 대해 외면하는 현재와 같은 ‘침묵의 카르텔’은 분명 타파되어야 한다.

수목장은 묘비를 나무로 대신한 것에 불과

세상의 중심과 생명력의 원천을 상징하는 우주목(宇宙木)이며 세계수(World Tree)로서, 혹은 마을을 지키던 수호목으로 숭배 받던 당산나무를 회상하며, 고인의 안식처로 사용될 나무의 이미지를 신목(神木)에까지 투영시키는 이들의 모습은 흡사 나무 숭배사상에 열광하는 광신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수목장이 산골 시의 아무데나 뿌리는 데서 오는 미관상의 위해 및 민원 발생의 소지를 미연에 방지한다고 한다. 고인을 추모하는 매개체가 되어 가족 간의 유대와 결속을 다지고 나아가 우려되는 가족제도의 붕괴를 방지할 수도 있다고도 한다. 결론적으로 고인은 나무와 숲이 되어 자연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영생할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앞서 언급한 수목장 유행의 본질을 간과한 위선으로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마치 제품광고와도 같다. 나무가 신령의 통로이고 신목(神木)이라 불리기도 한 것은 그만큼 신(神ㆍ영혼)이 머무르기 쉬웠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 중 산에서 나무를 잘못 건드려 정신이 나갔다던가 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는데 굳이 이런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소위 동티(動土) 났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도, 숲을 찾았을 때 내 조상이 아닌 다른 이의 조상까지 만나고 싶어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23) 고인이 수목과 함께 영생할 것이라는 생각 - 그것은 묘비를 나무로 대체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산림 그 자체가 공동묘지화 되는 부작용이 우려된다.

수목장의 주인공은 국가와 업자?

현재의 수목장에 대해서는 비판이 거의 없어 이제까지의 보도, 연구로만 본다면 친환경적인 장법이며 고인을 자연으로 되돌려 사후의 삶을 살게끔 하는 온전한 장법처럼 보인다. 전국을 휩쓸고 있는 수목장의 열풍 속에 수목장에 대한 비판을 두고 과거의 장례법에 집착하는 수구(守舊)요, 몰생태적이고 반환경적인 사고, 혹은 일부 장의업자들의 항거쯤으로 치부되는 현실도 심심챦게 보여진다.

다만 상업적 이해의 개입을 우려한 호화분묘 - 호화납골묘의 대를 이을 사설 수목장림에 대한 견제의 목소리와, 법률개정에 있어 이해관계 혹은 무지의 정도에 따라 봉안으로 볼 것이냐, 자연장의 산골로 볼 것이냐의 차이에 대한 갈등이 있을 뿐이다.

변화는 개혁을, 그것은 부와 권력의 이동을 낳는다. 앞서 조선왕조가 매장에 집착하였던 것은 통치력 강화를 위한 유교의례의 정착과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나, 일제시대 전통말살을 위해 화장을 장려했던 것 등은 국가권력과 의례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24)

현대의 매장에 있어서 화장으로의 변화 그리고 수목장의 유행 역시 권력의 이동과 그 모습이 유사하다. 비록 화장의 장려가 산업화와 동시에 줄곧 회자된 것이라고는 하나, 시한부 매장ㆍ화장 및 납골 장려의 경우 ‘국민의 정부’ 시절에 성문화 되었고, 수목장은 ‘참여정부’에서 진행되고 있다. 물론 이것 자체를 두고 위정자들에 의해 의도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따르지만 미필적(未必的)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유추는 충분히 가능하다.

장례문화의 변용에 대해 정치ㆍ이데올로기적 요인이 작용한 것에 무게를 둔 이런 관점을 음모이론25)으로 치부하고 민중의 시각에서 한국의 현대사를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성숙된 민주의식이 정권을 교체하고, 장례문화 등 문화의 변혁을 이뤄냈다는 것이 그것인데, 달리 말하면 과거의 우매한 군중이 (산업화에 따른 정보통신 등 과학 기술의 혜택을 입어) ‘똑똑한 군중(Smart Mob)’으로 진화하면서 이뤄낸 결과라는 것이다.

또한 현재 한국의 장례문화 변용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이들의 일부는 신진 장의업자라 해도 무방할 만큼 과거의 장의업자들과는 다르다. 과거의 업자들이 경험과 경제력에 의지하여 사업을 하였다면 이들은 지식과 정보에 의지한다. 이들에 의해 가공되는 정보는 ‘똑똑한 군중’들에게 제공되어 그들을 전도사로 활용하고 있다. 시민운동에까지 침투한 이들의 활약은 기존의 국가권력과 대등한 관계를 맺고 문화 및 제도 변용의 주인공으로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5. 올바른 수목장을 위한 제언

수목장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그 방법이 아니다. 수목장 뿐 아니라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이야 어떻든 굳이 환귀본토진언(還歸本土眞言)26)을 외우지 않아도 시신은 모두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다만 그러기까지의 시간이 문제이고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물론 여기에는 서두에서 언급한 ‘약팽소선(若烹小鮮)’하는 정부의 자세도 필요하지만, 죽음에 대한 마음가짐은 우리 스스로 장례문화의 변화 주체가 되느냐, 대상이 되느냐의 단초가 된다.

필자는 우리의 죽음관이 올바르고 뚜렷하다면 앞서 지적한 여러 사항은 물론 장례에 있어 어느 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때문에 앞서 지적한 사항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대신하여 다음의 경전을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하려 한다.

『관정경(頂經)』27)에 이르기를, “아난이 세존에게 묻기를, 만약 사람의 목숨이 다해 산야(山野)로 보내져 탑을 세우게 된다면 그 사람의 영혼이 탑 안에 있는지 없는지를 물었다. 부처님이 답하길 혹은 있거나 있지 않으니 사람이 생존했을 때에 선행(善行)을 만들지 않고, 삼보(三寶)를 모르고, 또 선악(惡業)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였으나 복을 받을 수 없고, 악업을 지었으나 재앙을 받지 않고, 또한 선행도 없고, 복을 바르게 할 수도 없다. 이는 영혼이 그 탑 안에 있는 것으로 이는 갈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혹은 그 전생에서 크게 선행을 베풀어 복을 받고, 정근(正勤)하고 도(道)를 행하여 천상계 33천에 바로 태어나거나, 생존 중에 복을 받아 인간세상의 훌륭한 집안에 태어나거나, 머무를 곳이 있는 자연에, 혹은 여러 뜻있는 곳에 태어날 때 그 사람은 묘안에 없다고 말한다.

혹은 그 전생에서 살생하거나, 올바른 가르침을 믿지 않고 삿되게 목숨을 유지하고 사람을 속였기 때문에 아귀ㆍ축생도에 떨어져 많은 고생을 하며, 이로서 지옥을 맴도는 사람은 묘안에 있지는 않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불교에서는 혹 무덤 안에 남아있을지 모를 영혼의 천도를 위해 7일마다 7번 49재를 올린다. 이것은 사람이 죽은 후에 중유(中有)에 머물며 중음신(中陰神ㆍ영혼)으로 떠돌아다니는 시간이 49일에 해당한다고 보아 그 기간 동안 선행(善行)을 지어주고 법문을 들려주어 좋은 곳에 나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49일 이후의 무덤 속은 영혼이 없는 ‘비어 있는’ 묘가 된다.

결국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를 말하는 불교는 무덤의 유ㆍ무조차 문제시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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