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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의 불교학자 <33> 정영호 / 박경식
미술사학의 학맥과 학풍을 전승하다
[74호] 2018년 06월 01일 (금) 박경식 danhis@hanmail.net

1. 감포에 건립된 미술사학자 추모비

   

호불(豪佛) 정영호
(鄭永鎬, 1934~2017)

2018년 4월 7일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앞 바닷가에는 호불(豪佛) 정영호(鄭永鎬, 1934~2017)의 사거(死去) 일주기를 맞이해 추모비 제막식이 열렸다. 가족과 친지를 비롯한 학계를 대표하는 많은 인사가 참석해 선생을 기렸다. 이곳은 일찍이 1974년 10월 우현 고유섭 선생의 서거 30주기를 맞이해 한국미술사학회에서 건립한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비문이 새겨진 우현 선생의 추모비가 건립된 지역으로, 고고미술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정신적인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이처럼 상징성이 깊은 곳이기에 우현 선생의 제자인 황수영 · 진홍섭 박사가 타계했을 때, 두 스승을 추모하는 석비 건립이 호불 정영호 선생(이하 호불 또는 정영호 박사)의 주창과 주도로 이뤄졌다.

호불은 자신의 고희기념 논총의 발간을 미루면서까지 두 스승의 추모비 건립에 전력을 다했고, 그 결과 초우 황수영 박사의 비는 2014년 11월 15일에, 수묵 진홍섭 박사의 비는 2015년 3월 7일에 각각 제막되었다. 암울하고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재 연구를 통해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우려 노력한 우현 고유섭에게 직접 사사한 두 스승의 비를 세운 일의 의미는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이를 통해 우현 고유섭에서 비롯되는 한국미술사의 초기 학맥을 많은 이들에게 확인시켰기 때문이다. 호불은 세 스승의 비를 완성하면서 “그 스승 그 제자(開城 三傑)”라는 작은 비석을 별도로 건립해 세 분의 관계를 공고히 했다. 우현 선생 곁에 두 분의 제자를 모신 덕분에 이곳은 단순한 추모의 공간에 머물지 않고 한국미술사의 정신과 사제간의 정이 넘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앞바다. 문무대왕의 호국 의지가 짙게 배어 있고, 우현 선생의 문무대왕에 대한 혜안이 깃들어 있으며, 황수영 · 진홍섭 박사의 스승에 대한 애틋함이 배어 있는 이곳에 호불 정영호 교수의 추모비가 건립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호불은 생전에 우현 고유섭으로부터 시작된 한국미술사 학풍이 초우 황수영을 통해 자신에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항상 긍지를 느끼고 평생토록 강한 자부심을 지녔다. 이 같은 사실은 우현 서거 50주기였던 1994년 6월에 선생의 학풍을 계승하고 더욱 발전시키고자 한국문화사학회를 창립하고 학술지인 《문화사학》 창간호를 발행한 데서 잘 드러난다. 이번 추모비 건립은 우현에서 초우 · 수묵으로 이어지고 호불에 이르러 만개한 한국미술사의 전통과 학풍의 완성을 뜻한다.

우현의 비가 홀로 서 있던 대본리 앞바다는 2018년 4월 7일을 기점으로 한국미술사의 정신적 고향이자, 스승의 사랑과 제자의 존경이 어우러진 따뜻한 공간으로 변화되었다. 호불 정영호 박사의 스승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과 존경이 이룩한 결과라 하겠다.

2. 황수영과의 만남 그리고 스승에 대한 존경심

   

고 황수영 박사

호불은 늘 황수영 박사를 일컬어 ‘내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매우 강한 애착이 느껴지는 표현이다. 다른 사람의 선생이기도 하지만, ‘나만의 선생님’이라는 집착이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필자가 두 분을 직접 만나기 시작한 1978년부터 약 30년 세월을 곁에서 목도한 바, 두 사람의 관계는 실제 부자지간(父子之間)이라도 저토록 존경과 사랑으로 가득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돈독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1953년 서울 수복 후 손보기 교수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고 들었다. 당시 손 교수가 “고고미술을 공부하려면 황수영 선생이 계시는데, 황 선생님은 우현 고유섭 선생의 수제자이자 이 방면에서 제일의 학자”라고 소개하면서, “마침 이번 학기부터 역사과에 강의를 나오도록 되어 있으니 그분에게 지도를 받으라고 권고하셨다”는 것이다. 이 같은 손보기 교수의 권고가 평생의 사제관계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평생을 함께하는 불교미술의 사제이자 동반자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호불은 황수영 박사를 스승이라기보다는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모셨다. 필자는 호불의 제자여서 많은 지역에 조사를 함께 다니곤 했는데, 매번 조사에서 새로운 유적이 확인되면 가장 먼저 황 박사에게 연락을 취했다.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1970년대에도 한 시간 넘게 장거리 전화를 기다려 초우와 통화하면서 그날의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목격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해외 답사를 다녀올 때면 항상 초우가 좋아하는 은단이며 여러 가지 선물을 사 와서 직접 전해드리곤 했다.

언젠가 중국 답사에서 막 돌아온 호불이 필자에게 그림 한 점을 초우에게 전해드리라고 당부한 적이 있었다. 그 그림을 본 초우가 ‘개성 향교와 부근의 풍경’이라고 말하며 부인과 함께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이 기뻐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스승 초우의 고향이 개성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던 호불은, 중국 답사에서 개성의 풍경이라고 소개된 그림을 보자마자 스승의 고향에 대한 향수를 생각하며 주저 없이 구입해 가져왔던 것이다. 중요한 발굴조사와 답사에 늘 초우를 모셨고, 현장에서 듣는 초우의 가르침이 호불에게는 진리 그 자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초우 선생의 추모비 제막식에서 비문을 한 구절 한 구절을 읽으면서 눈물을 훔치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스승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이 얼마나 지극한가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호불은 초우를 극진히 모셨지만, 더불어 수묵 진홍섭 선생에게도 스승으로서 존경을 보냈다. 늘 제자들에게 ‘진 선생님’이라 칭하며 답사와 발굴조사는 물론 대소 모임에서 수묵 선생을 모시는 데 예의에 벗어남이 없었다. 매년 새해가 되면 어김없이 수묵 선생 댁에 가서 세배를 드렸고, 미술사학계의 여러 일을 의논드리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하기에 초우 황수영의 추모비에 이어 바로 수묵의 비를 건립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손보기 교수 역시 늘 기억했다. 제자들과의 자리에서는 항상 손보기 교수와의 일화가 대화의 주제로 등장했다. 언젠가 답사에서 누군가가 손보기 교수에 대한 말을 입에 올리자 그 즉시 “그분께서는 내 은사님이신데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호언하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스승에 관한 한 당당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이를 통해 사소한 부분일지언정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고자 했던 데서 스승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필자가 호불을 모시던 일과 관련하여 부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타계한 스승을 기억하고 그 유가족을 찾는 일이었다. 매년 선생을 따라 신년 세배를 다닌 행로에는 동빈 김상기 교수 댁과 단국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했던 김성근 교수 댁이 있었다. 김성근 교수는 필자도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어 당연한 도리라 생각했지만, 동빈 선생 댁에서 사모님과 자제분들을 뵙는 일은 참 어색했던 기억이 있다. 뿐만 아니라 성북동에 있는 최순우 선생 댁도 매년 찾았다. 비록 선생은 타계했지만, 직접 자제분들을 만나 근황을 듣고 삶에 도움이 되는 여러 말씀을 나누곤 했다.

이처럼 황수영 선생을 비롯해 생전에 자신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던 스승을 모두 기억하고 찾아 인사를 드리는 호불을 통해 스승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가를 말이나 글이 아닌 생활 속에서 배우고 느낄 수가 있었다. 학문의 세계에서 이해관계 때문에 사제가 서로 반목하는 것이 놀랍지 않은 요즈음, 평생을 지켜온 초우 황수영 박사와의 사제관계는 많은 후학들에게 귀감으로 남을 것이라 생각한다.


3. 불교미술로의 투신

   
1976년 6월 발간 《고고미술》 129 ·130호
정영호 박사는 1952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에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입학 · 수학하였다. 정치가나 관료가 되기를 희망한 부모님의 뜻을 따라 같은 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해 정치학을 전공했으나, 교육자의 길을 택했다. 필자가 아는 한 부모님의 뜻을 절대 거역하지 않을 호불이었기에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경천동지’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이 생존해 계실 때 댁을 찾아갈 때면 부모님 앞에서 공손하게 말씀을 듣던 호불의 모습을 기억하기에 이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호불의 부친은 모든 면에서 대쪽 같은 꼿꼿함을 지닌 분이었다. 이에 반해 어머님은 언제나 온화하고, 음식 솜씨가 뛰어났던 분으로 기억된다.

호불의 술회에 따르면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을지로 6가에 있던 해성고등학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역사교육과 졸업 후 사대부중과 숙명여고 교사를 역임했고, 1970년대 초반까지는 서울대, 홍익대, 숙명여대, 동국대, 성균관대의 강사를 거쳐 1967년에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부임해 교수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교원대 역사학과 교수를 거쳐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겸 박물관장으로 학교생활을 마감한 것을 보면 타고난 교육자임이 분명하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선택해 평생 한길을 걸었으니 정치가보다는 교육자가 천직이었던 듯싶다.

정영호 박사가 미술사를 전공하게 된 계기는 1952년 경주 지역을 답사하면서 여러 유적과 유물을 견학하면서 굳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감은사지 동삼층석탑에 대한 실측조사가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보면 서울대 역사교육학과의 입학과 경주 지역 답사와 손보기 교수의 권유로 인한 황수영 박사와의 운명적인 만남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져 미술사 연구에 평생을 매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불은 대학 시절,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일주했던 일화를 가끔 이야기하곤 했다. 당시 남대문 도깨비시장을 돌면서 인화용 흑백과 슬라이드 필름을 어찌나 많이 사 모았던지 “남대문 필름은 사대(師大) 돼지가 다 먹는다”라는 상인들의 말이 있을 정도였다는 것도 생각난다. 당시 그는 구입한 필름을 전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소포로 부치고, 자전거를 이용해 전국을 일주하며 유적과 유물에 대한 답사를 진행했다고 했다. 이처럼 호불은 경주 답사 이후 미술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평생을 보냈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전국에 산재한 유적과 유물의 답사에 전력을 다했고, 현지를 답사하며 실견한 학문적 경험은 지표조사를 통해 이룩한 빛나는 성과의 바탕이 되었다.

   
설악산 백담사에서 열린 2001년 만해대상 시상식. 오른쪽에서 3번째가 호불 정영호 박사.

호불이 본격적으로 고고미술이라는 학문에 매진할 수 있었던 계기는 1960년 8월 5일 광복절을 기념해 설립된 고고미술 동인회와 이 학회의 간사를 맡은 일이었다. 고고미술 동인회는 전형필, 이홍직, 황수영, 진홍섭 등이 주축이 되어 창립한 최초의 미술사 · 고고학 관련 학회로, 호불이 이 학회의 간사를 맡았다. 그의 술회에 따르면 《고고미술》은 월간으로 발간되었기에 매달 한 번씩 등사 프린트를 해야 했고, 사진의 인화와 현상은 당연 자신의 몫이었다고 했다. 지금도 전해지는 초기 《고고미술》의 원본을 보면 원고는 등사해 프린트했고, 사진은 일일이 한 장씩 붙인 것이다. 그가 간사직을 맡은 이래 100호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거르는 일 없이 발간되었고, 이런 성과는 현재 한국미술사학회가 발족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훗날 정영호 박사는 한국미술사학회 회장에 선출되어 한동안 학회를 이끌었을 만큼, 현재도 활동하는 학회의 창립에서부터 발전에 이르기까지 크게 기여했다. 이처럼 초기 고고미술 동인회의 활동을 하면서 간송 전형필로부터 ‘호불(豪佛)’이라는 호를 받기도 했다. 그는 《고고미술》의 발간에 전력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항상 새로운 유적과 유물의 조사에 주력해 논문으로 발표했다. 지금도 1호에서 100호까지의 《고고미술》에 수록된 논문을 보면 호불의 논고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데서 《고고미술》에 쏟았던 그의 정열과 노력의 일면을 알 수 있다.

《고고미술》의 창간과 발전에 주력하면서 한편으로는 1962년에 발족한 문화재위원회의 초대 전문위원에 위촉되면서 그의 조사연구 활동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64년도에 발족한 신라오악 학술조사단의 조사위원으로 위촉되어 197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이 학술조사를 통해 수많은 문화재 조사에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1965년 3월부터는 동해안 38 이북 지역에 대한 조사를 맡아 도의 선사가 주석했던 진전사지의 발견과 선림원지 및 오색석사지 등 강원도 양양 지역에 있던 통일신라시대의 사지들을 확인한 바 있었다.
이중 진전사지에서는 ‘진전(陳田)’이라고 새겨진 명문기와를 수습함으로써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가지산문(迦智山門) 시발지가 이곳이었음을 입증했다. 진전사지는 훗날 정영호 박사가 부임한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 6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했고, 현재는 조계종의 총림으로 복원불사 중이다. 1963년 이후에는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위원으로 위촉되어 전국에 산재한 문화재의 정비와 복원 그리고 지정 등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처럼 정열적인 연구 활동을 인정받아 2001년 8월에는 만해대상(학술 부문)을 수상했다.

호불은 대학 재학 시절에 불교미술에 뜻을 둔 이래 1960년에는 숙명여고 교사를 거쳐 여러 대학에 출강하면서 교육현장에 투신했다. 뿐만 아니라 평생의 스승인 황수영 박사와 연을 맺었고, 고고미술동인회의 간사와 문화재전문위원으로서 전국을 누비며 새로운 문화재의 발굴과 이에 대한 많은 논고를 발표했다. 그가 논문과 저술로 발표한 수많은 학문적 성과는 자신의 주 전공이었던 석조미술에 국한되지 않았다. 고고학과 고대사는 물론 미술사의 전 영역을 아우르고 있어 지금도 이 방면 연구의 초석을 이루고 있음은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다.


4. 영원한 ‘박물관맨(man)’ 호불

호불의 일생은 박물관과 함께했다고 과언이 아니다. 단국대학교와 한국교원대학교의 박물관장으로 대학교수 생활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룩한 모든 업적이 박물관 운영에 참여하고 관장으로 재직하던 시기에 이루어졌기에 호불은 진정한 ‘박물관맨’이었다고 생각한다. 수십 년을 가까이에서 보좌해 온 필자가 보기에, 호불은 박물관장 직위를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사용하거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으며, 유물 조각이라고 가벼이 다루거나, 유적조사를 소홀하게 한 적이 없었다. 정영호 박사의 박물관과의 인연과 활동은 크게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 단국대학교 박물관장으로서 호불

정영호 박사는 1966년부터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출강했다. 1967년 단국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는 사학과 교수 겸 박물관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1986년에 이르기까지 20여 년간 단국대학교 박물관장을 역임하면서 문화재 발굴 및 논문 발표를 통해 한국 문화의 원형과 발전상을 구명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특히 1967년부터 해마다 한 지역을 선택해 지표조사를 진행했다. 지표조사란 말 그대로 지상에 드러나 있는 모든 문화재를 조사하는 방법론으로서 현재는 보편화되었지만, 당시로는 매우 생소한 방법이었다. 그 때문에 한국문화재 조사방법론에서 지표조사라는 방법을 처음으로 도입하고 정착시킨 인물을 정영호 박사라 해도 틀림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호불은 지표조사의 대상 지역을 경상북도 북부지역과 충청북도를 거쳐 경기도 지역으로 확대했다. 미술사는 물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외울 정도로 고대사에 해박했던 그의 식견이 이 같은 지역 선정으로 이어졌다고 생각된다. 이들 지역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통해 미술사는 물론 고대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제를 해결했고, 연구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다. 지표조사는 매년 1월에 1차 조사를 시작으로 그해 12월까지 진행했는데, 매번의 조사에는 사학과 재학생들이 참가해 다양한 유적조사 경험을 축적했고,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를 많이 배출할 수 있게 되었다. 호불이 단국대학교 박물관장으로 재직하면서 진행했던 지표조사와 이를 통해 거둔 성과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67년은 단국대학교 박물관이 개관했고, 호불 주도의 지표조사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그는 첫 번째 조사지역으로 충청북도 괴산 지역을 선택했다. 아마도 신라의 북진과 고구려의 남진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를 통해 《삼국사기》에 기록된 계립령(鷄立嶺)의 존재가 확인되었고, 각연사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1968년에는 경상북도 선산군을 지표조사 대상 지역으로 선정해 진행했다. 그 결과 신라불교의 초전 지역인 모례 장자의 유적과 도리사는 물론 죽장사지 등 주변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조사를 통해 모례라는 인물과 관련된 집터는 물론 그와 연관된 각종 유적이 확인되어 신라불교는 선산 지역 특히 도개면 도개동 일대에 처음 전파되어 이후 경주로 전해졌음이 파악되었다. 이 유적은 현재 조계종에서 ‘아도모례원’으로 정비해 성역화되었는데, 이곳의 조사는 호불의 학부 시절 고대사 수업시간에 김철준 교수에게 들었던 신라불교의 전래 내용을 야간열차 등을 이용해 현지에 내려가서 직접 현장을 확인했다고 한다.
1969년에는 경상북도 상주군을 선정해 조사를 진행했다. 이 조사에서 김유신 장군이 백제 공격 시 전초성으로 활용했던 금돌성의 존재를 확인하는 개가를 올렸고, 이를 토대로 1972년 〈김유신 장군의 백제 공격로 연구〉를 완성했다. 호불은 항상 《삼국사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미술사 연구에서 고대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곤 했다. 이 같은 사실은 그의 학문영역이 단순히 미술사 자체에만 국한되지 않고 고대사 영역을 넘나들었음을 보여준다.

1970년에는 경상북도 문경군을 선정했는데, 《삼국유사》에 기록된 사불산 사불암(四佛山 四佛岩) 유적과 대승사 및 견훤산성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사불암의 확인으로 《삼국유사》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했는가를 입증했을 뿐만 아니라 훗날 호불이 ‘삼국유사 고고학’이라는 용어를 주창하실 수 있는 전기가 되었다.

이처럼 1967년 단국대학교 박물관장으로 부임한 이래 경상북도 북부지역에 대한 지표조사를 진행하여 그간 의문으로 남아 있던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과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계립령의 실체는 물론 신라불교의 초전 문제, 김유신 장군의 백제 공격로 등 많은 문제를 풀어냈다.

경상북도 북부지역에 대한 조사를 마친 정영호 박사는 이어서 충청북도 전역에 대한 조사를 계획하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아마도 당시에는 미술사 연구에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고대사 연구에서 고구려의 남하와 신라 북진의 연결고리를 풀어낼 수 있는 중심지역이란 점에 착안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호불의 판단은 훗날 단양 신라적성비와 충주 고구려비를 발견, 조사함으로써 한국고대사 연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충청북도에 대한 지표조사 역시 매년 1개 군을 선정해 일 년 내내 전체지역에 산재한 문화유적을 현지조사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충청북도와 인근 지역에 대한 조사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이 표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호불이 조사한 지역은 충청북도 일원과 인접한 강원도 및 경기도 남부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불교 유적에서 가장 주목되는 성과는 1976년 예천군에 소재한 용문사에서 국내 유일의 윤장대 확인, 1982년 이천군 조사에서 확인된 태평흥국명마애불의 발견을 꼽을 수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이천 장암리에 소재한 마애반가보살좌상으로 불상의 뒤편에 “태평흥국육년신사이월십삼일(太平興國六年辛巳二月十三日)”이라고 새겨진 명문을 판독함으로써 981년(고려 경종 6)에 조성했음을 밝혀냈다.

뿐만 아니라 1981년 영월 조사에서 궁예와 연관된 흥교사지를 확인했고, 1983년 광주군의 조사에서는 그간 춘궁리 사지(寺址)로 알려져 있던 유적에서 ‘동사(東寺)’라고 새겨진 기와 편을 발견함으로써 이 유적이 동사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또한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사실도 확인되었는데, 옥천의 고리성과 진천의 김유신 장군 탄생지, 단양 적성과 적성비의 발견 조사와 더불어 영월에서 고구려 산성으로 확인된 왕검성과 태화산성을 비롯해 이천에서 확인된 효양산 토성은 신라의 북진과 고구려의 남방 한계선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주요한 실마리가 되었다.

   
충북 단양  적성비

이 같은 성과는 연구 논문으로 계속 발표되어 학계에 주목을 받았다. 정기적인 조사 외에도 수시로 비정기적인 조사를 진행했는데, 호불이 가장 역점을 두었던 분야는 남한 지역에서 고구려의 흔적을 찾는 일이었다. 당시 고구려의 남방 한계선은 지금의 워커힐 아파트가 있는 아차산 일대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호불은 단양의 온달산성과 조치원에 소재한 개소문 산성을 주목해, 고대사 학계의 견해와는 달리, 5세기에 이르러 고구려가 더 남쪽으로 전진했음을 밝혔다. 이 조사에 참여했던 필자가 보기에 호불의 견해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이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호불의 주장은 단양 신라적성비와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되고, 1990년대 후반부터 남한 지역 내에서 고구려 유적이 잇따라 발굴되기 시작함으로써 지금은 정설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고구려에 대해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시기에 유적과 유물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분석을 토대로 한강 이남 지역에 진출했던 고구려 영역에 주목한 것은 역사를 보는 혜안을 지녔기에 가능한 발상임이 분명하다.

   

충주 중원고구려비

정영호 박사가 진행했던 9년에 걸친 충청북도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단양적성비와 중원고구려비의 발견이다. 두 비석의 발견으로 진흥왕 대에 단행된 신라의 북진 경로가 파악되었고,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고구려는 충주 지역에 국원성을 설치했음이 밝혀졌으며, 신라 · 고구려의 관계사를 복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양 비석이 지닌 의의는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되어 이미 소상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두 비석의 발견은 호불이 집중력을 발휘하여 한 치의 소홀함이 없이 유적조사에 임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단양적성비의 경우는 지금도 둥글게 올라와 있는 우측 상단부의 일부만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었다. 1978년 1월 4일 적성산성에 대한 조사 시 학생들이 성내에 흩어져 유물을 수집하는 동안 당시 4학년이었던 이천효 학생이 호불과 함께 평탄지를 돌아보던 중 지표면에 솟아오른 석재를 발견했다. 이상히 여긴 정영호 박사가 표면의 글자를 확인하고, 이어 비석 전체를 노출해 이 석재가 진흥왕 대에 한강 유역을 경략하면서 건립한 척경비임을 밝혔다.

중원고구려비 역시 그 누구도 이 비석이 고구려가 건립한 비일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오히려 조선시대에 건립된 백비 또는 신라 비일 가능성이 제기됐었다. 비석을 처음 대면했던 정영호 박사와 비문의 판독을 위해 첫 번째 조사를 진행했던 국내 고대사 및 한문 전공 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이 같은 선입견을 가졌다. 하지만, 비문의 판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비문의 주어가 신라가 될 수 없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 필자는 밖에서 탑본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정 박사가 갑자기 나오더니 비석의 서두 부분을 직접 손톱으로 긁어내며 세밀한 탑본을 요구했다. 몇 차례의 노력 끝에 ‘고려(高麗)’라는 명문을 판독하게 되었다. 충청북도 중원군 용전리 입석부락 어구에 이름 없이 서 있는 비석이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 비임이 밝혀진 순간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필자가 탑본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곁에서 직접 목격한 일이라 더욱 생생하게 떠오른다. 고구려비의 발견에 관한 한 여러 말들이 있었지만, 이 비석의 국적을 밝힌 학자는 분명 호불 정영호 박사다. 반드시 비석의 국적을 밝히겠다는 집념과 노력 그리고 고대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유물 앞에서 실증적인 자세를 견지했던 그의 노고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양 비석의 발견으로 호불은 고고미술사학과 역사학계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1979년 10월에 대한민국 문화상(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정영호 박사의 유물에 대한 애착과 집념은 충주 햇골상 마애반가사유상의 발견 조사에서도 일관되었다. 당초 충주 인근 햇골산 답사의 주목적은 충주 예성동호회에서 발견한 마애여래좌상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마애불을 보기 위해서는 경사가 심한 산비탈을 올라가야 했는데, 안전하게 비탈을 오르기 위해 바위의 한 면을 잡은 정 박사가, 촉감이 이상한 것을 느끼고 다시 살펴보니 반가사유상의 발목이었다. 힘들게 산을 오르는 와중에서도 다듬은 석재 면의 촉감을 느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석조 유물을 직접 만졌으며, 그러한 경험이 온몸에 배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이렇듯 단양신라적성비와 중원고구려비 발굴은 유적과 유물의 조사에서 당신이 지닌 모든 것을 다 풀어내며 확인하고자 했던 그의 집념이 빛을 발한 사건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언급하고 싶은 것은, 매번의 지표조사에서 사학과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여 상당수의 학생에게 다양한 유적과 유물을 견학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고, 이를 통해 이 분야를 연구하는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는 점이다.

2) 한국교원대학교 박물관장으로서 호불

정영호 박사는 1986년 4월부터 정년퇴임 시까지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재직했다. 교원대에 재직하면서 교수부장을 역임한 바 있는데, 이곳에서도 부임 이후 박물관 설립에 주력해 1987년에 개관했다. 이는 단국대학교에 이은 두 번째 박물관 설립이다. 정 박사는 박물관의 준비 단계에서부터 개관에 이르는 전 과정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유물 수집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현재 교육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다양한 전시회를 열고 있는데, 지금의 기반은 모두 정 박사가 박물관 초창기에 노력한 결과의 산물이라 하겠다. 교원대 박물관을 개관한 이후 이루어진 다양한 조사 활동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제1집(1987년) 《朴堤上史蹟調査報告書》
제2집(1988년) 《昇州大谷里 · 和順福橋里支石墓群發掘調査報告書》
제3집(1989년) 《壬亂義士 金俊臣公史蹟調査報告書》
제4집(1990년) 《雲住寺의 石塔과 石佛》
제5집(1991년) 《飛中里一光三尊石佛 地表調査 및 簡易發掘調査報告書》
제6집(1992년) 《飛中里一光三尊石佛 復元調査 및 原位置探索調査報告書》
제7집(1993년) 《中原塔坪里寺址 發掘調査報告書》
제8집(1994년) 《中原塔坪里遺蹟 發掘調査報告書》
제9집(1995년) 《百濟王仁博士史蹟硏究》
제10집(1996년) 《完州 松廣寺》
제11집(1997년) 《新羅佛敎初傳地域 學術調査報告書》
제12집(1998년) 《報恩俗離山裨補塔學術調査·鎭川崇烈祠地表調査報告書》
제13집(1999년) 《鎭川金庾信將軍史蹟 學術調査報告書》(附: 全州地方의 木佛調査)

위와 같은 활동은 부임 초기부터 정년퇴임 시까지 지속되었다. 호불이 한국교원대학교 박물관장으로 재직하면서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은 국내 조사와 더불어 대마도에서 순국한 선열들의 비석을 세우는 일이었다. 별세하기 전 200회 방문을 목전에 두고 있었을 만큼 열정적으로 이 사업에 정진해 모두 10기의 비석을 건립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같은 사업은 성격상 정부 차원에서 주관했어야 당연한 사업이나, 정 박사는 자발적으로 진행했다. 국내도 아닌 일본 땅에 그들을 설득하며 선조들의 비석을 세우는 일이 수월했을까? 숱한 마찰과 난관이 있었지만, 호불은 묵묵히 이를 진행해 나갔다. 황수영 박사를 고문으로 모시고, 대마도의 유지들인 나가도메 히사에(永留久惠), 마사끼 아끼도(眞崎昭和), 후지가미 기요시(淵上淸) 등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 사업을 추진했다. 호불은 일 년에 두 번씩은 반드시 전체 비석을 돌아보며 주변 청소는 물론 꽃병에 헌화하는 일까지 일일이 손수 마무리했다.

3)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장으로서 호불

호불은 한국교원대학교에서 정년퇴직한 후 2002년 3월부터 2014년 2월까지 12년간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겸 석주선기념박물관장을 역임하셨다.

단국대학교에는 당초 그가 설립한 중앙박물관과 석주선 선생의 기증으로 건립한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이 있었는데, 1997년에 이 둘을 통합해 석주선기념박물관으로 출범했다. 초대 관장이었던 손보기 교수의 뒤를 이어 2대 관장으로 취임했고, 단국대가 경기도 용인시 죽전동으로 이전하면서 새로운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이로 인해 호불은 박물관의 이전 및 신축 박물관 개관업무를 총괄, 2009년 4월에 개관을 맞았고, 2014년 2월까지 박물관의 기초 수립과 운영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영호 박사의 일생은 박물관과 함께했고 그의 학문은 박물관과 더불어 만개했다. 뿐만 아니라 일생을 통해 3개의 박물관을 개관하고 운영한 유일한 학자로 기록될 것이다.

   


5. 발굴조사와 호불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호불은 학문 활동의 대부분을 박물관과 함께했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조사 역시 그의 연구 활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호불은 지표조사를 학계에 처음으로 도입했고, 대학박물관의 독자적인 발굴조사 역시 최초로 시도했다. 단국대학교와 한국교원대학교 박물관장을 역임하면서 호불이 진행한 발굴조사를 시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 페이지의 표와 같다.

표를 보면 호불이 참여한 발굴조사는 모두 22차례에 달하는데, 진전사지의 연차 발굴을 포함하면 모두 27회가 된다. 발굴 대상 유적은 청동기 시대의 유적으로부터 조선시대의 궁궐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를 망라한다. 호불의 학문영역이 고대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한국사의 전 시대를 망라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전체 발굴조사에서 사지와 연관된 건물지 조사 빈도가 가장 높은데, 이런 면모는 불교미술을 전공했던 선생의 전공 분야가 단순히 유물 자체의 분석과 연구에만 국한되지 않고 실제 이들이 존속했던 본래의 영역에 대한 조사로 확대되었음을 알게 한다.

그가 진행했던 발굴조사 중 가장 주목되는 내용은 진전사지와 비중리 그리고 탑평리 사지에 대한 조사이다. 특히 진전사지 조사에서는 도의 선사의 부도 및 그의 탑비를 발굴하여 선종을 종지로 하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시발지를 확인하였다. 호불은 훼손 위험으로부터 사지를 보호하고자 사재를 털어 토지를 구입했다. 이후 진전사지는 설악산 신흥사에 기증하여 복원의 단초를 마련했다. 이는 그의 문화재에 대한 사랑이 어떠했던가를 보여준 한 사례라 할 것이다. 훼손 위기의 비중리 사지에 대한 조사에서도 1979년에 조사했던 삼존불의 국적을 밝혔고, 실제 사찰이 존재했음을 증명했다. 더불어 탑평리사지 조사에서는 현존하는 탑평리칠층석탑과 사역은 무관한 것임과 동시에 석탑의 건립연대가 기왕에 알려진 바와 같이 8세기가 아니라 9세기임을 밝혀냈다.

호불은 발굴조사를 통해 많은 연구 업적을 이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이를 통해 역사고고학이라는 학문 분야 정착에 기여했다. 더불어 이러한 작업의 중심에 사학과 재학생들을 참여시켜 많은 학생이 발굴조사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었고, 현재 한국 고고학계의 중심에서 활동하는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6. 열정과 사랑이 가득했던 학자

호불은 어떤 일을 진행하든 그 결과를 예측하는 능력이 출중했다. 강의실에서든 답사와 발굴 현장에서든 항상 ‘멀리 보고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을 강조했다. 이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만 집착하지 말고 다각도로 생각하고 숙고하라는 뜻이었다. 하다못해 박물관에서 작업하면서 끈을 묶을 때도 항상 “푸는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생각하며 작업하라”고 했다. 그의 이 말씀은 지금도 제자들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당장에 벌어지는 일에 대한 해결책만을 생각하지 말고, 가능한 한 다양한 방법을 수립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라는 그의 가르침은 무슨 일에서든 길잡이가 되는 교훈이었다. 이 같은 가르침은 유적과 유물을 대할 때 더욱 강조되었음은 물론이다.

더불어 호불은 미술사 연구에서 항상 체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흔히 호불을 일컬어 ‘탱크’라고 부르곤 했는데, 학창시절부터 당수, 유도, 레슬링을 비롯한 각종 격투기를 수련했고, 특히 대학과 군대 시절에 럭비선수로 활동했던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체력이 강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노력했다는 점이다. 답사나 발굴조사 시 호불의 가방에는 늘 줄넘기가 있었고, 새벽이면 어김없이 줄넘기 운동을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늘 군용 워커를 신고 발굴조사를 다녔는데, 평소에도 다른 것들보다 좀 더 무겁게 제작된 구두를 동네 제화점에서 주문해서 신고 다녔다. ‘왜 무거운 구두를 신고 다니시냐’는 질문에 호불은 ‘답사 시 워커를 신기 때문에 그 무게를 항상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곤 했다. 이를 보면 호불의 체력은 선천적인 측면과 젊은 시절의 운동 영향도 있겠지만, 지속적인 자기관리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호불은 자기관리에 엄격했지만, 학생들과 스스럼없이 함께하는 스승이었다. 어느 학생이든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는 어김없이 질타가 이어졌기에, 우리는 호불에게 ‘쌍권총’이라는 별명을 붙여드렸다. 훈계할 때면 어김없이 양손을 뽑아 들고 지적하였기에 우리에게는 이 별명이 호불의 애칭이었다. 늘 답사와 발굴현장에서 학생들과 함께한 호불은 제자들의 이름과 성격은 물론 개개인의 연애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도 주례를 많이 서는 교수 중 한 분이었다. 제자들에게 엄격하면서도 언제나 다정다감한 스승이었다.

   
경주 감포읍 대본리의 한국 미술사학자 3대(代) 4명의 비석
왼쪽부터 진홍섭, 고유섭, 황수영, 정영호의 추모비다.

그리고 호불은 사랑이 넘치는 분이었다. 8남매의 장남이었던 그는 국내든 해외든 답사를 가면 동생들과 부인, 딸들의 선물까지 모두 꼼꼼히 챙겼다. 더불어 주변 동료들과 제자들을 위한 선물까지도. 호불이 홀로 외국 답사를 다녀올 때면 매번 볼펜이나 손수건 등의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어디에서든지 늘 가족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가족의 안위를 확인하는 전화통화를 했다. 추모비 제막식에서 읽은 미망인의 추도사 중 “지금이라도 전화가 올 것만 같다…… 곤전-! 하시면서 문을 열고 들어오실 것만 같다”는 대목을 들으며 동생들과 딸들이 흘리던 하염없는 눈물은 그가 생전에 보여준 깊은 가족 사랑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2017년 4월 7일 호불 정영호는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금년 4월 7일, 그가 평생 존경했던 스승들의 석비가 서 있는 동해구에 추모비를 세웠다.

호불 정영호는 평생을 박물관과 함께했고, 미술사학과 고고학 그리고 역사학 분야에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다. 한국의 미술사와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하지만, 자신의 학문과 일을 사랑했고, 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삶의 자세 역시 후학들의 본보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

 

 

 

박경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에서 박사학위 취득(교육학박사).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분황사 모전석탑의 양식기원에 대한 고찰〉 〈백제 석탑의 독창성이 한국 석탑에 미친 영향〉 등과, 저서로 《한국의 석등》 《한국석탑의 양식기원-미륵사지 석탑과 분황사 모전석탑》 등이 있다. 현재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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