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의식의 배경과 의미를 분석한 역저

《불교의례: 그 몸짓의 철학》
이성운 지음 / 조계종출판사

국어사전에 따르면 의례는 “어떤 행사를 치르는 법식이나 정해진 방식에 따라 치르는 행사”라고 되어 있다. ‘행사의 설행’이라는 목적성과 ‘법식’ 또는 ‘정해진 방식’이라는 형식성에 초점을 둔 정의이다. 실제로 많은 학자가 의례의 중요한 특징으로 반복성(repetition)과 정형성(pattern)을 거론한다. 어떤 행위가 일정한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또 그것이 정형화된 형태로 실행된다면 의례의 기본적인 성립요건을 갖춘다고 보는 것이다. 반복성을 부르는 일정한 상황과 정형화된 형태는 바로 의례의 사전적 의미에서 주목하는 목적성과 형식성에 부합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정의에는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다. 바로 의례가 지니는 의미이다. 의례로 표현되는 것은 무엇이며, 그 표현은 어떠한 기제에 따라 작동되는가.

인간은 전 생애를 통하여 생각하고 움직인다. 움직이고 생각한다. 이 서술에서 생각함과 움직임은 독자적인 병렬일 뿐이다. 생애 첫 단계의 인간은 아마도 동작과 사고를 인지적으로 결합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움직임과 생각의 상관관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이미 그의 움직임에는 생각이 담긴다.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할지라도 어떠한 의도가 있기에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내 다시 움직임은 생각을 낳는다. 움직임으로부터 비롯되는 타자와의 충돌로 세상을 배우고 자아를 형성한다. 나아가 움직임 자체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타자의 행동에서 의미를 찾고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처럼 인간의 생각과 움직임은 결코 분리될 수가 없다. 사유와 행위, 정신과 신체는 서로를 인과적으로 넘나들며 상즉한다. 다시 말해 생각은 행동으로 표현되고 행위는 사고를 담는다. 일정한 상황에 임하여 반복적으로 정형화되어 나타나는 인간의 행위양식이라고 하는 의례 또한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그 상황이 함유한 취지와 가치가 표현될 수밖에 없다. 종교의례라면 응당 그 종교에 내포된 세계관과 지향성이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의례를 불교의 사상과 정신이 구현된 몸짓으로 보고, 이를 다룬 자신의 신간에 ‘그 몸짓의 철학’이라는 부제를 단 이성운 박사의 시도는 그런 점에서 몹시 적절하다.

하지만 여전히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몸짓은 사상과 정신을 표현하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상과 정신이 반드시 선행하여 몸짓을 만들어내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선행하는 사상과 정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특정한 몸짓이 의도적으로 ‘고안’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기질과 문화가 본유적으로 지니고 있던 어떤 몸짓들이 특정한 사상과 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 일정한 몸짓에 담겨 있던 사상과 정신 또는 목적과 취지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망각되고 무뎌지기도 한다. 그렇게 처음의 의미를 놓친 행위는 관습적으로 반복되며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재창조’하기도 하지만, 끝내 무의미한 것으로 ‘소멸’하기도 할 것이다. 때로는 관습적인 행위의 반복에서 본래의 취지가 무뎌져 가는 것을 알아차리고 몸짓과 정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점검과 교정’이 가해질 필요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현행 한국의 불교의례를 조망하는 가운데 의미를(경우에 따라서 ‘재창조’된 의미까지도) 해석하는 데에 힘을 쏟을 뿐 아니라, 몸짓과 정신 사이의 어긋남에 대한 점검과 교정에도 충실하기를 자임한다. 이 책이 지니는 가장 큰 미덕이다.

본문은 총 5부로 구성된다. 우선 1부에서는 ‘믿음의 몸짓’으로서 ‘귀의’를 다룬다. 여기에는 삼귀의, 예경, 수계가 포함된다. 삼보께 지극한 마음으로 절하는 예경이야말로 삼귀의가 극대화된 국면으로서 공덕이라는 불교 정신의 실천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39~41쪽), 그리고 수계가 삼보에 귀의하여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고자 서원하는 절차라는 점에서(51쪽), 삼귀의뿐 아니라 예경과 수계까지 1부에 수록되었다. 2부는 ‘해탈의 몸짓’으로서 ‘수행’을 다룬다. 여기에는 송주, 염불, 참선이 포함된다. 많은 이들이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간경 · 염불 · 참선의 삼문수행(三門修行)을 꼽는다. 저자 또한 이 견해에 동의하되(75쪽), 주문을 외운다는 의미의 송주가 한국불교에서는 경전을 독송하거나 염송하는 것까지 포함한 넓은 의미로 쓰인다는 점에서(76쪽) 송경 대신 송주라는 개념어를 사용하였다. 또 참선 부분에서는 선정수행이 어려운 오탁악세의 중생들을 위해 동아시아에서 고안되어 유행한 참법의 두 가지 수행방식인 사참(事懺)과 이참(理懺)을 부각하여(109쪽, 115쪽), 사참 단계의 예참과 이참을 통해 얻어지는 실다운 경계[一實境界]를 중심으로 서술을 전개한다.

3부와 4부는 각각 ‘바침의 몸짓’으로서 ‘공양’과 ‘베풂의 몸짓’으로서 ‘시식’을 다룬다. 주지하다시피 공양이란 삼보 · 스승 · 부모 · 망자 등에게 음식이나 의복 등을 공급하는 행위이다. 본디 공양이란 삼보와 같이 공경할 만한 존재뿐 아니라 망자까지도 그 대상으로 포함하는 것이었으나, 후대에 들어 망자에게 먹고 마실 것을 베푸는 행위를 별도로 시식이라고 부르게 되면서 두 의례가 현상학적으로 분리되었다.

하지만 역시 그 두 의례는 본질적으로 취지와 의미를 공유하기 때문에 각각의 의례를 구성하는 하위의식에서도 구조적 유사성을 지닌다. 구체적으로 3부 공양 의례에서는 거불과 소청, 가영과 헌좌, 변공과 헌공, 발원과 보궐, 축원(축원 삼종과 삼단 축원), 그리고 봉송의식이 거론된다. 다만 한국불교의 헌공의식에서는 봉송의식이 희미해지며 현실에서 정토를 이루는 양태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봉송을 다루는 목차에서는 ‘현실의 피안’이라는 절제목이 달리게 되었다. 4부 시식 의례에서는 창혼과 청혼, 정화와 안좌, 변식과 시식, 장엄염불, 봉송과 봉안, 그리고 봉송의식의 다음에 이어지는 삼귀의가 거론된다. 이중 마지막 삼귀의 과정은 망자를 봉송한 이후에 행해진다는 점에서 스스로 귀의하는 삼귀의[自三歸依]라고 보아 ‘스스로 귀의’라는 절제목을 달았다.

마지막으로 5부는 ‘귀환의 몸짓’으로서 ‘다비’를 다룬다. 여기에서는 임종 전후의 절차, 염습 · 진반시식 · 이운 및 화장 또는 매장의 장례의식, 그리고 (화장의 경우) 유골의 봉안의식이 거론된다. 전체적으로 1, 2, 5부의 절제목에는 ⎈표시를 붙였음에 반해 3, 4부의 절제목에는 일련번호(1~6)가 부여되어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1, 2, 5부에 포함된 의식들이 독립적 경향을 가지고 설행되는 것과 달리 3, 4부의 절을 이루는 의식들은 각각 공양과 시식 의례를 구성하는 연속적인 하위의 의식절차라는 점을 부각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를 반영한다(10쪽).

그렇다면 왜 저자는 여러 불교의례 중에서도 특별히 귀의, 수행, 공양, 시식, 다비의 다섯 가지를 선정한 것일까. 이것은 두 가지 키워드로 설명될 수 있다. 일생의례와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불교 이념이 그것이다. 인간의 생애는 태어남으로 시작하여 일정 기간 생존을 유지하다 죽음으로 끝이 난다. 종교적 태어남이란 하나의 종교전통을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여 그 종교의 신자로 거듭나는 사건이다. 귀의 의례를 불교인으로서의 출생의례라 할 수 있는 까닭이다. 물론 저자는 귀의 의례 속에 수계식뿐 아니라 삼귀의와 예경을 포함하지만, 매번의 불교 행사에서 행해지는 삼귀의와 예경을 통하여 불자는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새롭게 각성하며 불교적 삶을 확인하고 지속한다.

한편 개종하거나 탈종하지 않는 한 개인의 종교적 삶은 죽음으로서 마감될 수밖에 없다. 깨달음의 순간 얻는 것이 해탈이라고 하지만 육신을 지닌 인간의 실존은 오직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라야 무여열반을 이룰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비의례야말로 진정한 불교적 의미의 죽음의례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기간에 그는 불교의 이념에 따라 수행하고 실천한다. 불교 특히 대승불교에서 가르치는 최고의 이념은 바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다. 불교인은 송주와 염불과 참선의 수행으로 자신의 깨달음을 도모하는 한편, 공양과 시식의 의례를 통해 위로는 불보살에서 밑으로는 망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중생의 요익을 위하여 베풂을 실천한다. 저자는 바로 위의 다섯 가지 의례를 통하여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불교인들의 생애적 몸짓과 그 의미를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면 앞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했던 몸짓과 정신 사이의 어긋남의 점검은 어느 지점에서 발휘되는가. 저자는 불교의 각종 의궤(儀軌)와 의문(儀文)들을 전거 삼아 날카로운 눈썰미와 예리한 인식으로 이 책에서 다루어진 모든 종류의 의례와 의식에 대하여 꼼꼼한 비평을 가한다. 그 모든 비평이 의미와 가치를 지니지만, 그중에서도 반드시 언급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 불교인들이 일반적으로 구별 없이 사용하곤 하는 범어 ‘나모(namo)’와 한자어 ‘귀의(歸依)’를 세심하게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나모’는 단순한 인사말이지만 ‘귀의’는 ‘귀의하여 돌아간다’는 뜻인 ‘사라남 가차미(saraņaṁ gacchāmi)’의 번역어이므로 두 용어의 공능과 용처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38~39쪽).

둘, 공양의례의 헌좌 의식은 의례에 초청된 불보살에게 자리를 권하며 앉으실 것을 청하는 수순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좌석을 별도로 마련하는 경우가 드물다. 이는 의문과 행위가 불일치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삼보를 청하였으면 반드시 삼보위패나 번을 마련해야 언표와 행위가 호응한다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삼존상이 있기에 별도의 좌석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미 삼존의 부처님이 계시는 것을 고려하였다면 별도로 청해 앉으시라고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151~152쪽). 이와 같은 폐단은 시식의례의 안좌 의식에서도 되풀이되고 있으므로 재고가 요청된다(235쪽).

셋, 공양의례 중 헌공 의식에는 마음으로 올리는 공양을 표현하는 운심공양이 있다. 이것을 춤으로 재현한 운심게작법에는 ‘유원제불 애강도량 수차공양’이라는 원망(願望) 구절이 삽입된다. 여기서 ‘애강도량(哀降道場)’은 여러 부처께서 운심공양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 이 도량에 내려오시라는 바람을 의미하는데, 삼보는 이미 소청의식에서 모셔져 자리하고 계신 상태이므로 다시 도량에 내려오시라고 청하는 것은 전후의 맥락과 모순된다(169쪽).

넷, 다비의례에서는 임종 직후에 ‘○○ 영가여’라고 부르며 무상계 수계염송을 한다. 그 내용은 이제 막 죽음에 이른 이를 위해 무상의 계를 설하는 법문이다. 그런데 이 무상계가 지장재일이나 추천법회 등에서 활용되는 경우가 있다. 비록 지장재일이나 추천법회가 망자를 위해 설행되는 행사라 하더라도 지금 막 죽음에 이른 이를 대상으로 하는 무상계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291쪽).

다섯, 다비의례의 장례 의식 중 죽은 이를 좌석에 바로 앉힌다는 의미의 정좌게송을 시설하고, 이를 ‘좌석을 바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이후에 안좌게송을 거듭 시설한다. 출가자의 다비작법은 정좌 이후 시식과 입감(入龕)이 진행된다. 그런데 입감의식을 자의로 입관(入棺) 의식이라고 하면서 안좌게송을 시설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입관하고 나서 안좌한다는 것은 전후가 호응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302~304쪽).
이 밖에도 주목할 만한 비평과 주장이 여러 군데 더 존재하지만, 그 모두를 소개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므로 여기에서 그친다. 대체로 저자는 의문[말, 의미]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것을 경계한다. 이는 불교의 철학을 담아 표현하는 몸짓으로서 불교의례를 정의하는 저자의 관점에 부합한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러한 지적과 교정의 제안이 과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어긋남과 망각의 시간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여 의례의 몸짓과 종국에는 그 철학까지도 변모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독자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와 정신의 상관관계는 학문적인 견지에서 거듭 주시되어야 하며, 바로 이 점에서 저자는 학자로서의 소임에 충실하다고 평가될 수 있다. ■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석사 · 박사학위 취득. 불교의례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전문연구원 역임. 주요 논문으로 〈조선전기 度牒制度 연구〉(박사학위 논문) 〈조선 세종 대 僧役給牒의 시작과 그 의미〉 〈전통시대 한국불교의 도첩제도와 비구니〉 〈한국 불교의례에서 ‘먹임’과 ‘먹음’의 의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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