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있다 보면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좋든 싫든 문득문득 자신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절에서는 함께 살아도 홀로 사는 것과 다름없다. 절의 삶은 평지의 삶과는 사뭇 다르다. 몸도 마음도 등 붙이지 못한 허공에 기대인 것처럼 절묘한 허허로움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출가자가 아닌 세인이 절에 머문다는 것은 더욱 유정하고 아련하기 그지없다. 제 손으로 자신을 가장 높은 벼랑으로 밀어 올리는 처연한 몸짓처럼. 다치지 않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가장 위태로운 곳에 집을 짓는 제비의 심정처럼.

산 중턱에 제비집처럼 맺혀 있는 남녘의 작은 암자에 나는 근 십여 년을 깃들었더랬다. 신경림, 정희성 선생님의 추천으로 막 문단에 등단했던 푸르른 시절, 오직 좋은 시 한 편 쓰겠다는 치기 하나로 찾았던 산사. 그러나 무슨 마음의 변덕이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세상은 왜 이다지도 어처구니없는 것이며, 과연 진리란 건 있기나 하는 것인지, 정말 이것들의 실체가 있다면 내 이 두 눈으로 기어이 보고야 말겠다고 뻗치며 남은 산사.

그 산사에서 그리 오랜 시절을 보내게 될 줄은 나 역시 까마득히 몰랐다. 살아가면서 삶이 때로 어느 방향으로 흐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길은 자기로부터 자기에게로 가는 길이라 했던가. 내가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은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길 없는 길이었다.

그랬다. 사찰에서 한 시절은 깊은 어둠 속에 독하게 뿌리내리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고 스스로 갇혀 있던 인식의 굴레를 걷어차고 나와 감히 백척간두에서 허공으로 한 발 내뻗는 흉내라도 낼 수 있었던,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한때였다.

그러나 어딘들 다르랴. 절에서의 시간도 기다림과 외로움과 반조의 연속이었다.

어느 봄날, 며칠째 스님에게선 소식 한 자 없는, 봄이라도 옷섶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매운 봄날이었다. 한번 길 떠나면 당최 연락을 주지 않으시는 스님. 그 때문에 절 식구들은 스님을 기다리느라 목을 빼고, 중요한 손님이라도 오시는 날에는 연락이 닿지 않는 스님을 찾느라 전국 방방곡곡의 절로 전화하느라 바빴다. 이번엔 보살과 처사가 함께 갔건만 그들도 스님 따라 함흥차사가 된 모양이었다.

온다 간다 말도 없이 불쑥불쑥 안거를 떠나던 스님 덕분에 산속에서 우리끼리 한겨울을 보낸 적이야 여러 번 있었지만, 이렇게 하루이틀 다녀온다던 사람들이 몇날 며칠이 넘어가도록 소식 한 자 없어 기다리는 것은 참 막막하다. 만날 날을 알고 기다리는 것과 만날 날을 모른 채 기다리는 것은 그 차원과 질이 전혀 다르다.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릴 때는 시간도 멈추고, 세상도 멈춘다. 멈춘 시간 속에서 기약 없는 기다림은 남은 사람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골 깊은 화염의 흔적을 잔인하게 남긴다. 일생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은 그래서 어쩌면 시공이 다 멈춘 어느 지옥과도 같은 경계에서 슬픈 영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리라.

아무도 없는 절집에 있다 보면 문득문득 피할 수 없는 의문들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나는 누구이며, 이곳은 어디인가. 절에서 산 지 몇 년이 지났건만 존재 근원에 대한 물음이 다시 솟구칠 때면 타다 만 돌덩이처럼 가슴이 뜨겁고 목이 멘다.

왜 내 젊음의 기억은 온통 고통 그 자체였을까.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사는 동안 왜 나는 한 번도 행복하다고 느껴보지 못했을까. 그래서일까. 서러운 별빛이 가로등의 허리를 아득히 적시는 밤이면 홀로 뜨거운 신열에 들뜨다가, 새벽이면 아무 말 없이 떠나갈 허망한 꽃무릇 사태를 견디다 못해 얼마나 많은 밤을 차라리 내가 먼저 머리 꺾어 쏟아져 내리고는 했던가.

그렇게 떨치고 신열과 눈물과 환화(幻華)의 세상을 등지고 선 길의 끝. 그러나 이곳에서도 검은 장대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슴에 탕탕 대못을 박듯 가뭇없이 쏟아지고, 길의 끝에도 사람이 있고 기다림이 있고 그리움이 있어 끝 모를 무지와 회한은 조각조각 고뇌의 불이 되어 한밤중이면 여린 속살을 어김없이 태웠다. 그러다 때로 새벽이면 그 화염들이 정수리의 꽃으로 피어오르기도 했는데 그러면 나는 대낮에도 별빛보다 더 환한 고뇌의 꽃을 머리에 이고 사각사각 절 마당을 맨발로 밟으며 길 아닌 길을 하염없이 걷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이나 더 흘렀을까. 다 타버린 바로 그 절명의 가슴 속에서 손톱만 한 소원 하나 우담바라처럼 아득하게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

모든 탐착이 사라져 이 한 마음 고요해지기를, 살아서 적막하고 순하게 소멸하기를, 그렇게 소리 없이 조용히 네게로 스며들어, 그렇게 네가 되고, 네가 되고, 네가 되어, 다시는 내가 되지 않기를······.

그날 해 다 지도록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 법당 앞에 쭈그리고 앉아, 후두두 검붉은 노을 쪽으로 비상하는 새의 힘찬 날갯짓 소리와 가끔씩 제 빈 속을 다시 두드려가며 텅 빈 삶의 자세를 바로잡는 대나무들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참 오랜만에 손가락으로 흙마당에 시 한 편을 썼다.

죽 한 사발

나도
언제쯤이면
다 풀어져
흔적도 없이 흐르고 흐르다가
그대 상처 깊은 그곳까지
온몸으로 스밀
죽, 한 사발 되랴

biyay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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