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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가는 길 / 김영재
[74호] 2018년 06월 01일 (금) 김영재 시조시인

구례 화엄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쌍계사로 길머리를 잡았다. 섬진강을 따라가는 국도는 봄밤에 달리는 것이 제격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못 한다. 3월 중순이라 벚꽃은 망울져 아직 피지 않았고 아침나절에 길을 떠나야 한다. 벚꽃이 함박눈처럼 쏟아지는 봄밤에 그 길을 달리면 환상의 순간을 맛본다. 불빛 속에 춤을 추듯 흩날리는 꽃잎의 향연은 꿈결에도 황홀하다. 단잠을 설치게 한다.

피아골 초입을 지나 하동과 구례의 중간 지점의 화개에서 배낭을 챙겨 내렸다. 화개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인데 나에게는 어쩐 일인지 ‘화개장터’라 해야 친숙하고 확신이 선다.

버스 정류장은 복잡했다. 다리 건너 화개장터는 시골 장터가 아닌, 서울의 광장시장 못지않게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섬진강 건너 광양 매화마을은 매화 향기에 취하고 사람들의 발길에 뒤엉켜 몸살 앓는 모습이 아련하게 보인다.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경계를 넘어가 화개동천을 따라 ‘쌍계사 벚꽃 십리길’을 걷는다. 화개에서 쌍계사까지는 6km 거리다. 벚꽃 시오리길이 맞겠지만 그러려니 한다. 수령 50~70년 된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도로 양편에 늘어져 터널을 이룬다. 벚꽃은 묵은 가지에 드문드문 꽃봉오리로 맺혀 있을 뿐 아직 흐드러진 모습은 아니다. 이 길은 사랑을 갈망하는 푸른 청춘들이 걸으면 사랑이 맺어진다 해서 예부터 ‘혼례길’이라 부르기도 했다.

나는 오늘 쌍계사 부처님을 친견하고 불일폭포의 유장한 물줄기를 만나야 한다. 산을 깨치고 나를 깨치는 불일폭포의 천둥 같은 소리를 들어야 한다. 불일폭포 소리에 깨치지 못한다면 깨어지기라도 해야 한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시오 리 길은 길멀미가 나지 않는 곳. 경을 치게 해맑고 아름다운 곳”이라 했던 소설가 김동리(1913~1995) 선생을 떠올려 본다. 선생은 나의 대학 은사이시고 고교 때도 문학의 가르침을 주셨다.

경을 치게 해맑고 아름다운, 길멀미 나지 않는 길을 걸으며, 나는 조금씩 꽃멀미를 하고 있었다. 매화, 산수유가 피었다 지면 벚꽃, 진달래가 뒤따라 피는 봄 한 철. 꽃들은 제 이름에 걸맞게 모양과 색깔로 나에게 자연의 질서를 일러준다.

한참을 걸었다. 보랏빛 제비꽃이 벚나무 밑동에서 바람을 피해 얼굴을 내밀었다. 도로 왼편 언덕에 매화가 한창이다. 노랑 · 하양 나비들이 꽃 사이를 날고 벌들도 부지런히 꽃 속으로 드나든다. 냉이꽃, 꽃다지, 산자고, 별꽃 따위가 초록 들녘에 다투어 피어나고 있었다. 밭둑에는 곧바르게 줄을 서지 못한 유치원생처럼 개나리가 들쭉날쭉 늘어서서 노랗게 피어 있다. 겨울 추위를 견뎌낸 차밭과 보리밭이 시원스레 초록 융단을 펼쳐놓았다.

시오 리 길을 걸었더니 몸에 땀이 배고 지리산에서 내려온 바람이 젖은 몸을 말린다. 쌍계사 입구다. 화개에서 쌍계사까지의 길이 관광 나들이길이라면 쌍계사에서 불일폭포까지 왕복 5km 길은 명상과 자기성찰의 길이 아닐까.

쌍계사 일주문으로 들어선다. 속세를 떠나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서는 첫 관문이다. 일주문을 지나니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답답한 가슴을 씻어준다. 산문 밖에서 예쁜 꽃들에 취해 놀라 움칠했던 속내가 조금은 안심되었다. 금강문에 이른다. 금강문 앞 옆에 서 있는 대나무들이 큰 키를 자랑하며 가지런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조금씩 흔들린다. 흔들리지 않으면 바람이 무안해할까, 조금 흔들려준다. 시조 한 편 써봤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는 군자다/ 흔들리지 않으면 바람이 무안해진다/ 가던 길 잠시 멈추고 나도 조금 흔들린다
― 김영재 〈쌍계사에서〉

대나무 우듬지가 싱싱한 큰 붓이 되어 하늘을 화선지 삼아 무언가 그리고, 쓰고, 해를 불러와 낙관으로 삼는다. 나는 그걸 읽거나 깨달을 수가 없다. 못 읽고 못 알았다 해도 바람과 대나무 은덕으로 잠시 잘 쉬었다. 고맙고 또 고마울 뿐이다.

천왕문을 통과하니 마음이 조금 가파르다. 국사암 쪽으로 길을 틀어 비탈을 오른다. 절집이 조용히 지켜본다. 길은 흙길이고 고요하고 공손하게 나그네를 맞이한다. 반대쪽에서 지게에 나무를 지고 오는 사람이 순간, 시간과 공간을 갈라놓는다. 흙길을 밟고 터벅터벅 걸어 나무지게를 지고 오는 저 사람. 얼마 만의 풍경인가. 내 유년의 아련함이여. 몇십 년을 잊고 살았던 고향과 고향 사람들이 한순간 몰려왔다. 함께 산길을 걸어간다.

흙길을 지나자 바위가 주인이 된 계곡길이다. 소나무 뿌리가 바위를 타고 넘는다. 환학대다.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속세를 떠나 이상향인 청학동을 찾아다녔다. 그가 이곳 환학대에서 학을 불러 타고 날았다는 바위다. 조금 더 발품을 팔면 마족대(馬足臺)다. 임진왜란 당시 지원군으로 온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말을 타고 지리산을 오를 때 말이 바위를 밟아 말발굽 자국이 생겼다는 마족대. 말의 속도와 장군의 기상을 말해준다. 이런 허망한 스토리가 삶이 팍팍할 때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

생명의 힘은 무한하다. 커다란 바위를 쪼개고 몇십 년, 아니 그 이상을 살아낸 나무가 당당하게 서 있다. 바위에 박힌 형상이다. 그 나무를 본 순간 발걸음은 멈춰 섰고 등줄기의 땀도 식었다. 경외심이다. 생명이 존재하는 동안 불가능은 없다. 산속에서의 중얼거림. 이제 불일평전에 당도했다.

‘폭포까지 10분→’ 표지를 따라 가파른 바윗길을 오른다. 오른쪽 낭떠러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 조심조심 오른다. 불일암 돌축대를 지나 돌계단을 급히 내려간다. 건너편 돌산에서 떨어지는 60m 물줄기의 불일폭포가 장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산 아래 용소에 살던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를 쳐 청학봉, 백학봉을 만들고 그 사이로 물이 흘러 폭포가 되었다 한다. 봄가물로 폭포는 여위었지만 물소리 바람 소리는 맑아 두 귀를 씻어주며 타일렀다. 길 잃지 말고 왔던 길 따라 하산하라고. 돌길 걷듯이 조심해서 세상을 살아가라고.                 

 chaekji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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