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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자이나교의 불살생론 비교
김미숙 동국대 강사
[26호] 2006년 03월 10일 (금) 김미숙 동국대 강사

머리말

몇 주일 전의 일이다.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가 보게 된 불교텔레비전에서 한 스님의 설법 장면을 녹화 방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스님은 한참 동안을 강한 어조로 ‘외도(外道)’를 비판하고 있었다. 앞뒤 없이 시청하게 되어 저간의 사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설법의 분명한 요지는 “불교만이 최상의 진리”라는 것이었다. 가우타마 붓다(Gautama Buddha)의 당대에도 그러하였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이었고, 외도 역시 붓다 당대에도 그랬듯이 현 시점에서도 그릇되고 사악한 길이니 결코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하고 있었다.

그 설법을 듣고 나서 필자는 텔레비전의 화면 속에 간간이 비춰지던 청중들의 내심이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만이 진리의 길이요, 외도는 삿된 길이라….’

그러한 이분법적인 자로 필자의 글을 재단하여 말하자면, 붓다의 당대부터 불교 교단 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외도로 여겨졌던 자이나교의 불살생론을 불교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이 이 글의 주제가 될 것이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삿된 외도, 즉 자이나교의 불살생론은 거론할 여지도 없이 그릇된 것이라고 치부되어야 마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살생 원리의 기원 문제라든지 그 철학적인 배경에서도 불교와 자이나교는 적지 않은 교집합 부분을 갖고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양자의 비교를 통해서 자이나교의 사상뿐 아니라 불교의 불살생계에 대한 이해를 좀더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1)

1. 불살생 원리의 기원

불살생 원리는 고래(古來)로부터 인도 사회를 지배하는 대표적인 윤리 원칙이며 어느 특정 종교만의 규율이 아니다. 특히 채식주의로 대변되는 현대 인도인의 식생활 문화에 이르기까지 정치 사회의 전 영역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중요한 실천 규범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불교 교단에서는 불살생이라는 계가 불교에서 최초로 정립시킨 원칙이며, 아쇼카 왕의 불법 선양과 더불어서 인도 전역에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가우타마 붓다로부터 시작된 불교의 역사가 자이나교의 역사보다 선행한다고 보는 입장과 그 궤를 같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견해를 정설로 인정하기에는 적지 않은 의문이 따른다고 본다.

먼저 붓다의 교설이 상당 부분에서 독창적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수행 방법이나 교단의 운영 측면, 특히 교단의 규범을 위한 계율들은 불교만의 것, 또는 불교에서 최초로 정립한 것이었다기보다는 기존의 슈라마나 전통 내지 자이나 교단에서 먼저 행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붓다의 정각을 시점으로 하여 형성된 불교 교단은 고대로부터 전통을 이루고 전승되어 오던 슈라마나 교단의 일파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불살생 원리는 슈라마나 교단의 기본적인 규범이었던 것이다. 다만 불살생 원리의 기원을 언제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여러 학설로 나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학설들이 있지만, 불살생 원리가 브라나마 전통과 슈라마나 전통 중 어느 쪽에서 기원했다고 볼 것인가, 또는 자이나교와 불교 중 어느 쪽이 먼저일 것인가, 그러한 두 논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브라마나 전통에서 불살생 원리가 기원했다고 보는 입장은 자이나교와 불교를 포함하여 인도의 모든 전통의 시발점이 베다에 있다고 보는 데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한 견해는 현대에 이르러서 더욱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힌두 민족주의 또는 힌두 근본주의적 입장과 동일선상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살생 원리가 슈라마나 전통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브라마나 전통에서 중시하던 희생 제의에서 행해졌던 유혈(流血)의 공희(供犧)에 대한 반대로서 불살생주의를 강조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슈라마나 교단의 영향을 받아서 브라마나 교단에서도 유혈의 공희가 점차로 무혈(無血)의 공희로 대체되어 갔다고 보고 있다.

슈라마나 전통에서 그 기원을 찾는 입장은 크게 자이나교 기원설과 불교 기원설, 둘로 나뉜다. 이러한 학설상의 대립은 불교의 개조인 붓다의 생존 연대와 자이나교의 제24대 조사인 마하비라의 생존 연대를 어떻게 정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마하비라와 붓다, 두 인물의 생존 연대에 대해서는 학설이 매우 다기(多岐)하기 때문에 단정지어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불교 기원설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마하비라가 자이나교의 개조이고 그의 연대가 붓다보다 후대라고 간주하고 있지만 그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는 사실이다.

가장 단적인 이유로는 초기 불교 경전 속에서 붓다의 생존 중에 이미 마하비라가 열반에 들었다는 전언(傳言)을 거론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자이나교와 불교 문헌의 비교 연구에 따르면 자이나 교단 특히 마하비라가 붓다보다 먼저 활동했던 것을 부인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자이나 교단에서는 마하비라가 불살생을 처음으로 주창했다고 보지도 않는다. 그는 명백히 제23대 파르슈와 조사의 교단을 이어받은 제24대 조사이며, 그러한 사실은 자이나교의 어떤 분파에서도 부인하지 않는 명백한 역사로 인정받고 있다.

리샤바를 제1대 조사로 신봉하고 있는 자이나 교단에서는 불살생 교의를 비롯한 모든 교리의 시초가 리샤바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입장은 교단 내의 신앙으로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엄밀한 논거를 요구하는 학문적 논의의 장에서는 문헌적인 근거까지 뒷받침되고 있는 제22대 아리슈타네미 조사로부터 불살생 원리가 시작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설도 있다.

아리슈타네미 조사의 일생을 전하고 있는 『후독경(後讀經)』을 비롯한 자이나교의 초기 경전에서는 그의 출가 동기가 살생에 대한 혐오감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살생 원리가 브라마나 교단의 희생 제의에 대한 슈라마나 교단의 반감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입장이 가장 일반적인 학설이라고 할 수 있으나, 아리슈타네미 기원설에 따르면 그와 다른 동기도 읽어 낼 수 있다. 즉 아리슈타네미가 자신의 결혼식 때 음식 재료로 쓰일 동물들이 감금되어 있는 것을 보고서 “만약에 날 위해서 수많은 생명들이 살해된다면, 나는 다음 세상에서 행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후독경』 22. 19)라고 말한 뒤 출가 수행의 길을 떠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슈타네미의 설화에도 나타나 있듯이 불살생주의가 오로지 브라마나 교단에서 행하던 유혈 공희를 반대하고자 강조되었던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초기 경전의 문구들로 보건대, 재생 후에 살해된 동물들의 보복이 두려워서 살생을 금지하게 된 것이라는 일부의 주장은 긍정하기 어렵다. 물론 윤회와 전생(轉生)을 전제하는 슈라마나 전통에 따라 불교와 자이나교 모두 살생을 범한 경우에 그 주체는 재생할 때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2) 그러나 그 이유는 악한 업(karma)을 쌓았기에 그에 따른 결과를 받게 된다는 것이며, 희생된 동물의 보복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불살생 원리의 기원이 언제라고 단정하는 것은 고대 문헌이 희소한 까닭에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브라마나 전통에서 희생 제의에 쓰였던 동물들과 그 살생을 담당한 집행자에 대해서 신의 이름으로 정화시키고 살생이 아니라고 부인한다고 하여도, 슈라마나의 이상과는 괴리되었던 논리를 폈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동일한 슈라마나 전통을 따르면서도 불교 문헌에서는 유혈의 희생 제의에 대한 반감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자이나교에서는 존재의 평등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데서 서로 차이가 난다. 그러한 차이점은 존재론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2. 불살생의 서(誓)와 계(戒)

불교와 자이나교 모두 슈라마나 전통을 이어받아서 불살생을 서(誓)와 계(戒)의 제1 원칙으로 규정하고 있다. 불교는 5계 중의 제1계로, 자이나교에서는 5서 중의 제1서로 정해 두고 수행자와 재가자 모두에게 지켜야 한다고 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종교는 전혀 다를 바 없다.

5계와 5서는 각각의 교단에 입문하는 경우에 가장 먼저 받게 되는 기본 규범이며 그것을 준수하는 것이 곧 해당 교단의 교도라는 정체성을 획득하는 길(mrga)이 된다. 거꾸로, 5계와 5서를 지키지 못한다면 해당 교도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5계와 5서 중 네 조목은 서로 일치하지만 다른 한 조목은 서로 다르다. 이것은 두 종교의 상이점으로 지적되거나 불교만의 특이점으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양자의 차이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위의 표에서 보듯이 5서와 5계의 차이는 각각 한 조목, 즉 불소유(不所有)와 불음주(不飮酒)의 유무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불소유는 파르슈와 조사의 교단에서 따르던 4금계 중의 하나로서, 슈라마나 전통에서는 당연시되었던 규범적 원리였다. 이 점은 불교 교단에서 불소유를 5계 중의 하나로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붓다 당대로부터 현대 교단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3)

5서와 5계는 자이나교와 불교의 근본 규범이며 재가자와 출가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지만, 자이나교에서는 두 경우를 구분하여 그 정도에서 차등을 두고 있다. 즉 출가자의 경우에는 5대서(大誓)라 하고, 재가자의 경우에는 5소서(小誓)라고 구별하되, 조목상의 차이는 두지 않는다. 다만 그 엄격성 정도에서 보다 완화시키고 있다.

또한 불교의 5계 중 불살생계와 다른 조목의 관계는 상호 독립적인 내용으로 진술되고 있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자이나교의 5서는 불살생서를 제외한 나머지 네 조목들도 모두 불살생서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으며, 그 각각이 모두 불살생서의 세부 조목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것은 자이나교에서 불살생서를 준수해야 하는 이유가 단순히 생물학적 존재를 보호하는 데에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자이나교에서 살생을 금하는 이유가 만물에 영혼(jva)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서 엄격한 수행 방식이 도출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살생의 객체는 영혼이라기보다는 생기(生氣)라고 번역되는 프라나(pra)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열 가지로 세분된다.

위와 같은 10종의 생기들이 모여서 영혼의 생명력을 이루고 있다고 하며, 그 중 어느 하나만이라도 침해당하는 경우에 ‘살상(殺傷)’이 성립한다는 것이 자이나교의 입장이다.

또한 10종 생기의 다양한 조합에 따라 수많은 존재의 층위가 생겨난다고 말한다. 예컨대 인간은 5감각을 비롯하여 10종의 생기를 모두 갖춘 존재인 반면에, 개미는 3종의 감각을 비롯하여 7종의 생기를 갖추고 있고, 지·수·화·풍도 각각 촉각이라는 1감각을 비롯하여 4종의 생기를 지닌 살아 있는 존재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생기의 개념에 대한 자이나교의 독특한 정의는 불교를 비롯한 다른 인도 종교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낳게 되었다. 생기의 침해와 손상의 여부를 살상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자이나교의 수행법이 불교와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로 여겨진다.

3. 불살생의 수행법 비교

불교에서는 불살생계를 준수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살생하지 않으면 될 것이다. 살생의 객체로 인정되는 범위는 자이나교의 그것보다 훨씬 좁기 때문에 불살생의 대상도 그만큼 줄어든다.

불교 문헌에서는 불살생의 대상에 대해서 ‘살아 있는 존재(bhta)’라고 총칭하여 말하거나 존재의 ‘생명(jva)’을 거론하지만, 그 의미와 범위는 자이나교와 다르다.4) 또한 불교에서는 지바(jva)라는 말을 어떤 존재의 생명력에 한정하여 사용하고 있으나, 자이나교에서는 영원 불변성을 지닌 실재의 하나인 영혼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 불교에서는 영원 불변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존재란 여러 요소들이 일시적으로 화합하여 생명이 유지되는 것일 뿐이라고 정의한다. 이와 같은 존재에 대한 정의의 차이는 양 교단의 수행법이 확연히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먼저, 불교와 달리 자이나교에서는 3행(行) 즉 마음, 말, 몸으로 짓는 행이 각각 생기로 인정된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다수의 불교 학자들은 불교에서는 행위자의 의도 또는 동기를 중시하고, 자이나교에서는 행위 또는 결과를 중시하는 것이 두 교의상의 차이점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불교 경전에서 의업을 중시하는 불교와 달리 자이나교에서는 신업을 중시한다고 설명하는 데 그 근거를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이나교에서는 심행, 구행, 신행, 즉 3행을 10종 생기에 포함시키고, 영혼의 생명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마음, 말, 몸 등으로 짓게 되는 어떠한 악행도 모두 살상(殺傷)과 관련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결코 몸으로 짓는 것, 즉 신행으로 인한 결과에만 치중하였던 것이 아니다. 도리어 마음이나 말로 짓는 악행이 얼마나 중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에 대해서 세밀하게 분석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만큼 행위의 동기라고 여기는 마음도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이나교에서는 몸으로만 살생 또는 살상을 야기할 수 있다고 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몸보다는 심행과 구행으로 짓는 살상이 영혼의 청정과 해탈에 훨씬 더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여러 각도로 설명하고 있다. 그 중 한 예가 영혼의 정화에 대한 14단계 이론이다.

영혼을 완전히 정화시킨 최종 단계는 전지(全知)를 성취한 해탈 단계이지만, 그 단계에 이르기까지 출가자와 재가자는 여러 가지 수행법을 실천해야 한다.

그 중 대표적인 예로 우기(雨期) 동안의 안거 수행을 들 수 있다. 우기 안거는 인도 종교들 중 자이나 교단에서 가장 먼저 정립시킨 것이며, 오로지 불살생서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 우기 동안만 예외적으로 정주 생활을 하는 것이다. 안거했던 이유는 우기 동안 생명체의 성장과 번식이 매우 활발해져서 수행자들이 편력하는 동안 살생을 범할 우려가 높기 때문이었다.

우기 안거는 슈라마나 전통의 수행 원칙인 편력행(遍歷行)의 예외이며, 인도 특유의 기후와 풍토적 조건을 반영한 것이다. 불교에서도 붓다 당대부터 우기 안거가 수용되었으며,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엄수되고 있는 유서 깊은 수행 전통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안거 전통이 그렇듯이, 자이나교와 비교하자면 불교에서는 불살생계와의 관련성을 그다지 강조하는 편은 아니다.

의생활과 관련된 수행법으로는 의복과 침구 등의 소재는 살생을 최소화시킨 것을 선택해야 하며, 손질과 세탁 등은 반드시 일몰 전 태양이 떠 있는 시간에만 하도록 제한되어 있다. 세탁을 할 때에도 특히 주의를 기울여서 생물체를 손상하거나 살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불살생 원리와 관련된 자이나교의 수행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 중 하나가 단식행이다. 존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자이나 교도들은 살생이 수반될 수밖에 없는 음식의 섭취를 최대한 절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이와 관련하여, ‘죽을 때까지 단식하는 것’ 또는 ‘단식 끝에 죽는 고행’ 등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정사서(正死誓, sallekhan vrata)는 제6의 서(誓)로 꼽힐 만큼 중시되는 것이지만, 그 실상은 이상적인 죽음의 방식일 뿐이며, 매우 엄격한 요건이 갖추어진 다음에야 실행할 수 있는 임종 형태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사서가 자이나교의 극단적인 고행을 대변하는 단식사(斷食死)라고 여긴다거나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바른 이해가 아니라고 본다.

그 밖에도 자이나교의 수행 세칙들은 거의 전부가 불살생주의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아도 전혀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일몰 후의 식사 금지, 목욕 금지, 양치 금지, 삭발과 온몸의 털 뽑기, 입 가리개의 착용, 털채의 지참 등이 모두 불살생서를 지키기 위한 것이며, 수면을 억제해야 하는 이유도 무의식 상태에서 살생을 범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도 자이나교와 유사한 내용의 계와 율을 정하고 있더라도 그 논거로서 불살생 원리를 강조하는 정도는 자이나교보다 상당히 완화되어 있고 평이한 편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맥락에서 불교도들은 자이나 교도들의 수행법은 “지나치게 극단적이며 비현실적이다.”라고 비난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물론 옷을 벗고 다니는 공의파 수행자를 가리켜서 ‘무참(無慙) 외도’라고 폄하했던 불교도들이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입 가리개를 하고 털채를 들고 다니면서 불살생주의를 고수하는 자이나 수행자들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매우 극단적이며 불교식의 중도적 수행과는 거리가 먼 것은 분명하다.

더 나아가서, 불살생주의에 천착하는 자이나교의 수행법은 매우 기괴할 뿐만 아니라 강박 신경증 환자의 병증(病症)과 다를 바 없다는 평가를 내리는 학자를 접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불살생주의라는 이념 위에 쌓아 올려진 자이나 교단의 역사는 인도 불교의 역사와 달리 너무도 굳건하게 그 혈맥을 전승해 오고 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그들의 수행법이 그렇게 비난받을 만큼 극단적이고 기괴하며 불합리한 고행주의에 그쳤다면 수천 년 동안 교단을 지탱해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이나 교단에서는 초기 교단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수정이나 개변(改變) 없이 불살생의 이상을 고수해 오고 있는 까닭은 불살생 원리가 다르마, 즉 최상의 진리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4. 맺음말

불살생주의에 대해서 인도의 3대 종교, 즉 힌두교·불교·자이나교의 입장을 간명하게 요약하여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힌두교에서는 죽이기도 하고 먹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죽이지는 않으나 먹기는 한다.
자이나교에서는 죽이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다.”

물론 이와 같은 단언에는 반론이 따를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일반화시켜서 말하는 이면에는 자이나교의 수행법이 매우 엄격하고 지나치게 극단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뜻도 가미되어 있다.

위와 같이 세 종교의 비교에서도 드러나듯이, 자이나교의 불살생주의가 가장 엄격해 보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자이나교의 입장에서는 극단적이라는 비판에 대해서 도리어 의아해 한다.

과연, 자기 몸의 보존을 위해서 다른 목숨을 죽이는 경우와 다른 목숨을 죽이지 않고자 애써 노력하는 경우, 둘 중 어느 쪽이 더 극단적인가? 이러한 의문과 반론은 단순히 자이나 교도들의 실천행(實踐行)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불살생 원리가 인도 종교에 보편적으로 수용되었다고는 하지만, 힌두교의 쉬바파 등에서는 현재까지도 유혈 공희가 당연시되고 있으며, 불교의 실상을 볼 때에도 불살생의 입지는 거의 소실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자이나 학자들은 비판을 가한다.

불교에서는 불살생의 논거로서 생명의 가치를 중시하면서 자비와 연민의 미덕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자이나교에서는 자비와 연민은 감정일 따름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예컨대 사랑은 사랑을 낳을 수 있다. 감정은 감정으로 다시 갚을 수 있고, 감정은 또 다른 감정을 재생산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이나교에 따르면 불살생서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그 행위 주체의 해탈이 저해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다른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자비심이 필요하다는 데 그치지 않고, 최종적인 자신의 해탈을 얻기 위해서 기필코 살생을 자제해야 하며, 그 결과로써 업의 제어와 지멸을 성취하고 마침내 궁극적인 해탈에 이르러야 한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런 까닭에 불교에서 “자비는 자비를 낳는다.”라고 말하는 데 대하여, 자이나교에서는 “불살생은 불살생을 낳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살생이든 불살생이든 오로지 그 행위 주체에게 그에 상당한 결과가 귀속될 뿐이며, 감정적인 어떠한 보답과도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물론 자이나교에서도 존재의 가치적 평등성에 의거해서 불살생을 강조하고 ‘모든 존재의 공존 공영’을 표어로 삼고 있기도 하지만, 불살생주의의 초점은 오로지 해탈을 위한 업의 소멸이라는 한 점으로 응집되어 있다는 것이, 불교의 불살생론과 다른 점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요컨대 불교와 자이나교는 존재론뿐 아니라 업론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불살생의 계와 서라는 동일한 조목에 대한 실천 방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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