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친구들과 폐사지를 다녀왔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원주 황학산과 현계산 사이의 낮은 산자락 아래 넓은 터에 자리한 거돈사지. 거돈사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절터 한가운데 서 있는 삼층석탑이다. 이 터를 쓸쓸히 지켜온 산 증거이다. 옛날부터 이 지역은 흥원창이라는 조창(漕倉)이 있을 만큼 흥청대던 곳이었다. 이런 번성으로 인해 남한강 주변에는 절이 100여 개가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존하는 사찰은 없고 천년 역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여기 거돈사지와 이곳에서 가까운 부론면에 위치한 법천사지, 그리고 섬강을 따라 조금 올라간 곳에 흥법사지가 폐사지로 남아 있다.

이렇게 넓게 터를 잡아 절을 세웠던 것은 신도들이 많아서였을 것인데, 폐(廢)했을 때는 여러 이유가 있었을 터이다. 이 절은 조선 임진왜란 때에 왜군이 북상하는 길목에 있어, 그들이 거처하다 떠나며 불을 질러 폐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누구는 이 사실을 들어 인연이 다한 탓이라고 한다. 통일신라 때 조성되어 고려 초 전성기를 거친 절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은 시대와의 인연이 끝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풍수설로 설명하기도 한다.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동강과 서강을 품고 부론에 와서 섬강을 만난다. 이곳은 강원도와 충청북도 경기도의 3도에 접해 있어 세 곳에서 흘러온 물이 풍부한 곳이라 뱃길의 중심지였다. 그러던 것이 차츰 물이 줄고 물물을 나르던 배들이 줄며 나루가 옮겨가니 거주민들도 타지로 떠나면서 절들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이 설이 유력해 보였다.

폐사지 여기저기를 둘러보는데 문득 어린 날 엄마 손에 이끌려 다니곤 했던 회암사가 떠올랐다. 눈이 부시게 하얀 옥양목 한복을 입은 엄마가 그날은 말할 수 없이 예뻐 보였다. 버스에서 내려 좁은 밭둑을 지나 칠봉산 자락 넓은 터에 깨져 나뒹구는 비석, 특이한 문양이 새겨진 돌들을 비껴가며 한참을 올라가야 좁은 오솔길이 나온다. 그 길을 오르는 동안도 엄마는 여기저기를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아 연신 절을 올리느라 여념이 없어, 그때부터는 엄마의 손을 놓고 뒤에서 촐랑촐랑 따라가야만 했다. 어린 나는 그 모습이 하도 이상해서 아무것도 없는데 왜 그렇게 절을 하느냐고 물으면 이곳이 다 절이 있던 곳이란다. “부처님이 계시던 곳이지.” 그래서인지 엄마는 한 발짝도 허투루 걷지 않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는 내가 새소리를 들으며 연둣빛 이파리를 훑으며 깡충깡충 앞서 뛰어갔다. 숨이 차게 산등을 올라가야 나오는 조그만 절(작은 암자). 도착 후 엄마가 부처님 계시는 법당에서 절을 올리는 동안 나는 다람쥐 나비를 잡으러 뛰어다녔다.

학교에 들어가고부터는 절에 갈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교사가 된 뒤 방학 때면 동료들과 함께 여기저기 사찰을 찾아다녔다.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가 절에서 놀고만 온 것 같아도 어깨너머로 듣고 본 것들이 마음속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는지 이상하게도 어느 법당엘 가든 부처님의 눈과 마주치면 알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동료들한테 놀림도 많이 받았다. “부처님이 애인이라도 돼?”라고. 눈물이 울고 싶다고 나올까?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시키는 것인데, 나도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생활하는 중에 모든 것을 부처님께 의지하고 기대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우연일까? 결혼하고 얼마 안 돼 시아버님이 몸져누우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여러 형제 중에 나를 불러 위패를 회암사에 놓아달라고 당부하셨다. 그래서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위패를 회암사에 모셨다. 그리고 사십구재를 올리느라 7일마다 그곳에 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 서적을 읽게 되고 불심에 심취하게 되었다. 불경을 공부한 일은 없지만, 불교는 마음공부요 학문의 바탕임이 느껴져 회암사뿐만 아니라 도선사도 자주 찾게 되었다. 3남매를 낳아 기르면서 할아버지 얼굴을 못 뵌 아이들을 위해 할아버지 위패가 모셔진 회암사엘 시어머니를 모시고 일 년에 두 번은 꼭 찾아가 예불을 올렸다. 때로는 외할머니도 모시고 소풍 가듯 절엘 다녔다.

그런데 절에 다닌 지 15년이 지난 어느 날,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어났다. 시어머니께서 느닷없이 교회를 나가겠다고 하시며 밤이면 동네 교회에 가서 밤을 지내고 오시는 것이었다. 난감했다. 시간을 두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보이지 않는 분란이 집안을 덮치기 시작했다.

결국 집안의 평화를 위해 다니던 절에 발길을 끊었다. 더군다나 막내가 할머니를 따라 교회에 가서 살다시피 하는 일이 발생했다. 아이를 방치할 수 없었다. 교회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반듯한 교회를 찾아 내가 아이와 함께 교회에 나가기를 결심했다. 그때의 심정은 꼭 애인을 바꿔치기한 기분이었다. 배신자 같았다. 지금도 (교회 권사이지만) 절엘 가면 법당 오른쪽 출입문에 비스듬히 서서 옛 애인을 훔쳐보듯 불상을 바라보며 ‘저 왔어요.’ 하며 속엣말을 읊조린다. 그러면 빙긋이 웃으시며 ‘그래, 왔구나!’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눈물이 핑 돈다. 첫사랑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다 마음의 헛것이다. 한 운수가 지문(智門) 화상에게 묻기를 “연꽃이 아직 물속에서 피어오르기 전일 때, 뭐라고 합니까?” 하니 지문께서 ‘연꽃’이라고 답하고, 운수가 다시 “그럼 물 위로 올라와 핀 뒤에는 뭐라고 합니까?” 하고 물으니 지문께서 ‘연잎’이라고 대답했다든가. 진정한 부처는 내 마음 안에 있는 것이라는 뜻 아니겠는가.

거돈사지의 삼층석탑을 한 바퀴 탑돌이 하고는 동쪽 언덕길 끝자락에 있는 고려 초의 고승 원공국사 탑비로 가보았다. 기록에 보면 탑비 옆에 원공국사의 사리탑이 함께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자신의 집으로 가져갔다가 해방 후 경복궁으로 옮겼다고 한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단다.
산 중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 옛날 즐비하게 늘어선 절의 기와지붕들이 아름답게 곡선을 이루고, 그 안에서 목탁 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무상이다. 3월인데 바람이 차다. 이곳에 비석 말고 진정한 수문장이 하나 거대하게 서 있어 찾는 이들을 반긴다. 기단 끝자락에 우람하게 버티고 서 있는 천 년이 넘었다는 느티나무다. 우락부락 뻗어 있는 그 뿌리에 가만히 앉아보았다. 가지 끝마다 파르스름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저 나이테 안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얼마나 전하고 싶은 말이 많을까? 나처럼 첫사랑의 이야기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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