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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 죽는 게 소원이여” / 김택근
[74호] 2018년 06월 01일 (금) 김택근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제 어머니 앞에서는 문상을 간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구순 고개를 넘은 어머니는 죽음에 민감하다. 혹 누구의 별세 소식이라도 들으면 대뜸 당신이 아직까지 살아 있음을 책망한다.

“그 사람은 복도 많다. 그렇게 가면 얼마나 좋아. 날 잡아가라는 귀신은 어디서 무엇 허는지.”

빈말이겠지 하면서도 막상 어머니께 드릴 말이 없다. 우리에게 100세 시대가 왔다지만, 그래서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라지만 병든 노년은 아프고 쓸쓸하다. 그리고 적막하다. 쇠약해진 어머니는 이제 고향에도 갈 수 없다. 늙음은 죄가 아닌데도 스스로 방안에 갇힌 죄수를 자처하며 혼잣말을 한다.

“자다가 죽는 게 소원이여.”

병치레 없이 정정하던 노인이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시면 호상이라고 한다. 아주 어릴 때 일이다. 점심 잘 드시고 밭일을 하던 이웃집 할머니가 해 질 녘 방에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며느리가 ‘저녁 드시라’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방문을 열어보니 앉은 채로 이승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부처 죽음’이라며 두 손을 모았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은 그 ‘죽음 복’을 부러워했다.

고통 없이 홀연 이승의 옷을 벗으면 죽은 자는 물론이고 남은 자에게도 복이다. 이렇듯 누구든 고통 없이 오래 살다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싶어 한다. 우리네 다섯 가지 복 중에서 마지막은 ‘제 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는 것[考終命]’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마지막 미소를 남기는 일이야말로 최고의 복일 것이다. 하지만 일생을 감싸고 있던 육신을 고통 없이 벗어나는 ‘곱게 죽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하늘의 보살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몇 년 전 일본에서는 유명 사찰을 돌며 ‘건강하게 살다가 갑자기 죽게 해 달라’고 불공을 드리는 노인들이 생겨났다. 그들을 위한 여행상품까지 등장했다. 백발의 순례자들은 부처에게 ‘부처 죽음’을 내려달라고 간절하게 빌었을 것이다. 불교는 어쩌면 죽음의 강을 가장 깊이 들여다보는 종교일 것이다.

청담 스님이 출가를 결심하고 장성 백양사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당대의 고승 용성 스님이 머물고 있었다. 청담 스님은 정작 용성 스님은 만나지 못하고 대신 ‘사찰에서의 죽음’을 목격했다. 그것은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죽음을 내쫓는 기이한 광경이었다. 지대방에 누워 죽어가는 노스님에게 다른 스님들이 문병을 왔다. 하지만 속인들이 생각하는 문병이 아니었다.

“스님 이제는 단념하시오.”

자신의 죽음을 빨리 불러오라는 재촉이었다. 청담 스님은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곧 죽을 때가 되었으니 어서 죽어 가라는 말이다. 어떻게 들으면 몰인정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나, 조금도 생사에 거리낌 없는 사람들의 인사 말투로 나에게는 실감되었다. 말하는 측이나 말을 듣는 측이나 무심하고 솔직 담백하고 일진리(一眞理)를 긍정하고 하는 말 같았다. 그 스님은 일어나 자기의 걸망을 정리하고 난 다음 죽어갔는데 나는 거기서 불교의 하나의 영골(靈骨)을 볼 수 있었다.

청담 스님은 이렇듯 스님의 죽음에서 진리의 영골 한 조각을 발견했다. 하지만 사찰에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은 속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1970년대 초반 오대산 상원사 선방에서 일어난 일이다. 결핵을 앓던 스님이 각혈을 했다. 그러자 스스로 바랑을 챙겨 떠났다. 갈 곳이 없으니 죽음을 맞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지허 스님은 이런 《선방일기》를 남겼다.

눈 속에 트인 외가닥 길을 따라 콜록거리면서 떠나갔다. 그 길은 마치 세월 같은 길이어서 다시 돌아옴이 없는 길 같기도 하고 명부(冥府)의 길로 통하는 길 같기도 하다. ……자비문중(慈悲門中)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절간에서도 병든 선객을 위해 베풀 자비는 없다. 건강한 선객은 부처님처럼 위대해 보이나 병든 선객은 대처승보다 추해진다. 화두는 멀리 보내고 비루와 비열(卑劣)의 옷을 입고 약을 찾아 헤맨다. 그는 이미 선객이 아니고,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인간폐물이 되고 만다.

그 병든 스님은 어디서 최후를 맞았을지 가슴이 먹먹하다. 화두를 붙들고 치열하게 정진했던 선승도 신외무물(身外無物), 즉 몸이 가장 중요하다고 이른다. 불가에서도 이럴진대 속가에서 편히 죽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요즘처럼 ‘연명(延命)의 의술’이 발달한 사회에서는 정겨운 공간에서 평온한 죽음을 맞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우리는 오늘도 죽음으로 가는 길을 걷는다. 살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초행길이다. 물론 아직 그 언저리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죽음 가까이에 있는 이들의 심경을 미루어 헤아릴 수는 있다. 부모들은 자신의 늙음이 곧 자식들의 짐이라는 생각을 깊이 하고 있다. 그래서 내 힘으로 오래 살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세상을 버리고 싶어 한다. 자식들을 떠나 눈 속의 외가닥 길로 스스로를 내몰고 있다. 갑자기 죽기를 바라는 기원에는 이런 슬픔이 들어 있다.

“자다가 죽는 게 소원이여.”

제대로 모시지 못했으니 불효가 하늘을 찌른다. 어머니의 지난날은 실로 험했다. 부디 그동안의 수고가 편히 발을 뻗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죽음은 여전히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그러니 또 슬프다. 저기 꽃잎 진 자리에 눈물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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