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무쌍한 구름 같은 세상을 만나보기 위해 나는 종종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하나하나 비워내는 연습을 한다. 한편에서는 무언가 채우려는 삶이 계속되는데, 다른 한구석에서는 자꾸 비우려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니 비워야 채워진다는 진리를 깨닫게라도 된 것일까. 버려야겠다고 작심하고 옷장을 열고 시작해 본다. 빼곡하던 옷장이 헐렁하도록 안 입는 옷들을 몽땅 내놓는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목도리도 눈에 띈다. “아직 성성한데……” 나직한 어머니 음성이 들리는듯하여 잠시 옛 생각에 잠긴다. 추려낸 옷들을 다시 들춰보고 털어보다가 몇 벌을 다시 챙겨둔다. 살아계실 때는 잘 들리지 않던 어머니 말씀이 왜 이리 조그만 일에까지 자주 되살아나는지? 그 그리움이 강물로 흘러 몇천 번은 바다에 당도했으련만 나이가 들수록 더욱 깊어져만 간다. 어머니를 떠올리면 끓는 마음도 누그러지고 편안해진다.

나그네는 짐이 가볍다. 나그네처럼 가볍게 인생을 살기 위해 어머니는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어려운 시대를 그래도 당당하게 살아가신 것 같다. 절에 가실 때 가장 우아하고 신선해 보였다. 하얀 치마저고리에 윤이 나는 하얀 고무신, 목도리까지 하얗게 차려 두르시고 절에 다녀오시곤 했다. 별채 어머니 방에는 조그만 부처님상이 모셔져 있었다. 날마다 절을 하시고 치성을 드리셨다. 나는 그 부처님 좀 다른 곳에 두시라고 불평하며 “차라리 엄마 자신을 믿으세요.” 핀잔처럼 쏘아붙인 적도 있다. 하지만 새벽마다 어머니의 비나리 소리에 잠이 깨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에는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두 분이 화목하게 살고 계셨다. 어느 날 외할머니 방에 갔더니 묵주를 손에 쥐고 눈 감고 기도를 드리시는 것이었다. 너무 낯선 모습에 얼른 방문을 닫고 나온 뒤부터 외할머니 곁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이신 외할머니와 유교 집안의 친할머니는 사이좋게 나들이도 가시고, 서로 챙기고 위해 주며 특별한 음식은 사부인 먼저 드시라고 양보하며 돈독하게 지내는 모습이 어린 마음에 아리송하면서도 흐뭇했다. 동네 어른들이 “어쩌면 그렇게 두 분이 친자매처럼 사이가 좋냐.”고 감탄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왜 외할머니가 그 시대에 천주교를 믿으셨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외할머니는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 있었는데 조그만 관직에 계시던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양자를 들였다고 한다. 양아들은 노름에 미쳐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끝내는 외할머니 집까지 날려버려서 대전 작은딸네에서 살고 계시다가 몸이 안 좋아지면서 큰 딸인 어머니가 모시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왜 가톨릭 신자가 되셨는지는 한 번도 여쭤보지 않았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 자긍심이 대단하셔서 풍비박산이 난 외갓집 이야기는 자식들에게 소상히 하지 않으시고 가끔씩 외할아버지의 인자하고 훌륭한 모습을 상기시켜 주실 뿐이었다. 외할머니가 이모 댁에 사실 때는 이종사촌들이 외할머니 손 잡고 성당에 다녔노라고, 그래서 지금까지 성당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밥상 앞에서 조용히 식사 기도도 하셨는데 누구도 그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 같이 즐겁게 맛있게 열심히 식사하고 각자 학교에 가고 일하고 모두 화목하던 분위기가 서리서리 남아 있다. 종교가 다른 할머니 두 분이 한 집안에서 서로 존중하며 평화롭게 지내신 걸 생각하면 신기하고 늘 포근한 마음이 일어난다.

독일 유학을 떠날 때 어머니는 “네가 공부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살아서 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하시더니 빨간 거미줄 같은 그림을 겹겹이 접어주시면서 부적이니 몸에 꼭 지니고 다니라고 당부하셨다. 공부하겠다고 머나먼 이국땅으로 떠나가는 딸을 위해 20리 길을 걸어서 큰 절 스님께 받아오신 어머니의 선물이었다. 그리고 타국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을 계속 읊조리라고 일러주셨지만 나는 그 말을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보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지극 정성, 걱정과 믿음, 모든 기원이 담긴 그 부적은 말없이 지니고 다녔다.

독일 유학 중 동네 목사님이 종종 저녁 식사에 초대해 주시고 장기간 휴가를 떠날 때는 화초에 물을 주라는 부탁도 하셨다. 그렇게 가까이 지내던 어느 날 목사님은 우리를 공동체 예배에 초청하셨고, 교인들에게 한국인 유학생이라고 소개하며 친하게 지내라는 광고도 하셨다. 예배가 끝나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악수를 청하며 서로서로 놀러 오라며 초대하겠다고 이름과 주소를 적어갔다. 덕분에 캠퍼스 친구들 외에 많은 사람과 가까이 지내며 독일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종교 간 다른 점을 인정하며 요즘도 종교포럼에 열심히 나가고 있다. 자유자재 걸림이 없는 마음을 가질 때 본래면목으로 돌아가 평온해지는 것이라 믿고 있다.

“세상을 살려면 참고 배려해야 한다. 일단 참는 게 제일이다. 참을 인(忍) 자 세 번만 생각해라. 사람 마음이 떠나면 그만이다.” 배려와 참음에 대해서는 부모님께 귀가 아프게 들으며 자랐다.

하지만 아직도 ‘나’를 다스리지 못할 때가 많다.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일을 당했을 때, 짊어지기 너무 무거운 짐이 주어질 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조용한 절을 찾아가 명상에 잠길 때가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나의 삶을 견뎌낼 수 있는가? 답답할 때 내 마음, 자연 그대로 머무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마음 마음 마음이여,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받아들이다가도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조차 용납하지 않으니.”(보리달마 〈안심법문〉) 마음공부 시간에 상도선원 미산 스님이 가르쳐 주셨다. “마음은 변화무쌍한 현상들을 따라 순간순간 움직이며, 좋은 것은 끌어안고 싫은 것은 밀쳐내며 쉬지 않고 생멸을 반복한다. 마음 수행의 과정은 즉시현금, 지금 이 순간, 산중이 아닌 일상 속에서 꾸준히 이뤄져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마음을 챙겨 대상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자아를 내려놓는 순간 진실과 자유가 드러난다.”

그대로, 지금 이 순간! 집중하며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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