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수학 교과서에는 기원전 3세기 무렵 그리스인인 에라토스테네스(B.C.E 276~B.C.E 194)가 원의 중심각과 호의 비례관계 그리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에서 하지 태양의 남중 각도의 차이점을 이용하여 지구의 둘레 길이를 측정했던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중학교 책에는 소개되지 않고 있지만, 에라토스테네스와 거의 동시대 그리스인인 아리스타르코스(B.C.E 310~B.C.E 230)는 지구가 하루에 한 번 자전하고 일 년에 한 번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지동설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개기월식 중에 달이 지구 그림자에 완전히 가리는 시간을 이용하여 지구와 달과 태양의 반지름 비를 계산하였다. 위 두 사람이 구한 값은 현대인이 구한 값과 대략 10% 이내의 오차를 보인다. 다시 말해서 기원전 3세기 그리스인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구와 태양과 달의 크기를 거의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시기는 고조선이 한 무제에 의하여 멸망당한 때(B.C.E 108)보다 대략 150년 전이다.

그런데 중학교 교과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나온다. 16세기 이탈리아(피렌체) 사람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자신이 만든 망원경을 이용하여 수평선 너머에서 항구로 들어오는 범선을 관찰했는데, 범선의 깃발이 먼저 보이고 배의 몸통은 나중에 보이는 것을 들어 지구가 정육면체가 아니라 둥글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지동설을 지지하다가 로마 교황청에 의하여 화형에 처할 위기에 놓였는데 결국 자신의 지동설을 철회함으로써 화형은 면하고 종신 가택연금을 당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코페르니쿠스는 천체를 관측하면서 화성이 공전궤도를 지나다가 갑자기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역행운동을 알아냈는데, 이는 종전의 천동설로는 설명 안 되고 지동설로써 설명된다는 것을 주장했다. 코페르니쿠스도 가톨릭교의 처벌이 두려워서 죽을 때까지 지동설을 발표하지 못하고 죽고 나서야 그의 주장이 책으로 발간될 수 있었다.

위의 역사적 사실에서 몇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첫째, 16세기 이탈리아의 과학 수준이 그보다 1,700여 년 전인 기원전 3세기의 그리스보다 뒤떨어졌다는 것이다. 1,700년 전을 우리 역사에 대입해 보면 신라 초기에 해당한다. 현재가 신라 초기보다 과학 수준이 떨어졌다는 말이 된다. 둘째,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는 에라토스테네스와 아리스타르코스를 몰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보다 1,700여 년 전 사람들이 주장하고 증명한 지구 구체설과 지동설을 다시 증명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36년 전 필자가 중학교 다닐 때나 지금이나 중학교 교과서에는 에라토스테네스와 갈릴레이의 지구 구체설을 동시에 실어놓았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중학교 교과서에서는 이 역사의 엄청난 모순과 의문에는 답하지 않고 있다. 도대체 서양에서는 1,7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엇 때문에 서양은 1,700년 동안 퇴보를 거듭했던 것일까? 이제는 이 의문점을 중학교 교과서에 실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후대의 교훈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

그리스 · 로마 시대는 인간의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인본주의 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자연의 모든 현상이 왜 그럴까 하는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하여 항상 의문을 가지고 연구하고 토론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그리고 이 과정을 ‘진리에 대한 사랑’ 즉 철학(philosophy)이라고 했다.

사실 그리스인들은 원추곡선론 등을 통하여 대수학의 도움 없는 순수 기하학으로 원, 타원, 쌍곡선, 포물선 등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내놓았다. 이러한 학문적 바탕 위에서 지구의 반지름과 지동설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현대인들도 감탄해 마지않는 그 아름다운 이론들이 왜 1,700년 동안이나 사라졌는가?

로마의 황제들은 대대로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를 수백 년간 탄압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274~ 337)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점점 강성해가는 기독교를 이용하여 쇠퇴하는 로마를 일으켜 보려고 기독교를 로마의 유일 종교 즉 국교로 인정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천도를 단행하여 동로마 시대를 열었다.

이때부터 유럽에서는 기독교 유일신 사상에 반하는 종교와 사상은 이단으로 금지되었고, 그리스 · 로마의 많은 문화재가 우상숭배 타파를 명분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리스 · 로마 시대 인물 조각상들의 팔다리가 많은 부분 절단되었거나 파괴된 채로 발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과정에서 성서의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이론만 살아남았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기독교의 천국을 지지하는 모델로 살아남을 수 있었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구약의 지구 중심 창조론과 연결되어서 1,400년 이상 절대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아르키메데스, 에라스토테네스, 아리스타르코스 등 유명한 철학자, 수학자들과 그들의 이론들은 철저히 유럽인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한마디로 기독교는 유럽인들에게서 ‘의심할 수 있는 자유’를 철저히 빼앗았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을 채워 넣었다. 약간이라도 의심하는 자들은 이단으로 몰아서 죽였다. 그리하여 이단 재판과 마녀사냥이 횡행했던 중세 유럽은 어떠한 사회였을까? 지옥이었다. 그렇게 유럽 사회는 1,700년 동안 퇴보에 퇴보를 거듭했다.

암흑의 유럽 사회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쳤으니 바로 십자군 전쟁이었다. 200년간 10여 회에 걸쳐 지속된 십자군 전쟁에서 유럽인들은 계속 튀르크의 이슬람에 패함으로써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고 신에 대한 의심이 생기게 되었다. ‘신의 군대가 왜 계속 패하기만 하는가?’ ‘신이 있기는 한가?’ 그리고 전쟁 중에 약탈한 이슬람 서적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1,000년 이상 잊고 있었던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럽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 등 많은 고대 그리스인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이슬람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관대해서 그리스 · 로마 문화를 모두 수용하여서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럽에는 신본주의의 기독교에서 벗어나 인본주의의 그리스, 로마 시대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생겼으니 바로 르네상스 운동이다. 이때부터 유럽은 서서히 중세의 암흑에서 벗어나서 문명의 세계로 나가게 되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슬람은 십자군 전쟁에서 거듭 승리함으로써 신본주의에 빠지게 되었고 종교 도그마에 젖어들었다. 그 결과가 현대 이슬람의 과격화와 배타성 그리고 호전성이다.

갈릴레이는 에라토스테네스를 몰랐다.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타르코스를 몰랐다. 그리하여 1,700여 년 전에 이미 그리스인들이 다 밝혀놓은 진리를 밝히기 위하여 평생 목숨을 건 연구를 하였던 것이다. 유럽에서는 이들의 노력을 바탕으로 이후에 데카르트(1596~1650), 뉴턴(1642~1727) 등 위대한 과학자들이 출현하여 수학과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유럽에서 1,700년의 퇴보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서 중세 1,000년의 암흑기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제 중학교 교과서에서는 에라토스테네스와 갈릴레이의 역사적 모순에 대하여 밝혀야 한다. 1,700년의 퇴보 이유를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의심하는 자는 불지옥에 떨어진다.’는 협박이 인류에게 미친 엄청난 퇴보를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의심하는 자에게 진보와 행복이 있다.’고 가르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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