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나가오 가진(長尾雅人) : 우에야마 슌페이(上山春平)

  * 이 글은 《中央公論》 89(5)호(1974년 발행)에 실린 나가오 가진(長尾雅人, 교토대학 명예교수)과 진행자 우에야마 슌페이(上山春平, 교토대학 교수)의 대담 〈アラヤ識と三性-唯識思想の基本構造〉를 번역한 글이다.   

대담자 약력

나가오 가진(長尾雅人, 1907~2005) / 일본 교토대학 명예교수. 불교학자, 티베트학자. 불교 경론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를 개진하였고, 또한 티베트학의 수립에도 공헌하였다. 주요 연구로는 《中観と唯識》 《摂大乗論 和訳と注解》 《仏教の源流-インド》 등이 있다.

우에야마 슌페이(上山春平, 1921~2012) / 일본 교토대학 명예교수. 철학자. 초기의 관심은 영미 프래그머티즘(pragmatism) 철학에 있었지만, 이후 일본을 중심으로 한 불교, 국가론, 전쟁론, 일본문화론 등으로 옮아갔다. 소위 ‘신교토학파’의 일원으로 꼽힌다. 주요 연구로는 《弁証法の系譜-マルクス主義とプラグマティズム》 〈深層文化論序説〉 〈仏教思想の遍歴-空海から親鸞へ〉 등이 있다.

“본래는 의타기(依他起)의 세계인데, 색안경을 끼고 보기 때문에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세계가 된다고 설명하는 것이 삼성설(三性說)입니다.”

알라야식에 대해

우에야마 슌페이
(上山春平, 교토대 교수)
우에야마: 오늘은 알라야식을 중심으로, 불교의 이론 중 아마도 가장 발달했다고 여겨지는 유식사상의 골자에 대해 찬찬히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알라야식이라는 것은 유식사상을 특징짓는 관념론적 철학의 토대이면서도, 철학을 넘어 종교적 실천으로서 유가행(瑜伽行), 즉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전환되는 장으로 여겨질 수 있는 측면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알라야식을 일반적인 의식의 저변에 존재하는 심층심리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만, 단순히 심리학이나 인식론의 관점에서는 파악할 수 없는 알라야식의 모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이것을 밝혀 주셨으면 합니다.

나가오:알라야식은 장식(藏識)이라고 번역되는데요, 흔히들 이 ‘장(藏)’이라는 것이 ‘여래장(如來藏)’이나 ‘지장(地藏)’이라고 할 때의 장(藏)과 같은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런데 이 두 장(藏)은 원어인 산스크리트어로 보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전자는 거주(居住)를 의미하는 ‘ālaya’의 번역이라면 후자는 자궁(胎)을 의미하는 ‘garbha’의 번역이기 때문입니다. 알라야식을 여래장과 같은 것으로 보면, 알라야식도 무언가 본래 청정한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알라야’의 동사형은 ‘가로막다’ ‘가까이 밀착하다’ ‘정착하다’와 같은 의미로, 요컨대 범부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알라야는 어떤 장소, 들어가는 것, 창고 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에야마: ‘알라야’라는 용례는 아함(āgama, 원시불교)에도 종종 보이지만, 개념어로서 정착된 것은 역시 아상가(Asaṅga, 無著)나, 특히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의 활동 시대 즈음부터이지 않습니까?

나가오:확실히 알 수 있는 건, 5세기경부터 사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에야마: 석가모니의 시대로부터 천 년이 지난 때부터군요.

나가오:알라야식은 매우 잘 알려진 용어인데, 알라야식을 논하는 기초가 바로 식론(識論, vijñāna-vāda)이라는 것입니다.

우에야마: 그 ‘식론’이라는 것을 저희가 알기 쉽게 바꾸어 말씀해 주신다면 어떠한 논의가 될까요?

나가오 가진
(長尾雅人, 교토대 명예교수)
나가오: 인식론(認識論), 혹은 의식론(意識論)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이것은 불교 이론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논의의 기저에는 유가행(瑜伽行, yoga), 혹은 수행이 있습니다. 그 유가행 중에서 특히 식(識)을 문제로 삼은 것입니다. 좌선을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번뇌가 움직이는 이 의식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죠. 그처럼 의식에 대한 고찰이 깊어지면 유식파(唯識派)라 불리는 측면이 강해집니다. 그런데 바수반두 이전 아상가의 시대, 혹은 《해심밀경(解深密經)》이라는 유식계 경전이 나타났을 즈음에는 유가행파로서 측면이 더 강했겠죠.(나가오는 수행론을 중심으로 한 ‘유가행파’를 그들의 이론에서 발달한 사상 체계로서 ‘유식파’ 혹은 ‘식론’과 구분하여 사용한다.—역자 주)

우에야마: 바수반두 때부터 식론적인 면이 강해졌던 모양이군요.

나가오:그렇죠. 그때 정점에 달함과 동시에 타락의 씨앗이 보이기 시작한 듯합니다.

우에야마: 당나라를 거쳐 일본에까지 들어온 법상종(法相宗)은 바수반두의 이론을 전수한 것이군요.

나가오:바수반두부터 다르마팔라(Dharmapāla, 護法)까지 걸쳐 온 것입니다.

우에야마: 일본에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알려진 ‘유식(唯識)’이라는 것도 역시 식론을 중심으로 한다고 보아도 좋을까요?

나가오:그렇습니다. 일본에는 “사분삼류유식반학(四分三類唯識半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분(四分)과 삼류경(三類境)을 습득한다면 유식을 반 이상 이해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분’이란 견분(見分), 상분(相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으로, 각각 ‘보는 것’ ‘보이는 것’ ‘그것을 자각하는 것’ ‘다시 자각함을 자각하는 것’의 네 가지 구분입니다. 이것은 현장(玄奘)이 번역 · 편집한 《성유식론(成唯識論)》에 나타난 독자적인 인식론입니다. 그리고 ‘삼류경’이란 인식의 대상을 세 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더 자세히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만, 어쨌든 ‘법상종’이란 복잡하고 까다로운 사분과 삼류경의 이해에 진력하는 것으로 됐다, 혹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지요.

우에야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식론에 치우친 탓에 유가행의 측면이 탈각되었다고 봐도 될까요?

나가오:예.

우에야마: 그 유가행이라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나가오: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 육바라밀(六波羅密)과 같은 수행이 모두 유가행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삼학이나 육바라밀은 원시불교에서부터 서서히 발달해 온 것으로, 수행자의 기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유의 근거로서 식론이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우에야마: 식론은 소승(小乘)의 부파불교에서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했다고 봅니다. 이것과 유식의 식론은 어떠한 차이점이 있을까요?

나가오:그것을 지금 자세히 검토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화엄경(華嚴經)》의 〈십지품(十地品)〉에 나타난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는 사유가 큰 근거가 됩니다.

우에야마: 화엄의 십지(十地, 보살수행의 10단계)라는 것은 유식사상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것 같군요. 근본 경전인 《해심밀경》을 시작으로 아상가의 《섭대승론(攝大乘論)》, 나아가 《성유식론》 등 유식의 중요 문헌들에서는 대부분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십지를 거론하고 있으니까요. 중관(中觀) 사상을 설한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 등도, 예를 들어 《라뜨나발리(Ratnāvalī)》 등에서 십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가 유식 계통의 사상가들처럼 식론을 전개했다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나가오: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식 계통의 사상은 나가르주나와 같이 공(空)의 논리에 입각하여 심(心)을 논한 것이지요. ‘공이다’ ‘공이라고 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심이다’라는 식의 사유입니다. 삼계(三界)가 유심(唯心)인데, 심 그것이 어떠한 의미에서 공이며, 어떠한 의미에서 공이 아닌가를 이해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방향에서 심을 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식론이 됩니다. 그런데 식론이 바수반두에 와서 정점에 달했을 때 알라야식이라는 개념이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이것이 으뜸가는 근거[藏]라면서 말이지요.
우에야마: 아상가의 경우에는 알라야식이 아직 그 정도로 큰 위치를 점하고 있지 않았던 건가요? 예를 들어 아상가의 《섭대승론》에는 제일 처음에 알라야식이 제시되고 있는데요.

나가오:물론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섭대승론》에서는 아직 “알라야(ālaya)라 해야 할까, 아다나(ādāna)라 해야 할까, 그저 심(心)이라 해야 할까 등을 음미해보면 그중 알라야라는 명칭이 가장 적절하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론적인 조직화라는 점에서 본다면, 역시 바수반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것이 분명하게 행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알라야를 축으로 이론 전체가 체계화되고 있는 것이지요. 대표적으로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등이 그러합니다.

우에야마: 알라야식은 제8식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런데 저것을 여덟 번째 식(識)으로 순서화한 것도 역시 바수반두에 와서 정착된 것인가요?

나가오:그렇습니다. 마나식(manas)을 일곱 번째 식으로 보는 것도 이때 정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섭대승론》에도 마나식이 나오지만 뭔가 어정쩡한 데다가 어떤 의미에서는 알라야식과 유사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언제나 무언가를 보거나 무언가를 듣고 있으니, 그와 같은 마음의 작용 자체를 식(識)이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일곱 가지로 나누든 여덟 가지로 나누든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나가르주나의 시대에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여섯 가지 인식으로 충분하였죠. 현상적으로는 이 여섯 가지로 전부 망라할 수 있습니다.

우에야마: 심리학적으로는 그것으로 거의 충분하겠군요.

나가오:여기에서 다시 제6식인 의식(意識)에서 자아(自我)를 생각하는 의식을 특별히 일곱 번째 마나식으로 독립시키거나, 혹은 제8식으로서 알라야식을 정립시키게 됩니다.

우에야마: 그 마나식이라는 것은 전6식인 의식과 무엇이 다른가요?

나가오:제6식인 의식(意識)의 원어는 mano-vijñāna인데, 이것은 마나식의 원어인 manas(생각하다)와 동일한 용어지요.

우에야마: 그런데 제7식으로서 마나식을 별개로 세운 것인가요?

나가오:유가행이라는 관점에서 말하자면 ‘자아의식’이 큰 문제가 됩니다. 예를 들어 수행자가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 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아의식입니다. 이것은 붓다 이래 무아(無我)의 사상적 관점에서 보면 부정되어야 할 대상으로 중요하게 여겨져 왔죠. 그렇기 때문에 제6식 중 별도로 자아의식만을 제7식으로 세웠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에야마: 실천상의 필요에 의해 나온 것이네요.

나가오:그렇습니다. 유식파의 경우 단순히 학문적으로 마음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 유가행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지요.

우에야마: 유가행을 실천하는 주체가 이론을 전개한 모양이군요.

나가오:저는 유가행자가 아니어서 그렇게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역시 유가행을 빼면 유식파의 특색이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 않습니까? 유가행을 뺀 유식파란 그저 심리학자 혹은 인식론자가 되어버리지요.

우에야마: 유가행, 즉 ‘요가’라 하면 인도에서는 불교의 테두리를 넘어 널리 수행의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지요.

나가오:유가행이란 요컨대 수행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름 아닌 선(禪)에 대한 수행을 말하는 것이지요.

우에야마: 바라문의 수행에도 적용할 수 있겠네요.

나가오:그렇게 봐도 문제가 될 건 없지만, 특히 불교 내부에서는 계 · 정 · 혜의 삼학이나 육바라밀 등을 유가행이라고 합니다.

우에야마: 후대의 염불이나 좌선 등도 유가행에 들어가겠군요.

나가오:들어갑니다. 불교를 이론적 부분과 실천적 부분으로 나눈다면, 실천적 부분에 유가행이라는 명칭이 붙는 것이지요.

삼성(三性)에 대해

우에야마: 불교가 목표로 하는 미혹에서 깨달음으로의 프로세스가 유가행, 이 유가행을 축으로 이론을 구성한다면, 이른바 ‘깨달음의 이론’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래 부처님께서 얻으신 깨달음이 어떠한 것인가는 사실 알기 어렵습니다. 아함(원시불교)의 가르침을 아비달마에서 체계화하거나, 중관(中觀)에서 그 체계를 부수거나 하는 소란을 거쳐 다시 한번 미혹에서 깨달음으로의 논리를 재구성한 것이 유식의 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 기본적 구조에 대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가오:저는 아직 깨닫지 못해서…… 사실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 정직한 대답이겠지요. 어쨌든 유가행의 경우 범부에서 부처가 되는 방향만이 인정됩니다. 즉, 깨달음의 논리 외에는 성립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가행이란 분명 그것을 위한 도(道)입니다. 그 경우 중관(中觀)의 공(空)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공성(空性)이란 깨달음의 한 경지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나가르주나의 중관은 공성을 저편에 두고 실제 논리 전개는 이편에서 행하고 있습니다. 중관에서는 저편과 이편의 관계에 대해서까지 논의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양방향의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것이 유식의 삼성설(三性說)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유식의 사상체계란 ‘식론’과 ‘삼성설’과 ‘유가행론’의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식론이 유식사상의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고 보지만, 유식파에는 ‘유가행파’라 불리는 측면도 있습니다. 또한 유가행이란 깨달음을 위한 행(行)이기 때문에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라는 전환이 고려되기 위해서는 삼성설을 그러한 사유의 근저에 두게 됩니다.

우에야마: ‘유가행파’라거나 ‘유식파’라고 불리는 경우는 있어도 ‘삼성’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경우는 없지요.

나가오:저는 오히려 삼성학파(三性學派)라 불려도 될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우에야마: 흥미롭군요. 바수반두 이후 인도에서는 디그나가(Dig-nāga, 陳那) 등 뛰어난 분들이 나타나 식론을 크게 발전시키셨고, 현장(玄奘)이라는 위대한 스님께서 나타나 바수반두 계통의 식론을 중국, 한국, 일본 등에 전파하였다고도 하는데, 우선 식론이라는 측면이 가장 눈에 쉽게 띄기 때문이겠지요?

나가오:그런데 식론은 독자적인 식론만을 전개할 수 있다 하더라도, 식론을 불교와 관련지어 보았을 때는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식론만으로는 깨달음의 논리에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삼성설을 근저에 둠에 따라 비로소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전환’의 논리에 식론이 편입될 수 있습니다. “전식득지(轉識得智)”라는 말이 있는데요, 미혹의 의식을 깨달음의 지혜로 전환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논리를 밝히는 것이 유식의 이론적 주장이며, 삼성설은 바로 그 점을 주제로 하는 것입니다.

우에야마: “전식득지”의 경우, 우선 ‘식을 전환시킨다’라는 의미에서 역시 식론이 전제되어 있는 것 아닌지요?

나가오:인식은 미혹의 세계에 속한 것이면서 깨달음의 지혜로 전환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식이 지혜가 되고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전환되는 프로세스가 유식의 이론에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는 세 가지 성질의 관계를 통해 밝혀집니다.

우에야마: 이제 삼성(三性)의 구성원들이 소개되었습니다. 이 세 가지 복잡한 술어의 산스크리트 원명과 그 의미를 먼저 소개해주실 수 있는지요?

나가오:우선 의타기성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parata-ntra, 모든 것이 타자에 의지하여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자존, 자립의 존재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서 존재한다고 할까요? 타자에 의해 있다는 것은 붓다 이래 연기(緣起, 인연)와 동일한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삼성설은 연기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유식파에서는 삼계유심(三界唯心) 사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의 유심적인 존재 방식이 곧 의타기적인 존재 방식이 됩니다.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어떠한 것을 보거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식파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모두 마음의 작용으로 포섭되며, 동시에 모두 타자에 의지해 있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은 항상 무언가를 분별(分別, 판단)하고 있으며, 이 분별에는 집착이 따르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이것은 안경이다’라고 분별하는 경우, ‘그것은 안경 이외의 것이 아니다’라든가 ‘이 안경은 나의 것이다’라는 등의 집착이 따르기 쉽습니다. 이처럼 분별에 집착이 따르는 것을 변계소집성이라 합니다.

우에야마: 변계소집성은 산스크리트어로 뭐라고 하나요?

나가오:parikalpita입니다. ‘pari’가 ‘변(遍, 두루)’, ‘kalpa’가 ‘계(計, 측량하다, 생각, 분별, 판단)’인데, 여기에 과거 수동분사형인 ‘ta’가 붙어 ‘kalpita’가 되면 ‘소집(所執, 얽매인)’이라는 의미가 도출됩니다. ‘변계소집’은 현장이 고안한 번역어인데, 매우 뛰어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에야마: 의타기성과 확실하게 구분이 되는군요.

나가오:의타기적인 세계에 집착을 덧칠한 것이 변계소집의 세계입니다. 의타기의 세계와 변계소집의 세계가 개별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의타기의 세계가 바로 변계소집의 세계인 셈이지요.

우에야마: 흥미롭군요. 후설(Husserl, Edmund, 1859~1938)의 현상학에 에포케(έποχή, 판단 정지)라는 용어가 있는데요, 보통의 상식적인 관점을 방기하고 다만 나타난 그대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의타기의 세계가 그런 것이군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에는 항상 끼고 있는 색안경을 벗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정말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겠군요.

나가오:보통은 변계소집의 세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지요. 갓난아기들은 집착이 없는 세계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우에야마: 성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정된 관점을 몸에 익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집착을 제거하는 것은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무조건적인 진실로 여겨지는 과학적 명제 같은 것도 인류사회의 상대적인 조건들 속에서 진실과 거짓의 가치가 부여됩니다. 그 때문에 이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변계소집의 덩어리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가오:분명 과학자도 보통의 상식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처럼 덧칠된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이 덧칠을 벗겨낼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에야마: 그 전에, ‘왜 벗겨내야 하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이라는 위대한 모범이 없었다면 과연 ‘벗어난다’는 발상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나가오:변계소집의 세계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어딘가에서 나오지 않았을까요?

우에야마: 물론 한계가 있겠지요.

나가오:그 한계를 타개하기 위해 색안경을 벗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본래는 의타기의 세계인데 색안경을 끼고 있기 때문에 변계소집의 세계가 된다고 설명하는 것이 삼성설입니다. 삼성설에 의하면, 일단 변계소집의 세계가 되어 버린 의타기의 세계가 ‘꽃은 붉다, 버들은 푸르다.’와 같은 근원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원성실성일 뿐입니다.

우에야마: 집착이 떨어졌다고 할까, 대상이나 자아에 대한 집착이 없을 때 변계소집 세계가 원성(圓成)의 세계로 전환되는 것이군요.

나가오:탈락(脫落)하는 것입니다. 탈락이란 색안경을 벗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성이 된다.’는 말은 ‘의타기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매화를 찾아 나섰다가 돌아와 보니 자신의 정원에 매화가 피어 있더라’는 식이지요.

우에야마: 그런데 원성실성의 원어는 무엇입니까?

나가오:pariniṣpanna. “pari”는 ‘parikalpita(변계소집)’의 ‘pari’와 같이 ‘두루’라는 의미입니다만, 여기에서는 ‘원(圓, 원만한)’으로 번역되었습니다. ‘niṣpanna’는 ‘걷다’ ‘완성하다’라는 의미가 있는 어근 ‘pad’에 과거수동분사형이 붙어 ‘걸어서 완성된’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완성하여 진실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원(圓) · 성(成) · 실(實)”이라 번역한 것입니다.

우에야마: ‘수행하여 도달했다’는 의미겠군요.

나가오:그렇습니다. 수행이 들어오지 않으면 원성실성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수행에 의지해 원성실성에 도달했을 때, ‘본래 의타기인 세계가 뒤틀려 변계소집의 세계가 되며, 뒤틀린 세계를 바로잡는다면 원성실의 세계가 현현한다.’는 삼성의 논리가 밝혀집니다.

우에야마: ‘뒤틀렸다’거나 ‘뒤틀림을 바로잡는다’는 것이 의타기, 즉 연기(緣起)에 입각한다는 말씀이군요. 이제까지의 말씀을 추려보면 삼성설은 나가르주나의 《중론》에서 연기를 중심으로 한 사상과 같지 않습니까?

나가오:조금 거칠게 말하면, 나가르주나는 연기(緣起)가 바로 공(空)이라고 말했습니다. 붓다께서 설하신 ‘연기(인연)’ 사상에서 공을 찾아낸 것이지요. 이와는 달리 유식파는 연기를 의타기로 파악하고, 삼성설을 따라 유가행에서 전식득지(轉識得智)의 논리를 추구하였죠.

우에야마: 어쨌든 연기 사상이 붓다와 나가르주나, 유식파를 관통하고 있고, 그 일관된 축에 유식파의 삼성설을 자리매김할 수 있군요.

나가오:그렇게 이해해도 좋겠군요. 다만 나가르주나의 경우는 미혹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를 속제(俗諦)와 승의제(勝義諦)라는 이세계론(二世界論)적인 방식으로 파악한 반면, 유식파는 삼성이라는 세 가지 조목의 관계로 파악하였습니다.

우에야마: 나가르주나의 중관 논리는 칸트(Kant, Immanuel, 1724~ 1804)의 이율배반과 같이 긍정도 할 수 없고 부정도 할 수 없는 곳으로 몰아넣어 세속의 관념을 파괴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유식의 삼성 논리는 의타기라는 모습에서 변계소집이라는 소외된 형태로 변화되어 있던 것이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함에 따라 원성실에 이른다는 점에서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1770~ 1831)의 정명제(An-sich), 반명제(Für-sich), 종합명제(An-und-für-sich)라는 트리아데(triad, 헤겔의 변증법에서 정-반-합을 구성하는 세 개의 명제—역자 주)와 비슷한 사유로 보입니다. 오직 논리형식만을 본다면 말이죠.

나가오:진리의 세계를 저쪽 편에, 허위의 세계를 이쪽 편에 두는 사고는 이세계론(二世界論)적인 구조입니다. 플라톤 같은 경우도 그러하지요. ‘허위의 세계에서 진리의 세계로 나아간다’ ‘스스로 진리를 완성한다’는 사고방식을 취하면 두 가지의 세계를 매개하는 제3의 모멘트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삼성설의 특색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 원성실성의 원어인 pariniṣpanna는 ‘길(道)을 걸어 나아가 완성하였다’는 의미로, 이쪽이 나아가 완성하지 않는다면 원성실성은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우에야마: 그러한 방식으로 삼성설을 이해한다면, 변계소집의 세계를 의타기로 인식하는 이론적 측면으로서 식론을, 변계소집성에서 원성실성으로 전환을 이행하는 실천적 측면으로서 유가행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즉, 식론과 유가행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삼성설에 들어 있다고 봐도 되겠군요.

나가오:보통 삼성은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이라는 순서로 쓰여 있기 때문에 의타기성이 미혹과 깨달음의 중간에 있는 것처럼 설명되는데요, 이 세 가지는 그처럼 단계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에야마: 선생님은 ‘주체가 변하면 세계가 변한다’는 관점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유가행을 통해 주체가 변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군요.

나가오:똑같은 하나의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이 변하는 것입니다. 본래 의타기로서 세계가 변계소집의 세계가 된 것이므로 이것을 전환시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요.

우에야마: 본래의 모습인 의타기로 파악하는 것이 원성실성이라는 말이군요. 의타기를 장애가 되는 방식으로 파악하는 한 의타기가 아닌 변계소집이 된다, 의타기를 의타기로 파악하는 것이 원성실성이다, 이렇게 보면 되겠습니까?

나가오:하나 더 말씀드리면, 변계소집성으로부터 원성실성에 이르는 것을 ‘무분별지(無分別智)’ 원성실설에서 의타기성에 이르는 것을 ‘후득지(後得智)’라 합니다.

우에야마: 의타기를 파악하는 것이 후득지라는 건 무슨 의미지요?

나가오:후득지란 무분별지를 얻은 후에 얻게 되는 세간적인 지혜입니다. 이처럼 후득지는 보살에게만 있는 지혜입니다. 범부에게는 없습니다. 범부는 곧바로 변계소집의 방향으로 가 버립니다.

우에야마: 무분별지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경지입니까?

나가오:미혹의 인식에서 깨달음의 지혜로 전환, 즉 전식득지의 내용에 무분별지와 후득지가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우에야마: 후득지를 포함한다면 세속의 미혹된 세계로도 길이 닿게 되겠네요.

나가오:나가르주나의 중관 사상에서는 세속의 세계와 승의의 세계는 절대적으로 단절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유식의 입장에서는 삼성설에 의해 두 세계에 다리를 놓을 수 있게 됩니다.

우에야마: 후득지가 있다면 인식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필요성을 가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미혹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안다는 의미에서……. 《해심밀경(解深密經)》에 ‘삼시교판(三時敎判)’이라는 것이 있지요. 아마 삼성을 설한 직후였다고 기억하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쓰여 있습니다. 선생께서 이것을 새삼 논의하실 필요는 없으시겠지만, 독자를 위해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러저러한 말씀을 하셨다 해도 처음에는 사제(四諦)를 설하셨다.

나가오:고(苦) · 집(集) · 멸(滅) · 도(道)의 사제 말씀이지요.

우에야마: 소승(小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할 이들을 위하여 이것을 설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승(大乘)에서 수행하는 이를 위해서는 모든 법(法, dharma)에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설하셨다고 합니다.

나가오:즉 제법개공(諸法皆空)이라는 것이네요.

우에야마: 그런데 이 공(空)이라는 것을 완전하지 않은 형태[不了義—역자 주]로 설하셨다고 했어요. 그리고 세 번째로 소승과 대승을 모두 포함한 일체승(一切乘)에 맞추어 모든 법에는 자성이 없다는 것을 완전한 형태(了義-역자 주)로 말씀하셨다고 쓰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 번째의 가르침이 유식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가르침은 아마도 중관을 가리키는 것이겠지요. 유식 관련 논서를 보면 “일체승을 위해서”라는 말이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그것은 단순히 소승과 구별되는 대승이 아닙니다. 모든 입장에 진리를 나누어 준다고 할까요? 그러한 경향이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혹의 세계라는 광경에 깊이 들어간 형태인 식론이 수반되어야 할 필연성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가오:유식파는 일승(一乘)이 아닌 삼승(三乘)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중관파가 삼승은 그 자체로 모두 같은 것이며 본래 일승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유식파는 개개인의 호오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삼승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조금 전에 ‘일체승’이라고 말씀한 것을 보통은 ‘삼승’이라고 합니다.

우에야마: ‘삼승’은 성문(聲聞) · 연각(緣覺) · 보살(菩薩)이지요.

나가오:예, 그렇습니다.

우에야마: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을 볼 때도 〈성문지(聲聞地)〉 〈독각지(獨覺地)〉 〈보살지(菩薩地)〉 등등을 자세하게 분류하여 열일곱 개의 지위로 나누고, 유가행의 단계를 상세하게 논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무언가 대단한 열정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목표는 보살지(菩薩地)에 있다 하더라도 말이죠.
나가오: 그런데 한편으로는, 보살지도 성문지도 병렬적으로 설정되어 있으니까요.

우에야마: 성문지에 대해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지요.

나가오:그렇습니다. 재미없는 이야기이긴 해도.

우에야마: 식론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부분과 대단히 깊이 연관되어 있는 곳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요? 식론이란 어쨌든 알라야식에서 시작하여 미혹의 세계로 내려가는 것으로 서술되고 있지요.

나가오:나가르주나의 중관 사상은 변계소집적인 세계의 논리를 희롱하며 원성실의 세계, 공(空)의 세계를 그저 가리킬 뿐입니다.

우에야마: 변계소집적인 세계의 논리를 다루면서 그것을 논파할 뿐이지요.

나가오:그런데 변계소집이라는 미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미혹된 세계의 실상을 밝혀야 합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유식 사상의 식론이 나타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식의 갖가지 모습을 분석하여 알라야식에 관한 논의에까지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인식을 전환시켜 전식득지(轉識得智)한 경우, 깨달음의 지혜라는 구조는 미혹된 인식의 구조와 같습니다. 즉 미혹의 세계를 규명하여 그것을 완전히 뒤집기만 하면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가 됩니다. 비유를 들어보지요. 본래 의타기의 세계에는 무언가 전류처럼 보이는 것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전류는 항상 변계소집 쪽으로 향하는 전류입니다.

우에야마: 인간의 세계에서는 한 사람 몫을 하는 사회인으로서 상식을 몸에 익힌 것이 변계소집을 몸에 익힌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항상 모두가 그러한 방향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나가오:그 전류의 방향을 뒤집은 것이 깨달음으로의 길이 됩니다.

우에야마: 변계소집에서 의타기로.

나가오:그러한 방향으로 전류의 흐름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에야마: 베르그송(Bergson, Henri, 1859~1941)이나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1870~1945, 철학자이자 ‘교토학파’의 창시자—역자 주) 선생이 ‘순수지속(純粹持續)’ 혹은 ‘순수경험(純粹經驗)’이라는 개념을 들어 상식과 과학의 편견을 버리고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 것과 목적하는 바에 공통점이 있군요. 적어도 일상의 타성(惰性)이라는 방향을 바꾸고자 하였다는 부분은…….

나가오:보통은 변계소집성에 해당하는 미혹의 세계와 원성실성에 해당하는 깨달음의 세계라는 두 가지로 생각하지만, 삼성설의 특징은 이것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우에야마: 원성실성과 변계소집성이라는 양극단을 매개하는 의타기성이 도입됨에 따라 미혹의 세계를 규명하는 동시에 그것을 전환시켜 깨달음의 세계를 분명하게 묘사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나가오:《우파니샤드(Upaniṣad)》에서 “네띠, 네띠(neti, neti)”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 하여 부정의 사유를 보이고 있지만, 이쪽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 외에 향해야 할 세계를 밝히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나가르주나의 경우도 그렇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쪽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상식을 모조리 부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쪽의 세계를 규명하지도, 저편의 세계를 규명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째서 변계소집의 세계가 생겼는가 하면, 의타기가 그러한 자기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변계로의 타락이라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규명함에 따라 역전의 가능성도 비로소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우에야마: 삼성설이란 식론 등에 대한 일종의 메타이론(주어진 이론에 기초가 되는 이론)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즉 삼성설에 기반해 식론을 이해함에 따라 식론이 깨달음의 논리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나가오:그렇지 않고 식론만 설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우에야마: 잘못했다간 아비달마의 방향으로 질질 끌려가 버리겠군요.

나가오:불교가 아니라 그저 학문이 되어버릴 겁니다.


삼성설과 알라야식

우에야마: 저희가 유식 관련 고전을 접했던 경험에서 말씀드리면, 《해심밀경》에서 시작되어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이나 《섭대승론》을 거쳐 《유식삼십송》이나 그 해설서인 《성유식론》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식론, 삼성설, 유가행론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데요, 오늘은 먼저 식론을 중심 테마로 알라야식의 문제를 다룬 후 삼성설을 논의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맺는 의미에서 다시금 알라야식의 문제를 삼성설과 식론의 관계 속에서 검토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가오:저는 삼성설이 식론과 유가행론의 근거가 되는 사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성설에서 알라야식론이 도출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알라야식의 구조나 작용 등을 고찰할 경우 반드시 삼성설적인 사유방식에 근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에야마: 조금 전 자아의식이 유가행의 과정에서 문제가 되어 마나식을 따로 설정하였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알라야식을 세운 이유도 무언가 유가행의 측면에서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유식의 이론에는 종자(種子)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행위를 하면 그것이 잠재적인 형태로 남아 다음의 행위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한 잠재적 형태를 종자라고 명명합니다. 알라야식이란 그러한 종자를 거두는 창고로 생각되는데, 미혹에서 깨달음으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반드시 미혹된 종자를 없애야만 한다고 생각됩니다. 마나식은 그러한 창고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알라야식이라는 심층의 창고를 세워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은 아닐까요?

나가오:《성유식론》에 “종자는 현행(現行)을 낳고, 현행은 종자를 훈습(熏習)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현행’ 즉 목전에서 지금 무언가를 보고 듣는 작용의 배후에 그 작용의 잔존 효과가 축적되는 작용, 다시 말해 ‘종자를 훈습하는’ 작용을 알라야식이라 합니다. 혹은 ‘종자’가 ‘현행’으로 현현하는 작용을 들어 그러한 현행의 배후에 있는 작용을 가설적으로 알라야식이라 명명한 것입니다. 알라야식을 창고에 빗대어 무언가를 여기에서 꺼내거나 무언가를 여기에 거두는 장소로 생각한다면, 어떤 고정된 장소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고정적 실체를 엄격하게 단속하는 불교의 이론으로서는 맞지 않죠.
인식이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만,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5식입니다. 눈, 귀, 코, 혀, 몸이라는 다섯 가지 감관[五根]과 짝하는 인식이 그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성냥을 보는 하나의 작용이 있지요, 이 ‘본다’는 것이 식(識)입니다. 그런데 이 ‘보는 작용’은 동시에 그 작용의 잔존 효과를 어딘가에 축적하는 작용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본다’는 작용 그 자체를 어딘가에서 끄집어내는 작용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도 여겨집니다. 즉 ‘본다’는 작용이 동시에 그 작용을 어딘가에 축적하는 작용과 그 작용을 어딘가에서 끄집어내는 작용을 함께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현재의 작용은, 미래로의 방향을 가진 작용과 과거로부터의 방향을 가진 작용을 그 배후에 함께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배후의 작용을 알라야식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알라야식은 5식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인식 안에서 5식과는 달리 기능하는 측면에 불과합니다.

우에야마: 예를 들어 ‘성냥을 본다’는 극히 단순명쾌한 작용의 배후에 ‘체험의 축적’이라는 측면을 고려한 것이군요.

나가오:무언가를 본다는 단순한 작용이 과거의 체험에서 나온 ‘종자’로부터 생기고, 다시 현재의 작용이 ‘종자’로 축적됩니다. 그 ‘종자’를 저장하는 장소가 어딘가에 있어야 할 텐데, 그것은 머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심장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딘가에 창고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니라 다만 들어가는 작용과 나가는 작용, 즉 ‘현행이 종자를 훈습한다’는 작용과 ‘종자가 현행을 낳는다’는 작용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작용의 측면(aspect)을 알라야식이라 합니다.

우에야마: 다시 말해 무엇을 보는 경우 ‘본다’라는 실질적(actual)인 작용은 ‘실질적인 것에서 잠재적(potential)인 것으로’ ‘잠재적인 것에서 실질적인 것으로’라는 두 방향의 작용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이군요. 이처럼 실질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즉 현실태와 잠재태가 교류하는 측면을 알라야식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군요.

나가오:현재를 중심으로 하되, ‘과거에서부터의 방향’과 ‘미래로의 방향’을 내포하는 작용으로 알라야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에야마: 일종의 시간 원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군요. 현재의 순간은 독립적인 순간이 아니라 과거를 업고 미래를 마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나가오:앞서 알라야식은 ‘종자가 현행을 낳는다’는 방향과 ‘현행이 종자를 훈습한다’는 방향이라는 두 가지 작용을 담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바수반두의 《유식삼십송》에서는 전자를 ‘이숙(異熟, vipāka)’이라 하고 후자를 ‘일체종자(一切種子, sarvabījaka)’라 합니다.

우에야마: ‘이숙’은 기묘한 느낌이 드는 말이네요.

나가오:행한 것이 다른 형태로 남아 있다, 다르게(異) 익는다(熟)는 말입니다. vipāka의 ‘pāka’란, 예를 들어 쌀을 부글부글 끓여 먹을 수 있도록 부드럽게 만드는 것 같은 어감이죠. 알라야식은 이숙식(異熟識)으로서 훈습된 종자입니다. 어떤 향을 옷에 배도록 하면 본래의 향이 없어진다 해도 그 향이 옷에서 발산됩니다. 이 경우, 옷에 향기가 배는 것이 이숙식의 측면이며, 옷에서 향기를 발산하는 것이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의 측면입니다. 즉 알라야식은 이숙식임과 동시에 일체종자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알라야식 또한 일종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무언가 인식의 대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알라야식이라는 인식은 대체 무엇을 보는 것인가, 이 점이 문제가 됩니다. 이에 대해 바수반두 저 《유식삼십송》의 산스크리트본에는 “알 수 없는 집수(執受)와 처(處)의 요별(了別)이다”라 쓰여 있습니다. 이 문장은 복잡한 논의를 담고 있는데요, 가장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처의 요별’이란 외부 혹은 환경에 대한 인식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산, 저 강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외부’라는 인식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집수’는 내적인 것입니다. 이처럼 안과 밖을 모두 인식하는 성질 때문에 ‘알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眼識] ‘그것은 성냥이다’라고 생각하는[意識] 등의 인식과는 달리 알라야식에는 그와 같은 드러난 형태가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고 말한 것이지요. 여기에서 ‘집수’는 다시 종자와 유근신(有根身)으로 나뉩니다. 종자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지만, 유근신은 흥미로운 개념입니다. 이것은 몸을 말합니다. 인간의 몸이란 단순히 손이 여기에 있고, 발이 여기에 있으며, 머리는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몸이란 내면적으로 통일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손과 발을 잘라 그 주변에 늘어놓는다 해도 이것을 몸이라고는 부르지 않습니다. 자동차도 차바퀴를 저기에 두고 차체를 여기에 둔 것을 자동차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의 통일된 것으로서 모여야만 합니다. 특히 몸이란 그러한 것입니다. 그 몸을 내면으로부터 파악할 경우에 ‘유근신의 집수’가 있습니다.

우에야마: 집수의 산스크리트어는 무엇인가요?

나가오:upādāna입니다.

우에야마: 어떠한 의미인가요?

나가오:‘잡다’라거나 ‘지니다(지키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집지(執持)’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모친의 태내에서 점점 커져가지만, 항상 개체로서 통일되어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 집수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에야마: 일종의 주체성의 원리로 보아도 될까요?

나가오:그러나 마나식의 자아와는 다릅니다. 알라야식은 어쨌든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이지만, 그 대상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몸을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몸을 본다고 하더라도 몸의 외부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보는 것입니다. 이 몸에 자신의 업(業)이 훈습되어 그 훈습된 것(종자)으로부터 이 몸이 행동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그 창고(알라야)로 들어가고 그 창고에서 나오는 의미가 육신 자체에 있게 됩니다. 인간의 육체 또한 찰나멸(刹那滅) 하는 것이니, 찰나마다 끊임없이 세포가 변한다 하더라도 전체가 통일되고 집수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라야식의 작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에야마: 그렇다면 개체화의 원리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있겠군요.

나가오:있지요. 거기에서 신체에 관한 논의를 전개해도 좋겠지만, 거기까지 저희의 머리가 돌아가지는 않으니 다만 육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자아의 도구인가, 동물이라면 동물의 육체와 인간의 육체가 객관적(objective)으로는 같은 기능(function)을 가진다 해도, 그러나 역시 말씀하신 것처럼 개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역시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랄까, ‘너’가 아니라 ‘나’랄까, 이런 통일이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알라야식은 통일의 원리로서 이해된다고 봅니다.

우에야마: 철학의 논의 주제로 심신론(心身論,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논의—역자 주)이라는 것이 있는데, 알라야식은 심신론의 관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인 사유방식이군요. 이것을, 예를 들어 프로이트를 잘 이해한 사람과 유식을 잘 이해한 사람이 협력하여 파고든다면 상당한 수준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가오:알라야식이란 밖으로는 무언가 외부라는 것을 의식합니다. 그리고 안으로도 자신의 육체, 혹은 과거를 등에 지고 미래를 향해 발동하는 종자를 통일시키는 작용으로서 존재합니다. 이것을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나식입니다. 그 경우에는 아치(我癡)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가 항상 달라붙어 일어납니다. 자아에 대한 어리석음, 집착, 교만 그리고 애착의 네 가지입니다.

우에야마: 그렇다면 마나식이란 앞서 말씀하신 변계소집적인 작용이라 할 수 있겠군요.

나가오:그렇습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마나식과 알라야식은 모두 ‘인식’이라는 점에서 의타기적입니다. 자아의식인 마나식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항상 변계소집적인 작용입니다. 그러므로 제8식인 알라야식, 제7식인 마나식, 제6식인 의식(意識), 눈 · 귀 · 코 · 혀 · 몸의 5식은 전식득지에 의해 네 가지 깨달음의 지혜가 됩니다. 알라야식이 대원경지(大圓鏡智), 마나식이 평등성지(平等性智), 의식(意識)이 묘관찰지(妙觀察智), 5식이 성소작지(成所作智)가 되는 것입니다. 대원경지란 마치 거울이 모든 것을 공평무사하게 비추는 것과 같이 일체의 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평등성지란 ‘나’ ‘저것’이라는 차별이 없어 평등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묘관찰지란 교묘하게 관찰한다, 성소작지란 지은 것 모두를 완성한다는 말입니다.

우에야마: 여기에 분명하게 삼성(三性)의 관점이 들어가 있군요.

나가오:삼성의 논리가 없다면, 인식에서 지혜로의 전환이 용납될 수 없습니다. 범부가 머무는 변계의 세계는 어디까지나 변계의 세계일 뿐 어떠한 전환도 일어나지 않겠지요.

우에야마: 네 가지 지혜도 유식에서 처음 나온 것인가요?

나가오:적어도 네 가지 지혜를 조직적으로 제시한 것은 역시 유식파겠네요. 그렇지 않으면 나올 수 없지요.
우에야마: 이런 논의는 식론의 범주를 넘어 선 것이군요.

나가오:그렇기 때문에 알라야식의 구조란 그 자체로 불지(佛智)의 구조가 된다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전까지 6식이었던 것에 ‘7식이 발견되었다’ ‘8식이 발견되었다’라고 한다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여 심지어 제9식인 아마라식(amala-vijñāna)을 설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진제(眞諦, 499~569, 인도 출신의 역경승—역자 주) 계통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진제의 실제 의도는 알라야식이 전식득지한 것을 아마라식이라 부른 것입니다.

우에야마: 대원경지와 비슷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군요.

나가오:그렇게 봐야 합니다. 알라야식의 내부에 다시 아마라식이 있다고 이해하면 곤란하지요. 그것을 본성청정심(本性淸淨心)이라고도 하는 것이죠. 범부의 마음은 오염되어 있지만 마음 그 자체는 본래 청정하다, 그것을 아마라식이라 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을 제9식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전식득지라는 유식의 분석에 입각한 것이라면 문제가 없습니다. 8식과 병렬된 제9식이라고 이해할 필요는 없겠지요. 8식 전체의 본래 모습이 의타기적으로 청정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괜찮습니다.

우에야마: 그러한 의도에서 알라야식을 파악하고 나아가 그것을 삼성설의 관점에서 다시 파악하여 바로잡는다는 것이겠군요.

나가오:그렇습니다. 삼성과 관계없이 그저 심리분석의 의미만을 추구한다면 본래 유가행파에도 유식학파에도 없는 관점이 되어버리지 않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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