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보고 : 한국불교 희망을 찾아서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마라.
그리하면 마침내 원한은 그치리라.
참고 인내하면 원한은 그치게 되나니
이것이 부처님의 법이다.
— 《출요경》

《본생경》 제536화 ‘쿠나라의 전생 이야기’에는 부처님이 석가족과 구리족 간의 물로 인한 분쟁을 조정한 이야기가 나온다. 부처님의 동족인 석가족과 외가 쪽인 구리족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석가족이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물을 대기 위해서는 인근의 강물을 끌어와야 했다. 그런데 이 강물은 석가족만 쓰는 것이 아니라 이웃 부족인 구리족도 함께 쓰고 있었다. 비가 많이 올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가뭄이 지속되면 강물의 물을 끌어 쓰는 문제로 석가족과 구리족은 분쟁을 겪어야만 했다. 구리족은 강에다 둑을 쌓아 석가족의 물길을 막고 자신들의 논에만 물을 대려고 하였다. 그러자 석가족은 몰려가 구리족이 쌓은 둑을 허물고 새로 둑을 쌓아 자신들의 논에만 물을 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두 부족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급기야는 살상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부처님은 대치하고 있는 그들을 찾아갔다. “그대들이여 강물이 소중한가? 그대들 몸에 흐르는 피가 더 소중한가? 사소한 강물 가지고 소중한 생명을 희생시키려 하는가?” 그들은 부처님의 중재를 받아들여 하루씩 번갈아 강물의 물을 대기로 합의하였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한 민족인 남과 북이 이념분쟁으로 원수가 되어 총부리를 마주한 지 그 얼마인가요.
‘그대들이여 강물이 소중한가? 그대들 몸에 흐르는 피가 더 소중한가? 사소한 강물 가지고 소중한 생명을 희생시키려 하는가?’ 하신 부처님의 말씀이 더욱 절절히 다가옵니다. 우량사는 노래합니다. “봄 산에는 좋은 일도 많아 느끼고 즐김에 밤 되도록 돌아가길 잊었네. 물을 손에 담으니 달이 손에 있고 꽃과 같이 노니 꽃향기가 옷에 가득하네. 흥겨워 먼 곳 가까운 곳 마구 다니다가 떠나려 하니 향기로운 풀 아쉬워라. 남쪽으로 종소리 나는 곳 멀리 바라보니 누대가 짙은 푸른 산기운 속에 보이네.”
— 설한당에서 장곡 합장

4월 26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이루어진 다음 날 아침, 백제불교회관 관장 장곡 스님이 이른 아침에 올린 글이다. 스님은 매일 아침 경전 속에 나오는 일화를 곁들여 부처님 말씀을 들려준다. 이 글들은 페이스북과 카카오스토리 등 SNS에 올라온다. 또 스님과 친분 있는 사람들의 개인 이메일로 보내지고 백제불교회관 다음카페에도 아침편지로 소개된다. 백제불교회관에 소속된 대부분의 불자는 스님의 아침 글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스님의 글은 하루 만에 ‘좋아요’를 찍는 팔로워가 수백에서 수천 명에 이른다.

백제불교회관 개관 이전의 역사

설한당(雪寒堂)은 백제불교회관에 있는 장곡 스님의 방 이름이다. 창문도 없이 사방이 막혀 있는 방에서 스님은 매일 온라인을 통해 부처님의 말씀을 소개한다. 스님의 아침 글은 백제불교회관과 역사를 같이한다. 백제불교회관 카페 회원 수는 현재 2,595명으로 집계된다. 여기에 스님의 SNS 팔로워를 합하면 1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매일매일 스님과 글로 만나고 있다.

백제불교회관은 2001년 3월 28일 대전시 서구 둔산동에서 개관식을 갖고 출범했다. 6층짜리 상가건물 가운데 3층과 6층을 임대해 3층은 회관과 사무실로, 6층은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1997년 12월 정부대전청사가 준공돼 대전의 새로운 중심 도심지로 주목을 끌었던 둔산동에 이웃종교 시설들의 입주는 활기를 띠었으나 불교계는 전무했다. 신도시로 급부상할 둔산동 신시가지에서 불교 포교를 담당할 도량이 없는 현실은 낙담 그 자체였다. 실제로 현재 둔산동은 정부청사를 비롯해 대전광역시청 등 국가행정기관과 대전고등법원, 대전고등검찰청, 대전지방경찰청, 대전지방교육청 등 사법 · 교육행정기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대기업과 금융기관, 백화점, 대형종합병원, 대형마트 등 업무지구가 형성된 대전광역시의 최고 도심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렇게 변화하게 될 곳에 포교당 하나 들어서지 않는 안타까운 현실은 포교에 둔감한 교계의 현주소이기도 했다. 당시 계룡산 갑사 주지로 있던 장곡 스님이 나섰다. 장곡 스님은 1981~84년 논산 관촉사 주지로 부임했을 때 논산 읍내에 포교당과 현정유치원을 개원한 바 있다. 고란사 주지로 있던 1990년 4월엔 부여불교문화원을 만들어 일선의 현장포교를 지휘한 전력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백제불교의 중흥을 늘 가슴에 품고 있던 스님에게 새로운 신시가지로 변모하는 둔산동은 포교의 황금어장일 터였다. 비록 임대 수준의 포교당이지만 백제불교회관을 개관하고 대전과 충남 지역 전(全) 신행단체를 상대로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때맞춰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이 백제불교회관을 ‘전법도량’으로 지정했다.

백제불교회관이 개관되자 대전 지역 신행단체의 활동이 활기를 띠게 됐음은 물론이다. 이들 신행단체는 모두 백제불교회관에 적을 두고 연합회 형태로 자단체를 운영했다. 이전만 해도 서로 분산돼 있어 정보교환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유기적인 연대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정보를 교환하고 신행 활동을 교류하며, 나아가 회관에 등록된 20여 개 직장 · 직능단체가 연합으로 월 1회 합동법회를 실시하는 등 대전 · 충남 지역에 새로운 불교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백제불교회관에 참여한 초기 신도단체는 백제불교사상연구회를 비롯해 대전정부청사 공무원 불자 모임인 반야회, 중도불교문인회, 중앙불교문화연구소, 대전교수불자회, 한국대학생불자연합회 대전지부, 아미타상조회, 대전북부경찰서불자회, 대전시중구청불자회, 대전세무서불자회, 대전운전기사불자회 등 20여 개다. 대전불교언론인회는 백제불교회관 개관에 힘입어 창립한 대표적인 신행단체로 백제불교회관을 지역사회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둔산동에서 한때 오류동으로 이전했으나 2007년 다시 지금의 둔산동으로 돌아왔다.

본래 백제불교회관 개관 배경엔 백제불교사상연구회가 있다. 장곡 스님이 부여 고란사 주지로 재임하던 때 만든 연구회다. 부여는 ‘사비’로 불리던 백제의 옛 수도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 때 3천 궁녀가 백마강에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 아래 고란사에서 스님은 찬란했던 백제불교의 영화가 재현되기를 꿈꿨다. 국보 제9호 부여 동남리 정림사지 5층석탑을 둘러보며 불교문화의 중흥도 아울러 소망했다. 그래서 1989년 지역 인사이면서 전문가를 중심으로 만든 게 백제불교사상연구회다. 당시 충남대 사재동 국문과 교수, 이평래 철학과 교수 등의 학자와 신도성 〈대전일보〉 편집부장 등 언론인이 참여했다.

이들의 자문과 도움으로 1991년 월간 《백제불교》를 창간했다. 《백제불교》는 제호에 걸맞게 백제불교의 중흥을 도모하는 특집을 이어나갔다. 1993년 ‘백제불교 부흥,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한 신년좌담을 특집으로 게재했다. 이 좌담엔 발행인 장곡 스님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부여불교문화원장 성수 스님, 강건기 전북대 철학과 교수, 윤석문 삼미고창비행장 공항장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어 1994년 신년특집좌담으로 ‘백제불교 현황과 과제’를 놓고 사재동 · 이평래 · 김선욱 충남대 교수, 신도성 〈대전일보〉 편집부장, 김재근 〈대전일보〉 기자가 제각각 의견을 개진했다. 이 밖에도 백제불교에 대한 학술연구와 세미나 등 토론자료 등을 집적해 나가는 한편 월간 《백제불교》를 통해 백제불교의 중흥을 실현시키기 위한 홍보활동을 꾸준히 전개했다.

백제불교사상연구회와 월간 《백제불교》의 발간은 오로지 백제불교의 중흥을 이루고자 했던 장곡 스님의 의지 덕에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2001년 백제불교회관 개관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장곡 스님이 갑사 주지를 그만둔 후 2008년부터 재정난으로 인해 백제불교사상연구회가 활동을 접고 《백제불교》가 휴간된 것은 지금도 큰 안타까움으로 남고 있다.

백제불교회관의 동맥 백제불교문화대학과 대학원

백제불교회관은 개관 다음 해에 바로 백제불교문화대학을 개교했다. 초대학장엔 사재동 충남대 교수. 명망 있는 중견 학자가 학장을 맡고 충남대를 중심으로 공주대, 한남대, 대전대 등 지역대학의 철학 · 문화 관련학과 교수와 충청 지역 사찰의 주지 스님 등으로 강사진을 꾸리자 인근에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교양과정(1년제), 전문과정(2년제), 연구과정(1년제) 250여 명의 정원이 꽉 차고도 남았다. 2002년 3월 2일 입학식을 하고 개교한 백제불교문화대학은 불교의례를 비롯한 불교문화, 사찰연수 등 불교문화 전반에 관한 전문강좌를 개설해 학생들에게 불교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주력했다. 이와 함께 불교복지론과 사찰경영론, 불교언론, 불교유통사 등 불교사상과 실생활을 연계한 응용 분야의 강좌도 개설해 불자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불교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다. 

대전 · 충남 지역 불자들의 적극적인 호응 덕에 백제불교문화대학은 개교 1년 만에 2년제로 승격됐다. 또한 2004년 조계종 우수대학으로 선정돼 표창을 받으면서 대학원을 신설, 1기 입학생을 모집했다. 2대 학장을 장곡 스님이 맡았고 사재동 교수는 대학원장으로, 이평래 교수가 부학장으로 취임했다. 수료생이 배출되면서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집약할 필요성이 대두되자 총동문회가 구성됐다. 초대회장으로 선출된 곽무영(대전광역시청 불자회장) 씨를 중심으로 총동문회는 백제불교 문화예술제 및 백제불교문화 학술회, 해외불교 성지순례 등 동문 활동에 더욱 활기를 불어넣었다. 더욱이 백제불교문화대학 졸업기념행사의 일환으로 2003년 2월 대전시민회관에서 ‘불교문화제’를 개최한 것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고 있다. 불교 및 문화의 불모지로 불리는 대전 지역에서 처음으로 열린 ‘불교문화제’는 1천여 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불교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며 성공리에 회향됐다. 졸업생들의 자부심이 한결 높아진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불교예술제는 몇 년 동안 이어졌다. 시민들의 호응도 컸다.

우수한 강사진과 총동문회의 단합된 힘 덕분에 몇 년 지나지 않아 수요가 따르지 않는 바람에 문을 닫는 다른 지역과 달리 꾸준히 졸업생들을 배출하고 있다.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는 동문들의 이타행은 일반인들을 백제불교회관으로 끌어들이는 자석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 2월 18일 백제불교문화대학 제16기 졸업식에는 23명이, 14기 대학원 졸업식에는 18명이 졸업장과 함께 ‘품계’를 전수하고 전법 활동의 기수로 나설 것을 다짐했다. 이렇게 졸업한 수료생이 올해로 1천 명을 넘었다. 이 가운데 조계종 포교사 고시에 합격한 이도 2백 명 안팎. 이들은 백제불교회관에서 주관하는 각종 행사, 이를테면 포교결집대회나 백제불교 문화예술제, 포교전진대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대외적 이미지 제고는 물론 거사림회 발족 등 가시적인 성과물들을 생산해 내고 있다.

대전 · 충남불교를 이끄는 힘

현재 백제불교회관에 적을 둔 신행단체는 초기 20여 개에서 40여 개로 배 이상 늘었다. 백제불교회관 개관 이후로 한국장애인불자회, 대전교사불자회, 한국철도공사불자회, 한국불자불교미술협회, 청우거사림회, 칠우거사림회, 수요경전반, 다라니독송반 등 모임이 결성됐고 이들 단체는 백제불교회관을 거점으로 법회와 지역활동을 활발히 펼쳐오고 있다. 재작년 불자 수 300만 감소라는 충격적인 인구주택총조사 발표에도 불구하고 신행단체의 증가와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백제불교회관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필자는 백제불교회관 전반의 활동과 결과들을 놓고 다섯 가지로 분석해 소개한다. 당연히 주관적인 판단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양해 바란다.

첫째는 문턱을 없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만든 평등체 구현이다. 장곡 스님의 평소 지론은 ‘사찰 문턱을 없애자’는 것이다. 사찰이라고 해서 이웃종교인이 오는 것을 막아선 안 된다. 경제적인 약자라고 해서 사찰을 찾는 데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신분에 따라 사찰 문턱의 높낮이가 달라져서도 안 된다. 이러한 철저한 평등 개방 정신이 백제불교회관 운영에 그대로 반영돼, 신도들은 물론 일반인들의 출입이 자유로웠다. 인식 또한 개선됐다. 사찰이 불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불교사상 또한 닫혀 있는 옛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일반화된 것이다. 대전 서구청과 백제불교회관이 ‘아이 낳기 좋은 환경 만들기’를 위한 중매쟁이 e-카페 운영 협약식을 가진 것은 그 좋은 예다. 2012년 7월 12일 박환용 대전 서구청장과 백제불교회관 관장 장곡 스님은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대비한 방안으로 ‘인연 이어주기’, 즉 중매쟁이 e-카페 운영 협약식을 체결했다. 백제불교회관이 중매쟁이 역할을 한다는 보도에 시민들도 협조를 약속하며 크게 반겼다. 이 협약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며 적지 않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한다.

둘째, 누구나 함께 참여하는 동사섭(同事攝)의 구현이다. 백제불교회관은 각기 다른 성격의 신행단체가 입주해 있다. 그러나 자단체의 고유활동도 중시하지만, 대외적인 이타행에서는 연대를 당연시한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대전역 광장에서 실시한 자비의 쌀 모으기 탁발행사는 2000년대 대전충청포교사단이 처음 그 문을 열었다. 이후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자비의 쌀 모으기 탁발행사는 백제불교 신행단체협의회가 주최하고 백제불교문화대학 총동문회와 대전 4 · 8봉축위원회가 주관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아집과 아만을 제거하기 위한 수행의 일환으로 신도들이 탁발에 나섰고 대전 · 충청 지역의 신행단체가 대부분 이 행사에 동참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신선한 반응에 힘입어 백제불교회관은 해마다 부처님오신날 정례행사로 봉행하고 있다. 연말 불우이웃돕기 일환으로 시작된 ‘자비의 연탄 나누기’ 역시 주최는 백제불교 신행단체협의회다. 장곡 스님이 이사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백제불교복지회가 처음 시작했으나 동사섭의 실천이 우선돼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백제불교 신행단체협의회가 주도적으로 나서게 됐다. 자비의 연탄은 대전시 관내 저소득층과 독거노인들에게 전달돼 추운 겨울을 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신행단체들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함께 협력하고 참여하면서 ‘동사섭’이라는 불교 정신이 얼마나 따뜻하고 위대한 실천인지를 깨닫게 된다고 입을 모은다.

셋째, 수행을 통한 자정기심(自淨其心)의 체현을 추구한다. 장곡 스님은 불교에 귀의하는 것은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에 목적이 있다고 강조한다.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라는 〈칠불통게(七佛通偈)〉가 곧 ‘마음을 잘 다스리라는 것’이라며 종교의 기능도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에 따라 백제불교회관 6층 법당은 항상 시민선방으로, 그리고 염불삼매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또한 충남 보령시 먹방계곡이 있는 성주면 성주리에는 백제불교회관 신도들을 위한 수련시설이 마련됐다. 장곡 스님이 몇 해 전 돈이 조금씩 모일 때마다 과거 성주사지가 있었던 이 지역에 터를 마련하고 수련장을 지은 것이다. 수련장 앞 도량의 넓은 잔디밭과 꽃나무, 그네 등 조경은 장곡 스님이 직접 시간을 내 짬짬이 울력해 만들었다. 시설이 완전히 갖추어지면 이곳에서 합동수계법회 등 수련대회를 정기적으로 가질 예정이다. 지금은 신도들이 단체로, 혹은 신도 가족들이 힐링을 위한 수련회나 여행을 원할 경우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실제 이곳을 이용해 본 신도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된다고 자랑한다. 백제불교회관에 소속된 신도들이 주위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한 장면이고 이것이 곧 포교로 연결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넷째, 포교에는 끝이 없다는 전법(傳法) 정신의 강조다. 포교에는 끝이 없다. 항상 새로운 시작만 있을 뿐이다. 전법도생(傳法度生)하라는 부처님의 유훈은 불자들이라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의무다. 백제불교회관은 이 같은 뜻을 실천하는 도량이다.

장곡 스님이 충남경찰청 불자회 지도법사를 역임하던 2005년 당시 충남경찰불교회 이기병 회장은 “모든 경찰서마다 불자회를 창립한 후 충남경찰불자 축제 한마당을 개최하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장곡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회원뿐 아니라 비회원, 심지어 가족 모두가 참여하는 대동 한마당을 개최하자면서 이를 성사하기 위한 제반 지원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포교에 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조주 스님이 말씀하신 ‘끽다거’의 화두처럼 일상에서 차를 마시듯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포교란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일상생활처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백제불교회관은 다른 종교시설의 공격적인 선교활동처럼 요란하지 않다. 대형 현수막을 내걸거나 신문에 광고하는 등 이벤트식으로 전개하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다. 다만 일상생활처럼 상대방과 교감하며 담담하게 이루어진다. 부처님이 상대방의 근기에 따라 설법하고 교화하듯 개개인의 상황과 존재성을 중시한다. 더욱이 백제불교회관은 백제불교문화대학과 대학원 운영을 통해 200여 포교사를 배출한 전법도량이다.

이들은 총동문회와 기수별 모임을 가지며 대전과 충남 주요 도시에서 포교 전진기지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2009년 11월 14일 전국포교결집대회를 시작으로 2010년 4월 대전컨벤션센터의 포교결집대회, 2012년 4월 7일 계룡산에서 가진 국태민안 결집 포교전진대회, 같은 해 8월 25~26일 공주 한옥마을에서 포교전진대회 및 수계법회, 2013년 8월 24일 논산 영주사에서 가진 포교전진대회 등은 백제불교회관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행사들이다.

다섯째, 시대에 걸맞은 SNS 활용 포교전략이다. 페이스북과 카카오스토리, 다음카페와 개인 이메일 등을 통해 장곡 스님은 글머리에서 소개한 것처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 부처님 말씀을 들려준다. 해설과 메시지를 담은 이 글들은 때로는 교훈이 되고 삶의 거울이 되어 심금을 울리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인터넷, 온라인에서 스님의 글은 블로그나 카페를 통해 언제든 접할 수 있다. 특히 현대인에게 맞게 쉽고 간결한 문체로 전달하는 스님의 글은 시시때때로 정치인이나 기관장 등이 특정 행사에 나와 인용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장곡 스님은 “언젠가 복지시설을 위탁운영하게 된 교회 행사에 참석했는데 목사님이 카페에 올라온 내 글을 인용해 인사말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라고 전했다.

인터넷과 SNS를 활용한 전법활동은 젊은 층 공략에 주효하다. 따라서 백제불교회관은 노령화된 신도를 걱정하는 최근 불교계 환경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그렇다고 신진세대들이 두터운 신도층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신개념 미디어 포교라 해도 노령화로 기울어지고 있는 불교 신자의 흐름을 피해 가지는 못하고 있다.

백제불교의 중흥을 위해

올해로 백제불교회관은 개관 17주년을 맞아 지난 3월 23일 기념법회를 봉행했다. 과거 찬란했던 백제불교의 중흥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출범한 백제불교회관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보를 여전히 수행 중이다. 또한 여건도 충분히 확보해 놓고 있다. 대전과 충남 지역의 웬만한 신행단체들은 모두 백제불교회관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고, 신행단체협의회를 통해 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해 벽두 해마다 봉행되는 대전불교 신년하례법회는 백제불교 신행단체협의회와 대전불교사암연합회가 주축이다. 이는 대전불교의 핵심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라는 의미다. 백제불교회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신행단체는 직장과 직능 등 모든 분야가 총망라돼 있고 이들 단체는 다달이 합동정기법회를 봉행하면서 법우애를 과시한다. 언제든 힘만 결집하면 백제불교의 영화를 재현할 가능성이 크다. 그게 희망이고 사부대중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장곡 스님은 백제불교사상연구회와 월간 《백제불교》의 복간을 꿈꾸고 있다. 아직 재정 여건이 미흡해 엄두를 낼 형편은 아니지만, 원력을 세우면 주저하는 일이란 없다. 백제불교회관과 백제불교사상연구회, 그리고 백제불교와의 조우가 이루어질 날이 머지않았음을 기대해 보는 것이다.

낡고 허름한 상가에 입주해 있는 백제불교회관. 그러나 불교 포교를 담당할 인재를 배출하고 새로운 불자 만들기에서는 한국불교 최고라고 단언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백제불교회관은 매일매일 차 마시듯 전법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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