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 1948)는 영국의 통치에 반대하여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으로 인도의 독립을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그는 1914년 남아공에 있을 때, 처음으로 ‘마하트마(Mahātmā, 위대한 영혼)’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마하트마 간디(Mahātmā Gandhi)로 불리고 있다. 또한 바푸(Bapu, 구자라트어로 ‘아버지’라는 뜻)로 불렸으며, 비공식적으로 ‘국가의 아버지(國父)’로 알려져 있다.

마하트마 간디(이하 ‘간디’로 약칭)는 인도의 독립 운동가였고, 정치인이자 법률가였으며, 철학자이자 종교인이었다. 니콜라스 지어(Nicholas F. Gier)는 간디를 ‘탈근대 사상가(postmodern thinker)’라고 명명했다. 간디의 사상과 활동을 간디주의(Gandhism)라고 부른다. 간디주의는 그 실천철학을 ‘사띠야그라하(Satyāgraha, 眞理把持)’로 정의하고 있다. 간디는 자신이 성자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라고 했지만, 간디만큼 많은 사람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친 인물도 찾아보기 어렵다.

간디가 남긴 글은 수없이 많다. 간디 사후에 인도 정부가 출판한 《간디 전집》은 90권, 5만여 쪽에 달한다. 그러나 국내에 소개된 책은 《간디 자서전》 외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최근 경희대 철학과 허우성(許祐盛) 교수가 라가반 이예르(Raghavan Iyer, 1930~1995)가 엮은 《마하트마 간디의 도덕 · 정치사상》(전 3권)을 우리말로 옮겨 출판했다. 이 책은 《간디 전집》의 30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간디에 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간디의 사상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하여 인도의 독립과 관련된 논문, 간디의 법철학 사상에 관한 논문, 간디의 사회사상, 간디의 저널리즘에 관한 논문 등이 발표되었다. 이 외에도 간디에 관한 많은 논문이 있지만, 간디의 불교사상에 관한 논문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간디는 붓다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그는 불교 교단과 불교사상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그가 이해한 불교사상은 올바른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여기서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다만 이 글은 《간디 전집》이 아닌 라가반 이예르가 엮은 《마하트마 간디의 도덕 · 정치사상》(허우성 역)을 근거로 논술한 것이기 때문에 필자가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2. 간디의 정치와 종교사상

1) 정치와 종교의 관계

간디의 불교사상을 논하기에 앞서 간디의 정치와 종교사상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간디의 삶을 관통하는 주제는 정치와 종교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와 종교를 구분하지 않았다. 간디는 “정치는 종교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종교에서 분리된 정치는 타락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간디는 정치와 종교는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정치 문제를 종교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인물이 바로 간디이다.

간디는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즉 “나에게 종교 없는 정치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정치는 종교를 보조합니다. 종교 없는 정치는 혼을 죽이므로 죽음의 함정이 되고 맙니다.” 또한 “나에게 구원의 길이란 부단한 수고를 통해서 조국에 그리고 조국을 통해서 인류에게 봉사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간디에게 종교 없는 정치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간디는 1927년 〈영 인디아〉에 기고한 〈나는 왜 힌두교도인가〉라는 글에서 “나는 힌두 가정에서 태어나 세습의 영향을 받는다고[받았다고] 믿으며 힌두교도로서 살아왔다.”라고 밝혔다. 어떤 사람이 간디에게 ‘성자인가 정치가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나는 금생에는 ‘성자(saint)’라는 말이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자란 단어는 거룩한 말이므로 어떤 사람에게도 적용되어서는 안 되고, 나 같은 자에게는 더욱 가당찮은 칭호이다.”라고 답변했다. 대신 그는 “나는 진리를 좇는 겸손한 구도자입니다. 나는 바로 현세에 자아를 실현하기를, 즉 해탈을 얻기를 몹시 원하고 있습니다. 나라에 대한 봉사는 육신의 교도소로부터 내 혼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훈련의 일부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그의 글을 통해 볼 때, 그가 얼마나 경건한 종교인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2) 간디의 종교관

간디는 신의 전지성(全知性)을 믿었다. 그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했다. 간디는 자신의 종교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나는 종교를 정치에 도입함으로써 친구들과 더불어 실험을 해왔다. 나에게 종교란 무엇인가를 설명해 보자. 내가 다른 모든 종교보다 분명히 높이 평가한 종교는 힌두교가 아니라 힌두교를 초월한 종교이다. 그것은 사람의 본성 자체를 바꾸는 종교이며, 우리를 내면적 진리에 꽉 붙들어 매어 두고 늘 정결케 하는 종교이다.

위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간디는 힌두교도였지만, 힌두교라는 종교에 예속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간디는 “그 누구도 전능한 신이 우주의 창조자요 유지자이며, 파괴자라는 점,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힌두교를 대표하는 삼신(三神, trimūrti)은 우주의 창조자인 브라흐만(Brahman), 우주의 유지자인 비슈누(Viṣṇu), 우주의 파괴자인 시바(Śiva)이다. 이를 통해 간디의 신앙은 힌두교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간디는 힌두교의 관점에서 다른 종교를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나는 시크교를 힌두교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힌두교의 일부로 그리고 비슈누교와 마찬가지로 힌두교 내의 개혁으로 간주한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불교는 저에게 힌두교의 일부입니다. 붓다는 세상에 새로운 종교를 준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을 주었습니다.”라고 단언했다.

한편 간디는 “세속에서가 아니면 진리의 길을 밟을 기회조차, 아니 진리를 언급할 기회조차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지어 존재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세속을 버리는 것은 진리추구를 아예 포기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또한 “신을 외면하거나 도외시한다면 개인적 완성, 자아에 대한 지식, 진리추구도 모두 거짓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아완성은 봉사를 통해서 얻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가 완성되기를 기다려 봉사하려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이다. 봉사 없는 자아완성은 도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내가 해탈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것이 진리나 비폭력과 갈등을 일으킨다면 나는 그 해탈까지 버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간디는 세속사를 떠나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모두 헛된 것이라고 보았다.

간디는 “즉 ‘묵띠(mukti)에 대해서 늘 말하는 대신 우리는 박띠(bhakti) 안에서 시간을 써야 한다’고. 박띠 없이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의무에 헌신하고 신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심정을 채우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간디는 자기완성을 위한 해탈,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경건한 신앙, 즉 절대자에게 귀의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이와 같이 간디는 개인 완성보다는 이웃과 나라에 대한 봉사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간디의 종교관을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그는 ‘수행의 길’보다 ‘보살의 길’을 선호한 것이었다. 수행의 길이란 자기완성을 위한 진리추구를 말하고, 보살의 길이란 자기완성보다 타인구제를 위한 이타행(利他行)을 말한다. 이러한 간디의 성향으로 볼 때, 그는 부파불교의 수행자보다는 대승불교의 보살에 더 가깝다. 간디주의자인 람지 싱하(Ramjee Singh, 1927~ ) 교수는 “간디는 20세기 ‘보살(bodhisattva)’이었다”고 선언했다. 간디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간디가 구도의 길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해탈(목샤)을 위한 분투〉라는 글에서 “나는 해탈을 구하는 한 사람의 구도자에 불과하네.”라고 술회한 바 있다.

한편 간디는 1927년 〈영 인디아〉에 기고한 〈나는 왜 힌두교도인가〉라는 글에서 “소에 대한 숭배는 모든 생명의 하나 됨에 대한 신념을, 따라서 모든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실체를 응용한 것이다. ……바르나슈라마 법의 발견은 진리를 향한 부단한 추구의 놀라운 결과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가 소의 숭배와 와르나슈라마다르마(varṇāśrama-dharma)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와르나슈라마다르마란 힌두교도에게 부과된 ‘종성(種姓)과 주기(住期)에 대한 의무’를 말한다.

《바가바드기타(Bhagavad Gītā)》에 의하면, 신이 스스로 특징적인 자질과 특정한 의무에 기초하여 브라흐마나(brāhmaṇa), 끄샤뜨리야(kṣatriya), 바이샤(vaiśya), 수드라(śūdra)라는 사성계급을 창조했다고 한다. 이 계급에 상응하는 특권, 의무 및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인생을 범행기(梵行期, brahmacārin), 가주기(家主期, gṛhastha, gṛhāśrama), 임서기(林棲期, vanaprastha), 유행기(sa-ṃnyāsin)의 네 단계로 구분하여 각 단계의 의무를 규정했다. 이것을 ‘와르나슈라마다르마’라고 부른다.

이처럼 《바가바드기타》는 간디의 종교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문헌이었다. 《바가바드기타》는 간디의 ‘영적 사전’이었다. 그러나 붓다는 ‘종성과 주기에 따른 의무’를 부정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간디는 힌두교도로서 이 제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판차마(Panchama, Sk. pañcama)로 불리는 제5의 카스트, 즉 불가촉천민(untouchable)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 《하리잔(Harijan, 신의 아들)》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간디는 1929년 미얀마 양곤(랑군)에서 행한 대중 집회 연설에서 “불가촉천민제도가 힌두교의 중대한 오점이라는 점을 저는 수도 없이 자주 말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오늘날 생존을 위한 경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 경주에서 힌두교가 망하든지, 불가촉천민제도가 뿌리째 뽑혀서 아드바이타(不二論) 힌두교의 근본 원리가 실생활에서 완전히 실현되든지, 인도는 양자택일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모든 카스트와 종교적 차별 또는 인종적 차별을 당신의 마음으로부터 제거하십시오.”라고 촉구했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신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간디의 종교관은 힌두교에 토대를 두고 있었지만, 무소부재(無所不在)의 유일신 존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베다》에는 수많은 신이 있다. 다른 경전들은 그들을 천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베다》는 유일신에 대해서만 노래한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신관(神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간디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배타적이지 않았다. 그는 “우리 모두는 이슬람교도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힌두교도이자 기독교도이기도 하다. 진리는 어떤 특정 경전에만 속하는 배타적 속성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간디의 종교관은 포용적이고 포괄적이며 관용적이었다.


3. 간디의 불교 이해

1) 간디의 불타관

간디는 1925년 5월 9일 마하보디협회에서 개최한 석가탄신일 기념식 연설에서 에드윈 아널드 경(Sir Edwin Arnold, 1832~1904)이 쓴 《동방의 빛(The Light of Asia)》이라는 책 외에는 불교 관련 서적을 읽은 적이 없다고 언급했다. 그가 교도소에서 읽은 수많은 도서목록에도 불교에 관한 것은 없다. 간디가 불교 경전은 물론 불교사상에 관한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불교 이해 수준은 매우 낮다.

간디는 붓다에 대해 “세상이 존속하는 한, 그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스승 중 한 분으로 꼽힐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저는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라고 격찬하며 붓다가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간디는 “붓다께서는 일체의 세속적 행복을 포기했습니다.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고통받는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자신의 행복을, 온 세상 사람과 나눠 가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중생들의 행복을 위한 붓다의 교화활동을 간디는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간디는 붓다를 힌두교도 중의 한 사람으로 이해했다. 그는 “제 소견으로 붓다는 자신의 삶 속에서 힌두교를 실천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이 살았던 참담한 시대의 개혁가(reformer)였습니다.” 또한 그는 “붓다는 결코 힌두교를 거부한 적이 없었으며 다만 그 토대를 넓혔습니다. 힌두교에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해석을 주었습니다.”라고 해석했다. 간디는 1927년 11월 25일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고타마가 힌두교도 중의 힌두교도였다는 것도 기억하십시오. 그는 힌두교 정신과 《베다》 정신에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간디의 주장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붓다와 불교사상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에 불과하다.

붓다가 당시 인도의 정통파인 바라문교와 사문 계통인 육사외도(六師外道)의 사상을 동시에 논파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붓다는 연기법(緣起法)으로써 바라문교의 ‘전변설(轉變說, pariṇāma-vāda)’과 육사외도의 ‘적취설(積聚說, ārambha-vāda)’을 비판했다. 전변설은 자아(自我)나 세계는 유일한 브라흐마(brahmā, 梵天)에서 유출, 전변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적취설은 그러한 유일의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는 대신 개개의 요소를 불멸의 실재로 믿고, 그것들이 모여 인간과 세계 등 일체가 성립한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간디는 “저는 힌두교와 불교의 핵심적 가르침을 구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힌두교와 불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불교에서는 자아(自我)나 영혼(靈魂)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디는 “저는 붓다가 무신론자가 아니었다고 감히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신은 자만(pride)으로 행동하는 자라면 어떤 사람도, 어떤 귀의자도 보시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붓다가 무신론자가 아니었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간디는 붓다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즉 “붓다는 두려움 없이 전쟁하면서 원수의 진지까지 진격해 갔고 교만한 사제들을 굴복시켰다. ……만일 붓다의 사랑이 가진 지고(至高)의 주권이 사제를 굴복시키는 과업에 충분하다는 점이 증명되지 않았다면, 그는 사제에 저항하여 죽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대목은 초기경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것은 간디가 붓다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간디는 “붓다에 대해서는 더 큰 자신감을 가지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생애 동안 여러 기관을 설립했다고 합니다. 그는 돈이 없었다면 기관들을 창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육신 · 혼 · 마음을 준 사람들은 부 역시 붓다에게 바쳤다고 합니다. 붓다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자신을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라고 했다. 이런 주장 역시 붓다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붓다는 생전에 어떤 기관도 설립한 적이 없다. 최초의 사찰인 죽림정사는 빔비사라왕이 상가(Saṅgha, 僧團)에 기증한 것이고, 기원정사는 아나타삔디까(Anāthapiṇḍika)로 불리는 수닷따(Sudatta, 須達) 장자가 상가에 기증한 것이다. 붓다는 출가한 후 단 한 번도 직접 돈을 만진 적이 없다. 붓다가 돈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기관을 설립할 수 있었다는 간디의 발언은 붓다의 명예를 크게 훼손한 것이다.

2) 불교에 대한 간디의 이해

간디는 붓다가 힌두교도의 한 사람으로서 힌두교를 개혁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힌두교의 신앙이 보다 형식적으로 변질되었을 때, 붓다가 ‘동물 희생 제사’가 잘못된 것임을 일깨워주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붓다는 힌두교의 형식적인 동물 희생 제의를 개혁한 힌두교도였다는 것이다. 그는 “불교는 결과적으로 힌두교를 개혁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간디는 붓다가 힌두교도였으며,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것이 아니라 힌두교를 개혁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붓다는 자신의 종교가 그런 궁지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연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버리고 고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열렬한 명상으로 수년을 보냈고, 결국 힌두교 내부의 개혁을 제안했습니다. 그의 경건함은 바라문들의 마음에 큰 영향을 미쳤고, 희생 제사(sacrifice)를 위한 동물 살상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붓다가 새롭고 다른 종교를 창시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뒤에 온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독자적인 종교의 성격을 부여했습니다.

간디는 붓다가 자신의 종교, 즉 힌두교를 위해 출가하여 고행했으며, 결국 힌두교를 개혁했다는 것이다. 간디는 힌두교의 관점에서 붓다가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간디의 주장은 붓다에 대한 망발(妄發)이며, 불교에 대한 망언(妄言)이다. 따라서 불교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다.

또한 간디는 불교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불교가 인도 밖으로 전파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불교가 인도에서 쇠퇴했다고들 말하는 사람이 가끔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불교 승려들이 불교를 너무 열광적으로 전파하려고 해서 당시 힌두교 사제들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는데, 이 사제들이 불교도를 나라의 외곽으로, 티베트, 중국, 일본, 미얀마, 스리랑카로 몰아냈다. 하지만 불교도의 정신은 인도에 남아 있으면서 힌두교도가 믿는 모든 원리를 발동시켰다.

간디의 주장에 따르면 힌두교 사제, 즉 바라문들이 불교를 인도 밖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전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스리랑카의 연대기에 의하면 아소까 왕(Asoka, B.C.E 269~232년경)의 원조 아래 빠딸리뿟따(Pāṭaliputta)에서 제3결집을 마친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 장로가 이웃 나라에 전도단을 파견했다고 되어 있다. 이 전도단의 활동에 의해 불교가 먼저 동남아시아에 전파되었고,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흥기한 이후에는 티베트 · 중국 · 일본 등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학자가 인정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간디가 이런 주장을 한 것은 그가 불교는 힌두교의 한 일파에 불과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불교사에 대한 무지 때문이거나 둘 중 하나에 해당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간디는 붓다가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간디는 1924년 5월 18일 봄베이에서 개최된 붓다 탄신일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교는 저에게 힌두교의 일부입니다. 붓다는 세상에 새로운 종교를 준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을 주었습니다. 그는 힌두교에 생명을 앗아가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라고 가르쳤습니다. 진실한 희생은 타인의 희생이 아니라 자신의 희생입니다. 힌두교는 《베다》에 대한 어떤 공격에 대해서도 분개합니다. 힌두교는 새로운 해석을 일종의 공격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힌두교는 붓다 가르침의 중심 진리를 수용하면서도, 불교를 새로운 반베다적 이교(異敎)로 간주하여 그것과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위 인용문을 통해 간디의 불교관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불교를 힌두교 일부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불교가 《베다》의 권위를 부정하고, 새로운 해석을 가하는 것을 힌두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또한 간디는 “적어도 인도에서는 힌두교와 불교가 오직 하나일 뿐이고, 오늘날에도 양자의 근본적 원리는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간디는 힌두교와 불교의 원리는 동일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힌두교와 불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불교는 당시 바라문교(지금의 힌두교)를 비판하면서 탄생한 종교이다. 결코 힌두교와 불교는 같은 종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불교는 신(神)의 존재는 물론 자아(ātman)나 영혼(soul)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디가 힌두교와 불교를 같은 종교로 이해한 것은 불교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간디는 “불교 경전, 니야야와 상키야 철학파의 저작들은 불변의 것은 아니지만, 이것들 역시 제각각의 관점에서 이해되고 수용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간디는 불교 경전을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3) 간디의 불교관 비판

간디는 1927년 11월 25일 스리랑카 콜롬보 연설에서 불교도들이 육식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간디는 붓다가 육식을 금하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간디의 주장에 따르면, 붓다는 미물의 생명조차 자신의 생명만큼 귀하게 여겼다. 그리고 동물 희생 제사를 금지시켰다. 그런 붓다가 육식을 허용했을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붓다가 세 가지 점에서 깨끗한 고기, 즉 삼종정육(三種淨肉)은 먹어도 좋다고 허락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인간은 육신을 갖고 있는 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육식이든 채식이든 먹지 않을 수 없다. 엄격히 말하면 식물도 생명체에 포함된다. 따라서 육식 자체를 죄악시할 필요는 없다.

간디는 1925년 3월 5일 자 〈영 인디아〉에 실린 〈신과 국민회의〉라는 글에서 “나는 불교도와 자이나교도가 무신론자거나 불가지론자임을 부인한다. 그들은 불가지론자일 수는 없다. 육신과 떨어진 혼, 육신의 해체와 그 해체 이후 존재할 수 있는 혼을 믿는 자들이 무신론자가 될 수 없는 법이다. 우리는 모두 ‘신’에 대해서 다른 정의를 가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니티샤타카(Nitishataka)라는 사람이 반론을 제기했다. 니티샤타카는 “이슈와라 또는 초자연적 실체(신에 상응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의 존재에 대해서 불교는 침묵하고 있고 자이나교는 회의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체임버 백과사전(Chamber’s Encyclopedia)》의 〈불교〉 항목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세상을 창조하는 신이든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다스리는 신이든, 신이라는 개념 자체는 불교 체계 내부에는 전혀 없다. 신은 부정되었다기보다는 알려지기조차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 있게 그리고 일반적으로 무신론자들의 나라는 절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지만, 이런 견해와는 반대로 많은 불교 국가가 본질적으로 무신론적이라는 사실은 더 이상 논란거리가 아니다.

이러한 니티샤타카의 반론에 간디는 “나는 자이나교와 불교 모두 무신론적이 아니라는 내 견해를 고수한다.”라고 답변했다. 이와 같이 간디는 불교에 대한 자신의 잘못된 견해를 수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불교와 자이나교에 대한 간디의 이해 부족을 드러낸 것이다. 불교는 무신론의 종교이며, 불교에서는 영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간디는 모르고 있었다.

불교도였던 찰스 파브리(Charles Louis Fabri, 1899~1968) 박사와 간디의 대담을 통해서도 간디의 불교에 대한 이해 수준을 엿볼 수 있다. 파브리는 간디에게 “기도에 의해서 신성한 마음이 변화될 수 있을까?” “신성한 마음을 기도로 발견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간디는 “신성한 마음(Divine Mind)은 불변이지만, 신성(Divinity)은 만인 안에 그리고 생물 · 무생물을 가리지 않고 모든 만물 안에 존재합니다. 기도의 의미는 내 속에 있는 신성을 불러내려는 데 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파브리는 “기도란 간청하고 요구하는 일입니다.”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간디는 “내가 기도를 자아에게, 나의 높은 자아(Higher Self)에게, 참자아(the Real Self)에게 간청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답변했다. 파브리는 “기도는 실제 완전한 명상이며 높은 자아에의 융몰(融沒, melting into the Higher Self)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간디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의 신에 대한 신념을 이렇게 피력했다.

구름 위 어디쯤 존재하시는 신에게 내가 기도를 드리고, 그분이 멀리 계시면 계실수록 그에 대한 나의 열망이 더욱 간절해지며, 내 생각 안에 그가 임재하시고 그 임재 안에 나는 나 자신을 본다고 말하는 것이 사태에 더 적합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아시다시피 생각은 빛보다 더 빠릅니다. 그래서 나와 그분 사이의 거리가 한량없이 엄청나다고 해도 그것은 사라집니다. 그는 한없이 멀리 계시지만 아주 가까이도 계십니다.

이러한 간디의 주장에 대해 파브리는 “그것은 신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붓다의 가르침 이상의 것, 그분 이상의 스승이 없습니다. 세계의 스승 가운데 오직 붓다만이 ‘내가 말한 것을 맹목적으로 믿지 마시오. 어떤 도그마 혹은 어떤 책이라도 무오류인 것으로 수용하지 마시오’라고 말했습니다.”라고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나 간디는 자신이 성취한 일들은 신의 응답이었다고 답변했다.

파브리는 “붓다는 모든 이에게 스스로 구원을 찾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기도하지 않았으며 선정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간디는 “그가 기도하는 붓다였다는 사실은 내가 증명할 것입니다. …… 붓다가 기도할 만큼 겸손한 인물이 아니었다면, 그는 과거에 수백만 사람들의 삶을 지배할 수 없었을 것이고, 현재에도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간디는 붓다가 신에게 기도한 사람으로 믿고 있었다. 파브리는 종교적 체험을 강조하는 간디에게 “나는 이제 ‘이기심이 고(苦)의 원인이다. 비구들이여, 만물이 무상함을 기억하라’는 붓다의 한두 마디 말씀에 큰 위안을 얻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간디는 “그것이 기도입니다.”라고 응대했다. 이처럼 간디는 붓다를 심하게 왜곡하고 있다. 만일 붓다가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벌떡 일어나 간디를 크게 호통을 쳤을 것이다. 왜냐하면 붓다는 기도가 아닌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증득했기 때문이다.


4. 맺음말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독립 운동가였고, 정치인이자 법률가였으며, 철학자이자 종교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성자도 정치인도 아니라고 했지만, 간디만큼 많은 사람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친 인물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간디의 불교 이해 수준은 의외로 낮다. 그가 언급했듯이 에드윈 아널드 경이 쓴 《동방의 빛》이라는 책 외에는 불교 관련 서적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불교학자도 있었지만, 그는 붓다와 불교사상에 대해 깊이 공부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힌두교에 바탕을 두고 다른 모든 종교를 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불교 이해는 붓다와 불교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켰다. 그는 일관되게 붓다는 힌두교도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삶 속에서 힌두교를 실천한 개혁가로 정의하고 있다. 또한 그는 붓다가 무신론자가 아니었다고 여러 차례 강조하여 주장했다. 이것은 붓다와 불교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1925년 5월 7일 콜카타에서 개최된 석가탄신일 기념식 연설에서 간디는 붓다가 힌두교도였고, 그는 무신론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이 행사는 붓다의 탄생을 기념하고 불교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행사를 주관했던 아나가리까 다르마빨라(Anagārika Dharmapāla, 1864~1933)는 간디의 연설을 듣고 너무 실망하여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한다. 간디는 다르마빨라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질책했다고 다른 장소에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필자의 심정도 다르마빨라와 다르지 않다. 그가 느꼈을 당혹감을 필자도 그대로 느끼고 있다.

이 글은 《간디 전집》이 아닌 라가반 이예르(Raghavan Iyer)가 엮은 《마하트마 간디의 도덕 · 정치사상》을 근거로 집필한 것이므로 간디의 불교사상을 충분히 다루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간디의 불타관(佛陀觀)이나 그의 불교사상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철학석사, M.Phil).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삼법인설의 기원과 전개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저서로 《마음비움에 대한 사색》 《잡아함경 강의》 《동남아불교사》(공저) 등이 있으며, 5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