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와 의상의 화엄철학을 중심으로

진리를 찾아 길 떠난 사람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지난해 우연히 고운기의 시를 읽다가 ‘귀축(歸竺)의 한나절’이란 구절을 만나고는 자연스럽게 《삼국유사》 〈의해(義解)〉 편 ‘귀축제사(歸竺諸師)’를 떠올렸다. ‘귀축제사’는 신라인으로 태어나 인도로 구도의 길을 떠난 이들을 기록한 글로 귀축(歸竺)이란 천축(天竺)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귀축이란 말에 담긴 의미가 쉽사리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歸)’는 돌아간다는 뜻인데 어찌 신라에서 태어난 사람이 돌아가야 할 곳이 천축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다가 천축은 인도를 가리키고 인도는 바로 석가모니가 탄생한 곳으로 불법이 있는 곳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결국 귀축이란 육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아니라 진리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구도자의 간절함을 표현한 말이다. 불법을 구하는 이에게 천축은 이미 지상의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 것이다. 육신의 고향을 떠난다 하더라도 진리의 고향에 가서 머물 수 있다면 구도자에게는 후회 없는 선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글을 읽어 가다 보니 거기서 생각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불법을 구하기 위해 인도에 갔던 아리나발마의 전기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나발마(釋阿離那跋摩)는 신라인이다. 처음 불법을 구하고자 일찍이 중국에 들어갔다가 석가모니의 자취를 찾아뵐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정관(貞觀) 연간에 장안(長安)을 떠나 오천축국(五天竺國)에 이르렀다.(……)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기약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절에서 죽으니 나이가 70여 세였다.
(廣凾求法高僧傳云 釋阿離那跋摩 新羅人也 初希正敎早入中華 思覲聖蹤 勇銳彌增 以貞觀年中離長安到五天 住那蘭陁寺 多閱律論抄寫具莢 痛矣歸心 所期不遂 忽於寺中無常 齡七十餘)

아리나발마는 자신이 원했던 진리의 고향에 머물면서도 끝내 고향 신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뿐 아니라 아리나발마를 이어 인도로 갔던 다른 구법승에 대한 기록에도 같은 자취가 보인다.

혜업(惠業), 현태(玄泰), 구본(求本), 현각(玄恪), 혜륜(惠輪), 현유(玄遊)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두 명의 법사가 모두 자신을 잊고 불법을 따라 부처의 교화를 보려고 중천축(中天竺)에 갔다. 그러나 혹은 중도에서 죽고, 혹은 생존해서 그 절에 머문 자도 있지만 끝내 신라와 당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자는 없고, 오직 현태 법사만 겨우 당으로 돌아왔는데 또한 그 마친 바를 알 수 없다.
(継此有恵業玄泰求本玄恪恵輪玄逰 復有二亡名法師等 皆忘身順法 觀化中天 而或夭於中途 或生存住彼寺者 竟未有能復雞貴與唐室者 唯玄泰師克返歸唐 亦莫知所終)

귀축제사의 서사는 이처럼 구도의 길을 떠난 이들이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삶을 마쳤다고 안타까워하는 결말로 끝나고 있다. 이는 기록을 남긴 일연의 다음과 같은 찬(讚)에서도 알 수 있다.

天竺天遥萬疊山 천축 하늘 아득히 멀어 만첩산인데,
可憐逰士力登攀 가련하다, 유사(遊士)들은 힘써 기어올랐구나.
㡬回月送孤㠶去 저 달은 몇 번이나 외로운 배 떠나보냈는가.
未見雲隨一杖還 한 사람도 구름 따라 돌아오지 못했네.

천축으로 간 구법승들의 고난을 기리는 한편, 고향으로는 끝내 누구도 돌아오지 못한 안타까움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이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와 불법을 펴고자 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삼국유사》뿐 아니라 천축에 갔다가 신라로 돌아오지 않고 당나라에서 삶을 마쳤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가 보인다.

月夜瞻歸路 달밤에 고향 길 바라다보니
浮雲颯颯歸 바람 탄 구름만 돌아가는구나.
緘書參去便 봉한 편지 가는 편에 부치려 하나
風急不聽迴 세찬 바람 듣지 않고 돌아서는구나.
我國天岸北 내 고향은 하늘가 북쪽인데
他邦地角西 이 나라는 땅끝의 서쪽이라네.
日南無有雁 남쪽 하늘엔 기러기도 없으니
誰為向林飛 뉘라서 계림으로 날아가 줄까.


기러기 발에 편지라도 묶어 보내고 싶지만, 남쪽 나라에는 기러기조차 없어 그리할 수 없다는 표현에서 멀리 천축에서 고향 계림을 그리워하는 이방인의 향수가 잘 보인다. 성지를 순례 중이던 혜초 또한 고향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만은 어쩌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구도를 위해 목숨을 걸고 천축까지 간 신라의 구법승이 진리의 고향에서 육신의 고향을 그리워한 것을 보면 애초에 진리와 육신은 따로 분리할 수 없는 일체의 사물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이상이라면 육신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인간으로 사는 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같은 이상과 현실의 문제는 불교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철학과 모든 현실의 관계 또한 이 둘 사이의 긴장을 벗어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 그것이 철학과 현실의 간격일 것이다.

한국철학사에서 불교의 위치를 논하는 글 첫머리에 귀축과 얽힌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까닭은 한국철학사에서 불교의 위치가 마치 귀축 제사들이 진리와 현실 사이에서 고뇌했던 처지와 유사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라는 두 가지 덕목을 모두 따라야 하는 대승불교의 교리를 실천하는 일은, 한편으로는 불법을 깨닫기 위해 수행 정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의 중생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하는 지금의 불자들에게도 해당하는 일일 것이다.


한국철학과 한국의 현실

필자는 졸고 《한국철학사》에서 철학자 35명의 삶과 사유를 기술한 바 있다. 삼국시대의 철학자 원효부터 현대의 장일순에 이르기까지 1,300년 지성사를 정리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보람이 있었지만 여러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먼저 삼국시대 이전의 신화나 무속과 관련된 사유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단군신화나 삼국의 건국신화에 철학적 함의가 담겨 있지 않다든지 또는 그 자체가 철학적 사유에 부합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단군신화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물음에서 비롯된 서사로 한민족의 기원을 묻는 철학적 질문에 부합하고 다른 신화도 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음에 답하는 방식이 철학적 진술과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선 일차 기술에서 배제한 것이다.

또 비중에 견주어 불교철학을 충분할 만큼 기술하지 못한 것 또한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그중 삼국시대의 불교를 기술하면서 원효와 의상 두 철학자만 기술하고 원측과 혜초를 포함시키지 못한 점, 조선의 철학을 정리하면서 조선의 불교철학에 대한 기술이 빠진 점이 못내 아쉽다.

먼저 원측과 혜초는 당시 불교계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들에 관한 기술이 빠진 까닭은, 그들의 사유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신라에 돌아오지 않고 당나라에서 활동하다가 삶을 마쳤기 때문에 그들이 남긴 글에서 신라의 현실을 고민한 흔적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불교를 다루지 못한 까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시대의 불교에 새로운 사유가 없다고 판단해서가 아니라 초기부터 권근, 정도전 같은 유학자들이 배불론(排佛論)을 강경하게 주장하면서 불교가 커다란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조선의 불교는 세속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독자적 생존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유지되어 현실과 거리가 먼 철학이 되고 말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국의 고유한 철학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가 한국철학의 독자성이나 고유성을 찾는 데 치중한 나머지 상대적으로 동아시아의 지성사적 맥락을 소홀히 한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동아시아 지성사의 흐름을 도외시한 철학사 기술은 한국철학의 범주를 지나치게 좁게 보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적절한 기술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철학에 독자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유성이나 독자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철학이든 그 사유를 통해 한국인이 당면했던 구체적 현실을 고민했다면 독자성은 바로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든 중국에서 유래한 유교든 한국의 현실을 고민했다면 한국철학사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해당 사유가 아무리 널리 유포되어도 당대의 현실을 고민한 흔적이 적으면 기술에서 배제했다. 현대철학을 기술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계열 사상가를 포함시킨 이유도 그들의 사유가 당대의 구체적인 현실을 고민하면서 전개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교철학의 경우 16세기까지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기술했고 17세기부터는 실학을 중심으로 기술했다. 17세기에 이르러서도 성리학은 나름대로 발전을 계속했지만 지나치게 형이상적 사변으로 흘러 현실과의 긴장을 놓쳐버렸다고 보았기에 기술에서 배제했다. 조선시대의 불교에 관한 기술이 빠진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이처럼 일부 중요 불교철학자가 기술에서 빠졌고 조선시대 불교가 포함되지 않았음에도 한국철학사에서 불교의 비중은 적지 않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대부분의 기술은 불교철학을 중심으로 구성했기 때문이다. 특히 원효의 화쟁철학과 의상의 화엄철학은 한국철학의 새벽을 열었다고 할 만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국철학의 특징으로 꼽을 만큼 이후의 철학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불교철학의 전성기에 활동했던 이들 철학자의 사유를 검토하면 한국철학에서 불교철학이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저절로 드러날 뿐 아니라 현재의 한국불교가 나아가야 할 길이 어디에 있는지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원효의 화쟁론(和諍論)에 보이는 화해의 철학

한국철학사 전반을 관통하는 통합과 포용이라는 특징은 원효(元曉, 617~686)가 제기한 화쟁론(和諍論)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화쟁 사상은 좁게 보면 교리 논쟁을 통합하기 위한 불교 내부의 이론적 접근이지만, 넓게 보면 동아시아 불교의 보편적 맥락의 연장이자 당시 신라가 당면했던 현실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사회통합 이론으로서, 당대의 역사적 조건에서 탄생한 화해의 철학이다.

원효가 활동했던 시기는 신라의 26대 진평왕(재위 579~632)부터 31대 신문왕(재위 681~692)에 이르기까지 6대에 걸쳐 있다. 신라는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재위 기간인 675년에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불완전하지만 삼국을 통일했다. 이후 신라는 서로를 공격하며 적대시하던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신라인이 함께 살아가야 했으므로, 내부의 분열을 극복하고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국가적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신라는 내부적으로는 백제와 고구려를 부흥하기 위해 봉기하는 유민들을 진압하거나 회유해야 했으며, 각지에서 할거하던 호족 세력의 힘을 통제하기 위해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안정시켜야 했다. 또 밖으로는 한반도를 점령하려는 당나라와 5년여에 걸친 전쟁을 치러야 했다. 내부의 분열을 극복하지 못하면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화쟁론은 이러한 역사적 조건에서 나왔으니, 곧 과거 서로 적대적 관계였던 다수의 구성원들이 평화롭게 살기 위한 방법을 철학적으로 모색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사회의 분열이 극심할 때마다 ‘화쟁’을 화두로 삼아 논의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화쟁론은 한국철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평화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의 화쟁론은 한마디로 온갖 쟁론을 화해시키는 논리이다. 문자 그대로 ‘화쟁(和諍)’이라는 말은 일체의 쟁론을 화해시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화쟁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는데, 먼저, ‘화(和)’는 화합, 통합한다는 뜻이고, ‘쟁(諍)’은 말로 다투는 것이다. 따라서 화쟁은 쟁(諍)을 화(和)한다는 뜻으로 온갖 논쟁을 화해시키는 논리를 말한다. 또한 ‘화’와 ‘쟁’ 자체가 상반되는 뜻이기도 하다. ‘화’는 평화의 상태이고 ‘쟁’은 분쟁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화’는 분쟁을 평화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이고 ‘쟁’은 절대적으로 피해야 할 상태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원효는 ‘화’조차도 ‘쟁’의 다양한 모습 중 하나일 뿐이라고 하면서, 여기서 더 나아가 화와 쟁 자체는 대립되지만 화와 쟁이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진리를 찾기 위한 방편이라는 논리를 이끌어낸다.

원효는 화쟁의 논리를 사물에 비유하여 “파도와 고요한 바다는 둘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화쟁은 모두 일심(一心)을 근본으로 하지만 그 양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승기신론소》에서는 화쟁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바람 때문에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만 파도와 고요한 바다는 둘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 또한 이와 같아서 불생멸심(不生滅心)이 움직일 때 생멸상(生滅相)을 떠나지 않으며 생멸하는 상(相)도 참된 마음이 아님이 없기 때문에 생멸상 또한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심생멸문(心生滅門)”

‘파도’와 ‘고요한 바다’의 비유는 이 두 가지 현상이 비록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모두 ‘물[水]’이라는 본체의 일부가 드러난 것일 뿐 애초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사물을 관찰할 때 감각으로 포착 가능한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의 응용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이나 경험 안에 갇혀 사물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파악하고는 자신의 경험과 다른 주장을 그르다고 판단한다. 이것이 분쟁이 일어나는 일차적인 이유다. 따라서 화쟁의 첫 단계는 자신의 경험이나 감각이 특정한 조건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반성적으로 사유하고 타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때 가능해진다.

그런데 분쟁의 근본적 원인은 외부 사물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비롯되는 경우보다 각자 지닌 가치관이나 삶의 목표가 다른 데서 기인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 때문에 원효는 불생멸심과 생멸상의 비유를 통해, 각자의 가치관이나 삶의 목표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서로 떼어낼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진여(眞如)’는 진실한 실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깨달음의 경지이며, ‘무명(無明)’은 명지(明知)가 없는 상태로 깨달음은커녕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식한 상태라고 하는데, 원효는 이조차도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고요한 바다와 파도의 비유에 이어 불생멸심(不生滅心)과 생멸상(生滅相)을 예로 든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생멸심은 진리이고 생멸상은 비진리라는 식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고, 그 둘이 서로 떠날 수 없으므로 둘이 아닌 하나의 마음, 일심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원효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일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세상에는 만 가지 다른 법칙과 불법이 있지만 그 하나하나가 모두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편이다. 그런 방편을 회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만법귀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원효의 화쟁론이 지향하는 최종 종착지는 일심(一心)으로 돌아가는 환귀일심(還歸一心)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의 마음, 곧 일심으로 돌아가면 불국토가 되고 극락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다 같이 불법의 세계로 가는 대승이든, 혼자서 깨닫는 열반이든 모두 일심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원효는 《대승기신론소》에서, 환귀일심이 바로 본각(本覺)이라고 강조하면서 본각에 도달하면 삼라만상의 각기 다른 모습이 같은 것이며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통찰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원효는 여기서도 또다시 사유의 깊이를 더한다. 곧 사물의 두 가지 상반된 양상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인데, 그것을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 자체를 따로 독립적인 대상으로 보고 그걸 다시 사유한다는 점에서 철두철미하다. 그것은 이런 식이다. 예컨대 파도와 고요한 바다는 둘이 아니라 한 가지라고 주장하지만, 그것 역시도 하나의 견해일 뿐이며, 불생멸심과 생멸상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도 하나의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분명코 정견(正見)이라고 확신이 드는 주장이라 할지라도 그 또한 여러 견해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데서 화쟁론의 핵심에는 자신을 향한 치열한 반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효는 화쟁을 이루기 위해 ‘개합(開合)’ ‘여탈(與奪)’ ‘입파(立破)’의 세 가지 방편을 제시한다. 먼저, 개합(開合)에서 ‘개(開)’는 여는 것, ‘합(合)’은 합치는 것, 곧 닫는 것이다. 원효는 이 둘을 합쳐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개’는 하나의 불법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펼치는 것이고 ‘합’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펼쳐진 불법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한다. 상반되는 두 가지 주장이 사실은 불법의 한 방편으로 모두 진리를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탈도 같은 논리로 풀이한다. ‘여(與)’는 주는 것이고 ‘탈(奪)’은 빼앗는 것이다. 주는 것과 빼앗는 것이 상반된 것 같지만 사실은 주는 것이 빼앗는 것이고 빼앗는 것이 주는 것이라는 논리다. 입파 또한 마찬가지다. ‘입(立)’은 세우는 것이고 ‘파(破)’는 깨는 것이다. 자기가 세운 논리를 자기가 깨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자신의 견해를 철저하게 반성하는 화쟁의 통찰이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도 사회분열이 심각해지면 종종 원효의 화쟁론을 통해 서로 다른 의견을 통합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마다의 이익을 다투는 입장을 지키는 한 화쟁의 길은 멀기만 하다. 이익을 다투는 사람들 간에 몫을 어떻게 나누는 것이 합당한지, 그에 대한 합의는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화쟁을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으로 옮기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화쟁을 위해서는 먼저 상반되는 주장을 살피기 위해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인내를 넘어 상대를 포용하고 용서해야 한다. 하지만 상대를 나와 같은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이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의상의 화엄철학에 보이는 전체와 하나의 관계

의상(義湘, 625~702)은 중국에 유학하여 화엄의 2대 조사였던 지엄에게 화엄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정통 불교철학자로, 파격적 주장과 기행으로 불법을 전파했던 원효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화엄철학을 전개했다. 그러나 같은 시대를 살면서 동일한 시대적 과제를 고민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사유에는 모두 화해의 논리가 바탕에 깔려 있다. 의상은 화엄철학의 근간이 되는 《화엄경》을 깊이 연구함으로써 자신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당나라를 비롯해 국제적으로 유행하던 화엄철학을 통해 자신이 당면했던 신라의 현실을 고민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의상의 저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다. 이 글은 80권이 넘는 《화엄경》을 7언(言) 30구(句) 210자(字)로 간명하게 풀이한 일종의 게송(偈頌)으로 의상이 제시하는 통합의 논리가 담겨 있다.

《화엄일승법계도》는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에서 시작해,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으로 이어지면서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로 끝나는 210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에서 의상의 사유를 살펴보는 데 가장 중요한 게송이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다[一卽一切多卽一]”라는 대목이다. 해당 문구가 나오는 초반의 12구는 다음과 같다.

法性圓融無二相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이 없고
諸法不動本來寂 제법이 부동하여 본래 고요하다네
無名無相絶一切 이름 없고 모양 없어 일체가 다 끊겼으니
證智所知非餘境 지혜로 알 뿐 다른 경계로 알 수 없네

眞性甚深極微妙 진성은 깊고 깊어 지극히 미묘하니
不守自性隨緣成 자성이 있지 않고 인연으로 만들어지네.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안에 일체 있고 일체 안에 하나 있으니
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네

一微塵中含十方 하나의 티끌에 온 세상(시방세계) 머금었으니
一切塵中亦如是 온갖 티끌이 다 이와 같다네
無量遠劫卽一念 셀 수 없는 무량겁(헤아릴 수 없이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의 흐름)이 한 생각에 지나지 않고
一念卽是無量劫 한 생각이 바로 셀 수 없는 무량겁이라
—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첫 두 구절인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본성, 곧 법성은 그 자체로 완전하여 두 가지 다른 모습이 없고 모두 고요할 뿐이라는 규정이다. 이는 만물을 하나의 존재로 귀일시켜 이해하는 화엄불교의 종지일 뿐 아니라, 원효가 화쟁론에서 사물의 두 가지 다른 양상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라고 파악한 불이사상(不二思想)과 궤를 같이하는 통찰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두 구절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참된 본성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만날 때만 의미를 얻게 된다는 화엄불교의 연기설을 부연한 것이다. 여기서 ‘자성(自性)’이란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본성을 가리키지만, 그 본성은 해당 사물만 따로 떼어놓아서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 그 사물의 크고 작음,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를 구분한다. 그러나 그런 차이는 다른 사물과 비교할 때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그 자체는 본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농구공과 지구는 얼핏 보기에 전혀 상관이 없는 물건처럼 보이지만 구형이라는 점에서 같은 종류다. 또 선인과 악인은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실은 서로 만날 때 비로소 선인과 악인으로 나누는 구분이 가능해지므로 단독으로는 선인도 악인도 될 수 없다. 일(一)과 십(十)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일과 십이 있으면 일도 자기 정체성이 있고 십도 자기 정체성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일과 십이 서로 만나야, 곧 연기(緣起)를 통해서만 의미가 생성된다. 말하자면 일은 단독으로는 의미가 없고 십이 있어야 일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십은 일이 있을 때 일의 열 배라는 의미를 비로소 가진다. 결국 십이 없으면 일이 의미가 없고, 일이 없으면 십도 의미가 없다. 곧 일과 십은 같다. 이것이 바로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각자의 자성이 따로 없고 다른 사물을 만날 때만 자성이 확인된다는 의상의 법계연기설이다.

의상은 이런 사유를 거쳐서 마침내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다’라는 유명한 통찰을 이끌어낸다. 이어지는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은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일체 안에 하나가 있으므로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라는 뜻이다. 《화엄경》 전체의 핵심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의상은 더 나아가 이 명제를 시공간적 지평에서 바라본다. 먼저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라는 구절은 공간적 지평에서 하나와 전체의 관계를 정리하는 언명이다. 곧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존재인 하나의 티끌에 온 세상 전체가 모두 들어 있을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티끌이 다 그러하다고 풀이한다.

티끌 하나에 온 우주의 이치가 있다는 말은 온 우주의 이치가 티끌 하나하나마다 다 들어 있다는 이야기다. 공간적 지평에서 사물을 이와 같이 이야기할 수 있다면 시간 또한 마찬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의 티끌에 온 우주가 들어 있다면, 찰나의 순간에 영원이 들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상은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이라고 하여, 영원의 시간이 일념의 짧은 시간과 같다고 이야기한 다음 다시 일념의 짧은 시간이 헤아릴 수조차 없는 무량겁과 같다고 마무리한다. 무량겁이란 헤아릴 수 없이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의 흐름을 말한다. 그런데 의상의 화엄철학에 따르면 이 무량겁은 일념의 짧은 순간과 같다. 곧 영원의 시간과 찰나의 시간이 같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한순간에 영원의 시간이 들어가 있고 영원의 순간을 이루는 찰나의 매 순간이 다 그렇다.

물론 이런 통찰은 의상이나 화엄철학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점적인 사유물은 아니다. 이를테면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예언〉에서도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고 했는데 이 시구는 “하나의 티끌에 온 세상 머금었으니 온갖 티끌이 다 이와 같다네[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라고 한 《화엄일승법계도》의 법문과 동일한 통찰을 담고 있다. 또 ‘영원은 지금이 모여서 생긴 것’이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단호한 시구는 물론이고,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온 세계를 구하는 것’이라는 탈무드의 오랜 경구도 모든 동일한 사유에서 비롯된 통찰이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는 관세음보살

필자는 한국철학의 역사적 전개양상을 두고 보편적 맥락에서 당대 지성사를 충실하게 반영하면서 한국의 고유한 현실을 고민할 때 한국의 고유한 철학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아울러 삼국시대부터 1,300여 년을 관통하는 한국철학의 특징으로 ‘통합과 포용’이라는 가치를 꼽기도 했다. 실제로 한국적 사유는 양극단을 통합하고 상대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왔다. 원효, 의상, 의천, 지눌을 비롯한 불교철학자들은 물론 동학의 최제우를 거쳐 현대 한국의 기독교 계열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극단의 통합과 포용이라는 일정한 흐름은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원효의 화쟁과 의상의 화엄철학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철학의 이 같은 특징은 모두 불교철학에서 발원한 사유다. 그렇다면 불교철학은 한국철학사의 기원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한국적 사유의 고향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대 한국의 불교는 이런 초기의 사유에 걸맞은 지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필자의 얕은 식견으로 산중의 선승이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는지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사회적 고통을 야기하는 현실의 제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불교계의 실천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불교계가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목소리에 충분히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가 아닐까 싶다.

필자는 관세음보살을 세상의 소리를 듣는 보살이라고 생각한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관(觀)’ 자는 ‘본다’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이 경우에는 ‘듣는다’는 뜻으로 쓰였고, ‘세음(世音)’은 세상의 소리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소리를 다 듣는 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을 줄여서 ‘관음보살(觀音菩薩)’이라고도 하는데 관음보살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천수관음보살(千手觀音菩薩)이나 천목관음보살(千目觀音菩薩)은 관음보살의 여러 현신 중 하나다. 천수관음보살은 천 개의 손으로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해주는 보살이다. 중생을 고통에서 꺼내주기 위해 손이 천 개가 된 것이다. 천목관음보살의 눈이 천 개인 까닭은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보기 위해서다.

즐거운 소리를 모두 다 듣기 위해서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 천 개의 귀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즐거운 소리는 관세음보살이 듣지 않아도 된다. 구해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듣는 이가 바로 관음보살이다.

세상에는 강자가 있고 약자가 있다. 우리가 차별하지 않는다고 할 때는 약자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강자와 약자를 똑같이 대하는 것이 아니다. 강자와 약자를 똑같이 대하면 늘 강자가 이기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관음보살이 모든 소리를 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로 약자의 소리를 들으면 모든 소리를 다 듣는 것이다.

한국철학사의 새벽을 열었던 원효와 의상은 상구보리에 그치지 않고 하화중생을 동시에 실천했다는 점에서 약자의 소리를 잘 들었던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진리를 깨우치는 일과 중생과 고통을 함께하는 일이 다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현대 한국의 불교계가 이 두 철학자의 사유와 실천을 따라 약자의 고통을 먼저 보살피는 보살행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귀축’과 ‘귀향’의 길은 둘이 아니라 겹쳐 있는 한 길일 테니까. ■

 

전호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성균관대학교, 동 대학원 졸업. 16세기 조선 성리학 연구로 박사학위 받음. 민족의학연구원 원장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장자’ 구워삶기: 노장 전통의 신유가적 변용〉 〈‘열하일기’를 통해 본 박지원 사상의 근대성과 번역의 근대성 문제〉 등과 저서로 《한국철학사》와 《장자강의》 《공자 지하철을 타다》 외 등 다수.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