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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reset), 한국불교* / 박광서
- 재가결사로 새로운 흐름 만들어야
[74호] 2018년 06월 01일 (금) 박광서 gp0117@hanmail.net

 * 이 글은 불교평론과 경희대 비폭력연구소가 주관한 열린논단(2018년 4월 19일)에서 발제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 들어가며

   

박광서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한국사회는 큰 변혁기를 맞고 있다. 기우뚱거리던 한국호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갑자기 맞게 된 남북화해 분위기로 우리 민족의 새 희망을 말하고 있지만, 밝고 안정감 있는 사회를 만들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러한 전환기에 한국불교를 바라보는 시선은 불안하기만 하다. 지난 10년간 불교 신자가 무려 3백만이나 줄었으며, 출 · 재가를 막론하고 불교지도자들의 무기력증은 불교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한다. 미래의 한국사회에서 불교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불자들의 시대적 화두가 아닐 수 없다.

2. 한국사회, 병이 깊다

웰빙지수 등 여러 가지 지표는 한국사회가 경제성장에 비해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먼 사회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정부의 신뢰도와 사회통합지수 역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대상 30개국 중 최하위급인 29위로 전락하였다. 특히 자살률은 OECD 평균 자살률의 2.5배로 15년째 부동의 1위다. 신뢰도, 자부심, 행복도가 현저히 낮은 부실하고 불안정한 사회라는 것이다. 해방 이후 정치 · 사회 · 경제적으로 누적된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양극화(불평등)와 부정부패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 결과 함께 사는 세상이란 공동체 정신이 급격히 약화되고 좌절과 분노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1) 양극화(불평등) 해소해야

지구상에서 양극화 현상을 앞장서 이끌어가는 나라가 미국, 영국과 함께 바로 우리 한국이다. 한국의 상위 10%의 소득점유율은 미국 다음으로 2위다. 중산층이 사라졌다는 통계가 걱정스러우면서도 나만 탈락하지 않았으면 하는 소시민적 걱정만 하다가, 중산층이란 단어마저 생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철저히 파괴된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한국사회에서 양극화는 아직도 진행 중이란 사실이다. ‘노력하면 사회적 지위가 상승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1994년에는 5.3%만이 ‘불가능하다’고 답했으나, 20여 년이 지난 2015년에는 무려 62%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젊은이들의 만혼 · 비혼이 늘어 OECD 국가 중 15년째 저출산 1위인 초저출산 국가다.

2) 부정부패 척결하고, 사회 신뢰도 회복해야

부패는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가로막는 독소다. 권력으로 돈을 갈취하고 돈으로 다시 권력을 사는 부패한 지배층에 대한 민초들의 절망감은 넓고 깊다. 우리나라의 부패지수는 OECD 34개국 중 29위로 부패국가로 낙인찍혀 있다. 아태지역으로 국한하면 한국의 부패지수는 단연 1위다. 이대로는 사회가 정상적으로 굴러가기 어렵다. 탐욕과 불의가 판치는 사회, 그래서 “이게 나라냐?”고 묻지 않았던가. 사회 신뢰도 회복을 위해 대수술이 필요한 이유다.

3) 공공성 제고 절실하다

이 시대의 화두인 양극화의 해소와 부정부패의 척결은 근본적으로 국민의 정치사회 의식이 달라져야 가능하다. 소수 패거리의 이익을 위해 국가정책이 결정되는 경우 국민의 신뢰는 배신당한다. 갑질이 몸에 뱄거나 속임수와 은폐의 달인이 높은 지위로 올라가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과 미래세대에까지 전가된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정치와 사회에 최소한의 관심을 가져야 하며, 특히 정치가와 정치꾼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변화의 핵심은 한마디로 ‘공공성’의 회복이다. 급속히 개인화 · 파편화된 현대생활 속에 우리 사회의 공공의 가치는 너무 쉽게 무너져 버렸다. 전 국민적 공황상태를 겪었던 세월호 침몰 사건 직후, SBS TV에서 우리 사회의 공공성 문제를 다룬 바 있다. 사회를 건강하게 지탱하는 네 가지 요소는 사회현안에 대한 의사 결정 또는 사회자원의 배분과 활용 과정에서, 사익보다는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지(공익성), 얼마나 형평성에 맞는지(공정성), 정보공유 등을 얼마나 투명하게 처리하는지(공개성), 일반 시민의 참여 의지나 역량(공민성 혹은 시민성) 등인데, 우리나라는 안타깝게도 이 모든 영역에서 OECD 회원국 중에서 최하위 수준(각각 33위, 33위, 29위, 31위)이었다.

공익성과 공정성은 양보와 배려, 희생과 헌신이 몸에 배야 가능하기 때문에 교육 · 문화의 질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는 만큼 시간이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투명성과 시민성은 국민의 의지와 합의만 있으면 이른 시일 내에 선진국 수준으로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3. 종교지형의 변화

우리나라는 세계의 여러 종교가 팽팽하게 경쟁하며 공존하는 거의 유일한 나라다. 게다가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가 그 신자 비율에 비해 정치 · 사회적 영향력이 비정상적으로 큰 독특한 나라이기도 하다. 특히 지난 10년간은 개신교는 정치세력화를 위해 ‘죽기 살기’로, 고도의 정치집단인 천주교는 ‘죽은 척 살기’로, 사회 부적응증을 앓고 있는 불교는 ‘죽어지내기’로 한 시기다.

1) 불교 인구 3백만 줄다

2016년 12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의 내용 중 종교인구 조사결과는 한국의 종교지형이 10년 전과 크게 달라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 종교인구는 지난 수십 년간 꾸준히 증가해 2005년도에 53%로 처음으로 종교인이 무종교인보다 많아졌으나, 최근 10년 사이 44%로 줄어들어 무려 9%라는 큰 폭으로 감소했다.

‘탈종교화(세속화)’ 추세는 세계적인 현상이기에 총 종교인구의 감소는 그리 놀랄 만한 결과라고 할 수는 없으나, 종교별로 들여다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불자들 300만 명이 무종교인으로, 천주교인 110만 명이 개신교인으로 이동한 셈이 되어, 결과적으로 개신교 인구가 불교 인구를 추월하고 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1위의 종교로 올라선 것이다. 일반적인 탈종교 추세와 다르게 유독 개신교 신자 수가 증가한 배경은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종교 상황과 사회현실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일반 국민으로서는 경제 양극화와 정치 · 종교 패거리 문화로 인해 생존의 위협과 공동체 의식의 상실을 겪고 있는 암울한 상황에서 어떤 집단에 속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절망적 환경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구원과 보상이 있다는 심리적 보호막으로, 이권에 얽혀 있는 사람에게는 정치 · 경제공동체로서 개신교계가 상대적으로 충분히 이용가치가 있는 집단으로 비쳤을 것이다.

개신교 학자들 스스로 분석한 개신교인 증가 배경도 흥미롭다. 우선 한국교회가 대형화 · 권력화하면서 자본주의 기업으로 변형, 생존과 비즈니스가 최우선 관심사인 경제공동체로 바뀌었을 뿐이라며, ‘세속화’에 초점을 맞춘 비판적 시각을 표출했다. 또 다른 학자 역시 “종교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삶과 연루돼야 한다. 대중의 사회불안과 생존위기와 같은 고통에 무감각하고 응답하지 못한 종교의 위기이며, 그런 공감의 연결망이 가장 적극적으로 실행되는 장이 바로 개신교였던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정치 · 사회적인 피폐가 사람들을 개신교라는 텐트 속으로 몰아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딱히 불교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300만의 불자들을 잃은 불교가 가장 뼈아프게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개신교를 우군 삼아 극우세력을 결집시킴으로써 정권을 유지해왔던 이명박 장로 대통령 5년과 보수 박근혜 정부 4년을 생각하면 인구센서스 결과와 개신교 학자들의 분석 결과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두 정권 동안 국민은 종교 과잉, 정확히 말하면 개신교의 정치 과잉 시대를 겪은 것이다.

2) 종교의 권력화를 경계한다

선악 놀이와 편 가르기에 익숙한 기독교 근본주의는 ‘다른 것, 다양한 것’을 ‘틀린 것, 잘못된 것, 없어져야 할 것’으로 간주하는 성향이 짙다. 불신과 갈등의 늪에 빠진 한국사회에서 사회 · 경제적 기대치가 사회적 비난이나 불이익보다 클 때 망설임 없이 종교 패거리 문화가 작동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치집회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십자가는 정치에 뛰어든 종교, 종교 뒤에 숨은 정치를 보는 듯하다. 부도덕한 정권과 탐욕스러운 재벌 간의 유착에 신정을 꿈꾸는 기독교가 가세해 서로 숙주가 되어 빚어낸 정 · 경 · 교 삼합의 기묘한 모습이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박근혜 정부는 종교계나 시민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지극히 편향적인 기독교 인사들을 연달아 고위공직에 임명, 정교분리의 헌법정신을 어지럽혔다.

종교인 과세도 그렇다. 역사적으로 자유는 ‘종교 자유’를 의미하고 평등은 ‘조세 평등’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은 죽음과 세금뿐”이라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명언처럼,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지난 수십 년간 종교인에게 세금을 걷지 않았던 유일한 나라다. 종교 앞에만 서면 왜 정치는 작아지는가. 국민의 저항을 의식해 2018년부터 시행하기로 했지만, 아직도 일반 국민에 비해 엄청난 특혜를 주는 형식적 과세제도를 보며 또다시 개신교 권력을 실감하게 된다.
반면, 사랑의 교회 불법 건축 관련 파기환송 1심(2017년 1월)과 2심(2018년 1월)에서 잇달아 ‘공공도로지하점용취소 처분’ 판결이 내려진 것은, 종교 과잉의 한국사회에서 그나마 7년 6개월 만에 종교 권력을 심판한 상징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억될 만하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바라는 최근 사회적 분위기와 국민의 바람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4. 한국불교, 리셋해야

종교도 국민의 화합과 행복증진을 위해 사회의 변화를 함께 이끌어갈 책임이 있다. 사회갈등 해소를 위한 지혜와 역할이 없는 종교, 사회의 공공성 제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종교는 도태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불교는 지도자들의 리더십과 사회적 실천에 대한 신뢰가 높지 않아, ‘연기의 그물망, 함께 사는 세상, 구세대비(救世大悲)’라는 구호가 허망하게 들린다.

지난 수십 년간 불교는 세상의 흐름을 선도하기는커녕 사회의 변화에 맞춰가는 것조차 힘겨워해 결국 제1의 종교 자격을 박탈당한 셈이다. ‘믿음직한 어른’인 줄 알았던 불교계가 ‘초라한 가출집단’으로 비치거나 ‘덩치 큰 바보’가 아닌가 의심까지 받게 된 현실이 가슴 아프다. 건강한 사회를 위한 지지대가 되고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불교가 되기 위해, 한국불교는 과연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근본적으로 되짚어 봐야 한다. 사회불안과 대중의 고통에 함께하지 못한 불교의 무감각과 무책임을 철저히 깨닫는 데서 출발해, 바른 모습으로 신뢰를 회복하고, 사람을 모아 사회 인재로 육성하며, 시대변화에 적응할 힘을 기르는 새로운 결사가 시급한 이유다.

1) 종단 신뢰회복, 절실하다

지난해 한국불교계, 정확히 말해 조계종단 내에 탄핵 시국에 많이 듣던 구호 ‘적폐청산’의 목소리가 높았었다. 불교 시민사회단체들이 주도하여 ‘청정 승가공동체 구현과 종단개혁 연석회의’라는 단체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저녁 종로 보신각에서 촛불 법회를 여는 등 연대 활동을 하기도 했다.

지금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에는 정법 수행이 사라지고 범계일탈이 만연하면서 승가공동체는 붕괴하고 연일 불자들이 절을 떠나고 있습니다. 일부 지도층 승려들의 은처, 폭행, 성폭력, 공금횡령, 도박 등 범계행위는 이미 임계점을 넘어 종단의 사회적 신뢰를 붕괴시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여기에 신자유주의적 탐욕과 물신주의까지 절에 스며들고 사방승가 정신을 상실하면서 승가공동체는 붕괴하여 스님들은 무소유, 평등, 자비의 정신을 상실한 채 각자도생하고 있습니다.

종단개혁 연석회의가 조계종 적폐에 대해 내놓은 소책자의 머리글 내용으로, 일반 사회의 양극화와 부정부패까지 그대로 빼닮은 종단 풍토와 피폐한 불교계 상황을 엄중하게 지적하고 있다.

사회변화에도 못 미치는, 아니 스스로의 무게도 추스르지 못하는 병약한 한국불교를 어찌할 것인가. 사찰 수는 늘었는데 불교의 역할과 영향력은 오히려 줄었다면, 현재 모습의 불교는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종교 아닌가 심각하게 자문해 봐야 한다. 종단 지도부는 비전과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돈과 권력은 집중되어 특정 패거리의 유지 · 관리에 역량을 소진하다 보니, 출가자 급감은 물론 각자도생의 진흙 길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느낌이다. 진지한 성찰이 없다면 10년 만에 불자의 3분의 1이 떠나버린 엄혹한 현실을 극복하기는커녕 불자 수 감소는 더 가속화할 것이 뻔하다. 리영희 선생은 생전에 “나는 부처님의 제자이지, 불교 신자는 아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불교지도자들은 불자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불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이제야말로 불필요한 과대포장을 과감히 버리고 세상마저 버릴 만큼 크게 비우리라던 초심으로 돌아가, 출 · 재가가 함께 지혜롭게 소통하며 불교의 백년대계를 다시 세우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그 첫걸음은 종단의 지도부를 공심 있고 유능한 분들로 모시는 일일 것이다. 그다음, 미래의 한국불교를 이끌어갈 출중한 출 · 재가 지도자들을 어떻게 배출할 것인지를 새로운 화두로 삼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불교에 희망은 없다.

2) 교육이 문제다

지난 30년간의 종교인구 변화 조사결과를 보면, 이미 10년 전부터 종교인 수가 감소세로 돌아섰다. 문제는 불교계다. 스스로 신앙심이 깊다며 자신의 종교에 자부심을 가진 신도 비율이 개신교의 경우 46%에서 52%로 오히려 6%나 증가한 반면, 불교는 35%에서 21%로 14%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조계종 종책연구기관인 불교사회연구소가 발표한 여론조사에서도 신앙생활의 만족도를 묻는 질문에 ‘만족한다’고 답한 응답자는 개신교가 65.1%로 가장 높았으며, 가톨릭은 50%, 불교는 34.3%로 가장 낮았다.

불교계에 빨간불이 켜졌다. 무엇이 문제인가. 2000년대 들어 사회적으로 힐링 문화 선호도가 높아지는 분위기 속에 템플스테이 등 유연한 프로그램 접속을 통해 불교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그것이 바로 젊은 층이나 고학력자 포교로 직접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관리부실 때문이다.15)

기독교는 사랑이 넘치는 종교이지만, 증오의 벽 역시 두껍다. 선악 이분법적으로 편 가르기에 익숙해 삶이나 선교가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우리 편 아니면 버리면 그만이다. 그에 비해 불교는 증오를 버리라며 누구도 배제하지 않지만, 반면에 (현재의 한국불교는) 자비도 모자라 주변의 어려움과 사회 고통에 무감각할 가능성이 크다. 내치지도 않지만 품지도 않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종교가 돼버린 것이다. 그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불교의 대패, 기독교의 판정승이다.

사회를 움직이는 힘인 파워엘리트 수는 기독교가 불교의 3.5배 정도라고 한다. 종교의 영향력은 그 종교의 신자 수와 사회 적응력, 응집력이 함께 작용하는데, 기독교의 정치 · 사회적 영향력은 대체로 불교의 5배 또는 그 이상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런 불균형은 최근에 갑자기 불거진 것이 아니고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사회변화에 무지해 자체 문제에만 매달려 살아온 불교지도자들의 책임이 너무도 크다.

불교가 쇠락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출 · 재가를 막론하고 불교지도자 양성에 실패한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어느 조직도 유능한 인재 없이 지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교는 해방 이후 수십 년간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를 따라잡는 것조차 버거웠던 데다, 몇 차례의 종단 사태를 겪으면서 내부 에너지를 소진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인재를 키우는 데 정성을 들일 만큼 여유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조계종에서 승려의무교육 제도가 자리를 잡은 지 20여 년밖에 안 돼 이제 겨우 체계적인 교육과정으로 출가자를 배출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에 반해 재가자는 누가,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내용과 수준으로, 얼마 동안 교육해야 할지 관심 둘 여유조차 없었다.

한때 성철 · 청담 · 숭산 · 법정 스님 같은 큰스님들의 영향으로 불교의 이미지가 좋아 보이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도 불교계는 내부 권력 싸움에만 몰두했지, 그런 사회 분위기를 이용해 크게 도약하겠다는 의지와 구체적인 실천 방안은 없었다. 인터넷 시대에 사는 수백 만의 불자가 또 한 사람의 도인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더구나 재가자 입장에서는 그런 도인에 대해 존경심은 가질 수 있어도 그대로 닮아야 할 롤모델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불교 전통에서 깨달았다는 사람일수록 대체로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은 숨길 이유도 없고 숨겨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실천은 지혜를 구한 다음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절차가 아니라, 얻은 지혜의 깊이를 확인하기 위한, 다시 말해 다른 수준의 수행이라고 보아야 한다. 수행이 깊을수록 지혜롭고 자비로우며, 많이 참고 희생하면서 중생의 행복과 사회의 공공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닐까. 불교적 세계관과 정서로 사회실천이 몸에 밴 재가불자의 양성이 절실한 과제가 아닌가 싶다.

한국불교계의 현실은 사찰 · 문화재 · 영혼 관리와 종단 지도부의 유지, 관리에 불교 자원의 대부분을 소진하기 때문에 오히려 건강한 사회를 위한 대사회적 종교기능은 소홀하거나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때다. 불교의 순기능이 현실사회에서 극대화되는 방안은 무엇인지, 명상수행만으로 개인의 문제와 세상의 모든 문제도 함께 해결될 것인지, 포교와 교육은 그 목적, 내용, 방법이 시대의 흐름에 맞게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치열하게 고민하며 함께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특히 재가불자 기초교육과 관련, 세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첫째, 재가 초심자의 기본 교육 기간은 석 달을 넘기지 않아야 한다. 실제로 일생을 불교 공부에 바친 사람들이 오히려 미로에 빠진 듯 헤매는 경우를 보게 되는 것도 안타깝다. 평생 공부하고 수행해도 어렵고 안 되는 종교라는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현대사회에서 불교의 대중화는 아예 불가능하다.

둘째, 교육 내용은 기초교리를 충분히 숙지해 몸에 배도록 가르치자. 모든 경을 이리 꿰고 저리 꿴다고 해도, 한 가지라도 확실히 소화해 한평생 불자답게 사는 것만 못하다. 예컨대 교육의 핵심은 ‘무소유(無所有)’와 ‘사회적 책임(責任)’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모든 고통은 탐욕으로부터 생기고, 따라서 욕심을 버리면 어떤 것도 두려울 게 없다. 세상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또 세상은 얽히고설킨 인연의 집합체다. 나 혼자 자유롭다고 세상이 저절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공업중생의 공동책임을 자각하여 사회의 고통을 내 문제로 받아들이며 자비실천으로 곧바로 나아가지 않으면 아직 교육된 불자라고 할 수 없는 이유다. ‘맑고 따뜻하게’ ‘지혜와 자비’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以生其心)’도 ‘무소유와 책임’의 다른 표현 아닌가.

셋째, 일상의 생활에서 바로 적용되는 실제 사례 중심으로 살아 있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불교가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례들에 대해 해석하고 답을 줄 수 없다면 쓸모없는 종교다. 지루하지 않도록 직접 자신과 사회의 문제에 불교 정신을 대입해 소화 · 흡수 · 해소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적으로 철저하게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어느 수준에 오른 불자라면 가끔 깊이 있는 연수를 통해 자신의 공부와 삶을 재확인하는 과정은 필요할 것이다. 먼저 공부하는 시간, 장소, 내용 등에 대해서도 기존 관념 깨기를 시도해야 한다. 사는 곳이 ‘법당’이요, 앉은 곳이 ‘선방’이며, 하는 일이 ‘화두’요, 모든 인연은 ‘도반’이고, 이 세상이 바로 ‘극락’이라고 받아들이는 상근기 훈련 말이다. 더 나아가 출가자와 다르게 재가자이기에 개인 문제를 넘어선 모든 사회문제들-가족, 이웃, 직장에서부터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문화, 종교, 환경, 인권 등-을 공부의 보조 자료로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 불교의 기본원리를 ‘유익하고 재미있게’ 여러 각도로 재확인함으로써, 갈등 해소와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불교적 처방이 다른 어떤 처방보다 유효하다는 확신을 심어 주어야 한다.

자신만을 챙기고 사회구성원으로서 역할과 공동체 의식이 부족한 불교계에 대해 함석헌 선생이 했던 말을 되새겨 본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 다르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이다. 나는 내 참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불교는 마음 닦는 것을 일로 삼지만, 유교는 일을 통해서 마음을 닦는다.”라며 사회적 역할이 없는 수행을 폄하하기도 했다. 단순히 유학자의 트집 잡기로 생각해선 안 된다. 실학의 입장에서 이유 있는 충고이며, 불자들은 겸허히 새겨들어야 한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답하기 위해 ‘불교’를 ‘출가자’로, ‘유교’를 ‘재가자’로 바꾸기만 해도 불교의 위상은 더 분명해지지 않을까.

3) 제3의 길, 재가결사(在家結社)

공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불교는 일반 도시민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가 대자비로 세상을 품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품을 능력도 없으며, 품고 싶지도 않은 것은 출가자의, 출가자에 의한, 출가자를 위한 산중불교이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세속사에 조금만 부대끼면 아무도 모르게 산속으로 숨어버리는 사례를 보아 온 기억 때문에 끝까지 함께할 수 있겠다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출가승들 중심으로 운영되는 종단에 대한 기대를 과감히 포기하고 재가불자들 중심으로 새로운 불교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할까.

미국 정치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은 조직의 퇴보에 반응하는 인간의 행동 양상을 ‘충성, 항의, 이탈’의 세 가지로 분류했다. 조직의 퇴행에도 불구하고 계속 충성심을 유지하거나, 조직에 남아 항의하기도 하며, 그마저도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면 아예 조직을 떠난다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의 불교의 상황을 요약하자면, 충성은 내키지 않고, 항의하기도 지쳤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이탈하는 수밖에 없다. 3백만의 이탈이 다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되지는 않겠지만, 충분히 검토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탈은 그저 자신의 결정으로 떠나면 그뿐,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으니 마음의 결정이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불교가 건강을 되찾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떠났던 불자들이 돌아올 확률은 더 줄어들 것이 자명하므로 유효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불교(종단이든 가르침이든)에 실망해 이탈하는 경우도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개종 등 완전한 결별로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 경우 둘째, 불교는 실망이고 기독교는 싫어 무종교인으로 살기로 한 경우 셋째, 불교 자체는 차마 버릴 수 없어 불교계를 떠나 당분간 따로 사는 방법을 모색하는 경우다. 각각 재혼, 독신, 별거에 해당하리라.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군대식으로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첫 번째 개종의 경우는, 아예 힘센 적군에 항복하여 언젠가 총구를 아군에게 겨눌 수도 있다. 두 번째 무종교의 경우는, 전쟁도 두렵고 아군의 지리멸렬한 모습도 실망스러워 전쟁을 피해 총을 버리고 평민으로 숨어 살기로 한 부류다. 세 번째는 이탈 아닌 이탈이다. 전쟁은 두렵지 않으나 썩은 아군 지도부로는 필패한다는 절망감에 따로 민병대를 조직해 국가를 건지기로 한 경우다. 세 번째의 경우는 본 조직에서 보면 이탈이겠지만, ‘대안’을 통해 재건을 모색하는, 항의의 다른 형태이기도 한 제3의 길이다. 필자 개인의 불교 인생을 돌아보면 룸비니학생회, 교수불자연합회, 우리는선우, 참여불교재가연대, 종교자유정책연구원 등 모든 불교 활동은 종단과 일정한 거리를 둔 제3의 재가불교운동이 아니었나 싶다.

생각을 비우고 세상을 버려야 하는 출가자, 생각을 깊이 하고 세상을 온몸으로 품어야 하는 재가자, 같은 불자이지만 입장은 전혀 다르다. 섞일 수도 없고 흉내 내서도 안 되는 서로의 입장을 솔직히 인정하고 분명하게 역할 구분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출가하지 못해 세상 살기 힘들어하는 재가자나 세속욕 버리지 못해 스스로는 물론 교단까지 망치는 출가자만 양산할 최악의 가능성마저 맞을 수도 있다. 혹 지금 한국불교계가 그런 엇박자 상황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4) 무엇을 어떻게 할까

한국불교는 잠에서 깨어나 과감히 리셋(reset)하고 새로 디자인해야 할 때다. 무력감 · 상실감을 떨쳐내고 함께 이롭고 더불어 행복해지는 ‘맑고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기꺼이 마중물이 되겠다는 불자의 초심과 원력을 되살려야 한다.

그런데 재가자의, 재가자에 의한, 재가자를 위한 불교는 가능한가. 서양의 종교운동으로는, 5백 년 전 당시 영국을 지배하던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반대와 반(反)성직자 운동의 결과로 창립된 ‘성공회’의 출발 배경이 유사한 경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국불교사에서는 불교와 사회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재가자가 함 직한 신불교운동의 큰 바람을 일으켰던 만해 한용운이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해에게 종교가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 종교가 인류를 행복, 희망, 그리고 문명으로 이끄는 데 기여하느냐 못하느냐에 있었기 때문이다. 백 년 전 그가 〈조선불교유신론〉을 주창했을 당시에도 불교는 대외적으로는 권력과 금력에 굴복 · 야합하여 종교적 자주성을 상실했으며, 대내적으로는 ‘사찰에 갇힌 불교’ ‘승려들만의 불교’로 굳어져 폐쇄와 고립을 자초함으로써 민중과 분리되어 있어 사회적 기능을 하기엔 무기력한 상태로 보였다. 중생제도의 목적이 없는 수행만을 위한 ‘고요한 수행’에 반대하면서 ‘생사에 집착하는 것 못지않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중생구제에 힘쓰지 않고 열반에 안주하고 있는 것’을 강하게 질타하였다. 지금 똑같은 말을 해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만큼 선견지명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선각자의 혁명적인 제안과 실천 의지는 잠든 불자들을 깨우는 경종이었고 횃불이었으나, 화석화된 불교계 내부의 타성과 보수성으로 인해 빛을 보지 못한 채 그때 제기된 문제들 대부분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불자들에게 미해결의 숙제로 그대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재가불자들이 해야 하고(당위), 할 수 있고(능력), 하고 싶은 것(희망)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선 기존 교단의 역할과 차별화하여 당분간 재가불자의 특성에 맞는 활동에 치중해야 한다. 기본적으로는 불교 공동체요, 느슨한 사회 공동체이기도 하다. 도시 생활 속에서 지혜와 자비의 두 팔로 세상을 품는 ‘시민불교’라고 할까.

새로운 재가운동을 시작하면서 꼭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오랜 원력 사업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인재양성이다. “사람이 전부다.”라는 말이 있다. 세상사는 모두 사람에 의해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결국 사람에 의해 결실을 맺기도 하기 때문이다. 불교가 사회에서 유용한 종교로 인정받는 방법 중 하나는 사회를 움직이는 각 분야의 지도자가 불자일 때이다. 그러나 불교계에서는 세상을 움직일 걸출한 불교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꿈을 꾸지 않고, 이를 뒷받침할 의지나 제도도 거의 없다. 특히 재가 지도자 양성은 아예 머릿속에 없다.

반면에 기독교의 경우는 다양한 분야의 인재 확보가 선교의 주목적이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교육기관에서 믿음의 새싹 키우기가 이루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문가의 일자리 창출과 사회활동 무대 제공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신도시의 대형 종교부지는 자산가치뿐 아니라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 효용 가치와 선교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도심의 문화 공간 역할을 하고 있어 불자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불교도 일부 진행하고 있다며 항변할지 모르나 규모와 내용 면에서 기독교와는 아예 비교가 안 된다. 게다가 공격적으로 정치 · 사회 · 경제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함으로써 신자들의 사회 진출을 용이하게 돕고 그렇게 성장한 신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충성도는 높을 수밖에 없다. 선순환 구조이다.

이제라도 자비, 생명, 평화의 불교적 가치에 익숙하고 공공의식과 사회참여 의식이 높은 재가지도자를 다양한 방면에서 지속적으로 양성하는 것만이 불교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 아닌가 싶다. 불교학자가 되라거나 평생 불교 공부만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사회에서 필요한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미래 지도자가 될 만한 젊은 인재 수백 명을 찾아내고 지속적으로 지원하며 훈련시켜야 한다. 신라의 ‘화랑’과 유사하달 수 있을까. 일본의 창가학회(SGI) 배경의 ‘공명당’과 정치인 배출을 위한 ‘정경숙’ 등도 참고할 만하지만, 우리 경우는 분야에 제한이 없다는 점에서 다르다.

둘째, 싱크탱크(think tank), 즉 연구개발이다. 지구적 안목으로 미래사회를 예측하고 비전을 찾아냄으로써 미리 대비하는 사회가 건강하고 안정적인 발전을 이루는 것은 당연하다. 세계 최강국일수록 각 분야의 고급 두뇌들이 모인 각종 연구소가 활성화되어 있는 이유다. 불교계 역시 불교적 철학을 바탕으로 한 한국사회의 예측과 처방은 물론, 거꾸로 한국불교를 어떻게 시대정신에 맞게 분석하고 유도해 나갈지 연구하는 기관이 있어야 한다. 매년 불교계는 물론 사회 각 분야에서 관심을 가질 정도의 연구보고서가 수십 건 발표되는 수준이 되려면 박사급 전문가 10~20명 정도로 구성되어야 한다.

필자는 20여 년 전부터 불교와 사회를 접목하여 상시 연구하는 싱크탱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고, 1999년 참여불교재가연대를 창립한 후 2003년 부설 전문기관으로 사단법인 불교아카데미를 설립했지만 아쉽게도 연구소의 역할과 기능은 미진하다. 10여 년 전부터는 종단 차원 혹은 개인이 만든 연구소가 생기기 시작해 불교와 사회를 연결시킨 연구기능을 확대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어 반갑기는 하나, 적은 예산에 1, 2인이 운영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어 아쉽다.

그밖에 불교 시민사회단체의 열악한 생태계를 복원, 활성화할 인적 · 물적 지원과, 세상 속에서 불교의 가치를 펼치기 위한 교육 · 언론 · 복지 등 사회기관의 확충 등 불교와 삶이 합치되는 활동공간을 넓혀주는 것도 불교발전의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다.

결국 한국불교의 모델은 한국 불자들이 새로 만들어야 한다. 이 ‘길 없는 길’을 누가 어떻게 닦아나갈 것인가. 20세기 중국 문학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가인 루쉰이 〈고향〉이라는 작품에서 한 말을 되새겨 본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5. 마치며

불교가 처해 있는 한국사회는 결코 녹록지 않다. 정치 · 사회적으로도 불안정하고, 서양종교의 공격적 세 불리기는 불교가 움직일 공간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종교는 동력의 한 축으로 순기능도 하지만 역기능 또한 적지 않다. 무엇보다 과잉과 결핍은 둘 다 병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한국 기독교도 문제지만,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불교 또한 사회적 부담이 되고 있다. 공간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친근한 불교로 거듭나고, 불신 · 배제보다 신뢰 · 배려의 자신감으로, 갈등 · 분열이 아닌 상생 · 통합의 불교 정신을 다시 살려 건강한 불교와 함께 차원이 다른 선진사회가 앞당겨지기를 꿈꿔 본다.

이 시대의 불교 재건을 위한 화두로 ‘재가결사’를 제안한다. 첫째 부처님 가르침 아니면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확신, 둘째 현 출가 중심의 종단만으로는 사회변화조차 따라가기 어렵다는 점 재확인, 셋째 재가불자들의 주인의식과 원력이 부족하다는 각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산 10% 기부운동’을 통한 모금으로 위에서 언급한 새로운 불사(인재양성, 싱크탱크, 연대 지원, 기타 사회 불사 등) 추진이 그것이다.

출구가 없이 꽉 막혔을 때 초심으로 돌아가는 정신은 이 시대 불교계에도 꼭 필요하다. “그 시대 그 조직의 문제는, 그 시대 그 조직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다.”며 발상의 대전환을 일깨웠던 아인슈타인의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사회를 보듬고 선도하는 불교로 다시 우뚝 서기 위해, “변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던 전 일본 민주당 간사장 오자와 이치로의 좌우명이 불교계에 새 바람으로 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23)

1991년 재가결사 모임 사단법인 ‘우리는선우’를 창립하면서 다짐했던 결사문(結社文)의 일부를 옮겨놓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 불자는 달라져야 하고, 불교는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산중에 갇혀 있거나 경전 속에 묻혀 있어서는 안 된다. 가르침 따로 행 따로, 종교 따로 삶 따로라면 그 가르침이나 종교는 이미 개인이나 사회를 이끌어 갈 힘이 없는 죽은 가르침이며 종교이다. 불국정토의 구현, 즉 사회의 불교화는 불교의 사회화가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중략) 우리는 재가이기에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재가이기에 더 효율적으로 해낼 수 있는 불사(佛事)를 폭넓게 제시하고 구체적으로 실현해 보여야 한다. 삶의 현장이 곧 수행의 장이라는 투철한 결사 정신으로……. ■

 

박광서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미국 MIT 연구원을 지냈으며, 불교의 사회참여운동에 적극 나서 우리는선우(재가신행결사단체) 이사장, 참여불교 재가연대 상임대표, 종교자유정책연구원 대표 등을 역임했다. 현재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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