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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와 공모: 종교계 성범죄의 발생과 은폐*/ 권최연정
특집 | 한국사회의 성윤리와 불교
[74호] 2018년 06월 01일 (금) 권최연정 nuajoui@gmail.com

 *  이 글은 필자의 논문 〈여성혐오와 교회 내 성범죄〉(2017)를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종교계_미투

내가 기억한다. 내가 증거다.
우리가 기억한다. 우리가 증거다.
우리는 여기 있다. 너를 위해 여기 있다.
세상아 들어라. 우리가 말한다.

인용한 문구들은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서울 광화문, 홍대, 대학로 등 주요 도심에서 연속적으로 주최하고 있는 ‘성차별 · 성폭력 끝장집회’의 행진구호 중 일부다. 이 구호들에는 미투 운동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주지하다시피 여타 범죄에 비해 성범죄 사건의 공개와 신고율이 유독 떨어지는 데에는 가해자나 주변인의 적대적 반응에 대한 염려가 크게 작용한다. 그러므로 미투 운동의 시작은 무엇보다도 ‘폭로’일 수밖에 없다. 범죄를 범죄라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말하겠다는 것이 미투 운동의 첫 번째 결의다. 폭로는 또한 다른 피해자들의 증언을 불러낸다는 점에서 유용하고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미투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말해도 된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함께 말할 것”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이 ‘연대’가 바로 미투 운동의 두 번째 결의다.

‘문화예술계 미투’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계 미투’ 해시태그 운동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종교계도 일찌감치 이 무대에 등장했다. 천주교 신부의 성폭행 시도가 드러나면서 종교계 성범죄 문제가 수면에 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종교계 미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천주교만의 문제도 아니다. 종교계에 몸담은 여성 활동가들은 오랫동안 이 문제와 씨름해왔다. 특히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우리 사회가 본격적으로 ‘여성혐오’를 말하기 시작하면서 종교계의, 특히 성직자의 성폭력 문제는 활동가들, 관련 연구자들, 정책 입안자들 사이에서 밀도 있게 다루어져 왔다. 이들이 파헤치고자 했던 것은 종교계의 성범죄가 각 종교의 특정한 관점과 수사를 동원한 여성혐오 문화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성범죄가 발생했을 때 은폐의 고리를 강화하는 신학 · 교학적 기반과 공동체의 압력이 크다는 점에서, 그리고 역으로 그러한 환경이 성범죄가 발생하기 쉬운 토양이 된다는 점에서 종교계 성범죄는 폭로와 연대를 더욱더 필요로 한다. 종교계의 성범죄는 가해자가 성직자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이 경우 피해자가 범죄 행위를 거부하거나 범죄 사실을 단번에 인지하기 어렵다. 피해를 인지하더라도 ‘가해자=성직자’라는 사실 때문에 내적 혼란이 일어나고, 가해자의 지위와 주변인의 반응이 부담되어 사실을 밝히기보다는 신앙 공동체를 떠나기 쉽다. 그러므로 각각의 사건을 대할 때 결과보다는 조건을 살펴야 한다.

이 글에서는 먼저 종교계에서 성범죄가 발생하고 지속되며 은폐되기까지 하는 조건들을 살펴보고, 이러한 조건들을 없애기 위해 종교인 개개인과 집단으로서 종교계가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지 전망해보고자 한다.


가해자의 기회

존 곤죠렉은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 건강관리센터나 상담소, 정신과 등 돌봄노동 기관에 대한 제재와 규칙이 정교해지면서 성범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교회 내 성폭력이 개선되지 않는 것은 교회의 조직적 · 제도적 실패라고 말한다. 그는 개인의 성향만으로는 성범죄가 실제로 일어나는 걸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다. 개인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착취할 ‘기회’가 있어야만 성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이 기회란 바로 범죄와 ‘공모’하는 환경이다. 여기에는 우선 가해자가 범행 의도를 갖고 만들어내는 물리적 · 정서적 환경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성범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를 꺼리는 주변인, 가해자를 감추고 두둔하는 신앙적 기반들이 이 범행의 발생과 사후 처리 과정을 돕는다.

가해자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취약한’ 피해자를 골라내고 신뢰를 얻는 것이다. 2000년대 초 보스턴 대교구 가톨릭 사제 성추행 사건의 시작을 알렸던 게오건 신부는 아버지가 없는 가정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자녀들에게 아버지상을 제공하고 싶었던 어머니들은 게오건을 식구처럼 대하며 가정 안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게오건은 체포당한 후 정신감정을 담당한 의사에게 결손가정의 아이들이 자신에게서 아버지상을 찾아 행복한 마음에 친밀한 행동을 했다고 말한다. 그 아이들의 친밀한 행동에 자신을 흥분시키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헷갈렸다고’,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은 자신에게 친밀하게 굴지 않았기 때문에 헷갈리지 않았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아이들이 친밀하게 대했기 때문에 자신의 ‘친밀한’ 행동도 나쁘지 않다는 것, 그것이 이 범행의 ‘사전 정당화’다.

카롤린 엠케는 폭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 안에서 준비되며, 폭력이 실제로 이루어지려면 사전 정당화와 사후 동의의 과정이 반드시 수반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폭력의 구조를 이해하려면 누구를 표적으로 삼는지, 어떤 장벽과 장애물을 제거하려 하는지 살펴야 한다고 말이다. 게오건처럼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피해자에 대한 설득이 이루어진다. ‘안수 또는 치유 행위다’ ‘아버지로서의 친밀한 행동이다’라는 변명은 성직자 성범죄에 단골처럼 등장한다. 2016년 8월 미성년자 상습 성폭행으로 면직된 이동현 목사의 경우에서 전형적인 정당화와 협박에 가까운 설득 과정을 볼 수 있다. 그는 범행 과정에서 “누구나 나를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니 너의 잘못이 아니”라며 안심시키고,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전하자 “한국에서 여자가 이런 식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네 인생은 망한다”라며 겁을 주기도 했다.

말뿐만이 아니라 물리적 · 정서적 ‘고립’ 역시 주요한 기술이 된다. 수련과 사역이라는 명목으로 미성년자들을 해외의 고립된 환경에 처하게 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산사(山寺)라는 고립된 환경에서 종무원을 성추행하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정서적 고립은 더욱 심각한 문제다. 이동현은 “네가 입을 뻥긋하면 사탄이 그 말을 이용해서 우리 사역을 망친다”며 대의를 위한 희생을 강요하고, “네가 떠나면 나는 너무 힘들어서 사역을 못 한다”며 인정에 호소하기도 했다. 전병욱 목사의 피해자 역시 4년간이나 상습적으로 추행을 당하면서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미혼인데 그런 일을 당한 것이 부끄러워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회에 덕이 안 될 거라는 생각에’ 침묵했다. 성직자는 교인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를 때 이 점을 정확하게 인지한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하지만 교회가 이게 뭐야, 그것만 도와줘.”라는 전병욱의 호소는 오랜 기간 피해자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장벽과 장애물을 제거하는 이러한 기술들은 최근 ‘그루밍(groo-ming, 길들이기)’이라는 용어를 통해 조명되고 있다. 그루밍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길들여 성범죄를 용이하게 하거나 은폐하는 행위’를 뜻하는 말로, 1980년대에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패턴을 설명하는 용어로 쓰이기 시작했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진로나 고민 상담 등을 해 주며 경계심을 무너뜨려 신뢰를 얻고, 관계를 성적으로 만드는 단계가 자연스럽게 여겨지게끔 한다. 성범죄 피해가 발생한 후 피해자를 회유하거나 협박하는 등 폭로를 막는 행위도 이에 포함된다. 신뢰 관계는 그루밍의 핵심이며, 성직자는 이 점에서 확실히 유리한 면이 있다. 가해자의 이 같은 연속된 행위들 속에는 피해자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끔 할 수 있을 것이고, 이상하게 생각하더라도 문제 삼지 못할 것이며, 문제 삼더라도 설득할 수 있다는 확신이 내포되어 있다.

가해자의 이러한 기대와 믿음은 피해자뿐 아니라 자신과 피해자가 속한 교계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알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알려지더라도 결국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는 종교계의 성범죄 사건에서 주변인들이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에게 협조하는 모습을 오랜 역사를 통해 보여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성별 위계,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이에 대한 신앙적 정당화와 더불어 바람직한 여성 신도의 모습이라는 이상적 여성상까지,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여성혐오 문화가 종교계에 만연해 있다. 피해자나 주변인이 성직자의 가해 행위를 성범죄로 인지하기 쉽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성혐오 문화의 공모

주변인의 문제를 좀 더 들여다보자. 이은의가 지적한 것처럼 “‘처리가 어떻게 되느냐’는 표면적으로 피해자의 적극적 소명이나 가해자의 반성에 의해 좌우될 것 같지만, 실상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시선과 태도에 달려 있다.” 피해자가 공동체 내부에 문제 제기하거나 사법기관에 신고하기를 주저하는 데에는 주변인의 반응에 대한 염려가 크게 작용한다.

전병욱 사건이 알려졌을 때 피해자는 주변인들의 적대적 반응에 직면해야 했다. 친분이 있는 사람들조차 사모님과 딸을 생각해 글을 내리라고 연락하거나 전병욱이 새로 부임한 홍대새교회에 출석했다. 사건을 직면하지 않은 주변인들은 ‘목사님이 애를 낳았다고 해도 용서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극단적 반응에서부터 ‘어차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이라며 방관하는 태도, 교회의 평판과 사역에 대한 은근한 우려 등을 보였다.

이들은 왜 이러는 걸까? 이러한 반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변인의 개념을 확장해야 한다. 우선 전병욱이 담임을 맡았던 삼일교회의 소속 노회인 평양노회까지 확장해볼 수 있겠다. 이 사건에 대한 대응을 시작한 2010년부터 평양노회가 열리는 시기마다 전병욱 면직안이 제출되었지만, 노회는 절차를 문제 삼으며 안을 접수하지 않았다. 노회는 2016년에 이르러서야 전병욱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은 “전 목사가 자신의 과오를 책임지려 했고 그 후 이루 말할 수 없는 도전과 고난을 받으며 절망의 골짜기를 통과했”으므로 용서하고 이 문제에 고귀한 영적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를 당부했다. 이 판결을 놓고 일각에서는 ‘솜방망이’ ‘면죄부’라며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고, 한 언론사는 “평양노회의 전병욱 목사 구하기”라는 기사로 이를 꼬집었다.
‘말씀이 그립다’며 전병욱의 홍대새교회에 몰려가는 신자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전병욱이 먼저 교회를 개척한 것도 아니고 일부 신자들이 모여 교회를 개척하고 전병욱을 청빙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성범죄를 외면하고 은폐하는 것이 과연 그 종교와 공동체를 위하는 길일까? 전병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교계와 사회의 비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걸까? 유승태의 분석은 이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는 홍대새교회로 몰려가는 신자들의 자발성이 ‘우리’라는 의식에서 비롯한다고 보았다. ‘우리’라는 신앙적 관계가 윤리적 우위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관계의 지속이 더 중요한 목적이며, 이 관계에 위해를 줄 수 있는 목소리는 아무리 옳은 소리라도 배제되기 쉽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우리’에 대한 외부의 평가가 아니다. ‘우리’라는 관계가 지속되고 ‘우리’끼리 괜찮으면 된다는 의식이다. 유승태는 이러한 관계가 낳은 또 다른 심각한 부작용으로 ‘우리’의 내부에서도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다.
엠케 역시 혐오와 증오가 이데올로기에 따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감정이며, 더 나아가 이것이 분출되려면 모욕적인 언어표현, 사고와 분류에 사용되는 연상과 이미지들, 범주를 나누고 평가하는 인식틀이 미리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평양노회는 판결문을 통해 가해자를 이해하려 하고 피해자에게 적대적인 주변인들에게 이러한 양식을 만들어준 셈이다.

주변인이란 일차적으로 피해자/가해자의 지인과 해당 사건이 일어난 공동체의 구성원을 일컫는 말이지만, 이들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그 공동체가 소속된 교단 및 종단, 그 안의 신앙적, 신학적, 조직적, 제도적 기반에까지 그 의미를 확장할 수 있다. 그랬을 때 성범죄가 일어나고 덮이는 구조와 조건을 이해할 수 있다. 권김현영이 적절하게 지적하듯이, 특정한 시점과 사건의 단일 맥락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은 성범죄가 자신이 속한 문화 속에서 저질러져 온 연속된 행동들의 결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인식에 이르지 못한다.

범죄는 범죄다

종교 지도자건 평신도건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다’는 말로 피해자를 설득하고 공동체를 잠잠하게 하려는 시도는 늘 있어 왔다. 성범죄 사건을 폭로하고 처리하는 게 정말로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성폭력 사건 처리라는 에너지 많이 드는 일을 할 만큼 이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뿐이다. 범죄에 분개하고 피해자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도 실제 사건에 개입하거나 맞닥뜨리는 데에는 큰 용기와 결심이 필요하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게 제삼자 입장에서는 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역시 사실상 영향을 미치는 개입이다.

그런가 하면 ‘묻어두면 스님들끼리 알아서 정화한다’ ‘[절이] 왜 세상의 관심사가 되어야 하나’라는 등 세속과 종교계를 분리하는 방어적 자세도 돋보인다. 성범죄를 덮어두는 것이 종교 공동체와 신앙생활을 위한 것이라는 이 같은 태도에는, 성범죄를 처벌해야 할 범죄라기보다는 추문 정도로 여기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처럼 성범죄를 대하는 종교계의 태도에서 주목할 점은 종교인, 특히 성직자의 성범죄를 ‘범죄’로 보는 공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성직자의 성범죄에 대한 공론과 연구는 상당 부분 가해자의 성향과 정신병리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파악된 가해자의 대다수가 성직자이고 용서와 자비, 뉘우침에 대한 종교적 기대가 있기 때문에 가해자 이해에 치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공론과 연구들이 가해자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비행’ ‘탈선’ ‘일탈’ ‘중독’과 같은 불분명한 개념들을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 언어 사용자에게 가해자의 행위가 우연하고 일시적인 것 또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불러올 우려가 있다. 전병욱이 “교회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사실이 있”다고 고백했으나 “하나님이 명예회복을 시켜줬”다는 셀프 용서를 할 수 있었던 기저에도 자신의 행위가 용서받을 수 있는 일시적 일탈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신 앞에 지은 ‘죄’와 사회법상의 ‘범죄’를 구분하고, 성직자는 전자에 대한 처리만을 따른다는 인식이다. 이 같은 인식은 가해자인 성직자뿐 아니라 피해자와 주변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해자의 동기를 규명하는 일은 사건을 파악하는 일보다 시급하지 않고 진실을 밝히는 일과 동일시할 수도 없다. 강간 피해자와 가해자가 ‘용서’를 위해 8년간 이메일을 주고받고 결국 일주일간의 만남 끝에 함께 쓴 특별한 책이 있다. 용서를 구하던 가해자는 피해자가 수년 전 분노 속에서 쓴 글의 내용을 듣고서야 이렇게 깨닫는다. “이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겠다. 왜 그랬는지는 그보다 덜 중요하다.”

가해자와 주변인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피해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사법적 인식이 이를 도울 수 있다. 성범죄가 발생했을 때 개인이나 소속 집단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법적 문제로 바라봐야 성범죄를 근본적으로 줄일 수 있다. 공동체 내 해결을 유일한 선택지로 생각할 때 공동체가 범죄를 은폐하기도 쉬워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어떤 반사회적 행동을 혐오에 기반한 범죄행위로 판단하는 것은 단일 사건을 일회적으로 문제 삼기보다는 그것이 오래된 지배-종속 관계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는 관련 범죄에 대한 사회적 태도와 대응에 변화를 요구할 근거가 된다. 친밀한 관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교회 내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의 소속교회라는 특정 사회가 처리에 관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리고 그 집단 내에서 향후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느냐가 피해자에게 핵심적인 해결 과제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변화를 모색하는 것은 더욱 중요해진다.

주변인으로서 교회 구성원과 지도부는 범죄의 피해자인 여성을 오히려 비난하고 여성이 제공했을지 모를 범죄 동기를 찾거나, 가해자를 이해하고 걱정하며 처벌을 주저하고 방관하는 방식으로 여성혐오 문화에 일조하는 양상을 보여 왔다. 주변인들이 가해자의 성범죄를 여성혐오 문화와 관련하여 사고하고 자신이 혐오문화 속에서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지 인식할 때, 위와 같이 성범죄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여 다시금 여성혐오 문화에 공모하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문화를 바꾸는 일

리베카 솔닛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제목의 글을 쓰고서 스스로 놀랐다고 한다. 어떤 남자가 가르치려 드는 우스꽝스러운 사례로 글을 시작했는데 결국 강간과 살인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맺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보고 여성학 이론서부터 여성활동가들이 펴낸 에세이집까지 이 책 저 책 뒤져본 필자는 새삼스레 놀랐다. 성폭력이 중심 주제가 아니더라도 여성에 관한 책들은 대개 성폭력에 대해 말한다는 점 때문에. 솔닛은 나중에서야 이것이 결국 여성혐오의 다양한 양태들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폭력과 권력남용이 성희롱, 협박, 위협, 구타, 강간, 살인 같은 범주만으로 깔끔하게 구획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차별의 문화와 싸워야 한다.

앞에서 필자는 성범죄에 공모하는 주변인의 개념을 개개인에서 여성혐오 문화까지 확장해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목표로 삼고 우리에게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될 일은 문화를 바꾸는 일일 것이다. 여기에는 구조적 개혁과 예방이 중요하지만, 현재 미투 운동이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무엇보다도 기본은 폭로다. 일단 범죄 사실을 드러내고 직면할 수 있어야 앞으로 사회와 법률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지 방향을 정할 수 있다. 폭로의 연쇄와 연대가 갖는 또 다른 유용성은 범죄의 상습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범죄의 상습성을 확인하는 것은 폭력의 발생과 은폐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드러나게 한다는 데에도 의미가 있지만, 현행법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친고죄 규정 폐지(2013.6.19) 이전의 범죄가 드러나 가중처벌의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폭로와 연대가 기본이지만, 문화를 바꾸는 일 가운데 가장 즉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은 교단 및 종단의 법을 바꾸고, 성범죄 전담 기구를 만들고, 성범죄 처벌 수위를 높이고, 최소한 전체 성직자를 대상으로 성폭력 예방교육을 의무화하는 등의 구조적 · 정책적 개혁이다.

존 곤죠렉이 지적했듯이, 미국에서는 돌봄노동 종사자에 대한 법규를 상세하게 규정하면서부터 서비스 제공자와 클라이언트 간 성범죄가 현저히 줄었다. 현재 돌봄노동 종사자와 클라이언트의 관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어떠한가? 심리치료사와 같은 돌봄노동자가 클라이언트와 성관계를 한다는 것은 직무윤리에 어긋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인식이 법률에 영향을 미치듯 법률도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법률을 만드는 대표자, 즉 구조적 위계의 상층부에 여성이 진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법률을 만드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2017년 말 기독 언론 〈뉴스앤조이〉는 전병욱 목사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삼일교회가 조직한 ‘치유와 공의를 위한 TF팀’과 함께 대담을 기획했다. 필자는 이 바람직한 대담 기사를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정이 되었다. TF팀의 조직과 활동은 분명 고무적이지만, 그 구성원이 전부 남성이었던 것이다. 다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사건에 대응하는 조직도 이러할진대, 종교계 전체를 놓고 보면 어떻겠는가. 성직자 사이에서도 성별 위계와 구별이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여전히 여성의 성직 임명을 허용하지 않는 교단도 있고, 총회에 참여할 수 있는 대표자 중 여성이 1%밖에 되지 않는 교단도 있다. 의사결정 구조와 절차에서 여성이 자연스럽게 배제된 이런 모양새는 어느 종교에서나 일반적이다. 성범죄를 극복하고 궁극적으로 여성혐오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의사결정권을 평등하게 나누어 가지고 공동체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홍대새교회에 대한 유승태의 분석은 흥미롭지만 ‘우리’만 괜찮으면 된다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종교계 전반이나 종교단체들에 대한 외부의 평가를 우려해 공동체 내 해결을 원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은 우리의 시민의식을 믿어야 할 때다. 이제 우리는 어떤 집단이나 진영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보다는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를 두고 그 집단을 평가하고 있다.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는 ‘○○계’는 없다. 드러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문제라면 문제다. 그래서 필자는 사회와 종교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종교계 미투를 희망적으로 바라본다. 조디 래피얼은 면식 강간을 다룬 저서에서 “사회에서 강간을 추방하려면 교회, 학교, 대학, 사회단체, 군대 등 주요 단체들이 투명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종교계가 ‘우리만의 세계’에 스스로 고립될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성범죄는 성범죄다. 부인하거나 숨기지 말고 대처하는 것이 종교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다.

‘위드유(With You)’는 적극적 개입

지난 4월 개신교 몇몇 단체와 개인들이 주관한 3주간의 미투 관련 워크숍에 참여했다. 미투 운동으로 세상이 떠들썩해진 올해 초부터 집회뿐 아니라 토론회와 강연도 눈에 띄게 많아졌는데, 그중에서도 낯선 사람들끼리 모둠을 이루어 경험을 나누고 대응 매뉴얼을 만드는 워크숍은 새로웠다. 경험을 나누는 일이야 그 전에도 있었지만,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도 아닌데 함께 매뉴얼을 만드는 일은 드물었다. 3주 차에 워크숍 장소에 가 보니, 테이블마다 ‘피해자 가이드’ ‘가해자 가이드’ ‘피해자 주변인’ ‘가해자 주변인’ ‘교회 대책 매뉴얼’ ‘목회자 매뉴얼’ 등의 주제어가 놓여 있었다. ‘내가 그 입장이라면 어떨까, 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할까’를 통해 구체적인 매뉴얼을 만드는 작업까지 이어질 모양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가해자 주변인’ 테이블에 앉았다. 내가 겪은 성폭력 사건들에서 나는 피해자 주변인일 뿐 아니라 가해자의 주변인이기도 했는데, 신기하게도 지금껏 가해자 주변인으로서 역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테이블에 한동안 혼자 앉아 있을 때는 막막했지만, 모둠이 이루어지자 어느덧 다음과 같은 메모들을 적고 있었다.

-예를 들어 가해 지목인이 상담을 요청했을 때, 절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장 먼저 사실을 철저하게 확인해야 한다. -피해자의 요구를 확인하고 그에 따라 비밀 유지 여부를 결정한다. 이때 너무 공격적으로 조사하듯 하면 안 된다. 피해자나 피해자 대리인이 가해자의 주변인에게까지 공개할지 여부와 공개 수준을 결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피해자 지원 그룹과 가해자 지원 그룹은 분리해야 한다. 각각은 처리 권한이 있는 위원회에 경과를 보고하도록 한다. 즉 지원 그룹과 조사위원회를 분리하는 것이다. 가해자 지원 그룹은 가해자의 이후 징계 및 회복 과정을 장기간에 걸쳐 추적해야 한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인력은 어떻게 충당할지, 언제까지 활동가들의 결의와 자원봉사에만 의지할 수 있을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니 집단과 사회 차원의 위드유가 필요하다.

한편 미투 운동 이후 ‘심정적으로는 공감한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 말 뒤에는 ‘그런데 나서고 싶지는 않아’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공감한다는 말은 대체 왜 하는 걸까? 공감하고 응원하니 어쩌라는 건가? 그렇게 말하면 면전에서 비난받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공감한다는 좋은 말에 이런 반발심이 생기는 것은, 이 말이 나는 무엇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가해자 주변인의 입장에 서 보았을 때, 부족한 인력에 시달리는 활동가들의 입장을 생각했을 때, 그리고 구체적 상황에 대한 대응 매뉴얼을 만드는 이 작업에 참여하면서 ‘위드유’는 심정적 공감이나 지지의 말이 아니라 적극적 개입이라는 걸 되뇌게 된다. 이은의가 주변인의 역할에 대해 거듭 강조한 것처럼 “세상을 조금씩 좋게 바꿔나가는 것은 …… 수많은 제삼자들의 선택이다. 그들이 유리함보다 유익함을 선택하고 피해자를 지지할 때 세상은 좀 더 나아진다.” 사회의 위드유가 공염불이 아니라 결의가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개인의 위드유가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악은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피해자 중심/가해자 이해’ 구도의 또 다른 문제는 우리가 그들을 피해자 또는 가해자로 규정해버릴 위험이다. 어떤 사람도 한 가지 정체성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성범죄가 단일한 이유로 일어나지 않듯이, 성범죄의 피해자와 가해자도 단순하지 않다. 그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바라보는 것은 양자 모두의 치유와 사회복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건의 해결이 무엇보다 우선하지만, 사건을 맥락과 함께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특히나 용서와 회개, 뉘우침과 깨달음, 자비 등 종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종교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가해자 처리 문제는 내적 갈등을 일으키는 일일 것이다. 이 역시 가해자를 가해자로만 바라보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성범죄가 단순하지 않은 만큼 문제를 대하는 인식과 해결하는 방법도 다양해야 한다. 이제는 우리가 창의성을 발휘할 때다. ■

 

권최연정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박사과정 재학 중. 주요 논문으로 〈미국 여성운동의 세대 간 단절과 종교적 배경〉 〈여성혐오와 교회 내 성범죄〉 등이 있다. 현재 젠더 연구를 기반으로 현대 종교의 사회적 역할과 조건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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