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사회의 성윤리와 불교

1. 서론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나도 그랬어’, 일명 ‘미투(Me too) 운동’이 최근 들어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주변 곳곳에서 성과 관련하여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사안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무언가 모를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성추행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온 것 같다는 누군가의 푸념이 어찌 한 사람만의 일일까. 일상에서 겪게 되는 비교적 가벼운 언어적 · 신체적 성적 수치심까지 감안한다면, 우리는 거의 무방비한 상태로 성폭력의 피해에 노출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욕은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기본적인 욕망이다. 하지만 성욕은 다른 욕망과 달리 자신의 욕구 해소를 위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을 예로 보아도, 지위나 권력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의사와 무관하게 성희롱이나 성추행, 성폭행 등을 가하고 있다. 상대방이 겪을 심리적 · 육체적 상처에도 아랑곳없이, 오로지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는 데 급급하다. 절제되지 못한 성욕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에게까지 치명적인 고통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불교에서도 성적 문제는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재가불자의 기본 실천 규범인 오계에서는 ‘불사음계(不邪婬戒)’라고 하여, 자신의 배우자 이외 사람과의 성행위를 금지한다. 사음은 자신의 배우자를 배신하는 행위이자 상대방의 배우자에게도 상처를 주는 행위이다. 모든 생류에 대한 자애심을 강조하는 불교에서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가 용납될 리 없다.

한편, 이 글에서 다루게 될 율장(律藏)을 보면 출가자의 경우에는 모든 성관계, 나아가 이성과의 가벼운 신체적 접촉이나 음담패설 등에 이르기까지 성과 관련된 모든 행위가 엄격히 금지된다. 더구나 그것은 모두 중죄로 다루어지는데, 특히 가장 중대한 죄로 분류되는 바라이의 경우 제1조가 ‘음행’, 즉 성관계를 금지하는 내용이다. 비구 · 비구니가 되기 위해 받는 구족계(具足戒) 첫머리를 ‘음계’가 장식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어떤 감각적 욕망보다 성욕을 가장 강렬하고 위태로운 욕망으로 인식하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출가자에게도 성욕은 억제하기 힘든 욕망이지만, 이를 제어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게 되는 갖가지 환난(患難)은 수행자로서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하, 이 글에서는 율장에 나타난 성 관련 조문과 그 인연담 등을 검토하며 불교가 출가자의 성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지, 성욕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성적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성소수자의 입단 금지 규정을 고찰하고자 하는데, 이 규정은 출가자의 성적 범계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도 밝히고 있다. 출가자라는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성욕이라는 욕망이 갖는 특징과 그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보는 하나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2. 출가자와 성욕의 문제

비구 · 비구니가 지켜야 할 규범인 율(律, vinaya)을 가리켜 흔히 ‘오편칠취(五篇七聚)’라고 한다. 오편이란 바라이(波羅夷) · 승잔(僧殘) · 바일제(波逸提) · 바라제제사니(波羅提提舍尼) · 악작(悪作, 突吉羅)의 5종이며, 칠취는 이 5종에 투란차(偸蘭遮)와 악설(悪説)을 추가한 7종이다. 오편칠취에는 비구 · 비구니가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가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중 바라이와 승잔에 해당하는 범계 행위는 중죄(重罪), 그 이외는 경죄(輕罪)로 취급된다. 경죄에 해당하는 범계 행위는 한 명이나 두세 명의 비구 앞에서 혹은 마음속으로 혼자 참회하면 죄에서 벗어나 청정 비구(니)로서의 원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지만, 중죄의 경우에는 다르다. 바라이죄를 저지르면 ‘불공주(不共住)’라는 처분을 받고 더 이상 비구(니)라는 정식 승려의 신분으로 머물 수 없게 되며, 승잔죄의 경우에는 일정 기간 별주(別住)하며 속죄한 후 20명 이상으로 구성된 승가에서 동의를 얻은 후에야 원래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

성에 관한 모든 행위는 중죄인 바라이와 승잔에서 취급한다. 이로 보아 율장에서 성문제는 중대한 범계 행위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관련 조문인 바라이 제1조 ‘음계(婬戒, methuna-dhamma)’를 먼저 살펴보며 출가자와 성욕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이 조문은 ‘음을 행하는 것’을 금지한다. 음을 행한다는 것은 성관계를 갖는 것을 말하며, 대상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의 암컷, 심지어 비인녀(非人女)까지 포함된다. 율이 수범수제(隨犯隨制), 요컨대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나타날 때마다 그 행동을 금지하는 형태로 제정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음행이 승가에서 나타난 최초의 악행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수행자에게 성욕을 억제하는 일이 본능적으로 무엇보다 어려웠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조문의 인연담에 의하면, 수딘나(Sudinna)라는 비구는 부모님의 만류를 무릅쓰고 출가하여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는데, 기근이 들어 걸식이 어려워지자 친족을 찾아 고향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그가 환속하여 보시 등을 통해 공덕을 쌓으며 재가자로 살아갈 것을 권유했지만, 수딘나는 거절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후손이 없으면 모든 재산을 왕이 몰수해 간다며, 대를 이을 후손만이라도 남겨달라고 애원하였다. 수딘나는 차마 그 청까지 거절하지는 못하고 출가 전의 처와 음행을 저지르게 된다. 음행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조문이 아직 제정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수딘나의 행위는 불범(不犯)이었지만, 그는 심한 자책과 후회에 시달리며 나날이 초췌해져 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동료 비구들의 질문에 수딘나는 음행 사실을 고백하였고, 이를 전해 들은 붓다는 비구 승가를 소집한 후 “음욕법을 행하는 비구는 바라이이다. 함께 살아서는 안 된다.”라는 학처를 제정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에 한 비구가 음식으로 암컷 원숭이를 유혹하여 음행을 저지르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는 부처님이 금지한 것은 인간과의 음행일 뿐 축생과의 음행은 대상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며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붓다는 “어떤 비구라도 음욕법을 행한다면, 내지 축생과 함께한 것에 이르기까지 바라이로 함께 살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여 “내지 축생과 함께한 것에 이르기까지”라는 구절을 조문에 추가했다. 조문 해설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내지’에는 축생만이 아닌 비인녀, 3종의 황문(黃門), 3종의 이근자(二根者), 3종의 남자 등 성관계를 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이 다 포함된다. 황문과 이근자는 각각 성적으로 특이한 취향을 가지거나 남녀의 성기를 모두 갖춘 자를 가리킨다. 남자란 비구의 성적 대상이 될 수 있는 남자, 즉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3종의 황문이란 인(人)황문 · 비인(非人)황문 · 축생황문을 가리키며, 3종의 이근자 역시 인이근 · 비인이근 · 축생이근을, 3종의 남자도 인남 · 비인남 · 축생남이라고 하여 사람(女 · 男)과 비인, 축생으로 분류한다. 성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대상을 다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상의 문제는 개인적인 취향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절제되지 못한 인간의 성욕이 어디까지 대상을 넓혀가며 부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가지 사건 이후에 발생한 일이다. 웨살리에 머물고 있던 왓지족 출신의 비구들은 원하는 대로 먹고 자고 씻었다. 욕망대로 산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몸과 마음이 해이해져서 결국 난잡한 마음으로 음행을 저지르게 되었다. 그 결과 친족도 재산도 잃고 병까지 들자 후회하며, 아난다 존자에게 만약 자신들이 다시 구족계를 받을 수만 있다면 열심히 수행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이를 전해 들은 붓다는 그들을 위해 이미 제정한 학처를 번복할 수는 없다고 하며, 대신 한 구절을 추가하여 음계 학처를 확정한다.

어떤 비구이든 비구들의 학(學)과 규율을 갖춘 채로 학을 버리지 않고, 힘이 약함을 고하지 않고 음욕법을 저지른다면, 내지 축생과 함께한 것에 이르기까지 바라이로 함께 살아서는 안 된다.

“비구들의 학(學)과 규율을 갖춘 채로 학을 버리지 않고, 힘이 약함을 고하지 않고”라는 구절이 추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구로서의 수행은 지속하고 싶지만, 성욕의 유혹은 도저히 이겨내지 못하겠다고 판단되면 스스로 ‘학과 규율’, 즉 붓다가 율로 제정한 학처를 버린다는 의지를 표명하라는 것이다. 즉, 사계(捨戒)의 의지를 표명하면 더 이상 비구가 아니기 때문에 음행을 저질러도 바라이가 되지 않는다. 비구의 신분으로 음계를 어겨 바라이로 처벌받게 되면 두 번 다시 비구의 신분을 회복할 수 없지만, 환속한 후의 행위는 문제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율장에서는 환속이 몇 번까지 가능한지, 그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따라서 환속 후 몇 번이라도 다시 구족계를 받고 비구로서 수행이 가능하다. 결국 이 한 구절의 추가는 바라이죄를 저질러 비구로서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하지 않도록 하려는 일종의 배려이자 편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바라이 조문은 음계 외에, 5전 이상의 도둑질을 금지하는 도계(盜戒)와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는 살인계(殺人戒), 깨닫지 않았으면서 깨달았다고 거짓말하는 대망어계(大妄語戒)를 넣어 총 네 개로 구성되는데, 사계의 편법이 인정되는 것은 음계뿐이다. 이는 성욕이 매우 절제하기 힘든 욕망이라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사계의 과정은 간단하다. 자신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앞에서 “저는 우바새가 되겠습니다.” “저는 부처님을 버립니다.” “저는 법을 버립니다.”라는 등의 간단한 말을 하면 된다. 누군가 특정인의 동의도 승가의 동의도 필요치 않으며, 본인이 결심하고 그 뜻을 타인에게 전달하면 된다. 다만 상대방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이나 어린아이 앞에서 한 사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사계 형식으로 미루어 볼 때 역시 비구로서 수행을 지속하는 힘의 원천은 본인의 의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미처 사계하지 못하고 음행을 저질렀을 경우에도 범계 후 숨기려는 마음 없이 곧바로 승가에 참회의 뜻을 밝히면 ‘바라이학회(波羅夷學悔)’라는 신분으로 승가에 머물러 수행을 계속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비구의 신분이 아닌, 사미와 유사한 낮은 신분으로 머물게 되므로 사실상 비구 신분으로 음행을 저지르면 원래의 비구 신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원칙에는 변함없다.

이상의 인연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음계는 수딘나 비구의 부정행→축생과의 음행→계를 지킬 힘이 없는 자에 대한 사계 인정이라는 세 단계에 걸쳐 완성되고 있다. 이는 성욕이 매우 강렬한 욕망으로서 다양한 상황에서 집요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계를 지킬 힘이 없는 자에 대한 사계 인정’ 규정은 출가자에게도 성욕은 억제하기 힘든 욕망이라는 점, 그리고 율장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하지만, 출가자의 신분을 유지하는 이상, 성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바라이라는 극중죄로 다스려질 만큼 출가자의 성행위는 극도로 기피되고 있다. 사미 역시 음행을 저지르면 멸빈(滅擯)당한다. 다만, 사미의 경우 멸빈당한 후의 재출가 가능성 여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출가자의 직접적인 성행위 외, 성욕과 관련하여 나타날 수 있는 갖가지 행위 역시 율장에서는 금지한다. 바라이와 더불어 또 하나의 중죄로 간주되는 승잔에서는 제1조부터 제4조에 이르기까지 성과 관련된 행위가 총 네 가지 금지된다. 승잔 제1조 고출정계(故出精戒), 제2조 촉여신계(觸女身戒), 제3조 추악어계(麤惡語戒), 제4조 구음욕공양계(求婬欲供養戒)이다. 고출정계는 스스로 정액을 흘리는 행위, 즉 자위행위를 금지하는 것이며, 촉여신계는 비구가 욕정에 사로잡혀 여인의 몸에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문이다. 손을 만지거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 모두 금지된다. 추악어계는 남녀의 성에 관한 말이나 여성의 성기에 관한 말 등을 하는 것을 금지하는 계이다. 구음욕공양계는 성욕을 갖고 음욕공양, 다시 말해 자신과 같은 훌륭한 수행자에게 음욕을 공양하면 공덕이 있다고 여인 앞에서 설하는 것을 금지하는 계이다.

이처럼 율장에서는 직접적인 성관계를 비롯하여 자위행위, 성욕을 갖고 여인의 몸에 접촉하는 행위, 성과 관련된 말을 하는 행위, 음욕 공양을 부추기는 행위 등 성욕을 자제하지 못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성적 행위를 바라이와 승잔이라는 중죄로 헤아리며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3. 성적 행동은 왜 금지되는가?

사계라는 일종의 구제책을 마련해줄 만큼 욕망으로서 성욕이 갖는 강렬한 욕구를 인정하면서도, 출가자의 신분으로 음행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율장에서는 무슨 이유로 출가자의 성적 행위를 이토록 기피하는 것일까? 단 한 번의 성관계로 비구 혹은 비구니라는 신분을 완전히 박탈당한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율장에서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관련 조문들에 보이는 부분적인 기술을 통해 어느 정도의 추정은 가능하다.

앞서 언급한 바라이 제1조 ‘음계’의 인연담을 보면, 수딘나의 음행 사실을 알게 된 붓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행동을 꾸짖는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이는 부적절하고, 부적당하며, 어울리지 않으며, 사문답지 못하고, 합당하지 않으며, 해서는 안 될 짓이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이렇듯 잘 설해진 법과 율에 출가하고도 어찌하여 너는 평생 완전하고 청정한 범행을 실천하지 못한단 말이냐. 이 어리석은 사람아, 나는 여러 방법으로 탐욕으로부터 떠나라고 법을 설했지 탐욕을 가지라고 설하지 않았다. 속박으로부터 떠나라고 법을 설했지 속박당하라고 설한 것은 아니다. 집착을 없애라고 법을 설했지 집착하라고 설한 것은 아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내가 탐욕을 떠나라고 설한 법을 너는 탐욕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속박을 떠나라고 설한 법을 속박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집착을 떠나라고 설한 법을 집착을 늘리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나는 여러 방법으로 탐욕을 떠나라고 법을 설하고, 교만의 파괴를 위해, 갈증의 제어를 위해, 집착의 근절을 위해, 윤회의 단절을 위해, 갈애의 소멸을 위해, 탐욕으로부터의 떠남을 위해, 멸진을 위해, 열반을 위해 법을 설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나는 실로 많은 방법으로 감각적 욕망의 단멸을 설하고, 감각적 욕망의 개념 작용에 대한 완전한 앎을 설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증의 조복을 설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생각의 근절을 설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병의 가라앉힘을 설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차라리 맹독을 지닌 뱀의 입안에 남근을 넣을지언정, 결코 여인의 성기에 남근을 넣어서는 안 된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차라리 검은 뱀의 입안에 남근을 넣을지언정, 결코 여인의 성기에 남근을 넣어서는 안 된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차라리 타오르고, 활활 불타며, 이글거리는 불구덩이에 남근을 넣을지언정 결코 여인의 성기에 남근을 넣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 어리석은 사람아, 전자를 인연으로 해서는 죽음이나 죽음과 거의 유사한 괴로움을 받게 될지언정,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 이로 인해 결코 악처나 악취, 악생, 지옥에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어리석은 사람아, 후자를 인연으로 해서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 악처나 악취, 악생,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와 똑같은 구절이 승잔 제1조 고출정계의 인연담에서도 등장한다. 성욕으로 인해 마음의 안정을 잃게 된 셋야사까(Seyyasaka)라는 비구는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것이 전혀 기쁘지 않았고, 그 결과 육체의 조화를 잃어 점차 몰골이 초췌해져 갔다. 그러자 우다이라는 장로는 “만약 범행을 닦는 것이 기쁘지 않다면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자고 마음대로 목욕해라. 그래도 기쁘지 않고 정욕이 일어나 마음이 괴롭다면 손을 사용하여 정액을 흘려라.”라고 충고했다. 욕망대로 살라는 것이었다. 셋야사카는 찜찜하게 여기면서도 우다이 장로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이것이 허용되는 행위라 생각하고 따라 했다. 그 결과 셋야사까는 얼굴에 윤기가 흐르고 혈색이 좋아졌다. 이를 이상히 여긴 비구들이 연유를 물었고, 결국 셋야사까가 자위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를 전해 들은 붓다는 위의 인용문과 동일한 내용으로 셋야사까의 행동을 꾸짖고 있다. 성욕을 자제하지 못해 발생하게 되는 타인과의 성관계 혹은 자위행위 등을 똑같은 이유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의 발언을 보면 왜 출가자에게 성적 행동이 금지되는지, 그 이유는 자명하다. 성욕과 같은 감각적 욕망의 배후에는 탐욕과 속박, 집착 등 수행에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는 선하지 못한 요소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요소들은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르는 수행을 지속하는 데에 큰 방해 요소이다. 감각적 욕망의 제어와 깨달음의 상관관계는 초기경전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문제로 양자는 밀접한 관련하에 언급된다. 예를 들어, 《숫따니빠따》 제467게에서는 “감각적 욕망을 버리고 이겨낸 자는 태어남과 죽음의 끝을 알고 시원한 호수처럼 완전한 열반을 성취하였으니, 여래는 헌과(獻果)를 받을 만하십니다.”라고 하여, 감각적 욕망을 이겨내었을 때 완전한 열반의 성취가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또한 《담마빠다》 제215게에서는 “욕망에서 슬픔이 생겨나고, 욕망에서 두려움이 생겨난다. 욕망을 벗어난 자에게는 슬픔이 없으니, 어찌 두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슬픔과 두려움이 욕망에서 비롯됨을 설한다. 이 외, 니까야나 아함 등에서도 애욕을 떠난 생활이 평안하며, 안락하다는 점을 누누이 설하고 있다.

불도 수행이 계 · 정 · 혜 삼학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탐욕이나 집착, 갈애 등으로 인해 어떤 욕망보다 심하게 마음이 요동칠 수 있는 성욕은 지양해야 할 욕망임이 틀림없다. 앞서 언급한 왓지족 출신 비구의 예를 보면, 성욕은 식욕이나 수면욕과 같은 기본적 욕구의 제동이 풀어졌을 때 온몸이 해이해지면서 더욱 왕성하게 일어나는 욕구인 것 같다. 즉, 성욕의 힘이 증대하는 것이리라. 육체의 충동적인 욕구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정신은 육체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정신이 육체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 선정의 힘을 요구하는 정학을 실천하고, 나아가 반야의 지혜를 증득하는 혜학의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계학이란 ‘육체의 충동적인 욕구’ 이면에 존재하는 선하지 못한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며, 육체가 감각적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육체 위에 정신을 두고자 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수행을 통해 정신적 안정을 얻게 될 때 선정을 실천할 수 있는 힘도 생겨난다. 이러한 힘, 다시 말해 감각적 욕망을 다스리는 힘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정신과 육체의 안정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며, 결과적으로 정학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음행을 극중죄의 첫 번째로 거론하는 것을 보면, 율장에서는 감각적 욕망 중에서도 성욕을 탐욕이나 갈애, 집착 등의 불선법을 내포한 가장 위험한 행위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성욕이 식욕이나 수면욕 등의 다른 감각적 욕망과는 달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대상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더 강렬하게 품을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음계 제정의 단초를 제공한 수딘나 비구의 경우를 보면, 어머니의 청을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음행을 저질렀다고는 하나 목적은 자신의 후손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자손 번식의 욕망이야말로 인간이 갖게 되는 가장 본능적이고도 강렬한 욕망 가운데 하나이며, 이는 성욕과 불가분의 관계이기도 하다. 성욕은 성행위의 대상, 결과물로 태어나는 자식 등으로 집착의 영역을 확대해 간다. 단지 본인의 욕구를 채우는 차원에서 끝나는 욕망이 아닌 것이다. 고의 원인인 갈애가 어떤 욕망보다 치열하게 그 본성을 드러내게 되는 욕망이 바로 성욕이다. 처자식을 두고 출가를 감행해야 했던 고따마 붓다에게, 성적 욕망은 단지 개인의 성욕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보다 뿌리 깊은 욕망으로서 인간의 정신까지 지배할 수 있는 강렬한 본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성욕의 본질을 꿰뚫어 본 붓다이기에 성적 행위에 대해 이처럼 완고한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4. 성소수자의 입단과 차법

단음(斷婬)을 철저하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지만, 아울러 성욕을 부추기지 않는 주변 여건을 갖추는 것도 필요하다. 율장에서는 이 점에 대해서도 적지 않게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성소수자(性少數者, sexual minority)의 입단 금지 규정 역시 이런 시각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율장에서는 성소수자의 입단을 허용하지 않는다. 비구가 되기 위해 구족계를 받을 때는 차법(遮法), 요컨대 비구가 되는 데 결격 사항은 없는지 승가로부터 확인받아야 한다. 차법 가운데 한 가지라도 해당 사항이 있으면 구족계를 받을 수 없다. 그런데 차법 리스트 중 성소수자에 관한 항목이 눈에 띈다. 즉, 황문(黃門, paṇḍaka)과 이근자(二根者, ubhatovyañjanaka)의 출가는 허용되지 않는다.

황문은 빤다까의 한역어로, 빤다까는 기존에 ‘거세자(去勢者, eu-nuch)’나 ‘성적 불능자’ 혹은 ‘동성애자’ 등으로 해석되어 왔다. 율장에 등장하는 용례를 보면, 대부분 변태성욕을 지닌 동성연애자로 묘사되지만, 주석서에서는 5종의 황문을 언급한다. 즉, 다른 남자의 성기를 입으로 핥아 사정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가라앉히는 자(āsitta-paṇḍaka), 다른 사람들이 성교하는 모습을 훔쳐보면서 질투심을 일으켜 자신의 욕망을 가라앉히는 자(usuyya–paṇḍaka), 특별한 도구를 이용해서 정자를 빼내야 하는 자(opakkamiya-pa-ṇḍaka), 보름 동안만 황문으로 사는 자(pakkha-paṇḍaka), 태아일 때부터 성기가 존재하지 않는 자(napuṃsaka-paṇḍaka)이다. 이를 보면, 황문은 항상 혹은 일시적(보름)으로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성적 자극을 얻거나, 태어날 때부터 성기가 없어서 사정도 불가능하고 생식 능력도 없는 성적 불능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황문은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자’를 폭넓게 가리키는 용어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근자란 양성구유(兩性具有), 즉 태어날 때부터 여성의 성기도 남성의 성기도 함께 갖춘 사람을 가리킨다. 이 외, 원래 남성이었던 자가 비구로 출가하였는데 도중에 여성의 성기가 몸에 생기거나, 여성이었던 자가 비구니로 출가하였는데 도중에 남성의 성기가 몸에 생기는 경우에 대해서도 율장은 언급한다. 이 경우에는 그 혹은 그녀가 받은 구족계나 그 시점까지의 법랍(法臘)이 모두 인정되며, 바뀐 성에 따라 다시 수행을 지속하면 된다고 한다. 즉, 이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황문과 이근자처럼 성적으로 문제를 지닌 이들의 출가는 왜 허용되지 않았을까? 당시 인도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하며 억압받았던 낮은 계급의 사람들조차 받아들이면서 평등을 강조했던 불교의 가르침을 고려한다면 이해하기 힘든 원칙이다. 이 때문에 성소수자의 입단 불가 원칙을 일각에서는 차별이라는 시점에서 파악하며 비판의 날을 세우기도 하지만, 이 문제는 좀 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러한 규정이 처음에 왜 생겼는지 율장에 전해지는 인연담을 살펴보며 그 진의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율장에 의하면, 어떤 황문이 승가에 출가했는데 그는 젊은 비구들이나 사미, 코끼리 조련사 무리 등에게 다가가 자신을 더럽혀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조련사 무리 등이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이를 알게 된 세간 사람들은 ‘석자 사문은 황문이다. 황문이 아닌 자들도 황문을 더럽혔다’라며 비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황문의 출가가 금지되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황문은 처음부터 입단이 금지되었던 것은 아니며, 그들이 음란한 행위를 하여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금지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들은 수동적 동성연애자로서 난잡한 생활을 즐기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황문은 출가가 허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출가했다 하더라도 황문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는 즉시 승가로부터 추방당한다. 이근자의 입단 금지 인연담도 황문과 유사하다. 이들 역시 출가 후 동료 비구 · 비구니를 유혹해서 성관계를 갖기도 하고 갖게 하도록 부추기기도 하는 등 승가에서 문란한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입단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이들도 출가 후에 발각되면 승가 추방의 처벌을 받게 된다. 이근자의 경우에는 신체상 남녀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비구 승가와 비구니 승가 중 어느 쪽에 소속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결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양쪽을 다니며 음란한 행위를 할 수 있어 황문보다 한층 더 폭넓게 성적 문란을 일으킬 여지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율장에서 황문이나 이근자와 같은, 이른바 성소수자의 입단을 금지하는 이유는 승가에 성적으로 문란한 상황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이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승가 운영은 현실적인 문제이다. 공동체 생활을 전제로 하는 승가의 경우, 본인의 의지로 성적 욕구를 제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들어와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승가를 형성하여 일정한 공간 안에서 함께 생활해야 하는 불교의 출가자들이 이러한 사람들과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음계’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승가 운영에서도 큰 문제이며, 승가를 바라보는 일반 사회와의 관계라는 시점에서도 중대한 문제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들의 행동이 일반 사회에 알려지게 되면 승가 전체가 문란하고 비도덕적인 공동체로서 비난받게 되기 때문이다.

율장 곳곳에서 붓다는 율을 제정하는 이유, 다시 말해 율을 실천함으로써 얻게 될 이익을 열 가지로 설명한다. 이른바 ‘제계십리(制戒十利)’라 불리는 것이다. 제계십리는 승가의 구성원이 안락하게 머물며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재가자의 신심을 일으키고 증대시키며, 정법을 확립하는 것을 그 주된 내용으로 한다. 즉, 승가의 발전과 영원한 존속을 기대한다. 따라서 승가 운영에 있어 현실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처한다.

양모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찾아와 출가를 청원했을 때 붓다가 거절했던 배경에는 물론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무엇보다 성욕의 직접적인 대상인 여인들이 승가로 들어오는 것에 대한 염려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인들의 경우에는 이성이기 때문에 따로 승가를 구성하여 살아가는 방법도 있고, 또한 성욕을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능력도 있는 자들이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편, 성소수자는 다르다. 이들은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절제하기 힘든 성적 욕구가 있는 사람들이므로 승가에서 함께 생활한다면 수행에서 그토록 기피되는 성적 문제가 수행자들 간에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성적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만큼 주변 여건 역시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방향으로 조성해가야 한다. 이 점에서 이들의 입단 금지는 불가피한 조치였을 것이다. 후대가 되면 성소수자의 수행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표명하는 경전들도 등장하지만, 적어도 성소수자의 입단 금지가 승가의 규범으로 정착하게 된 과정을 율장에서 보면, 이 규범은 출가자들의 수행 여건에 대한 배려가 근본적인 이유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결론

불교에서 성욕은 다른 어떤 욕망보다 진지하게 다루어진다. 재가자의 경우에는 배우자와의 성관계는 용납함으로써 성욕 자체를 부정하지 않지만,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삿된 관계는 철저하게 금지된다. 이는 절제되지 못한 성욕이 잘못된 방향으로 분출됨으로써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에게도 해나 고통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출가자의 경우에는 성욕을 기반으로 발생하는 모든 성적 행위가 철저하게 금지된다. 사계를 통한 편법을 인정해 줄 만큼 성욕에 내재한 강렬한 욕망을 인정하지만, 출가자의 성행위는 한 치도 용납하지 않는다. 직접적인 성관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위행위나 성적 접촉, 음담패설, 음욕공양을 부추기는 말 등과 같은 행동 역시 모두 중죄로 다스려진다. 이것은 성욕 뒤에 탐욕, 속박, 집착, 갈애 등과 같은 불선법이 존재하며, 이러한 악한 감정은 수행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식욕이나 수면욕 같은 욕망과 달리 성욕은 성행위를 하고자 하는 혹은 이미 한 대상에 대한 집착이나 애증 혹은 후손을 남기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 등으로 이어지며, 어떤 욕망보다 강렬하게 인간의 심신을 지배하고 번뇌 속에서 고통받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적어도 계 · 정 · 혜 삼학을 닦아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출가자라면 성욕은 반드시 제어하고 끊어야 할 욕구인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하며 언급했듯이 최근에 성 피해와 관련된 미투 운동이 여기저기서 불붙듯 일어나고 있다. 정치계, 문학계, 예술계, 교육계, 체육계, 종교계 등 어느 분야도 예외가 없다. 고발당한 사람들의 지위나 신분도 다양하다. 각자의 지위에서 조금이라도 권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아낌없이 남용하여 성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성욕이 얼마나 강렬한 욕망이기에 이처럼 물불 안 가리고, 때로는 자신이 오랜 세월 쌓아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며 빠져드는 것인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탐욕하고 집착하며 그 감정에 스스로를 얽어매는, 성욕 뒤에 숨겨진 위험한 감정과 그로 인해 나타나게 될 결과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절제하기 어려운 것일까? 성범죄자로 고발당한 후에도 깊은 죄의식이나 진심 어린 반성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은 것을 보며 욕망이 때로 얼마나 이기적인 모습으로 표출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욕망에 사로잡혀 한 치 앞도 못 보는 장님과 다름없다.

모두가 출가자처럼 일체의 성욕을 끊고 단음하며 살아갈 수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절제되지 못한 성욕이 초래하게 될 고통과 불행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욕망이든 절제되지 못하면 그에 따른 부작용을 경험하기 마련인데, 특히 성욕은 자신의 욕구를 해소할 대상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주의해야 한다. 일시적인 감각적 쾌락에 매몰되어 주변 사람에게 치유될 수 없는 큰 고통을 안겨주고 스스로도 언젠가 악업의 과보를 받게 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

 

이자랑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동국대 인도철학과 졸업, 일본 도쿄대학 인도철학 · 불교학 전공 석사 및 박사과정 졸업. 〈초기불교교단의 연구-승단의 분열과 부파의 성립〉으로 문학박사 학위 취득. 초기불교 교단사 및 율장에 관한 50여 편의 논문과, 《나를 일깨우는 계율이야기》 《붓다와 39인의 제자》 등의 책을 썼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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