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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으로서 성욕에 대한 불교적 관점 / 이필원
특집 | 한국사회의 성윤리와 불교
[74호] 2018년 06월 01일 (금) 이필원 nikaya@naver.com

1. 미투로 이슈화된 성욕

   

이필원
동국대 경주캠 파라미타칼리지 교수

요즘 사회적으로 ‘미투(Me too)’ 운동이 뜨겁다. 미국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이 운동이 태평양을 넘어 한국에서 크게 이슈가 되고 있다. 반면 이웃 나라인 일본에서는 한국만큼 이 운동이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 점도 우리가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 아닐까 싶다.

왜 한국에서 유독 이 문제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는 것일까? 한국사회에 그만큼 왜곡된 성의식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일까? 한국사회가 다른 사회보다 훨씬 성에 대한 억압이 강하게 이루어졌고,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성적 욕망이 왜곡되어 드리워진 것일까? 아니면 사회적으로 일본보다는 피해자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사회 시스템적 장치가 훨씬 더 잘 마련된 것일까? 아마 이런 문제는 사회학을 연구하는 분들에게 미루어야 할 것 같다.

이제 시선을 불교로 돌려보자. 불교의 제일 명제는 ‘일체개고(一切皆苦)’ 즉 ‘모든 것은 괴로움으로 귀결된다.’이다. 필자는 개고(皆苦)의 의미를 ‘괴로움으로 귀결된다’로 이해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여기에서는 접어두기로 한다. 이 제일 명제의 근거는 바로 ‘욕망’이다. 말하자면 불교는 ‘고통을 욕망으로 분석하여 드러내고, 이를 통해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불교의 핵심 키워드는 ‘고통’과 ‘욕망’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필자는 ‘욕망으로서 성욕에 대한 불교적 관점’을 바로 이 두 키워드를 통해 기술해 보고자 한다.

고통(dukkha)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불만족’이다. 한편 욕망 역시 그 특징은 ‘불만족’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경전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욕망을 채우고 싶어 해서 탐욕이 생겨난 사람이 만일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그는 화살에 맞은 자처럼 괴로워한다.(Sn. 767)

황금 산의 황금 모두가 두 배나 세 배가 되어도 한 사람에게조차 충분치 않네. 이렇게 알고 바르게 살아야 하리라.(SN. I, Rajjasutta, p.117)

욕망은 그 본질이 불만족이기에, 끊임없이 추구하는 성향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욕망의 특징을 이해하지 않고는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고통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성욕의 문제 또한 욕망과 고통이라는 두 키워드를 통해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이 불교, 즉 붓다의 가르침을 통한 올바른 이해의 시도가 될 것이다.


2. 욕망의 관점에서 ‘성’

어떤 사람은 불교를 출가주의 종교라고 한다. 과연 불교는 출가주의일까? 이것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출가인지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야 할 것이다. 출가를 표현하는 전형적인 표현이 있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다.”라는 표현이다. 여기서 집(agāra)은 단순히 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소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출가란 ‘소유와 욕망의 포기’를 의미한다. 소유와 욕망은 우리를 속박된 상태에 머물게 한다. 그래서 출가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출가는 ‘감각적 욕망을 구하지 않는 것’으로도 제시된다. 만약 출가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불교는 출가주의가 맞다. 하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 출가를 말한다면 불교는 출가주의라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맛지마니까야에 《마하왓짜고따숫따(Mahāvacchagottasutta)》가 있다. 이 경전은 왓차고따가 붓다를 찾아뵙고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에 대해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에서 ‘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재가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출가자와 재가자가 구분되는 점은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삶의 방식보다는 소유와 욕망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는 몸의 출가보다는 마음의 출가가 더 본질에 가깝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은 추구의 대상은 아니다. 오히려 욕망은 떠남의 대상이 된다. 이것을 이욕(離欲)이라고 한다. 수행의 관점에서 욕망은 철저하게 파악되고, 통제되고, 제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욕망에 의해 지배되는 결과가 초래되기 때문이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욕망으로서 성욕은 통제되고 제어되며, 나아가 떠남이 실현되어야 할 것이 된다.

이제 붓다는 성적 욕망을 어떻게 바라보고,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욕망의 대상은 넘기 어려운 수렁이라고 나는 말합니다.(Sn. 945)

인용된 경문은 《숫따니빠따》의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 대한 경(Attadaṇḍasutta)》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 욕망의 대상(kāma)은 성적인 욕망의 대상을 의미한다. 보통 까마(kāma)는 성적 욕망의 대상을 의미한다. 남성에게는 여성이, 여성에게는 남성이, 동성애자의 경우는 동성이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넘기 어려운 수렁(paṅka duraccayo)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빵까(paṅka)는 수렁, 늪, 진흙 등의 의미로 해석된다. 깊은 뻘을 생각해도 될 것이다. 한번 빠지면 좀체 빠져나오기 어려운 수렁이나 뻘이다. 성적 욕망의 강력함을 너무나도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경문이 아닌가 싶다. 수렁은 다른 말로 ‘중독’의 관점에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10년 미국 매케이 연구팀의 연구 내용을 소개해 보자.

연구팀은 사귄 지 9개월이 지나지 않은 ‘열정적 사랑’ 단계에 있는 대학생 커플을 모집했다. “열정적 사랑 단계란 사랑하는 사람에게 걷잡을 수 없이 끌리는 시기를 뜻합니다. 상대를 향해 강렬한 감정적 끌림을 느끼는 거죠. 상대에게 온통 집중하고 상대를 항상 생각하는 시기입니다. 가까이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고 떨어져 있으면 괴로운 단계죠. 뭔가에 중독된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럴 겁니다. 이것도 중독이기 때문입니다.”

중독에서 벗어나기는 정말 어렵다. 담배 끊는 것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인용문에서도 보듯이, 가까이 있으면 좋고, 떨어져 있으면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고통을 회피하고 즐거움을 취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용문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를 실험대상으로 했지만, 이것이 과도하게 되면 연인에 대한 집착과 속박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즐거움에 너무 도취되면 그것이 가져다주는 위험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된다.

욕망의 대상에서 위험을 보고서, 그것에서 벗어남을 안온으로 보고 나는 정진하기 위해 갑니다.(Sn. 424)
위 내용은 《숫따니빠따》 《출가의 경(pabbajjāsutta)》의 경문이다. 막 출가한 수행자 고따마에게 마가다국 빔비사라왕이 정치적 제안을 한 것에 대한 답변이다. 여기서 욕망의 대상(kāma)은 성적 욕망의 대상을 포함하면서, 보다 넓은 의미로 감각을 통해 추구하는 욕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욕망의 대상을 ‘위험(ādīnava)’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즉 성적 욕망은 우리를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결국 이는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님을 밝힌 것으로 이해된다. 즐거움이 우리에게 위험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을 자제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다. 그 순간이 주는 즐거움에 탐닉하다 보니 결국은 헤어나오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을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성행위로 인해] 지금껏 그가 가졌던 명예와 명성을 모두 잃게 됩니다. 이것을 보고 성행위를 끊도록 배워야 합니다.(Sn. 862)

성행위(methuna)를 직접 언급하고 있는 이 경문은 수행자로서 홀로 살다가 성욕에 탐닉하게 되면 직면하게 되는 위험을 언급하고 있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지만, 그 일 하나로 그동안 애써 쌓았던 명예와 명성을 모두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매우 유사한 말을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은 위대한 철학자, 과학자, 작가들의 연구실까지 불쑥불쑥 찾아와 수치스러운 염문을 일으키기도 하고, 친구의 깊은 우정도 순식간에 끊어 버리며 건강과 부귀영화도, 높은 지위나 권력도, 참으로 소중한 행복도 간단히 파괴하는 위력적인 폭약이다.

이 문장을 보면, 쇼펜하우어가 붓다의 가르침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사랑은 기본적으로 성욕을 말한다. 그는 아무리 로맨틱한 정신적 사랑을 나눈다고 자부해도 본질적으로는 성욕을 근본으로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뉴스 등을 통해 목도하는 수많은 일을 보면, 붓다의 말씀이 그대로 적용됨을 알게 된다. 각고의 노력을 통해 명예와 인기를 얻었지만, 성욕에 사로잡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욕망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결국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모든 것을 잃게 됨을 본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소중한 행복도 간단하게 그 앞에서는 부수어지고 만다.


3. 욕망의 특징을 통한 성욕의 이해

앞서 성욕을 욕망과 고통이라는 두 키워드로 살펴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럼 이제 욕망의 특징을 통해 성욕을 이해해보자.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욕망으로서 성욕은 위험이며 넘기 어려운 수렁이다.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그곳을 향해 가는 사람은 없다. 굳이 헤어나오기 어려운 수렁에 일부러 들어가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성욕은 제어되어야 하고, 나아가 끊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쉽게 이에 동의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성욕이 아름답게 포장되기 때문이다. 성욕이 ‘사랑’이란 말로 포장되고, 로맨틱이란 이름으로 꾸며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욕이란 말보다는 ‘사랑’이란 말을 더 좋아한다. 성욕은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사랑이라고 하면 긍정적인 의미가 도드라지게 된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붓다는 욕망을 욕망으로서 바르게 볼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선입견이나 편견이나 환상을 버리고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볼 때, 욕망이 나에게 나아가 이 사회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게 된다. 바르게 보아야[正見] 바르게 알게 된다. 바르게 알아야, 그에 알맞은 대처가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욕에 대해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이나 환상도 버리고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을 하나 던질 수 있다.

‘성욕을 버려야 하는가?’

우리는 나에게 나쁜 것은 멀리하고 버린다. 그런데 반대로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옆에 두거나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다. 성욕을 버려야 할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성욕은 나쁜 것일까? 이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욕망이 지닌 특징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구체적으로 욕망이 부정적으로 기술되는 이유를 살펴보자. 욕망은 대단히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성욕, 재물욕, 식욕, 명예욕(권력욕), 수면욕 등이 있다. 이들 욕망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다양한 관점이 가능하겠지만, 욕망의 주체로서 ‘나’와 그것을 주체가 지배하는 ‘소유’의 관념이 이들 욕망의 배경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불교에서는 ‘아(我)’와 ‘아소(我所)’로 설명한다. 이를 간단한 명제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명예를 갖고 싶다.
나는 잠을 자고 싶다.
나는 섹스를 하고 싶다.
나는 재산을 갖고 싶다.
나는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

위의 명제는 주체와 주체가 갖고 싶어 하는 소유, 즉 욕구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욕구의 내용이 충족되지 않으면, 이것을 ‘결핍’으로 설명하게 된다. 결핍은 불만족의 특징이기도 하며, 이것은 ‘고통’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욕구의 주체인 ‘나’가 욕구의 결핍을 통해 대단히 불만족하고, 불유쾌하며, 불편한 상황에 놓이게 됨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불만족과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강력하게 욕구의 충족을 갈망하게 되고, 이를 통해 욕망에 지배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욕망에 지배되면 우리는 헤어나올 수 없는 카오스의 상태가 된다. 이를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탐욕(gedha)은 거대한 거센 흐름이라고, 열망(jappā)은 끌어들임이라고, 집착(ārammaṇa)은 혼돈(pakampana)이라고 나는 말합니다.(Sn. 945)

거센 흐름에 휘말리면 그 흐름에서 벗어나기란 좀체 쉽지 않다. 그 흐름은 우리를 끊임없이 끌어당겨 결코 놓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욕망에 사로잡히면 그곳에서 벗어나기란 매우 힘들다. 그리고 그 욕망에 사로잡힘, 즉 집착은 우리를 커다란 혼돈과 떨림으로 몰아넣게 됨을 이 경문은 말하고 있다. 이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고서는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혼돈이 지속된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그 혼돈 속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판단’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붓다는 욕망에서 ‘떠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붓다는 성욕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예를 보자.

온갖 성적 욕망의 대상에 대해(kāmesu) 탐욕하고, 열중하고, 미혹되고, 비열하며 바르지 못한 행위에 빠진 사람들……(Sn. 774)

성적 욕망의 대상에 정신을 잃고 빠져드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에 미혹되어 해서는 안 될 행위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모든 욕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말하자면 붓다는 욕망 자체가 악하다거나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빠져들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부주의함과 어리석음에 주의를 환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욕망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성질을 갖고 있기에 그것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애초에 그러한 욕망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동굴에 집착하고, 온갖 것에 덮여 있고, 유혹 속에 빠져 있는 자, 이러한 사람은 멀리 떠남과는 거리가 멀다. 참으로 세상에서 욕망의 대상들은 잘 포기되지 않는다.(Sn. 772)

‘잘 포기되지 않는다(na suppahāya)’는 말은 성욕에 사로잡히면 생각처럼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 성욕이란 다양한 모습으로 덮여 있어, 그것이 정확하게 포착되기란 쉽지 않다. 성욕에 사로잡힌 사람이 잘못된 방식의 삶을 선택했을 때, 그가 다양한 방식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성욕이 포장되기 쉽다는 것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유혹되며, 자기 편리한 대로 정당화시키면서 욕망에 집착하는 것을 붓다는 ‘파멸’이란 말로 경계한다.


4. 통제되지 않는 성욕은 파멸의 문

《숫따니빠따》에는 《파멸의 경》이라는 작은 경전이 있다. 이 경에 성욕과 관련된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여색에 미치고 술에 중독되고 도박에 빠져 있어 버는 것마다 없애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Sn. 106)

자기 아내로 만족하지 않고 매춘부와 놀아나고, 남의 아내와 어울린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Sn. 108)

젊은 시절을 지난 남자가 띰바루 열매 같은 가슴의 젊은 여인을 유인하여 그녀를 질투하는 일로 잠 못 이룬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Sn. 110)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타오르는 불구덩이를 피하듯, 깨끗하지 못한 행위를 삼가라. 만약 깨끗한 행위를 닦을 수 없더라도, 남의 아내를 범해서는 안 된다.(Sn. 396)

위의 경문을 보면, 이는 재가자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오늘날 제기되는 다양한 성문제에 대한 붓다의 입장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초기경전에서 성 혹은 성욕과 관련된 문제는 대단히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이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성욕이라는 욕망 자체가 나쁘다는 입장보다는 그것이 갖는 중독성과 흡인력이 강력하기에 충분하면서도 확고하게 주의를 환기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여색에 미친다(itthidutto)’는 주석서에서 “여자에 매혹되어 가진 것을 모두 주고 점점 여자에게 사로잡힌다.”는 의미이다. 자기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매매를 한다던가 불륜을 저지르는 것은 파멸로 가는 것이며, 나이든 남자가 젊은 여인을 좋아하여 희롱하고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것 또한 파멸로 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욕이 갖는 특징의 또 하나가 여기서 나온다. 그것은 ‘질투’라는 정서이다. 질투는 중요한 번뇌 가운데 하나이다. 질투는 분노를 야기하며 파괴로 이어지게 된다. 《말룽까뿌따경(Māluṅkyaputta-sutta)》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혼란된 사띠로 형체(rūpa)를 보고 나서, 사랑스러운 모습에 마음을 기울이고, 애욕으로 물든 마음을 지닌 자는 그것에 집착하여 경험하고 머문다. 그 집착된 마음을 지닌 자에게 다양한 형체에서 기인한 감각(vedanā)들이 자라나고, 탐애와 분노가 마음을 파괴한다.(SN. IV, p.73)

사띠란 ‘(바른) 알아차림’ ‘(바른) 기억’ 등을 의미한다. 반면 혼란된 사띠(sati muṭṭhā)란 ‘잘못된 알아차림이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으로 대상을 보면, 우리는 대상에서 욕망과 관련된 부분에 시선이 가게 된다. 그렇기에 사랑스러운 모습에 마음을 기울이고, 애욕에 물든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것은 욕망으로 대상을 물들이기에, 대상/상대는 본인의 의지와 관련 없이 욕망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 욕망이 해소되기까지 욕망에 물든 자는 욕망의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이를 《담마빠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자의 여자에 대한 욕망의 덤불은 그것이 조금 있더라도 제거되지 않으면, 젖먹이 송아지가 어미에 매이듯, 그와 같이 그의 마음은 속박된다.(Dhp. 284)

반대로 ‘여자의 남자에 대한 욕망의 덤불’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욕망의 덤불(vanatha)이란 ‘애욕의 숲’이라고도 이해된다. 잡목이 무성히 자란 곳에 들어가면 좀처럼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것을 상상해 보면 성적 욕망이 우리를 얼마나 속박하는지,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성적] 욕망의 즐거움에 물들고 [성적] 욕망의 탐욕에 홀려서 마음을 빼앗겨 사람들은 과오를 깨닫지 못하네. 사슴이 쳐진 그물을 모르듯, 과오는 나중에 쓴 맛이 된다네. 결과가 악하기 때문이라네.(SN. I, Appakāsutta, p.74)

오늘날 ‘미투 운동’에서 폭로되는 내용,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가해자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위 경문의 내용과 상당히 유사함을 보게 된다. 핵심은 스스로의 잘못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욕망에 마음이 홀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행동과 말을 하는지 모르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의 과보가 어떤지에 대해서 알게 된다.


5. 판타지의 성욕을 벗어나기 위해

오늘날 야기되는 많은 성문제는 성에 대한 과도한 해석과 오해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성에 개방적인 사회에서 오히려 성에 대한 이상하리만치의 무지가 자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성에 덧씌워진 관념들 때문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데이비드 로이의 견해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오늘날 (성과 관련된) 그 문제는 죄책감이나 억압 같은 게 아니라 포르노그래피 중독과 같은 여러 유형의 강박이다. ……중략…… 가부장 사회에서는 남성에게 성욕을 배출할 통로를 개방하고 여성의 성과 출산은 엄격하게 통제했지만, 우리의 문화는 성으로 푹 젖어 있다. 성이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상업화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성적 만족에 몰두하면 삶의 커다란 의미들이 붕괴되는 데서 오는 공허를 메우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의 중요성은 부풀려졌다.

앞서 연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사랑은 중독과 같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성은 중독성을 갖는다. 하지만 성행위를 경험한 모든 사람이 중독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중독은, 로이의 해석처럼 그 의미가 부풀려지거나 왜곡과 억압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그리고 성 자체가 자본과 결탁하면서 ‘상업화’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어 ‘성욕’은 판타지의 영역으로 흘러 들어갔다. 우리는 성욕을 그저 ‘스포츠와 같은 것’으로 치부하면서, 대단히 쿨(cool)한 척하지만, 그것이 바로 판타지이다.

왜 이런 판타지가 만들어진 것일까. 그것은 잘못된 ‘자아’에 대한 관념과 고집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즐긴다’ ‘내가 경험한다’와 같은 관념이 성을 ‘관계’가 생략된 단순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것을 자본이나 즐겨야 할 어떤 것과 동일시하게 된다. 자본이나 즐겨야 할 어떤 것은 그것을 소유한 자의 것으로 본다. 그렇기에 ‘욕망으로서 성욕’에는 대상화된 욕망만이 존재하게 된다. 대상화된 욕망의 내용은 ‘즐거움’ ‘쾌락’과 같은 것이다. 포털에서 ‘성생활을 즐겨라’와 같은 검색어를 넣으면 생각보다 많은 기사가 검색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성에 대한 잘못된 억압과 왜곡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성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것은 분명 왜곡된 성의식을 만들어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사용하는 ‘즐겨라’와 같은 것은 또 다른 왜곡과 억압의 표상일 수 있다.

충분히 억압되었기에 이제는 즐겨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단순화된 논리이다. 우리는 하나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서 또 다른 왜곡을 범하는 잘못은 없는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오늘날 이른바 비만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비만은 잘못된 식습관이나 음식에 대한 조절장애, 기타 유전적 요인 등 다양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잘못된 식습관이나 기름진 음식에 대한 노출에서 찾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성에 대한 자극적인 묘사에 자주 노출되거나 또는 성적 쾌락을 직접 경험하게 되는 환경에 자주 노출되면 자연히 성에 대한 왜곡이 일어나기 쉽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이미 충분하게 성이 노출된 사회이다. 그런 상황에서 ‘즐겨야 한다’는 것을 성에 대한 바람직한 인식의 한 축으로 강조하는 것은 성에 대한 또 다른 왜곡의 가능성이 있다.
불교는 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다. 그것은 성적 욕망을 어떤 방식으로든 왜곡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성적 욕망과 관련된 용어에 대한 경(Kāmādhivacanasutta)》이 있다. 여기에서는 성적 욕망(kāma)과 관련하여 ‘두려움, 괴로움, 질병, 종기, 화살, 애착, 진흙, 모태’라는 용어로 정의한다. 이 내용은 용어 자체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가 충분히 강하다. 왜 그럴까. 성욕은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삶의 과정에서 경험하게 된다. 굳이 배우지 않아도, 노력하지 않아도 성욕에 대한 갈망은 생겨난다. 그리고 그 쾌락을 경험하게 되면 그것에 속박된다. 그 속박에서 성에 대한 다양한 왜곡과 판타지가 생겨난다. 그렇기에 성적 욕망이 갖는 내적 특징과 사회적 특징을 모두 고려해야만 한다. 앙굿따라니까야의 경문을 비롯한 불교의 비판적 입장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성적 쾌락이 주는 달콤함과 그 이미지들로부터 균형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욕의 또 다른 측면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쾌락은 저절로 알게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 역시 학습되는 것이다. 그래서 긍정적인 측면이든 부정적인 측면이든 성욕은 바르게 이해되고, 학습되어야 한다. 그럴 때 판타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6. 성욕은 통제되어야 하는 욕망

불교의 관점은 일관된다. 즉 모든 욕망은 올바르게 이해되고, 적절하게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통제의 의미를 억압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앞서 주체와 소유란 측면에서 간단하게 언급하였는데, 바로 주체와 소유의 해체가 통제의 의미가 된다. 욕망하는 주체와 소유에 대한 비판적 경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현명한 자라면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희론적 개념의 뿌리를 모두 제거하십시오.(Sn. 916)

눈으로 탐내지 말아야 하고, 저속한 이야기에서 귀를 멀리 해야 하고, 맛에 탐착하지 말아야 하고, 또한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이라도 내 것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Sn. 922)

보고, 듣고, 맛보는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욕망하는 주체에 대한 관념이다. 그리고 그렇게 경험된 것들이 내 것이라는 소유의 관념이다. 즉 주체와 소유는 모두 관념인 것이다. 이것을 희론(papañca)이라고 한다. 희론은 개념적 확산이란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확산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관념이 욕망을 왜곡하게 한다. 바로 그 점에서 성욕이 이해될 때, 비로소 통제된다고 말할 수 있다.
성욕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욕망이다. 그런 만큼 성욕은 자칫 사람을 대상화하기 쉽다. 성욕에 사로잡히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욕망의 대상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를 혹은 남자를 사람으로 보는 것이 훈련되어야 한다. 그것이 되어야만 성욕은 긍정적으로 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방식은 무엇일까. 《대반열반경》에 참조할 만한 내용이 전한다.

세존이시여, 저희는 어떻게 여인을 대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쳐다보지 말라.
세존이시여, 쳐다보게 되면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말하지 말라.
세존이시여, 말을 하게 되면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사띠를 확립해야 한다.(DN. II, p.141)

이는 수행자로서 올바른 삶을 유지하기 위해 성욕의 근원인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여기에 붓다는 ‘사띠를 확립할 것’을 말한다. 사띠의 확립이란 올바른 기억이며 올바른 알아차림이다. 여인을 여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아야 함을 의미한다고 이해된다. 남자나 여자는 모두 사람이다. 여기에 성별을 붙여서 이해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부분적 이해일 뿐이다. 그래서 온전한 이해는 성별에 구속되지 않고 ‘사람’으로 대할 때 가능해진다. ‘사띠의 확립’은 이러한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띠가 확립될 때 욕망은 통제된다. 하지만 혼란된 사띠를 갖게 되면, 대화를 나누는 앞의 사람이 여자나 남자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성적 대상으로 보이게 됨을 의미한다. 앞의 사람이 여자 혹은 남자의 이미지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우리는 성욕이란 욕망의 수렁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올바른 사띠의 확립’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에서는 몸과 말과 뜻으로 자제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것이 바로 위험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이란 가르침이다.

몸으로 자제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말로 자제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뜻으로 자제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모든 면에서 자제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모든 면에서 자제하고 부끄러워하는 자는 보호받는 자라고 말해진다. (SN. I, Attarakkhitasutta, p.73)

위의 경문은 부처님과 꼬살라국의 왕 빠세나디의 대화이다. 좋은 것 혹은 훌륭한 것(sādhu)은 우리의 행위가 자제될 수 있을 때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몸으로, 말로, 생각/뜻으로 행위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의 방식이다. 그 모든 행위의 방식은 자제될 수 있어야 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도덕성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니다. 내가 보호받기 위해서이다. 앞서 《숫따니빠따》의 《파멸의 경》 경문을 통해서 보았듯이, 자제하지 않으면 보호받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평생을 노력해서 얻은 것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다. 존경의 눈이 경멸의 눈으로 바뀌는 것은 너무나도 쉽다. 그리고 성욕에 물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쉽고 간단하다. 쉽고 간단하기에 무엇보다도 강력하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욕의 힘을 너무 간과하게 되면, 그 힘에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우리는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성욕은 올바르게 이해해야 하고, 적절하게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

 

이필원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파라미타칼리지 조교수. 청주대학교 철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졸업. 일본 북쿄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주요 논문으로 〈阿羅漢の研究〉(박사논문) 〈사무량심의 ‘해탈도’적 성격 고찰〉 〈초기불교의 연기이해: 수행론적 관점에서의 새로운 접근〉 등이 있으며, 저서로 《불교 경전은 어떻게 전해졌을까》(공저)와 번역서 《사성제 팔정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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