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사회의 성윤리와 불교

들어가는 말

김영란
나무여성인권상담소 소장
미투(Me too, 나도 말한다) 바람이 드세다. 피해자들의 고발과 증언은 성차별과 성폭력이 ‘괴물’ 같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성차별적인 권력구조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주었다. 혹자는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는 미투 운동을 두고 제2의 민주주의 운동이라고도 한다.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동안에도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받아온 견고한 성차별 구조를 깨뜨리려는 ‘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의 절박한 목소리는 성차별과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억압과 차별의 구조에 대한 변화가 더 이상 늦춰져선 안 된다는 외침이다. 지난 2016년의 촛불혁명을 통해 전 대통령을 탄핵하고 정권을 바꾼 후 일상에서의 적폐청산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성차별이라는 불균형적인 그러나 견고한 권력관계에서의 폭력들도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미 여성계에서는 ‘성평등이 민주주의를 완성한다’는 슬로건으로 촛불을 들고 광장에서 성평등을 주장해왔다.

미투는 수직적 위계 문화 속에서 타인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군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폭력적 남성성에 대한 문제 제기다. 시대가 바뀌고 시민의식이 성장했음에도 여전히 가부장적 인식에 사로잡혀 여성을 동등한 시민이나 동료로 보지 않았던, 그래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여성은 성적 매력을 풍기며 남성의 요구에 순종적으로 응해야 한다고 여기며, 배제하고 비하하고 희롱하고 무시하고 때리고 성폭력을 행사했던 남성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3.7%가 미투 이후 사회 변화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63.0%) 또는 ‘매우 긍정적’(20.7%)이라고 답했다. 미투 운동을 통해 ‘성적 농담이나 신체적 접촉을 조심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라거나 ‘술자리나 식사 등 회식문화가 건전해지고 있다’ ‘성추행, 성희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거나 도움을 주는 분위기 형성됐다’라며 긍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반면 미투로 인해 ‘사소한 언행까지 문제 제기해 조직 분위기가 경직되고 있다’라거나 ‘무고한 사람을 가해자로 지목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라는 부정적인 의견도 있다. 또한 성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 이성과는 회식이나 모임을 하지 않는 펜스룰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증가하고 있다. 특히 이 조사에서 눈여겨보게 하는 응답은 ‘성폭력이나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도 일부 책임이 있다’라는 의견이다.

성폭력은 ‘피해자의 잘못도 있다, 피해자가 문제가 있다’라는 피해자 유발론은 ‘야한 옷차림은 문란하게 보이거나 남성을 유혹한 것이다’ ‘여성이 강력하게 저항하지 않은 것은 동의한 것이다’ 등 과거의 가부장적 성 관념들에 근거해 있다. 이러한 통념은 최근 미투 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비난의 시선에서도 나타나고 있고, 이는 2차 피해로 이어지고 있다.

젠더 기반 폭력(Gender Based Violence)은 사회적으로 부여된 여성성과 남성성 즉 젠더에 바탕해서 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고도 불리는 젠더폭력은 성폭력, 성적 착취, 강요된 성매매, 인신매매처럼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가해지는 폭력이나 가정폭력, 성기 절단, 명예범죄같이 여성의 신체에 가해지지는 폭력 등을 포함한다. 젠더 기반 폭력은 여성을 차별하는 개인적 인식과 함께 사회 구조적인 원인에 의해 일어난다. 즉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사회적 신념과 불평등한 권력관계, 성차별적인 공식적, 비공식적 사회제도 등에 의해 일어난다. 그럼에도 여성에 대한 폭력과 인권침해가 일어날 때마다 성적 욕망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인데 무조건 폭력으로 몰고 간다거나, 욕망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젠더 고정관념을 들어 반박한다. 이 글은 권력에 기반한 욕망이 어떻게 표출되는지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페니스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권력이 문제다

“복수하기 위해서 그랬죠. 그 여자한테 무시를 당했는데 혼내줄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강간해버렸죠.”

교도소에 수감 중인 성폭력 가해자들의 집단상담에서 성폭력 가해행위를 한 이유라며 듣게 되는 대답이다. 사실 이런 대답이 늘 나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범죄 행위자는 자신이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항변하기 위해 가해행위를 축소하고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 여성이 유혹해서 그랬다’ ‘꽃뱀에게 걸렸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딱 한 번 그랬다’ ‘잘 몰라서 그랬다’라는 대답이 훨씬 더 많다. 그런데 누군가 복수하려고 강간했다는 말을 꺼내면 ‘아,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보다’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복수의 동기를 꺼내는 것이다.

한 남자가 한 여자로부터 무시와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그 남자는 그 여자에 비해 학력이나 지적 능력, 재산, 자신감 등 뭐 하나 나은 게 없다. 처음에는 내가 못나서 그렇지, 욕이나 하며 뒤돌아설까 생각하다 ‘내가 남자인데 왜 여자한테 당하냐? 저 여자를 완전히 망가뜨릴 수 있는 무기가 내게 있잖아.’라는 생각이 떠오르고 주변 누구라도 동조하면 그 생각은 힘을 받는다. 낮은 자존감이나 낮은 공감 능력과 같은 흔히 성폭력 가해자의 특성이랄 수 있는 개인적 성향 외에, 여자는 남자를 무시해서는 안 되며 그런 여성은 혼내도 된다는 남성성이 발현된다. 폭력은 처음부터 자신이 의도해서 일으킨 것이 아니라 여성이 자신을 화나게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따라서 그 여성은 강간을 당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성폭력인데도 성폭력은 극악한 흉악범에 의해서나 일어나는 범죄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행동을 상대에 행동에 대한 반응 또는 호감이 있던 상태에서 이뤄진 거친 성관계 정도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폭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에게 페니스는 어떤 의미인가

흔히 성관계를 ‘성기 결합’이라고 하기보다 ‘삽입섹스’ ‘삽입했다’라며 페니스 중심으로 사용한다. 성관계의 중심이 남성에게 있는 것이다. 어린 여아들이 “나도 오빠처럼 서서 소변보고 싶어.”라는 말에 많은 부모들이 “너는 없어서 안 돼!”라고 한다. 모양은 다르지만 모두에게 있는 성기가 아니라, 페니스가 있는 남자와 페니스가 없는 여자로 나누는 것이다. 페니스를 가진 자는 페니스가 있기 때문에 특별한 능력을 갖춘 것이며 특별한 존재로 인정된다. 페니스를 가진 남성은 남성이라는 것만으로도 우월감을 갖고 행위의 대상이 되는 객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의도대로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며 성장한다.

이러한 남근주의 또는 페니스권력은 성기 삽입이 성적 쾌락을 넘어 삽입되는 대상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상징한다. 성폭력이나 성매매 가해자들에게서 성적 만족을 얻었다는 대답이 적게 나타나는 이유는 그 행위가 성적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적 만족 이외의 것을 충족하기 위해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즉 행위를 주도하는 지배자 위치의 만족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성폭력이나 성매매 청소년 피해자들이 진술한 피해 내용을 보면 성적 유린의 과정에서 보통의 남성들이 얼마나 파괴적인 방식으로 지배자의 경험을 누리려 했는지가 드러나 있다.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성적 욕설이나 비하적인 말, 치욕적인 체위 등을 명령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어린 여자아이들이기 때문에 더 가능했던 것이다.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의 저자 우에노 지즈코는 방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을 만나 어떤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는지를 물어보면 남성들은 대부분 ‘내가 다루기 쉬운 여성, 나보다 열등한 여성’이라고 답한다.”라며 “그들은 ‘강자’나 ‘나보다 큰 여성’들 앞에서는 작아진다.”라고 하였다. 성별 관계에서 남성은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젠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우위를 입증하기 위해 또는 그 우위가 위협을 받으면 폭력적 방식을 채택한다.


성을 밝히면 안 되는 여성들

2011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슬럿워크(slutwalk) 즉 ‘잡년 행진’은 ‘슬럿처럼 입어서 성폭력을 당했다’는 인식에 반기를 들고, 여성이 옷이나 술을 먹는 방식 때문에 성적인 공격을 당할 수 없다는 항의로 시작된 운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대 앞 슬럿워크 1인 시위’ 또는 페니스파시즘을 파괴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거나 “잡년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고 주장하며 활동해왔다. 무엇보다 폭력을 당하지 않으려면 성적 존재임을 드러내지 말라며 여성의 성을 통제하고 여성을 성녀와 창녀, 처와 첩 등 이분법으로 나누어 객체화하는 것에 저항한다.

‘슬럿처럼 입는다’는 것은 성을 밝히는 헤픈 여자, 문란한 여자라는 의미이다. 성적인 욕망을 드러내고 성을 밝히는 것은 정숙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이며 이런 여성은 보호받을 가치가 없으며 성적 폭력을 당할 만하다는 것이다.

성별 분업은 주도적이고 중요한 일은 남성이 하고 보조적이거나 하급직은 여성이 한다든지 성별에 따라 다른 태도, 업무가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성적 욕망, 성행위에서도 남성은 주도적이고 경험하는 자이고, 여성은 선택되고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수동적 존재이다. 여성의 성적 욕망 역시 남성과 차이가 없으며 성적 존재로서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하면서도 성적 욕망은 여전히 남성의 영역에 속해 있다. 여성은 성적 욕망을 갖는 것도 억제해야 하며 성적 경험에서도 주도적이거나 적극적이어선 안 된다. 여성은 언제나 남성을 기다리고, 남성이 무언가를 해주길 바라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

많은 연구가 보여주듯이, 사랑이라는 감정이나 성적 욕망 역시 자연발생적이라기보다 사회화 과정의 학습결과이다. 어떤 상황에서 욕망이 드러나는지, 욕망과 감정들이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강렬하게 경험되는지 자신이 속한 집단의 관습과 사회화에 따라 정해진다. 욕망이 즉각적이고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욕망을 어떤 방식으로 표출하고 성취하느냐는 사회화의 결과이다. 즉 사랑과 연애, 성적 욕망은 사회문화적인 산물로서 주어진 ‘성 각본(sexual script)’에 따라 특정한 젠더 역할을 수행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여성이 성적 주체성을 이야기하거나 성관계에서 자기 결정권을 강조한다면, 그 여성은 사회적 지탄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몸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면서 성적 욕망을 표출하기에는 사회적 시선이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성적인 욕구에 늘 죄의식을 느끼며, 숨기거나 무시하게 된다. 성폭력 피해를 당한 이후에도 자신이 성적인 태도를 보여서 피해를 당한 것은 아닌지,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죄책감을 느낀다. 때로는 주변 사람들도 혹시 성적으로 유혹한 것은 아닌지, 연애감정은 없었는지 묻고 의심한다. 그런 시선을 미리 감지하게 되면 결국 성폭력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 못하고 숨기게 된다.

성에 대한 태도, 각본은 청소년 시기부터 자연스럽게 구성된다. 청소년기, 청년기에 강한 성적 욕망을 보이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성욕을 가진 존재로, 섹스하는 존재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즉 연애는 인정해도 섹스는 불편해한다. 섹스, 피임, 임신, 낙태, 출산에 대해 드러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이런 주제들이 삶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적 욕망을 다루지 않을수록, 마치 아무 상관이 없는 듯 외면할수록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성적 대상화가 진행되고, 그들의 성적인 삶은 불편하고 수치스럽게 인식된다.

여성은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에 익숙하지만 ‘욕망의 주체’가 되는 존재로서는 익숙하지 않다.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여성 정체성을 형성하며 그 사회의 문화, 관습, 종교에 의해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것으로 ‘자연화’ ‘내면화’되어 왔다. 대상이 되는 여성은 욕망을 표출하는 것도 불편해하지만 성적 상황에서 거절하는 것도, 동의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다. 성적으로 수동적인 사람이 되도록 요구를 받으며, 성관계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면 ‘문란하다’는 프레임이 씌워지기 때문에 성적 주장을 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여성의 ‘노(No)’는 오히려 강력한 ‘예스’라는 왜곡된 통념이 형성된다.

여성의 성적 욕망을 인정하지 않거나 금지하는 가장 극단적인 문화가 바로 여성 할례이다. 일부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 같지만,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여성 할례는 아프리카와 중동 그리고 최근에는 유럽, 미주 국가까지 약 30여 개국에서 행해지고 있다. 1억 3천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할례를 받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고 매년 시술을 받는 여성들의 수는 200~300만 명에 달하며 하루에만 6,000명 정도의 여자아이들이 할례를 받다 죽음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할례는 일부다처제가 보편적인 아프리카나 이슬람 문화권에서 한 남편이 여러 아내를 성적으로 만족시켜 주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여성의 성적 의도를 막아 보려는 남성 우월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성 인권침해이다. 여성 할례는 사춘기 즈음하여 여성의 성기에서 성적으로 민감한 부분을 제거하여 성적인 쾌감을 평생 느끼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아동학대에 해당하는 범죄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할례 시술을 받지 않은 여성들은 그들 자신의 성욕을 억제하는 신뢰성이 없어 정숙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할례가 신체에 주어진 성적 억압이라면 헤프거나 문란한 여성이라는 개념은 정신적 억압이다.

문제는 여성에게 ‘무성적인’ 혹은 ‘순결한’ 자세를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여성 역시 자신의 ‘성욕’에 대해 느끼고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성적인 욕구인지, 혹은 자신의 성적 욕구를 어떻게 표현하고 해소해야 하는지 모른다.

성적 존재로서 여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적 대상으로서만 존재하게 한다. 성적 대상화는 돈으로 상대방의 성을 지배할 수 있다거나 나의 욕망만이 중요하다고 여길 때 가능해진다. 상대도 욕망을 가진 존재임이 고려되는 사회에서는 남성 중심적인 일방적 관행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최근 여성을 주체적 성욕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 변화가 여성을 비하하는 용어에서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 성적으로 자유롭거나 성적 파트너가 여러 명인 여성을 일컬어 ‘걸레’라고 불렀다면 최근에는 ‘보슬아치’라고 한다. 헤픈 여자를 걸레라고 불렀을 때도 성적 욕망을 드러내고 성취하는 여성에 대한 비하가 있지만, 보슬아치 역시 그에 대한 비하의 표현이다. 남성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욕망으로 자신의 몸으로 성을 선택 가능한 존재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감이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거침없는 변화와 같이 여성성에 대한 오랜 편견과 왜곡의 벽을 부숴버리는 자립적이고 당당한 여성상의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욕망이라고 가르치는 무수한 통념들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대부분의 교정교육 프로그램은 여성주의와 인지행동이론에 기반해 있다. 성폭력 가해 행동이 과거 심리적이거나 애착과 같은 개인적인 요인보다는 성에 대한 왜곡된 인지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고 왜곡된 인지를 바꾸는 것이 재발을 방지한다고 보는 것이다.

흔한 인지왜곡은 ‘여성이 약하게 저항했다면 성폭력 당한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 ‘여성이 조심하면 성폭력을 피할 수 있다’ ‘남성의 경우 여성이 적극적으로 유혹하면 성적 충동을 조절하기가 어렵다’ ‘여성이 남자와 숙박업소에 들어갔다면 성관계 의사를 암묵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등이다. 이러한 통념들을 얼마나 강하게 확신하고 있느냐에 따라 행동으로 실현될 가능성도 커진다. 예를 들면 어떤 남성이 ‘여성이 적극적으로 유혹하면 남자들은 성적 충동을 조절하기 어렵다’라는 통념을 지니고 있을수록 여성이 친절하게 웃고 말하는 모습을 보면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혹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남성이 그 여성보다 조금 더 힘을 갖고 있는 위치라면 성적 접촉을 시도한다. 그 시도가 성공하고 상대의 저항이 없었다면 두 번째 세 번째는 훨씬 수월하게 시도할 것이다. 상대 여성이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고 먼저 유혹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은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믿는다.
일반적으로 성욕은 억제할 수 없는 자연적인 본능이라는 성적 규범이 깔려 있기 때문에 성폭력이 ‘폭력’의 형태라 할지라도 ‘남성성의 본능’으로 이해된다. 성은 자연스러운 ‘본능’이므로 성추행, 성폭력도 본능의 차원으로 정당화한다. 본능론적 접근은 이성애 남성 중심적이며, 여성과 남성으로 범주화하여 남성과 여성 간에만 성폭력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한다. 동성 간 성폭력은 ‘장난으로’ 또는 ‘친해지기 위해서’라는 말로 쉽게 가려지며 피지배적 위치에 놓인 피해자는 합의한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학교, 군대, 감옥 내의 남성 간 성폭력의 경우 피해자는 여성화된 지위, 즉 남성성의 손상을 입게 되기 때문에 피해 사실을 말하거나 신고하는 데 더 어려움을 겪는다.

‘여자가 침대에 누워 있었고 가만히 있었고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폭력이 아니다’ ‘강력하게 방어하는 여자를 혼자서 강간하기 어렵다’라는 통념은 가해 남성들의 개인적인 경험만이 아니라 성폭력에 대한 기존의 믿음체계에 기반한 것이다. 믿음체계는 자주 행동으로 나타난다. 성폭력 각본은 우월한 남성성, 강간 신화, 강간 통념 등의 믿음체계로서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익숙하며 오랜 세월 동안 내면화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자연스럽고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성폭력은 ‘폭력’의 형태에 ‘성’이 개입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가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벌인 일이라며 가해자 중심으로 사건을 해석한다. 성폭력이란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신체적, 언어적, 비언어적인 성적 접근이나 행위이다. 성폭력은 성욕이 일으킨 폭력이 아니라 성별, 지위 등의 권력 관계를 이용하여 성욕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폭력’을 택한 것이다.

최근 미투 운동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모 정치인이 ‘수컷이 많은 씨를 심으려 하는 것은 본능’이라며 성폭력이 아니라 남성의 본능이라며 옹호하자 한 인류학과 교수의 반론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성희롱, 성추행, 강간의 행위는 씨를 뿌리는 일이 아니다. 설사 강간의 결과로 임신이 되고 아이가 태어난다고 해도, 이는 진화론에서 이야기하는 생식 행위라기보다는 사회학, 인류학에서 이야기하는 권력에 의한 폭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본능이라는 프레임은 성폭력 행위의 중심에 있는 권력과 폭력에서 관심을 돌리게 한다. 우리 사회의 남성은 틈만 나면 정액을 뿌리고 싶은 본능에 움직이는 수컷으로 자리가 매겨지고, 제도는 그러한 자연적인 본능을 억제하는 수단이 되고, 여성은 수컷의 강한 본능을 억누르면서 보호해줘야 하는 암컷으로 자리가 매겨진다. 남성은 씨 뿌리는 수컷이 아니고 여성은 수컷이 뿌려대는 씨에서 보호받아야 할 순결한 처녀도 아니다. 왜곡된 본능에 인간을 자리매김하는 일은 과학 지식의 잘못된 전달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문제는 욕망이 아니라 권력이다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이 음란물에 빠져 그대로 시도해보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같은 학급에 있는 한 여학생에게 성추행 가해행위를 시도했다. 학급에 여러 여학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여학생을 선택해서 그런 행동을 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여학생들은 놀림을 받거나 장난치면 화를 내거나 대드는 데 평소에도 놀림을 잘 받던 그 여자아이는 아무 대응도 하지 않고 피하기 일쑤였어요. 아, 저 여자아이한테 하면 ‘아무 문제 없겠구나, 항의하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자 중학생이 여자 동급생에게 자신의 성적 욕망을 실현하려고 할 때 그 일이 가능한지 아닌지 탐색한다. 동급생 간에도 내가 좀 더 우월한 위치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탐색은 스스로 알아차릴 만큼 항상 명료하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 남학생도 이런 질문을 몇 차례 받고 생각해본 후에야 사건 당시 언뜻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을 발견해냈다.

성폭력은 할 만한 대상에게 가해하는 행위이다. 미투 피해자 중에는 가해자가 지금은 사회적 인지도가 있지만 과거 무명이었던 때 피해를 당한 피해자들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성폭력은 권력범죄인데 ‘아무 권력도 갖지 않았을 때 무슨 성폭력을 행사했겠냐?’며 반감을 드러낸다. 권력은 지위, 직급, 연령, 종교 성직자, 경제력 등에만 있지 않다. 일상의 관계에서도 힘의 차이는 발생한다. 성적 지향이 다르다, 술에 취했다, 개인적 약점을 알고 있다, 하루 일찍 입사해서 일을 좀 더 잘 알고 있다는 이유 등, 상대를 제압할 힘은 다양하다. 만약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권력이 없다면 성폭력이 아닌 것인가? 성폭력은 힘의 차이가 있는 관계에서 일어나며 힘의 차이는 일상에서도 일어난다. 성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 권력이 동원되는 구조화된 폭력으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인지, 그리고 ‘NO’라고 했을 때 이후의 불이익이나 피해가 예상되지 않는지가 성폭력을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나영(2018)은 젠더 자체가 권력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에 성별 권력관계와 무관한 권력형 성폭력이란 개념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하다고 한다. 즉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성별(gender) 자체가 위계적 관계로 구성돼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권력관계의 효과이자 새로운 권력관계의 원인”이라며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남성은 특정인의 잘못으로 개별화되지만, 여성의 경우 ‘여성 집단’ ‘여성성’의 문제로 과잉일반화 된다.”고 지적했다.

성추행 의혹을 받은 연출가 이윤택은 “더러운 욕망을 억제하지 못했다.”라고 했다. 예술가들의 순수한 동기를 이용하고 자신의 성적 욕망을 착취한 ‘권력’을 이야기하지 않고 욕망이라고 한 것이다. 폭력이 ‘성’(性)이 아니라 ‘권력’에 있음을 무시한다. 여성에 대한 성차별 및 성폭력 고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미투가 문제 삼는 것은 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력이다. 특히 연극계와 영화계 미투와 같이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된 비정상적인 조직문화와 같이 권력을 견제하기 어려운 구조의 취약함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임을 폭로하는 것이다.

미투를 통해 성폭력은 가해자 개인의 성욕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폭력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권력구조에 관심을 돌린다. 구조를 성찰하지 않고 욕망의 문제로 화살의 끝을 돌리는 이상 그 구조에 공모하게 된다. 욕망이 아니라 폭력의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


입증하기 어려운 성폭력

여성차별 문제를 다룬 유엔 최초의 문서인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 철폐 협약(Convention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s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은 국제여성 인권선언으로 알려져 있다. 이 협약에 의해 창립된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국제여성 헌법 격인 이 협약을 비준한 나라들의 이행 상태를 심의하고 있다. 최근 이 협약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이행 상황을 심의하는 자리에서 성폭력에 대한 안이한 대응으로 질타를 받은 바 있다. 특히 한국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을 무고죄로 고소하거나 이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거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에 대해 ‘이는 모든 피해자를 침묵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로 강간죄를 규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한국 형법은 강간을 너무 엄격하게 정의하고 있어 문제’라며 일반권고에서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설정토록 하고 있다.’라며 이에 대한 수정을 요청하였다.

국내에서도 가장 개선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법 개정으로 꼽는 것이 형법상 ‘강간’의 정의이다. 현행 형사법 체계에서 성폭행은 ‘피해자의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할 정도에 이르는’ 폭행 또는 협박이 있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폭력과 협박이 없으면 강간죄로 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피해자는 그런 폭력과 협박에 ‘저항해야만’ 범죄 피해를 인정받는다. 지적장애가 있는 여성이나 미성년 여성이 피해를 당해도 ‘저항했는지’를 따지고, 죄를 입증하기 위해 수사기관에서 ‘왜 저항하지 못했느냐?’라는 물음에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일은 바로 이런 법규정 때문이다. 단호한 거절 의사를 밝힌 것만으로도 강간죄가 성립된 판례가 있는 나라도 있지만, 저항규정을 따르고 있는 나라의 경우 ‘저항하기가 곤란한 상태’로 규정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피해자가 저항하기 현저히 불가능한 상태’와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규정은 피해자가 얼마나 저항을 했는지, 상황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었느냐를 피해자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가해자와 알던 사이였거나, 도움 요청이 없었다거나, 사건 직후에 곧바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면 불리해지는 규정이다.

성폭력을 당하는 순간에 저항했어야 하는데 왜 저항을 못했을까?

성폭력은 권력관계, 힘의 차이가 있는 관계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다. 취업 추천을 하고 자리를 보전해주고 역할을 주고 좋은 평가를 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성폭력을 거부하거나 문제 제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이 성폭력이기 때문이다.

직장 내 가해자의 대부분은 상사이다. 10인 이상 규모의 사업장에서는 절반 이상의 비율로 가해자가 상사이고 소규모 사업장은 사장에 의한 성희롱이 가장 많이 나타난다. 최종 인사결정권자인 사장에 의한 성희롱은 해고 등 직접적인 고용 불안정으로 이어져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고, 문제를 제기해도 직장 내에서 조사나 조치가 취해지기도 쉽지 않다. 여성노동자회의 조사에 의하면 “직장 내 성희롱으로 고용노동부에 진정해도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고용노동부에 접수된 직장 내 성희롱 진정 사건은 2012년 249건에서 2016년 556건으로 2배 이상 늘었으나, 같은 기간 검찰 기소 사건은 단지 9건에 불과했다. 시정조치도 대부분 진정취하나 시정완료 등 행정종결에 그치고 있다”. 여성노동자회는 “직장 내 성희롱 상담의 증가는 여전히 여성 노동자들이 직장 내 권력관계의 하위에 위치하며, 남성 중심적 직장 문화 속에서 여성 노동자가 성희롱의 대상이 되기 쉬운 현실임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많은 피해자가 ‘꽃뱀’의 낙인과 집단 따돌림이나 괴롭힘, 업무상 불이익, 해고 등 다양한 형태의 불리한 조치를 경험한다. 직장 내에서 성희롱 피해 사실이 알려지거나 피해의 처리를 요구하면, 가해자를 감싸거나 피해자는 ‘진지충’ ‘성격이 예민한 사람’이라거나 ‘참을성이 없는 사람’ 등 피해자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원치 않으면 거절하거나 저항했어야 한다는 비난과 폭력뿐만 아니라 연애사로 끌고 가려는 주변의 시선이다.

여성차별철폐위원회의 권고처럼 얼마나 저항했는지가 아니라 가해자가 피해자의 ‘적극적인 동의를 얻었는지’가 성폭행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동의는 어떤 행동을 했는가에 대한 기술적 정의 대신 동의의 유무, 관계의 대등성 강요성을 성폭력 여부의 판단 기준으로 한다. 동의는 단지 ‘yes’라는 한마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령이나 발달 수준, 자발적인 결정, 발생할 수 있는 결과 및 다른 선택도 가능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하는 등 동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아직은 부족한 상황이다. 성폭력을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라고 정의하듯이 성폭력의 기준을 동의 여부로 하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


불편함에 대한 해석

데이트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면접연구(배수희 외, 2016)에서는 면접 참여자들이 ‘다시 생각해보니까’ ‘헤어지고 나니까’라는 말을 시작으로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성폭력으로 언어화해낸다고 하였다. 성폭력이라고 판단 내리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변화를 통한 자기 해석적 행위라고 보는 것이다. 이후의 해석을 통한 경험의 재구성 과정에서 여성은 그 남자와의 성관계가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였으며 성관계에서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었는가를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같은 연구에서 켈리(Kelly, 1988)는 ‘성폭력의 연속선’ 개념을 통하여 이성애에서 성관계 경험이 동의 아니면 성폭력으로 이분화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에서 압력, 강제 그리고 힘으로 나아가는 연속선상에 있다’고 강조한다. 즉, 성관계가 여성의 동의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 동의가 암묵적인 강요에 따른 것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성폭력의 연속선’ 개념은 성폭력뿐만 아니라 성행위 전반에서 여성이 느끼는 불편함을 설명하며, 성폭력 상황에서 피해자가 즉각적으로 성폭력을 인식하지 않더라도 사후에 성폭력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성별 권력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관점이 대립하는 폭력의 경우 여성은 자신의 피해 경험을 재현할 언어가 부재한 현실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무엇을 데이트 성폭력이라고 명명할 것인가 혹은 어디까지 ‘범죄’로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 이전에, 성폭력이 여성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 혹은 ‘알아차리는 것’이라는 사실은 곧 ‘젠더 감수성’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성차별적인 문화적 맥락에서 작동하는 성별 권력의 영향력을 무시하고는 성폭력을 설명할 수 없다.

여성의 경험이 성 중립적 또는 남성과 동일한 언어로 묘사되고 특히 성폭력 경험 역시 단지 ‘범죄다, 범죄가 아니다’로만 판별하려는 시도 속에서 성폭력이 어떤 경험인가에 대한 젠더적 섬세함이 요구된다.
나오는 말

차별과 억압, 폭력을 정당화하는 젠더 고정관념이 각 개인에게 내면화되어 있고 법과 사회제도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사회에서, 권력에 기반한 폭력피해를 드러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폭력은 조신하게 행동하지 않은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해서 일어난 일이며, ‘밤늦게’ ‘술에 취해’ ‘거절을 잘 못해서’ 일어난 일이며, 그런데도 문제를 드러낸다는 것은 뭔가 정치적 의도가 있거나 숨겨진 의도가 있을 거라고 해석된다. 그나마 성폭력은 강간 등 성적인 폭력에 한정되어 있다.

폭력이 일어났다고 말할 때 ‘무엇을 성폭력으로 볼 것인가?’ 논쟁이 오간다

무엇 때문에 성폭력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 피해자 유발론, 본능론 등이 주장되면서 사회적 갈등이 일어난다. 그나마 아동이나 지적장애인이나 나이 차이가 엄청나게 나는 관계에서 일어난 성폭력의 경우 또는 소위 ‘피해자다운 피해자’인 경우에는 ‘상식적’으로 피해자로 인정한다. 그 이외의 피해자는 그 증언이 사실인지 조작된 거짓말인지 판단하기 위한 의심과 비난과 역고소를 감내해야 한다.

누구의 상식이며 누가 만든 규정인가? ‘상식’은 분명 본능 중심, 남성 중심의 언어 논리일 것이다. 이런 한계를 인식하고 성폭력 피해 사실이 여성의 입장에서 성립하려면 광의의 성폭력 개념이 필요하다. 넓은 의미의 성폭력은 ‘여성에 대한 폭력’, 여성의 성을 매개로 행해지는 모든 유형의 폭력으로 개념화하며 성별 권력관계 자체를 문제시한다. 그렇게 되면, 피해자가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주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성폭력을 젠더 권력의 문제, 즉 젠더 폭력의 문제로 제기할 수 있다. 권력의 문제이기에 인식 개선, 교육만이 아니라 가해자 입증 책임, 처벌, 그리고 그것의 ‘제도화’가 뒤따르게 된다.

성폭력은 공적인 공간에 나와 있는 여성을 여전히 사적인 존재로 여기면서 공적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적 대상, 폭력의 대상으로 볼 때 일어난다. 미투는 성폭력을 행사하지 말라는 공적인 문제 제기이다. 사적으로 희롱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문제라고 공표하는데도 공적으로 처리되지 않고 있다. 사법적 처벌과 같이 공적으로 처리되지 않기 때문에 피해자는 두려워하고 가해자는 재기를 꿈꾼다. ■

김영란 
나무여성인권상담소 소장. 연세대학교 간호학과, 동 대학원 졸업. 성폭력전문상담원, 사회복지사, 내러티브상담사, 반(反)성폭력 활동가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학교에서의 성인권 교육교재 연구 활동으로 《학교폭력 위기개입의 이론과 실제》(공저) 어린이를 위한 성교육만화책 《사춘기》 《채연이의 일기》 등을 펴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