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 대중화의 전범을 보여준 저술

탁효정 지음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
100%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학자들의 글쓰기에는 늘 아쉬움이 남는다. 자신의 전공 분야에 관한 전문지식을 다룬 글(성과)을 관련 분야의 사람들끼리만 나누어 읽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중적 글쓰기에 익숙한 기자 등 이른바 ‘글쟁이’들은 대중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쓰기 능력은 어느 정도 갖추고 있지만 전문적인 식견은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교수나 연구원 등 이른바 박사급 이상의 학자들이 대중적 글쓰기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또는 글쟁이들이 전문분야에까지 탁월한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고루 갖추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나,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다 보니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대중이 읽을 수 있도록 매개 역할을 하는 이들이 한때 출판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한 권으로 읽는…… ’ 유의 제목으로 출간된 책들이 대개 그런 경우였다. 이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들이 이뤄놓은 학문적 성과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책으로 펴내는 역할을 담당했다.

사실 학자들의 연구 성과는 논문집이나 학회지, 전문서적 등으로 정리되지만, 고작해야 그 분야의 전공자들 수백 명 정도가 읽을까 말까 하면서 도서관에 묻힌다. 이런 패턴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성적인 삶,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이런 매개 역할을 하는 몇몇 사람들의 ‘두드러진’ 활약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업이 전문가들의 성과를 온전히 대중에게 전하고 있다고 확신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들 역시 그 분야의 비전문가이기는 대중과 다르지 않고, 이에 따른 한계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메커니즘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면 공평해야 할 자연의 질서에 어긋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육식동물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갖고 있지만 뿔은 없는 것처럼, 뭉툭한 이빨과 둥근 발톱을 가진 초식동물이 육식동물에게는 없는 강력한 뿔을 가진 것처럼, 비록 속이 빈 뼈와 가녀린 두 다리를 가졌을 뿐이지만 하늘을 나는 날개를 가지고 있는 새처럼 자연의 질서는 어느 한 사람이나 부류에 모든 것을 다 몰아주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더라도 대중은 이 두 가지를 다 구족한 이를 기다린다. 간혹 이런 이들이 가물에 콩 나듯 나타나면 열광적인 환호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를 펴냈을 때 대중은 ‘유 교수가 우리나라 국토를 10배 이상 넓혔다’는 찬사를 보내며 그의 책들을 밀리언셀러로 만들어주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펴내는 철학서 등 여러 인문학 서적이 늘 화제를 몰고 다니며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탁효정 한국한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이 최근에 펴낸 책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은행나무 펴냄)는 이런 면에서 주목할 만한 책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원당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 연구원 장서각에서 일하고 있는 탁효정 박사가 최근 일반 대중에게는 매우 고리타분하고 무관심해 보이는 전공 분야의 지식을 탁월한 대중적 글쓰기로 맛깔나게 요리해 선보인 것이다. 이 책은 ‘전문지식과 대중적 글쓰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성공적으로 사냥한 결실이다.

이 책은 〈불교신문〉에 〈왕실원당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1년여간 연재된 글을 보강하고 보완해 탄생했다. 신문에 연재될 당시부터 원당 이야기가 재밌을 수 있다는 점에 놀랐고, 전문성을 유지하면서도 맛깔난 표현을 자유자재하게 구사하는 저자의 능력에 더 놀랐었다. 그 글들이 연재 당시보다 더 세련되고 깊어져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을 때, 전문성과 글쓰기 능력을 고루 갖춘 예비 스타의 탄생을 예감했다면 지나친 찬사일까.

아마도 이런 느낌을 받은 것은 필자만이 아닌 듯하다. 이 책을 발견한 《불교평론》에서 출간 즉시 서평을 부탁한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청탁 이유 역시 ‘전문성과 글쓰기 능력’에 대한 편집자의 주목이었다. 적게는 수십 명, 많아야 수백 명이 돌려보고 마는 학회지에 학자들의 논문이 실리면 그만인, 불교학계의 닫힌 현실에 대한 갑갑증을 풀어내고자 매거진적 편집방식을 도입해 ‘세미 학술지’ 형태로 발간하는 《불교평론》으로서는 탁효정 박사의 신간이 입맛에 딱 맞는 책이었을 것이다.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는 억불숭유의 조선 시기, 왕실의 깊은 불심이 빚어낸 찬란한 불협화음을 탁 박사의 눈으로 읽어낸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시대의 마음을 읽는 것이 역사를 통찰하는 가장 쉽고 재미있는 길”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자신의 말대로, 통속적인 내용에 머물러 있을 개연성이 높은 왕 중심의 조선사 뒤에 가려진 왕실 여인들의 지성스러운 불사를 소설처럼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한낱 투기와 가십의 소재에 불과했던 왕실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옛 사부대중의 자생적 개혁 의지와 지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 사찰의 역사에는 수많은 인연과 수없는 마음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하나의 인드라망을 이루고 있다. 어떤 이들은 동학사에서 단종의 핏빛 슬픔을 보고, 어떤 이들은 김시습의 통곡을 듣고, 어떤 이들은 누더기가 된 세조의 마음을 읽는다. 또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사육신의 충절과 비애를 느낀다. 어떤 이들은 이곳에서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이치를 깨닫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수행에 몰두한 스승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그중 일부는 역사로 남고, 일부는 전설로 떠돌며, 대부분은 세월 속에 묻혀 잊힌다. 동학사에 뒹구는 낙엽들이 계룡산의 일부가 되어 사라지듯이.(147쪽)


이 책은 ‘실록’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 퍼즐을 사료와 설화, 지금도 계속 발굴 중인 사찰 사지(寺誌)의 기록들을 저자만의 통찰과 세련된 글쓰기로 입체적으로 구현해내고 있다.

이 책은 조선의 아버지 태조는 물론이거니와 유교의 통치 철학으로 대표되는 세종, 그리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까지 조선 왕실 사람들 대부분이 신실한 불교도였음을 사료를 근거로 밝혀낸다.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왕실 불사의 흔적은 왕실의 사찰, 바로 불교 원당(願堂)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고, 탁 박사가 이 흔적을 연구해 오늘의 언어로 대중에게 상찬한 것이다.

원당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간절히 비는 집’이다. 조선 왕실 사람들은 절을 짓고 그 안에 위패나 초상화를 모셔 자신만의 소원을 담은 공간을 만들었다. 주로 죽은 부모나 남편, 요절한 자식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건축되었던 원당은,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아들 회임을 발원하는 기도처의 성격을 띠게 된다. 불교의 구도적 성격에 기복 신앙이 더해지고, 세종의 한글 창제로 불경이 대중화되면서 불교는 명실상부한 민중 종교가 되었다. ‘원당’이라는 말 자체는 낯설지만, ‘명당’이라든가 ‘영험한 기도처’란 익숙한 민중 신앙으로 지금껏 그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원당에 깃든 조선 사회의 파노라마’를 유려한 문장으로 살려내고 있다. 이름 없는 무장에 불과했던 이성계가 역사상 가장 견고한 왕조라 평가받는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던 계기는? ‘상갓집 개’라는 하찮은 별명으로 불렸던 왕실의 먼 친척 흥선대원군이 권력 최상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대중의 이목을 끄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저자는 놀랍게도 ‘조선 왕실의 원당’에서 찾아낸다. 탁 박사에 따르면,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던 신화와 같은 역사의 이면에는 ‘천하 명당’으로 불리는 ‘원당’이 있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명당은 부모의 묘를 이장하거나 절을 세우고 성심으로 기도한 끝에 뜻을 이루는 곳이다. 탁 박사는 그 한 예로 선조부터 순종까지 왕을 열넷이나 배출한 길지 동작동 화장사(현 국립현충원)를 등장시킨다. 중종의 후궁 창빈 안 씨를 이곳에 모셔 손자 하성군이 선조가 되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묻혀 그의 딸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가원수가 되었으니 이곳이 왕(또는 대통령)을 배출한 명당인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원당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명당을 애타게 찾았던 그 시대의 간절한 기도, 그 욕망과 아픔을 이해하는 것이다. ‘폭군’ 연산군과 광해군, ‘팜파탈(요부)’ 조귀인과 장옥정, ‘국모’ 명성황후 등 흔히 우리가 친숙한 별명을 붙여 부르는 왕실 사람들과 그 원당에 얽힌 사연들을 보면 그 호칭이 후대의 역사관, 즉 현재의 욕망과 아픔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는 역사서들의 일편지견(一偏之見)에서 벗어나 세종의 독재 군주적 측면, ‘무능한 왕’이란 오명을 벗기 시작한 광해군의 콤플렉스, 공포정치를 펼쳤던 세조의 선업(善業) 등을 ‘신선한’ 시각으로 읽어낸다.

그런가 하면 저자는 조선 시대 여성을 다룰 때마다 겪게 되는 고충도 털어놓는다. ‘여자가 사람이 아니었던 시대,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적 의미와 인간의 존엄성을 찾는 일’이 마치 목이 좁은 유리병에서 자란 새를 꺼내는 일 같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 500년 역사를 가능케 했던 힘의 원천은 어둠 속에서 촛불을 밝히고 치성을 올린 왕실 여성들의 불심이었고, 또한 역으로 500년간 이어져 온 왕실 불교는 왕실의 여성들이 막막한 삶 너머 내세를 상상하며 내면의 힘을 기를 수 있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영겁회귀의 삶과 욕망, 죽음과 참회가 원당에 오롯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 사찰의 역사에는 수많은 인연과 수없는 마음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하나의 인드라망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찰 원당에 깃든 왕실 사람들의 기도에서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이치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원당 이해의 새 장르를 제시한 이 책의 등장은 조선의 역사를 다르게 보는 하나의 창을 낸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원당을 통해 조선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직면하는 것과 같다. 혼란한 정국을 돌파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간절한 바람, 그리고 마침내 이뤄냈던 불교와 유교의 융화는 그리 낯선 얘기가 아니다. 촛불을 밝히고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 그리고 그 기도가 불러온 변화의 바람은 누구보다 지금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기댈 곳 없고 의지처가 절실한 이들에게 “가장 영험한 곳, 바로 내 마음속에 원당을 짓고 지성으로 가꾸”는 법을 알려주는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 역사학자의 엄중함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야사처럼 때론 준엄하게, 때론 발칙하게, 또 때론 흥미진진하게 다가온다. 원당이라는 역사를 읽는 새로운 프리즘을 오늘을 사는 대중에게 제시한 저자의 통찰과 탁월한 글쓰기 능력이 거듭 놀랍다. 그리고 또 하나, 책을 한 차례 읽고 난 뒤 잔존하는 조선사에 대한 지식은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덤이다. ■

 

이학종 / 시인, 전 미디어붓다 대표. 동국대 불교대학원 불교학과 석사과정 수료. 불교 언론에서 30여 년간 일하고 있으며, 저서로 《선을 찾아서》 《돌에 새긴 희망》 《인도에 가면 누구나 붓다가 된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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