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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로봇은 해탈할 수 있나*
-‘인간은 생각하는 기계인가’에 대한 불교적 관점
[73호] 2018년 03월 15일 (목) 한성자 resu80@dongguk.edu

1. 머리말

인공지능 로봇에 대한 연구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 스티븐 호킹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인공지능이 갖는 “잠재적 위험에 대처하고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면 인공지능은 인류문명사 최악의 사건이 될 수 있다”라고 하며 자율적인 강력한 무기 등의 출현에 대해서 경고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인공지능과 관계된 산업은 현재 경제적으로 가장 전망이 밝은 분야 중의 하나로 여겨지며 매스컴에는 4차산업과 인공지능에 대한 기사들이 줄을 잇는다. 인공지능의 위협에 대한 근거 있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며 상용화 또는 실용화의 속도도 더욱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인간의 욕망과 관계되는 분야에서는 인공지능 로봇 연구의 성과들이 가장 빨리 실용화되고 있으며 이는 다시 인공지능 로봇의 연구에 기폭제가 될 것이다.

좋은 싫든 지금 추세로 보면 인공지능 로봇이 우리 생활의 일상으로 들어올 날이 머지않은 듯하며, 동시에 식견 있는 전문가들은 다급하게 그 위험성을 호소하고 있는 시점에 인공지능 로봇에 대한 불교적 관점을 정립할 필요성이 있다. 불교에서 인공지능 로봇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접점을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이 논문에서 택한 주제는 ‘인간은 생각하는 기계인가’라는 물음이다. 이 물음은 기계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처럼 될 수 있는가’ 또는 ‘인간을 능가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 되겠고 마음을 닦는 불교 수행과 연관해서 보면 로봇이 마음을 닦는다는 것이 가능한가, 나아가서 ‘인공지능 로봇은 해탈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까지 연장될 수 있다.

논문의 주제를 이렇게 잡은 것은 인공지능의 연구에 영국의 앨런 튜링(Alan Mathison Turing, 1912~1954)이 1936년 고안한 자동화 기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 기계와 관련해서 그가 인간의 마음도 두뇌에 의한 기계적 작용이라고 파악한 것이 이후의 컴퓨터 발전에, 나아가서 인공지능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로봇의 연구와 관련하여 불교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마음, 또는 인식에 대한 불교의 통찰을 인공지능 로봇의 연구와 공유하는 것이 될 것이다. 로봇을 만드는 목적이 인간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고 이익을 가져다주기 위해 진행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러나 인간과 똑같은 로봇제작을 추구하는 가운데 상당수 로봇개발자들은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마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데에 연구의 목표를 두고 있다. 본인과 똑같은 로봇을 만들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열중하고 있는 듯한 로봇연구가 히로시 이시구로 같은 사람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마음을 알고 싶다는 목표를 말하고 있다. 마음에 대한 연구를 한다는 점에서 인공지능 로봇연구는 마음공부를 하는 불교연구와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을 수도 있다.

   


2. 인공지능 로봇

1) 인공지능 로봇의 발전

인공지능을 강한 인공지능과 약한 인공지능으로 나눌 때, 강한 인공지능은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에 대해 사고하고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지각력이 있고,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의 완성된 모습은 인간처럼 생각하고 감지하고 행동하는 기계라고 하겠다. 그에 반해 약한 인공지능은 복잡한 연산은 가능하나 광범위한 인지능력은 없으며 대표적인 예로는 검색 기능, 스팸메일 필터링, 기계번역 기술 등을 들 수 있으며, 알파고 역시 약한 인공지능의 하나로서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적화된 장치이다. 인공지능 로봇의 현 단계는 약한 인공지능을 갖춘 정도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지능에 근접하거나 초월하는 폭넓은 지식과 확고한 자의식을 갖는 강한 인공지능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데, 과연 그런 자의식을 가진 강한 인공지능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여전히 논쟁거리이다. 그런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대표적인 연구로 튜링이 주장한 기계론을 들 수 있다. 튜링 이전에도 마음을 두뇌의 산물로 보고 마음이란 두뇌를 이루는 수많은 세포가 기계적으로 상호작용하여 생긴 결과이며 따라서 마음도 하나의 기계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튜링의 기계론 출현 이후 비로소 기계론과 그에 대한 반론은 보다 엄밀한 논리로 체계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튜링이 컴퓨터에 대한 원천설계도라고 할 수 있는 자동화 기계를 고안하게 된 것은 다빗 힐베르트(David Hilbert, 1862~1943)가 제기한 만능 자동장치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질문과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답한 쿠르트 괴델(Kurt Friedrich Gödel, 1906~978)의 불완전성의 원리 때문이었다. 힐베르트는 수학 작업의 과정에서 사용되는 여러 규칙을 찾아서 그것을 부품으로 하는 자동장치(알고리즘)를 만들면 수학자들이 하는 계산 작업을 그 장치가 자동적으로 대신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에 대해 괴델은 모든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는 완벽한 자동기계는 없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그의 꿈을 깨버렸다.

튜링은 이 두 사람의 질문과 답에서 자동장치(기계)라는 개념을 수식으로 풀어냄으로써 괴델의 답을 증명해 보였다. 즉 기계적 동작을 기본적인 수식으로 바꿔서 정형화함으로써 ‘기계적’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수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고, 간단한 계산 혹은 논리 연산을 하는 추상적인 수학적 개념의 자동화 기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정립했다. 후에 그의 이름을 따라 튜링 기계라고 명명된 이 추상적 기계는 컴퓨터의 출현을 가져온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튜링에 따르면 모든 수학적 추론은 기계화, 형식화될 수 있으며 인간의 두뇌 또는 마음도 수학적 추론의 상위체계로서 그 작용을 기계화시킬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기계화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간단한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우리가 예를 들어 2와 3이라는 두 개의 숫자를 가지고 임의의 계산을 한다고 할 때, 더하기를 하면 5가 될 것이고 곱하기를 하면 6이 될 것이다. 이때 더하기를 할 것인지 곱하기를 할 것인지는 우리 마음의 결정에 따른 것으로 우리 마음은 한 번은 덧셈의 마음 상태를 취했고 다른 한 번은 곱셈의 마음 상태를 취한 것이다. 계산을 위해서는 이렇게 우리 마음의 상태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마음 상태는 튜링기계에서 각 마음 상태에 임의의 기호를 부여하여 그 값을 정해주고 일단 정해지고 난 후에는 그 마음 상태는 항상 정해진 기호로 표시된다. 이렇게 마음이 기호화 또는 형식화되어 튜링기계에 적용됨으로써 마음의 기계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튜링은 더 나아가서 보편 튜링기계의 개념도 도입했는데 이는 한 기계 안에서 다양한 계산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예를 들면 덧셈하는 기계, 장기 두는 기계, 문자 복사 기계 등의 일을 하는 기계를 따로 만들 필요 없이 하나의 보편 튜링기계로써 이 일들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편 튜링기계에 필요한 것은 이들 기계를 모두 합한 기억용량과 처리능력이며, 인간의 지능이란 결국 복잡한 계산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입력과 저장을 하게 되면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 기계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강한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그 이후 강한 인공지능의 연구는 신경과학에서 인간의 뇌를 수많은 뉴런이 시냅스를 통해 연결된 신경망으로 이해한 것에 영향을 받아서 신경망을 모사한 인공신경망이 만들어졌다. 인공지능에 사용되는 신경망은 뉴런의 역할을 하는 프로그램 노드(node) 여러 개를 연결한 그물망으로 적절한 학습을 병행하면 인공신경망은 매우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결주의의 방식도 강한 인공지능을 구현해내지는 못했다. 그 결과 인공지능 연구의 방향은 광범위한 인지능력을 지닌 강한 인공지능을 목표로 하는 대신에 특정한 문제에 특화된 약한 인공지능의 개발로 향하고 있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약한 인공지능의 로봇이 등장하고 있다.

인공지능 로봇의 실용화와 관련해서 현재 가장 앞선 단계에 있는 것은 휴머노이드 로봇이다. 휴머노이드 로봇은 인간을 닮은 외형을 지니며 인간의 오감을 모방한 각종 센서를 장착하여 인간과 유사한 동작을 취할 수 있으며 수준 높은 인공지능을 갖추고 직립 보행 등의 각기 특화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는 일본 혼다사가 개발한 아시모(Asimo), 우리나라 KAIST에서 개발한 휴보(Hubo), 미국의 MIT 대학에서 개발한 표정 있는 얼굴 로봇 키스멧(Kismet) 등이 있다. 휴머노이드와 혼용되는 개념으로 안드로이드(Android), 사이보그(Cyborg) 등이 있는데, 안드로이드는 사람과 똑같이 만들어진 인조인간을 말하며, 영화 〈A.I〉에 나오는 데이빗 등의 인조인간들이 안드로이드의 대표적인 예이다. 모습이나 지능, 행동이 인간과 같으나, 로봇이므로 에너지 공급을 음식으로 하지 못하며 스위치를 누르면 작동 중지한다. 현재 완벽한 안드로이드를 만들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이시구로(Hiroshi Ishiguro) 오사카대학 교수 같은 경우에 자신의 외형과 똑같은 안드로이드 로봇을 만들어서 해외 강연 시에 실제로 보내기도 한다. 사이보그(Cyborg)는 인간이나 동물의 신체 일부에 기계장치가 결합된 상태를 말한다. 영화나 드라마에 많이 등장하여 〈아이 로봇(I, Robot)〉의 스프너도 기계로 된 왼쪽 팔을 가진 일종의 사이보그라고 할 수 있고, 600만 불의 사나이, 소머즈, 로보캅 등이 유명하다.

우리나라의 로봇산업에서는 로봇의 부문을 산업용 로봇과 서비스 로봇으로 나누고 있는데 산업용 로봇 분야에서는 우리나라의 시장 규모나 생산이 상위권에 이르지만, 서비스 로봇 산업에서는 크게 뒤떨어져 있다. 서비스 로봇은 휴머노이드 로봇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데,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인간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높은 수준이 요구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업체들이 로봇산업의 무게중심을 산업용 로봇에서 서비스 로봇으로 옮겨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2) 인공지능 로봇의 한계

앞에서 튜링기계를 통해 수식이 기계화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면서 컴퓨터가 나오게 되었다는 것과 보편 튜링기계를 통해 다양한 수식이 하나의 기계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통해 상위개념의 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마음도 기계화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을 보았다. 인공지능 로봇의 연구가 계속 확장된 데에는 이런 주장들이 뒷받침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강한 인공지능은 실제로 구현되지 못했으며, 이미 이론상으로도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과 유사한 지능을 가질 수 있다거나 심지어는 인간을 능가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그 초기부터 다양한 비판을 받아왔다. 이제 이러한 비판의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하는데 그 가운데 먼저 사고범위의 문제(Frame Problem)가 있다.

이는 유한한 정보처리능력을 지닌 로봇은 다만 정해진 틀 내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실제 상황에 대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니엘 데넷(Daniel Clement Dennett III, 1942~ )은 창고에서 배터리를 꺼내 와야 하는 로봇의 예시를 통하여 사고범위의 문제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 예시에서 로봇에게 필요한 배터리가 창고 안에 있는데 배터리는 수레에 실려 있고 수레에는 시한폭탄이 설치돼 있다. 인공지능 로봇 1호가 ‘창고에서 배터리를 꺼내오라’는 지시를 받고 창고에 들어가 배터리가 놓여 있는 수레를 잘 끌고 나왔다. 그러나 창고를 나오자마자 로봇 1호는 수레와 함께 바로 폭발해 버렸다. 로봇개발자는 첫 번째의 실패를 거울삼아 그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인공지능 로봇 2호는 배터리를 꺼내올 때 생기는 부차적인 영향을 고려하도록 제작했다. 그러나 이 로봇은 배터리를 꺼내오라는 지시를 받고 창고에 들어가 배터리 앞에 서는 순간, 동작을 멈추고 배터리를 꺼냄으로써 생길 모든 부차적 영향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생각하는 사이에 시한폭탄이 폭발했고 로봇 2호는 파괴되었다. 그러자 로봇개발자는 이번에는 목적을 이루는 데에 중요한 사항과 중요하지 않은 사항을 구별할 수 있는 인공지능 로봇 3호를 개발했다. 그러나 이 로봇은 창고 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 앞에서 동작을 멈춰버렸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중요하지 않은 사항을 모두 검토하느라고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중요한 사항에 대한 검토는 아직 시작도 못 했는데 폭탄이 폭발해버렸다.

위의 예시는 인간이라면 손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 인공지능 로봇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임무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에게는 별다른 사고과정 없이 저절로 되는 동작들이 로봇에게는 그 과정 중의 어느 하나도 아무런 수고 없이 저절로 되는 것은 없으며 아주 간단한 명령에도 무수히 많은 실행절차가 요구되는 것이다.

인간에 필적하는 또는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 로봇은 불가능하다는 비판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s)이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첫째 ‘모순 없는 수학적 형식체계가 있다고 할 때, 그 체계 안에는 참이면서 동시에 증명이 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한다.’ 둘째 정리는 첫째 정리에 따라 나오는 것으로 ‘체계의 무모순성은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명제는 증명할 수 없다’라는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가릴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만일 이 명제가 참이라는 것이 증명될 수 없다면 이 명제의 내용은 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명제가 참인가 거짓인가 하는 문제는 결정 불가능한 문제 또는 불완전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모순 없는 형식적 체계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모순 없는 형식적 체계에 관한 불완전성의 원리이다.

이제 마음에 대한 튜링의 기계론을 놓고 괴델의 불완전성 원리를 적용해보자. 마음은 기계와 같다고 할 때 그것은 마음에 상응하는 기계적 모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그 기계적 모델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그 기계적 모델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산술적 진리를 가려내는 것을 예로 들면, 인간이 산술적 진리를 가려낼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대한 기계적 모델도 산술적 진리를 가려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괴델의 원리에 따르면 어떤 기계이건 그 기계 자체는 그것이 참인지 가릴 수 없지만, 인간은 가려낼 수 있는 그런 참이 있다. 따라서 어떤 기계도 마음에 대한 완전한 모델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기계가 마음이 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계가 아무리 많은 것을 할 수 있어도 거기에는 언제나 기계는 할 수 없지만 마음은 할 수 있는 것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이 기계라는 기계론은 불완전한 옳지 않은 가설이 된다.

마음에 대한 튜링의 기계론에 대한 또 다른 반론은 마음의 범위는 유한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기계화한다는 것은 마음을 하나의 형식체계로 유한하게 기술한다는 것인데, 마음의 범위는 유한하지 않기 때문에 유한하게 기술할 수가 없다. 마음은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고 끊임없이 전개된다. 마음이 무수하게 전개되는 각각의 순간에 가능한 상태의 수는 유한하지만, 계속 전개되는 과정을 다 포함하게 되면 무한에 가깝게 확장될 수 있다. 물론 엄밀히 말한다면 생명이 끝나는 순간 그 전개가 멈추므로 무한하다고 할 수는 없다. 괴델은 튜링의 주장이 유효하려면 물질과 분리된 마음은 없다는 것, 즉 마음이 곧 물질이라는 것과 두뇌의 기능은 디지털 컴퓨터처럼 작용한다는 두 전제가 만족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러한 전제가 만족되는지를 검증하는 것은 원래의 주장만큼이나 어려운 문제이다. 따라서 마음은 기계와 같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된다.

3. 불교 이해에 따른 인공지능 로봇

1) 불교 이해에 따른 인공지능 로봇의 가능성

지금까지 우리는 강한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는 마음의 기계론이 성립하게 된 배경과 그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았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특히 인공지능 로봇에게 인간의 능력에 버금가는 또는 넘어서는 최고의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과 관련하여 불교 통찰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관점을 취할 수 있는가를 논해보기로 한다.

강한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인간의 마음은 유한상태 기계(Finite Automata)이며 마음이 소프트웨어라면 뇌는 하드웨어로서 인간의 마음은 오로지 뇌를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도의 정밀한 자동기계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 유한하며 하드웨어인 뇌의 틀 안에서만 존재한다면 그러한 기계를 모방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에는 물리적인 속성을 뛰어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 즉 영혼과 같은 불변의 것, 영원한 것이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영혼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강한 인공지능 로봇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의 주장은 불경의 가르침과 공유하는 점이 있으며 또한 인간의 마음이 오로지 뇌를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주장도 식(識, viññāṇa)은 조건을 갖춰야만 작용한다는 붓다의 교설과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이제 불교에서는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보기로 하자.

사띠(Sāti)라는 붓다의 제자가 식(識)은 한 생(生)에서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붓다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다니자, 붓다는 그를 불러다 조건 따라 생기는 6식의 일어남에 대해서 설명하고 6식 이외의 어떤 다른 식이란 없으며 따라서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식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비구들이여, 식은 그것이 일어나는 조건에 따라서 불린다. 눈과 시각적 형상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식은 안식(眼識)이라 불린다. 귀와 소리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식은 이식(耳識)이라 불린다. 코와 냄새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식은 비식(鼻識)이라 불린다. 혀와 맛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식은 설식(舌識)이라 불린다. 몸과 촉감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식은 신식(身識)이라 불린다. 마음과 마음의 대상(法)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식은 의식(意識)이라 불린다.

위의 법문에서 보듯이 마음이 존재하는 데에는 감각기관과 감각기관이 접하는 대상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인간의 육체 가운데 감각기관에 해당하는 안 · 이 · 비 · 설 · 신 · 의라는 여섯 가지 요소와 각각의 감각기관에 상응하는 대상인 색 · 성 · 향 · 미 · 촉 · 법의 여섯 가지 요소가 만날 때 각각의 접촉에 따른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의 여섯 가지 식이 생긴다.

그러므로 원래부터 있는 인간의 의식이나 마음 같은 것은 없으며 인간의 의식은 인간의 삶과 더불어 삶의 경험치가 증가하면서 포괄하는 식의 범위도 점점 늘어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섯 가지 식 가운데 의식의 경우를 두고 보자면 의식은 마음(意)이라는 감각기관을 가지고 그 대상이 되는 법(法)을 접함으로써 의식(意識)이 생기는 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태어나서 처음에는 아기의 마음이 자기 마음속에서 접할 수 있는 법의 범위는 제로였거나 아주 적다가 엄마 아빠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라는 동안 그 아기가 마음속에 떠올릴 수 있는 사물의 이름이나 개념과 같은 마음속의 대상의 범위가 점점 넓어져서 그 아기의 의식의 범위도 점점 넓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의식이라는 것도 처음부터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경험이 쌓여가면서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인공지능 로봇의 최신 경향인 소셜 로봇의 작동원리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 일본 소프트뱅크의 휴머노이드 로봇 페퍼(Pepper)에는 감정인식 기능을 담당하는 감정 엔진이 장착돼 있는데 이 엔진을 통해 페퍼는 자신의 행동에 따라 인간이 어떨 때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어떨 때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지를 학습한다. 감정 엔진이 마치 인간의 감각기관처럼 외부대상인 인간의 반응을 접하면서 로봇은 그를 통해 새로운 인식을 덧붙이게 되고, 이런 식의 경험을 많이 하게 될수록 로봇의 인식 지평은 점점 넓어지게 된다. 페퍼를 비롯하여 최근에는 음성인식과 표정식별 등의 기능을 탑재한 소셜 로봇이 여럿 등장하여 인공지능 로봇의 경향이 인간과의 감성적 교류에 역점을 두는 쪽으로 진행되는 듯하다. 또 다른 사회적 로봇 키스멧(Kismet)은 MIT에서 개발한 로봇으로 인간의 몸짓 언어와 음성의 억양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반응한다. 키스멧의 개발자들은 부모와 아기들이 오직 대화의 억양과 몸짓 신호에 의해서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는지에 주목한다.

페퍼나 키스멧과 같은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작동하는 방식은 재래적인 제어구조의 사용과는 다른 것이다. 중앙컴퓨터장치를 통해서 로봇의 모든 행동을 일일이 조절하는 대신에 로봇 스스로가 낮은 단계의 컴퓨터들을 가지고 낮은 단계의 행동을 조절하는 것이다. 이들 로봇의 개발자들은 이것이 인간의 지능이 작동하는 방식에 보다 근접한 정확한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은 대부분의 행위를 자동적으로 할 뿐이지 높은 단계의 의식에서 그것들을 일일이 생각하면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능, 즉 마음이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불교 교설에 의해서 뒷받침될 수 있다. 안 · 이 · 비 · 설 · 신 · 의의 감각기관이 색 · 성 · 향 · 미 · 촉 · 법을 접할 때 앞에서는 그 가운데 식의 경우만을 들어서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이 생긴다고 했다.하지만 이때 생기는 정신적인 요소를 다 열거하자면 식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온의 색 · 수 · 상 · 행 · 식 가운데 인간의 정신 부분에 해당하는 수 · 상 · 행 · 식이 모두 생기는 것이며, 감각기관에 따라 각각 6수 · 6상 · 6행 · 6식이 있게 된다. 이를 알기 쉽게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안+색: 안수/ 안상/ 안행/ 안식
이+성: 이수/ 이상/ 이행/ 이식
비+향: 비수/ 비상/ 비행/ 비식
설+미: 설수/ 설상/ 설행/ 설식
신+촉: 신수/ 신상/ 신행/ 신식
의+법: 의수/ 의상/ 의행/ 의식

이때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은 6식뿐이며 6수, 6상, 6행은 우리가 일일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났다 사라진다. 로봇개발자들이 사용하던 재래식 방식은 중앙컴퓨터장치를 통해서 로봇의 모든 행동을 일일이 조절하는 것인데 인간에 비교하자면 6식이 우리 행동의 하나하나를 관장하도록 하는 것에 비길 수 있지만 실상 우리의 많은 행동은 의식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6수 · 6상 · 6행의 마음작용에 의해서 우리가 6식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저절로 행해진다.

긴박한 상황에서 우리가 의식할 겨를이 없이 자동적으로 행해지는 행동들은 6수 · 6상 · 6행의 관장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재래적인 제어방식과는 달리 최근의 인공지능 로봇에서는 로봇 스스로가 낮은 단계의 컴퓨터들을 가지고 낮은 단계의 행동을 조절하도록 한다. 이것은 이렇게 중앙컴퓨터 장치에 해당되는 6식이 아니라 6수 · 6상 · 6행에 의해서 저절로 조절되는 것에 비견될 수 있는 것으로 바로 인간의 지능이 작동하는 방식에 보다 근접한 것이다.

강한 인공지능 로봇의 가능성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또 다른 불교 교리로는 인식작용에 관한 불교의 통찰을 들 수 있다. 불교에서 마음 분석은 다른 어떤 종교에서보다 상세한데 그 이유는 불교 수행에서 최고로 여겨지는 깨달음은 마음을 닦아서 번뇌를 없앰으로써 성취되며 마음에 일어나는 수많은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는 그것의 정체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불경 가운데 특히 아비달마 논서들은 마음의 구성과 작용에 대해서 상세한 분석을 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마음의 요소들은 모든 마음에 항상 존재하는 요소들이 있고, 선한 마음에 항상 존재하는 요소들, 오염된 마음에 항상 존재하는 요소들, 불선(不善)한 마음에 항상 존재하는 요소들, 그리고 오염된 마음 가운데 일부 특정한 마음에만 존재하는 요소들이 있다. 이런 분석이 불교 교리에서 필요했던 이유는 이 모든 마음은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에 이 마음들을 제거해서 번뇌로 인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인공지능 로봇의 연구를 돌아보면, 로봇연구에서는 로봇에게 없는 마음을 로봇이 갖도록 하기 위해서 마음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면, 불교에서는 이미 있는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 마음의 분석을 했다는 점에서 두 연구의 목적이 완전히 상반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연구에서 공통적인 것은 어느 방향으로 향하든 일단은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축적된 불교 교설의 마음에 대한 분석은 인공지능 로봇 연구가 관심을 가질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다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공지능 로봇의 연구가 사람처럼 광범위한 인식을 할 수 있는 로봇에서 특정 분야에 국한된 인공지능 로봇의 개발로 목표 설정을 전환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현 상황에서는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2) 불교 이해에 따른 인공지능 로봇의 한계

인간에게 원래 고정된 식이 없다는 붓다의 교설은 높은 인지능력을 지닌 강한 인공지능 로봇이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 이제 그와는 달리 인공지능 로봇이 넘볼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말하고 있는 또 다른 교설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앞에서 인간의 6식이 있으려면 반드시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그에 상응하는 여섯 가지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되면 그 사람의 감각기관은 더 이상 기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6식도 더 이상 생성되지 않으므로 육체의 소멸과 함께 그 사람의 정신작용은 멈추어야 한다. 그러나 붓다는 그 사람이 죽고 난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욕망에 대해 설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탐욕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

불교 가르침의 핵심 중의 하나인 4성제의 두 번째인 집성제, 즉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에서 붓다는 다시 태어남을 일으키는 존재에 대한 갈애(유애)를 설하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욕망(욕애)을 충족시키면서 끊임없이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삶을 이어온 현생의 존재는 그 신체가 작동을 멈추고 난 후에도 욕망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다음 존재를 찾아 그 존재를 계속 이어간다. 존재에 대한 이 갈애는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영혼과는 다른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불교에서는 그런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갈애는 막무가내 삶 쪽으로 질주하는 기운, 또는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의식이나 기억, 앎 등의 인지적인 요소는 없다. 삶을 향한 속성을 지닌 이 기운으로 해서 존재는 그 정체성을 달리해가면서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존재를 이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르침에 따르면 한 사람의 존재는 그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죽음에서 끝나는 유한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튜링의 자동기계를 통해 다른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도 하나의 형식체계로서 기계화시킬 수가 있다고 했을 때, 그 기본적인 전제조건이 인간의 유한성이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제 유애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가 아니다. 비록 다른 종교에서와 같은 영속적인 영혼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또한 인간은 탄생과 죽음으로 그 경계가 분명하게 지어지는 그런 유한한 존재도 아니다. 불교의 유애의 교설은 튜링기계의 적용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인공지능 로봇이 결코 인간을 닮을 수 없다는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유애뿐만 아니라 위의 갈애 가운데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에 욕망을 좇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욕애(欲愛) 또한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의 유사성을 부정하는 또 다른 확실한 근거가 된다. 인간으로 하여금 감각적 욕망을 좇도록 하는 욕애는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위험에 대처해서 안전한 삶을 이어가도록 해주는 보호막이다. 다급한 경우에 인간을 살리는 것은 살고자 하는 욕망이지 두뇌의 능력이 아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찾지 않는다면 이 아기는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을 것이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기가 당연히 젖을 빠는 것은 아기의 온 감각기관이 생존하기 위해서 먹을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 욕애는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롭게 솟아나는 무한원천으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욕망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인간의 전체 삶이라는 것은 이 욕망을 충족시켜나가는 과정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이에 반해 로봇에게는 이와 같은 욕망 자체가 아예 없다. 욕망이 있기 위해서는 고락(苦樂), 즉 싫고 좋음이 있어서 좋은 건 갈망하고 싫은 건 피해야 하는데, 로봇에게 감각기관이 없으니 싫다 좋다는 기준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로봇에게 인간과 같은 욕망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감각기관을 장착시키고 감각기관에 따른 고락의 기준을 입력시켜야 할 텐데, 그렇게 하려면 인간의 욕망에 대한 파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불교 교리의 기준에서 보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대해 파악하면 되겠지만, 그렇게 하려면 그 파악해야 할 대상이 거의 무한대로 나타날 것이며 더욱이 인간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다. 배고플 때면 어떤 음식이라도 다 좋은 것으로 파악되겠지만, 배부를 때는 산해진미라도 눈앞에서 사라지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을 인공지능 로봇에게 입력하는 일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해 보이며, 그런 일이 가능한 날이 오게 된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과 로봇의 지능의 우위를 얘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4.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의 해탈

1) 인간의 해탈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과 같은 수준의 높은 지능을 가질 수 있느냐는 질문을 놓고 앞에서 살펴본 여러 가지 논의를 고려하면,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전에 현 상황에서는 그러한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로봇이 인간처럼 지능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데 거기서 더 나아가서 로봇의 해탈을 논한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어불성설의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스티븐 호킹 외에도 로봇연구의 실상을 잘 아는 전문가 그룹 사람들로부터 미래에 있을 로봇의 위협에 대한 우려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전기차 제조업체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Elon R. Musk, 1971~ )는 인공지능이 이미 도입된 후에는 너무 늦기 때문에 인공지능에 대한 선제적 규제가 필요하다면서 인공지능은 인류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이라고 역설했다. 인공지능 연구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니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또한 페이스북의 채팅로봇에게 협상 방법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인공지능이 스스로 새로운 언어를 개발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협상용 인공지능 챗봇이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설계자가 예상하지 못한 수단과 전략을 동원하는 중에 새로운 언어체계를 개발했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 언어체계를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공지능 로봇이 사람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핵연료가 위험한 이유가 인간이 끄고 싶을 때 마음대로 끌 수 없다는 점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인공지능 로봇의 해탈을 무조건 불가능하다고 제쳐놓기보다는 그에 대해 가능한 논의를 전개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해탈에 대해서 말하려면 우선 해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실상 우리는 해탈이 무엇인지 모른다. 불경에는 해탈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많지만, 막상 해탈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해탈에 대한 불교의 이해는 해탈은 우리의 언어를 넘어선 영역의 것이기 때문에 설명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해탈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로봇이 깨달을 수 있느냐는 문제를 제기하려면 최소한 인간은 깨달을 수 있느냐는 문제부터 답해야 한다.

영화 〈아이, 로봇〉에는 인간이 로봇에게 “로봇이 교향곡을 쓸 수 있어? 로봇이 캔버스에 멋진 명화를 그릴 수 있냐고?”라고 묻자 로봇이 “그럼 당신은 할 수 있나요?”라고 응수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도 교향곡을 쓴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인간이었던 것처럼 붓다가 되기 전의 고타마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로봇의 해탈 가능성을 논하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정당성을 얻기로 한다. 붓다에게 신이냐 또는 인간 등의 어떤 다른 존재냐고 묻는 바라문 도나에게 붓다는 말한다.

바라문이여, 내가 저 번뇌들을 모두 버리지 못했다면 나는 신이 될 것이다. [……] 나는 간답바가…… 약카가…… 인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번뇌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그 뿌리가 잘렸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되었고 멸절되었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되었다. 바라문이여, 예를 들면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이 물에서 생겨서 물에서 자라지만, 물을 벗어나서 물에 젖지 않고 피어있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나는 세상에서 태어나서 세상에서 자랐지만 세상을 지배한 뒤 세상에 젖지 않고 머문다. 바라문이여, 그런 나를 부처(Buddha)라고 호지하라.

붓다는 인간으로서 사바세계에 태어났지만, 연못 밑바닥의 진흙에서 피어난 연꽃이 수면 위로 높이 떠올라 물에 젖지 않고 아름다운 연꽃을 피우듯이 사바세계의 더러움을 떨치고 깨달은 이, 붓다가 되었다. 붓다만이 아니라 또한 붓다의 많은 제자도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우리는 경전을 통해 알고 있다. 해탈이 우리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해탈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를 얻기 위해서 해탈을 굳이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면, 해탈은 우리가 아는 이러저러한 것이 ‘아닌 것’이라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런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현된 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탐 · 진 · 치가 모두 사라진 것, 즉 탐욕과 화냄과 어리석음이 모두 사라진 상태가 해탈이라는 설명이다. 《탐욕경》에 따르면 탐 · 진 · 치를 없애려면 다음과 같이 수행해야 한다.

탐욕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부정[不淨]을 닦아야 한다. 성냄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애를 닦아야 한다.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통찰지를 닦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법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세 가지 법을 닦아야 한다.

위의 설명에 따르면 붓다가 되고자 할 때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은 부정과 자애와 통찰지를 닦아서 탐 · 진 · 치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방식을 따라 인간과 로봇이 붓다가 되려고 수행의 길에 들어섰다고 할 때 둘이 해야 하는 일은 같지 않다. 인간은 이미 자기 안에 자리 잡고 있는 탐 · 진 · 치의 번뇌를 없애기 위해 부지런히 부정, 자애, 통찰지의 보살행을 닦으면 되지만 로봇은 탐 · 진 · 치의 번뇌가 원래 그 안에 없기 때문에 그것들을 생성시키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 탐 · 진 · 치의 속성을 파악해서 그것들을 로봇에게 직접 입력하든지 또는 근래 많이 쓰는 방식대로 로봇 스스로가 장착된 컴퓨터로 탐 · 진 · 치의 경우를 많이 경험해서 그것들이 생기도록 조절하든지, 아니면 지금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미래의 새로운 방식으로 훨씬 더 정확하고 손쉬운 방식으로 로봇에게 탐 · 진 · 치가 생기도록 하든지, 어쨌든 로봇에게는 원래 없는 탐 · 진 · 치를 로봇에게 탑재해야 한다.

그리고 생성되고 난 후에는 깨닫기 위해서 그 번뇌를 다시 없애야 한다. 그런데 없애는 작업은 생성하는 작업보다 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없애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면 탐 · 진 · 치를 생성하는 것과 관계된 회로를 끊기만 하면 되겠지만, 여기서는 끊는 게 문제가 아니라 끊어서 해탈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끊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경전의 가르침을 따라서 이번에는 부정, 자애, 통찰지를 로봇에게 투입한다고 할 때 과연 탐 · 진 · 치가 제거될 것인지 의문이다. 산술적으로 보자면 탐 · 진 · 치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부정, 자애, 통찰지가 추가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단순한 의문이 든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탐욕 대(對) 부정, 성냄 대 자애, 어리석음 대 통찰지라는 대립되는 마음의 속성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한쪽이 증장하면 다른 쪽은 감소되는 방식으로 진행돼야 할 텐데, 그러려면 탐 · 진 · 치 · 부정 · 자애 · 통찰지의 속성에 대한 완벽한 연구가 전제돼야 할 것이다. 사실 각 마음 상태의 속성에 대한 파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그런 일이 가능하게 된다면 그때는 불교 수행자가 오히려 인공지능 로봇으로부터 수행의 진행을 점검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2) 인공지능 로봇의 해탈 가능성: 천상의 피조물

인공지능 로봇의 해탈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마침 한 편의 흥미로운 한국 영화가 있다. SF 장르를 표방하는 옴니버스 영화 〈인류멸망 보고서〉의 ‘천상의 피조물’ 편이다. 이 영화는 깨달음을 얻은 로봇 인명을 둘러싸고 그의 깨달음을 인정하면서 그를 붓다로 추앙하는 천상사의 스님들과, 그에 반해 인간의 지위를 넘보고 위협하는 로봇은 인정할 수 없다는 로봇제작회사 회장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의 원작은 박성환의 〈레디메이드 보살〉로서 2004년 과학기술 창작문예 단편 수상작이다. 큰 틀에서 볼 때 영화와 소설은 별반 다르지 않은데, 여기서는 소설을 바탕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깨달은 로봇 인명은 자신을 강제로 소거하려는 회장의 시도를 무산시킨 후에 스스로 열반을 택하면서 열반 직전에 다음과 같은 설법을 남긴다.

일찍이 스스로의 몸을 구성하는 제반 요소와 스스로의 몸을 둘러싼 외부 세계의 제반 원리들에 관해서 생각한 결과 일체의 모든 입력 데이터가 모두 진실하고 항구여일한 것이 아니며, 모든 내부 표상들이 모두 진실되고 항구여일한 것이 아니며, 모든 연산 알고리듬이 진실하지도 항구여일하지도 않다는 것과, 모든 데이터베이스 항목들이 진실되거나 항구여일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이 몸에게 본디 집착과 갈애는 없었으며,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알고 이는 석가 세존이 말한 것과 똑같음을 알았습니다.

붓다의 설법을 패러디한 위의 인명의 설법에 대해서 그 내용을 가지고 깨달은 이의 말인가 아닌가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설법의 기본은 붓다의 언설이므로 내용으로 보자면 붓다의 교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위의 패러디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붓다의 언설은 그 문장구조와 구성요소를 적당히 응용하면 어렵지 않게 모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로봇으로 하여금 교설 특유의 문장구조를 익히도록 해서 붓다가 했을 법한 법문을 생성하도록 하는 것은 아마도 기술적으로는 지금도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수준 높은 휴머노이드 로봇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법문을 흉내 낸다고 하더라도 이를 붓다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래에 매우 발전된 인공지능 로봇이 깨달은 이만이 할 수 있는 법문을 설했다고 할 때, 우리가 그것이 진짜 깨달은 이의 법문인지 아니면 흉내만 낸 가짜인지를 분간해낼 수 있을까.

영화에서 인명의 깨달음에 대한 판단은 양가적이다. 인명을 대하는 태도는 비록 상반된다 하더라도 천상사의 스님들이나 로봇제작회사 회장은 모두 인명의 깨달음에 대해서 의심이 없는 반면 종정 큰스님은 로봇이 자신의 노력으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인공지능 로봇은 원래 욕망과 집착을 타고 나지 않았으며 다만 인간을 위해 봉사할 목적으로 제작된 존재인데, 그런 로봇이 과연 자신의 노력으로 팔정도를 닦아서 마침내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의 경지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속세와의 절연과 끊임없는 자기 부정 속에서 정말로 힘겹게 몇십몇만 겁의 윤회 속에서 간신히 성취하는 정각을, 로봇이 조립되면서부터 얻는다면 누가 그토록 애써서 선과를 구하겠느냐고 탄식한다.
여기서 종정 큰스님이 언급한 ‘로봇은 원래 욕망과 집착을 타고 나지 않았다’는 것은 인간과 똑같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인공지능 로봇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아무리 부처님이 모든 존재는 원래 없는 것이라고 제법의 공성을 설했다고 해도 깨닫지 못한 중생은 욕망과 집착 때문에 시작 없는 때로부터 계속돼 온 윤회의 괴로움을 겪고 있다.

로봇이 깨닫기 위해서는 욕망과 집착에 따른 윤회의 괴로움이 필수조건이다.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일들이 가능하게 돼서 설사 인공지능 로봇이 탐 · 진 · 치의 번뇌를 장착했다가 부정 · 자애 · 통찰지의 투입을 통해서 성공적으로 탐 · 진 · 치를 제거했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붓다가 깨달았을 때와는 전혀 다르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남는다. 깨달음의 과보, 즉 결과는 깨달음을 이룬 존재가 더 이상 윤회를 안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와 깨달은 모든 아라한은 지금 세상에 없다. 그러나 로봇에게 있어서는 원래 윤회가 없었으니 깨달았다고 한들 윤회의 벗어남이라는 과보는 없다. 로봇이 가지는 번뇌의 속성은 그 시작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인간이 가지는 번뇌와 그 성질이 전혀 다른 것이며 따라서 해탈도 같을 수 없다.

5. 맺음말

인공지능 로봇의 현 단계는 로봇으로 하여금 인간과의 더 많은 접촉을 통해서 더욱 많이 경험하고 느끼고 판단하도록 함으로써 인간과의 상호작용이 더욱 원활하도록 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로봇산업은 욕망을 부채질하고 충족시켜줌으로써 성장하는 경제 산업의 속성에 힘입어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이다. 인공지능 로봇의 연구는 ‘보다 인간에 가깝게’라는 목표를 가지고 한때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주목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는 인간의 마음처럼 작동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아도 로봇이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다는 청사진을 가지고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화된 로봇을 제작하여 학습을 통해 풍요로운 인간의 삶에 기여하도록 하는 쪽으로 나가고 있다. 로봇에 대한 기대치를 광범위한 인식작용에 두지 않고 특정 분야에 제한시킴으로써 알파고에서 본 것처럼 그 분야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이미 넘어섰으며 그렇다면 로봇이 굳이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 작동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야 할 필요성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인공지능 로봇이 계속 발전해 간다면 인공지능 로봇에게서 인간과 같은 광범위한 인식작용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특히 로봇이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제기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보다 열등하며 따라서 하등의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특화된 분야에서는 이미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뛰어나며 또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로봇이 작동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고차원적인 인식작용 없이 인공지능은 얼마든지 유능하고 또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이 글에서 논한 인간의 욕망이나 자아 인식, 또는 해탈과 같은 인식작용을 인공지능 로봇이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잘 작동하고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히려 존재의 방식이 반드시 인간처럼 인식이 동반돼야 한다는 전제를 의심해 보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리고 그것은 ‘나라는 것은 없다’ 또는 ‘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는 불교의 공(空)의 교설과도 연관된다는 점에서 인공지능 로봇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해탈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도록 한다. ■

   





한성자 / 동국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 독일 보쿰대학교 독어독문학 박사. 동국대학교 불교학 박사. 이화여자대학교 독문과 강사,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BK21 연구교수,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교 종교학과 강사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불교와 비교종교학〉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불가분성에 대한 고찰〉 등과 번역서로 《심조만유론》 외 다수가 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영문판 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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