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 생물학 유전자학 뇌과학과 천체물리학의 비약적인 발달에 따라 유신론적 종교와 유아론적(唯我論的)인 종교가 설 곳을 잃고 있다. 과학이 제시하는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증거 앞에서 종교가 힘을 잃고 있다. 가히 종교의 위기이다.

하지만 불교의 원음을 찾으면 오히려 불교의 부흥을 가져올 수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너무나 혁명적이었기에, 불교는 부처님 사후에 아직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적 한계로 인하여 실증적인 증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유아론적인 힌두교적 참나(眞我, true atman) 불교와 중음신(中陰身) 불교 등으로 퇴보하고 말았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 (진화론 생물학 유전자학 뇌과학 천체물리학 등) 과학의 비약적인 발달에 따라 부처님의 무아연기론(無我緣起論)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도 무지에 잠겨 있는 한국불교를 진단하고 처방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1. 한국불교는 불교인가

불교의 최대 장점은 포용성이다. 불교는 그 지방의 민속신앙과 토속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산식각과 시왕전(十王殿)이 좋은 예이다. 그러다 보니 오랜 시간이 지나자 무엇이 불교이고 무엇이 불교가 아닌지 모호해졌다. 그래서 ‘한국불교는 불교인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특히 과학시대에 태어난 신세대 중에 종교인구가 급감하는 이 시대에 의미가 있다.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불교가 무엇인지를 정의해야 한다. 불교는 세상에 만연한 고통의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종교이다. 초월적인 존재에게 복종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이해를 통해서 정신적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목표이다. 계정혜(誡定慧)를 닦아 탐진치(貪瞋痴)를 제거해 윤회의 흐름을 끊으면 더 이상 육체적 고통도 없다. 윤회란 시시때때로 다양한 대상에 빙의(憑依)하여 사는 의식(consciousness)의 흐름을 말한다. 이걸 의식의 지향성(指向性)이라고 한다.

속인들은, 불교 경전이라는 텍스트를 전문가들인 승려들의 해석을 통해서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승려들이 미신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수천 년 케케묵은 미신이 승려들의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 이런 미신이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게 윤회환생이지 다른 게 윤회환생이 아니다.

1) 빅데이터와 미신 타파

스마트폰 위치추적 정보를 통해 조류독감 이동 경로를 발견한 빅데이터(Big Data) 기술을 이용하면 불자들이 좋아하는 사주팔자와 풍수와 점의 실상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2) 미신 불교

우리나라 유명한 승려들의 사상은 힌두교적 유아론과 미신으로 가득하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신도들 역시 그렇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부처님 가르침은 멀고 살아 있는 승려들과 그들의 환망공상(幻妄空想, 환상 망상 공상 상상)은 가깝다.

어떤 큰스님의 스승은 달이 지구보다 6배나 크다고 했고, 지구가 달에서 빠져나왔다고 했다. 달의 전면은 원형이지만 뒷면은 고깔 모양이라고 했다. 이런 내용을 모아 그 제자는 《금강심론(金剛心論)》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수년 전에는 불교텔레비전에서 이 스님 특집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스님은 이 책을 펼쳐놓고 찬탄하면서 이 부분을 클로즈업하는 통에 경악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독자들에게, 일지반해(一支半解)한 현대과학 지식으로 스님을 비판하면 방불훼불(彷佛毁佛)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기독교식으로 하자면, 신성모독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그 스님이 선정 중에 본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대강백으로 알려진 어떤 스님은 절 뒷산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두 사람이 선암사 경내 두 그루 나무로 환생했다고 주장했다. 또 어떤 큰 절 방장 후보였던 한 스님은 공사장에서 큰 돌을 깨뜨리면 돌이 피를 흘리며 복수를 한다고 주장했다. 동국대학교 총장을 지낸 백성욱은 겨울이면 제비가 물속에 들어가 조개가 되었다가 봄이면 다시 제비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걸 미신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게 진짜 과학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금강경》을 해설하면서 난생(卵生)에 대해서 부끄러운 생물들이 자기 몸을 가리느라 알로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예언으로 유명한 한 스님은 ‘1977년에 김일성이 죽는다. 2000년경에 포항에서 석유가 난다, 일본열도가 가라앉는다, 서해안이 융기한다, 만주가 우리 땅이 된다, 통일이 된다’고 예언했지만 다 틀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가 대단한 예언가인 줄 안다. 그런 예언 능력이 불교 수행을 통해서 나오는 줄 안다. 그가 점치기를 즐겨하고 점치는 사람들과 어울렸다는 소문이 있다.

비구니 선지식으로 알려진 어떤 스님은 수성 · 금성 · 화성 · 목성에서 외계인이 비행접시를 지구로 날린다고 주장했다. 자기 마음(주인공)으로 태풍의 진로를 바꾸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주인공(참나)에게 맡기면 못 고칠 병이 없다고 가르쳤지만 말년에 치매에 걸렸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 약탕기를 달고 사는 큰스님들을 폄하했지만 자신도 자리보전을 하다 죽었다. 이런 예들은 불법을 공부하면 병과 죽음을 이길 신비로운 힘이 생기는 줄 오해하는 망상의 소산이다.

승려들이 신비한 지식이 있는 줄 아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같이 몇 달만 살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신비한 능력으로 귀뚜라미보일러나 스마트폰이나 자동차를 고치는 법이 없다. 법률지식에도 무지하다. 도대체 무얼 아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다 안다는 선언만 있을 뿐이지, 다 안다는 내용이 없다. 그나마 안다고 하는 것도 대부분 환망공상이다. 진화론을 부인하고 종불변론(種不變論)을 주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현대과학에 역행하는 역행보살들이다. 이판도 사판 못지않게 대한민국 불자들을 고문한다. 괴이한 사상으로 신도들 뇌에 기생하며 신도들을 놔주지 않는다.

3) 참나 불교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여러 큰스님과 현재도 전국의 선승들에게 존경을 받는 고승들의 법문을 들어보면 무아연기론(無我緣起論)이 아니라 ‘참나 불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분들이 가르치는 참나(眞我, true atman)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아주 구체적인 존재이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인식하는 존재이다. 소위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존재이다. 화를 내는 존재이고 꼬집으면 아파하는 존재이다. 이 몸 저 몸 들락날락하는 존재이다. 힌두교 ‘하레 크리슈나(Hare Krishna)’ 운동의 창시자인 프라부파다가 말하는 ‘이 아파트에서 저 아파트로 이사 가는’, 즉 이 몸을 빠져나와 저 몸으로 옮겨가는 존재이다.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고 우주가 없어진 후에도 있는 영원한 존재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존재이다. ‘모든 것은 무아(無我)이지만 모든 것이 무아인 줄 아는 존재는 무아가 아니다.’ 혜민 스님과 한자경 교수의 주장이다. 이런 존재는 연기법을 벗어난 초월적인 존재이다. 이들은 ‘이 존재가 가아(假我)인 5온의 식(識, 마음)과 달리 공(空)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걸 참나(眞我, true atman)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에 비하면 기독교의 이신(理神)은 아주 점잖은 존재이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인식하는 법도 없다. 중력의 법칙, 상대성원리, 열역학법칙, 전자기법칙, 베르누이의 법칙 등 우주의 이법(理法)일 뿐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하는데, 즉 인신공희를 받고 인종말살을 자행하던 분노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잔인한 야훼라는 인격신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그리고 다시 이신으로 진화하는데, 불교는 거꾸로 더 나쁜 방향으로 퇴화하고 있다, 즉 우주의 이법인 무아연기론(無我緣起論)에서 참나라는 일체종지(一切種知)를 지닌 베다교적 인격신으로 퇴화하고 있다.

4) 중음신 불교
부처님 당시에는 지내지 않은, 중음신(中陰身)을 제도하는 49재를 지내는 것은 귀신불교이다. 부처님은 식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며 이생에서 저승으로 업을 짊어지고 가는 중음신을 부정하셨기 때문이다.

5) 문화로서 불교, 진리로서 불교
문화로서 불교를 하는가, 진리로서 불교를 하는가? 학자들은 문화 현상으로서 불교를 연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진리인지 아닌지는 잘 논하지 않는다. 심하게는 직업으로서, 호구지책으로서 불교를 한다. 연구비를 받고 맞춤형 논문을 쓰기도 한다. 불교계 권력자들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몸을 사린다. 그래서 결국 한국에서 불교를 진리로서 논하는 사람은 전문가들 중에서는 사라진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6) 신도들을 하찮게 다루는 성직자들
사악한 성직자들은 신도들이 깨는 걸 원치 않는다. 소 · 돼지처럼 우민(愚民)으로 만들어 놓고 부려먹고 뜯어먹고 잡아먹고 싶어 한다. 정확히 ‘허기심 실기복(虛其心 實其復)’ 작전이다. 말로는 지극히 높은 분에게 대신 청원을 넣어 (신도들의) 소원을 들어주게 도와준다고 하지만, 엄정한 인과의 세계일진대 간청한다고 일이 풀릴 리는 만무하므로(삿된 마음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소원을 빌지만 재물만 낭비하고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충기심 허기복(充其心 虛其腹)’이다.

사람들은 불교를 알려면 팔만대장경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화로서 불교를 말한다면 맞는 말이지만, 진리로서 불교는 팔만대장경을 몰라도 가능하다. 5비구는 팔만대장경을 모르고도 아라한이 되었다. 오히려 (특히 현대인들은) 팔만대장경의 숲에서 길을 잃고 불교적 진리를 더 모를 수 있다. 진리는 불교 밖에도 있다. 모든 진리는 불교이다. 넓은 의미로 볼 때 모든 게 무아연기(無我緣起)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는 무아연기의 춤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벗어난 신비한 ‘도가도 불상도(道可道 不常道)’의 도(道)의 춤이 아니라, 무아연기의 춤이다. 사량분별을 벗어난 초월적인 참나(眞我, true atman)의 춤도 아니다. 수백만 년 인류 역사에서 (신이나 참나 등) 초월적인 것이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해준 적이 없다. 인간 삶을 구원한 것은 인간 자신의 피땀 흘린 노력이다. 부처님의 설산 6년 고행도 그중 하나이다.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다는 가톨릭교회에 반기를 든 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이다. 하지만 ‘법등명 자등명’을 금과옥조로 삼는 불교는 깨달음의 길에 중재자가 필요 없다.

2. 한국불교 어디로 가야 하나

1) 무아연기와 진화론

무아연기(無我緣起)에 반하는 것은 불교가 아니다. 과학이론 중 (다윈의) 진화론은 가장 불교의 무아연기에 맞는 이론이다. 생물체의 몸과 마음이 환경에 맞추어 변화를 한다는데, 이보다 더 훌륭한 무아연기론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어떤 유명한 스님은 진화론을 부인한다. ‘과학자들이 뭘 몰라서 하는 소리’라는 것이다. 누가 뭘 모르는지 모를 일이다.

그 스님에 의하면 ‘개 · 소 · 말은 원래부터 개 · 소 · 말이었다’는 것이다. 식물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소위 종불변론(種不變論)이다. 또 어떤 스님은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는 법은 없지만 사람이 윤회를 해서 원숭이가 되는 법은 있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도가 높다는 게 무얼 일러 높다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사례들이다. 이분들이 어떤 도를 깨달았는지 궁금하다. 전생을 다 볼 수 있다면, 수 겁씩 볼 수 있다면, 어찌하여 수십만 년이면 충분한 생물의 진화과정을 보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 점에서 윤회론의 허점을 볼 수 있다.

진화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적 발견이지만, 무아연기론은 그보다 더 위대한 이론이다. 진화론의 사상적 배경이 무아연기론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쌍둥이 이론이다. 하나는 물질적인 몸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마음에 대한 것이다.

현대에 와서 뇌과학의 발달에 따라 양자가, 즉 몸과 마음은 통합되고 있다. 과거에는 마음은 몸과 독립적인 존재로 알았는데 (그래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존재는, 몸과 무관한, 참나라고 생각했는데) 마음 역시 뇌라는 물질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고 기능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옛사람들은 뇌를 쓸데없는 기관으로 생각했다. 이집트인들은 미라를 만들 때 심장은 보관하고 뇌는 버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뇌는 심장의 열을 식혀주는 냉각기관 정도로 간주했다. 뇌는 꾸불꾸불 접혀 표면적이 넓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지금도 힌두교도들은 심장에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나라 승려들도 그리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특히 티베트 밀교에 빠진 사람들 중에 많다.

다시 강조하지만 불교 무아연기론(無我緣起論)은 가장 탁월한 진리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리이다. 진화론의 근거이다.

진화론은 ‘설계자 없는 설계(design without designers)’이고 ‘경쟁자 없는 경쟁(competition without competitors)’이다. 이는 정확히 무아연기이다. 식물과 동물은 16억 년 전에 공통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 식물의 유전자는 반 정도가 동물과 일치한다. 식물의 유전자를 동물이 가져다 쓰는 경우도 있고, 그 역도 가능하다. 달팽이와 진딧물 중에는 식물의 엽록체를 빌려와 광합성을 하는 경우가 있고, 극지방 물고기에서 부동(不凍)유전자를 빌려와 추위에 얼지 않는 토마토를 만들기도 한다. 식물은 동물과 세포 구조도 비슷하다.
자이나교에는 윤회도(輪廻道)에 아귀와 아수라 대신 식물과 미생물이 들어간다. 윤회가 참이라면, 윤회도에서는 자이나교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인이 진화론을 발견하여 불교 무아연기론이 옳다는 걸 증명했는데, 이른바 불교 승려라는 사람들이 진화론을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헛소리라고 비웃는다. 수행승들의 지도자라는 분이 그리한다. 이게 다 힌두교적인 유아론인 참나론에 빠져서 그렇다.

2) 이성적 감성, 반야지적 자비

따뜻한 감성과 차가운 지혜가 어우러져야 한다. 불교가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도(中道)인 이유이다. 이성적 감성과 반야지적 감성을 개발해야 한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감성이 먼저 출현하고 이성은 뒤에 출현했다. 자비는 감성에 기반한 경우가 많다. 감성적 자비의 시초는 피붙이에 대한 사랑이다. 혈연에 기초한 가족 · 씨족에 대해서는 운명공동체이므로 즉각적으로 발현하는 감성이 효과적이지만, 혈연이 옅어지는 또는 거의 없는 현대적 초대형 집단에서는 불가능해진다. 이때 이성에 기초한 자비가 등장한다. 피터 싱어의 합리적 이타주의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성적 이해가 자선행을 촉발하고 심화하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렇네요. 그리해야겠어요.”가 여기에 해당한다.

삶은 앎에 선행한다. 앎은 삶에 후행한다. 사랑이 무엇인지 먼저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부모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고, 부모가 되는 사람은 없다. 사랑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랑과 부모 됨이 먼저 있고 사랑과 부모 됨이 무엇인지는 나중에 깨닫는다. 깨달음이란 삶과 앎을 역행시키는 것이다. 모르고 살지 말고, 알고 살자는 것이다.

(1) 반야지의 확장
거짓 · 조작 · 선동에 넘어가지 않는 지력을 개발해야 한다. 정의라는 포장지 안에 정의만 들어 있는 게 아니다. 현상은 코끼리 같다. 선악이 혼재되어 있다.(사람도 그렇다.) 누가 어떤 사람이나 현상의 나쁜 면만 보고 ‘나쁘다’고 외치면, 다른 사람들은 덩달아 ‘저놈 잡아라’ 하고 외치며 따라간다. 좋은 면을 보지 못한다. 심지어 더 좋은 면이 많은데 그 면을 보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법을 어겨 처벌을 받는 경우, 사람들은 그를 나쁜 사람이라 하지만, 그의 모든 면이 나쁜 것은 아니다. 도둑이 알고 보니 오래전에 행인을 치한으로부터 구해준 사람이었다. 세상의 현상에도 수많은 면이 있다. 지식, 지혜가 없이 정의롭기만 하면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하기 쉽다. 인류 역사상 나타난 공산주의(스탈린, 모택동, 폴 포트)와 종교(십자군 전쟁, 30년 전쟁, 위그노 전쟁, 네덜란드 독립전쟁, 4차례 중동전쟁, 마녀사냥)가 일으킨 학살이 그런 예들이다.

(2) 사유와 분석지(分析智) 개발
속고 속이는 걸 방지해야 한다.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익을 감추고 끝없이 속고 속인다. 선동에 넘어가지 않게 해야 한다. 지식 · 지력의 증강이 필요하다. 알량한 정의감은 오히려 멸망의 길로 인도한다. 대한민국의 위증 · 무고가 일본의 수천 배라고 한다. 사기도 18배나 된다고 한다. 불교도들이 나서서 ‘정직한 국민정신’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세상일에는 즉 사람과 사건과 현상에는 수많은 측면이 있다. 그에 따라 수많은 호오(好惡)가 있다. 각각의 측면에 대해서 호(好)와 오(惡)가 갈린다. 최소한, 중요한 측면은 동시에 고려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리하려면 지식과 지력(분석력 · 논리력 · 비판력 등)이 필요하다. 단지 선하고 정의감에 불탄다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선하고 정의롭게 만들지 못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는 말처럼,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세상을 더 살기 나쁜 곳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종종 무지한 선인(善人)들이다. 이들은 유식한 악인들보다 세상을 더 악화시킨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은 비전문가가 다루면 안 된다. 이미 부상당한 경추나 척추를 더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부상자의 입장에서는, 도우려다 부상을 악화시키는 무지한 선인보다 오히려 돕지 않는 악인이 더 나을 수가 있다.

(3) 판단중지
많은 경우에 판단중지(epoche)가 필요하다. 영원한 중지가 아니라, 증거가 충분히 쌓일 때까지,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서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10 · 14무기가 대표적인 예이다.

(4) 한탕주의 지양
우주적 지식창고가 있다고 믿고 종교적 수행을 통해서 그 창고에 접근하여 과학기술적 비밀을 알아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국내 물리학 교수들 중에도 있다. 인류 역사상 그런 식으로 과학기술이 발견된 적은 없다. 비밀은 사물 자체에, 허공에 있다. 모두 드러나 있다. 단지 인간의 지식 · 지력 · 지성이 부족해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다수의 중요한 진리가 이미 발견된 걸 모르는 승려들이 사람들을 몽매주의의 길로 오도한다. 배움 · 지식 · 지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의지하여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이다. 지성의 상징 부처님이 통곡할 일이다.

(5) 총론불교와 각론불교
부처님의 무아연기 · 삼법인 · 고집멸도가 총론이고, 제자들의 진화론, 뇌과학, 생물학, 심리학이 각론이다.
생명체는 시공에서 변하는 존재이다. 의식도 고락(苦樂)도 변한다. 그 구체적 해결책도 변한다. 국가가 국민의 고락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다. 예전에는 생산을 노동력에 의지해 노예제도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기계화와 자동화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노예도 사라졌다. 과학 · 기술문명의 발달이 인권향상을 가져오는 예이다.

각론의 심화에 힘써야 한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각론에 있다. 침팬지와 인간의 차이는 2% 각론에 있다. 유전자가 98%가 같으므로 2% 차이에 있다.

(6) 지력 향상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는 안 된다. 부처님은 무념무상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으셨다. 사유의 달인이셨다. 분별(分別)에 능하셨다. 예를 들어 5온 · 18계 · 12연기는 생각하고 헤아리고 요소로 분석하는 사량분별의 대상이다. 부처님은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당시 인도의 모든 학문을 닦았다. 아마 세계 최고 수준이었을 것이다. 불교계도 최고 수준의 현대적 지식인을 배출해야 한다. 부처님은 당신의 조상들이 불변의 진리로 추앙하며 의지하던, 수천 년 케케묵은 과거의 환망공상(幻妄空想)에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때려 부수었다. 수구파가 아니라 개혁파였다. 오래된 집을 때려 부수었다. 환망공상의 집을.

사량분별(思量分別)을 금기시하는 한국불교의 풍토는 참나불교[眞我佛敎]의 영향이다. 힌두교 브라만과 같은 존재를 설하는 한국불교는, 범아일여(梵我一如)처럼 모든 게 참나(眞我, true atman)이므로 참나 이외의 것을 논하는 것은 분별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부들 중에는 세속 학문 박사들이 있다. 천문학 박사인 바티칸 천문대장 신부는 ‘그런 걸 누가 믿어요?’ 하며 대놓고 천국 · 지옥을 부인한다. 승려들 중에 물리학 · 천문학 · 생물학 · 진화론 · 뇌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들이 나와야 한다. (모든 세속 학문은 무아연기의 구현이자 증명이다.) 윤회론을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삼법인 · 사성제 · 연기법을 제외한 모든 게 방편이라면 못 할 게 없다. (그런데 불교학자인 한자경 교수는 ‘무아론을 방편설’이라고 주장한다. 책까지 썼다. ‘불교의 무아론’인데, 그 결론이 ‘무아론은 방편설’이다. 이분은 앞서 말한 비구니 스님의 사상을 옹호하는 논문까지 썼다.)

3) 윤회론
윤회론에는 수많은 문제점이 있다. 윤회론은 ‘종(種) 쇼비니즘’이고 ‘생명계의 카스트 제도’이다. 동물을 도덕적으로 더 열등한 존재로 과거에 즉 전생에 더 나쁜 짓을 한 존재로 만드는 만행이다. 한 해에 수백억 마리의 짐승을 살해하면서 벌이는 위선이다. 서로 대량살상을 하고 고문을 하는 생물은 인간뿐이다. 윤회론은 진화론과 위배된다. 1억 5천만 년이나 지속된 공룡이었다는 전생담이 없다. ‘내가 과거 생에 공룡 왕 티라노사우루스였을 때’라고 시작하는 경전이 없다. ‘내가 식물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었을 때’라고 시작하는 경전도 없다. 그래서 필자는 경전을 두 개 만들어 보았다. ‘티라노사우르스 경’과 ‘마하보타니카 수트라(식물윤회경)’이다.

100억 원과 기억상실을 교환할 사람은 없다. 지금까지 길 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아는 사람들에게도 물어봤다. 수십 명에게 물어봤다. “내가 당신에게 100억 원을 주겠다. 단 조건이 하나 있다. 돈을 받는 즉시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다. 문자 그대로 일체의 기억을 잃어버린다. 돈을 받겠느냐?” 모두 거부한다. 거의 즉각적이다.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돈을 신처럼 섬기는 미국’에서 온 미군 병사 불교도도 있었는데 거부했다. 어떤 사람은 “어, 그거 윤회하고 같은 얘기네요?” 하면서 거부했다. 전생에 대해 기억이 없다면, 기억하지 못한다면, 윤회는 의미가 없다.

(1) 대승불교와 유아론
일부 대승은 영원히 원력수생(願力受生)하며 존재하는 영혼 같은 걸 인정한다. 같은 정체성을 유지하고 과거의 경험을 다 유지한다. 알라야식[藏識, 창고식]이 모든 기억을 저장하고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게 잘못되면 참나론이 된다. 한자경 교수와 혜민 스님이 전형적인 예이다. 보살이 될 때까지는 몰라도 보살이 된 후에는 상주불변의 아(참나, 眞我)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혜의 완성인 등각 · 묘각의 지위에 오른 보살은 그 후로 영원히 정신적 정체성이 바뀔 것 같지 않다. (자신의 무한한 과거생의 경험을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인간의 정의
불교는 모든 생명 있는 행성에 6도윤회가 있다고 가정한다. 인도(人道)라 할 때 인간의 정의는 무엇인가? 몸의 모양인가? 아니면 지력인가? 경전은 다른 행성에도 인간 모습을 한 생물이 살 것처럼 얘기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모든 부처는 32상을 지녔다. 타방불(他方佛)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타방불은 지구 인간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달라이 라마는 1981년에 하버드대에서 행한 연속강의에서, ‘중음신의 이동속도는 빛보다 빨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행성에 가서 태어날 때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침팬지 보노보가 구석기 시대 혹은 북경원인 혹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또는 600만 년 전 인간보다 더 지력이 높으면 인간으로 칠 것인가? 즉 인도로 칠 것인가?

60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인도(人道)에 속한다면 그보다 더 진화한 오늘날의 침팬지는 왜 인도에 속하지 않는가? 인도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불합리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통속적 윤회론에 의하면 영혼(중음신)이 동물의 몸에 들어가면 동물이고 인간의 몸에 들어가면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다. 그렇다면 다른 행성에 있는 인간과 전혀 다른 몸을 가진 생물은 인간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인도(人道)는 (인간이 아닌) 동물의 세계로부터 불연속적으로 단절되어 있는 게 아니다. 시공을 통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모든 동식물은 서로 유전자가 반 이상 일치한다.) 진화론이 바로 이런 이론이다. 옛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몰랐기에 서로 불연속적인 인도와 축생도를 생각했다. 동물의 몸과 마음이 인간으로 진화를 한 것이 35억 년간 윤회이지, 몸과 독립적인 (진화를 하지 않는) 마음이 동물의 몸을 들락날락하는 게 윤회가 아니다.

(3) 타방불은 인간인가
타방불(他方佛)도 지구인과 같은 모습이다. 왜냐하면 부처는, 불경에 의하면 누구나 다 32상(相)을 갖기 때문이고 32상은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물체의 몸은 환경에 의해서 결정 나므로, 다른 고등 행성에 반드시 인간 모습의 생물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지구만 하더라도 물짐승과 길짐승과 날짐승은, 사는 환경에 따라 서로 모습이 다르다. 예를 들어 고래와 하마와 황새가 있다. 갈라파고스 제도의 예도 있다. 그곳 생물들은 외딴 섬들에 고립되어 살다 보니 기이한 모습으로 진화했다. 생명체가 환경에 따라 몸의 모습을 달리하는 것이 무아연기론(無我緣起論)이다. 그러므로 다른 행성에는 인간과 같은 모습의 생명이 있을 필요가 없다. 옛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몰랐다. 그러므로 무아연기는 총론(總論)이고 진화론은 각론(各論)이다. 각론에 밝아야 한다. 학문이란 각론을 발견하고 심화하는 과정이다. 이름하여 총각론(總各論)이다. 불자들은 총각론에 밝아야 한다.

(4) 지옥과 유물론
지옥은 유물론이다. 이 말에 깜짝 놀랄지 모르지만 사실이다. 지옥중생의 고통은 육체적 고통이지 정신적 고통이 아니다. 펄펄 끓는 화탕(火湯)과 날카로운 칼을 세운 도산(刀山) 등에서 육체적 고문을 받는 곳이다. 산 채로 항문에서 입까지 꿰임을 당하거나, 산 채로 가죽을 벗김을 당하기도 한다. 정신적 고통을 받는 곳이 아니다. 이는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는 주장이므로 유물론의 일종이다. 정신적 고통인 번뇌는 (축생계 · 아귀계 · 지옥에는 없고) 인간계에나 있으므로, 만약 정신적 고통이 육체적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라면, 축생계로 추방하는 대신에 인간으로 환생하게 해 정신적 고통을 겪게 해야 옳을 것 같은데, 그런 일은 없다. 지옥이 유물론의 산물이라는 강력한 증거이다.

고통에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 있다. 마취제에는 육체적 마취제와 정신적 마취제가 있다. 대부분의 종교는 정신적 마취제이다. 종교로 마음을 마취하고 (인문 · 자연과학으로 마음을 분해 · 수술을 하며) 정신을 강화한 다음, 종교에서 깨어나면 된다.

(5) 참나론의 탈피, 윤회론의 탈피, 더 큰 의미로서의 윤회론
내세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도 인권과 사회와 공동체의 이익을 논한다. 자아의 영속성을 믿어야만 선행을 하는 게 아니다. 이 점에서 자아의 비소멸(非消滅)을 전제로 하는 윤회론은 저차원의 가르침이다. 아함경이 저차원의 경전이 아니라 ‘개인 의식의 영속성에 자비와 해탈의 기반을 두는 사상’이 저차원이다. 이기적인 사상이다.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선행과 자기희생은 내세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신비이다. 결코 풀 수 없는 신비이다. 사실은 무아론적 보살행이 바로 이런 선행과 자기희생에 해당하는데 불교도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무연자비행은 자기와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자비행인데, 여기에는 자기 자신의 내생에 전혀 인연이 없는 자비행도 해당한다.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이다.

(6) 개인의식 탈피
편협한 개인의식을 벗어나야 한다. 개인의 인과응보를 벗어나야 한다. 통계적 · 집단적 인과응보를 보아야 한다. 통계역학처럼 통계인과를 보아야 한다. 수십 조 개나 되는 입자들의 움직임은 일일이 하나씩은 알기 힘들어도, 전체적으로는 알기 어렵지 않다. 인과응보도 마찬가지이다. 73억 명이나 되는 인간들의 인과응보를 일일이 알기는 어렵다. 전체 집단의 인과응보를 보게 보면, 우연과 개별적인 예외의 역할이 과장되어 보이지 않아서, 평균적인 인과응보를 알게 된다. 보험과 같은 이치이다. 고객이 많으면 우연성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약화된다. ‘큰 수의 법칙(Law of Large Numbers)’에 의해 움직인다.

(7) 깨달음과 인구
깨달음도 인구의 힘이다. 인구가 작으면 의식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식도 발달하지 않아 인간의 본성을 파악할 수 없다. 부처도 나올 수 없다. 부처는 세인의 이해와 달리 산골의 산물이 아니라, 도시 문명의 산물이다. 믿기 힘들지 몰라도 적은 인구가, 침팬지가 깨닫지 못하는 이유이다. 침팬지 집단은 잘해야 200마리 정도이기 때문이다.

4) 불교 우주론

달라이 라마는 2011년에 다람살라에서 태국 불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불교 우주론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수미산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현대과학이 제시하는 우주론을 믿는다고 했다. 《구사론》은 해와 달이 지구를 돌고 지구 한가운데에 수미산이 있다고 하지만, 훨씬 더 발달한 현대과학적 우주론을 믿지 구사론적 우주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수미산이 없어지면 그 정상에 있는 지거천(地居天)인 도리천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아예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게 된다. 그러면 천계신화(天階神話)가 거짓말이 된다. (이 신화는 부처님이 어느 해 하안거 석 달 동안 도리천에 올라가 그곳에 환생한 어머니 마야부인을 뵙고 내려왔다는 일화이다.) 수미산이 없어서 도리천도 없다면 마야부인은 어디로 환생했을까? 부처님은 석 달 동안 헛것을 보신 것일까? 아니면 후세인들이 꾸며낸 이야기일까?

《무량수경》에도 수미산 이야기가 나온다. 부처님이 ‘극락에는 수미산이 없다’고 하자, 아난이 묻는다. ‘그렇다면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은 어떻게 되느냐’고. 무척 흥미로운 문답이 아닐 수 없다.

21세기 달라이 라마는 현대과학을 증거로 들어 염부제의 수미산도 부정하고 있다. ‘불경을 맹신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

너무 오래된 것은 약이라도 몸에 해롭다. 유효기간이 한참 지나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불경도 마찬가지이다. 그중에 유효기간이 지난 것은 솎아내야 한다. 지옥 · 아귀 · 동물계 · 아수라 · 천국을 말하는 통속적 윤회론도 거기에 속한다.

5) 말뿐인 보살행 실천-자비희사의 사회적 실현

손양원과 장기려 등 보살행을 한 기독교 목사들과 의사들이 있다. 손양원 목사는 여순반란 사건 때 두 아들이 공산반군 쪽에 선 18살 청년에게 살해당했다. 손 목사는 그를 자기 양자로 받아들여 키웠다. 소록도에서 나환자들을 돌보았다. 의사인 장기려는 고신병원을 세워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했으며, 청십자 의료보험을 만들어 (자신이 무료로 치료해 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료혜택을 주었다.

숨어서 자비행을 하는 스님들도 많겠지만 부처님 제자들이라면 더 큰 행이 필요하다. 타 종교인들이 ‘불교는 과연 자비의 종교구나’ 하며 감탄할 정도의 실천이 필요하다.

엉터리 목사들이 자기 교회와 호화스러운 큰 교회를 탐착한다면, 엉터리 승려들은 자기 토굴과 호화스러운 토굴을 탐착한다. 토굴이 깨달음을 가져다줄 것처럼 굴고, 토굴은 깨달음을 얻은 자가 사는 곳인 양 군다.
대만불교는 계행과 자비행의 실천이 뛰어나다고 한다. 인도 성지 순례만 갈 것이 아니라 대만불교 순례도 해야 한다. 엉망진창인 한국불교는 착실한 대만불교에서 배울 점이 있다.

수나라 신행 스님(540~594)이 일으켜 송나라까지 400년을 유행한 삼계교(三階敎)가 있다. 그는 무진장을 설립하여 빈민들을 구제하였다.

손양원 등 기독교 성직자들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데, 불교의 자비와 사랑은 전생담에만 있는 듯하다. 신도가 줄어드는 이유이다. 대만을 본받아야 한다. 국민성이 이유일 수 있다. (고정불변한 게 없으므로 국민성도 바뀐다. 국민의 마음에 나쁜 면이 있다면 ‘현재로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속고 속이는 걸 막아야 한다. 일반인들은 서양인들이 오히려 순진하고 착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방생은 사기이다. 방생을 할 양이면 평소에 물고기와 고기 소비를 줄이는 것이 더 효과적인 방생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년 소비하는 닭이 몇억 마리에 달할 것이다. 이들을 놔두고 물고기 몇 마리 방생하는 것으로는 양이 찰 수 없다.

근본적인 문제에 눈을 감아서는 불교가 아니다. 불교도들이 크게 반성해야 한다. 스님들만 바라볼 게 아니라 신도들이 변해서 스님들을 교화해야 한다. 연기법이 참이라면 스님들과 신도들이 서로 영향을 주며 탁마하는 것이 불교이다. 참나나 믿고 방종하게 사는 사람은 교화의 대상이지 교화의 주체가 아니다. 승복이 아니라 (거룩한) 행이 스님을 만들기 때문이다.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그렇다.

6) 주체적인 당당한 신도들의 마음 자세

신도들이 절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 절의 주인은 신도들이기 때문이다. 승려들은 신도들(불제자)의 일부분일 뿐이다. 신도들도 세속의 사원 이사처럼 경영에 참여해야 한다. 조계종 직책 중에 신도부장이 신설되어야 하며, 종회에도 신도의원들이 있어야 한다.

7) 평등한 승가의 구현, 비구니 처우 개선

모든 부처를 낳는 것은 여성이다. 모든 부처의 몸속에는 여성의 유전자가 반이다. 그러나 인간의 유전자 중에 깨달음의 유전자는 없다. 사람의 정신적 능력은 뇌를 만드는 (생체 · 문화) 유전자에 달려 있다. 옛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기에 사람의 정신적 능력은 육체와 무관하게 정신에 있는 줄 알았다. 전생에 선업을 지은 사람들이 전생의 마음(정신적 능력)을 지니고 남자로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모든 부처를 열 달 동안 배 속에 키우고 낳아서 수년 동안 젖을 물리어 키우는 것이 여성이다. 비구니들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어야 한다. 세속에서는 여자들의 참정권이 확보된 지 오래고, 여성 대통령 · 수상 · 총리 · 장관 · 판검사들이 숱하게 배출되었는데, 종교계만 예외이다. 하나님과 부처님이 남자이기 때문인가? 종회(宗會)가 깨달음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고 절집의 일상적인 대소사를 처리하는 곳이라면, 당연히 비구니들이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8) 승려들의 정치활동 금지

승려들은 자기 분야 일이나 잘할 일이다. 말로는 불법은 출세간의 일이라면서 세간의 일에 뛰어들어 간섭한다. 법문이라고 하는 것은 세속 정치 이야기다. 불과 십여 년 세월만 흘러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일들이다.

세속의 정치는 불법보다도 더 어렵다. 불법이야 선(good)만 닦으면 전부이지만, 세속의 일은 그렇지 않다. 하나의 일에도 수많은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어, 선과 악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기가 힘들다. 정의감에 불타는 스님들이 ‘이게 나라냐’ 하고 씩씩대다가는 한 면만 보는 단견에 빠지기 쉽다. 현대사회는 분업의 사회이므로 자기 일에 충실한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종교는 가장 큰 분업 중 하나이다. 부처님이 승려의 정치활동을 금하신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어느 쪽 편을 들건 반대쪽의 원한을 사서 세상에 평화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증오와 분쟁과 싸움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그리되면, 문제의 승려가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펼지라도 반대편 사람들은 그의 정치색에 대한 반감으로 귀도 기울이지 않아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할 길이 막힐 것이다.

불세출의 천재 뉴턴은 주식투자를 했다가 망했다. 자그마치 30억 원을 날렸다. 그는 “천체의 운동은 예측할 수 있지만 대중의 광기는 예측할 수 없다(I can calculate the motions of the heavenly bodies, but not the madness of the people)”고 한탄했다. 주식 가격을 결정하는 제일 요인은 수급이고, 수급은 대중의 마음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속일은 어렵다. 오히려 물리학 등 첨단학문이 더 쉬워 보일 정도이다.

벤저민 그레이엄(Benjamin Graham)이 말했듯이 “투자자의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이다”. 불교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이다. 아직 자기를 이기지 못한 자가, 아직 자기 자신을 모르는 자가 정치판에 뛰어들면 크게 망한다.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한다. 대중을 지옥으로 인도한다. ■

강병균 
포항공과대학교 수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수학과, 동 대학원 졸업. 미국 아이오와대학교 박사(수학). 울산대학교 교수 역임. 저서로 《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1, 2)이 있고, 〈법보신문〉에 《금강경》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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