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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을 폐지하고 법당을 세우다- 당송시대 선종사원*
2017 불교평론 학술상 수상기념 강연
[73호] 2018년 03월 15일 (목) 윤창화 changhwa9@hanmail.net

1. 불전(佛殿) 폐지와 법당(法堂)의 등장

당말오대(唐末五代, 835~959)는 선불교의 전성기였고 황금기였다. 이 시기 선종사원은 성불작조(成佛作祖)를 위한 수행자 집단, 결사 집단으로서, 기도 불공 등 종교적 · 기복적인 행위는 일절 하지 않았다.

당대(唐代) 조사선의 맹주들, 이른바 마조 · 백장 · 황벽 · 임제 · 덕산 · 운문 등은 선의 정신에 투철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반야 공(空) 사상에 입각하여 권위주의와 허상을 배격했다. 그 대표적인 말이 ‘살불살조(殺佛殺祖)’ ‘초불월조(超佛越祖)’ ‘가불매조(呵佛罵祖,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꾸짖다.)’이다. 그리고 부처란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불상이 아니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卽心是佛]’라고 강조했다.

이와 동시에 선종사원의 가람 구성에서도 깜짝 놀랄 양상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불전(佛殿, 대웅전)의 폐지와 법당(法堂, 설법당)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폐지하고 설법당을 세운다.’는 것은 중국불교사에서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초유의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본래 불교 가람의 양식은 전탑후당(前塔後堂) 형식이었다. 즉 가람의 중심에는 탑을 안치하고 그 뒤에는 불당(佛堂, 佛殿, 대웅전)을 배치하며, 앞에는 산문(山門), 뒤에는 강당, 그리고 좌우에는 여러 채의 요사채(寮舍)와 전각이 배치된 당답(堂塔) 중심이었다. 이는 중국 전통 사원의 가람 양식도 마찬가지고, 불국사, 해인사 등 우리나라 사찰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당 중기 백장회해(720~814)의 주도 아래 처음으로 선불교가 율종사원의 울타리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선종사원을 창건하던 시기에, 그는 과감하게 탑(塔)과 불전(佛殿, 대웅전)을 폐지해 버렸다. 설계도에서 당탑을 배제하고 그 자리에 높고 커다란 법당(설법당)을 세웠는데[不立佛殿 唯樹法堂], 이는 여타 불교 종파에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대하여 찬영(贊寧, 918~999)은 《송고승전》 〈백장회해 전(傳)〉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불전을 폐지하고 오직 법당만 세우는 것은 법(法)은 언어와 형상을 초월해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不立佛殿, 唯樹法堂, 表法超言象也).

선종사서(禪宗史書)인 《송고승전》의 찬자 찬영은 불전(대웅전)을 폐지하고 법당을 세운 까닭에 대하여, 간결하고 명확하게 “법(法)은 언어와 형상[言象]을 초월해 있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정의하였는데, 선(禪)은 언어문자와 형상이 닿지 못하는 곳, 언외(言外)와 상외처(象外處)에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언어도단처(言語道斷處)의 심원(深源)을 뚫기 위하여 우뚝하게 법당을 세우고 불전(대웅전)을 폐지한 것인데, 이는 곧 선불교의 살아 있는 정신인 동시에 긍지,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언상(言象)이란 언어문자로 이루어진 경전과 불상을 가리킨다고 본다.

백장회해는 양억(楊億, 楊文公, 974~1020)의 〈선문규식〉을 통하여 이렇게 말한다.

불전을 세우지 않고 오직 법당만 세운 것은, 부처님과 조사(佛祖)로부터 친히 법을 부촉 받은 당대(當代) 주지를 존숭하기 위해서이다(不立佛殿, 唯樹法堂者, 表佛祖親囑受, 當代爲尊也).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청규인 자각종색의 《선원청규》 10권 〈백장규승송(百丈規繩頌)〉에도 같은 내용(不立佛殿, 唯搆法堂者, 表佛祖親受, 當代爲尊也)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는 말미에 결어 같은 게송이 하나 더 붙어 있다.

入門無佛殿 산문에 들어서니 불전은 보이지 않네.
陞座有虛堂 법좌에 오르니 당(堂)이 텅 비어 있네(無佛像).
即此傳心印 이는 곧 심인을 전수받은 (주지)가 있기 때문이니
當知是法王 마땅히 알지어다. 이가(주지, 방장) 곧 법왕임을.”

“법좌에 오르니 당(堂)이 텅 비어 있네”라는 것은 ‘무불상(無佛像)’ 즉 법당에 불상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선종사원의 주지(방장)는 다름 아닌 ‘법왕(法王)’이라는 것이다. 직접 불조(佛祖)로부터 심인(心印, 心法)을 전수받은 살아 있는 현신(現身)의 법왕이었다. 그런 법왕(주지)이 부처(법신불)를 대신하여 여법하게 무생법을 설하고 있는데, 아무 지혜작용이 없는 그저 한낮 목석에 불과한 부처의 상을 모신다는 것은 살불살조의 선 정신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허상에 지나지 않는 불상을 위하여 불전을 세운다는 것은 반야지혜의 안목에서 볼 때 정말로 어리석은 우매한 일이었다.

‘주지=법왕’이라는 관점은 상당법어의 의식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주지가 상당하여 법문을 마치면 주관자인 유나는 백퇴(白槌, 사회봉)를 한 번 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관법왕법 법왕법여시(諦觀法王法, 法王法如是, 법왕(주지)의 설법을 자세히 관찰하시오, 법왕의 법은 이와 같습니다).”

이것은 《칙수백장청규》 3권 ‘주지 장(住持 章)’ 등에 있는 상당법어 등 법어 전후의 형식이다. 법문을 마칠 때 유나가 백퇴(白槌)를 치고 나서(維那白槌云) “제관법왕법 법왕법여시(諦觀法王法, 法王法如是)”라고 말하는 것은 《벽암록》 92칙 세존승좌 공안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장면인데, 선원총림에서 이 형식을 취했던 것은 《벽암록》에 바탕 했다고 할 수 있다. 경전적 근거는 《화엄경》(唐華嚴經四. 汝應觀法王,法王法如是)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왕의 법이란 곧 ‘제일의제(第一義諦, 최고의 법)’를 뜻한다.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주지는 오늘날 주지와는 그 개념이 전혀 다르다. 주지는 곧 불조(佛祖)로부터 법을 전수받은 ‘법왕’이었고, ‘현신불(現身佛)’이었으며, ‘살아 있는 부처(生佛)’였다. 따라서 법상에 올라가 법문할 때도 군주처럼 남면(南面)을 했다. 법왕(法王)의 자격으로 설법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주지를 법왕처럼 생각했던 것은, 한 예로 선원이 화재나 수해로 전소되었을 경우 가장 먼저 건축하는 당우가 법당과 방장(주지실)이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잠은 천막에서 자도 되고, 밥은 노천에서 먹어도 되지만, 법문을 듣는 공간인 법당과 법왕(주지)의 거처(居處)인 방장은 그 어떤 당우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상에서 보면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가람 구조 등 모든 시스템은 이와 같이 오도(悟道), 곧 성불작조(成佛作祖)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불전 폐지와 법당 등장의 사상적 배경

1) 형상의 배격과 공(空)의 확립

선불교의 소의경전은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 《유마경》 《열반경》 등 대승경전과 마명의 《대승기신론》이다. 그리고 그 사상적 바탕은 불성 · 반야 · 공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바탕하여 부처나 깨달음(=覺者)의 실체를 정의한다면, 그것은 곧 공(空)의 체득과 불성의 발현, 그리고 ‘반야지혜’였다. 그 가운데서도 반야지혜가 곧 ‘부처(깨달음)를 이루는 알맹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참선 수행자들이 가고자 하는 피안(彼岸)도 반야지혜의 완성[般若波羅蜜]이었다.

《금강경》은 반야 · 공 사상을 설하고 있는 대표적인 대승경전이다. 《금강경》은 시종일관 금강석 같은 반야지혜를 강조하고 있는데, 《금강경》 제5장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이치대로 정확하게 여래의 眞相을 보라)〉에서 대승의 여래(부처)는 공의 지혜가 가장 으뜸인 수보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거룩한 신상(身相, 육체의 모습, 형상)에서 여래의 참모습을 볼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신상에서는 여래의 참모습(眞相, 法身)을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신상(형상)은 곧 신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이름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와 같이) 무릇 모든 형상은 다 허망한 것이다. 만약에 모든 형상이 허상임을 직시한다면 곧 여래를 보게 될(깨닫게 됨) 것이다.

“여래의 진실한 모습은 신상(身相, 형상)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겉모습은 거룩한 신상(身相, 불상)이지만, 그렇다고 그 속에 여래의 참모습(법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을 직시할 때 비로소 여래를 볼 수 있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고 말한다.

또 대승의 여래는 《금강경》 제20장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형상을 믿지 말라)〉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신상을 부정하고 있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처[眞相]를 32상 80종호가 모두 갖추어진 완전한 색신(具足色身, 형상)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보리가 말했다. “볼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비록 구족된 색신이지만, 거기서는 여래의 참모습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구족된 색신이란 곧 구족된 색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냥 이름이 구족된 색신일 뿐입니다.”

32상과 80종호를 모두 갖춘(具足) 거룩한 신상(身相, 佛像)이지만, 그 속에 여래의 진상(眞相, 법신)은 내재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수보리의 요점은 일테면 사찰 이름이 ‘성불사’ ‘불국사’ ‘극락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대승의 붓다는 그 최종적인 판단을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고 정평이 나 있는 수보리에게 맡기고 있는데, 진정으로 대승의 여래가 수보리의 입을 통하여 당시 불교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신상(身相) 등 유형(有形)에 대한 부정’과 ‘허상을 앞세운 권위에 대한 배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공성(空性)과 반야지혜의 강조’라고 할 수 있다.

“신상에서는 여래를 볼 수 없다(不可以身相 得見如來).” 즉 ‘불상 속에는 부처가 없다’ 이것이 바로 불전을 폐지하고 대신 법당을 세운(不立佛殿, 唯樹法堂) 교리적 · 사상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법당은 주지의 설법 공간으로서 항상 반야지혜가 작용하고 진여법신의 세계가 실현되고 있는 곳이지만, 불전(대웅전)은 기도나 기원 외에는 아무 영험이 없는 당우였다. 그러나 선불교는 수행의 목적이 깨달은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이지, 기도나 기원을 통한 작복(作福)이나 왕생극락이 아니었다.

당대(唐代) 중국 선불교에서 불상과 불전(대웅전)에 대하여 이와 같이 파악한 것은 《금강경》 등 대승경전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절대 자의적인 판단이 아니고, 선의 소의경전에 의거한 것이었다.

김동리의 단편소설 〈등신불〉은 ‘단하소불(丹霞燒佛)’ 공안을 소설화한 것으로, 문학도와 불교도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단하천연(丹霞天然, 739~824)이 동안거를 마친 추운 어느 겨울날 객승의 신분으로 낙양 혜림사(慧林寺)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다. 지객의 안내로 객실에 들어가 보니 냉기가 쌩쌩 돌았다. 그는 추위를 막기 위하여 불전(대웅전)으로 올라가서 목불(木佛)을 가져다가 쪼개서 불을 피웠다. 이때 원주(院主)가 그 모습을 보고 달려와서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봐요, 객승! 불상을 쪼개서 아궁이에 넣고 불을 때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 단하 선사는 다음과 같이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목불을 다비해서 사리를 얻고자 한 것뿐입니다.” 원주가 말했다. “(이 답답한 객승아!) 나무토막에서 어떻게 사리가 나올 수 있겠소.” 단하가 말했다. “그렇다면 부처가 아니고 나무토막에 불과하다면 (문제가 될 것도 없는데) 뭣 때문에 나를 나무라는 겁니까.”(於惠林寺, 遇天寒, 焚木佛, 以御次. 主人或譏. 師曰. 吾茶毘覓舍利. 主人曰. 木頭有何也. 師曰. 若然者, 何責我乎)

단하소불의 선화(禪話)는 《조당집》 4권에 수록되어 있으며, 《선문염송》에도 나온다. 단하 선사는 석두희천의 제자로 백장회해(720~814)와 동시대 인물이다. 이 단하소불은 우연이 아니고, 당시 혜림사를 비롯한 낙양(당시 수도) 일대의 사찰에서는 수륙재, 천도재 등 각종 행사로 한 해를 보내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자 의도된 것이었다.

단하소불은 반야지혜가 확고하고 선의 정신이 투철한 선승이 아니고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조주 선사(778~897)는 구자무불성화와 구순피선(口脣皮禪, 뛰어난 법문)으로 유명한 선승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법했다.

금(金)부처는 용광로를 통과하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 속을 통과하지 못하고, 진흙 부처는 강물을 통과하지 못한다(金佛不渡爐, 木佛不渡火, 泥佛不渡水).

《벽암록》 96칙에도 나오는 조주 화상의 삼전어[趙州三轉語] 법문이다. 금으로 만든 부처는 용광로를 통과하지 못한다. 10분만 있으면 녹아 버리기 때문이다. 나무로 조성한 목불(木佛)은 불 속을 건너가지 못한다. 재가 되기 때문이다. 진흙으로 만든 부처[泥佛]는 물속에 들어가면 녹아 버린다.
형상이 가진 유형(有形)의 부처는 진불(眞佛)이 아니다. 진불(眞佛)은 법신불(法身佛) · 진리불(眞理佛)이다. 참부처[眞佛]는 용광로 속에 들어가도 녹지 않고, 불 속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속에 들어가도 녹지 않는다.
선종(禪宗)의 목표는 반야지혜의 완성에 있다. 선종에서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중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선종에서는 오로지 깨달아야만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다고 생각했고, 기도 · 염불 등 작복(作福)이나 신도 단련에 대해서는 조금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덕산선감(德山宣鑑, 782~865)은 ‘덕산방’으로 유명한 당말의 선승이다. 그는 《금강경》에 정통한 좌주(座主, 강사)였는데, 강남에서 선이 대단히 성황을 이루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일전(一戰)을 펼치고자 용담숭신을 찾아갔다. 그런데 조주로 가는 길 어느 주막에서 점심(點心)을 주문했다.

노파가 물었다. “바랑 속에는 무슨 경전입니까?” “금강경입니다.” 노파가 말했다. “제 말에 대답을 하면 점심을 그냥 드릴 것이고 대답을 못 하면 점심을 팔지 않겠습니다. 금강경에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고 했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을 찍겠습니까[點心]?” 《금강경》에 정통한 덕산이었으나 노파의 일격에 입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금강경》을 소각하고 선(禪)으로 전향했다.

덕산선감은 어느 사찰에 주지로 갔는데, 우뚝 불전이 세워져 있었다. 그는 불전을 폐지하고 법당만 두었다.

선사가 무릇 선원에 주석할 때는 불전(佛殿)은 철폐하고 오직 법당만 두었을 뿐이다(師凡住院, 拆却佛殿, 獨存法堂而已).

덕산선감은 새로 창건한 선사(禪寺)에 주지로 간 것이라기보다는 기존의 교종사찰에 주지로 간 듯하다. 그는 주지로 가서 불전(대웅전)을 헐어버렸다. 성불작조(成佛作祖)에는 무용한 건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불전을 허물어 버렸으니 불상은 보지 않아도 알 만한 일(소각)이다.
조주 선사(778~897)의 예는 좀 다르다. 그는 불전을 그대로 두었으나 불상에 예불(예배)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문원(文遠)이라는 시자가 불전에 올라가서 예불하자 조주 선사는 주장자를 내려치면서 말했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시자 문원이 말했다. “예불을 하고 있습니다.” “예불해서 무엇에 쓰려고 하는가?” “예불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까?” 조주 선사가 말했다. “좋은 일(예불)은 없는 것만 못하지”(趙州因文遠侍者, 在佛殿禮拜次. 師見以拄杖打一下曰. 作甚麼. 曰禮佛. 師曰. 用禮作甚麼. 曰禮佛也是好事. 師曰. 好事不如無)

여기서 말하는 예불은 합장배례 즉, 예배(禮拜)를 뜻한다. 불전에 있는 목불(木佛)이나 금불(金佛)은 반야지혜를 발휘하지 못하는 부처이다. 조주 선사는 그런 부처는 ‘참부처’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인데, 이 역시 불전을 폐지하고 오직 법당만 두었던 사상적 배경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당대(唐代)의 모든 선종사원이 불전을 폐지했던 것은 아니다. 불전을 신축하지는 않았지만, 기존에 불전이 있는 경우는 선승에 따라서는 그대로 둔 경우도 있고 폐지한 경우도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덕산선감(780~865) 같은 경우는 허물어 버렸으나 조주종심(778~897)은 그대로 존속은 시켰다. 다만 존속시켰지만 선원의 납자들이 불전에 가서 합장배례하지는 않았다. 염관제안( ? ~842)의 경우는 기존에 불전이 있는 사찰이었던지, 그대로 두었다.

3. 당말오대의 정국과 불전(佛殿)의 등장

당말에 일어난 황소(黃巢)의 난(875~884)은 당 왕조에 치명타를 가했다. 907년, 당(唐)은 드디어 289년 만에 망했다(618~907).

당말오대는 구(舊)질서가 파괴되고 신(新)질서가 싹트는 혼란기였다. ‘황소의 난’으로 많은 전적이 소실되는 등 사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특히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法難)’ 가운데 하나인 후주(後周) 세종의 폐불(955년)은 중국 화북 지방 불교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는데, 폐쇄된 사찰이 절반 이상으로 3,336개소나 되었다. 조주 선사의 선맥이 끊어진 가장 결정적인 원인도 세종의 폐불사건 때문이었다.

강북과는 달리 강남의 10국(國) 오(吳) · 민(閩) · 오월(吳越) 등은 정치 ·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강남의 주자(走者)인 민(閩)의 왕심지(王審知)와 남한(南漢)의 유엄(劉龑), 남당의 이변(李昪)과 이경(李璟), 오월의 왕 전홍숙(錢弘俶) 등은 선불교를 적극적으로 존숭 · 보호했다. 선종 5가(五家) 가운데 마지막 주자는 운문종과 법안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오대의 와중에서 성립했다는 것이 이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운문문언(864~949)은 오대십국의 하나인 남한(南漢)의 초대 황제 유엄(劉龑, 889~942)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소주(韶州) 영수선원(靈樹禪院)에 주석하면서 운문종을 성립시켰다. 그가 오대의 혼란 속에서도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을 유지하면서 일자선(一字禪)과 삼자선(三字禪)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유엄의 적극적인 외호 덕분이었다.

법안문익(885~958)은 당시 강남의 국주(國主)인 남당(南唐) 이변(李昪)의 후원으로 강서 금릉 보은선원(報恩禪院)과 청량원(淸涼院)에 주석하면서 크게 법안종을 드날렸다. 《송고승전》 13권과 《전등록》 24권 ‘청량문익’ 장(章)에는 “강남의 국주(國主)가 선사의 도(道)를 중히 여겨 보은선원에 맞이하여 주석하게 했다(江南國主, 李氏始祖, 知重師之道, 迎住報恩禪院)”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국주(國主)는 다름 아닌 남당의 왕 이변을 가리킨다.

항주에서 나라를 세운 오월왕(吳越王) 전(錢, 전홍숙)씨 일족은 법안종과 천태덕소(天台德韶, 891~972)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항주의 서호(西湖) 정자사(淨慈寺)는 법안종의 대사찰이었는데, 이것은 오월왕 전홍숙이 법안종의 3조인 영명연수(904~975)를 위하여 건립한 선원총림이었다.

그리고 후당의 장종(莊宗)은 당말의 임제종 선승인 흥화존장(830~888)을 존숭했고, 오대 때 초왕(楚王) 마은(馬殷)은 석문헌온(石門獻蘊) 선사에게, 민왕(閩王) 왕심지(王審知, 862~925)는 설봉의존과 현사사비에게 귀의했다.

당말오대 60년 동안은 어찌 되었든 전국시대로 난세였다. 이 난세의 영웅들은 대부분 지방 절도사 등 군벌 호족들이었다. 그들의 종교적 · 정신적 의지처는 가장 민중적 호응도가 높았던 선불교였다. 선승들은 각 지역에서 높은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하여 종교적인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적극적으로 선불교를 후원했다.

선종사원에 불전(佛殿)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절도사 등 군벌 호족들은 난세를 당하여 선종사원을 찾아가서 불전(대웅전)에서 국운융창, 무운장구를 빌었다. 운문문언(864~949)의 어록인 《운문광록》에는 불전(대웅전)이 선문답 속에 여러 번 나온다.

“여러분, 보시오. 지금 불전(佛殿)이 승당(좌선당) 속으로 들어가고 있소.” (대중 가운데 아무도 말을 하는 사람이 없자) 대신 대답하였다. “나부산이 북을 치니 소주가 춤을 추네.”

어떤 납자가 불전(佛殿) 모퉁이에 서 있었다. 그때 운문 선사가 손뼉을 ‘탁’ 치면서 말했다. “불전(佛殿)과 노주(露柱, 대웅전 기둥)가 주고(廚庫, 부엌)로 달려 들어가고 있다.” 그 납자가 고개를 돌려 보자 운문 선사가 말하였다. “보아도 그대는 모를 것이네. 다만 불전이 나올 때를 기다려 보게.”

또 어떤 납자가 물었다. “선사, 신라와 대당(大唐)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운문이 대답했다. “승당(僧堂), 불전(佛殿), 주고(廚庫, 고원), 삼문(三門)이니라.”

또 운문이 대중에게 말했다. “하늘과 땅 우주 그 사이에 하나의 보물(마음)이 있는데 형산(육체)에 비장(秘藏)되어 있다. 등롱은 불전 속에 있고, 삼문(三門)은 등롱 위에 있네.”

불전이 심심치 않게 선문답의 주제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적어도 당말을 지나 오대 무렵에는 선종사원에도 하나둘씩 불전이 세워지기 시작했다고 보인다. 선종의 건설자 백장회해가 제정한 ‘불립불전 유수법당(不立佛殿 唯樹法堂, 법당만 새우고 불전은 세우지 않는다)’의 대원칙은 이때부터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시대적 요청에 따라 불전이 세워지고는 있었으나 그 규모는 왜소하여 법당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이 시기(오대) 선종사원의 소임에는 ‘지전(知殿)’ 소임이 없었다. 불전은 우리나라 산신각 정도로 왜소했다고 보이고 신자들도 각자가 알아서 불전에 가서 기도할 뿐, 불공(佛供)을 올려준다거나 기도 · 염불해 주는 것은 없었다. 불공 의식은 물론 염불문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북송 말에 편찬된 장로종색의 《선원청규》(1103년)에는 ‘불전(佛殿)’이라는 용어가 세 번(2권, 9권, 6권) 정도 나오는데 주로 행자들에 대한 규정이다.

행자들은 매일 만참(晩參, 저녁 법문) 때 불전 앞에서 부처님께 예배하라(每日, 晩參於佛殿前禮佛).

황혼(黃昏)이 되어 대종을 치면 행자들은 불전(佛殿)에 올라가서 염불하라(黃昏鳴大鐘者, 行者上殿念佛也).

‘불전에 가서 예배, 또는 염불하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이 규정은 행자들에 한한 것이었다. 어디에도 “승당의 대중들도 불전에 가서 예배나 예불하라.”고 규정한 곳이 없다. 불전이 있고 불상이 모셔져 있어도 선당의 납자들과는 무관한 규정이었다. 즉 선당의 납자들은 불전에 가지 않았다. 이는 오늘날 우리나라 선원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4. 남송의 국가적 운명과 불전의 위상

1126년에 일어난 ‘정강의 변(靖康之變)’은 송나라를 혼란 속으로 빠트렸다. 정강 1년 금(金)나라는 북송의 수도 개봉(開封)을 공격한 지 3일 만에 수도를 함락시키고 흠종(欽宗)과 휘종(徽宗, 上皇), 그리고 황족과 대신 등 무려 3천여 명(약 70%)을 만주로 압송했다. 이는 한족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휘종의 아홉 번째 아들이자 흠종의 동생인 조구는 수도를 강남의 임안(현재의 항저우)으로 옮기고 남송을 세우고 고종으로 즉위했다. 재상 진회는 금나라와 강화를 추진했다. 양자강 북쪽은 금나라가, 남쪽은 송나라가 통치하는 선에서 금(金)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송나라가 수도를 임안(항저우)으로 옮긴 이후를 남송(南宋)이라고 한다.

남송은 이 치욕적인 사건을 겪고 나서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펼쳤다. 실지(失地) 회복을 위하여 조직을 재정비했는데, 그 일환으로 뒤늦게 실시한 것이 이른바 5산10찰 제도였다. 5산10찰 제도는 중앙에 5개 본산(五山)을 두고, 그 밑에 10찰(十刹)과 말사를 둔 제도로,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의 31본산제도와 거의 비슷했다.

5산10찰 제도는 관사제도(官寺制度)였다. 그 목적은 선종을 비롯한 전국 사찰을 국가기원 도량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국태민안(國泰民安)과 국운융창, 그리고 황제의 수명장수를 빌기 위한 것이었다. 5산10찰뿐만이 아니라, 남송의 모든 사찰은 대중들이 하루 세 번 즉 새벽, 사시(巳時), 저녁 이렇게 불전(대웅전)에 올라가서 황제의 만수무강[祝壽, 祝聖]을 기원했다.

남송 시대 선종사원의 불전은 그 위상이 북송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남송 불전은 황제의 수명장수와 국운융창 등 국가의 안녕을 짊어진 막중한 장소가 되었다. 불전은 웅장하게 신축되었고, 그 위상도 법당을 능가했다.

《남송오산십찰도》를 보면 남송 시대 불전의 규모는 법당과 같았다. 남송 오산 가운데 3위인 천동사 불전은 크기가 전면 5칸, 측면 3칸으로 법당과 똑같았고, 2위인 항주 영은사 불전도 크기가 법당과 같았다. 하위직이었던 지전(知殿, 대웅전 담당)이 상위직인 6두수로 급상승한 것도 이때이다.

시대를 잘 만나면 달(達)하고 그렇지 못하면 궁(窮)하게 되는 것은 비단 인간사만이 아니었다. 힌두의 신(神)도 그렇고 불전 등 사찰의 전각도 그렇고, 경전도 마찬가지이다. 달마와 혜가 시대에는 《능가경》이 소의경전이었고, 오조홍인과 육조혜능 시대에는 《금강경》이 소의경전이었고 남송, 원대에는 《능엄경》이 가장 많이 애독하는 경전으로 부각했다.

백장회해가 불전을 폐지하고 오직 법당만 세우도록 규정한 ‘불립불전 유수법당(不立佛殿 唯樹法堂)’의 대원칙은 400여 년 만에 완전히 백지가 되었다. 선불교도 당 · 북송 시대의 전성기를 뒤로하고 점점 부패,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남송 후기, 원(元)의 선불교는 명칭이 선종일 뿐이었다. ■

 

윤창화 / 민족사 대표. 1972년 해인사 강원 졸업(13회). 1999년 민추 국역연수원 졸업. 주요 논문으로는 〈해방 후 역경(譯經)의 성격과 의의〉 〈한암(漢岩)의 자전적 구도기 일생패궐(一生敗闕)〉 〈성철 스님의 오매일여론 비판〉 〈무자화두 십종병(十種病)에 대한 고찰〉 등과 저서로 《근현대 한국불교 명저 58선》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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