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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청량사, 산사음악회로 주민들을 위로하는 절
현장보고 | 한국불교 희망을 찾아서
[73호] 2018년 03월 15일 (목) 박부영 chisan@ibulgyo.com

 

   

경북 봉화 청량사는 산사음악회로 유명하다. 매년 가을 열리는 청량사 산사음악회가 얼마나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지 전국에서 최고라는 소문이 퍼져, 가을만 되면 방송과 신문이 앞다퉈 보도했다. 어떤 해는 현장을 나가지 않아 취재 기회가 없는 중앙 일간지 문화부장들이 가고 싶어도 못 가 애를 태운다는 소문이 조계사 주변에 돌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청량사 주지 스님이 문화부 데스크들을 특별히 초청하기도 했다.

어느 해 산사음악회에서 각자 소원을 달아 풍선을 날려 보내는 행사를 열었다. 음악회로 시작해서 음악회로 끝나기 때문에 내빈 소개, 인사말 같은 의식은 일절 없다. 참가자 명단에 이의근 경북도지사 이름이 주지 스님의 눈에 띄었다. 사회자가 이리저리 조명을 비추자 무대 아래 비탈진 잔디에 앉아 있다가 놀란 이 지사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지켜본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도지사가 옹색하게 앉아 관람하는 모습에 감탄한 것이다. 더 감격한 것은 이 지사였다.

그는 경북도 시군구 단체장 강연회에서 40분간 청량사 산사음악회 칭찬만 했다. 문화 관광 담당 공무원과 단체장들이 청량사로 몰려왔다. 경북의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 잡은 경산 갓바위 축제가 그렇게 해서 생겨났기 때문에, 신이 난 봉화군수는 청량사 산사음악회를 위한 일이면 먼저 찾아서 챙긴다.

돼지 축제로 유명한 청량사 인근 봉성면은 축제 때보다 산사음악회 때 팔리는 돼지고기가 더 많아 식당 주인들은 주지 스님만 보면 매달 음악회를 하면 좋겠다고 농반진반 던진다. 딱히 내세울 관광지도, 그럴듯한 랜드마크도 없는 봉화군이 청량사 산사음악회 덕분에 전국에 명성을 날렸다. 산사음악회가 한 지역의 경제를 좌우하는 영향력을 미친다. 청량사는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일까?

청량산은 태백산에서 갈라져 나온 일월산 서남쪽 24㎞ 지점에 솟은 산으로 전남 영암 월출산, 경북 청송 주왕산과 함께 3대 기악(奇嶽)으로 유명하다. 우뚝 솟은 열두 봉 아래 태백산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흐르는데, 공민왕이 몽골군을 피해 피난했을 정도로 험준하다. 열두 봉우리 중에서 연화봉 기슭 한가운데 자리한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한때 승당 등 33개의 부속 건물을 갖추었던 대찰로 봉우리마다 암자가 들어서서 스님들 독경 소리가 산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그러나 주세붕, 이황 등 유학의 태두들을 배출했던 유교 본산이어서 조선시대에 암자가 사라지고 청량사도 쇠락했다. 이름마저 불교식에서 유교식으로 바뀌었다. 그나마 청량산과 청량사만 남았다.

 
   

해발 600m 능선에 겨우 법당 한 채 서 있던 청량사가 전국에 알려진 것은 2001년 산사음악회를 열면서다. 오랜 시간이 걸렸던 불사를 마무리한 당시 주지 지현 스님은 지역주민들을 위한 기여 방안을 고민하다 산사음악회를 열기로 했다. 유명한 가수인 장사익 선생을 만나 생각을 털어놓았다. 장사익 선생은 만류했다. 아무리 불사를 잘해서 옛날과 달라졌다 해도 청량사를 오르기는 여전히 불편했다. 당시는 산사음악회를 여는 사찰이 흔치 않을 때였다.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어 어디든 차가 갈 수 있으며 놀이시설도 잘 갖춰진 가을 단풍 명소도 많은데, 잘 알려지지 않은 봉화를 찾아 힘겹게 걸어서 산에 올라갈 관람객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며 만류했다. 지현 스님은 ‘한 명이 와도 좋고 열 명이 와도 좋다. 일단 문을 열고 싶다’고 했다.

주지 스님이 음악회를 여는 것은 사찰에 관광객을 불러모으거나 돈을 벌고 싶거나 청량사를 홍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고락을 함께해 온 주민들과 그간의 노고를 서로 나누기 위해서였다. 문화 공연을 접할 기회가 없는 주민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몇 명이 오는지는 전혀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스님은 “첫째 아름다운 산사를 지역 문화 공간으로 돌려주기 위해서, 둘째 받는 불교에서 주는 불교로 가기 위해 산사음악회를 열기로 했다”고 말했다. 장사익, 안치환, 한영애 세 가수가 무대에 올랐다. 3천 명이 왔다.

첫해 단 한 번의 음악회로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다음 해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모일 것이었다. 기대가 커졌으니 부담도 커졌다. 지난해와는 다르고 시골 축제와도 다른 문화행사를 개최한다는 기준을 세웠다. 어느 해는 자비와 사랑으로 평화를 노래했다. 신부, 스님, 수녀 등 종교인들이 한데 모여 평화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신부가 기도하고 찬불가를 부른 뒤 찬송가를 부르고 대중가요를 합창했다. 스님이 찬송가를 부르고 찬불가를 부르고 대중가요를 합창했다. 비가 왔는데도 수천 명이 운집했다. 어느 해는 트럼펫 주자가 하얀 옷을 입고 산 위에 올라갔다. 초를 1만 개 켰다. 또다시 모인 수천 명의 관객이 깊은 감동을 받았다. 어느 한 해 화제를 낳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매년 가을이면 청량사 산사음악회를 보기 위해 찾아온 관광버스들로 봉화군 일대는 교통이 마비된다. 봉화군과 청량산의 명성이 높아지자 경북도와 봉화군은 청량산과 사찰 주변 정비에 더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됐다. 그러나 처음 6~7년간은 군 보조금을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지원을 받기 시작하면 온갖 간섭이 들어와 처음의 기조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같은 조건에서 평등하게 관람한다는 원칙에 따라 유지, 군 의회의원 등 지역에서 힘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대우를 하지 않았더니 지현 스님을 비난하기도 했다. 봉화군 나아가 경북을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매김한 이제는 군과 도로부터 지원을 받는다. 종단에서도 지원해 사찰 경비는 들지 않는다.

청량사 산사음악회가 유명해지자 방송은 지방분권 성공사례로 소개했다. 방송통신대학에서는 1시간 동안 산사음악회에 관해 강의하기도 했다. 지역경제에도 크게 기여한다. 음악회에 1만 명가량이 몰리기 때문에 음악회가 열리는 밤에는 펜션을 구할 수 없다. 청량사 산사음악회는 청량사만의 것도, 지역주민들의 소유도 아니다. 유학자들에 의해 하나둘씩 사라지고, 간신히 남은 암자를 지역의 명소로 가꾼 것은 사찰과 지역주민들이었다. 모두가 주인이다. 그래서 준비 과정도 사찰, 공연기획자, 신도회, 지역주민, 봉화군, 경찰, 공원관리사무소가 모두 참여해서 함께 지혜를 모은다. 사찰이 지역을 살린 데서 나아가 지역주민들 품에 사찰을 돌려준 것이다.

산사음악회를 처음 기획한 지현 스님과 청량사의 인연은 3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현 스님(현 조계사 주지)은 1984년 4월 청량사 주지로 부임했다. 총무원의 어느 부장 스님이 “경상도에 절이 하나 있는데 가서 살려나?” 하는 말에 ‘아무 생각 없이’ 임명장을 받았다. 서울 청량리역에서 아침 8시 기차를 타면 12시간 걸려 도착하는 오지였다. 강을 건너 계곡으로 오르거나 버스를 타고 우회해 능선을 타고 넘어야 하던 험지였다. 힘겹게 절에 오르자 법당인 유리보전과 고시생을 치르던 응진전만 있었다.

능선 위에 나란히 서 있는 법당 아래는 낙동강이 흐르는 천 길 낭떠러지였다. 법당 앞마당은 20명이 서 있기에도 비좁았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켜야 했으며 장작을 땔감으로 사용했다. 법당은 비가 샜으며 물이 나오지 않아 빨래를 들고 마을까지 내려가야 했다. 먹을 쌀도, 덮고 잘 이불도 없었다. 지현 스님은 “영주로 가서 캐시밀론 이불을 4천 원에 사고 제산면에 가서 쌀을 반 가마 샀는데, 그걸 지고 올라올 수가 없어서 반은 아래 두고 다음에 져 날랐다”고 말했다. 수저가 없어 싸리나무를 꺾어 간신히 끼니를 해결하는 피난살이 같은 생활을 했다. 부임 첫해 부처님오신날 25개의 등(燈)이 달렸다. 당시 고운사 주지 근일 스님(현 조계종 원로의원)이 일주일 뒤 ‘젊은 주지가 도망갔는지 보러’ 청량사에 왔다. 혹시 하는 생각에 2시간 동안 계곡을 따라 올라왔는데 도망가지 않은 것을 보고 가져온 흑사탕을 주며 격려했다.

스님은 도망치는 대신, 신도들이 절을 찾아오지 않으니 자신이 마을로 내려갔다. 고추를 함께 따고 마을 길 풀베기도 거들었다.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마을을 찾아 아이들을 경운기로 데려와 함께 놀고 해가 지면 집에 데려다주었다. 한자도 가르치고 함께 놀았다. 그 유명한 ‘경운기 스님’ 신화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4년을 어울리며 아이들과 놀자 사람들이 스님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절에서 기도하고 마을에 내려가 사람들을 만나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지내던 어느 날, 여든 넘은 노파가 청량사를 찾아왔다. ‘청량사 참배가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었던 노파는 군대 간 손자가 휴가를 나오자 등에 업혀 청량사를 찾은 것이다. 노인은 수십 년은 된 듯한 구겨진 지폐를 꺼내 주지 스님에게 주었다. 13만 원,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 돈을 받아든 스님은 고민 끝에 쇠락한 청량사를 보수하는 불사에 사용하기로 했다. 다리가 없어 나룻배로 강을 건너 가파른 계곡을 올라가야 하는 사찰 입지조건도 최악이었다. 맨몸으로 걸어도 강에서 몇 시간이 걸리는 산 위 절까지 자재를 나르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설령 실어온다 해도 자재를 둘 공간도 없었다. 청량사가 쇠락해진 것은 이 같은 지형조건으로 인해 절 보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노보살의 평생소원이 담긴 13만 원에 용기를 얻어 원력을 세웠다. 먼저 낡은 법당 수리부터 나섰다. 어느 날 독실한 불자인 영주의 ‘김 목수’가 기와만 구해주면 보수는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다. 기와 살 돈이 없었던 스님은 영주의 시골 빈집을 찾아다니며 쓸 만한 기와를 구했다. 양반 동네였던 영주에는 옛 기와집이 많았다. 지금은 고택(古宅)이 문화재나 휴식처로 각광받지만, 1980년대만 해도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는 바람에 돌볼 사람이 없어 허물어져 가는 빈집이 많았다. 기둥도 쓸 만했다. 그래도 문제가 남았다. 강을 건너 산 위로 자재를 실어 올릴 일이 난감했던 것이다.

그러자 지현 스님이 처음 부임해서 마을에서 함께했던 주민들이 나섰다. 농번기에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려와 함께 놀고 공부하던 스님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하루는 이 마을 사람들이, 다음 날은 저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며 기와를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날랐다. 맨몸으로 오르는 것도 벅찬 길을 마을 사람들은 기꺼이 짐을 지고 기와를 날랐다. 그 사람들 가운데 청량사에 전설처럼 전해오는 ‘특공대’가 생겨났다. 힘이 세고 날랜 부녀자 5명인데, 하루도 빠짐없이 기와를 날라 ‘특공대’라고 불렸다.
1989년 스님이 부임한 지 5년 만에 허물어져 가던 유리보전 번와(飜瓦)를 마쳤다.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을 수리했으니 이번에는 요사채 불사를 시작했다.

유리보전 옆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낡은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짓기로 했다. 이번에는 영주에서 가져온 기둥을 사용하기로 했다. 해결된 것은 기둥뿐이었다. 기와, 서까래 모래 등 다른 자재와 인건비는 없었다. 기와를 새로 얹는 일과는 비교가 안 되는 ‘대형 불사’였다. 스님은 마을 권선에 나섰다. 권선문 책 200권을 돌렸다. 가난한 경북 두메산골에서 권선이 될 리 없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금세 권선문이 마감됐다. 이번에도 기와를 머리에 이고 지게에 져 나르던 마을 주민들이었다. 권선문에는 500원, 1000원 시주자 명단이 빼곡히 적혔다. 주지 스님만 권선에 나선 것이 아니었다. ‘널매’로 불리는 노보살은 혼자 권선책을 들고 300가구를 돌았다.

주민들 시주로 마련한 모래와 기와 등 자재는 이번에도 주민들이 나서 산 위로 옮겼다. 또 ‘특공대’가 또 앞장섰다. 기와와 달리 목재는 사람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위험했다. 길이가 긴 대들보는 여러 명이 힘을 합쳐야 하는데 길이 좁고 가팔라 한꺼번에 들기가 불가능했다. 놓쳐서 구르면 밑에 있는 사람이 다칠 수 있고, 대들보가 훼손될 위험성도 있었다. 손으로 들 수 없어서 목에 올려서 운반했다.

상하지 않도록 가마니로 감싼 대들보를 하나 올리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강을 건너는 일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물이 어는 겨울을 빼면 작은 나룻배에 싣고 건너야 하는데 사공이 일이 있어 가버리면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사공을 기다리다 못해 직접 배를 젓다 물살에 떠밀려 가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스님은 낮에는 불사에 매달리고 저녁에는 기도했다. 신도들은 “밥만 먹고 나면 땅을 팠다”고 회고했다. 자재를 올리는 데 만 1년 6개월이 걸렸다. 3년 뒤 요사채 불사가 마무리됐다. 산 아래였다면 6개월도 걸리지 않았을 공사였다. 스님이 부임한 지 7년 만이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가운데 3칸 툇마루로 된 팔작지붕 건물에 스님은 선불장(禪佛場)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선불장 불사 뒤 2년간 고생하며 불사금을 모아 유리보전 옆에 탑을 세웠다. 신도들이 향로와 탑 주변을 에워싸는 난간을 보시했다. 무게 600kg에 이르는 향로는 1992년 부처님오신날 200여 명의 신도가 힘을 합쳐 강에서 산 위까지 끌어올렸다. 초파일 하루를 향로를 끌어올리는 운력으로 보냈다. 함께 고생한 뒤 청량사를 찾는 신도가 더 늘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눈앞에 실현되자 신도가 늘어나고 관(官)에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주지 스님과 신도들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 생겼고 함께 해냈다는 일체감으로 더욱 단단하게 결속했다.

그 힘은 다시 더 힘들고 어려운 불사를 추진하는 원동력이 됐다. 강에서 청량사에 이르는 계곡을 따라 길을 놓고 법당 앞 절벽 아래 축대를 쌓아 공간을 넓히는 대공사를 시작했다. 마침 봉화군에서 청량사로 건너오는 강에 다리를 세우고 길을 닦아 대규모 토목공사를 펼칠 여건이 마련됐다. 길 닦을 때 나온 돌로 축대를 쌓기로 했다. 돌은 주민들이 옮길 수 없었다. 영주에서 전문 인부를 불렀다. 현장에 나온 인부들은 가파른 길을 보고는 모두 도망갔다. 다시 청량산 지형에 밝은 주민들이 나섰고, 경운기가 동원됐다. 산길을 올라가다 전복되기 일쑤였다. 스님도 지게로 침목을 지고 날랐다. 그런 와중에 도립공원 훼손은 불법이어서 주지 스님이 수차례 조사를 받았고, 묵인해준 공무원은 처벌받았다.

축대가 완성되자 허공이 넓은 공간으로 변했다. 새로 생긴 공간에 신도들이 범종루를 지었다. 스님은 신도들이 쉴 수 있는 찻집을 겸한 휴식처를 만들어 화답했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라는 제목이 붙은 안심당(安心堂)이다. 1998년, 스님이 부임한 지 14년 만이었다. 범종루 낙성식에 1만 등이 불을 밝혔다. 신도들은 서로 위로하고 축하했다. 그 날은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도망가지 않았나 살피러 2시간을 걸어 올라와 사탕을 주고 갔던 근일 스님이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택시를 타고 왔다.

불사가 완성되고 가람이 면모를 갖추자 청량사로 전국의 불자와 관광객들이 밀려들었다. 산을 끼고 흐르는 맑은 계곡과 깊은 산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청량사를 찾은 관람객들은 탄성을 감추지 못했다. 청량사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경상북도가 나서 진입도로를 포장하고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을 설치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1년의 산사음악회는 사찰과 주민이 함께 한 불사가 마무리됐음을 세상에 알리는 선포식이었다. 유학자들에 의해 스러졌던 가람, 지역주민들조차 찾지 않던 궁벽한 암자가 젊은 주지 스님의 원력과 주민들에 의해 다시 일어났음을 세상에 알리는 축제였다. 봉우리마다 숨어 있던 암자에서 흘러나온 스님들 독경 소리가 청량산을 울렸던 그때가 다시 왔음을 고하는 성스러운 의식이었다.

청량사 법당 유리보전 앞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소나무에는 과거 청량사 불사에 관한 전설이 서려 있다. 원효대사가 청량사 창건 불사를 시작했을 때, 사하촌(寺下村)에서 논을 가는 뿔 셋 달린 소를 보았다. 그 소는 농부 말을 듣지 않아 골치였다. 원효 스님이 소를 시주받아 절에 데려왔더니 순순히 말을 잘 들었다. 원효대사는 소를 청량사 불사에 쓰일 목재를 나르는 데 부렸다. 신명을 다해 일을 도운 소는 준공을 하루 앞두고 생명을 다했다. 소를 묻은 자리에 가지가 셋인 소나무가 자라 사람들은 삼각우송(三角牛松)이라 불렀다.

전해오는 이 이야기는 전설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원효 스님의 소는 청량사 불사를 함께한 신도들이 되었다. 이들은 500원, 1000원씩 권선문을 써내려갔으며 기와 12장을 머리에 이고 산을 올랐고, 강에서 물을 길어 공양을 짓고 아이를 절에 맡기고 남편과 아내가 모래를 지고 이고 날랐다. 지금도 아침밥 먹고 청량사에 와서 종일 기도하고 절 일 돕다 집으로 간다. 신도들은 왜 이토록 절 일에 열성적일까? 특공대로 불리는 이들은 똑같은 말을 했다. “지현 스님은 아이들에게도 절대 말을 놓지 않고 공양도 늘 우리와 함께하신다. 이렇게 따뜻하고 신도들을 잘 배려하는 스님은 아직 보지 못했다.” 청량사가 외형을 넓히고 치장하는 데만 열중했다면 신도들이 그토록 열성적으로 절 일을 돕지 않았을 것이다.

   

신도들의 말대로 지현 스님은 주민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 아이들을 찾아 마을로 가서 함께 놀았다. 청량사의 진짜 불사는 건물이 아니고 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부임하자 마자 아이들을 찾아 마을로 간 스님은 길이 놓이자 사찰로 아이들을 불렀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부모가 됐다. 다시 그 자식이 청량사 어린이회에 가입하고 학생회에 들었다. 1980~90년대 불사를 함께하고 경운기를 타고 다녔던 초창기 아이들은 이제 40대가 넘은 부모가 되었다. 이들은 청년회를 조직했다. 서울에서 사는 20여 명의 당시 ‘아이들’은 초파일이면 200만 원을 모아 장학금으로 낸다. 어린이날에는 청량사의 현재 어린이들을 서울에 초청해 점심을 먹이고 구경을 시킨 뒤 봉화로 내려보낸다. 청년회장을 맡고 있는 권은희 씨는 ‘생각하는 박물관’을 만들어 아이들 교육을 위한 박물관을 운영한다. 찬불가를 작곡하는 작곡가도 있고 사찰 합창단 지휘자도 있다. 다들 사회의 어엿한 일원으로 자랐다. 그리고 이들은 여전히 청량사를 찾는다. 산사음악회가 열리면 봉사를 위해 찾는다.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돕기 위해 온다.

스님은 부임 2년 뒤 영주에서 어린이 법회를 처음 열었다. 그 법회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매주 일요일 청량사에서 초등학생 40명, 중학생 20명이 법회에 참석한다. 영주, 안동에서도 온다. 한 번도 빠지지 않은 아이가 4명이다. 안동에서는 엄마가 차로 데려오고 영주에서는 승합차로 실어온다. 빨리 청량사에 가고 싶어 차를 기다리지 못하고 버스를 타고 와서 강에서부터 뛰어 올라오는 아이도 있다. 1부 시간에는 법회를 보고 2부에서는 3개 반으로 나누어 미술 놀이 등을 한다. 여름에는 현장학습도 간다. 5명의 스님이 법회를 나눠 맡고 있다.

12월, 청량사 신도들은 송년법회를 연다. 5년째다. 1986년 청량사 어린이들을 위한 송년법회가 그 기원이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 아이들은 들떴다. 떡과 과자를 주는 데다 친구들이 전부 교회를 가니 절에 나오는 아이들마저 싱숭생숭해졌다. 스님은 아이들을 위해서 12월 24일 밤 ‘아기 예수 탄생 축하 촛불 대잔치’를 열었다. 스님이 예수 탄생 축하 잔치를 연다고 나이 많은 신도들에게 쫓겨날 뻔했다. 그 뒤 모두가 자랑하는 행사로 자리 잡았지만 처음에는 힘들었다.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5년 전부터 신도회 전체 송년법회로 자리 잡았다. 영주 청소년체육관에 400여 명이 모인다. 초청 가수 공연도 하고 한 해 동안 수고했다며 함께 위로하고 축하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자연스럽게 청년회에 가입한다. 서울 대구 등 외지로 나가는 청년들은 1년에 4번 모인다. 초파일 겨울 방학 여름휴가 산사음악회 때다. 초파일과 산사음악회 때는 50명이 보여 봉사를 한다.

청량사 신도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는 4세이다. 초등학교 6학년까지가 어린이회에 들어간다. 어린이법회 교사를 맡은 대학생의 어머니도 어린이회 교사 출신이다. 어린이회 지도교사가 결혼해 낳은 그 아이가 다시 교사가 된 것이다. 청량사에는 이런 신도가 적지 않다. 어린이회 역사가 30년이 넘은 데다 오랫동안 인연을 놓지 않고 함께해 왔기 때문이다. 지금도 아이들은 주지 스님을 찾는다. 메신저가 발달한 요즘은 지현 스님 휴대전화가 시도 때도 없이 ‘카톡’음이 울린다. 수업하는데 졸려서 혼났다는 사소한 이야기부터 이성 교제, 엄마 아빠와 불화까지 온갖 이야기를 쏟아낸다. 지현 스님이 카톡을 보여줬다. “스님 점심 드셨어요? 전 이제 점심 먹어요.” 따위의 사소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원래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가장 가깝지 않은가.

   

요즘 스님은 종단 업무에다 조계사 주지를 맡아 주말에야 겨우 청량사를 들른다. 그나마 큰 절답게 체계가 잘 갖춰져 있어 누릴 수 있는 기회다. 어쩌다 못 내려가면 아이들이 난리다. 청량사 주지 스님을 비롯해서 사중 스님들이 그 감당을 해야 한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 신도들도 스님을 찾는다. 어른들 역시 20~30년 전에는 청량사 학생이었다. 남편이 마음에 안 든다고 부인이 스님에게 이르면 스님이 남편을 혼낸다. 청량사 학생회에서 만나 결혼하고 스님이 주례를 선 신도들이다. 아이들 따라온 학부모도, 지현 스님보다 나이 든 신도들도 스님에게 이르고 상담하고 별 시답잖은 이야기도 나눈다. 그래서 청량사에는 아침에 와서 절에서 밥 먹고 해가 지면 내려가는 ‘출근 도장’ 찍는 신도들이 많다.

스님도 그 모습이 의아했는데 초등학생 아이가 의문을 풀어주었다. 스님이 학교 앞에서 아이들을 만나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절 어린이회 다니는 아이가 친구와 헤어지며 “우리 집에 간다”며 뛰어갔다. 지현 스님은 조금 전 헤어진 아이를 절에서 만났다. 아이가 말한 우리 집이 청량사였던 것이다. 스님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 아이와 신도들에게 청량사는 집과 같은 곳임을. 스님은 ‘절을 우리 집이라고 부르는 아이가 있어 깜짝 놀랐다. 아이들이 절을 그렇게까지 생각하는구나 하고 감격했다.’고 말했다. 한 반 친구 절반을 데려와 밴드부를 만든 아이도 있다. 중학교에 올라간 아이들은 이제 학생회의 주축이 돼 열심히 활동한다.

아이들이 스님을 친구처럼 친근하게 여기고 우리 집이라고 부르는 데는 지현 스님의 각별한 정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처음 오는 아이 이름을 10분 안에 외우고 이름을 불러주며, 옆에 앉혀 같이 밥 먹고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를 1주일 단위로 유심히 관찰하여 밥은 잘 먹는지, 아이와 잘 노는지, 어떤 성격인지 그 변화를 3~4개월 동안 살핀다. 그 과정을 신상카드로 남긴다. 성격 파악이 끝나면 그에 맞춰 아이를 대한다. 부족한 점이 있으면 사찰에서 채우고 보살피며, 어머니에게도 알린다. 아이와 엄마가 좋아할 수밖에 없다.
장학금도 많고 다양하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20만 원을 장학금으로 준다. 스님이 사준 가방을 메고 다니라며 주는 장학금이다. 아이는 스님이 사준 가방이라며 우쭐해진다. 중학교 가면 30만 원을 준다. 스님이 사준 교복 입고 학교 다니라는 장학금이다. 고등학교는 50만 원이다. 청량사 어린이회, 학생회 출신들로 결성된 청년회원들도 초파일에 장학금을 낸다. 마음나눔신도회는 딸기잼을 만들어 판매한 수익금을 영주 안동의 22개 전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장학금으로 준다. 졸업식 때 1인당 20만 원씩 지급한다.

스님은 “다른 데 쓸 돈 조금 덜 쓰면 아이들한테 투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스님은 또 이렇게 말했다. “초등학교 2학년을 불자로 만들려면 20년을 투자해야 한다. 아이가 자라 대학을 마치고 직장을 잡아 1만 원을 불전함에 넣을 때까지 투자해야 한다. 빨리 결실을 보려 하면 안 된다.” 청량사가 아이들로 넘쳐나는 데는 이처럼 전 사찰 차원의 애정과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지현 스님 말처럼 씨앗도 뿌리지 않았는데 열매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모양새가 대다수 절의 어린이 포교 실상이다. 그러면서 절에 아이가 없다고 한숨 쉰다.

아이들이 절을 찾아오자 아이들을 따라 엄마들이 왔다. 그래서 청량사는 젊다. 30~40대가 주축이다. 서울, 부산 등 대도시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젊은 사찰이다. 청량사 신도는 400명가량이다. 아이들을 따라온 어머니들로 구성된 자모회가 30명, 합창단, 연화회, 마음나눔회 등이 있다. 방생 가는 행사에는 버스 30대가 동원된다. 청량사는 신도뿐만 아니라 지역주민들을 위해 끝없이 헌신한다. 영주에 문화센터를 설립해 아이들과 지역주민을 위해 어학강좌, 기타 강습 등 문화교실을 연다. 포교당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문화센터다. 갈수록 늘어나는 노인들을 위한 출장법회도 한 달에 한 번 연다. 1980년대는 아이들을 위해 마을 출장을 나섰는데, 이제는 몸이 불편해 절에 오지 못하는 어르신들을 위해 마을에 간다. 100명까지 이르렀던 노인법회 참가자 수가 갈수록 줄어들어 안타깝다고 스님은 한숨 쉬었다.

지역민들을 위한 시민운동도 열심히 참여한다. 신부, 목사들과 함께 영주 주민자치연대, 고향 지키기 운동, 청량산 문화연대, 농사 판로 개척,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놋다리밟기 재현 등 지역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발 벗고 나선다.

젊은 신도, 어린이 청소년 법회, 문화교실, 수백 명에 이르는 신도들은 시골 산중 사찰의 일반적인 모습과 거리가 멀다. 지현 스님은 “환경이나 여건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원력이 있어야 한다. 사찰은 그 지역을 책임져야 한다. 그런 책임감을 갖고 원력을 세우면 사찰이 처한 여건은 문제가 안 된다”며 ‘신도가 없다, 절에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세태를 꼬집었다.

청량사는 꿈이 있다. 화목하고 평화로운 가족 만들기 전도사가 되기를 희망한다. 청량사에는 30여 년 전부터 함께 모래를 지고 기와를 이고 날랐던, 이제는 노년이 된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가 일할 때 스님 장삼에 똥을 싸며 놀았던, 이제는 학부형이 된 아빠 엄마, 스님이 준 돈으로 가방을 메고 교복을 입고 다니는 손자가 함께 있다. 지현 스님은 “할아버지 할머니 며느리 손자 3대가 함께 노래하는 합창단 결성이 꿈이다. 열 가족만 모이면 합창단을 만들 수 있다. 이들이 한목소리로 노래하며 화목한 가정 가꾸기 캠페인을 열고 싶다. 스님 법문 수백번보다 훨씬 낫다.”고 말했다. 가족이 모이는 스님의 꿈은 또 있다. 청량사에서 재배하는 배추를 도시 신도들이 와서 함께 김장해서 가져가면 좋겠다는 것이다. “100가족만 동참하면 농촌과 도시가 함께하는 좋은 사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청량사는 한국불교의 사찰이 해야 할 바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사찰이 지향해야 할 길은 무엇일까?

첫째, 어린이를 위한 사찰이 되어야 한다. 어린이가 마음 놓고 뛰어놀고 찾아올 수 있는 친근한 사찰이어야 한다. 게임이나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 어린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중요하다. 벽을 허물고 친근하게 대해야 한다. 사소한 이야기도 털어놓을 수 있는 믿음과 애정을 보여야 한다. 관심과 사랑으로 대하면 아이들은 사찰을 우리 집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청량사는 보여주었다.

둘째, 지역민과 함께하는 사찰이다. 지현 스님은 “신도나 지역주민이 객이 아니라 그들이 주인임을 스스로 느끼도록 배려하고 함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불사를 일궈낸 주인공은 주민들이었다. 큰 화주도 없었고 부유한 지역도 아니었다. 500원, 1,000원이 모였고, 그들은 몸을 아끼지 않았다. 주지 스님이 주민들 속으로 들어가 함께하자 모두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제 일처럼 열심히 했다.

마지막으로 종교인으로서 품위를 지키고 자기관리를 엄격하게 해야 한다. 지현 스님은 신도들과 함께하지만 자신을 잃지는 않는다. 친근하게 다가가지만 원칙을 버리지 않는다. 어려운 불사를 스스로 일궈내 지역사회에 큰 기여를 했지만 단 한 번도 불사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다. 공무원들이 알아서 먼저 챙기고 예산을 배정했다. 자치단체도 청량사 일을 제 일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스님은 “한 번이라도 먼저 손을 벌렸으면 계속 끌려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행자로서 늘 위의를 잃지 않고 계율에 철저했으며 수행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도들이 존경하고 다가왔다. 궂은일을 솔선수범했으며 신도들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낮에는 불사에 매진하고 밤에는 기도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후회도 하지 않았다. 불사를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어기는 바람에 큰 차질을 보고 고생하면서도 “덕분에 불사를 완성했으니 오히려 고맙다”고 웃었다. 이러한 종교인의 품성이 청량사를 한국불교에 희망을 주는 절로 만든 원천이다. ■

 

박부영 / 〈불교신문〉 상임논설위원. 한국외대 서반아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불교신문〉 기자로 오랜 기간 근무하며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불교풍속고금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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