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머니가 언제부터 절에 다니셨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언제나 절에 다니셨는데, 곰곰 생각하면 그렇다고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 신자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습니다. 어머니가 불경을 읽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부처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기억 속의 어머니는 절에 다니셨을 뿐입니다. 어머니는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길 때면 그때마다 강원도 저편 어느 절에 다녀오시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어머니가 다니는 그 절 이름을 한 번도 물어본 적은 없습니다. 물론 스님의 이름을 물어본 적도 없습니다. 어머니는 정말 불교를 믿었던 걸까요?

동지 팥죽은 뭐 흑파서 만들었는 줄 알아/ 팥죽 한 그릇에 오천원씩 내놔 /이제 우리 절도 지금 저 앞에 종루를 새로 지었듯이/ 일주문도 지어야하고 할 공사가 많아/ 기껏 일 년에 한두 번 와서/ 천 원짜리 한 장 놓고 쪼르르 내려가니 복이 와?/ 그 다 달아나는 복이야 천만 원씩 내고 빌어 봐/ 소원이 안 이루어지나 관상이 달라져/ 왕비도 되고 뭣도 되지/ 아줌마 어디 백만 원 내고 빈 적 있어/ 시주는 천 원 하고 복은 백만 원어치 빌고, 에이!// ‘산 속에 성철 스님 계시면 암자로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아아 마이크 시험 중’
— 이동재 〈어느 절의 법회〉

어쩌면 이동재 시인의 시 〈어느 절의 법회〉야말로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와 어머니가 다니던 절의 풍경일지도 모릅니다. 절에 다녀오신 어머니 손에는 늘 부적이 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 속에 등장하는 땡중처럼 시 속에 등장하는 아줌마처럼 내 기억 속의 어머니와 어머니가 다니는 절은 그렇게 미신과 불교 사이에 어정쩡하게 기우뚱한 모습으로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나이를 먹을수록 그만큼 어머니와 어머니의 절과 어머니의 스님은 점점 더 불교에서 미신 쪽으로 기울어져 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로 놀라운 건 그다음의 일입니다.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남편이 되고 두 딸의 아버지가 되고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내 왼어깨에 있는 절이다/ 절벽에 지은 절이라서 탑도 불전도 없다/ 눈코 문드러진 마애불뿐이다/ 귀하지 않은 아들 어디 있겠느냐만/ 엄니는 줄 한 번 더 섰단다/ 공짜라기에 예방주사를 두 번이나 맞혔단다/ 그게 덧나서 요 모양 요 꼴이 됐다고/ 등목해줄 때마다 혀를 차신다/ 보건소장이 아주 좋은 거라 해서/ 한 번 더 맞히려 했는데 세 번째는 들켰단다/ 크는 흉터는 부처님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이것 때문에 가방끈도 소총 멜빵도/ 흘러내리지 않아 좋았다 말씀드려도/ 자식 몸 버려놓은 무식한 어미를 용서하란다/ 인연이란 게 본래 끈 아닌가/ 내 왼어깨엔 끈이란 끈/ 잘 건사해주는 불주사라는 절터가 있다/ 어려서부터 난 누군가의 오른쪽에서만 잔다/ 하면 내 인연들은 법당 마당 탑신이 아니겠는가/ 내 왼어깨엔 엄니가 지어주신/ 불주사가 있다 손들고 나서려고만 하면/ 물구나무서버리는 마애불이 산다
― 이정록 〈불주사〉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동재 시인의 시 〈어느 절의 법회〉에 등장하는 그 아줌마가 내 어머니였듯이, 이정록 시인의 시 〈불주사〉에 나오는 엄니 또한 바로 내 어머니였구나. 그 둘의 모습이 실은 다르지 않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저절로 한 편의 시가 써졌는데, 그렇게 나온 졸시가 바로 〈미신을 믿는 게 아니지라〉입니다.

절에 다니시는 우리 엄니, 봄날만 되면 부적을 받아 오신다 안하요

그 스님이 보통 영험한 게 아녀 죽을 사람 여럿 살렸자녀 흘리지 않게 지갑 깊숙이 넣고 댕겨라

툭하면 부적을 가져다가 내 손에 꼬옥 쥐어주시는데, 대학에 붙는다는 부적, 아들 낳는다는 부적, 돈 많이 번다는 부적, 부적이 많기도 많지라

내도 알지라 미신이지라

미신을 믿는 게 아니라 엄니를 믿는 거지라
― 졸시 〈미신을 믿는 게
아니지라〉

목불(木佛)을 도끼로 쪼개 불쏘시개로 쓴 불가의 일화를 아시는지요.

중국의 단하 선사가 겨울밤, 병자(病者)를 데리고 어느 절을 찾습니다. 주지 스님이 방을 하나 내어주긴 했는데 냉방입니다. 주지 스님 방은 절절 끓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단하 선사는 법당 안에 있는 목불을 마당으로 가져 나와서는 도끼로 쪼개서 아궁이에 불을 지핍니다.

이 광경을 본 주지는 난리가 났지요. “세상에 부처님을 땔감으로 쓰다니 이런 땡중XX를 보겠나!” 그러자 선사는 답합니다. “부처님을 땔감으로 쓴 게 아니고 부처님 사리를 찾으려고 화장(火葬)을 한 거지요.” 주지는 화가 나서 선사의 멱살을 잡았겠지요. “이 미친 땡중 XX! 나무에서 어떻게 사리가 나온단 말이냐?” 그러자 선사가 웃으며 한 마디 던집니다. “그러면 부처가 아니네. 나무가 맞네!”

누가 진짜 스님이고 누가 땡중일까요? 진짜 부처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 엄니가 믿은 게 미신일까요, 부처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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