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종교인 전수조사에서 무종교인이 급증하고 불교인의 수가 줄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자 숨죽었던 포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오랫동안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강의를 하고 있는 나로서는 스피치 교육과 불가분의 관계인 포교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그동안 다가온 스피치 교육의 교육생 대다수는 타 종교인들이었다.

“돌아가면서 기도를 하는데 눈물 나게 감동적인 음성을 배우고 싶어요.” “제가 성경책을 낭독하는 순서인데 신심 나는 낭독 방법을 가르쳐주세요.” 등등, 자기의 원하는 바를 꼭 집어서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요구에 맞추는 교육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불교는?’ 하는 생각이 꽉 차올랐다.

포교 스피치, 전법 스피치를 표방하고 재가불자들을 위해, 강원의 학승 스님들을 위해 강의를 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불교도 이젠 입을 열고 적극적으로 포교에 임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부처님도 성도 후 45년간 맨발로 다니면서 하신 일은 오로지 전법이었다. 이론, 글자에 매몰되는 것도 위험하고 참선만 주장하는 것도 대승보살도에서는 균형을 잃을 수 있다. 말은 글과 달라 휘발성이 강해 전해 내려가는 데에 한계는 있다. 그러나 대중을 움직이고 불교의 신심을 고양시키는 일, 생활 속에서 다져가는 끈끈한 접착력은 사람과 사람 간의 커뮤니케이션에 의해서다.

부처님 말씀을 전한다는 것에 부담이 된다는 사람이 많다. 많이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떠드는 것이 외람될 것 같다고 한다. 불교에 대한 턱이 높으면 포교는 힘들다. 커피 마시면서, 수다 떨면서 건네지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에 대한 관심도 생겨나고, 나름대로 정리도 하게 된다. 포교 스피치 훈련으로 다져지게 되면 포교에 대한 대승보살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세상의 반쯤은 할 말은 있으되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고, 나머지 반은 할 말도 없으면서 계속 지껄이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 로버트 프로스트

불교에서 구업에 대한 강조나 묵언, 침묵, 참선 등의 분위기와 성리학의 권위적이고 중압적인 현실 속에서 말에 대한 오해는 깊다. 그러나 부처님은 오로지 포교(전법) 스피치로 불교를 펼쳐나가셨다.

제자들은 한자리에 모이면 두 가지 일에만 힘써야 한다. 하나는 법을 토론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혜로운 이의 침묵이다. 말할 때는 말하고 침묵할 때는 침묵할 줄 알아야 마음의 평온을 얻을 것이고 해탈의 시기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 증일아함

말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말로 인해 역사를 만들어왔고 사람과의 인연도 말로써 이루어졌다. 선문답도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며, 불립문자도 문자에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지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원효 스님도 《무량수경종요》에서 “관념적으로 말하지 말라. 구체적으로 말하라. 말로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말로 해줘야 한다.”라고 했다.

이제 이 시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해졌다. 21세기 한국불교의 포교는 부처님 닮기 프로젝트! 부처님의 지혜로운 스피치 방법을 배워야 한다. 21세기 IT, 세계화 시대에 종교는 바람에 실려 전파되기에 적합하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는 세상이다. 포교에 관한 한 시대적 발판이 만들어졌고 사찰마다 불교대학에서 공부하는 불자들도 많다. 이제 불자들은 자기가 배운 만큼, 들은 만큼, 아는 만큼, 느낀 만큼, 좋은 만큼, 그만큼씩부터 적극적으로 입을 열기 시작하면 된다.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 이 둘을 아우르는 것이 수행이고 복 짓는 일이며 최고의 기도다. 공덕에서도 최상은 전법이다. 보살행에서도 최고는 포교다. 기도에서도 남을 위한 기도가 최상이듯 바라밀행을 하는 이 모든 것을 포교에서 정리할 수 있다. 우리는 대승보살도를 행하는 지름길을 포교에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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