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 겨우 초등학교를 나와 그저 나무나 하고 풀 베던 산골 머슴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공부의 열망이 있어서 16세 때 고향을 떠나 인천으로 공부하러 갔다. 나는 젖소 대여섯 마리 기르는 작은 목장에서 기식하며 아침에는 신문을 배달하고 학교에 다녔다. 학교라야 인가도 못 받은 공민학교였다. 나는 야간에 고등공민학교 상과(商科)에서 부기를 배웠다.

어느 날 나는 허석이라는 친구와 함께 월미도에 간 적이 있다. 거기서 한 스님을 만났는데 그 스님은 우리에게 작은 책자를 주었다. 한문으로 된 《반야심경》이었다. 뒤쪽에 우리말로 풀이한 글이 실려 있었는데, 지금 기억으로는 일엽 스님(1896~1971)이 펴낸 책이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책인지도 몰랐다. 그 스님이 말하기를 이것을 읽으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니 한번 읽어보라 했다. 더듬더듬 읽었더니 그 스님이 “너 한자를 잘 아는구나.” 하면서 뜻도 물었다. 뜻은 모르겠다 했더니 그 스님은 갯바위에 앉아서 우리에게 그 뜻을 일러주었다.

그 스님과 헤어지고 난 후 고향에 돌아와서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부지깽이로 부뚜막을 두드려가며 《반야심경》을 외웠다. 그런 나를 본 모친이 “꼭 대사 같은 짓을 하는구나.” 하고 기특해했다. 나는 모친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 ‘대사가 되기 위해’ 석 달 후, 해인사로 갔다. 행자 노릇을 시작했는데 무슨 인연인지 한군데 오래 있지 못하고 삼남의 절들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1년을 떠돌다가 어느 가을날 단풍이 떨어질 무렵, 해인사 용탑선원으로 갔다. 거기에는 평생 나의 스승이 된 고암 스님이 계셨다. 스님은 행자인 나를 보시더니 ‘오래된 수좌 같다’고 했다. 절을 하자 “어디에서 왔는가.” 하고 물었다. “범어사에서 오는 길입니다.” 하니 “너는 지금 가야산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하고 알쏭달쏭한 질문을 했다. “가야산 안에 있습니다.” 하니 스님은 “가야산은 안과 밖이 없다.” 하시며 물러가라 했다. 그날부터 나는 스님의 시자가 되어 아궁이에 불 지피고 스님 방 청소, 도량 비질, 또 때로는 산에 가서 죽은 나무를 가져다 장작 패는 일을 했다.

하루는 스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이름을 하나 지어 주었다. ‘성춘(性春)’이라는 이름이었다. 스님에게 “앞으로는 제가 박성춘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단호하게 “너는 성(姓)이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어찌 성이 없습니까?” “부처는 성이 없기 때문이다.” “성이 없으면 부처님은 어디에서 태어나셨습니까?” “태어나지 않는다.” 나는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껌뻑거렸다. 스님은 다시 가르쳐주셨다. “부처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요?” “네가 마음만 먹으면 항상 네 안에서 환생하신다.”

천지를 분간 못 하던 나는 무엇이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스님에게 꼬박꼬박 물었는데 스님은 나를 귀엽게 여기셨던지 귀찮아하지 않고 대답해주셨다. 그렇지만 ‘내 안에서 부처님이 환생한다’는 말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함께 살던 스님들에게 물어봤지만 언제 어떻게 환생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나는 아무리 살펴봐도 내 안에서 환생하는 부처를 보지 못해 무척 답답해했는데, 이제 나이 70이 되고서야 가끔은 내 안에서 부처님이 환생하기도 하고 또 열반하기도 하는 것이 보인다.
1968년이던가 법주사에 주석하시던 금오 스님께서 열반해서 당시 종정이던 스님을 모시고 갔던 일이 있다. 해인사에서 새벽같이 일심여객 버스를 타고 대구를 거쳐, 기차로 대전으로 가서 다시 버스로 법주사로 가는 노정인데 온종일 걸렸다. 그때 처음 특급열차를 타보았다. 열차에서 콜라 두 병과 단팥빵 네 개를 샀다. 그때 스님은 뜻밖에 이렇게 물었다.
“이 빵은 누가 만든 것이냐?” “저는 모릅니다. 스님은 아십니까?” “내가 묻는 말에만 답해라. 이 빵은 누구 것이냐?” 나는 한참 궁리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스님께서 제게 돈을 주셨으니 스님 것입니다.” “틀렸다.” “그럼 제 것입니다.” “틀렸다.” “그럼 누구 것입니까?” “너는 이미 죽비 30방이다.” “죽비가 지금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스님은 “내가 지금 가르쳐주겠다. 아야야 해라.” 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스님은 단팥빵 하나를 놓고 어린 상좌를 가르치려 한 것이었다. 벌써 50년도 넘은 일인데 생각할수록 고맙고 감사하다.
스님을 모시던 때의 기억 중 또 하나는 1985년 호주 시드니에 있을 때 일이다. 나는 무슨 신심이 동했는지 뜻밖에 그곳에서 불광사를 창립하고 건물을 빌려 전법 활동을 했다. 그 무렵 스님은 하와이 대원사에 계셨다. 호주 시드니에 한번 다녀가시면 어떻겠는가 하고 여쭈니 흔쾌히 오셔서 반년을 계셨다. 그때 스님이 분부하기를 “여기서 보살계를 한번 설해야겠네.” 하는 것이었다. 당시 시드니 전역에는 한인이라고 해야 겨우 5천여 명 될까 말까였다. 그나마 여기저기 흩어져 살아서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니 불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렇지만 한둘이면 어떠랴 싶어 법회를 준비했더니 소문이 금세 나서 300여 명이나 접수하고 보살계에 참여했다.

법회가 끝나고 하루는 스님을 모시고 시드니에서 유명한 해안 절벽을 구경하러 갔다. 그 절벽은 〈나바론〉인가 하는 영화를 찍었다는 곳인데, 깎아지른 절벽이 말 그대로 천 길 낭떠러지였다. 그 절벽에 서서 스님은 나에게 다시 이렇게 물었다.

“자네 생사는 저 절벽과 같은가 다른가?” 나는 금방 답이 안 나와 머뭇거리자 또 말씀하시기를 “확연하다면 더 물을 것 없지만 저 절벽과 같다면 진일보하여야 하네.” 했다. 그 말끝에 내가 “이제 생각났습니다.” 하니 “틀렸다.”고 했다. “무엇이 틀렸단 말씀인지요?” “생각으로 답하는 것이 아닐세.”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정말이지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 뒤 스님은 고국으로 돌아가셨다. 몇 해가 지나 사형이 급한 전갈을 보내왔다. 스님이 위독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급히 돌아와 임종을 지켰다. 그게 꼭 30년 전 일이다.

그렇다. 생사와 열반, 삶과 죽음, 윤회와 인과, 그 어떤 것도 생각으로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앞이 툭 터져서 다 보여야 하는 일이 그 일이다. 수행이란 모든 걸 놓아버리고 쉬어감이라고 할 수 있다. 돈오면 어떻고 점오면 어떤가. 깨달음이 아니라고 해도 처음부터 자신에게 거짓이 없다면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아닐까. 나의 스승 고암 스님이 만나기만 하면 일러주던 가르침의 낙처(落處)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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