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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사태로 본 불교윤리의 대사회적 대응전략 재고
허남결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
[26호] 2006년 03월 10일 (금) 허남결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

먼저 하고 싶은 말

지난 연말부터 온 나라와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서울대 황우석 교수의 ‘논문조작사건’은 이제 검찰 수사가 마무리되어 감에 따라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매듭을 짓게 될 전망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검찰의 수사결과가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발표 내용을 사실관계 측면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줄 수 있을지언정 2004년도와 2005년도 논문의 과학적 의미, 즉 데이터 조작 혐의가 근본적으로 뒤집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를 알기 쉽게 요약하면 황박사가 주장하는 이른바 ‘환자맞춤형 체세포복제배아’와 이를 뒷받침하는 ‘원천기술’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가 조작을 지시하고 이를 누가 주도적으로 수행했으며 또한 연구비를 어떻게 집행했는지는 그야말로 부차적인 문제이다.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뒷받침할 일차적인 근거는 바로 이와 같은 과학적 진실성과 연구용 난자의 공급을 둘러싼 도덕성 문제이지 결코 개인의 성품이나 말솜씨, 그리고 그가 신심 깊은 불자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교계 일각의 황우석 지지자들은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애써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정확한 사실판단 보다는 성급한 가치판단의 포로가 되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불교계에서는 지난 2월 6일 출범한 ‘황우석 연구 후원을 위한 범불교 국민연대(범불교연대)’를 중심으로 황교수팀의 복제배아 연구 재개와 이를 위한 연구 환경을 조성할 목적으로 100억 기금 모으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 와중에 각종 음모론이 등장하고 황박사를 지지하는 촛불 시위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가 하면 황교수의 연구실 복귀를 외치며 분신자살을 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뿐만 아니라 서울대의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한 노정혜 연구처장이 대낮에 학교 안에서 폭행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까지 일어나 개인적으로는 정말 ‘이것은 아닌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불교윤리의 전통에서 본다면 생명공학기술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행위는 탐욕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요익중생의 결과를 낳을 것인지도 엄밀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해당 연구자들은 한사코 부인하지만 여기에는 이미 자본주의적 상업성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자본주의사회에서 연구 후원자와 연구자 사이의 관계는 서로 이익을 염두에 둔 거래를 할 수 밖에 없는 처지라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분야의 첨단 연구주제들은 매스컴의 낙관적인 전망과 화려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아직 이렇다 할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 반면에 난자 제공자인 여성의 인권 침해라는 지적으로부터 우생학 프로그램의 부활 가능성에 이르기까지 이 기술에 대한 전 인류적 불안은 점점 더 증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많은 선진 국가들이 복제배아줄기세포보다는 냉동잔여배아를 이용한 줄기세포연구나 성체줄기세포 분야에 연구역량을 집중하는 것은 생명윤리 문제의 발생이라는 본질적인 측면 외에도 연구윤리의 위반 가능성이라는 방법론적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줄기세포치료의 현실화는 성체줄기세포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차 인류의 복지에 기여할 수많은 과학기술 가운데서도 유독 황우석 박사가 주도하고 있던 복제배아줄기세포 연구에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 듯한 불교계 일부의 분위기는 어딘가 균형감각을 잃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더욱이 성체줄기세포 분야는 가톨릭교회가 주도하고 있는 만큼 불교계는 이와 다른 줄기세포분야이자 난치병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연구되는 복제배아줄기세포를 찬성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데에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만다. 오히려 전자가 난치병 치료를 목적으로 개발되어온 기술인 반면, 후자는 동물의 품종개량, 즉 우생학적 수요에 의해 발전되어 온 기술이라는 과학적 사실에는 눈감고 있거나 아예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범불교연대의 출범 당일 공동상임대표라는 분이 “과연 황박사가 불자가 아니라 가톨릭 신자였다면 하루아침에 사기꾼으로 매도당했겠는가? …성체줄기세포는 옳고 환자 맞춤형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안 된다는 김수환 추기경과 가톨릭계의 주장은 납득할 수 없다. … (가톨릭의 잣대에 의한) 생명윤리를 주장하기 위해 김수환 추기경은 값싼 눈물까지 흘렸다. … 일제 당시 일본군 장교였던 김 추기경이 과연 이 땅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가? … 불자인 심산 황우석 박사가 말했듯이 환자 맞춤형 줄기세포 연구는 대한민국의 독보적 기술이기에 2,000만 불자와 국민들은 원천기술의 재현을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2) 라고 말했다는 교계 신문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윤리적으로 세련되지 못한 다분히 감정적인 대응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는 걱정이 앞선다.

이즈음 공교롭게도 천주교 평신도협의회 측에서 황교수는 본래 ‘안드레아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는 상황이어서 불교계의 모양새가 여러 모로 우습게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동안 매스컴이 일방적으로 주입시켜 온 연구 결과의 엄청난 부가가치와 참된 불자 과학자라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주관적이고 역-종교편향적인 가치판단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과학과 윤리는 종교와 이념을 떠나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보편가치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거듭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이번 황교수 사건의 핵심은 종교적 입장의 차이가 아니라 진리탐구를 생명으로 하는 과학자가 그 절차를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결과를 왜곡했다는 도덕적 범죄행위에 있는 것이다. 거기에 1,600여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불교가 종교적 음모론을 들먹인다면 이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옹색하고 성급하다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이런 때일수록 불교가 각종 사회적 현안들에 대해 좀 더 자신감을 갖고 적극적인 대응 전략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본다.3)

성급한 가치판단에 앞서 정확한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

요즘 우리 사회의 유행어가 되다시피한 ‘줄기세포(stem cell)’란 용어는 아직 특정 조직의 세포로 분화되지 않아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각종 ‘원재료’에 해당하는 세포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포는 호르몬을 분비하지도 못하고 생식 기능에 관여하지도 않으며 다른 세포들과 동일한 능력을 발휘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줄기세포가 없으면 태아가 자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른들은 피부나 혈액 같은 세포가 새롭게 보충되지 않아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하지 못한다. 한편, 장차 줄기세포치료법에 이용될 것으로 기대되는 ‘줄기세포주(stem cell lines)’란 체외 배양에서도 미분화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죽지 않고 증식만 계속하도록 조작된 세포집단을 말한다. 이 줄기세포는 생명 발생 과정의 어떤 단계에 존재하는가에 따라 크게 ‘배아 줄기세포(embryonic stem cell)’와 ‘성체줄기세포(adult stem cell)’로 나뉜다.

자는 수정란의 발생 초기인 배반포기(blastocyst; 수정 후 3~5일이 지나 세포의 수가 100 ~200여개에 이른 시점) 단계에 이를 때까지 존재하는 세포를 말하며, 후자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우리 몸 안의 일부 조직과 장기에 남아 있는 미분화 잔여 줄기세포를 가리킨다. 수술로 잘라낸 간 조직이 복원되거나 상처에 새 살이 돋아나고 때를 밀면서 피부 세포를 벗겨내도 우리 몸의 피부가 줄어들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성체줄기세포의 대체 기능 때문이다.4)

그런데 이 줄기세포를 원하는 조직으로 분화시킨 다음, 이를 손상된 조직에 이식하면 유전성 질환이나 난치병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므로 앞으로 엄청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생명공학산업의 핵심기술로 떠오르게 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나라의 매스컴들이 줄기세포 연구와 관련된 특집 기사를 앞 다투어 보도한 것은 이처럼 무한한 잠재성을 가진 줄기세포 치료법 분야에 서울대의 황우석 교수와 같은 몇몇 생명공학자들의 업적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적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될지도 모를 벅찬 감동을 약속하고 있는 줄기세포치료법의 현주소는 기대와는 달리 그렇게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한 사실판단이다. 왜냐하면 줄기세포치료법이 임상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예컨대, 성체줄기세포 분야는 줄기세포의 양을 좀 더 많이, 그리고 순도를 더욱 높이는 기술이 시급하게 요구되며 배아줄기세포의 경우에는 치료의 목적에 맞게 원하는 세포로 분화시키는 기술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필요한 인간의 기술수준은 아직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불교계를 포함한 일부 국민들의 기대감은 과학적 사실을 간과한 채 지나치게 앞서 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미리 흥분하지 않아도 앞으로 얼마든지 박수를 보낼 기회가 있을 것 같은데도 말이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현재 불교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생명의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기(불살생계) 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이타행의 관점(요익중생계)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런 흐름에 반대하며 오히려 불살생의 전통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지계정신이야말로 역설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배려할 수 있는 다른 의학적인 대안 모색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불교적 상식으로 볼 때도 불살생계야말로 불교윤리의 기본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계목이 아니겠는가? 엄격하게 말하자면 불살생계가 전제되지 않은 대승보살도의 이타행은 궤변이거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선한 ‘동기(motive)’에서 이루어진 행위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대상의 죽음을 직접 ‘의도(intent)’한 행위는 불교적으로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바라이죄를 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5)

계율과 불교윤리에 대한 불자들의 인식전환이 시급하다

설사 그와 같은 기술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복제배아줄기세포 연구는 불교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비판의 여지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불교윤리의 핵심은 불살생계, 즉 생명존중사상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배아의 복제와 이를 통해 줄기세포를 추출하는데 윤리적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흔히 그것의 치료 목적을 사회적 이타행에 비유하며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환자의 체세포핵이식 방법을 통해 복제된 배아는 선천성 유전질환자들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유전질환자로부터 복제된 배아 또한 유전적 결함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후천성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이식된 체세포 핵을 받아들여 배양기 역할을 하는 난자 제공자의 세포질에서 유래할지도 모를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재로서는 인간배아의 생명을 파괴하면서까지 굳이 배아복제줄기세포연구를 고집할 이유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국민들은 마치 복제배아줄기세포만이 미래 의학의 전부인 것처럼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줄기세포치료법은 성체줄기세포를 이용한 방법이다. 이것은 임상적으로 이미 치료효과를 검증받고 있는 단계이다.

대표적인 것이 골수이식을 통해 백혈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물론 아직 성체줄기세포로 치료할 수 있는 질환은 한정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리 몸의 거의 모든 조직과 장기에는 미분화 줄기세포가 잔존하고 있으며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어떤 계통으로든지 분화가 가능하다는 새로운 정보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잠재적 생명이자 가능태인 배아의 죽음을 전제하는 복제배아줄기세포 치료법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 또한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논문에 사용된 데이터를 조작함으로써 얻은 가공의 허위 기술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상태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거의 같은 효과를 유발하면서도 불교적 의미의 생명을 파괴하지 않을 과학적 대안을 모색해야 할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종교나 윤리는 모든 측면에서 과학보다 포괄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불교는 지금부터라도 전체가 아니라 단지 그 일부에 불과한 생명공학기술의 발달에 일희일비하며 섣부른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불교야말로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생명을 중시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보다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종교적 이미지를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 대한 불교계 전체의 대사회적 감각과 인식전환을 촉구하고 싶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거듭 강조하고 싶은 말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어떤 과학기술이 현실적으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더욱이 그것이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치료법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기술의 개발, 동물독성실험, 전-임상실험, 임상, 부작용검증기간 등 수 많은 절차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제기되는 윤리적 문제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이 모든 것을 잊은 채 너무 쉽게 들뜨고 흥분해마지 않는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어느 일간신문의 “당신만 믿습니다”라는 기사 제목에서 단적으로 표현된 바 있다.6) 외국에서의 ‘대단하다(spectacular)’는 평가에7)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하는 우리의 국민성을 가리켜 지난 100여년의 근대사가 ‘억압의 역사’였던 나머지 그런 식의 보상 심리적 분출구를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는8) 분석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일반국민들은 보다 차분해지고, 과학자들은 더욱 더 신중해져야 되겠다는 주문을 해 본다.

환자의 체세포핵이식 방법을 통한 치료용 배아복제와 줄기세포 추출의 효율성 증대, 그리고 인간과 같은 질병을 무려 65가지나 앓고 있는 개의 복제에 성공함으로써 갖가지 질병의 치료법 개발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고 발표한 내용이 모두 사실이었다고 하더라도9) 지금 당장 유전성 질환이나 난치병 환자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처럼 믿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다. 그와 같은 기술을 정말 상용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엄밀한 과학적 검토가 이루어진 것도 아님은 물론이다.

언론의 지나친 애드벌룬 띄우기에 국내의 의학자들도 임상만 강조된 줄기세포연구 경향과 일반인들의 배아줄기세포에 대한 환상을 조목조목 반박한 다음 이에 제동을 걸고 나선 바 있다.10) 언론들의 보도 태도는 그저 생명과학기술 분야만이라도(?) 우리의 희망과 기대를 저버리지 말았으면 하는 국민들의 소박한 바람을 경쟁적으로 대변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추정을 해본다.

머지않은 장래에 그와 같은 코페르니쿠스적 치료방법이 가능하게 될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런 혜택을 받을 사람은 대단히 한정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도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든다. 이는 문명사회에서는 간단하게 치료될 수 있는 병도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치료비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죽을 날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과 유사한 광경을 연출할 것이다.

꿈같은 과학기술에 도취되어 앞으로 현실화될 것으로 보이는 엄청난 사회적 혼란을 망각한다면 이것은 인류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커다란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

인간의 실물 복제만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과학자들의 약속이 끝까지 지켜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한 번 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돈 많은 중년 부부가 죽은 자식을 되살려 달라며 거액의 비용을 제시했을 때 생명공학회사는 과연 이를 거부할 수 있을까? 미국의 한 TV 토론회에서 사회자가 출연자에게 “만일 당신이 남편의 복제인간과 잠을 잔다면 당신은 부정을 저지른 것일까요?”라고 물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다소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 복제인간이 등장한다면 별의별 혼란이 다 일어날 것이다. 수 십 년간의 시차를 두고 태어난 나의 복제인간은 나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다시 남편이자 아버지가 될 수 있는가? 인간복제를 반대하는 가톨릭교회에 복제인간이 찾아와 세례를 요청한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복제인간은 도대체 누구의 자식이며 재산상의 상속권도 갖고 있는 것일까?11) 등등. 상상만 해도 혼란스럽다.

현재로서는 이런 세상이 오지 않기를 바라야 되겠지만 오늘의 우리가 내일의 모습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문명의 이기들도 당시에는 그저 상상 속의 물건들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도 수두룩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배아복제에 이은 개체의 복제는 이미 상상의 단계를 벗어나 현실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윤리적 반성능력의 소유자들인 인간이 생명조작기술의 눈부신 발달을 마냥 넋 놓고 바라볼 수만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불교윤리는 21세기형 보편적 가치로 거듭나야 한다

불자인 우리 모두가 믿고 따르는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는 이 세상의 어떤 종교보다도 월등하게 수승한 진리가 담겨져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요즈음 일반 매스컴에 비쳐지고 있는 우리 불교계의 모습은 어딘가 궁색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때로는 왜 불교가 다른 이웃 종교에 대해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스스로 화가 날 지경이다.

그동안 한국불교가 계율을 현대사회에 맞게 적극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자신감과 윤리적 대응 방식을 준비하고 있었다면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불교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고상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가령, 교단의 지도적 위치에 서 있는 분들이 나서 의혹에 휩싸인 황교수의 연구 내용과 연구 과정에 대해 애정 어린 걱정과 불자로서 한 점 부끄럼 없는 학문적 자세를 주문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자식으로 감싸 안고 위로할 일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일단 먼저 제 자식을 꾸짖는 것이 옛날 우리 집안 어른들의 훈육 방식이었다. 그러나 일부 스님들과 불교 단체들이 황우석 박사에게 보이고 있는 태도들은 그 순서가 뒤바뀐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불교경전들은 한마디로 위대한 사전에 비유될 수 있다. 그것은 엄청난 어휘력과 무한한 표현 잠재력을 간직하고 있는 인류 전체의 보물 덩어리이다. 그러나 불교는 아직도 우리들에게 정교하게 다듬어진 아름다운 반지나 목걸이로서가 아니라 가공되지 않은 원석의 형태로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아 답답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 적어도 윤리적인 차원에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그동안 불교는 문법(교학이론)의 형태로만 논의되어 왔을 뿐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한 언어능력, 즉 회화 구사력(응용윤리)으로 인식된 적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불교는 다른 이웃 종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고답적이고 어렵게 느껴진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라는 가정을 해 본다.

현대사회의 복잡한 윤리적 갈등상황들은 불교를 불교 고유의 문법적 틀 안에서만 보려는 기존의 시각에서 과감하게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시대적 요구 그 자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서양의 몇몇 불교학자들이 불교윤리의 특징을 규정하면서 이상적인 ‘최대화의 윤리(maximum ethics)’ 보다는 현실적인 ‘최소화의 윤리(minimum ethics)’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평소 윤리학과 불교윤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필자는 이 자리를 빌어 일반 불자들과 전문 불교학자들 모두에게 현대사회와 불교윤리의 접목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는 사색과 교학적인 천착을 감히 당부 드리고 싶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한국불교계의 일반적인 도덕상황은 계율 엄숙주의 때문에 난처하고 곤란한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계율의 준수가 희화화되는 분위기가 더욱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 수계식과 파계주, 불음주계와 곡차 및 불사음계와 육보시라는 말 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칫 계율의 수지 내지는 윤리적 삶을 경시하는 풍조를 낳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서양윤리학의 방법론에서도 예외는 인정된다. 그러나 말 그대로 예외는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다. 그것이 일반화되거나 자신의 그릇된 행위를 멋스럽게 장식하는 수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시각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는 그것 자체로서 또 다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윤리적으로만 본다면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나 원효와 경허의 자유자재한 몸짓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나의 예외적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흉내 내는 다른 많은 행위들이 원치 않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 점을 다함께 경계하자는 말과 더불어 첨단 과학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을 위해 보다 능동적인 계율의 적용 방안, 즉 불교윤리의 대사회적 전략을 심도 있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다. 불교계율의 근본 취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단순명료화 작업도 하나의 방편이 될 것이다. 그것은 곧 2,500여년의 역사를 가진 부처님의 가르침이 21세기에 부응하는 보편윤리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와중에 조계종 총무원 산하에 오늘날 전 세계인들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생명과학과 윤리문제에 대한 불교적 대응 방식을 논의할 ‘불교생명윤리위원회’가 설치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어쨌든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학계의 명망 있는 중진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창립 취지에 맞게 연구와 자문 역할을 제대로 한다면 우리 불교의 사회적 이미지는 훨씬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개선될 것임을 확신한다.

여기서 불교윤리의 현대화 방안도 폭넓게 논의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 본다. 이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무리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윤리적인 과정을 거쳐 이룩된 성과가 아니라면 결코 존경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업적이나 명예도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세상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교훈을 ‘황우석 교수 사태’에서 값비싼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배운 바 있다.

불교적 의미의 ‘계율’이나 서양적 의미의 ‘윤리’는 바야흐로 우리의 삶에서 유용한 ‘자산’이자 첨단 ‘무기’가 되고 있다는 시대적 변화를 결코 놓치지 말자. 말하자면 지금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윤리적 마인드’를 요구받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어쩌면 그와 같은 윤리의식의 요청이야말로 한국사회의 질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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