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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부처님 법대로’ 살기를 주창한 수행자
특집 | 현대불교의 이상주의자들
[73호] 2018년 03월 15일 (목) 서재영 puruna@naver.com

1. 쌀 한 가마니와 《순수이성비판》을 바꾼 이상주의자

   

성철
(性徹, 1912~1993)

종교인의 삶은 깨달음이나 구원과 같은 이상을 좇아가는 길이다. 범부의 삶이 현세에 안주하는 것이라면 종교인의 삶은 현실의 저편, 피안(彼岸)이라는 이상을 향해 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화엄경》에 이르기를 “원대한 서원을 세우면 부처의 종자[佛種]가 끊어지지 않고, 원력을 따라가면 여래의 집[如來家]에 태어난다.”고 했다. 부처의 씨앗은 원대한 서원이라는 이상에 의해 잉태되며, 이상의 세계에 도달하려면 그와 같은 서원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실례를 봐도 위대한 종교인들은 한결같이 원대한 이상을 품고 살았다. 그런 이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에 안주하거나 역경에 좌절하지 않고 평생 수행자로 살아갈 수 있었다. 한국 현대불교의 고승으로 추앙받는 퇴옹성철(退翁性徹, 1912~1993) 역시 예외는 아니다. 스님은 영원한 자유와 행복이라는 이상을 좇아가는 수행자의 삶을 살았고, 그런 이상을 피안이 아닌 한국불교라는 토양 위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상을 추구하는 스님의 성향은 출가를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타고난 성품 자체가 그랬다.

내가 어릴 때는 좀 이상하다 싶을 만큼 이상주의자였습니다. 사람이 땅 위를 걸어 다니는 것보다 훨훨 날아다니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망상과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토록 사는 그런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늘 머리에 왔다 갔다 했습니다.

법어집 《백일법문》을 통해 유년 시절 자신의 성향에 대해 회고한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현실주의자는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고, 상황에 종속적인 태도로 살아간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유년 시절부터 가졌던 이상주의적 태도 때문인지 일평생 깨달음을 향한 수행에만 올곧게 매진했다. ‘원대한 서원이 여래의 씨앗’이라고 했듯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깨달음을 향해 평생 정진하는 이상주의적 삶이 현대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을 잉태한 셈이다.

성철 스님이 살다 간 시공은 근 · 현대사가 교차하는 질풍노도와 같은 시기였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에 이은 한국전쟁과 좌우대립 속에서 수행했고, 군부독재와 민주화 투쟁이 한창이던 때 해인총림 방장과 종정을 지냈다. 불교 내적으로는 왜색불교 청산을 위한 불교정화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으며, 신군부에 의한 10 · 27법난으로 불교가 유린당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파란만장한 시절을 관통하는 삶을 산 인물 중에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준 인물이 바로 만해 한용운과 퇴옹성철이다.

만해는 전인적 풍모를 가진 인물로 사회참여를 통해 역사적 현장에 투신했고, 시대와 싸우며 자신의 시공을 확장해 나갔다. 반면 성철 스님은 철저히 세간사에 대해 불간섭의 자세로 혼란한 시대상을 대쪽같이 관통했다. 스님은 오로지 깨달음을 얻겠다는 종교적 이상만으로 격동의 시절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이런 투철한 수행 정신이 있어 근현대라는 시공이 초래한 질곡에 휘말리지 않고 영원한 자유를 향해 전 생애를 바칠 수 있었다.

성철 스님은 1912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유교적 전통을 가진 선비 집안에서 일곱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속명이 이영주(李英柱)였다. 지리산 자락의 궁벽한 마을에서 가난한 선비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영주는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성장했다. 서너 살 때부터 서당 교육을 통해 《논어》 《맹자》를 비롯한 사서삼경 등 제자백가 사상을 두루 섭렵했으며, 다섯 살 때는 백일장에 나가 장원을 하고, 소학교 시절에는 《서유기》와 《삼국지연의》 같은 책에 몰두할 만큼 영특했다. 15세의 나이로 단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제도교육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을 맺었다.

성철 스님은 “내가 남에게서 배운 것이라고는 소학교 6년과 서당에서 배운 《자치통감》이 전부다. 그것 말고는 다 혼자 공부해서 알았다.”고 회고했다. 모든 것을 독학으로 공부했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보면 엄청난 독서량이었다. 영주가 20세 때 작성한 서적기에는 자신이 읽었던 70여 권의 책들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행복론》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역사철학》 《소학》 《대학》 《하이네 시집》 《성서》 《자본론》 《유물론》 등 동서고금의 철학책이 두루 포함되어 있었다. 궁벽한 산골에서 이런 책을 구해 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번은 동경 유학생에게 쌀 한 가마니를 주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바꾸기도 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 〈증도가〉에서 발견한 이상으로 가는 길

동서고금의 책을 두루 읽었지만 그것이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청년의 갈증을 풀어주지는 못했다.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은 역대 불조(佛祖)가 모두 그랬다. 달마대사를 찾아간 혜가 선사처럼 동서고금의 책으로 공부를 했지만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영가현각 선사의 〈증도가(證道歌)〉를 읽게 되었다. 생로병사의 고통을 목격한 싯다르타가 평화로운 눈빛을 지닌 사문을 만났을 때처럼, 영주도 〈증도가〉에서 한밤에 횃불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현각 선사의 법어를 통해 영원한 자유라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희망의 빛을 본 것이다.

그런 희망은 만해의 《채근담강의》를 읽으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펼쳐 여니 한 글자도 없으나 항상 큰 광명을 비친다.”라는 구절에서 영주의 눈길이 딱 멈추었다. 삶의 해답을 찾기 위해 남이 쓴 책을 읽으며 밖으로 질주했는데 정작 자신이 찾는 해답은 자신의 내면을 읽는 것, 곧 ‘자아경(自我經)’을 탐구해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영주는 지체하지 않고 지리산 대원사로 달려갔다. 청년의 열정은 주지 스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탑전에 방을 얻어 곧바로 수행에 들어갔다. 딱히 누구의 지도도 없이 조주(趙州) 선사의 무자(無字) 공안을 붙잡고 밤낮으로 화두 참구에 몰두했다. 그렇게 정진하기를 42일 만에 가나 서나 마음이 고요해지는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지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속세의 인연은 질기고 모진 법이다. 아들이 대원사를 왕래하며 수행에 몰두하자 집안에서는 결혼을 서둘렀고, 1931년 스무 살의 나이로 전주 이씨 가문의 규수와 혼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야소다라와 결혼한 싯다르타 태자가 그랬듯이, 결혼이 영원한 자유를 추구하는 청년의 꿈을 꺾어놓지는 못했다. 결혼 후에도 대원사에서 수행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즈음 수행에 몰두하던 청년 영주를 유심히 지켜본 사람이 있었으니, 독립운동가이자 후에 해인사 주지를 지냈던 효당 최범술이었다. 효당은 영주의 됨됨이를 보고 해인사로 가서 큰스님의 지도를 받으라고 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영주는 지리산에서 가야산으로 삶의 무대를 옮겼다.

그때 해인사 백련암에는 당대의 대선지식 동산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동산 스님은 첫눈에 마조를 알아본 남악처럼 첫눈에 영주의 법기를 알아보았다. 손수 ‘성철(性徹)’이라는 법명을 적은 쪽지를 건네주며 출가하라고 권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영주는 1936년 25세의 나이로 동산 스님의 두 번째 상좌가 되었다. 이로써 용성과 동산의 대를 이어 근현대 한국불교의 선맥을 잇게 될 수행자의 길로 들어섰다. 우연한 객기가 아니라 영원한 행복이라는 자신의 이상을 향해 가는 과정이었기에 출가에 대한 각오가 남달랐다.

하늘에 넘치는 큰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모든 것 다 버리고 초연히 내 홀로 걸어가노라.

성철 스님의 출가 시(詩)에는 만고를 진리를 찾아 초연히 떠나는 청년의 기백이 담겨 있다. 그런 각오가 있었기에 격동의 시대에도 흔들림 없이 수행의 외길로 걸어갈 수 있었다. 출가 직후에는 동산 스님을 따라 범어사로 가서 용성 스님을 시봉하며 금어선원에서 하안거를 났다. 동산 스님은 다른 수행자들에게는 선생이라 불렀지만 유독 성철 스님에게만 ‘스님’이라 부르며 신뢰를 보였다.
1937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26세의 나이로 비구계를 수지하고 한결같이 수행에 몰두했다. 그러던 중 1940년 겨울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무자화두를 참구하던 중에 칠통 같은 내면의 어둠을 깨고 견성(見性)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 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을 꺼져 내리도다./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 구름 속에 섰네.

성철 스님은 29세의 나이에 위와 같은 오도송을 남겼지만 그것이 수행의 끝이 아니라 끝없는 정진의 시작이었다. 자신의 수행과 체험한 경계(境界)를 점검하기 위해 운수납자의 길로 나섰다. 1941년 송광사 삼일암에서 하안거를 나며 보조지눌의 저서를 탐독했다. 이때 보조의 점수적(漸修的) 수행론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는데, 이에 대한 비판은 이후 돈오돈수론을 통해 담아냈다. 같은 해 수덕사 정혜사에서 동안거를, 이듬해는 간월암의 만공 스님 회상에서 안거를 났다. 이 밖에도 법주사 복천암, 선산 도리사 태조선원, 대승사 쌍련선원 등에서 안거를 나며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이렇게 전국 곳곳의 선원을 두루 다니며 당대의 선지식들과 함께 수행하는 사이 성철 스님은 교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철저한 정진력으로 수좌들의 세계에서 명성이 자자해지기 시작했다. 나아가 수행과정에서 만난 청담, 자운, 향곡, 홍경, 종수, 우봉, 도우 스님 등은 평생 도반이 되었고, 이후 봉암사 결사의 주축이 되었다. 성철 스님에게 수행은 내적으로는 자신의 공부를 깊게 하였고, 외적으로는 불교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수좌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처로 대변되는 근대불교를 청산하고 현대불교를 열어갈 성철 스님의 인적 네트워크는 이렇게 수행을 통해 결집되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3. ‘부처님 법대로’를 기치로 내건 봉암사 결사

한국불교는 1895년 개항과 함께 봉건적 억압구조에서 벗어나 근대불교라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근대의 도래와 함께 승니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면서 산중불교와 은둔불교를 탈피하여 도심불교, 대중불교라는 불교중흥의 꿈을 꾸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조선 침략에 일조했던 일본불교계의 영향력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승니의 도성출입금지 해제에는 일본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역할이 있었고,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는 조선불교의 중흥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불교가 조선불교의 근대화와 발전을 가져다줄 성장모델로 설정되었다. 자연히 일본불교를 공부하고 선진적 제도를 도입하여 근대불교를 완성하겠다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이에 따라 각 사찰에서는 젊은 승려들을 선별하여 일본으로 공비유학생을 파견했다. 당시 일본불교의 대세는 대처(帶妻)였고, 유학승들은 그것을 한국불교의 근대화 모델로 이해하게 된다. 유학에서 돌아온 대부분의 승려가 대처가 되고, 조선불교를 장악하려는 일제의 의도와 맞물려 대체제도가 공식화되었다. 대처제도는 일제 강점기에 도입된 왜색불교라는 성격을 띠지만, 한편으로는 불교 발전을 열망하는 조선불교가 스스로 선택한 근대불교의 개혁조치라는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개항 이후 1945년 해방까지 50년 동안 불교 발전이라는 꿈을 안고 도입한 불교는 대처불교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근대불교의 실험은 오래가지 못했다. 해방을 맞이하면서 50년간의 실험은 종말에 직면했다. 불교 발전이라는 슬로건 아래 일본불교를 모방한 대처불교를 청산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근대불교가 일본불교를 모방하여 대처불교를 수용하는 것이었다면, 현대불교는 친일청산이라는 기치 아래 근대불교를 지우는 과정이었다.

결국 해방과 함께 한국불교는 길을 잃었고, 다시 좌표를 설정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이에 따라 근대불교의 이름으로 진행된 개혁적 조치는 부정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전통복고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전통복고의 방향을 가장 먼저 설정하고 실천에 옮긴 선지식이 바로 성철 스님이다. 스님은 봉암사 결사를 통해 한국불교의 전통성을 되찾고, 불교의 근본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부처님 법대로’라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단행한 것이다. 근대불교가 낳은 폐해를 극복하고 다시 불교의 근본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근대불교가 종언을 고하던 해방 당시 성철 스님은 청담, 자운 스님 등과 함께 문경 대승사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이후 한국불교의 주역으로 등장할 이들은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서 한국불교의 방향을 놓고 치열한 토론을 펼쳤다. 결론은 총림(叢林)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대처제도의 폐해를 극복하고 수행가풍을 회복하는 구심점으로 총림이라는 전통적 수행체제를 선택한 것이다. 한국불교의 근간이 참선에 있는 만큼 수행가풍을 바로 잡는 것이 대처불교로 파괴된 계율전통과 수행가풍을 되살리는 길로 파악한 것이다.

성철 스님은 그런 계획을 실천할 수 있는 도량으로 봉암사를 선택했다. 도반들을 향해 “이 좋은 도량에서 함께 정진하자!”고 제안했고 자운, 보문, 우봉 스님이 화답했다. 이렇게 네 사람이 주축이 되어 향곡 스님을 비롯해 제방에서 인연이 맺어진 도반들을 불러 모아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 아래 1947년 봉암사 결사를 단행했다.

봉암사 결사의 취지는 선종의 종풍을 되살리고 옛 총림의 법도를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취지에 따라 20여 명의 수좌가 결집하니 모두 눈 푸른 납자들이었다. 이후 봉암사 결사에는 비구 29명, 비구니 15명 등 40여 명이 넘는 수행자들이 인연을 맺게 되었다.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했던 삶이 역사적 사건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보면 봉암사 결사는 1947년이 아니라 전국 선원을 돌며 수행할 때 이미 준비된 것이나 다름없다.

성철 스님은 18개 조항의 공주규약을 제정하여 부처님 법대로 살겠다는 결사 정신을 담아냈다. 첫째, 계율준수를 제일 조항으로 담았다. “엄중한 부처님의 계율과 숭고한 조사들의 가르침을 온 힘을 다하여 수행한다.”는 것이다. 대처불교로 대변되는 근대불교를 청산하고 전통복고를 통해 현대불교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겠다는 정신을 천명한 것이다.

둘째, 경제적 자급자족을 선언했다. 당시 봉암사는 사찰 소유 전답이 많았고, 소작농에게 받은 임대료로 운영경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주규약에는 “소작인의 세금과 신도의 특별한 보시에 의존하는 생활은 완전히 청산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탁발로 연명했던 인도불교의 전통과 스스로 경작하며 자급자족했던 중국 선종의 전통을 계승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셋째, 일상생활을 곧 수행으로 설정했다. 공주규약에는 “물 긷고 나무하고 밭일하고 탁발하는 등 어떠한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장작 패고, 방아 찧는 것이 곧 수행이라는 육조대사의 수행정신과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작무에 종사케 했던 보청법(普請法)의 전통을 되살린 것이었다. 이에 따라 ‘매일 두 시간 이상의 노동’이라는 의무를 두어 백장청규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다.

넷째, 청빈한 삶과 승가의 위의를 확립하는 데 진력했다. 늘 가사 장삼을 수하고 생활하며, 사찰을 벗어날 때는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고 함께 다니게 했다. 가사는 마직이나 면직으로 한정하고 색은 괴색(壞色)으로 제한했다. 또 와(瓦) 발우만을 사용할 것과 정오가 넘으면 공양할 수 없게 하는 등 부처님 당시의 수행생활로 돌아갈 것을 명시했다.

공주규약에 나타난 봉암사 결사의 성격은 부처님 당시의 수행전통을 복원하고, 선원청규의 정신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불교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세속화되었던 근대불교를 극복하는 길을 근본으로의 회귀로 설정한 것이다. 이런 취지에도 불구하고 봉암사 결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49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희양산 일대에 빨치산의 출몰이 잦아지면서 위기를 맞았다. 성철 스님이 기장 묘관음사로 거처를 옮기면서 결사는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지만, 봉암사 결사가 현대 한국불교에 남긴 의미는 지대했다.

비록 짧았지만 봉암사 결사는 현대불교가 나아갈 방향은 부처님의 근본에서 찾아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하고, 불교 발전의 이름으로 방기된 계율정신과 수행가풍을 일으켜 세우고, 수행을 최고의 가치로 복원했다. 특히 결사를 통해 현대 한국불교의 주역들이 결집한 것은 가장 큰 소득이었다. 결사에 동참한 스님들 중에서 종정이 4명, 총무원장이 5명이나 배출되었다. 이는 결사에 동참한 주역들이 현대 한국불교의 주역으로 활동했음을 의미한다. 그들을 통해 봉암사 결사의 정신과 전통은 한국불교의 중심적 가치로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4. 한국불교의 ‘틀’을 제시한 해인총림

봉암사 결사가 불안한 정국으로 인해 좌초하고 뒤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국사회는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불교계에 닥친 진짜 소용돌이는 전쟁이 끝난 뒤 1954년 이승만의 불교정화 유시로부터 시작되었다. 평생 성철과 함께 수행하던 도반 청담 스님은 정화불사의 최선두에 섰다. 성철 스님은 정화가 대처(帶妻)라는 왜색불교의 질곡을 벗는 과정이므로 당위에서는 공감했지만 정화를 이루는 방식에 대한 견해는 달랐다.

성철 스님이 보는 정화는 봉암사 결사를 통해 드러낸 바와 같이 수행들 스스로가 불교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처승을 몰아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정화에는 동참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화가 정점으로 치닫던 1955년 스님은 팔공산으로 들어가 철조망을 둘러치고 10년 동안 산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세상과 담을 쌓고 오로지 수행에만 몰두하던 스님이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1965년이었다.

25세에 출가하여 29년 동안 참선수행과 교학연찬에만 몰두한 끝에 나이 54세가 되어서야 김용사 조실이 되어 처음으로 법상에 올랐다. 여기서 그 유명한 백일법문의 초안이 될 법문을 설했으니 당대까지 접할 수 없었던 수준 높은 설법이었다. 수좌들 세계에서 자자하던 명성이 마침내 대중적으로 폭발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렇게 등장한 스님은 1993년 입적할 때까지 26년간 한국불교의 정신적 지주로서 무너진 계율정신을 재건하고 선풍을 되살리는 데 진력했다.

그 사이 치열하던 불교정화도 일단락되고 비구 종단도 점차 안정을 찾게 되었다. 문제는 사찰을 비구 측이 접수하는 것만으로는 정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정화불사는 불교의 청정성 회복은 물론 교단발전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보여주어야 했다. 1955년 전국승려대회에서 비구 측의 종헌이 수립되고, 대표적인 사찰을 비구들이 접수했지만 소유권만 바뀌었을 뿐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언론에서는 정화의 결과로 대처승과 권속들이 사찰에서 물러갔을 뿐 비구 측이 내세운 개선이나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 없다며 정화에 대한 회의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비구 종단에서는 이와 같은 세간의 평가에 응답하고, 정화의 가시적 성과를 보여 주어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 더구나 정화를 위해 갑자기 늘어난 비구들은 출가자의 자질저하라는 역설적 상황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비구 종단에 부합하는 승가상을 확립하고, 정화에 부합하는 수행가풍을 확립하는 것이 절실해졌다. 이런 내외적 상황에 대한 비구 측의 응답이 종합수행도량이라는 성격을 띠는 해인총림의 설치였다. 1967년 7월 해인사에서 개최된 종회에서 총림법이 통과되면서 해인총림이 설립되고, 같은 해 하안거 해제날 성철 스님이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었다.

성철 스님이 주축이 되어 수립한 총림계획안에 따르면 총림은 종학을 연구하고, 수도의 향상을 도모하여 지혜와 덕행을 함께 구비한 출가자의 양성이 목적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해인총림은 첫 동안거에 150여 명의 대중이 운집하면서 불교계 안팎의 기대를 받으며 출범했다. 백장청규에 따라 소임을 정하고, 구족계를 수지하지 못한 스님들에게 구족계와 보살계를 설했다. 보름과 그믐에는 포살을 시행하고 옛 총림의 전통에 따라 상당법문을 설하면서 총림의 체계를 갖추었다.

해인총림은 정화의 결실로 얻어진 성과물이기 때문에 총림의 성공은 정화의 정당성을 보여주는 것이자, 종단 변화의 실질적인 증거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출가자들의 자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교육의 장이자 수행의 근거가 확보되었다는 것을 가장 큰 성과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총림의 설치는 어디까지나 외형적 틀을 완성하는 것이었을 뿐 총림이라는 그릇에 어떤 사상적 내용과 수행가풍을 채울 것인가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었다. 그 과제에 응답한 것이 바로 백일법문이다. 방장으로 취임한 성철 스님은 그해 겨울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백일에 걸쳐 백일법문이라는 장광설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선과 교를 넘나들며 토해내는 백일법문은 해인사는 물론 한국 현대불교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봉암사 결사의 주역인 청담(왼쪽)과 성철. 가운데 뒤쪽은 향곡


5. 백일에 걸친 장광설과 중도교판

해인총림 방장으로 추대될 당시 불교계의 상황은 정법을 연찬하고 수준 높은 설법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다. 더군다나 정화 과정에서 급조승들이 승단의 대세를 이룸으로써 출가정신을 찾아보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교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물론 불교사상에 대한 통합적 안목을 갖추지도 못한 실정이었다.

총림은 그와 같은 대중들에게 승가정신을 확립하고, 수행가풍을 복원하고, 교리에 대한 체계적인 안목을 제시해야 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성철 스님은 방장이 되던 그해 동안거에서 그 같은 요청에 응답하기 위해 백일법문을 설파했다. 고요한 침묵을 뜻하는 해인사 대적광전(大寂光殿)에는 쩌렁쩌렁한 사자후가 울려 퍼졌고, 눈 푸른 납자들이 법당 가득 도열하여 경청했다. 그해 겨울 해인사의 풍광은 정화 이후 한국불교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청사진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백일법문의 의미는 다음과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중도교판(中道敎判)을 통해 전체 불교사상을 조망하는 통섭(統攝)의 불교관을 확립한 것이다. 백일법문은 초기불교, 중관사상, 유식사상, 천태종사상, 화엄종사상, 선종사상 등 2,600년에 이르는 불교사상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설파하고 있다. 이를 위해 스님은 방대한 경전과 논소와 선어록을 두루 인용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불교는 수 · 당 대에 성립된 천태와 화엄의 교판론에 입각하여 불교사상의 심천(深淺)이 판단되던 때였다. 그마저도 강원교육이라는 제한된 범위에 갇혀 불교사상 전반에 대한 통합적 안목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성철 스님은 수행을 강조한 선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방대한 경전을 섭렵하고, 전체 불교사상을 종합하여 백일법문으로 풀어놓았다.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불교사상을 정리하는 차원을 넘어 불교사상의 핵심 줄기를 잡아 전체 불교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그렇게 불교사상을 하나로 꿰는 핵심 줄기는 중도(中道)사상이었다. 스님은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에서 설파한 가르침의 핵심이 중도사상이므로 중도는 불교사상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초기불교, 유식과 중관, 천태와 화엄, 선종사상의 핵심 역시 중도라는 공통분모 위에 확립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백일법문은 중도사상을 통해 전체 불교사상을 조망하는 이른바 중도교판이라고 해야 할 교학체계를 확립했다. 이는 화엄이나 선종이라는 편향된 관점에서 벗어나 불교사상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둘째, 천태와 화엄과 같은 중국 교판론의 오류를 지적하고 바른 안목을 제시한 것이다. 천태교판이나 화엄교판의 특징은 전체 불교사상에 대한 섭렵을 통해 《법화경》과 《화엄경》을 최고 수준의 경전인 원교(圓敎)로 분류한 것이다. 문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아함을 소승교(小乘敎)로 파악함으로써 ‘법에 무지한 수준 낮은 교설’로 분류했다는 점이다. 이는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준 낮은 가르침으로 폄하하는 것을 의미했다.

동아시아불교에서 중국 교판론의 영향력은 지대했으므로, 수준 낮은 교설로 분류된 아함경전은 자연히 소외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교판론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외키는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성철 스님은 이런 교판에 맞서 불교의 뿌리는 부처님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하열(下劣)한 가르침으로 분류한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1,500년 이상 동아시아 불교계를 지배해 왔던 교판의 한계를 지적하고 불법에 대한 바른 안목을 제시한 것이다.

셋째, 근대 불교학이 제기한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에 대한 관점을 제시한 것이다. 교판론에 대한 비판이 과거 중국의 교판가들의 오류에 대한 비판이었다면 대승비불설에 대한 비판은 근대 불교학의 왜곡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대승비불설은 말 그대로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설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문헌학이 불교학의 방법론으로 수용되면서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입멸한 후에 등장했음이 밝혀졌고, 이는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교설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확장되었다. 《금강경》이나 《화엄경》 같은 대승경전에 신앙적, 교리적 근거를 두고 있는 동아시아불교에서 이런 주장은 혼란을 초래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교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대승불교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했다. 대승불교 역시 불설(佛說)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름 아닌 중도사상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5비구에게 설한 초전법륜의 핵심은 중도사상이다. 그리고 중관, 유식과 같은 인도 대승불교는 물론 천태와 화엄종 같은 중국 대승불교와 선종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승불교를 관통하는 핵심 사상도 중도사상임을 여러 경론을 동원하여 논증했다.

결국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를 거쳐 선종에 이르기까지 중도사상이 전체 불교를 관통하는 핵심이자 근간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대승불교 역시 부처님의 근본취지에 부합하는 가르침이므로 불설이 맞는다는 것이 성철 스님의 논지다. 시기적으로 언제 성립된 문헌이냐가 관건이 아니라 그 경전이 담고 있는 내용이 불교의 핵심사상인가 아닌가가 불설과 비불설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승비불설에 대한 논쟁이 여전히 학계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고려하면 스님이 불교학의 이슈에 대해 반세기 먼저 문제를 파악하고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 것은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일이다.

넷째, 대처승단을 대체하는 비구승단의 정신적 지향성과 사상적 근간을 확립했다는 점이다. 정화불사를 통해 사찰은 비구 측이 차지했지만, 출가자들이 급조되고 체계적인 승가 교육이 부재하여 출가자의 자질은 오히려 저하되는 역설적 상황이 빚어졌다. 백일법문은 단순한 교리 설명이 아니라 정화를 통해 만들어나갈 한국 현대불교의 사상적 기틀을 확립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근대불교의 실패를 청산하고 현대불교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념적 모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백일법문은 지난 50년 동안 한국 현대불교를 지탱해 온 사상적 근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 비구 종단의 구심점이 된 가야산 호랑이

성철 스님은 평생 수행자로 살았지만 근현대 한국불교사에서 보면 다양한 위상과 의미를 띠고 있다. 고집스럽게 수행 한 길로 걸어간 수행자로서 위상, 방대한 경론을 열람하고 중도사상으로 불교사상을 통합적으로 조망한 학승으로서 위상, 총림의 수행자들을 지도하는 방장으로서 위상, 한국불교를 대표하며 종단의 구심점이 되었던 종정으로서 위상 등을 꼽을 수 있다.

스님의 한국불교에서 위상을 거론할 때,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장좌불와(長坐不臥)와 10년 동구불출(洞口不出)이라는 치열한 수행 이력이다. 스님의 이와 같은 이력은 무너진 수행전통을 복원하는 데 모범이 되었다. 그와 같은 수행을 바탕으로 총림을 지키며 수행자들을 지도했기 때문에 가야산 호랑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나 전국의 수행처를 돌아 가야산에서 입적한 스님은 평생 산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36년 출가 직후 동산 스님은 함께 서울로 가자고 했지만, 스님은 이를 거절하고 은해사 운부암을 거쳐 금강산 마하연으로 들어가 동안거와 하안거를 보냈다.

불교정화가 한창이던 1955년 비구 측이 해인사를 접수하자 주지로 천거되었지만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57년에도 해인사 주지에 추천되었지만 역시 사판의 길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불교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도시화를 추구하다 못해 세속화되어 버린 근대불교의 병폐를 극복하는 길은 철저한 수행과 불교의 근본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만큼, 평생 수행처를 떠나거나 수행과 관련 없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설사 수행과 관련된 일일지라도 선방을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일례로 1981년과 1991년에 6대와 7대 종정으로 추대되었지만 취임식장에는 참석하지 않았고, 1984년에는 여의도 봉축행사에 모시고자 총무원 간부들이 찾아왔지만 역시 산을 떠나지 않았다.

정화불사의 회오리가 거세게 일어났을 때도 스님은 관여하지 않았다. 봉암사 결사에 함께했던 평생 도반 청담 스님이 선봉에 섰지만 동요하지 않았다. 정화운동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정화에 대한 방법론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원택 스님은 “정화운동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절 재산을 모두 사회에 내주고 승려는 걸식하며 수행에 힘쓰자고 주장하였다. 그러지 않으면 절 뺏기 식의 정화가 되어 자칫 잘못하여 묵은 도둑 쫓아내고 새 도둑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이 성철 스님의 견해였다고 회고했다.

정화에 대한 이런 견해는 당연히 수용될 리 없었고, 스님의 표현처럼 정화는 절 뺏기로 치달았다. 이에 성철 스님은 정화가 한창이던 1955년 파계사 성전암으로 들어가 철조망을 둘러치고 오직 수행에만 몰두했다. 참선 수행은 물론 남전대장을 비롯해 방대한 경전을 열람하고 불교사상에 대한 체계적 정립에도 열정을 쏟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와 같은 스님의 행보가 오히려 정화를 완성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겉보기에는 자기 수행에만 몰두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와 같은 철저한 수행과 교학연찬은 정화의 완성을 위한 종교적 내용의 확보라는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정화는 비구가 사찰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수행과 교학연찬으로 수행자다운 승가, 불교의 사상적 내용을 담보하는 교단이 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와 같은 정화를 완성하려면 수행력이 바탕이 되고, 교학적 깊이를 갖춘 명안종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철 스님은 철저히 은둔과 수행에 몰두했지만 그와 같은 수행과 교학연찬이 정화불사에서 화룡점정의 역할로 마무리되었다. 수행력과 교학적 깊이를 겸비한 방장과 종정을 배출하지 못했다면 정화는 사찰쟁탈전이라는 세간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둘째, 총림의 방장과 조계종의 종정으로서 교단과 한국불교의 구심이 되었다는 점이다. 조계종 자체가 현대에 성립되었고, 종정제도 역시 1962년에야 초대 종정을 위촉했음으로 역사가 일천한 현대불교의 산물이다. 따라서 종정에 대한 권위는 사회는 물론이고 종단적으로도 높지 않았다. 조계종 종정에 대한 종단적 권위와 사회적 위상은 성철 스님이 종정을 지내는 동안 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성철 스님은 정치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수행자로서 품위를 지킴으로써 스스로 위상을 확립해 나갔다. 근현대 한국불교는 교단 안팎의 역학관계에 의해 간섭받고 흔들렸다. 1895년 개항 이후 일본불교에 의해 근대불교는 왜색불교로 변형되었고,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타율적 정화가 진행되면서 불교는 또 한 번 내홍을 겪었다. 대처와 대립해 있던 상황에서 불교계는 정치권력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어떤 경우에도 산문을 벗어나지 않고 선방을 지킴으로써 정치권력과 철저하게 거리를 두었다.

일례로 1977년 구마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했던 박정희가 해인사를 방문하면서 방장 스님의 면담을 요구한 적이 있다. 해인사 주지를 비롯해 스님의 상좌까지 백련암으로 찾아와 면담을 간청했지만 스님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세속 일에 관여하지 않고 권력자 앞에 초연했던 스님의 태도는 전두환 치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81년 4월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받았지만, 스님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25명의 위원 중에 참석하지 않은 위원은 스님이 유일했다. 권력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산문을 굳건히 지킴으로써 불교의 자존심을 지키고, 종정으로서 중심을 잡아갔던 것이다.

셋째, 깨달음 지상주의를 통해 수행의 궁극적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출가의 길은 밖을 향한 욕망의 질주를 멈추고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는 회광반조(廻光返照)의 길이자, 자성(自性)을 깨달아 내면의 보배창고[自家寶藏]를 여는 길이다. 하지만 근현대불교사에서 승가는 불교 발전이라는 기치 아래, 또는 정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끊임없이 밖을 향해 내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밖을 향한 질주와 외향적 가치가 승가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면서 출가정신이 들어설 자리는 사라졌고, 승가는 세속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었다.

방장이자 종정이던 스님은 이처럼 승가의식의 부재, 출가자의 본분사가 무엇인지를 놓쳐버린 승가를 위해 출가자의 바른길을 제시해야만 했다. 이에 스님은 수행자들에게 깨달음 지상주의라는 목표를 설정했다. 스님은 “깨친다는 것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서 불교를 논의한다면 절대로 불교가 아니다.”라고 강조하며 깨달음 지상주의를 제창했다. 깨달음이라는 불교의 본질적 목표를 향해 가지 않는다면 아무리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그럴듯한 성과를 낸다고 해도 불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 발전을 명분으로 진행되었던 근대불교의 대처제도와 불교정화를 기치를 내걸고 분열했던 현대불교의 흐름에 대한 경책이기도 했다.

당대의 시대적 맥락 속에서 보면 깨달음 지상주의는 당시 불교계가 처해 있던 승가정신의 소멸이라는 종단적 한계를 돌파하려는 의도가 깔린 것이기도 했다. 성철 스님은 깨달음 지상주의라는 고원한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향외치구의 삶에 이끌려 놓쳐버린 출가자의 본분을 회복시키고자 했다.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야 하듯 정화를 마치고 총림을 건설했다면, 세속적 가치와 대립의식을 떨쳐버리고 근본으로 돌아와 수행에 매진해야 했다. 따라서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제시한 것은 밖을 향해 질주하던 승가에게 출가자가 가야 할 방향은 내면이라고 일깨운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고원한 목표를 향해 줄기차게 달려갈 때 근대불교의 질곡에서 벗어나 바람직한 불교를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행하다가 작은 경계만 만나도 깨달았다고 선언하고, 수행을 방기하는 수좌들이 허다했다. 수행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깨달음을 향해 가라는 처방이 유효했지만 스스로 깨달았다며 수행을 팽개친 수행자에게는 또 다른 처방이 필요했다. 여기서 돈오돈수론(頓悟頓修論)과 구경각(究竟覺)이라는 수행론이 역사적 가치를 발휘하게 되었다. 스님은 제8 아뢰야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끊어진 상태, 모든 번뇌를 제멸한 구경의 경지에 이른 것만이 깨달음이라고 정의했다. 보조의 돈오점수를 비판하며 제기한 돈오돈수론은 이후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수행을 방기한 얼치기 수행자들을 수행 한 길로 돌려세우는 훌륭한 처방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끝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스님의 수행은 선방에서 끝나지 않고 삶을 통해서도 드러났다는 점이다. 스님은 늘 30년 된 누더기를 걸치고 “나는 제일 못났기 때문에 좋은 옷 입을 자격이 없다.”며 검박한 생활로 수행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제자들을 지도할 때도 “도를 이루려면 가난부터 배우라”고 강조하며 무소유의 삶으로 일관했다. “가난함에서는 항상 누더기를 입는다(貧則身常被縷褐).”는 〈증도가〉의 가르침대로 살아갔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평생 선방을 떠나지 않고 수행에만 철저했던 스님은 1993년 11월 4일 “참선 잘 하라”는 유훈을 남기고 세수 82세, 법랍 58세로 열반에 들었다. 25세 청년으로 출가하여 29년 동안 수행과 교학연찬에 매진했다. 1965년 김용사 조실이 되어 처음으로 법상에 오른 이후 입적할 때까지 28년 동안 종단의 어른으로서 조계종의 구심점이 되었다. 58년에 이르는 출가자로서의 삶은 오로지 깨달음이라는 종교적 이상을 향해 가는 과정이었다. 그와 같은 이상주의적 자세로 일관했기에 격동의 현대사에 휩쓸리지 않고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 되고, 현대불교의 사상적 근간을 놓는 동량이 될 수 있었다. ■

 

서재영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한국선학회 집행위원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간화선 수행의 성찰과 과제》 《아침바다 붉은 해 솟아오르네》 등이 있으며 40여 편의 연구논문이 있다. 현재 조계종 환경위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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