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현대불교의 이상주의자들

1. 글을 시작하면서

소천
(韶天, 1897~1978)

소천(韶天, 1897~1978) 스님에 대한 집필을 의뢰받고 인연의 오묘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필자가 소천 스님을 처음 뵌 것은 6 · 25전쟁으로 피난 간 마산의 어느 목욕탕 이층집에서다. 당시 소천 스님은 광덕 스님(당시 고 처사로 불림)과 함께 그곳에서 ‘금강경 독송 구국원력대’를 조직하여 활동할 때였다. 나는 당시 초등학교 2학년생으로 모친의 손에 이끌려 가서 《금강경》 독송 소리를 자장가 삼아 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그 어린 소년이 나이 칠십이 된 지금, 소천 스님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글을 쓰게 되니, 이 인연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아득해진다. 필자가 소천 스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1969년 9월이다. 군 입대를 며칠 앞두고 인천의 보각선원에 계신 스님을 뵈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처음 뵙는 것이었다. 스님은 장성해 버린 나의 모습에 놀라시고 대견해 하셨다. 스님은 그때 무엇인가 원고를 쓰고 계셨는데, 원고의 내용을 말씀해 주셨다. 활공사상(活功思想)이라는 것을 처음 들었는데 무척 인상적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지니고 있던 불교적 사유와는 매우 다르게 느꼈다.

며칠 머물면서 원고를 정리해 드리고 싶었지만 사정상 몇 시간의 만남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이 몇 시간이 소천 스님과의 첫 번째 인격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배웅하시는 칠순 중반의 스님 모습에서 언뜻 스님이 외로워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가슴이 짠하였다. 나는 제대를 했고 스님은 돌아가셨다. 청계천 어느 헌책방에서 나는 우연히 어마어마한 제목의 책을 발견하였다. 《전쟁 없는 새 세계 건설의 원리와 방법》이란 책이었다. 느낌이 왔다. 첫 페이지에 스님의 영정이 있었다. 나는 반가움에 서문을 급히 읽어 나갔고, 바로 보각선원에서 정리했던 원고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책이 소천 스님의 마지막 글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것은 소천 스님과의 두 번째 인격적 만남이 되는 것이리라. 《소천선사문집》(Ⅰ · Ⅱ)을 정독하면서 지금 소천 스님을 다시 뵙고 있다. 그런데 스님의 글을 독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스님의 글쓰기 방식과 용어를 이해하는 것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이는 스님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창작이니만치 쉬운 용어를 만들어 쓰지 못함이 미안하다. 어떤 고마우신 이는 쉬운 말을 쓸 것과 남의 학설을 많이 보아 남이 쓰는 용어를 쓰라 했다. 하나 쉬운 말을 써보려고 애쓰겠으나 남의 용어를 배울 겨를도 없지만 따라 쓸 생각은 없다. 용어는 제가 본 진리가 있을 때는 저의 용어가 새로 생길 수밖에 없다. 남의 용어를 따다 쓸 때는 독자(獨自)의 본 진리는 딴 것이 되고 마는 까닭이다.

스님의 뜻에 적극 동감한다. 그러나 어쩌랴. 필자는 서양 사람들의 용어와 이를 번역한 용어에 익숙해 있으니.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그동안 배우고 가르쳐 왔던 전공이 윤리와 정치철학인바, 바로 소천 스님의 관심 분야와 매우 가깝다는 점이다. 이 글이 스님의 뜻을 왜곡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족 하나. 스님의 글이 옛글 투여서 지금의 글쓰기 맞춤법과 다른 경우가 많지만 그대로 인용하기로 했다. 독자는 불편하겠지만 스님의 체취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2. 금강반야(金剛般若)의 길을 찾아가는 돈키호테

소천 스님이 살아오신 삶의 여정과 글들을 보면서 나는 언뜻 ‘돈키호테’를 연상했다. 웬 돈키호테? 돈키호테는 스페인의 세르반테스가 지은 세계적인 고전으로 우리 모두의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소설 《돈키호테》의 주인공이다. 돈키호테는 환상과 현실이 뒤죽박죽되어 기상천외한 일을 계속 일으킨다. 거대한 풍차를 보고 나쁜 거인이라 생각해서 칼을 들고 공격하기도 한다. 이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 돈키호테의 행동이 왜 지금까지 우리에게 회자되고 있는가? 바로 그의 변치 않는 정의감과 이를 실천하는 우직한 용기 때문이다.

소천 스님의 마지막 저서 《전쟁 없는 새 세계 건설의 원리와 방법》의 머리글을 보자. 여기에 스님의 돈키호테적 여정이 여실히 나타난다.

나는 온 세계가 전면적 개조를 보기 위하여 이 글을 쓰는 것이며, 다시 전 인류의 업행이 근본적 개조를 보기 위하여 이 글을 쓰는 바이다. 또 모든 생명이 한 몸처럼 살아지기 바라서 이 글을 쓰는 바이며, 다시 전쟁 없는 세계를 건설해 놓기 위하여 이 글을 쓰는 바이다. 그래서 인류와 세계의 근본성을 알려주려 하는 것이며, 이 인간의 식생활과 성생활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에서 열거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전 인류의 천부된 지혜의 힘과 신체의 힘과 탐욕의 힘과 사랑의 힘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조금도 남김없이 총동원, 총발휘하여 성공하려는 것이니 이 사실의 적합성 여부는 세계를 근심하시는 모든 지자(智者)들에게 맡기기로 한다.

출판 역사상 이런 엄청난 발문을 한 저자가 과연 있을까? 더구나 이 불같은 열정이 칠순 중반의 나이에 가능한 것인가? 이 책의 내용에는 현대의 인문 · 사회과학적 주제가 모두 담겨 있다. 필자는 스님의 관심이 이렇게 넓고 깊고, 그리고 치열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스님의 참모습은 붓다의 깃발을 들고 금강의 광장으로 뛰어나가는 사회사상가, 사회운동가의 모습이다.

스님의 구체적 삶의 여정이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
소천 스님의 연보를 살펴보자. 소천 스님은 1897년 종로구 적선동에서 태어나 1978년 82세 나이로 범어사에서 입적하였다. 속명은 신세순(申世淳)이었다. 스님의 생애 기간은 한국 근현대사의 파고가 가장 컸던 격랑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등 격랑의 파고 속에서 망국의 비운을 겪는 시기에 태어났다. 14세 때에 기독교 정동교회에 다니면서 구국의 간절한 기도를 하였으나, 한일합방의 국치를 당하자 교회를 떠나 종교와 사상 등 다양한 영역을 섭렵하였다. 15세 때 종로에 있는 한남서림 주인으로부터 《금강경》을 받았다고 한다.

23세 때 서울에서 3 · 1독립운동에 참가한 후 북간도로 탈출해 김좌진 장군 휘하의 독립군 북로군정서에 입대하여 사관훈육부, 사관학교를 수료하고 청산리 전투 등 무장 구국투쟁에 투신했다. 하지만 독립군 지도자들의 반목과 대립에 고뇌하면서 만주를 떠나 북경으로 향했다. 독립군 사관생도 모집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였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교원 생활과 웅변연구회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산중 사찰로 피신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불교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금강경》을 읽고 큰 깨달음을 얻어 구국구세의 사상적 지표로 삼았다. 1935년 39세에 《금강경 강의》를 간행하였고, 1941년 경기도 파주에 토굴을 짓고 불교를 통한 구국구세의 방법 모색에 진력하다가 49세 때 해방을 맞았다.

파주 토굴에서 해방을 맞이한 소천 스님은 다시 절규했다. 남북분단, 좌우의 극한적 대립의 해방 공간 속에서 진정한 독립과 민족정기를 함양하기 위하여 《바른 정신》 《독립의 넋》 《인류업 개조운동》 등을 저술했으나 《진리도》 1권만 출판되었다. 《진리도》를 읽던 필자는 깜짝 놀랐다. 책의 서두에 당시 초대 부통령인 이시영이 추천문으로 한시를 지어 게재하고 있어서다. 그 한시는 다음과 같다.

사상평공애(思想平公愛) 주의활공덕(主義活功德)
자종유무풍(自靜有無風) 하기탐애랑(何起貪愛浪)
집실진리도(執實眞理刀) 용권제도력(用權制度力)
가구세여국(可救世與國) 보근단성족(普勤檀聖族)

위의 내용을 보면 소천 스님의 활공주의를 이미 이시영 부통령은 알고 있었다. 《진리도》 서문에는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주장한 독립운동가이자 한국독립당을 창당한 조소앙 선생의 글도 실려 있다. “대자유, 대해방의 그 자미(滋味)가 주관 객관을 포섭하고, 정신과 물질의 양면을 통틀어 훌륭한 새로운 재조직된 것 같은 신세계에 살아볼 수 있을까”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서문을 쓴 것이다. 이것은 소천 스님의 사상이 당대의 민족운동가들에 이미 알려져 있고 그들과 깊이 교유해 왔음을 의미한다.

소천 스님의 치열한 삶의 양식은 1950년대를 기점으로 전환기를 맞게 된다. 6 · 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온 소천 스님은 1952년 범어사에서 용성 스님의 위패상좌(位牌上佐)로 동산 스님을 계사로 하여 출가했다. 당시 나이가 56세였으니 큰 결심을 한 것이다. 1952년부터는 마산과 부산에서 《금강경》 독송운동을 전개하였다. ‘금강경 독송 구국원력대’를 조직하고 《금강경》 사상을 바탕으로 나라와 민족을 구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이때 광덕 스님이 조력자로 함께하였다. ‘금강경 독송 구국원력대’의 출발지인 마산의 목욕탕 이층집과 마산 추산동의 조그마한 암자 등에서 광덕 스님과 함께 《한글 금강경》 5만 권을 만들었다. 전후의 어려웠던 시기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단한 원력과 정열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마산의 ‘7형제’라는 보살 모임이 적극 참여하고 후원했다고 한다.

1954년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참여하였다. 1955년 조계종단의 교무부장, 대각사 주지 소임을 보면서 《금강경》 독송 운동을 다시 발동시켰다. 대각회를 출범시키고, 《금강경과 각운동》 《활공원론》 《진리에서 본 구세 방략》을 출간했다. 이후 불국사와 화엄사의 주지를 역임했다. 말년은 인천 보각사에서 거주하면서 《금강경》 독송 운동을 다시 추진했다. 1970년에는 마지막 저서 《전쟁 없는 새 세계 건설의 원리와 방법》을 펴냈다. 1978년 82세로 범어사에서 입적했다. 다비 후 사리를 거두어 범어서 부도전에 봉안하였다.

지금까지 소천 스님의 생애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스님은 한국 근현대사의 파고 속에서 계속 배를 띄워 항해를 끝없이 시도하신 분이다. 또한 만주 독립군사관학교 참모로 재임 시부터 3부작으로 구성된 소설 《독립의 넋》을 쓰기도 했다. 《소천선사문집》 발간을 주도한 광덕 스님은 이 소설의 원고를 찾지 못한 것을 매우 아쉬워하는 글을 머리말에 표현하고 있다. 또한 스님은 시와 노래 가사를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내곤 하였다.

필자가 소천 스님의 생애를 돈키호테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세상의 돈키호테는 외롭지 않았을까? 돈키호테는 선각자이기 때문이다. 보각선원에서 뵌 스님의 마지막 모습이 왠지 자꾸 떠오른다.

참고로 《소천선사문집》(Ⅰ · Ⅱ)에 실린 저서와 글을 ‘경전 강의’와 ‘사상 강론’으로 나누어 정리해 보고자 한다. 스님의 일생이 이 저서와 글에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경전 강의

1. 《금강경 강의》 1935년 간행. 재가 법사이던 39세 때 지음. 권상노 박사와 김대은 스님의 추천 서문이 있음.
2. 《금강경 강의》 1965년 간행. 초판의 한문을 줄이고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쓰고자 하였음
3. 《반야심경 강의》 1954년 간행. 하동산 스님의 추천 서문이 있음. 1968년 재간행
4. 《한글 원각경 강의》 1968년 간행. 초학을 위해 한문을 한글로 번역 출간. 경전 한글 번역의 효시로 볼 수 있음.
5. 《천수경》 1956년 간행. 한문 경전을 우리말로 풀어 불교의례에 적용하고자 함.

사상 강론

1. 《활공원론》 1947년 초판, 1953년 중판. 소천 스님 사상의 핵심을 기술.
2. 《조물주 개조와 불이 정책》 1950년대 초반 집필. 활공주의의 실천방안 모색.
3. 《구국방략원 하편》 1947년 집필. 상편은 유실됨. 문답형식으로 구국 방향 모색.
4. 《진리도》 1949년 출간. 부통령 이시영과 삼균주의 주창자 조소앙의 추천 서문이 실림. 활공주의 핵심 기술.
5. 《공행혈구운동》 1949년 집필. 구국구세 운동의 헌장과 규약 제시.
6. 《근본진리에서 본 구세방략》 1954년 간행. 활공주의 해설.
7. 《새 생각(전쟁 없는 새 세계 건설의 원리와 방법)》 1970년 간행. 마지막 저서로 활공주의 실천의 이론과 방법을 다양한 영역에서 제시.
8. 《금강경과 각운동》 1954년 출간. 《금강경》 3만 권 불사와 함께 ‘금강경 독송 구국원력대’에 대한 이론과 실천 방향 제시.
9. 《구호선 6척》 1955년 작성. 백성욱 박사 서문 실림. ‘금강경 독송 구국원력대’의 신앙생활 방향 제시.
10. 기타 유실된 원고로 《바른 정신》 《독립의 넋》(소설) 《인류업행 개조운동》이 있음.


3. 구세구국 불교와 활공주의(活功主義)

불교를 끄는 두 수레바퀴는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의 전통적인 풍토에서는 상구보리는 형님 격이었고, 하화중생은 동생 격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한국불교 지성사에서 상구보리인 깨달음에 대한 논쟁은 매우 다양하고 깊이 있게 논의되어 왔지만, 하화중생에 대한 논의는 당위적 선언만 전개된 것이 현실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풍토에서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 선각자로 큰 족적을 남긴 소천 스님의 사상과 행적은 매우 이색적이라 할 수 있다. 소천 스님의 사상과 이상은 《금강경과 각운동》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한국불교는 닭이 우는 소리가 다섯 홰째인데 잠꼬대 소리만 하며 화급(火急)이 동량(棟梁)에서도 감몽(甘夢)에 도취하고 있는 것이다. 신흥 한국의 불자여, 불도의 발생지는 산간이었지만 불원(佛願)의 결실처는 대도회지여야 한다. 또 불자의 신해(信解)는 출세적(出世的)에서부터지만 행증(行證)은 세간상에서부터 드러나야 한다. 결실이 없는 불교, 행증이 없는 불자 기수가 백천만이라도 무용이다. 이들 각운동에 좀이 되는 용류(庸流)들은 불교가 국사를 우(憂)하거나 정치를 논하면 변괴로 안다. 이것은 벌써 옛날 소리다. 이런 무리들은 한국불교를 위하여 교단에서 없어져야 한다. 진리의 주인인 불교가 진리로 되어야 할 국사를 근심치 않고 정치를 논치 않으면 누가 할 것인가? 아불(我佛)께서는 대우국가(大憂國家)이며 대우세자(大憂世子)이시다. 그래서 불을 우웅(憂雄)이라 부르는 것이다. 또 불께서는 대정치가이시니 나라를 근심하시고 세계를 근심하시어 치세, 치국, 치가, 치신, 치심하시는 그 정치론은 드디어 팔만장경이신 것이다.

민중불교니 참여불교니 하는 용어도 없던 시절, 1950년대에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랍다. 이것은 아마도 구국 독립운동을 한 여정과 56세에 출가하여 한국불교의 습과 틀에서 자유스러웠던 때문은 아닌지 짐작해 본다. 여하튼 스님은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역전시켜 놓았다고 할 수도 있다. 이 둘을 이분법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결국 세상을 구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주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가 지향할 사회는 ‘바르고 행복한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개의 수레바퀴가 함께 굴러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바퀴는 개인윤리적 차원이다. 이것은 개인의 도덕성, 즉 개인 의지와 결단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여기서는 개인의 가치관 정립과 그 실천 방향에 관심을 둔다. 또 하나의 바퀴는 사회윤리적 차원이다. 여기서는 사회구조와 제도의 도덕성에 관심을 가진다. 여기서 사회정의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와 함께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이며 어떻게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할 것인가 하는 사회윤리적 과제가 성립한다. 이를 불교 이론에 적용해 보면 상구보리는 개인윤리적 접근법이고 하화중생은 사회윤리적 접근법이다. 소천 스님은 불교 사상의 사회윤리적 측면을 중요시하고 이를 사회 구제의 방법으로 적용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활공사상으로 표현된다.

소천 스님의 저술은 크게 두 분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금강경》 《반야심경》 《원각경》 등을 한글로 번역하여 민중에게 다가가 각성을 꾀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구세구국의 이념과 전략에 관한 글이다. 여기에는 《활공원론》 《구국방책론》 《진리도》 《전쟁 없는 새 세계 건설의 원리와 방법》 등 9권의 저서가 있으나 그 내용은 상호 중복되면서 ‘활공주의’를 각기 다른 방법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천 스님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또한 스님의 글쓰기는 매우 자유분방하고 주제도 광범위하며 다양하다. 게다가 근현대의 문체와 용어를 혼용하고 있어 쉽게 체감되지 않는다. 소천 스님의 사상을 체계화시킬 방법이 무엇일까? 이데올로기의 구조와 연결하여 체계화시켜 보면 소천 스님의 사상 틀을 그려 볼 수 있을 것 같다. 테어본(G. Therborn)은 이데올로기의 구성 요소로서 세 가지 측면을 열거하고 있다.

《금강경 강의》
(사바도원, 1936년판)
첫째, 이데올로기에는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며(what exist)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인식이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이며, 이 세계는 무엇이며, 자연, 사회, 인간은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고 정체감(sense of identity)을 획득하게 된다.

둘째, 이데올로기에는 ‘무엇이 좋은 것이고(what is good), 정의이며, 미이며, 향유할 만한 것인가’에 관한 요소가 포함된다. 이러한 구성 요소에 의해 우리의 바람이 형성되고 표준화된다.

셋째, 이데올로기는 ‘무엇이 가능한 것이고(what is possible) 불가능한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요소를 포함한다. 여기서 인간의 희망과 꿈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느냐의 실천적 문제가 제기된다.

위의 구성요소를 간단히 정리해 보면 ‘세상 만물과 인간에 대한 표상과 진단’ 그리고 ‘지향 가치와 이상적 사회의 제시’, 마지막으로 ‘구체적 실천방안들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논리적 정리’로 요약할 수 있다. 위 세 가지 구성 요소로 소천 스님의 사상적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사상적 원천: 금강반야(金剛般若)

이데올로기의 첫째 구성 요소인 세상과 인간에 대한 표상과 진단은 이데올로기의 원천이자 출발점이다. 그러면 소천 스님 사상의 첫 출발점이자 원천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소천 스님과 일생 동안 뜻을 같이한 광덕 스님이 명확히 밝히고 있다.

노사 필생의 근거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다름 아닌 금강반야이다. 망국의 비운 속에서 《금강경》을 만나고 독립투쟁 과정에서 《금강경》을 읽었으며 세계적 사상 혼란의 와중에서 금강반야밀다에 눈떴던 것이다. 그로부터 노사는 생명을 얻고 눈을 얻어 그 생애를 펼쳤던 것이다.

이번에는 소천 스님의 글 〈금강경 독송 구국원력대 취지〉 전문을 보자.

나라와 세계는 미증유의 중대 단계에 다다랐다. 마지막 결정을 낼 순간 전이다. 이것이 구하여질 진리 주인으로도 그 손길을 내밀 때가 정히 이때인 것이다. 그래서 금빛의 신호는 벌써 온 것이니 즉 정(正)의 빛이 이 땅에 임하였다. 이는 이 땅에 화합의 신으로 강림하는 금비둘기가 그것이다. 또 이와 때를 같이하여 외치는 소리도 있는 것이다. 이는 새벽을 알리려 날 빛을 받으며 우는 닭의 소리가 그것이다. 금비둘기는 정견(正見)을 보여주는 《금강경》이 이것이요 금닭의 울음소리는 우리 말로 번역되어 원력대들의 입으로 독송하는 소리가 그것이다. 우리는 금닭이 되어 자꾸만 울자. 인류의 잠이 깨이도록 자꾸만 울자. 우리는 《금강경》으로 우는 금닭인 것이다.

그러면 《금강경》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활공사상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이를 자세히 논하는 것은 지면 관계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저서 《활공원론》의 ‘제1장 활공의 기본원리’에서 제시한 7가지 원리를 보면 바로 《금강경》의 체취를 한껏 느낄 수 있다. 이 7가지 원리는 다음과 같다.

▲무정법(無定法)과 미지법(未知法) ▲물심불이(物心不二) 개설 ▲활정법(活定法)과 무활정법(無活定法) ▲업행(業行) 개조론 ▲초불이론(超不二論) 개설 ▲탐애와 입공(立功) ▲진리의 귀숙처(歸宿處)와 주재지(主宰地)

위의 내용은 《금강경》에서 도출한 활공주의의 텃밭이다. 이를 바탕으로 구세구국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2) 지향가치: 바르고 평화로운 활공 세계 구현

소천 스님의 지향가치의 핵심은 ‘활공주의’이다. 활공주의에 대한 스님의 뜻을 직접 살펴보도록 하자.

활공주의는 무엇 하는 주의인가? 국가와 민족을 구하며 세계와 인류를 구하는 주의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이유로는 명칭과 같이 살리는 공(功)이 있는 주의인 관계이며, 또 살리기로 공을 삼는 주의인 까닭이다. 말하자면 진리공(眞理功)을 살려서 만사와 만위를 살림으로써 병든 국가와 병든 세계를 살려내는 공을 세우자는 것이다

활공주의의 주장에는 항상 ‘삼본사상(三本思想)’과 ‘무대립사상(無對立思想)’이 제일 많이 거론된다. 활공주의를 뒷받침하는 기초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본사상은 평등, 공심(公心), 자비[박애]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삼본사상은 ‘공허리(空虛理)’ 이론에서 도출한 것인데 이는 《금강경》에서 원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삼본사상은 무대립사상으로 연결되거나 동일시된다. 무대립사상의 설명에서 소천 스님의 사상을 더욱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무대립이란 것은 타를 대립하지 않음으로 이 까닭에 무대립인 것이 아니고, 대립할 타가 없는 진아이므로 무대립인 것이다. 독존이란 말도 그렇다. 타 존재성을 부인, 또는 무시하고 자만을 인정하는 독존이 아니라, 인정받을 자타를 동시에 부정하고 있는 진아의 독존인 것이다. 초불이(超不二)도 그렇다. 둘이 아니라면 하나에서는 대립이 없을 듯하지만, 아니다. 하나는 이에 둘이나 타나 이(異)를 인정함에서 생긴 언사이기 때문에 벌써 대립이 되고 있다. 이 까닭에 ‘하나에서 하나도 없는 하나’인 진리에서만 진시 대립이 없겠기에 초불이(超不二)라고 해 본 것이다. 이러한 진리의 무대립사상은 인인개개가 진선미를 다 같이 수용하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방대한 스님의 문헌 속에서 위의 인용구가 스님의 사상을 명확하게 압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님의 글쓰기는 주제가 방대하고, 자유분방하고 형식을 무시하고 있기에 지금의 용어로 쉽게 간추리기 쉽지 않던 차에 위의 인용구를 발견한 것은 필자에겐 행운으로 느껴진다. 필자는 이 글을 보면서 현대의 많은 사상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음을 직감하고 감탄하였다.

특히 스님의 무대립사상은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E.Levinas, 1906~1995)의 ‘타자윤리학’을 연상시킨다. 타자윤리학은 타자의 존재 자체를 ‘윤리’라고 보면서 타자 덕분에 나라고 하는 존재가 성립한다고 본다. 그 외에 무대립사상은 상호윤리, 공동체 윤리, 생태환경 윤리, 평화 윤리 등 현대의 윤리이론의 이론적 틀과 연결되어 있고, 각종 정의론 등 현대의 사회사상과도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스님은 활공사상을 ‘산 이치’로 보면서 일체 상대가 서로 상대를 살리면서 자기도 살아가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현대 사유의 제일 큰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스님의 글을 인용해 보면 확연하게 나타난다.

유(有)가 무(無)도 살려서 유로 살아나는 것이다. 물(物)과 심(心)도, 전(全)과 개(個)도, 유산(有産)과 무산(無産)도, 유능과 무능도 다 그런 것이다.

활공주의는 이념적으로 매우 개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스님은 놀랍게도 아나키즘, 공산주의, 자유주의, 삼균주의, 삼민주의 등을 거론하면서 활공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자본주의)가 서로 갈등하고 싸우는 것은 활공의 발동처(發動處)를 알지 못한 이유라고 본다. 이 사상들이 한 발씩만 더 내놓으면 저절로 활공주의에 합할 것으로 본다. 즉, 모든 이념이 폐쇄성에서 벗어나 상대를 살리는 ‘산 이치’로 갈 때 진정한 공산주의가 되고 진정한 자유주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미소 양 진영으로 대립된 갈등 구조가 해소되고 공존 공영할 수 있다고 본다. 남북이 전쟁을 하고 극단적인 이념 갈등을 겪는 시대에 이런 주장을 했다는 것은 매우 놀랍다. 신념의 늪에 빠지는 이데올로기의 함정에서 벗어나 ‘산 이치’로 이념의 순기능을 살리고자 한 것이다.

3) 활공의 실천: ‘산 이치’ 구현의 방안들

소천 스님의 사상을 조명함에서 매우 특이하고 신기한 점이 있다. 바로 활공사상의 이상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많은 고뇌와 탐구를 하였다는 점이다. 대개의 사상가들은 이데올로기의 세 가지 요소 중 두 가지 즉, 현실진단의 틀과 지향가치를 제시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구체적 실천 방안은 시공간에 따른 전략 전술적 성격이 강해 대개 그 추종자들에 의해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소천 스님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스님의 글에는 마치 사회정의와 풍요를 위한 정책 입안자와 집행자와 같은 자세가 물씬하다. 이것은 그만큼 스님의 사상이 관념적이 아니라 구세와 구국의 구체적 방안을 실천하려는 치열함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활공사상에 관한 스님의 글 중에서 절반 이상이 구체적 실천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조물주 개조와 불이정책》 《구국방략원》 《진리도》 《공행혈구운동》 《근본진리에서 본 구세방략》 《전쟁 없는 새 세계 건설의 원리와 방법》 등 저술의 제목에서 스님 사상의 실천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실천 방법의 원칙은 ‘산 이치’를 되살리는 것이다. 활공 법칙은 원래부터 실현되어 있는데 이 법칙이 고장이 나서 그 원인을 찾아 치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장이 발생한 경로를 찾아 활공의 이치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님이 제시한 구체적 실천 영역이 하도 방대하고 다양하여 이를 요약하기가 쉽지 않다. 그를 크게 정치적 영역, 경제적 영역, 종교적 영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정치적 영역

스님의 글에는 남북 분단과 평화, 그리고 현대의 정치이념에 대한 견해와 주장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스님의 독립투쟁 등 구국 활동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스님은 ‘인간의 모순을 정리하는 것이 정치’라고 보면서 정치의 갈등과 대립은 탐애와 유무 대립으로 생기는 것으로 본다. 인간은 탐애적 존재로서 탐애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탐애를 ‘산 이치’로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큰 과제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은 인간의 탐애를 산 이치로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두 이념이 탐애를 ‘산 이치’로 활용한다면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인간의 탐애를 ‘산 이치’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다양한 측면에서 제시하고 있다. 여러 면에서 숙고할 과제가 매우 많으나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또한 탐애의 늪에 빠진 인간은 유무 대립의 갈등에 빠진다. 정치가는 국민이 유무(有無)의 상전이 되게 하면 선정(善政)을 하는 것이요, 유무의 충복이 되게 하면 악정(惡政)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무의 충복이 되면 전쟁을 하고, 핵무기를 만드는 등 인류가 자멸할 수 있는 짓을 하면서도 자랑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협소한 이념적 갈등과 세계 정치 상황을 볼 때 많은 교훈을 담고 있는 내용이다. 이념의 함정에 빠져 이념의 노예가 되지 말고, 이념을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도구로 활용하고자 하는 현대 정치철학의 과제가 제시되고 있다.

(2) 경제적 영역: 개전여일(個全如一)의 평등 실천
경제적 영역의 실천 과제의 핵심은 평등이다. 그러나 스님이 주장하는 평등은 절대적 평등이 아니다. 그렇다고 상대적 평등이나 비례적 평등도 아니다. 스님은 활공주의의 ‘산 이치’를 경제에 적용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산 이치에서는 일체상대가 서로 상대를 살리면서 자기도 살아가는 것이다. 유가 무도 살려서 유로 살아나는 것이다. 물과 심도, 전과 개도, 유산과 무산도, 유능과 무능도 다 그런 것이다. 우리 일신(一身)에서도 그런 것이다. 이목구비 등 개체가 전체를 살릴 때 개체도 살아나는 것이다.

위의 내용은 개체가 전체를 살리고 전체가 개체를 살리는 ‘개전여일의 평등론’이라 할 수 있다. 스님의 평등론에서 제일 특징적인 것은 인간의 본능을 이용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능을 탐애의 욕구와 혜능(慧能)의 본능으로 보고 이 본능을 산 이치로 이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탐애의 욕구를 지혜롭게 관리할 때 혜능의 본능도 가동하여 정의의 길로 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를 제도로 실천하기 위하여 ‘공급차이 조절법’ ‘논공행상법’ ‘잉여혜능 부패방지’ 등의 각종 제도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소천 스님의 사상을 현대 사회사상과 연결시켜 보면 많은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3) 종교의 영역

소천 스님은 문화와 종교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종교혁명을 촉구하는 스님의 글을 살펴보자.

모든 종교가들이여, 안으로 보이지 않는 우상을 모시고, 사후의 천당을 동경함보다 밖으로 보이는 성수(聖數)를 모시고, 생전 실현의 천당을 향유함이 더 정확하지 않은가? 마음의 우상을 집어치우고 그 자리에 성수평등신을 모시는 것이 어떠한가? 성수평등신은 탈 벗은 삼위일체신이시니, 평등은 성부(聖父)시오, 공심은 성자(聖子)시오, 자비는 성신(聖神)이신 것이다.

오늘날 현대종교의 문제점과 사회적 역할을 모색하는 많은 논의가 전개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스님의 종교관이 얼마나 선구적인 것인가를 체감하게 된다.
스님은 현실의 기독교 신앙의 많은 문제점을 거론하면서, 예수의 재강림은 육신을 말함이 아니요, 그가 실천궁행으로 보여준 평(平) · 공(公) · 자(慈)라고 주장하면서 바른 신앙을 강조했다. 그러면 불교는 어떻게 보는가?

불법의 숭배대상은 불 · 법 · 승 삼보이다. ……불은 각의 체성(體性)이므로 평등이요, 법은 각의 법칙으로 공심이요, 승은 불보와 법보의 화합이므로 자비인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지닌 삼보만은 실천궁행(實踐躬行)에서만 가치가 발생된다. 실천궁행의 완수가 곧 성불인 것이요, 실습은 곧 수행인 것이며, 성불의 길인 것이며, 보살의 도인 것이다. 면벽관심(面檗觀心)의 구불수도(求佛修道)보다도 실물실제를 실습실행하는 구불구법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혜쌍수가 되는 것이며……

위의 글에 오늘날 한국불교 교단에서 중요 과제로 논의되고 있는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다. 특히 종교 간의 화합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스님은 종교와 과학의 일체화를 주장했다. ‘과학의 완수를 촉구함’이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과학이 없으면 진정한 종교가 없고, 종교가 없으면 진정한 과학이 없다고 하면서 과학과 종교가 하나가 될 때 진정한 세계평화가 온다고 주장했다. 스님의 종교에 대한 문제의식은 오늘날 한국의 종교계가 가지고 있는 고뇌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4. 맺음말-활공의 화두를 어떻게 풀 것인가

소천 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탐사하면서 스님은 현대 한국 불교사에서 매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는 탁월한 사상가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스님은 불교계에서 생소한 편이다. 소천 스님의 사상이 세간에 가까이 다가온 것은 1993년 광덕 스님과 소천 스님 맏상좌인 창봉 스님이 주도하여 발간한 《소천선사문집》(Ⅰ · Ⅱ)라고 볼 수 있다. 소천 스님에 대한 글은 효림 스님과 대학 시절부터 활공사상에 심취한 권경술 교수 등 재가불자가 집필했다. 또한 광덕 스님의 전법 활동을 조명하는 여러 글에서 소천 스님이 단편적으로 소개되곤 하였다. 김광식 교수는 《우리 시대의 큰스님》이라는 책에서 근현대 고승 31인에 소천 스님을 선정하여 스님의 행적과 사상을 종합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소천 스님의 사상은 광덕 스님의 불광 운동으로 이어졌다. 56세에 비구가 된 소천 스님과 20대 청년인 광덕 스님의 만남은 평생 지속되었는데, 두 분은 나이를 넘어 ‘뜻’으로 도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소천 스님의 ‘뜻’은 그가 시대를 앞선 선각자임을 말해준다. 금강반야에서 도출한 활공사상은 현대 한국불교가 나아갈 비전과 좌표를 제시하고 있다. 하화중생의 실천불교 지향이 바로 활공사상이다. 오늘날 많이 논의되고 있는 공업(共業)도 이미 활공사상에서 펼쳐진 것이다.

서구의 저명한 불교학자 콘즈(E. Conze)는 현대사회와 문명이 불교에 큰 도전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도전에 대한 새로운 응전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과거의 교의를 해석하는 데 상당한 ‘적응’이 필요함과 동시에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붓다의 다르마는 항상 여실(如實)하지만 대상과 시절을 따라 연기한다. 붓다 다르마가 새로운 시절을 맞아 장엄한 모습으로 어떻게 현현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소천 스님이 던진 활공의 화두이다. 오늘의 한국불교가 이 화두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
이 글을 쓰게 된 인연에 깊이 감사한다. 이제야 나는 소천 스님과 만난 것이다. ■


방영준 
성신여자대학교 윤리교육과 명예교수. 성균관대학교와 서울대 대학원 졸업(윤리 및 사회사상 전공). 성신여대 사범대학장, 자유공동체연구회 회장 역임. 우관상 수상. 주요 저서로 《아나키즘-저항과 희망》 《공동체, 생명, 가치》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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