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만해사상 실천선양회 Home
불교평론 소개 l 구독신청 l 지난호 보기
 
 인기키워드 : 사색과 성찰, 청규, ,
> 뉴스 > 기획시리즈 > 현대한국 불교학자
     
[기획연재] 현대한국의 불교학자 <> 이재열
조계종조 논쟁을 촉발한 재야의 이론가
[72호] 2017년 12월 01일 (금) 양혜원 gala78@hanmail.net

들어가는 말

현실에 존재하는 권위에 맞서고 잘못을 바로잡는 일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터이다. 만성화된 오류를 지적하기 위한 명분은, 이미 오류에 속한 자신의 삶조차 비판적으로 직시하고 고친 후에야 얻어질 수 있다. 여기 암울한 불교계의 현실을 마주하고 이를 개혁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 실천한 사람이 있다. 승려 혹은 강단의 학자로 생을 마감하지 못하여 이제 거의 기억해 주는 이 없는, 그러나 행적을 더듬다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인물, 거사 이재열(李在烈, 1915~1981)이 있다.


1. 불화 이재열의 생애

불화(佛化) 이재열은 거사, 혹은 법사라고 불리는 것에서 보듯 재가의 재야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행적은 워낙에 영성(零星)하여 ‘이재열’이라는 이름으로 잘 찾아지지 않으며, 단편적 글과 기사들이 여기저기 약간씩 인용된 채 파편화되어 돌아다님을 보게 된다. 이는 불화가 특정한 소속 없이 생을 마감한 데다 ‘재열’이라는 이름은 40대 초반인 1958년에 바꾼 것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본래 이름은 ‘재병(載丙)’이며, 1946년에 나온 그의 저서 《조선불교사의 연구(朝鮮佛敎史之硏究)(第一)》(東溪文化硏揚社)도 개명 전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승단이나 학계에 적을 두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것은 문도나 제자에게 뜻이 이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그의 생애는 자세히 상고되지 못하다가 근래에야 이철교 〈불화 이재열〉(《세속에 핀 연꽃》 2003)에서 상세한 삶이 정리되어 소개된 바 있다. 그 내용에 기대어 살펴보면 불화의 생애가 일제강점기 초반부터 해방 후 이승만, 박정희 정권까지 걸쳐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조선 끝자락의 전통적 교육과 새로운 개화 교육의 혜택을 동시에 받으며 시대의 변화를 온몸으로 겪은 지식인이자, 현재 조계종의 출범 과정과 불교계 분규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를 지나온 출가자이고 또 재가자였다.

출생과 성장

불화는 1915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석범(李錫範)과 어머니 김성녀(金性女)의 4남 3녀 중 막내였는데, 아들이 없는 당숙에게 양자로 들어가 생부모와 양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다만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고 병치레가 그치지 않았는데, 이러한 병약함 때문에 훗날 ‘재병’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재열’로 개명하게 되었다. 재병의 ‘병(丙)’ 자가 병(病)과 통한다고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취학 전까지는 한학자였던 생부 이석범에게 배우다가 열한 살이 되던 해에 대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만주로 갈 요량으로 안변에서 잠시 출가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만주로 가는 것이 여의치 않자 다시 귀가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불화는 아마 이 시기에 불가와 인연을 맺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6년 만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상경한 이듬해인 1932년 4월 14일 봉선사에서 출가하였다. 그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이때 대허태오(大虛泰旿)를 은사로, 운허용하(耘虛龍夏)를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고 기환(基幻)이라는 법명을 얻게 되었다.

출가와 안목의 확장

출가 후 1935년 4월까지 3년 동안 봉선사 홍법강원에서 사미과와 초등과, 중등과를 수료하였으며, 1935년 여름에 춘천 청평사 선원에서 안거하였다. 전통적 강원교육과 선원을 거친 불화는 선진 교육제도에 대한 관심으로 곧바로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이에 재적 사찰인 봉선사로부터 유학 동안 5원씩의 학비 보조를 약속받고 백용성 선사의 보증으로 도항증을 발급받아, 1936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 아이치현의 임제종 묘흥선림(妙興禪林)에 머물렀는데, 여기서 묘흥선림 전공과 제1학년을 수료한 후 오사카로 옮겨 1937년 3월에 졸업하였다.

돌아오자 그는 곧 서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하고, 아울러 개운사에서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에게 비구계를 받았다. 또한 이 무렵 그는 스스로 개명을 하였는데, 1938년 7월 이름을 이석불화(李釋佛化)로 바꾸었다. 전시(戰時) 상황에서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육은 불화의 학구열을 채워주지 못하였다. 그는 1939년 9월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불화는 동경 일본대학 전문부 종교과에 입학하여 일본의 교육제도를 연구하고자 하였다. 그는 조선불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아 유능한 인물이 양성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 유학을 통해 장래에 조선 불교계의 동량이 될 인재를 양성할 교육제도를 모색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불화의 일본 유학과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점은, 첫 유학 때 오사카에서 평생의 지기인 법운(法雲) 이종익(李種益, 1912~1991)을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종익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유학 온 것이었는데, 일본에서 시작된 이들의 인연은 학문은 물론 이후 치열하게 제기된 불교계의 개혁, 종조 논쟁까지 함께 헤쳐 가는 평생의 도반이자 지기로 이어졌다. 두 번째 일본 유학 때 불화는 이종익과 함께 자취하며 생활하였다.

두 번째 일본 유학 때 눈에 띄는 점은, 수학 과정 중 종교교육 과목 리포트를 쓰면서 훗날 종조설 주장의 시원적 틀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리포트 주제는 ‘조계태조 불일보조 국사의 종교교육에 대하여’였는데, 이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보조국사의 종교교육관에 큰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더하여 불화는 1941년, 이 시기에 강압적으로 행해진 창씨개명 정책에 따라, 스스로 원효원(元曉院)으로 창씨 하고 원효원불화(元曉院佛化)로 개명하였다. 훗날 권상로가 불화의 보조종조론에 대하여 반박 글을 쓰면서 〈원효원에 기(寄)함〉이라고 했는데, 이는 불화를 지칭한 것이다.

원효와 지눌, 지행합일의 길

일본 유학 중 종교교육에 관해 공부하면서 불화가 위와 같이 원효와 지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그의 지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이론의 궁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향한 실천행에 큰 가치를 두고 있었다. 그의 결기는 이후의 행보를 통해 확인된다. 해방 후 식민지 불교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개혁 과정에서 기득권의 강고한 벽에 부딪혔을 때, 불화는 법운 이종익과 함께 환속 성명을 발표하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처가 절대다수를 이루던 상태였고 불화 자신도 대처였음을 생각할 때, 환속 성명은 비판적 자기반성을 통해 스스로 출가자로서 정체성을 포기하는 일대 결단이었다. 자신을 내려놓음으로써 새로운 교단은 대처가 아닌 수행승에 의해 주도되어야 한다는 신념과 결기를 천명한 것이다.

불화의 이러한 행보는 자신이 새로운 이름으로 선택한 ‘원효원불화’에 참으로 걸맞은 것이었다. 원효의 무애행이 자발적 환속을 통한 거사의 삶으로 드러났듯, 불화의 지행합일적 삶 역시 비판적 자기성찰을 통해 스스로 승려라는 이름을 버리면서 한층 성숙한 면모를 드러내었다. 승려를 포기한 불화의 선택은 불교적 삶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앎을 실천하며 중생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며, 거리낌 없이 불교계의 개혁을 부르짖을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과거 원효는 승려를 포기하고 승단 밖에서 거사로 생을 마감하여 한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존재가 되었었다. 그러나 그 깨달음에 대한 학문적 성취와 신행일미의 삶은 훗날 재조명되며 문도가 없음에도 저절로 그 빛이 드러나게 되었다. 불화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삶은 불교계의 개혁을 위해 자신조차 비판의 칼날 위에 올릴 만큼 치열하고 뜨거웠으나, 승단에도 학계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생을 마감하였다. 그래서 이른바 교단정화 기간 동안 비구승 측의 이론 및 사상의 핵심 논리를 제공한 인물임에도 거의 주목받지 못해 왔다. 그러나 현 조계종 성립사 내지 조계종 종조론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면 될수록 그 빛을 감추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드러나지 못한다면 일찍이 법운 이종익이 1981년 5월 불화의 49재 추도식에서 탄식 조로 뱉은 말을 다시 인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방 이듬해 11월경에 《조선불교사의 연구》라는 400페이지의 유인물을 발표한 것은 실로 형의 피와 땀의 결정으로서 한국문학사상 큰 개척이요, 발명이었던 것임을 안목이 있는 몇몇 학자는 확인하는 바이었네. 그 뒤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35~36년 동안 부단히 그 과업에 심혈을 쏟아온바 …… 한국학계에서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였던 것이나, 그 학설을 제대로 이해하고 논평할 자조차 희소하다는 것은 한국학계를 위하여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구료.”


2. 이재열의 활동과 사상

불화는 평생을 조계종사라는 하나의 주제에 골몰하였다. 그의 연구는 재야 사학자의 것이라기엔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한 사료들을 섭렵하고 있으나, 발표할 만한 학술지의 지면을 얻기가 어려워 대중잡지나 자비출판의 유인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 주장에 논리적 비약이나 견강부회가 있다는 한계가 지적되고, 여러 종조론(宗祖論)이 제기되는 가운데 감정적 충돌이 일기도 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불화의 격한 언어 때문에 그의 연구를 평가절하해 왔던 경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일제강점기에 촉발된 조계종 종조론을 되짚어 보고 해방 이후 이른바 교단정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중 비구 측 논리와 이념의 핵심 제공자 중 하나였던 불화의 주장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다음에서는 1941년 태고사법 인가로부터 불교계가 어떤 종조론을 채택해 왔는가를 중심으로 이재열의 활동과 사상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1) 교단혁신 운동과 조계종 종조 논쟁
1941년 태고종조론 채택과 불화의 반박

일제강점기인 1941년 5월 조선총독부가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太古寺法)’을 인가하면서 ‘조계종’이 발족되었다. 이 태고사법 제1조를 보면 “태고사 본말사는 조선불교조계종을 봉(奉)한다”고 하였고, 제4조에서는 “본종은 태고보우 국사를 종조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태고종조론(太古宗祖論)은 당시 불교계에서 널리 받들던 설로, 포광(包光) 김영수(金映遂)가 〈조계선종에 취하야〉 혹은 〈조선불교 종지에 대하야〉 등의 글을 통해 강력하게 주장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조계종의 종조설은 태고종조론뿐 아니라 몇 가지가 더 제기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능화(李能和)는 일찍이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의 〈보조하시설조계종(普照下始設曹溪宗)〉에서 “조계종은 보조지눌에 의해서 비로소 개립되었으며, 따라서 조계종의 종조는 보조지눌”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퇴경(退耕) 권상로(權相老)의 경우에는 〈고조파(古祖派)의 신발견〉에서 도의종조론(道義宗祖論)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이에 불화는 종조에 대해 궁구하며 각종 사료를 검토한 결과 신라시대의 도의(道義)는 조계종 성립 4백여 년 전이고 태고는 조계종 성립 약 2백여 년 후이므로 조계종의 종조나 중흥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조계종의 종조는 보조지눌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불화는 잘못 규정된 조계종 종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태고사법 공포 이듬해인 1942년에 태고종조설을 비판하는 〈조계종 원류 및 전등사의 근본적 연구(曹溪宗原流及傳燈史之根本的硏究)〉와 〈조계종 전등보 및 개종 교지(曹溪宗傳燈譜竝開宗敎旨)〉 등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태고는 조계종 성립 후 2백 년 뒤의 인물로 고려 말에 원에 들어가 임제종 승려 석옥의 법을 받아왔으니 조계종의 종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조계종과 관계없는 태고를 종조로 삼는 것은 ‘환부역조(換父易祖)’하는 사이비 학자들의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였다.

불화의 이 과감한 주장은 불교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불화와 함께 보조종조설을 주장한 이종익은 “당시 퇴경 · 포광은 종단의 원로이며, 또 학계에서는 아직 그들의 설을 믿고 있던 터라 불화의 성명서가 문제가 됐다. 종헌 · 종단을 무시하고 원로 대덕에 불경(不敬)하며 5백 년 동안 신봉하여온 태고조(太古祖)까지 깔아버린다 하여 종회에 이것을 부의(付議)하여 불화를 종단에서 도첩(度牒)을 체탈하고 승적(僧籍)에서 제명하였다.”고 회고하였다.

해방 후 조선불교교헌의 공포와 불화의 교조 봉대 건의

이렇게 시작된 조계종 종조론에 대한 논의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불교계는 해방을 맞아 식민불교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혁신교단을 건립하려는 움직임으로 부산하였다. 그러던 중 1946년 5월에 ‘조선불교교헌’이 공포되었는데, 여기서는 종명이나 종조를 직접적으로 명시하지 않는 모호한 양상을 보였다. 이에 불화는 〈교조 봉대(奉戴)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하고, 조선불교 총무원의 제3회 중앙교무회의에 대비하여 기존에 썼던 〈조계종 원류 및 전등사의 근본적 연구〉와 〈조계종 전등보 및 개종 교지〉를 개편하여 《조선불교사의 연구(朝鮮佛敎史之硏究)(第一)》(東溪文化硏揚社, 1946)를 자비출판하고, 이 책의 부록으로 〈조선불교교헌 개정안〉을 첨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출판 과정은 녹록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불교사의 연구》 서문에서 불화는 그 일련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 소책자는 약 오년 전에 치안방해란 이유하에 출판허가를 취소당하였던 〈조계종 원류 및 전등사의 근본적 연구〉와 〈조계종 전등보 및 개종 교지〉 2부를 개편한 것이다. 회고하건대 동명고녀(東明高女)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만주에 보내 출판하려고 한역(漢譯)도 하여보고, 일본에 보내 상재(上梓)하려고 일역(日譯)도 하다가 전쟁으로 인하여 중도에 폐지하였던 것을 시급히 개편하고 보니 내용에 있어 소략한 것이 많았다. ……이렇듯 불완전한 것을 2~3일이란 단시일에 수만 원이란 금액을 차용하여서 출판하게 된 것은 금반 총무원에서 개최되는 해방 후 제3회 중앙교무회의(1946)에 연내로 생각하던 소감을 참고로 진언하려는 미지(微志)가 그리한 것이다.

위 서문에서 말하는 5년 전이란 1941년 태고사법에서 태고종조설을 택하자 불화가 보조종조설로 이를 반박하여 도첩을 체탈당했던 시점이다. 그 여파였는지 1천여 매에 이르는 〈조계종 원류 및 전등사의 근본적 연구〉와 〈조계종 전등보 및 개종 교지〉는, 조계종 종정 방한암(方漢巖)과 송광사 삼일선원 조실 이효봉(李曉峰), 조계강원 주실 임운양(林雲壤) 등이 불화의 연구를 지지하고, 안진호와 이능화가 직접 교열까지 보아주었음에도 치안방해라는 이유로 출판 허가가 돌연 취소되었다. 그 원고를 해방 후 총무원의 중앙교무회의에 올리기 위해 다시 소략하게 개편하여 1946년에야 출간하게 되었다.

1954년 보조종조론의 채택

그러나 교단의 혁신을 갈망하는 청년 승려들의 요구는 좀처럼 채택되지 못하였고 특히 비구 ・ 대처 간의 갈등까지 중첩되면서 불교계의 혼란이 더욱 가중되어 갔다. 이 와중에 불화와 법운이 환속 성명을 발표하여 교단은 대처가 아닌 비구가 주도하여야 한다는 결기를 천명한 것이었다. 결국 1954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나라’고 유시하면서 이른바 교단정화가 시작되기에 이르렀다.

승단의 절대다수가 대처인 상황에서, 불교혁신화를 주도하던 법운과 불화, 이대의, 문정영, 강석주, 채벽암 등은 교단정화 운동을 발기하였다. 동년 6월 24일 발기인대회를 개최하고 정금오(鄭金烏)를 위원장으로 김적음(金寂音)을 부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8월과 9월에 열린 제1~2차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에서 ‘불교조계종 헌장’을 채택하였다.

이 헌장의 채택은 불화가 주장한 보조종조론이 드디어 관철된 것이었다. 즉, 헌장에는 “신라 선종 사굴산파조 통효범일을 원조(遠祖)로 하고 고려 조계종조 보조지눌을 종조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1941년 공포된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의 태고종조론이 비로소 부정되고 불화와 법운 등이 주장하던 보조종조론이 채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불교조계종 헌장 반포 이후 종조에 대한 격론이 일었다. 1954년 10월 3일 선학원에서 권상로와 불화 이재열은 조계종의 종조를 놓고 격하게 대립하였고, 이로 인하여 불붙은 이른바 ‘종조논쟁’은 교단정화의 여러 사안 가운데 가장 예민한 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더하여 청정비구로 존경받던 종정 만암이 보조종조설에 대해 환부역조라며 종정직을 사퇴하고 대처승 측으로 돌아서면서 교단은 일대 혼란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1962년 통합종단의 발족과 태고종조론 채택

1961년의 5 ・ 16 군사정변은 불교계 내부의 혼란 상황에도 일정한 전기가 되었다. 사회 안정 차원에서 불교계의 분규를 안정시키고자 한 군사정권은 비구와 대처 양측에서 각 다섯 명의 대표를 뽑아 불교재건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후 회의를 거쳐 재건비상종회를 구성하였으며, 이 재건비상종회에서 1962년 3월 25일 새 종헌을 확정 공포하였다. 그 결과 4월 11일에 마침내 통합종단이 출범하게 되었다. 그런데 종헌 제3조를 보면 “본종은 헌덕왕 5년에 조계혜능 조사의 증법손 서당지장 선사에게서 심인을 받은 도의 국사를 종조로 하고 고려의 태고보우 국사를 중흥조로 하여 이하 청허와 부휴의 양 법맥을 계계승승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비구 측에서는 1954년 교단정화의 이름으로 천명한 보조종조론을 별다른 논의를 거치지 않은 채 포기한 것이다. 이에 불화는 종단에 건의서와 성명서를 제출하는 등 수정을 요구하였으나 이미 환속하여 아무런 적을 가지지 못한 그의 목소리는 별다른 파장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병약한 그는 1975년 폐암을 선고받고 1981년 3월 19일 자택에서 조용히 삶을 마감했다.

지금까지 조계종의 종조설은 보조종조론으로 대표되는 불화 이재열과 이종익의 주장, 김영수에서 성철, 지관으로 이어지는 태고종조론으로 대별된 상태로 흘러왔으며, 그 외에 도의, 범일 등이 종조로 주장되기도 하였다. 최근의 연구 경향은 보조종조설과 태고종조설 양측의 주장이 모두 무리한 면이 있다고 평가하는 실정이기는 하나, 교단이든 학계든 종조 논쟁에서만큼은 견해의 대립이 매우 첨예하다. 다만 1994년 반포된 현재 조계종의 종헌은 도의선사를 종조로 하고, 보조지눌이 중천하였으며 태고보우가 중흥조가 된다고 하여 도의종조설과 보조종조설, 태고종조설을 절충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조계종에서도 종조설과 관련하여 깊은 고민이 있었음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2) 불화 이재열의 《조선불교사의 연구(朝鮮佛敎史之硏究)》

1946년 불화가 자비 출판한 《조선불교사의 연구(朝鮮佛敎史之硏究)》는 그의 주장을 수록한 유일한 저서이다. 그러나 저서의 출판 부수가 많지 못하고 현재 구하여 보기가 쉽지 않아 참고에 어려움이 있다. 또한 비슷한 시기 조선불교에 대한 식견을 밝힌 인물로 이능화, 권상로, 김영수, 이종익 등이 현재 학계에서 널리 회자되는 데 반해, 또 다른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있는 불화의 저서는 관심에서 소외되어 왔다. 아마 불화가 승단이나 학계에서 활동하던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저서의 내용으로 미루어 광범위한 사료를 수집하고 이를 해석해낸 조선불교에 대한 그의 독특한 식견은 해당 시기 불교계 지식인의 불교사관을 드러내는 동시에 법통설 논쟁과 관련하여 핵심 논점들을 건드리고 있어 검토되어야 마땅할 것으로 보인다.

불화의 저서는 내용상 연구방법론을 먼저 다루고 사료비판과 더불어 그에 근거한 구체적 접근을 시도하는 등 일본에서 수학한 근대적 지식인의 면모를 십분 드러내고 있다. 또한 그 내용 역시 흥미로운데, 학계에서 현재까지 논란이 있는 오교양종에 대한 나름의 식견을 밝히고 불교사 시대구분을 시도하는 등, 조선불교와 관련된 중요하고도 대표적 논점들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음이 주목된다. 원래의 원고에 비해 소략하게 출간하였다는 이 저서만으로도 조선불교에 대한 불화의 관심과 공부가 얼마나 깊었는지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불화의 저서에서 드러나는 몇몇 대표적 주장은 소략하나마 이미 이철교 〈불화 이재열〉(《세속에 핀 연꽃》 2003)의 말미에 소개된 바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불화 저서의 전체적 틀을 드러내고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 구체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그 정확한 서지와 전체 목차를 수록해 두고자 한다. 특히 불화 저서의 목차는 내용이 세밀하기도 하지만, 목차에 해당 장, 절 내용의 핵심적 내용을 부기하고 있어 그 내용을 훑는 것만으로도 책에 실린 내용과 주장을 소개하는 데 유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불화 저서의 정확한 제목은 《조선불교사지연구(朝鮮佛敎史之硏究)(第一)》이며 동계문화연양사(東溪文化硏揚社)에서 1946년에 간행되었다. 저자명은 이재열의 개명 전 이름인 ‘불화학인 이재병(佛化學人 李載丙)’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전체 분량은 본문 306페이지에 부록 21페이지이다. 그 구체적 목차는 아래와 같다.

자서/범례

제1편 조선불교사 연구에 대한 관견(管見)
1. 서언
조선의 건국/불교의 기원/불교가 수입된 경로와 동기/조선불교란 정의/조선을 알자면 조선불교사를 연구하여야 한다/집필하는 동기

2. 조선불교의 개념
3종 개념/광의의 조선불교사/협의의 조선불교사는 교리사를 내포한 전등사

3. 사료의 수집과 선택
1은 사료의 수집/2는 사료의 선택

4. 사실사(事實史)의 연구법-대각묘지(大覺墓誌)의 문종(文宗) 비판
사료의 비판에 내적 비판과 외적 비판이 있음/흥왕사 대각국사묘지명의 문종은 송(宋)의 문종/법성종은 천태종/문종중에 고려의 밀교가 없음/열반종은 천태학에 소섭된 열반경학/묘지의 종명은 종의 정원법사 서장에 의한 것/오교는 현수교판/선적종은 문장적 표현이고 공인적 종명은 아님/영통사 대각비/보한집(補閑集)/송의 양걸 시/선봉사 대각비/달마선종/조계/종본과 대각과의 관계/대각은 고려에서 미증참선/선적종은 운문종의 별칭/대각이 전등한 종파/대각은 종명 변경사에 영향을 급치 못함/고려에의 화엄종/유가종/자은종/삼비를 비교하면 표면상에는 各異하나 내용상에는 일치/현행의 오교양종설은 위사(僞史)

5. 전등사(傳燈史)의 연구법
전등의 정의/전등은 전법에서 성립/조계태조 보조의 전등관/입법즉전등/양산파는 북종의 분파/보장록발은 태고이전에 있든 계문종풍/벽계종풍도 계문적 종풍/각진-졸암-구곡 삼대의 종풍/종풍은 전등의 구체적 증거/삼.체도즉전등설의 비판/고려의 전등은 염향사법/양산파 지의 전종은 사법의 승사/사찰관리적의 이동 /일사를 이종이 관리한 예/계종의 승적이 굴산하에 있게 된 인유/승적은 사법과는 불리하나 전등법과는 분리/일인지상에 이종의 법통을 승사한 예/태고이후에 쓴 조계종은 구곡이 종암의 법사임으로써다/이재매사로써 종풍이 쇠퇴하거든 어찌 체도즉전등이 가하랴-태고는 현재의 조선과는 무관한 산성

6. 고사료(古史料) 취급법
[1] 고조파비판/역사의 史厄/전등사상 이설은 모다 사액/1. 원형의 고조파 2. 고조파의 발견된 동기 3. 고조파의 비판/외적 비판/내적 비판/허단보설과 같은 안조적 조파
[2] 중관위작 《벽송당행적》 비판/1. 벽송행록원본과 개작본의 외적비판/2. 위작본의 내적 비판/경성당 휴옹행록후발 /불조원류벽계조/조선 간화선의 원류/이색의 대혜서장발/상총선사의 상소일단/대찬의 법집절요발/벽송의 진각국사어록초개간발/벽송의 종풍/3. 개작본은 중관의 위작본/선가귀감서/대흥사청허비의 대본은 중관찬 청허행장/표훈사청허비/위작본은 동복사에서 개판/표훈사비의 대본도 중관찬 청허행장

7. 결언

사학의 정의/조선불교사학자의 이념

제2편 고려 양종오교사(兩宗五敎史)의 근본적 연구
총설
종단 성립의 요건/지나 오가와 고려 구산의 성립/종단 존속의 요건은 교의와 청규/대각 당년의 종파/오교/구산/조계종/양종
각론
1. 화엄종
대각의 연보/송 정원의 서장/균여전/유가종사 혜덕비/본종약계
2. 해동종(일명 분황종, 도문종)
왕륜사기/관보/김포광교수설/려장신조본교기/제분황사효성문/서당화상비/계종과의 관계/도문종은 본종의 후신/본종의 약계
3. 자은종
현화사비/고려사/관고/자정비/종조는 순경
4. 유가종(일명 중도종)
혜덕비/관고/혜소국사 정현/종조는 태현/중도종은 본종의 후신/계종과의 관계/자은-유가 이종의 약계
5. 신인종
삼국유사/개종연기/본종이 중도종과 병합한 인유/본종의 약계
6. 총지종
삼국유/계종과의 관계/진언집총론/관고/본종의 법계는 선사/남산종과 병한한 인유/선종에 합한 인유/본종의 약계/개종연대고
7. 남산종
개국율사기/통도사사리기/관고/본종조는 자장/조계종은 동산, 조산에서 성립/본종약계
8. 소승종(일명 시흥종)
종고/대각의 간정성유식론단과서/보조의 간화결의론/시흥종은 본종의 후신/천태의공의 석가여래행적송/이색의 보제선사비/사찰의 주무종파의 변천고/열반종의 내력/본종조는 원광
9. 천태종(천태소자종)
연기/개종연대/구성요원은 선종구산/본종의 발전/선종은 조사선문/소자종은 묘련사파/묘련사중흥비/용암사중창기와 무외/만의사기와 신조
10. 천태법화종
원묘비/정명어록서/부암의 종풍은 법화종풍/천태종약계
11. 선종
[1] 구산종문
달마구산문이란 어원/구산조사/구산은 지나의 오가와 같다/총괄적 종명은 선종/선종의 연원/지나의 오가칠종과 고려의 구산십종과의 약계
[2] 임제파의 계종신설운동과 패망
혜소는 임제정인에게 사법/혜소의 법계
대감은 임제혜소에게 사법/대감이란 시호는 조계능대사의 시호
광지는 체도사 혜소에게 사법
관승도 혜소의 법사
연담은 대감의 사법/연담의 유형
효돈, 연의 등도 대감의 사법
조응은 대감의 사질
혜소파의 건종운동과 패망
[3] 선종구산의 쇠망
조계종조 보조즉전에의 종폐/용재총화 12종
12. 조계종
조계종의 흥기와 발전연표/조계종은 조계산종
13. 오교양종의 어원석(語源釋)
태종이 양종 못되는 논거/천태종이 법성종인 원인/오교와 교하제종의 배대/양종은 선종과 조계종
제3편 조계종 전등사(傳燈史)의 근본적 연구
발원문
1. 서언-전등사상에의 보조국사의 지위
2. 조계종의 종지
3. 이조(二祖) 진각국사의 전등사실(傳燈史實)
1. 조계 2세 진각은 체도사 보조에게 사법
2. 진각의 종풍
3. 희양원진은 보조에게 참학사법
4. 가지보각은 염향으로서 원사보조
4. 삼조(三祖) 청진국사의 전등사실
5. 조계3세 청진은 염향으로써 진각에게 사법
5. 사조(四祖) 진명국사의 전등사실
6. 조계4세 진명은 염향으로써 청진에게 사법
6. 오조(五祖) 원오국사의 전등사실
7. 조계5세 원오는 진명에게 참학 사법
8. 조계6세 원감은 체도사 원오에게 사법
9. 조계7세 자정은 원오의 사법
7. 육조(六祖) 자각국사의 전등사실
10. 조계8세 현각은 원오의 사법
11. 조계9세 담당은 원오의 사법
12. 조계10세 혜감은 원오에게 사법
8. 칠조(七祖) 각진국사의 전등사실
13. 조계13세 각진은 자각에게 참학사법
9 팔조(八祖) 졸암선사의 전등사실
14. 조계지로 졸암은 각진의 사법
10. 구조(九祖) 구곡국사의 전등사실
15. 판조계종사 구곡은 졸암의 사법
11. 십조(十祖) 벽계선사의 전등사실
16. 벽계는 구곡의 적통
12. 전등사상 이설(異說)과 그 논거
현조선불교의 종명고/(1) 법안나옹종통설/(2) 조계구곡종통설/(3) 조계나옹종통설/(4) 임제태고종통설/(5) 임제나옹종통설/(6) 조계진각종통설
13. 결언-변증법적으로 현현한 조도(祖道)
구산의 이설이 보조에게로 귀일, 천태벽계설도 또한 망단. 벽계는 구곡의 적통
부록
1.한암노사 서한 2.효봉선백 서한 3.운양강백 서한
4.교헌개정안(초) 5.현해탄을 건느며 6.求道者は須く誠心に歸れ


맺는말

불화의 뜨겁고 치열한 삶과 연구의 결과는 그의 생전에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하였다. 치열하게 대립했던 전사가 있어서인지 최근에는 법통에 대한 논쟁을 피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화와 같은 이의 종조 연구를 보았을 때, 치열한 고찰과 연구 과정에서 비로소 한국불교의 전통이 드러나고 그 색채가 분명해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소모적 논쟁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연구가 너무 무겁다. 비판 없이 기존설을 수용하고 현재의 지식 속에 갇혀서는 새로운 전통을 창조해갈 수 없다. 이제까지 흘러온 법통과 종지를 재해석하고 한국불교의 흐름이라는 열린 관점에서 현재의 조계종이 무엇을 이어가고 다시 창조해야 하는지, 당면한 문제를 직시하며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조계의 맥을 잇는다는 이들에게,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이들에게, 불화는 그 저서를 통해 묻고 있다. 지금 그대가 이어가는 것은 무엇이냐고. ■

 

양혜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조선 초기 법전의 ‘승(僧)’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은 〈고려 후기~조선 전기 면역승(免役僧)의 증가와 도첩제 시행의 성격〉 〈《경국대전》 개정판본의 시행 단계 재검토-보물 제1521호 《경국대전》 간행년 판정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댓글달기는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수(0)  
전체기사의견(0)
불교평론 소개독자투고불편신고구독신청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135-887]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12-9번지 MG타워빌딩 3층 | Tel 02-739-5781 | Fax 02-739-5782 | 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사성
Copyright 2007 불교평론.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udreview@hanmail.net
불교평론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및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