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위기와 인류미래의 연기관계를 규명

미래세대를 위한 더 깊은 민주주의: 생태민주주의

불교로 바라본 생태철학
남궁선
어떠한 생물일지라도 약하거나 강하고 굳세거나, 그리고 긴 것이건, 짧은 것이건, 중간치건, 굵은 것이건, 가는 것이건, 또한 작은 것이건, 큰 것이건,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살고 있는 것이나,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어느 누구도 남을 속여서는 안 된다. 또 어디서나 남을 경멸해서도 안 된다. 남을 골려줄 생각으로 화를 내어 남에게 고통을 주어서도 안 된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지키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
— 《자애경》 중에서

《자애경》의 이 내용은 인간의 행복만이 아니라 작건 크건 보이건 보이지 않건, 멀건 가깝건 모든 생명에 대해 자비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도 감동이지만,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에 대해서까지 깊은 자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깊은 울림이 있다.

최근 신고리 5 · 6호기 건설 문제를 둘러싸고 이루어진 공론화위원회의 활동은 더욱 발전된 민주주의 형태인 ‘숙의민주주의’로 평가되고 있다. 정치학자들은 칸톤별로 다양한 사회적 결정을 주민들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는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를 가장 진화된 민주주의로 말하고 있지만, 생태민주주의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현세대 중심주의와 인간 중심주의로 한정되어 있다. 다시 말해 현재 존재하는 많은 생명의 이해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미래세대의 이해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현재 살고 있는 인간의 이익만을 위해 작동되는 기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생태주의는 인간만이 아니라 온 생명과 미래세대의 이해를 고려한 생태민주주의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태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60년 수명의 신고리 5 · 6호기 건설을 승인한 공론화위원회의 결정은 현세대 중심의 결정이다. 앞으로 60년 사이에 사고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오롯이 미래세대가 막대한 피해를 당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오늘의 이 결정은 역사적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이러한 결정을 현세대가 할 권리가 있을까.

그 많던 공룡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남궁선 박사의 《불교로 바라본 생태철학》(민족사, 2017년 6월)이 주장하는 업설에 의하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고, 그 자유의지는 결국 과거 인류의 체험과 현재 가치관의 축적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현재 인간의 행위는 엄밀하게 말하면 완전한 자유의지에서 나온 행위가 아니며, 과거의 행위가 현재를 지배하고 있고 그렇게 지배된 세계관에 의거한 행동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현재의 우리 행위가 결국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과거에 그 많던 공룡은 어디 갔을까? 모두 죽어 썩어져 분자로 원자단위로 낱낱이 해체되어 미네랄 등, 영양염류가 되어 흙으로, 물로, 공기로 흩어져 비와 햇빛과 함께 식물로 모이고, 이것을 섭취한 다른 동물의 살이 되고 피가 된다. 이것이 다시 죽고 썩어 또 다른 생명의 세포가 되어 몸으로 신체조직으로 되살아난다. 지금 내 피부와 장기 속에는 수만 년 전 과거의 공룡이 들어 있으며, 수천 년 전 우리 조상들과 수많은 당시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와 바로 내가 된 것이다.

윤회는 업을 전제로 하며 업은 윤회의 씨앗을 만든다. 업은 행위를 한 뒤 사라지지만 그 업력은 남아서 세력이 되어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고 저자는 말한다. 업은 시공적으로 전개되는 과보의 개념으로 생명체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가 단절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된다. 그래서 미래세대는 곧 다시 태어날 나 자신이다. 이 업은 당대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 다음 대에 받는 ‘순생업’, 차후 세대에 과보를 받는 ‘순후업’으로 구분한다. 오늘날의 결정 중 몇 가지는 당대에 과보를 받지만 순후업과 같이 미래세대에게 나쁜 과보를 받게 만드는 행위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따라서 ‘지구라는 공간에 살아가는 짐승들은 우리와 뿌리가 같은 공업중생이므로 착취의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보호해야 할 또 다른 나’라고 역설한다.

업 사상을 기반으로 한 윤회사상은 다른 존재와 미래세대에게 깊은 자애심을 갖고 존중하는 생명관이다. 그러한 생명관에 바탕한 사회적 의사결정 시스템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차원에서 업 사상과 윤회는 바로 생태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중요한 사상적 근거가 된다.

복잡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인연과보의 현실

남궁선 박사의 이 책은 불교의 업 사상을 통해서 생태주의의 논거를 펼치고 있다. 세계를 선과 악, 천사와 악마, 익충과 해충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제압하거나 배제하는 서구의 사상과 달리, 불교에서는 모든 세계는 둘로 나눌 수 없고 서로 촘촘히 상의상존하는 관계이며 인연에 따라 과보를 받는 사실은 한 치의 오차가 없다. 이러한 유정의 의지적 행위로 인한 인연업보는 결국 현재 오늘날의 세계를 만들어왔다.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오늘의 결과는 운명에 의한 것도 절대자에 의한 것도 아니며 오롯이 개인과 집단의 자유의지 실천을 통해 축적된 것이기 때문에 바로 지금 우리의 의지적 실천으로 인해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이유가 된다고 한다.

오늘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받을 만해서 받는 과거의 과보이다. 비선형적 복잡계 이론에서 하나의 행위는 수많은 정교한 연관의 그물망을 통해 상상할 수 없는 곳에 중중무진의 영향을 미치며 변화를 만들어낸다. 바로 이러한 복잡계의 특징은 여러 요소가 연관되고 결합하여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내며(창발성), 사소한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민감성), 수많은 요소가 상호작용하며 꼬리에 꼬리는 물고 영향을 주고받는(되먹임) 현상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이 되먹임은 효과를 증폭시키는 양의 피드백과 스스로 제어하고 조절하는 음의 피드백을 통해 자연을 조절하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혼돈 속에서도 보편성을 지니며(자기 닮음) 자기 조직화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이룰 수 있을까

전 인류의 희망은 모든 나라가 미국처럼 풍요롭게 사는 것이다. 과거 20~30여 년 전에 우리는 미국보다 30년, 일본보다 10년 뒤졌다는 말을 하곤 했다. 우리가 궁극에 도달해야 할 목표가 바로 미국 문화(American Life Style)였던 것이다. 그런 미국은 세계 평균보다 5배나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 중국의 10배, 인도의 20배를 사용한다. 전 세계 70억 인구의 5%도 안 되는 미국이 세계의 화석연료 23%를 사용하고 있고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미국 유럽, 일본 등 20%의 잘사는 나라들이 세계 화석연료의 82%를 소비하고 있다. 이 말은 80%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18%의 화석연료를 함께 나눠 쓰고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 전 지구적인 위기인 기후변화 문제는 바로 잘사는 20%의 과도한 자원 소비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이다. 뒤집어 보면 80%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바로 그 가난 덕분에 지구는 아직도 결딴나지 않고 있고, 우리의 풍요와 낭비를 용인하는 것 아닌가. 결국 우리는 가난한 나라와 함께 평등하게 나눠 써야 할 자원을 착취하며 사는 것이고, 미래세대가 써야 할 자원까지 수탈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는 오계의 도둑질, 즉 투도업(偸盜業)을 짓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더욱이 소비가 미덕이라고 부추기고 자연의 정화능력이나 복원능력을 넘어서 물과 공기를 소비하고 환경오염 정화를 포함시키지 않는 가격정책도 결국 도둑질이라고 말한다.

생태맹, 생태치를 벋어나 생태품의 사회로

업은 생각과 마음이 짓는 사업(思業, 意業)과 신구의(身口意)의 말과 행동으로 짓는 사이업(思已業)으로 나뉘는데, 특히 마음으로 짓는 사업 즉, 의업이 바로 업의 근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업의 뿌리는 탐 · 진 · 치 3독심에서 비롯되며, 계 · 정 · 혜 3학을 통해 3독심을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지멸하는 것이 바로 자비의 실천이라고 한다.

개별적으로 짓는 불공업(不共業)과 그것들이 모여 인류가 만들어낸 공업이 바로 오늘의 결과를 초래했다. 그동안 사회변혁을 도모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개인의 변화보다 구조와 시스템의 변화를 우선시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결국 개인들의 마음이 만들어낸 사업(思業, 意業)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것이 모여 공업이 되고 사회와 세계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업은 복잡계의 상호작용을 통해 증상력(增上力)을 갖고 그 효과가 증폭되어 의미 있는 미래를 만든다고 강조한다. 구조의 변화만이 아니라 결국 수많은 개인의 노력과 실천, 깨달음과 각성이 복잡계의 변화를 자극하여 큰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는 점을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업의 영향으로 현재를 만들었고, 인간의 발전적 자유의지에 의한 행위가 현실을 개척하여 새로운 업을 지으며 미래를 창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인간은 물질적 탐욕에 빠진 자기중심적 이기주의로 인한 갈애(渴愛)로 인해 무명(無明)에 빠져 오늘과 같은 과보를 받게 되었지만, 다시 인간의 의지적 행동의 축적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전히 부족한 불교생태주의 논의

저자는 이러한 업 사상을 통해 악을 행하지 않고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불살생을 실천해야 하며 나아가 적극적인 선행으로써 방생을 실천하자고 제안한다. 단절된 개체생명 중심의 사고에서 생물 존중심의 불살생관, 온 생명의 조화와 균형을 통합적으로 보는 생태적 생명관, 중생주의로 전환할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생태맹, 생태치를 벗어나 생태적 품위를 갖는 사회로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벌이 꽃에서 꿀을 딸 때면 그 빛깔과 향기를 다치지 않게 한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지속가능한 사회의 금과옥조이다.

생태의 학술적 논의가 척박한 불교계 현실에서 남궁선 박사의 이 책은 필자 같은 환경활동가에겐 논리적 뒷받침을 해주는 반가운 역작이 아닐 수 없다. 다만, 하나뿐인 지구라는 유한성에 기반한 생태주의와 자원무한주의라는 잘못된 세계관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우리의 무명은 자원은 무한하다는 자원무한주의와 경제는 수직적으로 무한대로 성장할 것이라는 성장무한주의, 아울러 쓰고 버리는 직선적 세계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진보라고 생각하는 생산력주의의 잘못된 역사관에 대한 언급 역시 부족한 느낌이다. 특히 순환적 세계관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실천적 삶에 대한 언급과, 그러한 사상을 기반으로 한 보다 정교한 대안 제시가 아쉽다. 이 외에도 업 사상에 기반한 동물권이나 기타 자연권에 대한 심도 있는 접근이 있었다면 더욱 설득력을 높여 주었을 것이다.

한국불교가 전개해 온 환경운동은 이미 수경 스님의 오체투지와 삼보일배, 지율 스님의 도룡뇽 소송, 발우공양을 현대화한 정토회 에코붓다와 불교환경연대의 ‘빈 그릇 운동’ 등으로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을 주도하고 이끌어 왔다. 이렇게 풍부한 불교계의 실천적 성과를 교리적으로 해석해주고 학문적 성과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불교학계의 무관심에 크게 아쉬움을 느낀다. 부처님의 사상은 사회 현장에서 불교적 실천으로 구현될 때 가치가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남궁선 박사가 각고의 노력 끝에 선보인 역저가 현장과 결합하여 우리 사회의 실천적 성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 주요 저서로 《생태사회와 녹색불교》 등과, 공저로 《유기농을 누가 망치는가》 《녹색당과 녹색정치》 《생태생명의 위기와 대안적 서알》 등이 있다. 현재 한살림 연수위원, 모심과 살림연구소 감사, 환경운동연합 정책위원, 정토회 에코붓다 이사, 전국귀농운동본부 이사, 귀농정책연구소 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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