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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채상식 《일연(一然), 그의 생애와 사상》
선승 일연, 신앙과 역사의 합일을 꾀하다
[72호] 2017년 12월 01일 (금) 정병삼 jbsam@sm.ac.kr

한 인물의 삶이 그 시대의 치열한 변화를 나타낸다면, 그래서 바람직한 지성의 길을 걸었다면, 그 자취를 찾는 작업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오늘날의 눈으로 전통시대를 판단하는 것은 인식 기준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큰 얼개만은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고려 후기 격변기를 살았던 일연(一然, 1206~1289)에게서 그런 길을 걸었던 지성인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일연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 대개는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떠올리게 된다. 이는 《삼국유사》가 우리 고대문화를 폭넓게 탐구할 수 있도록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주는 너무 소중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연은 고려 후기 불교계의 중심인물로서 여러 의미 있는 활동을 펼쳤던 지식인이다. 선(禪)에 뛰어난 수행자이자 저술가였으며 교계의 지도자였다. 《삼국유사》는 그가 시대적 과제를 도외시하지 않고 역사의 흐름과 함께하고자 했던 한 모습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연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방면에서 살펴보고 이를 종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삼국유사》를 다룬 책은 많지만, 일연을 본격적으로 다룬 저서는 아직 거의 없는 편이다. 《일연, 그의 생애와 사상》은 그런 의미에서 우선 학술적인 의의가 크다.

책의 내용
저자 채상식 교수는 일연 연구의 본격적인 장을 열었던 연구자이다. 《일연, 그의 생애와 사상》은 채 교수의 40년 연구를 한데 모아 일연을 그 시대의 의식인으로 자리매김한 결정체이다.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제1장은 일연 연구의 기초적 접근이다. 먼저 일연 연구의 현황에서 일연 비문, 사상적 경향, 《삼국유사》의 찬술 문제를 중심으로 이제까지의 연구 상황을 점검하였다. 그리고 일연의 생애를 살피는 데 기본 자료가 되는 일연비(一然碑)의 현상과 복원 문제를 상세하게 다루었다.
저자는 일연의 불교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생존했던 당시 동아시아 사상계를 점검하는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제창한다. 이제까지 일연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시도도 많지 않았지만, 보다 거시적인 관점의 접근을 강조하는 신선한 논의로 생각된다. 일연이 남긴 《중편조동오위》의 번역과 이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의 필요성은 향후 일연 연구의 중요한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매우 타당하다. 아울러 새로운 일연비 탁본 출현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내비치는 것도 연구의 일차적 태도인 자료 보완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제2장은 일연의 생애와 활약상이다. 일연비의 비문 검토를 통해 일연의 생애와 가지산문의 추이를 살폈고, 일연비 음기에 새겨진 후원자의 분석을 통해 일연의 단월과 그 성격을 살폈다. 특히 일연을 후원한 고위관료 정안(鄭晏)과의 연계와 강화도에서의 활동을 다루었다. 이어 일연비에 보이는 비의 건립자이자 후계자인 청분(淸玢)과 산립(山立) 두 표기의 존재에 대한 이견(異見)을 분석하여 이들이 동일인이라는 주장을 다시금 명확히 하였다. 다른 견해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숙고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이라 설득력이 있다.
일연의 생애에서 그가 만년에 수행자의 길을 지속하지 않고 최고의 승직을 받고 화려한 길을 택한 것은 많은 고뇌와 성찰과 암울한 시대상에 대한 인식에 따른 것으로 분석한 것이 눈길을 끈다. 《삼국유사》는 바로 그런 시대 인식과 소명의 산물이라고 평가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연의 만년에 충렬왕 측근 세력인 단월들이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충족하기 위해 일연을 지원했지만, 정작 일연 자신은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희망을 제시하고 이민족의 침탈에 대해 민족자존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삼국유사》를 찬술했다고 보았다. 이 점이 일연이 시대를 안고 실천하며 살았던 지성인의 면모를 떠올리게 한다.
제3장은 일연의 사상과 그 특징이다. 첫째, 일연의 행적과 사상적 경향에서는 그의 행적과 선사상, 저술과 사상적 경향을 분석하여 선 사상가로서 일연을 부각했다. 둘째,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에 보이는 사상과 특징에서는 이 책의 내용상의 특징과 편찬 의도를 살폈다. 앞서는 행적 중심으로 선 사상가로서 일연을 드러냈다면, 여기서는 선서의 편찬을 통해 일연의 선사상을 밝히고자 했다. 셋째, 인흥사(仁興社)와 관음신앙에서는 일연이 《역대연표(歷代年表)》와 《법화경보문품》 등 여러 전적을 간행했던 인흥사에서 관음신앙과 다라니신앙 등에 큰 관심을 두게 된 사정을 살핌으로써 일연의 사상적 기반을 확장하였다.
일연의 종합적 이해에 가장 의미 있는 보완점을 제시한 것이 사상을 분석한 이 부분이다. 저자는 일연의 사상이 시기적으로 변화를 보였다고 파악한다. 초기 간화선을 중심축에 둔 일연의 사상은, 선과 교학과 밀교로 확대되었고, 다양한 사상적 학문적 기반은 남해의 대장경 조성에 참여하면서 더욱 성숙하였으며, 만년에 기층민이 고통받는 시대적 상황을 목도하며 신앙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
특히 《중편조동오위》의 저술은 운문종의 《조정사원》 중편과 함께 일연이 다양한 선사상의 흐름을 종합하고 점검하려는 것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연이 간화선만을 수용하지 않고 북송으로부터 받아들인 다양하고 새로운 선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음을 평가하였다. 이 점은 일연의 선사상 연구에 주목되는 지적이다.
제4장은 인흥사 간 《역대연표》와 《삼국유사》의 찬술이다. 첫째, 《역대연표》의 내용 분석에서는 매우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역대연표》의 현상과 내용을 분석하였다. 둘째, 《삼국유사》의 찬술 기반에서는 일연의 학문 경향과 시대인식, 《삼국유사》 찬술의 기초작업, 그 의미와 독창성을 체계적으로 고찰하였다. 셋째, 《삼국유사》의 간행과 범어사본의 자료적 가치에서는 현전하는 《삼국유사》 판본을 소개하고 범어사 소장 선초 간행 판본을 다른 판본과 비교하여 그 자료적 가치를 살폈다.
저자는 일연이 인흥사에서 《역대연표》를 간행한 것은 이전 비슬산에서 다양한 사상과 신앙을 섭렵했던 것보다 《삼국유사》 편찬에 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평가하였다. 저자는 또 일연의 《삼국유사》 편찬 작업은 그 방대한 자료 수집과 집필을 고려할 때 그의 단독 찬술이라기보다는 문도들이 참여하여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삼국유사》 집필 시기는 여러 상황으로 보아 인흥사에서 연표 제작에 나선 이후 운문사에 머물 때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인각사에서 만년을 보낸 시기에 마무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1281년(76세)부터 1289년(84세)의 시기이다. 반면 일연이 50여 년간 사료를 수집했다는 견해는 선승으로서 길에 더 중심을 두었던 일연의 행적에는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저자는 판본의 교감 못지않게 내용에 대한 교감을 통해 《삼국유사》의 표준본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필자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삼국유사》 관련 연구자들이 힘주어 말하는 표준본 작성의 필요성에 대한 피력이다.
본론의 마지막으로 이들 분석 내용을 종합하여 제5장 결론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부록으로 일연비의 본문과 음기에 대한 가장 정리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역주를 실었다.


일연의 시대 인식‐격동기 사회의 민중들의 고통
일연이 살던 시대는 격변의 시대였다. 일연은 무신의난이 일어나 최씨 정권이 정착되던 시기에 태어나서, 몽골의 침공에 고통당하던 시대를 살다가, 그 압제를 받던 시기에 생을 마쳤다. 고려 전기 불교는 화엄종과 법상종 중심의 교종 불교가 문벌귀족 체제와 깊은 연계 속에서 주류를 이루었고, 의천 이후 선종과 천태종이 가세하여 주도적인 흐름을 형성하였다. 무신들이 일으킨 정변으로 고려사회는 기존 문신귀족 체제가 부정되고 새로운 정권이 전개되었다. 문무의 정권 투쟁에서부터 기층사회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서 변화가 일어났고, 불교계도 이러한 변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무신 집권 초기에 불교계는 교선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최충헌이 집권하고 나서 선종 위주로 교단이 개편되었다. 최충헌은 정혜쌍수를 표방하며 새로운 결사운동을 개창한 지눌의 정혜사(定慧社, 뒤의 수선사(修禪社))에 관심을 갖고 이를 지원하였으며, 지겸을 중심으로 선종이 불교계를 주도하도록 하였다. 최충헌을 이은 최이 또한 수선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적극 지원하면서 선종 중심의 불교계 운영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어 요세의 주도로 정토관과 참법을 내세운 백련사(白蓮社)가 지방인들의 지원 속에 개창되어 수선사와 양립하였다. 수선사와 백련사는 지방사회 관료와 지식인 및 지방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새로운 불교운동을 주도하였다.

일연 연구의 종합적 관점‐총관과 세찰
일연이 출가하던 때의 불교계는 이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일연 연구는 개인 연구를 통해 사회 상황과 역사성을 살필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매우 의미 있는 시대와 주제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일연 연구의 핵심이 사상과 신앙과 저술의 종합적인 분석에 있다고 말한다.
“일연과 관련된 연구는 무엇보다 실증과 종합적인 인식 태도, 곧 총관(總觀) 세찰(細察)하는 태도를 함께 취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여기에 저자가 추구한 일연 연구의 명제가 선명히 드러난다.
한 인물과 그가 살던 시대를 밝히기 위해서는 명확한 자료를 구하고 이를 토대로 그가 추구하던 삶의 모습과, 이루고자 하던 바람직한 시대상을 찾아내야 한다. 이는 인물과 시대에 대한 다방면의 통찰을 필수로 한다. 일연비 비문의 꼼꼼한 대조, 상해까지 가서 확인한 《해동금석원정고본》의 일연비 자료, 일연비에 등장하는 단월에 대한 미시적 분석, 《역대연표》의 분석과 왕 재위 연도의 꼼꼼한 계산, 《삼국유사》 판본의 판각 사례와 이체자(異體字) 분석 등은 저자의 ‘세찰’ 자세를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일연은 기본적으로 선사상을 익히고 수행한 선승이었다. 젊은 시절에 화두를 참구하며 깨달음의 길을 추구하였고, 입적하기 전까지 여러 산승들과 선문답을 하고 입적 직전에도 선기 높은 문답을 남긴 채 고요히 입적하였다. 그러나 저자가 강조하려는 것은 일연이 시대적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그를 껴안고 살았던 실천수행자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선 수행자가 소홀하기 쉬운 신앙에도 노력을 기울였다고 평가했다. 무신정권에 따른 피폐된 현실과 몽골과의 오랜 전쟁, 원 간섭기에 처한 과중한 부담으로 큰 피해를 받던 농민과 천민들에게 일연은 희망과 구원을 위한 신앙을 강조하였고, 그런 노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민중들에게 신앙적 대안을 목표로 저술한 《삼국유사》였다는 것이다. 이 면은 ‘총관’의 태도이다.
일연은 신앙과 역사의 합일을 모색했다는 판단이 필자가 인식하는 저자의 일연 연구 귀결이다. 일연의 생애와 사상을 사상과 신앙과 저술로 면밀하게 검토하여 내린 이 귀결에 이 책이 갖는 연구사적 의의가 잘 드러나 있다. ■

정병삼 / 숙명여자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박사). 신라 불교사상과 문화를 비롯한 한국불교사와 한국문화사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의상화엄사상 연구》 《일연과 삼국유사》 《나는 오늘 사찰에 간다》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전통의 흐름》(공저) 《중국화엄사상사》(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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