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율적 이타주의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 이 글은 불교평론과 경희대 비폭력연구소가 주관한 열린논단(2017년 11월 16일)에서 발제한 내용이다.

1. 들어가면서

담준 스님
동국대 강사
대승불교의 보살(Bodhisattva)은 위로는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키고(上求菩提), 아래로는 인간을 모든 고통으로부터 구제하겠다는(下化衆生) 서원을 세운 존재를 말한다. 보살은 자비의 이타적 행위를 통해 자신을 구제하는[자리이타(自利利他)] 삶을 추구한다.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고자 하는 보살의 행위는 자비의 이타행으로서 6바라밀의 제1 덕목인 보시(dāna)를 통해 구체화된다 이 보시의 현대적 개념이 기부이다.

불교의 자리이타행은 남을 돕고 남의 생명을 지키려는 노력이 결국은 본인의 안녕을 증진한다는 가르침을 토대로 한다. 현대적 의미의 자리이타의 버전(version)이 공리주의의 윤리체계를 바탕으로 한 최근의 효율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이다. 효율적 이타주의는 남을 위하는 행동이 결국 나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각자의 한도 내에서 선(善)을 최대화하자는 것이다. 빈곤이나 기아 등 세계가 직면한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적성과 능력이 허락하는 한 효율적 방법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윤리적 운동이다. 효율적 이타주의는 보시나 기부가 지닌 공덕에 대해 관념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자기 수행이자 이타행으로서 불교의 자리이타행을 최근의 서양의 윤리적 흐름인 효율적 이타주의와 비교 설명하려는 시도는 자칫 형식적이거나 외형적인 유사성에 기댄 피상적 논의에 그칠 우려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자리이타행을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현대의 윤리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또 실천 가능한 윤리적 해법을 찾으려는 시도가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불교 윤리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음은 물론 새로운 의미 차원을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까지도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를 한다. 무엇보다 비교의 방법이 유의미한 까닭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자리이타행을 종교로서 불교의 도덕원리로만 한정하면 불교의 테두리를 벗어난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도덕원리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종교 간 상호존중과 관용적 공존을 중시하는 종교다원주의 사회이고 표면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이다. 종교를 믿지 않는 비율은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윤리는 특정 종교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모두 공평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 이성이나 양심에 입각한 윤리일 수밖에 없다. 도덕원리가 유사한 상황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보편화 가능성(universalizability)을 요구한다면, 특정 종교에 기반을 둔 윤리적 교설로 이 조건을 충족시키기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에서는 종교에 바탕을 둔 윤리는 아니지만,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돕는 것이 결국은 자신의 안녕을 증진하는 길이라고 말하는 효율적 이타주의를 주목하고자 한다. 모든 유정적 존재(sentient being)는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는 핵심적 전제를 자리이타의 윤리와 효율적 이타주의는 공유하고 있다. 필자는 효율적 이타주의를 종교로서 불교를 전제하지 않는 자리이타의 윤리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현대적 의미의 불교 자리이타의 실천방안을 효율적 이타주의를 통해 모색해보고자 하는 시도는 불교적 가치의 사회적 구현을 위해서라도 충분히 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2. 자리이타행과 효율적 이타주의

1) 자리이타행의 원리: 자리와 이타의 양립 가능성

불교에서 말하는 자리이타의 윤리적인 삶은 일방적인 자기이익의 추구나 타인을 위한 전적인 자기희생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행복에 대한 추구가 타인의 행복 증진과 서로 관계할 때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도 이롭게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겠는가.”라는 초기경전의 한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건강한 자기이익[自利]의 추구를 부정하지 않는다. 즉 이는 자기 자신을 이롭게 못 하면서 다른 존재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이고, 다른 존재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참다운 행복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익은 단순히 현재의 물질적 이익이나 쾌락 충족의 차원이라기보다는 고차원적이고 넓은 범위에 적용되는 고통의 감소와 함께 최대의 행복을 산출하는 상태를 뜻한다. ‘자리’와 ‘이타’의 관계를 붓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남의 이익을 위해서도 도를 닦지 않는 사람, 남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도를 닦지만 남을 위해서는 도를 닦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 둘 다를 위해 도를 닦는 사람이다…… 이 가운데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 둘 다를 위해서 도를 닦는 사람은 네 사람 가운데 으뜸이고 가장 뛰어나고 가장 훌륭하고 가장 높고 가장 탁월하다.
— 《화장터 나무토막경》(AN4:95)

이처럼 ‘자리’와 ‘이타’의 부류는 ‘자리’와 ‘이타’ 모두를 추구하는 것, 둘째는 자리만을 추구하는 것, 셋째는 이타만을 추구하는 것, 마지막으로 자리와 이타의 어느 것도 추구하지 않는 순서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서 자리와 이타 둘 다를 추구하는 것이 으뜸임은 물론이다. 이때 자리, 즉 ‘자신에게 이로운 것(attattha)’은 아라한과(arahatta)를, ‘남들에게 이로운 것’이란 필수품을 보시하는 자(paccaya-dāyaka)들에게 생기는 큰 결실의 이익(maha-pphal-ānisaṁ)을 말하는데, 자리가 이타에 선행한다.

하지만 대승에서는 “자신을 위해 남을 해치면 나중에 지옥에서 고통받게 되지만 남들을 위해 자기가 해를 입으면 하는 일마다 성공하게 된다네.”라는 설명에서 보는 것처럼, 이타를 우선시하여 그 중심축이 ‘이타를 통한 자리의 추구’로 옮겨진다. 이는 기존의 불교 전통과 차별화되는 대승불교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강력한 중생 구제의 원력에 있기 때문이다.

자리와 이타의 추구에서 초기불교 자리이타의 자비와는 그 선후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다고 어느 하나가 배제되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초기불교의 아라한이 자리이타적 자비의 삶을 모범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대승의 보살도 이와 동일한 삶을 지향하고 있다. 보살의 자리이타 실천은 《대승기신론》의 어떻게 수행하면 신심(信心)에 이를 것인가[修行信心分]에 대한 수행의 오문(五門) 중 시문(施門)에 대한 설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어떻게 시문(施門)을 수행하는가? 만약 일체의 와서 구하여 찾는 사람을 보거든 가지고 있는 재물을 힘닿는 대로 베풀어 줌으로써 스스로 간탐(慳貪)을 버리어 저로 하여금 환희케 하며, 만약 액난(厄難) · 공포 · 위핍(危逼)을 받는 사람을 보거든 자기의 능력에 따라 무외(無畏)를 베풀어주며, 만약 중생이 와서 법을 구하는 이가 있으면 자기가 아는 대로 방편으로 설하되 명리(名利)나 공경을 탐내어 찾아서는 안 되고 오직 자리이타만을 생각하여 보리에 회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살(菩薩, bodhisattva)’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겠다는 원력의 삶을 사는 존재이다. 하지만 일방적인 자기 삶의 희생을 통해 타자를 열반으로 인도하지는 않는다. 보살의 행위는 이타를 배제한 자리가 아니라 이타 그 자체가 자리인 ‘둘이 아닌[不二]’ 방식으로 전개되고, 공성을 바탕으로 한 자비 공덕의 성취로 실현된다. 자기이익과 타자의 이익의 조화(自利卽利他)의 방법에 의하기 때문에 결국 보살정신의 궁극의 가치인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가 가능하다.

2) 효율적 이타주의의 사고(思考)와 방법

효율적 이타주의는 공리주의에 바탕을 둔 윤리체계이다. 효율적 이타주의의 도덕적 판단은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늘리려는 공리주의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여타의 조건이 같다면 마땅히 최대의 선을 선택해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효율적 이타주의는 ‘다른 사람에게 가능한 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이성과 실증을 통해 모색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일반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타주의가 자기희생을 통해 타인의 행복과 복리 증진을 추구한다면, 효율적 이타주의는 자신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요구하지도 않고, 남을 위한 최선이 자신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면 이를 최상의 결과로 간주한다. 자기이익에 반하는 자기희생의 거부는 고전적 공리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밀은 자신의 행복을 희생함으로써 타인의 행복 증진이 가능하다면, 그 사회는 대단히 불완전한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대체적인 윤리학 전통이 그 이익이 장기적인 관점에서든, 혹은 단기적인 관점에서든 자기이익의 추구를 비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해왔다는 왔다면, 이에 반해 공리주의는 자신 삶의 의미들을 보호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이익들을 허용하고 증진시켜 나가는 것을 가치 있는 삶으로 받아들인다. 효율적 이타주의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피터 싱어 또한, “효율적 이타주의자의 대다수는 본인의 행동이 희생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라고 하여, 건강한 자기이익의 추구를 인정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익’의 추구라고 했을 때, ‘이익’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 건강한 혹은 정당한 자기이익(self-interest)의 추구와 이기주의(selfishness)를 구분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레이첼즈는 이기주의(selfishness)와 자기이익(self-interest)의 두 개념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간주한다. 예를 들어 내가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다면 분명히 나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 것이지만 그 누구도 나를 ‘이기적’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이를 닦거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나 법을 준수하는 것도 모두 나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그 어느 것도 이기적인 행위라고 할 수 없다. ‘이기주의’가 타인의 이익을 침해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면서 말 그대로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모든 행위를 지칭한다면, ‘자기이익’은 타인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기이익적 동기에서 하는 행동들은 당연히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충분히 가능하다. 엄밀히 말하면 자기 이익 추구의 삶이 이기주의와는 관계가 없다. 이와 같다면 도덕의 영역에서 ‘자기이익’이 완전히 배제될 이유는 없으며, 이타주의와 양립 가능한 지혜롭고 현명한 이기주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와 함께 자기이익이 소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욕구 역시 동시에 중요하며, 특히 아주 적은 비용의 기부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도덕적이다. 기부 혹은 선행을 하는 방법에서 효율적 이타주의자는 감정적이고 명분에 따라 할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따져서 어떤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것인지를 계산해서 정하라고 조언한다. 가령 굶어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프리카 소년의 사진을 보고 연민의 마음으로 바로 관련 후원 자선단체에 돈을 기부했다고 치자. 그러면 착한 일을 했다는 심리적 만족감은 느낄지 모르지만, 이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고 나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은 늘 열려 있다. 즉 제대로 알고 기부하지 않는다면 실질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는 해를 끼칠 수도 있다. 남을 돕고 싶다는 마음에서 기부한다고 해서 그것이 제대로 된 도움을 전달하지는 않는다.

최근 한 자선단체 대표가 비영리법인과 주식회사를 함께 차려놓고 후원자들을 물색해 결손아동 후원금 명목으로 3년간 모은 기부금 128억 원으로 호화생활을 즐겼다는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는 다른 사람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돕는 확실한 방법은 무엇인지, 선의(善意)가 오히려 해악을 끼치는 부작용 없이 최대한의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탓이다. 진정으로 남을 돕고 싶다면 그냥 돈만 낸다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잘해야’ 한다. 그래서 맥어스킬(W. MacAskill)은 아래 각주16)에서 제시한 5가지 항목을 참고하면 효율적인 기부처를 가려낼 수 있고, 남을 도울 때 쉽게 빠지는 함정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3. 자리이타행 혹은 무주상 보시행의 현대적 재해석

1) 무주상 보시의 의미와 그 실현을 위한 전제

대승의 대표적인 보살행의 실천 덕목으로서 6바라밀(saṭ-pāra-mita)은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서 해탈/열반을 성취하고 완성하는 데 필요한 여섯 가지 수단이다. 이 중 바라밀행의 첫 항목인 보시바라밀(dāna-pāramita)의 진정한 가치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제거하고 자비심을 촉진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이라는 데 있다. 이는 ‘나’라는 집착에서 비롯한 자아의식을 약화시키고 정화시키는 무의식적 과정이기도 하다.
보시바라밀은 세 가지 원칙 즉, 삼륜청정(三輪淸淨)이 되어야만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삼륜청정이 전제되지 않는 보시 행위는 탐진치 삼독을 정화시킬 수 없고, 일체중생에 대한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기 어렵다. 그냥 현실적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보시라면 몰라도 깨달음을 증득하고자 하는 보살의 길에서 추구되는 보시는 그야말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집착하지 않고 계산되지 않은 마음으로부터 비롯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경계(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이른바 색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할 것이며, 성 · 향 · 미 · 촉 · 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최상의 보시는 ‘내가 무엇을 남에게 베풀었다는 생각이 없는 무주상 보시이다. 내가 베풀었다는 집착을 가진 보시는 궁극적으로 깨달음으로 이끌지 못한다. 무주상 보시라야 생사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누리는 유루복(有漏福)이 아닌, 해탈에 이르게 하는 한량없는 복, 즉 무루복(無漏福)이 된다.

그러나 무주상 보시는 보살이 추구하는 최고의 보시이자 공덕이 되겠지만 과연 우리가 일상에서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윤리적 차원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 즉 무주상 보시의 보살행이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이 지나치게 높아 평범한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차원의 행위로 볼 수 있겠느냐는 질문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상적 경지의 윤리적 행위를 요구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윤리적 판단을 이끌어낼 만한 적절한 수준의 원칙부터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이 한층 실천 가능하고 바람직할 수 있다. 적절한 수준을 제시해야 한다 함은 현실적인 기대를 하는 사람들에게 권장할 수 있어서 거기에 맞추어 윤리적 실천을 할 수 있는 정도를 요구함을 말한다. 곧 보시를 권유하더라도 한층 자연스러운 방편은 자신의 이익을 바라는 보시, 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보시로부터 시작하여 그보다 큰 공덕이 있는 으뜸가는 보시[無住相 布施]의 순서대로 설하는 방식이 보다 바람직할 수 있다.

《보시경(Dāna-sutta)》(AN7:49)을 통해 이에 부합하는 적절한 예를 엿볼 수 있다. 이 경에서는 큰 결실, 큰 이익이 없는 보시와 큰 결실, 큰 이익이 있는 보시를 구분하고, 그 결실로 인한 태어남에 대해 설한다. 가장 먼저 기대를 갖고 하는 보시, 부(富)를 기대하며 하는 보시로부터 마지막으로 다만 마음을 장엄하고 마음의 필수품을 위해 하는 보시까지 차례대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마음을 장엄하고 마음의 필수품을 위해 하는 보시’가 가장 큰 결실과 이익이 있음은 물론이다. 《합송경(Saṅgīti sutta)》(D33)에서도 “보시 가운데 마음을 장엄하는 보시가 최상이다.”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마음을 장엄하는 보시’ 혹은 무주상 보시(無住相 布施)가 보시 중에서 가장 뛰어난 보시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기대를 갖고 하거나 혹은 상에 머물러 하는 보시라고 말할 수 있는 유주상 보시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설사 상이 있더라도 반복해서 보시 공덕을 쌓으면 천상에 태어날 수 있는 공덕을 쌓게 된다. 복덕을 쌓아 천상에 태어나려면 유주상 보시라도 꾸준히 해야 한다. 이를 반복해서 하다 보면 ‘원래 내 것은 없다’는 무아적 입장과 ‘가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지 않는 것이 무소유’라는 무주상 보시의 참다운 가치를 체득하게 된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에게 보시의 실천을 권유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은 각자가 실질적 ·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으로부터 출발하여, 무주상 보시가 아니더라도 보시 행위는 그 자체로서 보시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보시하는 사람에게도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되는 길임을 보이는 것이다. 보시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의 일차적 관심은 어떤 보시가 자신에게 심리적 만족감을 가져다주고, 또 이익이나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있기 때문이다.

효율적 이타주의자 또한 기부를 통한 성취감과 행복을 얻음과 동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큰 혜택이 돌아가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돈을 벌어서 물건을 더 산다고 더 행복해지지 않는 반면, 남을 돕는 데 쓰는 것은 행복감을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기부와 행복감은 상관관계를 보이고, 행복한 사람이 남도 잘 돕는다.

2) 보시/기부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접근의 필요성

현대사회는 복잡하고 다원화된 여러 가치를 전제하고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합의할 수 있는 보편적 설득력을 갖춘 이상적 윤리를 주장하기란 어렵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윤리는 각 사회계층의 다양성과 상이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이기적인 개인들이 어떻게 서로 공존할 수 있는가를 모색하고자 하는 판단 기준으로서 윤리이다.

규범 체계로서 법으로 제정하기는 어려우나 시민생활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체계로서,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도록 하한선을 규정해주는 최소도덕(minimum morality)을 요구한다. 최대도덕이 인간의 도덕적 가능성에 대한 최대의 희망과 당위를 담고 있다면, 최소도덕은 서양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도적 윤리관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사회 구성원이 반드시 행해야 하거나(도덕적 권장사항), 아니면 행해서는 안 되는(도덕적 금지사항) 규칙체계이다. 개인들 간의 이익이 갈등을 빚을 때 그것을 절충하고 조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요구되는 사회에서는 최대도덕(maximum morality)이 아무리 이상적이고 바람직해 보이더라도 그 현실적 실현 가능성이나 적용 가능성에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시민사회의 윤리는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하는 최소도덕으로서 의무윤리(duty ethics)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때 최소는 인간됨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윤리적 지점이고, 이 최소도덕이 제대로 이행(履行)되지 못할 경우, 아무리 바람직해 보일지라도 최대도덕은 관념적이고 무의미한 구두선에 그치기 쉽다. 이 최소도덕과 최대도덕의 관계는 비첨(Beauchamp)과 칠드레스(Childress)의 설명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표 1〉
의무(Obligation) 초과의무 (Beyond obligation)
(Supererogation)
강한 의무
(Strict obligation)

[1] 약한 의무
(Weak obligation)

[2] 의무를 넘어선
이상들
(Ideals Beyond
the obligatory)
[3] 성인/영웅의 이상들
(Saint and heroic ideals)
[4]

위의 〈표 1〉은 강한 의무(공통도덕에서의 핵심적인 원칙과 규칙들)로부터 약한 의무(공통도덕에서 일상적 기대의 주변에 있는 것)를 거쳐, 도덕적으로 요구되지 않는 것과 예외적으로 유덕한 것들의 영역까지의 연속선으로 되어 있다. 이 연속선은 자기희생의 연속적인 행위와 같은 높은 수준의 초과 의무에서 끝난다.
여기에서 의무(Obligation)를 기초로 하는 최소도덕은 우리 삶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한 토대가 된다. 어떤 사람에게 바른 행동이라면 관련된 비슷한 상황에서도 누구에게나 바른 행동이어야 하며, 이렇게 낮은 수준의 공통적 요소를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 최소도덕의 단계에 해당한다. 반면에 오른쪽의 초과의무적 행위(supererogatory acts)는 절대적 이타적인 행위로서 요청되는 도덕적 의무를 넘어서서 개인의 이상을 위해 수행되는 최대도덕의 차원이다. 세로의 점선이 말해주는 것처럼, 두 개의 범주는 엄격한 구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최대도덕으로서 초과의무는 최소도덕인 의무와 연속선 위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윤리적 인간(homo ethicus)은 최소도덕이나 의무에 만족하지 않고 최대도덕이나 초과의무의 영역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앞서 살펴본 집착과 이해타산이 없는 마음으로 베푸는 보살의 무주상 보시가 〈표 1〉의 오른쪽의 초과의무에 속하는 영역이라면, 유주상 보시는 왼쪽의 의무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타자에 대한 의무와 책임의 한계는 윤리학의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이다. 이 윤리학적 질문과 관련하여 공리주의와 효율적 이타주의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희생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면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있다. 무주상 보시와 같은 높은 수준의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가장 일상적인 삶의 현장,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주요 화두로 삼는다. 그렇다고 궁극적 도덕 이상으로서 무주상 보시와 같은 최대도덕의 차원을 방기(放棄)할 수는 없다. 최대도덕은 ‘의무를 넘어서는(Beyond obligation)’ 덕목으로서 우리 사회의 삶의 지평을 최대한 고양시키는 역할을 하고, 또 도덕적 이상은 언제나 우리가 지향해야 할 기준점으로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도덕의 이상을 존중해야 함은 마땅하지만, 레이첼즈가 ‘최소도덕’의 개념을 “자신의 행위로 인해 영향받을 모든 사람의 이익을 똑같이 고려하면서 이성에 따라 행동하려는 노력”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사회가 점점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고 비속(卑俗)해지고 있다고 느낀다면 우선 점검해 볼 것은 이 ‘최소도덕’의 지점이다. 레이첼즈의 ‘최소도덕’의 개념과 유사하게 싱어는 ‘이익 평등 고려의 원칙(the principle of equal consider-ation of interests)’을 제시한다.

이 원칙에 따르면 우리는 인종이나 성별과 상관없이 차별 없는 대우를 해야 하며, 나아가 인간이든 동물이든 고통을 받고 있으면 그 고통은 똑같이 중요하고, 우리는 그 고통을 덜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윤리적 의식은 나 아닌 타자의 고통에 대한 의식에서부터 비롯한다. 남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준다는 원칙에 의해 윤리적 행동을 결정한다.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윤리 공동체의 일원일 수 있는 필요조건일 뿐 아니라 충분조건이기도 하다. 싱어가 제시하는 윤리학은 일차적으로 타자나 다른 생명체가 느끼는 고통에 대한 감수성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자비 윤리학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불교의, 특히 대승의 가르침은 굶주림과 질병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음을 환기시킨다. 기아에 시달리는 빈민들은 우리의 약간의 원조만으로도 목숨을 구할 수 있으므로 원조는 자선이 아니라 의무이다.

효율적 이타주의의 사고에 따르면 보시/기부를 하면서 소중한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것은 공덕이 될 수도 있고 악업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준다는 점에서 어떤 종류의 지침보다도 뚜렷한 기준과 실천방법을 제시한다. 결국 주었다는 생각도 없이 결과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선의(善意)에 의거하여 행하는 보시는 공덕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과 세상을 망치기 쉽다. 좋은 목적을 위해 돈을 쓸 때는 그 용도가 되는 곳을 올바르게 알아 바른 이치로 써야 한다. 이 보시가 ‘바른 보시’ ‘현명한 보시’이다.


4. 나가면서

우리가 바라는 윤리적 삶은 자신의 이익을 넘어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일에 참여하는 삶이다. 대승의 보살 역시 자기의 이익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나아가 많은 생명체의 이익을 위해 세상을 향한 보시를 베풀고자 한다. 즉 세간적이고 출세간적 목표에 대해 올바르게 설하고, 가난한 자에게 보시하고, 불행에 빠진 자들을 위로하는 등 중생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을 실질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물론 상(相)에 머무름[住]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하는 무주상 보시가 무루(無漏)의 복을 가져오는 최상의 보시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적 덕목은 현실적이고도 실용적인 대안으로서 사회적 이타행의 구체적 제시와 실천일 것이다. 이와 함께 무주상 보시가 현실세계에서 수용할 수 있는 차원인가 하는 소박한 의문이 있음을 앞에서 이미 밝힌 바 있는데, 이는 자칫 실현 가능성 등을 따지지 않고 무주상 보시만을 상찬(賞讚)하거나 요구하게 되면 실천에 옮겨낼 수 없는 공허한 관념적 메아리에 그치거나, 보시의 싹을 자르게 하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오게 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깨달음으로까지 이끌 수 있는 무주상 보시의 가치 구현을 위해서라도, 보시는 효율적 이타주의의 사유와 방식을 통해 일상에서 실제적으로 수행(遂行)되고 드러나야 한다. 효율적 이타주의에 따르면 남을 돕지 않는 삶은 결코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실질적인 전략이 기부이고 보시이다. 보시나 기부를 통한 효율적 이타주의자로서 윤리적 삶은 힘들고 불편한 자기희생(self-sacrifice)이 아니고 열반, 자기완성(self-perfection)을 향한 삶이다.

전반적으로 보면 일본에서든 다른 국가에서든 자신을 불제자라고 칭하는 사람들 중에서 붓다의 삶과 가르침에 드러난 연민의 윤리적 삶을 실천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한 윤리학자의 충고가 과장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기부와 보시 등을 포함한 우리 사회가 바라는 윤리적 실천을 담보해내지 못하는 종교는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할 것이 자명하다. ■



담준 스님 /  동국대학교, 중앙승가대학교 강사. 중앙승가대학교 역경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윤리문화학과 졸업(석사, 박사) 주요 논문으로 〈원효 윤리사상에 관한 연구〉(박사학위논문), 〈원효 윤리의 공리주의적 ‘해석 가능성’ 검토〉 등이 있다. 불교학술진흥상 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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