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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산업혁명, 무엇이 걱정인가 / 이혜숙
[72호] 2017년 12월 01일 (금) 이혜숙 hesook56@hanmail.net

시작하는 말

이 글은 특별히 학술적이거나 이론적이지 않고, 우리의 평범한 생활 경험과 그로부터 갖게 되는 전망들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필자는 산업사회나 과학기술에 대한 연구를 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기술개발로 만들어진 생활기기조차도 충분히 잘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방면의 전문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를 고민해야 하는 까닭은,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근대적인 기계화와 대량생산에 의한 산업혁명이 한꺼번에 전개될 무렵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고, 오래지 않아 우리 세대는 전기와 정보기술에 바탕을 둔 3차 산업혁명 즉, PC와 인터넷의 디지털 문화를 얼떨결에 받아들이며 살아오던 참에 또다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혁명’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이라고 한다. 과연 지금 무엇이 그토록 ‘새롭고 급격하게’ 깨지고 세워진다는 것인가. 우리는 삶의 그 같은 변화를 알아차리고 있었는가. 돌아보면, 필자의 유년 시절은 가구별로 사용하는 전기에 ‘일반선’과 ‘특선’이 있었고, 혹시 공부하느라 전등불을 늦도록 키게 되면 어른들이 걱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너지가 부족했던 그 시절이 어느새 도시마다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는 시절로 바뀌었고, 급기야 각종 전열기로 취사를 하고 전기로 가는 자동차도 생겨났다. 또 1990년대 중반, 필자가 미국 어느 대학에 방문연구원으로 있던 당시 누군가 가져온 휴대전화를 신기한 듯 들여다보던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에 돌아오니, 벌써 수많은 사람이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그뿐만 아니라, 미국에 가기 전 필자는 아파트에서 생활쓰레기와 재활용품의 분리수거를 실천하고 있었는데 미국에서는 분리수거는커녕 캠퍼스 내에 담배꽁초가 사방에 떨어져 있는 걸 보기도 했다.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이 앞선 우리나라라는 점에서 자부심도 살짝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한국사회는 때때로 새로운 이슈를 재빠르게 수용하거나 반응하는 민감성이 있기는 한 것 같다. 그래서 요즘 사태에도 혹자는 “디지털 산업이 진화하고 있을 뿐, 4차 산업혁명은 없다. 유독 한국에서만 4차 산업혁명이 만병통치약인 듯 온 나라가 올인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어찌 되었건, 한국교육학술정보원에 들어가서 ‘4차 산업혁명’을 키워드로 검색해보면, 불과 2년 이내(2016~2017년 현재)임에도 800여 편의 학술지 논문과 350여 편의 단행본, 30여 편의 공개강의 자료 및 연구보고서 등이 나타난다. 여러 방송 매체들도 행여 질세라 이에 관한 특강을 대중에게 들려주고 있다. 어떤 이슈보다도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4차 산업혁명’이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최근 불교학 · 종교교육학 분야에서도 이 주제를 담은 학술 활동이 있었다. 주로 인공지능 · IOT(사물 인터넷) · 로봇 · 스마트시티 ·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등의 기술적 정보와 현황을 공유하고, 그 불교적 · 종교적 대응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외부환경이 이러한 가운데서 다시 우리 각자의 경험으로 돌아와 생각해보자. 특히 불교계 구성원들은 예컨대 IT(Information Technology) 기술을 담은 시스템을 얼마나 잘 이용하고 있을까. 솔직히 필자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사용은 하지만 아주 초보적인 수준에 있고, 카카오톡 하나도 마지못해 매우 소극적으로 참여하는데 독자 여러분의 경험은 어떠신지 궁금하다. 일반 불자 대중의 취향이 궁금한 것 못지않게, 사찰이나 종단 입장에서는 정보통신기술의 메가트렌드(megatrend)를 어느 정도로 이해하며 활용하고 있는지도 중요하게 생각된다. 과학기술 발전과 그런 신제품의 출시에 민감한 얼리 어댑터(early adopter, early taster)가 아니라 혹시 슬로 어댑터(slow adopter)인 불자라면, 4차 산업혁명과 같은 주제에 과연 관심이 있을까, 없을까.
그러나 얼핏 보더라도 디지털 기술혁명은 단지 포교 매체로서 IT나 인터넷 활용이라는 문제를 넘어서, 복잡하고 다양한 이슈를 종교계에 던지는 것 같다. 사이버 공간에 점점 더 집중되는 우리 삶의 구조로 말미암아, 본래 종교가 가졌던 의미인 시간과 공간의 초월성에 대한 추구가 새로운 풍토와 경험을 낳고 있다는 판단에 공감한다. 불교계 역시 차수(次數)를 달리하는 산업혁명의 흐름과 더불어 불자들의 신행(信行)에서 과연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그 변천사를 소급 추적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나 다른 기회로 미룬다. 이 글은 우선 4차 산업혁명의 내용과 그 영향력에 대한 전망들을 간략히 소개하고, 그것이 불교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으며, 불자들의 삶에 어떤 의미가 될 것인지를 추론해보고자 한다.


4차산업혁명, 무엇이 새로운가

잘 알다시피, 4차 산업혁명이란 2016년 초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이 이끄는 세계경제포럼(다보스 포럼)에서 국제적인 쟁점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슈밥에 의하면, 세상이 다면적이고 서로 깊게 연관된 가운데서 과학기술이 더 새롭고 뛰어난 역량을 갖춘 기술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4차 산업혁명은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전개 중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혁명은 개인과 사회 · 기업 · 경제 등에 전례 없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유도하고, 사회 전체 시스템의 변화를 수반한다고 본다. 소위 혁명적으로 개발되고 있는 기술의 영역은 인공지능 로봇 공학 · 생명공학 · 사물 인터넷 ·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등으로 크게 나눠볼 수 있다.

첫째, 인공지능 로봇 공학은 2차 산업혁명의 생산라인 자동화를 거쳐 축적되어온 자율적 기계장치의 총화라고 볼 수 있다. 생산 공정에서 노동 일부를 단순 반복하는 산업용 로봇의 역할은 이미 오래된 것이고, 매년 열리는 로봇 월드컵[로보컵]이나 군사 로봇 · 의료 로봇 등의 더욱 정교해진 기능과 무인운송용 드론과 차량의 자율주행기술 등이 여기에 속한다. 가까운 미래의 로봇은 전방위로 인간과 상호작용을 하게 되고, 로봇의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능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더 나아가 로봇 다리를 장착한 인간과 같이, 인간과 기계장치의 합성이 인간을 대체하는 트랜스 휴머니즘(trans-humanism)의 단계가 올 것이라고도 한다.
발달한 로봇이 인간세계의 방대한 자료를 수집 · 분석함으로써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되는 측면이 있지만, 반(反)유토피아적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이미 산업현장의 로봇이 생산 업무를 지휘하고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함으로써 노동자의 역할 기회와 소득을 줄이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사람보다는 로봇과의 상호작용이 더 빈번하게 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도 있다. 더욱이 로봇의 사용에서 윤리적이고 법적인 책임을 명확하게 규정하기도 전에, 다양한 역할들을 맡기게 되는 점에서 복잡하고 비관적인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자율주행차량의 기계적 기능적 오류로 접촉사고가 생긴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사고가 난 차의 소유자인가, 인공지능 기계인가, 기계나 차량의 제작자인가?

둘째, 생명공학은 인간과 동식물의 유전자를 편집(CRISPR/Cas 9)하거나 활성화하여 건강하고 우량한 개체를 만들고, 유전자 맞춤 치료로 난치병을 치료해서 장수(長壽)를 도모하는 기술 등에 관한 영역이다. 이런 기술을 이용하여 이미 피부와 뼈, 심장과 혈관조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또한, 이중용도 연구(dual-use research)로서, 전염병에 관계되는 바이러스와 같은 신생물질을 연구하는 합성생물학도 여기에 관련된다. ‘이중용도’란 연구 결과가 인간에게 혜택이 되기를 바라는 목적이지만 한편으로 위험성도 있는 과업이라는 점에서 우려를 안고 있다. 예컨대, 연구 결과를 통해서 병원성 바이러스와 같은 생물을 무기로 쓸 가능성에 대비하여 ‘생물무기 금지협약’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도 거론된다.

앞서 로봇 분야가 점점 더 똑똑해지고 자율성 수준이 높아져 왔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부족한 것은 인간처럼 스스로 도덕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한 문제이다. 따라서 윤리적 로봇이나 기계 윤리(machine ethics)를 더욱 주목하게 되듯이, 생명공학 분야에서도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기술개발 자체가 아니라 법 · 규제 · 윤리의 쟁점들이다. 생물학이란 기계적 개발과는 다른 차원의 파급성과 책임성을 갖는 영역이므로, 특정 연구의 책임자나 담당 기관의 양심적 결정으로 간단히 보호될 수 있는 성질의 윤리가 아니다. 더욱이 고급의 연구 성과들이 경쟁적으로 상업화되는 추세를 막기가 쉽지 않으니, 연구와 개발 과정의 투명한 설명과 그 안전한 관리를 위해서 국가 간의 더욱 긴밀한 협력과 감시 체제가 필요하다.

셋째, 사물 인터넷[Internet of Things]은 인터넷과 웹의 확장으로서 사람과 사물 · 프로세스와 데이터의 지능형 연결이다. 예컨대, 가정과 직장의 기기들이 정보통신기술로써 서로 기능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며, 이러한 종류의 개발 상품들을 이미 우리 TV에서도 일상적으로 광고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도시의 건물과 도로 등 전통적인 인프라에 정보통신기술을 통합함으로써 주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스마트시티[smart+connected community]가 탄생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송도가 그 사례로 소개된 바 있다. 이와 같이 대단위로 통합되는 네트워킹 기술은 주민의 생활상 편의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소셜 미디어의 기반이 됨으로써 시민 대중의 정치 · 사회적 역량을 결집시키고 직접 민주주의의 촉매작용을 할 수도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여러 차례의 촛불집회를 전개하면서 활용한 인터넷과 스마트폰 교신이 그 일례라고 본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개개인의 정보가 수집되고 정치권력이 시민들의 활동을 추적· 감시하는 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도 간과하면 안 될 것이다.

초연결(super-networking) 사회의 여러 가지 장점에 반(反)하여, 가장 심각한 위협 중 한 가지는 사이버 전쟁의 가능성일 것 같다. 사이버 공간이 과거의 육(陸) · 해(海) · 공(空)과 같은 전쟁터가 될 수 있고, 전쟁 시기와 평화 시기의 구분이 모호해지게 될 것이다. 언제라도 군사 시스템 · 에너지원 · 상수도 · 교통관리시설 등 국가의 기반시설에 해당하는 네트워크와 거기에 연결된 기기들이 해킹을 당하거나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의 적(敵)과 달리 광대역 사물 네트워킹 시대의 적은 실체가 뚜렷하지 않은 가운데, 일반 범죄자 · 해커 · 테러리스트 등과 같이 다양한 상대방들을 향하여 정부는 물론 평범한 개인들까지도 평소의 경계를 점점 더 강화해가야 할 것이다.

넷째, 증강현실(增强現實)이란, 사용자가 보고 있는 현실세계에 부가정보를 갖는 가상세계를 겹쳐서 하나의 영상으로 보여주는 기술이다. 영상을 겹침으로써 현실과 가상화면과의 구분이 모호해지도록 한 것이지만, 가상현실과는 달리 사용자가 실제 환경을 볼 수 있으므로 보다 나은 현실감과 동시에 부가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카메라로 주변을 비추면 인근에 있는 상점의 위치나 전화번호 등의 정보가 입체영상으로 표기된다. 또한 이 기술은 병원의 원격 의료진단 · 방송 · 건축 설계 · 제조공정 관리 등에 활용되고 있다. 증강현실을 실외에서 실현하는 것이 착용가능 컴퓨터(wearable computer)이다. 특히 머리에 쓰는 형태의 컴퓨터 화면장치는 사용자가 보는 실제 환경에 컴퓨터 그래픽 · 문자 등을 겹쳐 실시간으로 보여줌으로써 증강현실을 가능하게 한다. SF(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 등을 통해서 집단적으로 상상하던 세상과 그에 대한 정보가, 더 이상은 상상이 아니고 현실처럼 개개인들에게 제공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4차 산업혁명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였는데, 이 변화의 흐름은 산업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 전체를 디지털 그물망으로 철저히 파헤치고 있다. 이러한 세계는 ‘VUCA’ 즉 불안정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다의성(Ambiguity)의 특징이 있다고 한다. 4차 산업혁명의 본격적인 성공을 위한 조건으로서, 클라우스 슈밥이 제시한 네 가지 요소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소개한다. 첫째, 다중 이해관계자(multi-stakeholder)들이 서로 간의 경계를 허물고 더 밀접하게 연계되며 포용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맥락적(contextual) 지능이 필요하다. 둘째, 끊임없이 강력한 변화 즉 파괴적 혁신의 시대에 창의적이고도 민첩하게 대응하는 회복력은 정서(intelligence) 지능에 달려 있다. 정서는 두뇌와 마음이 만나는 교차지점으로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셋째, 과학기술이 개인 중심 사회를 조장하기 쉬운 만큼, 개인과 동시에 공동체적인 가치와 목적에 균형을 이루도록 고무적인 영감(inspired) 지능이 필요하며, 그것은 공유(sharing)와 신뢰가 핵심이다. 넷째, 앞서 세 가지 지능에 토대가 되는 것으로서 신체(physical) 지능 즉 건강한 몸과 생활의 관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4차산업혁명, 불교적으로는 무엇인가

앞서, 혁명적인 기술개발의 속도와 범위를 중심으로 산업사회 차원의 변화를 전망하는 가운데서, 혹은 낙관을 하고 혹은 비관을 하는 논리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배운 불교적 관점에서라면 장차 4차 산업혁명이 어떤 의미를 지니겠는지, 생각해볼 차례이다.

첫째, 불교는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고 무아[본질적 경계 없음]이며 오직 연기(緣起)한다는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무상한 세계인 산업사회의 변천이란, 그 변화의 속도감이 빠르거나 늦거나, 혹은 변화의 향방을 예상하였거나 예상하지 못하였거나, 그 현상은 우연히 벌어진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흐름이 누구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예정된 것은 아니며, 혹은 아무런 연유(緣由)도 없이 제멋대로 흘러갈 세상일은 더더욱 아니다. 만물만사가 서로 인연하는 법에 따라서 생주이멸(生住異滅)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불교이므로, 변화 그 자체는 불교적으로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소위 문명사에 ‘파괴적 혁신(disruption)’이라고 하는 4차 산업혁명의 흐름에 대해서도, 불교의 입장은 일단 자연스러운 인과론(因果論)으로 해석해야 옳을 것 같다. 여기서 ‘자연스럽다’는 말은 그대로 바람직하다거나 당연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사람들이 지금껏 추진해온 노력의 방향을 볼 때 어느 정도 예상될 만한 현상이므로 다짜고짜 과잉반응을 할 이유가 없겠다는 의미다.

돌이켜보면, 과학기술산업은 끊임없이 변천해왔고 그에 맞물려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의 제반 현상들도 변화하고 유동적이기 마련이었다[Volatility · Uncertainty]. 그와 같이 중생계 현실은 무상[生滅]하므로 괴로움이라고 불교는 가르친다. 변화무쌍으로 인한 괴로움이란, 만사가 불변이기를 바라거나 혹은 확실히 고정된 어떤 것으로 간주할 때 생겨나는 대내외적 갈등이다. 반면에 본래 무상하다는 이치를 통찰하고 확연히 알아차림으로써 긴장과 마찰의 소지가 줄어들 것이다. 예를 들어, 로봇과 디지털 기술이 점점 더 발달함으로써 인간의 입장이 위축될 것을 염려한다면, 일견 맞고 일견 틀리다고 말할 수 있다. 로봇과 인간의 관계도, 그간에 있어 왔던 몇 차례의 산업혁명처럼 일련의 전개과정을 거치면서 나름대로 조절이 되지는 않을까. 인공지능 로봇이 기계여서 문제라기보다는, 애당초 우리에게 낯선 것, 적응의 노력을 새로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걱정스러운 것이 아닐까. 새로운 경험에 개방적이지 않은 사람일수록 소위 ‘혁명적’ 변화라는 선전(宣傳)과 풍문 속에서 이즈음 지레 더 위협을 느끼게 되는 건 아닐까.

둘째, 불교는 만사만물이 저 홀로 생겨나는 법이 없고 상의상관[緣起]하는 관계로 존재함을 강조한다. 세상만사가 상호의존적인 관계성에서 예외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화엄사상과 인드라망의 비유는, 4차 산업혁명 디지털 시대의 ‘초연결(super-networking)’ 그물망 구조와 그에 따른 복잡성(Complexity)을 선도적으로 잘 짚어주는 개념이 아닌가 싶다. 사물 인터넷의 사통팔달하는 원리를 불교적으로 해석하자면, 무릇 생명 있는 것들은 서로 연계하고 상생하는 법을 거스르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 상관성의 원리를 잘 수용하여 삶의 기술[事]과 기기[物]가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상호작용의 순리를 따른다면, 적어도 세간적 차원에서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공존이 가능할 것으로, 불교는 가르친다. 아주 오래된 불교의 이러한 세계관이 최첨단 4차 산업혁명이 지향하는 가치와 전망에 근사(近似)한 것으로 느껴지는 게 매우 흥미롭다. 즉 스스로 파괴적 혁신을 거쳐 가치를 창출하고, ‘사물 간(事物 間) 기존의 경계를 허물어 더욱 깊이 포용하고 공유하는 것이 추구되는’ 4차 산업혁명과 불교에는 서로 공통되는 지향점이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로, 21세기 후반쯤이면 사람보다 영리한 로보사피엔스(Robo sapiens)가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도 있는데, 그렇다면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주장하던 인간 본위의 사고방식에 변화가 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불교는 세상 만물 중에서 인간만을 우선시하지 않고 또한 인간 몸[신체]의 고정된 실체성을 인정하지도 않는 입장이므로, 더불어 살아가기에는 로봇인들 사이보그인들 별문제가 아닐 것 같다. 만물의 서로 다른 경계와 차이를 사량분별(思量分別)하는 데 주력하기보다, 만물이 소통하고 평등하게 인연을 지어가는 원리에 더욱 주목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불교이다. 그러므로 만약 4차 산업혁명이, 그에 긍정적인 해설자들이 예상하는 방향으로 잘 발전되어 간다면, 결과적으로 어느 시대보다도 더욱 불교적인 세상을 구현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잠시 상상해본다.

하지만, 인류가 지나온 수차례 산업혁명과 그 변천 과정에서의 경험을 돌아보면 아무래도 ‘이해관계자들이 서로 간의 경계를 허물고 더 밀접하게 연계되며 포용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차원의 바람직한 발전을 기대하기란 쉽지가 않을 것 같다. 요컨대 인간과 첨단기술 사이에서 낯설고 긴장되는 상호관계의 문제보다도 더욱 심각한 것은, 발전된 기술과 기기들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이 여전히 많을 것이라는 점이다. 전차(前次) 산업혁명의 토대인 전기 에너지를 충분히 사용할 수 없는 인류가 아직도 많은 것을 보면, 4차 산업혁명의 성과를 정의롭게 공유하려는 데도 역시 장애(障礙)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 상호작용의 문제이다. 제아무리 로봇공학이나 생명공학이 발달해도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제한되고, 소득의 격차와 마찬가지로 IT와 디지털 생활 경험의 빈부 차이가 4차 산업사회에서도 불평등의 중대한 요인이 될 것으로 예상치 않을 수 없다. 사회적인 네트워킹[그물망]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사회공동체 구성원 중 일부가 위축되거나 불행할 때 여타의 구성원들만이 성장하거나 행복할 수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셋째, 디지털 시대에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통합한 증강현실은 매우 독특한 아이디어와 기술의 결합이겠지만, 불교적으로는 그다지 새로운 개념이 아닐 수 있다. 불교에서 역시 중요한 교리인 공(空) 개념과 그 사상적 발달은, 사물의 실재[有無]나 실체[我]에 대해서 혁명적이고 전환적으로 통찰하기를 가르쳐 왔다. 존재론적으로 무엇인가 있다 혹은 없다고 할 때, 그 실재성과 실체성에 대한 검증은 공(空) · 가(假) · 중(中)의 세 가지 명제로 귀결되었다. 공 · 가 · 중 삼제(三諦)는 사물이 없다고도 있다고도 단정하지 않는 불교 특유의 인식론이다. 다시 말하면), 있는 것 가운데서 동시에 없는 것을 보고, 없는 것에서 동시에 있는 것을 보는데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음이 또한 매우 중요한 수행의 덕목이다

감각에 의거(依據)하는 현실과 초감각적인 가상(假想)이 겹치는 현상은 종교 일반이 갖는 영적 체험의 특성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특히 불교 경전에는 여러 등장인물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현상에 대한 묘사가 많다. 아마도 불교적 세계관이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본질적으로 모호하다고 보는 인식론에 기초하기 때문일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삼계[欲界 · 色界 · 無色界]의 분류에서와같이 욕망과 형상이 갖춰진 세계가 있는가 하면, 욕망에서는 자유롭게 벗어나고 형상만 남은 세계 그리고 욕망도 형상도 모두 벗어난 세계를 설정하고 있다. 수행자가 선정(禪定) 삼매에 들어서 그와 같이 차원이 다른 세계를 넘나드는 그 경험이야말로, 실제와 가상이 통합된 증강현실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는 없을까.


4차산업혁명, 불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러면 과연 불교를 믿고 배우는 사람들은 혁명적이라고 예고되는 디지털 기술과 그 시대적 전망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 우선 새로운 것에 대한 민감성의 문제에 대해서 돌아보자. 실제로 한국의 불자들이 일상생활을 통해 체감하는 기술 발달의 속도나 심도가, 학자들의 말처럼 ‘혁명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것인가. 또는 그런 변화들에 대해서 특별히 더 긴장해야 할 이유가 불자들에게 따로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구체적인 답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이유도 모르는 채 조급함이나 불안감에 등을 떠밀리지 않고 찬찬히 자기 경험을 주체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기는 하다. 불자들에게 4차 산업혁명은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잘 알다시피 다보스 포럼 보고서는, 4차 산업혁명으로 노동시장이 파괴되어 대량실업이 불가피하고 경제적 불평등도 심화할 수밖에 없으므로 정부와 기업이 서둘러 교육과 고용정책을 혁신할 것을 주문했다. 실은 이미 앞서 3차의 산업혁명을 거쳐 오는 동안에도, 경제성장이 사회구성원의 소득으로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았고 고용이 더욱 불안정해진 구조적 문제가 지적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다시 4차 산업혁명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하여 즉각적으로 시행해야 할 방안으로, 인적 자원관리 기능을 혁신하고, 빅 데이터를 분석하며 직무 능력을 다양화하고, 유연한 조직체계를 구축하는 것 등이 제시된다. 거기다가 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할 대책으로는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의 융합 교육이 제도화되도록 교육체계를 혁신하고, 새로운 기술을 지속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평생교육을 장려한다. 기업은 경쟁보다 공생하는 전략이 생존에 필요불가결하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기업 사이의 협조체제를 구축하라고 한다.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의 혜택과 위험 사이에서 균형을 이룰 대비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원론적인 불교 교리가 아니라 현실의 불교인으로서 돌아보면, 과학자도 아니고 과학기술자도 아닌 우리가 일상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기술의 편리성을 경험하는 순간 또 새로운 기기의 출현과 그 변이(變異)의 속도에 압도되어 버린다. 과학기술 개발의 속도나 양(量)에 못지않게 중요한 가치 정향에 있어서, 윤리적인 기술과 발전의 지속가능성이 모두에게 염려되어야 할 사안일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이 시대가 인류사에 가히 혁명적인 변곡점이라고 인정하게 된다면 불교인으로서, 불교계의 일원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결론적인 그 답을 구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중단 없는 기술 개발과 기술 확장의 시대에 불자로서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 4차 산업혁명의 여러 분야 가운데서도 최우선적으로 관심이 가는 개발영역은 무엇일까. 어쩌면, 인간의 다양한 욕망 가운데서도 몸과 건강에 대한 염원이 가장 지속적으로 생명공학의 발전을 추동하는 힘이 될 것 같다. 최근의 유전자 편집이나 조작에 대한 불자들의 인식이 어떠한지가 궁금하였으나, 관련 연구의 자료를 얻지 못하고 다만,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을 물은 결과만 확인할 수 있었다. 2014년,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조사에서는 장기기증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응답자의 비율이 천주교 82.6%-개신교 80.0%-불교 76.9%이고, 기증 의사를 가진 응답자는 천주교 62.8%-개신교 59.6%-불교 59.4%로 조사되었다. 장기기증의 필요성이나 기증 의사를 막론하고 종교 간 응답 비율의 순위는 천주교-개신교-불교로 나타나서 불교가 가장 낮은 비율을 보였고, 동 연구소의 2011년 조사결과에서도 동일한 경향이 나타났다.

이 응답 결과에 대해서 더 자세한 조사 절차 없이 섣불리 해석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일단 불자들은 장기기증의 필요성이나 자신이 기증할 의사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라고 추정해본다. 장기기증과 이식 그리고 생명 연장 등에 대한 인식이 자신의 불교적 신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으나, 그것은 다른 기회로 미뤄야겠다. 여기서의 문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생명공학의 발전을 위해서 국가 사회적으로 투자되는 비용과 그 성과의 분배나 공유에 대해서도 불자들은 크게 관심이 없다는 것인지, 자세한 내막이 궁금하다. 불자들이 생명공학적인 서비스 외에도, 예를 들면 로봇이나 자율주행차량 등을 이용할 의사가 있는지, 혹은 단순히 온라인 소셜 미디어의 사용 정도나 수준이 어떠한지 등도 실제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그와 같이 불자들의 디지털 캐릭터를 파악하는 것은 한국불교계 안팎에 필요한 빅 데이터의 중요 부분을 구축하는 일이기도 하다.

둘째, 불자들은 혁신적인 산업과 과학기술이 어느 범위까지 개발되기를 바라는가. 이것은 주로 인공지능과 디지털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이 생명공학 · 로봇 공학 · 사물 인터넷 등 기존 분야 외에 또 어디에서 쓸모가 있을지에 대한 지식기반이 있어야 제대로 응답이 될 문제다. 불자들이 IT나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이해와 실용적 학습을 확대해가는 것이 좋겠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도 여기서 일반인에게 기술개발의 범위를 묻는 것은, 기술 사용상의 안전과 비밀보장 및 사생활 보호에 침해가 되는 각종의 윤리적 · 법적 책임 문제를 예상한 질문이기도 하다. 최근처럼 북한 핵미사일의 위협을 느낄 때라면, 군사 로봇 중에서도 킬러 로봇이나 드론의 개발을 강력히 요구할지도 모른다. 혹은 현재의 사찰경영을 염두하고 거기에 필요한 불교문화 콘텐츠의 온라인 네트워킹을 기대할 수 있겠으며, 뇌과학자들에 의해서 명상 수행의 성취도나 심도(深度)를 측정하는 도구와 기술이 개발되기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사찰 단위로 구성원 불자들의 연령별 · 성별 · 직업별 · 계층별 등에 따라서 디지털 기술의 필요성과 가치 공유에 대한 기대 정도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기술 개발과 그 사용에 관한 기대는 각자 욕망의 크기에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셋째, 불자들은 향후 4차 산업혁명의 성과를 어떻게 나누고자 하는가. 이것은, 디지털 혁명이 심화하여 갈수록 그 기술적 성과를 향유(享有)하는 데에서 구성원 사이의 독과점과 불평등이 생길 것을 예상하는 질문이다. 생명공학에서 첨단의료기술이 아무리 잘 개발되더라도 그것이 모두에게 이용 가능한 서비스가 될 가능성은 예측하기 어렵다. 반면, 로봇의 기술력으로 인하여 사람의 노동력이 사용될 기회가 줄어들 경우는 어렵지 않게 예상된다. 따라서 각자의 소득이 줄어들고 역할과 기회가 불평등하게 분배될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미리미리 그에 대한 정책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 경우, 개인적이고 사적인 대책은 실효성이 의심스럽기 때문에 집합적이고 공적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예로서, 불자들이 기본소득과 공유경제 등을 포함하여 안정된 사회보장 시스템의 필요성에 공감한다면, 그것을 여론화시켜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합의점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조직화를 위해서 시민운동가와 같은 불자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필요하다. 그 활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의견을 수렴하고 아울러 지역 내 오프라인 미팅을 가지며 다수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등, 전방위의 네트워킹 전략과 방법론이 필요할 것이다.


마무리하는 말

산업개발 · 과학기술 개발 · 불교 등과 같이 거대한(macro) 주제에 비추어서 불자 각인의 세부적(micro) 생활경험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내용을 구성해보려니까, 막상 글쓰기가 어려웠다. 무릇 담론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참여 이전에 나름대로 깊이 있는 성찰과 지식의 토대를 참여자들이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불자와 불교계의 IT와 디지털 특성을 사전에 조사한 데이터가 너무 부족하므로, 막연한 추론에 그치고 말았다. 세상사를 해석하는 데 흔히 그렇듯이, 불교의 원론을 그대로 옮겨서 일방적이고 선언적인 결론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

이혜숙 /  금강대 응용불교학과 객원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원 불교학과 철학박사. 동국대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사회복지사협회 국제교류위원 등 역임. 저서로 《종교사회복지(편저)》 《아시아의 종교분쟁과 평화운동(공저)》 역서로 《불교사회복지학》 등 다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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