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상을 가로질러 참자기와 존재를 찾는 여정

 

1. 불교와 정신분석의 만남*

정신분석과 불교, 특히 선불교는 통하는 지점이 적지 않다. 에리히 프롬은 정신분석과 선불교가 존재의 본성을 깨닫고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의 실현을 지향하는 방향성을 가졌다고 말한다. 프로이트의 계승자를 자임하는 자크 라캉은 1962~63년 진행한 《세미나 10, 불안》에서 선불교에 대해 말하면서 불교사상과 정신분석은 문제의식이 비슷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디서 구체적인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만남을 위한 키워드를 ‘욕망’에서 찾을 수 있다. 욕망 자체가 아니라 참된 존재에 대한 욕망에서 친화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여기에서부터 두 사상의 생산적 대화를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와 정신분석을 비교한 선행연구는 주로 ‘무아론’이나 주체이론, 불교의 아뢰야식과 무의식의 비교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필자가 보기에 논의를 집중해야 하는 전략적 지점은 욕망이다. 욕망은 주체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근거이면서 ‘주체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언명이 암시하듯 상호주체적 구조라는 관계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상호주관성의 산물이다. 불교의 무아론도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하고 연관되어 있다는 연기적 관점에서 존재를 사유한다. 주체와 타자, 무의식의 지위와 윤리, 진리의 문제는 욕망을 매개로 해명할 수 있다.

신경증 증상과 무의식적 욕망을 연관시키면서 욕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정신분석은 중생이 당하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강조하는 불교의 입장과 언뜻 달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고통이 근본 무지이자 번뇌라고 할 수 있는 무명(無明, avidyā) 때문이고, 무명을 걷어내고 진정한 자기[眞如]를 찾을 것을 불교가 가르친다는 점에 주목하면 불교는 오히려 해탈(解脫, vimoksa)의 욕망을 권장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욕망이나 해탈은 참된 존재에 대한 열정(passion)이자 상호주체적 관점과 연기론적 입장에서 존재와 세계에 대해 사유하는 출발점이다.

이하에서 우리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두 사상을 비교해볼 것이다. 이를 통해 문제를 설정하고 해결하는 방법이나 개념은 다르지만, 양자가 욕망에 대해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함을 보여주려고 한다. 불교 이론에 대한 필자의 한계상 주로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양자의 이론적 입장을 거시적으로 비교하면서 정신분석의 미진한 부분을 불교사상이 주는 영감을 통해 보충하는 연구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정신분석이 욕망을 통해 불가능성처럼 나타나는 실재(réel)에서 존재의 자리를 찾기 위해 욕망을 긍정한다면 불교는 ‘지혜의 완성’을 통해 본래적 불성을 회복하고 고통에서 벗어날 것을 권한다. 하지만 양자가 욕망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하면서 소외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통한다.


2. 욕망이라는 매개

정신분석은 욕망을 긍정하는데 그것이 존재에 대한 관계이자 주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반면 불교, 특히 아비달마에서는 삼독(三毒)과 오욕(五慾)에 집착하는 마음의 상태를 갈애(渴愛, tṛṣṇā)라고 보면서 그것이 모든 윤회와 고통의 원천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주장을 보고 정신분석은 욕망을 긍정하고 불교는 욕망을 배척한다고 말하면 안 된다. 불교는 자아의 집착에서 비롯되는 갈애를 부정하지만, 역으로 지혜를 얻고 해탈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는 수행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도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고 한다. 라캉은 욕망 개념을 중심으로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재해석하고 철학적 색깔을 입히면서 욕망을 정신분석 경험이 드러내는 본질적 지평에 위치시킨다. 프로이트가 리비도 에너지 관점에서 무의식의 역동성과 그것이 일상에 침투하는 증상을 강조했다면 라캉은 ‘욕망하는 주체’ 개념을 중심으로 무의식과 임상의 의미를 해석한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를 치료하면서 무의식의 존재를 확신했고 그것은 억압된 것의 표출과 연관이 있다고 말했다. 역동적 무의식 이론은 충동(Trieb) 개념을 통해 구체화된다. 리비도(Libido)에서 비롯되는 충동이 주로 대상에 대해 작용하기 때문에 정신분석에서는 성적 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몸을 포함하는 대상과 맺는 관계를 중시한다. 하지만 라캉은 욕망과 충동을 결여에 대한 관계로 정의하는데 결여의 대상은 존재이다. 라캉은 욕망을 “결여에 대한 존재적 관계(rapport d’être à manque)”라고 말한다. 존재결여는 존재가 언어로 완전하게 의미화되지 않고 공백(vide)이나 무(無, néant)처럼 남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존재적 관계(rapport d’être)’라는 용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욕망은 늘 ‘~에 대한 관계’를 통해서 정립되기 때문이다. 라캉이 말하려는 바는 언어가 사물들을 잃어버린 대상처럼 만들면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구조를 결여에 관계를 맺는 부정성 x로 만든다는 것이다. 주체의 구조 때문에 욕망이 발생하는 것이지 생리적 결핍이 원인은 아니다.

주체는 이 결여를 채우려고 대상에 집착하는데 이 상태를 라캉은 소외라고 말한다. 욕망에서 윤리적 태도를 강조하는 것은 대상관계 속에서 존재가 실종되기 때문이다. 욕망은 근본적으로 결여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다른 대상(autre chose)’을 향해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순환 운동처럼 전개된다. 욕망이 환상에 의해 유인되고, 하나의 대상이 주어지면 또 다른 대상으로 쉽게 이동하는 것도 채울 수 없는 존재결여가 근저에 있기 때문이다. 욕망이 끈질기게 계속되는 것이 존재의 회복을 위한 정념(passion)이지만 자칫 대상관계 속에서 소외될 수 있기 때문에 욕망에 대한 태도가 중요하다.

다시 말해 욕망 자체는 부정해야 할 악덕이 아니지만 소외된 욕망 혹은 잘못된 욕망은 지양되어야 한다. 《정신분석의 윤리》라는 제목이 붙은 세미나 7권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욕망의 본성을 정의하면서 그것이 윤리적 지평에 연결되는 불가결한 이유를 설명한다. 전통 윤리가 주로 절대선(아리스토텔레스)이나 측정 가능한 쾌락(공리주의)을 지향한다면 정신분석 윤리는 순수한 존재를 겨냥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전환이다. 존재를 겨냥하기 때문에 욕망의 윤리는 절대적이다.

라캉은 정신분석의 윤리 원칙을 “단 하나의 비판 그것은 욕망을 양보하는 것”이라고 명확히 한다. 라캉은 무조건 욕망에 따라서만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때 욕망의 윤리는 철저하게 개인 삶의 비극적 차원에 뿌리를 내린다. 비극적 차원이란 삶에서 느끼는 고통, 병리적 현상, 좌절을 말하는데 왜 이렇게 말했을까? 그것은 주체가 잃어버린 것이 언어를 벗어나는 실재계(réel)이기에 현존재의 삶에서 영원히 잃어버린 대상으로 남기 때문이다.

실재계는 상징계와 상상계의 그물망을 벗어나 지속하는 불가능(impossible)의 영역으로 주체는 그것을 늘 죽음의 효과처럼 느끼는데 바로 이것이 삶에 원천적인 비극성을 부여한다. 욕망의 윤리는 상실과 실재계의 불가능성이라는 비극적 차원을 인정해야 비로소 그 맥락이 이해된다. 삶의 비극성은 욕망이 지속되도록 만드는 요인이기에 오히려 존재 회복을 위한 긍정적 토대가 된다. 언어가 존재를 억압하고 소외시키지만, 주체는 소외를 자신을 회복하는 적극적 발판으로 만들 수 있다. 주체는 욕망을 추구하면서 상징계 너머로 가보려는 불가항력적 충동을 되풀이하는데 이것이 주이상스(Jouissance)이다.

라캉이 욕망을 상징계에서 주체가 자신의 존재를 되찾는 실존적 노력으로 본다면 불교는 존재에 대해 연기론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불교사상은 기본적으로 만물의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전제로 삼는 일체론적 세계관에 가깝다. 일체는 “다양한 인과관계를 기초로 하여 성립되어 있는 ‘유위(有爲)’의 존재”로 개체적인 삶과 개인의 의지를 넘어선다. 불교는 모든 사물이 자성(自性) 없이 연기에 의해서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기에 가유(假有)이지만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하면서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불교는 이런 연기적 관점에서 존재에 대해 사유한다. 불교가 말하는 욕망, 즉 갈애도 연기적 관점을 전제해야 그 의미가 이해된다. 갈애는 기본적으로 인과적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어떤 것에 집착하는 무명에서 나온다. 무명은 “고통과 그 원인, 그것의 소멸과 그것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무지”(Samytta-Nikāya II. 4)로 마음이 오염된 상태이다. 무명은 어떤 맹목적 성향에 이끌리는 심리상태라 정신분석이 말하는 맹목적 충동의 상태와 흡사하다. 무명을 갈애의 원인으로 정의하는 것을 보면 불교는 욕망에 대한 분석에서 바른 사유와 벗어남을 강조하는 주지주의 태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일체개고(一切皆苦)’를 ‘중생의 업’(사트바 카르만, sattva-karman)에서 기인하는 삶의 조건으로 확인하면서 이에 근거해 차례로 고(苦)→집(集)→멸(滅)→도(道)의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수행의 방향과 원리를 제시하는 사성제(四聖諦)에서도 암시된다. 여기서 두 번째 집제가 갈애의 본질이다. 갈애는 보통 세 가지 양상으로 설명된다.

비구들이여, 집성제(集聖諦)란 무엇인가? 그것은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고 만족을 찾는 것이다. 무엇이 갈애인가? 그것은 세 가지가 있는데,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欲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비존재에 대한 갈애[非有愛]가 그것이다. 이들 세 가지 갈애가 바로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集諦]이다.

욕애는 탐욕과 탐심에 사로잡혀 대상을 좇는 것이며 성적 욕망을 포함한 쾌락의 추구를 포함한다. 유애는 생명을 보존하려는 욕망이며, 비유애는 생의 소멸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다. 그런데 삼종의 갈애를 정신분석이 말하는 욕망과 비교하면 차이가 분명하다. 존재에 대한 욕망은 대상에 대한 욕망과 구분되기에 불교의 교리에 대입하면, 욕애는 경계의 대상이다. 반면 불교가 말하는 유애와 비유애는 정신분석의 입장에서는 존재의 열정으로 긍정될 수 있다. 물론 유애나 비유애가 겨냥하는 존재와 정신분석에서 욕망이 겨냥하는 존재가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욕망이 정신분석에서 긍정되는 이유는 욕망이 겨냥하는 존재가 현상적이고 경험적인 자아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개념과 표상의 질서를 벗어나는 진정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불교도 참된 깨달음을 통해 소외된 자아가 아니라 진정한 자아인 진여를 찾을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정신분석이 말하는 문제의식과 만날 수 있다.

결국 불교에서 궁극적으로 수행과 반야(般若, prajñā)를 통해 말하려는 것이 자아의 소멸에 그치지 않고, 스즈키의 말대로 자기 존재의 핵심에 깊이 도달하는 내적 자각, 즉 자증(自證)의 강조에 있다면 정신분석의 문제의식과 통한다. 돈오(頓悟)가 목표로 하는 진리가 참다운 존재에 대한 자각이라면 외형상 두드러져 보이는 개념적 차이에 근거해 정신분석과 불교의 욕망이론을 대립시키기보다는 욕망을 통해 말하려는 공통 문제의식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불교가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사상에 기초해 무아론(無我論, anātmavāda)을 주장한다면, 정신분석도 자아의 망상적인 성격과 소외의 본성을 강조하면서 더 확실한 존재에 대한 개념화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결국 불교는 갈애의 소멸을 주장함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주체를 찾으려는 해탈의 욕망을 주장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존재에 대한 갈망

갈애는 그릇된 집착인데 이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아론의 의미를 깊게 이해해야 한다. 불교는 한결같은 실체로서의 자아, 모든 행동과 욕망의 토대가 되는 자아 개념을 부정한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자아를 ‘나’라는 잘못된 생각과 집착에서 찾으면서 오온(五蘊, panca skandha)에 불과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오온은 물질적인 것을 지칭하는 색(色, rūpa)과 심리적인 것인 명(名, nāman)으로 이루어지며, 명은 다시 수(受, vedana), 상(想, samjna), 행(行, samskhara), 식(識, vijnana)의 집합이다. 여기서 색은 단순히 육체만을 지칭하지 않고 감각기관과 그것에 상응하는 대상은 물론 인식작용을 함께 포함하는 것으로 나머지 네 가지와 분리해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자아가 오온의 작용에 불과하니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은 다음과 같은 부처의 가르침에 잘 나타나 있다.

다섯 가지 취한 근간이 있으니, 이른바 색의 취한 근간과 느낌 · 생각 · 결합 · 식별의 취한 근간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은 슬기도 없고 밝힘도 없어서 다섯 가지 취한 근간에서 ‘나’라는 소견을 내어 거기에 집착하여 마음을 얽매고 탐욕을 낸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은 슬기도 있고 밝힘도 있어서 그 다섯 가지 취한 근간에서 ‘나’를 보아 집착하여 마음을 얽매거나 탐욕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자아가 오온에 불과하다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색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덧없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괴로우면 ‘나’가 아니다. 또한 자아가 실체와 의지의 근본이라면 색을 이렇게 되었으면 한다든가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지만, 그렇게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부처가 설법하는 무아론의 근거는 스스로에 대한 자재력(自在力) 부족과 자아가 무상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라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참된 존재인 진여가 따로 있는데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상태가 무명이며, 무명에 휘둘릴 때 모든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부딪치면서 일으키는 온갖 괴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무아론의 이론적 근거는 결국 연기론이다. 연기론은 현상 일체를 12처와 18계로 보면서 그것의 작용에 의해 만물이 소멸과 순환을 계속한다고 보는 사상이다. 연기론 관점에서 보면 사물 자체는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기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모든 존재는 연기와의 관계 속에서 서로 의존, 인과, 상호 조건하면서 존재한다. 결국 자아는 이런 연기적 관계와 작용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는 실체로서 자아, 모든 인식과 행동의 근거가 되는 중심점으로서 자아는 인정하지 않지만, 수행을 위해 자기의 본원적인 어떤 차원이 있음을 인정한다. 불교는 업(業, karman)이 발생시키는 결과의 필연성과 자업자득의 두 원칙에 의해 선악의 근거가 성립된다고 보면서 윤회를 내 행위 결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행위를 신업(身業), 어업(語業), 의업(意業)의 3종으로 나누는데 이 중에서도 마음의 행위가 가장 중요하다.마음의 행위가 강조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의 작용만이 아니라 마음속에 숨겨진 나쁜 경향이나 자질이 윤회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선악 개념이 행위의 주체를 온전히 전제하지는 않지만, 생의 순환과 상호작용에 의지 차원을 전제하기에 번뇌나 유위에 의한 삶의 고통과 벗어남, 즉 해탈을 주체의 의지와 관련하여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수행을 통해 진리를 바로 봄으로써 번뇌를 끊고 해탈하는 것은 결국 어떤 주체적 차원을 전제하기에 가능하다.

이렇게 봤을 때 무아론은 동일성, 자족성, 독립성을 지닌 주체를 부정하는 것이지 심리적인 인과관계 일체를 부정하거나 공(空)을 실체처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존재의 요소들은 단지 흐름 속에 있을 뿐이지만 그 흐름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존재의 실체성을 부정하면서도 욕망을 통해 주체가 사라짐 속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정신분석의 주체 이론과 비슷하다.

라캉은 언제나 현실을 만드는 상상계의 기만성과 주체의 불안정한 지위를 말한다. 이 불안정한 지위란 바로 주체를 사라지게 하는 빈 공간으로 진정한 주체의 자리는 이곳이다. 우리는 이 빈 공간에 있는 주체를 ‘리비도 주체(sujet libidnal)’라 부를 수 있다. 리비도 주체란 라캉이 ‘우리 존재의 핵(Kern unseres Wesen)’이라 부른 것이다. 상상계의 자아가 실체로서 코기토(cogito)에 매달린다면 ‘리비도 주체’는 지젝이 ‘향유의 원환고리’라고 불렀던 숨(sum), 즉 존재 자체에 해당한다. 리비도 주체는 상상계와 상징계에 의해 은폐되면서 결여처럼 남지만, 그 결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그런 존재이다. 즉 리비도 주체는 부정의 방식으로 자신을 긍정하면서 새로운 대상을 창출하는 것으로 라캉은 이것을 박막(lamelle)이라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박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특성을 갖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기관 [……] 이다. 이것이 바로 리비도이다. 이것은 리비도, 삶의 순수한 본능으로서의 리비도이다. 말하자면 불사의 삶, 억누를 수 없는 삶, 어떠한 기관도 필요로 하지 않는 삶, 단순화되고 파괴 불가능한 삶에 대한 본능이다. 이는 정확히 생물이 유성 생식의 주기를 따름으로 인해 상실하게 되는 부분이다. 대상 a로 열거할 수 있는 형태들은 모두 그 잃어버린 것의 대표자, 등가물이다. 그러니까 대상 a는 순전히 그 잃어버린 것의 대표자, 문양에 불과한 것이다.”

리비도란 존재하지 않는 것, 즉 상징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기관으로 라캉은 이를 비현실적(irréel)이라는 형용사로 규정한다. 비현실적인 것은 우리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실재(réel)와 접속한다.실재란 주체가 상징계에 자리 잡을 때 잃어버린 것으로 말하는 주체에게 언제나 쾌락 원리의 너머(l’au-delà du principe de plaisir)처럼 제시되는 부분이다. 쾌락 원리 너머라는 표현은 역설인데 말하는 주체에게는 그것에 접근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가능성이 욕망을 지속시키는 원인이다. 말하는 주체는 존재결여를 죽음의 효과처럼 경험하는데 이것이 욕망의 본질이다. 죽음과 욕망의 본질적 관계에 대해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우리가 말의 연속적 놀이 이전에 있었던 것, 그리고 상징계의 탄생에 선행하는 것을 주체 속에서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죽음 속에서만 볼 수 있다. 이로부터 주체의 존재는 그것이 의미로 가지는 모든 것을 취한다. 결국 주체는 타자들에 대해 자신의 존재를 죽음에 대한 욕망처럼 확증한다.

죽음에 대한 욕망은 주체가 몸담고 사는 상징적 질서인 현실(réalité)을 뒤흔들고 삶의 근원적인 파토스처럼 주체를 사로잡는다. 그러기에 말하는 주체가 느끼는 원초적인 불가능성은 고통이지만 존재에 대한 체험이라는 면에서 긍정할 수 있다. 욕망이 주이상스(jouisance)와 결합하는 지점이 이곳이다. 주이상스는 주체에게 금지된 대상을 향한 불가역적인 충동인데 이것은 언제나 의미화를 벗어나서 지속하려는 존재에 대한 향유 의지와 이에 뒤따르는 고통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지젝이 이 존재를 향유의 원환고리라고 부른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라캉이 주체의 분열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이처럼 현실 질서에서 소외되어 있지만 삶의 토대가 되는 리비도 주체의 자리이다. 불교가 무아론을 통해 자아의 무상함과 번뇌를 지적하면서 상호의존성(相依性)이라는 제법(dharma), 즉 연기성(緣起性)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했다면, 라캉은 언어와 이미지의 틀인 자아에서 벗어나는 존재의 자리에 도달할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주체는 절대로 자아를 벗어던질 수 없다. 라캉은 소외된 욕망을 벗어날 것을 권고하지만 동시에 상상계와 상징계를 폐기하고 실재계를 그 자체로 만날 것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라캉은 존재의 불가능성을 더 강조하는데 연기적 관점에서 무아론이 자아의 비실체성과 공(空) 사상을 주장하는 것도 이와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불교나 정신분석은 둘 다 서구사상에 뿌리 깊은 표상적 사고와 과학적 이성주의를 거부하면서 그릇된 집착이나 나르시시즘적 정념을 벗어나 존재의 비실체성, 즉 무(無, néant)에 관한 사고를 적극적으로 개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라캉이 불교에 매료된 것도 무에 대한 절대적 사고 때문이었다. 무에 대한 사고는 진리의 문제와 연결된다.


4. 반야와 환상 가로지르기

불교와 정신분석은 둘 다 근본 무지나 상상계가 고통과 소외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진리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리 개념에는 차이가 있다. 불교는 수행을 강조하는데, 이때 필요한 지혜가 ‘반야’이다. 불교의 진리 개념에서 주목할 점은 근본 무명과 미혹을 멸하기 위해 깨달음을 더 강조하면서 그것을 목표처럼 제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가 스스로 말한다”면서 실재(réel)가 우연히 드러나는 사태에 진리를 연결시키는 정신분석과 대조된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수행을 통해 스스로 진리에 이르는 것을 강조한다. 정신분석이 욕망의 충족 불가능성을 그 자체로 대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면, 불교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낙관적 관점을 견지한다.

불교가 말하는 반야는 존재 전체의 이치를 관조하는 것으로 스즈키 다이세쓰가 말한 것처럼 선험적 직관에 가깝다. 반야는 법의 이치에 부합한 ‘더없이 완전한 지혜’ 혹은 ‘반야바라밀(prajñāpāramitā)’이라 부르며 그것을 얻어야 성불이 가능하다. 반야를 통해서 만물의 법칙과 본질을 깨달아야 중생을 괴로움에 빠뜨리는 갈애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반야는 존재, 특히 자아의 무상성과 연기적 작용 속에서 내가 존재함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포함한다. 아함부 경전에는 지식과 지혜가 많은 제자가 자아의 본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는 부처님 말씀이 나온다.

그는 무명과 욕심을 떠나 밝힘을 내기 때문에 ‘나는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도 아니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내가 훌륭한 것도 아니요, 내가 못한 것도 아니며, 내가 저와 같은 것도 아니며, 내가 아는 것도 아니요, 내가 보는 것도 아니다’고 생각한다.

결국 자아를 고정된 실체처럼 보지 말고 연기적 관점에서 내가 있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의 이 말은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며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는 라캉의 코기토에 대한 비판을 떠올리게 한다. 불교 진리 개념이 존재에 대한 바른 앎과 연관된다는 것은 특히 직관적 앎을 중시하는 선불교에서 강하다. 선불교에 의하면 선이란 초자연적인 것을 접하는 황홀경에 대한 극한 체험이 아니라 깨달음(satori)을 통해 본래의 마음을 재발견하는 지혜에 가깝다. 스즈키는 선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선(禪)은 그 본질에서 자기 존재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기술이며, 속박으로부터 자유로 향하는 길을 가리킨다.” 이 극과 저 극이 하나이며, 사물이 사물이면서 사물이 아님을 아는 것이 깨달음의 본질이고 해탈로 가는 길이다. 깨달음을 통해 있는 실재의 참모습을 왜곡 없이 관조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이 말하는 진리 개념은 어떠한가? 진리는 근본적으로 존재의 드러남이기 때문에 무의식에 속한다. 라캉은 무의식을 주체가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지식이자 의식적 담론의 연속성을 흔드는 어떤 결핍으로 정의한다.무의식에는 무지의 차원이 포함된다.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은 언뜻 자신의 본성을 잘못 아는 불교의 무명 개념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라캉은 무지(ignorance)를 불완전한 지혜가 아니라 존재의 토대를 이루는 근본 정념으로 본다.무지가 존재의 속성이라는 생각이 정신분석 진리 개념에서 볼 수 있는 특이점이다. 무지는 상징계나 상상계에 대해 자신을 감추는 실재(real)의 속성인 불가능성을 지시한다. 주체는 언제나 이 불가능성을 통과하면서 만들어진다. 라캉의 다음 설명을 보자.

주체가 걸어가는 길은 [……] 불가능한 것의 두 벽 사이를 통과한다. [……] 불가능한 것은 반드시 가능한 것의 반대가 아니다. 혹은 오히려 가능한 것의 대립물이 당연히 실재이므로 우리는 실재를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해야 할 것이다.

이 불가능성이란 상징계에 구멍처럼 남는 실재계의 구조적 속성이다. 불가능성을 전면화하고 주체 스스로 이 불가능성을 마주하고 통과하는 것을 정신분석은 겨냥한다. 임상도 깨달음이나 자아의 적응이 아니라 존재결여를 수용하고 그것에 대해 바른 태도를 정립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분석의 끝은 오히려 프로이트가 불안의 출발점이라 불렀던 근원적인 분리, 즉 출생 상황과 비슷하다. 그러나 라캉은 분리가 불안의 원인이 아니라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거나 결여가 채워지려 할 때 주체가 불안을 느낀다고 강조한다.결여가 있어야 주체는 자신을 욕망하는 존재로 만들 수 있는데, 이 결여의 자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상상적인 것이 주체를 압도하면서 삼키려 하기 때문이다.

라캉에 따르면 결국 결여의 결여가 불안의 원인이다. 이런 이유로 분석의 최종 목표는 존재의 비실체성과 주체의 궁핍함을 그 자체로 수용하면서 대타자의 과도한 향유에 휩쓸리지 않는 것을 지향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치료가 끝난다면 욕망은 다시금 환상 속에 자리 잡는다. 최초 환상을 통과한 후 주체에 의해 다시 능동적으로 무대화되는 환상의 대상을 라캉은 ‘오브제 a’라 부른다. ‘오브제 a’는 결여를 구조화하는 환상 속에서 실재와의 만남을 매개하면서 대타자의 욕망에 대항해 존재를 보존하는 능동적 기능을 한다. 욕망의 최초 단계에서 환상에 의해 휘둘렸다면 다음 단계로 환상을 끝까지 관통하면서 그것이 결국은 존재결여를 무대화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능동적으로 그 빈자리에 욕망의 원인이자 대상인 ‘오브제 a’를 놓아야 한다.

라캉이 말하는 진리는 이처럼 환상 가로지르기를 필요로 한다. 라캉은 《세미나 10권 불안(Angoisse)》에서 불교에 대해 말하면서 “욕망은 망상이다”라는 깨달음이 불교가 주는 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라캉은 욕망과 환상의 구조적 연관성을 더 강조한다. 욕망은 환상을 매개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욕망의 망상적 성격을 경계하는 불교와 이 지점에서 차이가 있다. 라캉은 환상을 진리에 연동시킨다. 욕망이 존재결여라고 한다면 올바른 욕망은 대상의 불가능성을 그 자체로 보여줄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환상을 능동적으로 무대화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문제가 되는 진리는 최후의 진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망상의 옆에서 존재의 기능을 엄밀하게 할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욕망이 망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욕망이 이 아무것도 아닌 것(rien) 위에서 어떤 지지물, 어떤 출구, 어떤 목표를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라캉이 선불교와 정신분석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지점도 여기이다. 라캉은 선불교의 무(無)에 대한 적극적인 사고를 높이 평가하면서 불교도 결국 ‘대상을 갖지 않음(ne pas avoir)’을 지향한다고 해석한다.정신분석이 말하는 환상도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겨냥한다. 욕망이 환상 가운데서 마주하는 것은 결국 존재이다. 그러므로 환상을 가로질러야 존재에 도달할 수 있다. 라캉은 주체가 존재보존을 위해 결여를 무대화하면서 욕망을 지속하는 것이 환상(phantasme)의 주 기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라캉은 모든 환상을 옹호하지는 않는데 환상은 주체의 거세를 감추고 환상 자체에 고착되게 만드는 방어적 기능도 수행하기 때문이다. 라캉이 긍정하는 환상은 결여 자체를 관통하면서 자신의 결여를 전면화하는 그런 환상이다.

이것은 수행을 통해 사물의 본성을 알고 나자 수행 전처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선사의 깨달음과 비슷하다. 환상 가로지르기는 존재결여에 주체가 대응하는 순수 행동이며 무의 충만함을 다시 발견하는 것이고, 상징계를 벗어나는 질서인 ‘실재와의 만남인 투케(tuché)’와 만나는 행위이다. 주체는 언어의 효과이지만 죽음 충동을 통해 언어의 이면에 자리 잡는 실재를 폭로하고 전면화한다. 이 죽음 충동이 결국은 상징계의 구조와 진리의 긴장 관계를 제시하면서 진리를 말하는 주체의 입을 통해 드러내는 원동력이다. 지젝이 강조했듯이 실존론적 조건인 유한성과 진리의 가능성인 무한성 사이에서 분열된 주체는 자신의 우연적 행위를 통해 모든 존재론적 구조를 지탱한다. 그러므로 진리와 연동된 주체의 행위는 윤리적이며, 상징계를 포함한 세계의 구성 가능성이 된다. 존재결여에 대응하는 윤리적 행위가 결국 무로부터의(ex-nihilo) 창조를 가능하게 만드는 진정한 원천이다.


5. 참된 존재와 자기의 탐구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불교와 정신분석은 욕망에 대해 서로 다른 정의와 목표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나는 지점이 적지 않고 문제의식도 통한다. 두 사상은 인간이 살면서 경험하는 착각과 미혹 같은 소외를 경계하며, 현존재가 타자와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진정한 존재의 본성을 찾을 것을 주장한다. 정신분석은 인간의 욕망을 무조건 발산하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소외된 욕망과 참된 욕망을 구분한다. 환상의 구조를 잘 알고 그것을 가로질러 가면서 욕망에 대해 비타협적 태도를 취하라는 정신분석 윤리는 욕망을 존재에 대한 관계로 인식하면서 소외에서 벗어나라는 주문이다. 불교 역시 갈애는 자아에 대한 그릇된 믿음과 집착이기에 일체의 법을 깨달아 그것에서 벗어나며 궁극적으로 해탈의 경지에 들어갈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해탈이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육근과 육경의 작용이 만드는 경계를 벗어나는 참된 앎을 통해 대상에 매이지 않는 마음, 즉 진여심(眞如心)을 얻는 것이다.

불교가 수행을 통해 이러한 마음을 얻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정신분석의 윤리와 분명 만나는 지점이 있다. 정신분석이 자아를 거울 이미지에 불과하다보면서 ‘진정한 주체’를 찾을 것을 욕망이론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불교도 ‘무상(無常)의 자기’를 자각하고 ‘참된 자기’ 혹은 ‘근본주체’를 찾을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불교나 정신분석은 환상 너머에 있는 무 혹은 실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진리의 동반자이다. 물론 실재의 본성에 대한 정의나 환상이 욕망에 미치는 효과는 서로 다르게 정의한다. 불교보다는 정신분석이 실재의 부정성과 공백(vide)의 효과를 더 강조한다. 에리히 프롬은 불교와 정신분석이 치료의 담론으로 인간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공통성을 가진다고 말하지만, 필자는 오히려 삶의 부정성과 모순을 자각하고 존재의 본성을 정면으로 직시하는 것을 두 사상이 강조하기 때문에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결국 두 사상 다 언어와 지식을 벗어나는 존재에 대한 탐구를 권한다. 우리는 이처럼 불교와 정신분석의 문제의식에는 통하는 점이 많음을 살펴보았으며 두 사상이 서로 다른 지평에서 서로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공통적으로 존재의 회복을 궁극적 목표로 설정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여러 개념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세부 이론을 비교하면 불교와 정신분석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도 존재한다. 이것은 두 사상의 성장 배경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이 논문은 불교와 정신분석의 차이와 공통점의 제시에 머무르고 둘을 아우르는 융합적 지평의 제시까지는 이르지 못했는데 이것은 차후 연구 과제로 남긴다. 또 필자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불교 이론을 다소 자의적으로 이해하거나 정신분석 관점에 경도된 과도한 단순화가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국내에서 아직 정신분석과 불교 양자의 관계에 대해 전문가들의 심화된 연구가 많지 않음을 감안할 때 초보적이나마 욕망 개념을 중심으로 양자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보여준 연구는 그 자체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유식불교와 정신분석의 무의식 개념, 공과 실재에 대한 개념 그리고 불교의 수행과 정신분석의 치료 등 향후 연구를 통해 조명해야 할 주제들이 많다. ■

 

김석 
건국대학교 융합인재학부 교수. 프랑스 파리8대학 철학과에서 〈자크 라캉의 욕망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철학아카데미, 고려대, 시립대 등의 강사를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선의 윤리와 순수 욕망의 윤리〉 〈한국사회 이념 갈등의 심리적 근원 분석〉 〈배제와 폭력: 공동선을 향하여〉 등과 지은 책으로 《에크리,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 《프로이트 & 라캉, 무의식에로의 초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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