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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담(野談)을 통해 본 조선시대 승려상 / 탁효정
[72호] 2017년 12월 01일 (금) 탁효정 bellaide@naver.com

1. 야담과 불교

야담(野談)은 재미있다. 실록에서는 “유정이 왜국을 다녀왔다”라고 짤막하게 끝나는 기록이, 야담에서는 적장의 모가지가 공중으로 날아가고, 왜적들이 벌벌 떨며 다시는 땅에 발도 붙이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이야기로 등장한다. 대중강연을 나가도 역사 이야기를 할 때 꾸벅꾸벅 졸던 청중들이 야담을 꺼내는 순간 눈을 반짝거리며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 중에서도 재미있는 이야기, 신기한 이야기만 묶였기 때문에, 이들 야담이 재미있는 것은 한편으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야담은 민간에서 구전되는 이야기를 글로 묶어낸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따로 없다. 《어우야담(於于野談)》이나 《용재총화(慵齋叢話)》 등의 책에는 각각 유몽인(柳夢寅)과 성현(成俔)이라는 필자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들은 엄밀히 말하면 저자(著者)가 아니라 편자(編者)라 할 수 있다.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책으로 묶은 사람이지, 그 이야기를 지어낸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야담은 그렇다고 해서 소설도 아니다. 소설이 가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에 반해 야담에서는 어디 사는 아무개라는 실존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한다. 특히 역사 속 유명 인사들이 주인공 혹은 주변 인물로 나타나 실제 상황처럼 묘사되곤 한다. 그런 측면에서 야담 혹은 야사는 종종 역사서와 대별되는 의미로 사용되곤 한다. 역사서 특히 정사류(正史類)의 책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글이기도 하지만, 역사 서술가의 특정한 목적 또는 사관이 가미되어 있다. 반면 야담은 과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실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야담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역사서에 기록된 이야기보다 더 그 시대를 잘 반영하는 사료로 간주되곤 한다. 야담은 한 사람이 지은 이야기도 아니고 누가 지었는지도 알 수 없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그 시대를 살아간 이들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집단심리가 녹아들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야담은 그 시대 민중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코드로 이해되곤 한다.

조선시대 야담집에는 불교나 승려에 관한 이야기가 종종 실려 있다. 야담에 등장하는 조선시대 승려들의 모습은 조선시대 불교의 이면을 보여주는 사료들이다. 거기에는 조선 사람들의 눈에 비친 승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승려들의 모습은 몇 가지 패턴으로 등장한다. 이 글에서는 이들 야담 속의 승려들을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승려들이 어떠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신통한 승려, 신승(神僧)

조선시대 야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승려는 신승, 즉 신통력을 발휘하는 승려들이다. 이들은 귀신 정도는 마음대로 제압하고, 왜적들을 혼쭐내며, 가끔은 구름을 타고 저 신선의 세계로 날아가 버린다. 야담에는 야사와 소설, 민담의 요소들이 혼합돼 있는데, 실제 역사 속에 존재했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도 조선시대 민중들의 영웅으로 추앙된 인물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1) 역사 속 승려들의 영웅담

야담집에 등장하는 신승들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높았던 인물은 도선(道詵), 나옹(懶翁), 무학(無學), 휴정(休靜), 유정(惟政)이었다. 그중에서도 도선과 나옹은 신라와 고려시대에 활동했던 인물임에도 조선시대까지 높은 인기를 누렸다.

도선은 실존 인물이었는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한, 생존 시기도 설화마다 제각각으로 등장하는 승려이다. 그럼에도 사찰 연기설화에 가장 자주 등장한다. 도선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사찰만 수백여 곳에 달한다. 또한 무학이 조선 건국에 큰 영향을 미쳤듯이 도선은 고려 건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승려로 등장한다. 고려 태조의 탄생을 예언했다는 설부터 고려 태조를 도와 전국의 비보사찰 500곳을 창건했다는 설 등이 대표적이다. 도선이 역사서에 전면으로 등장하는 것은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 나오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도선은 풍수지리에 능한 승려로 자리매김했다. 더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조상숭배에 대한 관심이 전 시대보다 훨씬 더 커지고, 풍수지리가 종교 이상의 종교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풍수지리학의 시조처럼 추앙되던 도선에 얽힌 이야기들도 더욱 많이 양산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나옹은 고려 말의 대표적인 고승으로, 공민왕의 왕사(王師)였다. 고려시대 수많은 승려 중에서도 나옹이 조선시대 야담집에 자주 등장한 것은 나옹의 제자들이 조선 전기 불교계를 주도했기 때문으로 간주된다. 나옹의 제자인 무학은 조선 최초의 왕사가 되었고, 나옹의 법손 제자들은 조선 전기 왕실불교를 주도하는 승려들이 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 중기까지도 나옹은 여전히 고려 말의 고승을 대표하는 유명 인사로 추앙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우야담》에는 〈산 귀신을 죽인 나옹 선사〉라는 제목으로 다음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나옹은 고려 말의 신승(神僧)이다. 회암사의 주지로 부임해 가는데, 절에서 십 리쯤 못 미치는 곳에서 찢어진 납의를 입고 대삿갓을 쓴 어떤 사람이 길가에 엎드려 알현하였다. 나옹이 누구냐고 묻자,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빈도(貧道)는 절에 있는 시주승입니다. 대사께서 저희 절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감히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옹은 그에게 앞장서라고 했는데, 그는 물을 건너면서도 옷자락을 걷지 않고 평지를 걸어가듯 하는지라 나옹은 마음속으로 그가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절 문에 들어서자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나옹이 절에 들어와서는 예불도 하지 않고 곧장 행랑으로 가 머무르니, 절의 중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조금 있다가 먼저 중들에게 한 다발의 삼으로 만든 동아줄 수십 길을 준비하게 하니, 여러 중이 더욱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대사께서 처음 오셔서 예불도 드리지 않고 먼저 물건을 징발하고 인력을 동원하니 어찌 된 일입니까?”
그러나 감히 거역하지는 못하고 갖추어 올렸다. 나옹은 대불전에 올라 건장한 중 백 명을 뽑아서 지시하기를, 굵은 동아줄로 몇째 번 자리에 있는 장육불(丈六佛)을 얽어매어 땅에 쓰러뜨리라고 했다. 절에 있던 늙은 중들이 모두 모여 합장하면서 청하여 말했다.

“예전부터 이 불상은 영험하여 범상하지가 않습니다. 비를 빌면 비가 오고, 병이 나서 빌면 병이 나았고, 아들을 빌면 아들을 잉태하여 무릇 기원하는 바에는 곧바로 응험이 있었습니다. 대사께서 처음 하시는 일에 대중들이 귀를 기울이고 눈을 닦고 보는데, 제일 먼저 불상을 쓰러뜨리게 하시니 매우 괴이한 일입니다.”
나옹은 눈을 부릅뜨고 꾸짖어 말했다.

“너희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거라!”

여러 중이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일제히 힘을 합해 불상을 끌어당겼다. 불상은 나무로 만든 것에다 금을 입혀 무거운 것이 아니었는데도 100명이 끌어당겼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늙은 승려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도다. 영험한 불상을 모욕해서는 안 되니 커다란 우환이 있을 것이다.”

나옹이 탑(榻, 좁고 기다란 평상)에 올라가 한 손으로 불상을 밀자, 즉시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밖으로 끌어내 승려들 앞에 놓고는 땔나무를 쌓고 불태우자 노린내가 산에 가득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불상을 만들어 세웠는데 또다시 요환(妖幻)이 있자 전처럼 불태워 버렸다. 세 번째로 만들어 세웠더니 다시는 재앙이 없었다. 나옹은 이에 불상을 안치하며 말했다.

“무릇 불상을 안치하고 향불을 피워서 공양을 올리는데, 간혹 산 귀신이나 나무 도깨비가 불상에 붙어서 거짓으로 석가여래의 신령한 환술인 것처럼 꾸미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른바 아무 절에 영험한 불상이 있어서 감통하여 즉시 감응이 있다고 하는 것들은 모두 이런 따위들이다. 어리석은 중들이 그것을 받들어 모시는데, 간혹 절 전체가 화를 입고 중들이 까닭 없이 죽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나옹은 신통한 고승이다. 대개 사물이 오래되면 신령해지고 신령해지면 반드시 이에 붙는 것이 있는 법이다. 하물며 절집이 아침저녁으로 공양하는 곳임에랴. 먹을 것을 구하는 귀신들이 이를 두고 어디로 가겠는가? 요즘 사람들이 또한 무덤가에 간혹 돌로 사람을 만들어 그로써 신도(神道)를 지키게 하는데, 세월이 오래되면 간혹 산 귀신이 생겨나 그 제사를 대신 받기도 한다. 근래에는 간혹 돌로 된 화표(華表)를 세워 돌로 만든 사람을 대신하기도 하는데, 이는 자못 이치가 있다.

위의 이야기에서 나옹 스님은 절집에서 부처 행세를 하며 사람들의 우상으로 군림하고 있는 귀신을 퇴치한다. 흡사 퇴마사를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역사서에 등장하는 법 높은 승려 나옹의 면모와는 사뭇 거리가 있다. 대중에게 선사의 고매한 이미지는 그다지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귀신에 씐 불상을 알아채고 이를 퇴치하는 퇴마사의 모습이 훨씬 더 멋져 보였을 것이다.

나옹의 제자이자 조선 최초의 왕사인 무학도 조선시대 야담의 단골 주인공이다. 특히 이성계의 조선왕조 개창을 처음으로 예견하고,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측면에서 무학은 조선 건국을 상징하는 승려로 회자되었다. 무학골, 무학재, 왕십리 등의 지명들이 무학과의 인연에서 비롯되었고, 서울의 4대 비보사찰(승가사, 삼막사, 청련사, 백련사)도 무학이 정한 것이라고 조선의 민중들은 믿어왔다.

《한거잡록》에는 무학대사가 태조의 앞날을 예견한 이야기〔無學前知〕가 등장한다. 이성계가 막 왕조를 개창한 직후 무학은 태조에게 “훗날 방석과 방번의 난리로 태조가 도읍을 버리고 함흥으로 갈 때 다리 하나를 지나게 되는데 영도교라는 다리입니다. 이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라고 말한다. 뒷날에 이르러 태조가 무학의 말을 떠올리며 “무학이 과연 지금 이 일이 있을 줄 알고 있었구먼.” 하고 탄식하는 내용이다.

조선시대 야담에 등장하는 무학은 태조의 왕조 개창을 예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태조가 자신의 아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는 것까지 알고 있는 선지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때문에 실록에서조차 무학을 일컬어 신승 무학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실제의 무학은 원 유학을 통해 고승들의 인가를 받은 선승이었고, 평생토록 선 수행에 매진했던 납자였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설화 속에 등장하는 무학은 미래를 예측하고 명당을 점지하는 예언자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무학 관련 설화들이 크게 늘어난 것은 임진왜란 이후였다. 전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민중들은 조선의 미래를 예측하고 한양 주변에 네 곳의 수호사찰을 세운 무학을 떠올리며 새로운 희망을 찾고자 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도 조선시대 야담에 자주 등장하는 승려들이다. 두 승려는 임진왜란 당시 승군들을 통솔해 왜적을 무찔렀다는 점에서 조선의 전 계층으로부터 존경받았다. 그중 사명대사의 이야기는 대부분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일화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일본의 정세를 탐색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긴 해야 하는데, 누구를 보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전쟁이 막 끝난 직후였기 때문에 일본으로 간 사신의 목숨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조정에서 탐적사로 차출된 인물이 사명대사였다. 조정의 부름을 받은 사명대사는 목숨을 걸고 일본으로 건너갔고, 예상외의 큰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다. 이후 일본으로 잡혀간 포로 수천여 명이 송환되었고, 왜국과의 외교 라인도 성공적으로 재개되었다. 이후 사명대사의 이야기는 조선 민중들에 의해 일본을 혼내준 무용담 혹은 복수전으로 변화했다. 《어우야담》에는 유정에 관해 다음의 일화가 실려 있다.

유정은 우리나라의 호걸스러운 중이다. 송운이라 자호하였고 휴정의 제자로, 평소에는 오대산 월정사에 거처하였다. 임진년에는 금강산 유점사에 있었는데, 왜병이 대거 이르자 같이 기거하던 중들과 함께 왜구를 피하여 깊은 산골짜기로 숨었다.

한 중이 가서 엿보니, 왜병이 유점사에 들어가 그곳에 거처하던 중 수십 명을 결박하고 금은보화를 찾는데, 내놓지 않자 장차 죽이려고 하였다. 유정이 이 말을 듣고 유점사에 가서 그들을 구하려고 하자 중들이 모두 만류하며 말했다.

“스님께서 같이 기거하던 스님들을 죽음에서 구하고자 하시니, 그 자비로움이 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호랑이 입을 더듬어 그 수염을 잡아당기는 격이니 무익한 일로 다만 화를 부를 뿐입니다.”

유정이 이 말을 듣지 않고 난병들 가운데로 들어갔다. 유정이 법당에 들어서자 한 장수가 글로 써서 전했다.

“이 절에 있는 금은보화를 모두 내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너를 죽이리라.”

유정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는 금과 은을 보배로 여기지 않고 단지 쌀과 베만 사용하기 때문에 금은보화는 온 나라를 통틀어도 드물다. 하물며 산에 사는 중은 단지 부처님께 공양이나 드리고 채식을 하며 초의를 입을 뿐이다. 혹은 곡기를 끊고 솔잎을 먹으며, 혹은 민가에 걸식하여 삶을 영위하는데, 어찌 금은을 쌓아둘 리가 있겠는가. (중략) 지금 죄 없는 어리석은 중들을 행랑 아래 결박하여 놓고 진기한 보화를 내어놓으라 하고 있는데, 저들은 지팡이 하나로 온 산을 다니면서 민가에서 밥을 구걸하여 조석으로 공양받는 사람들이다. 비록 몸을 가르고 뼈를 가루를 낸다 한들 어찌 보물 하나 나올 수 있겠는가. 원컨대 장군은 그들을 살려 주거라.”

왜장들이 유정의 글을 돌려보고는 얼굴빛이 변하여, 하졸들에게 20여 명의 중을 풀어주게 했다. 유정은 다시 손을 휘저으며 지팡이를 끌고 나갔다. 왜장이 커다란 판자에 글씨를 크게 써서 절 문에 걸었다.

“이 절에는 도를 깨우친 고승이 있으니 군사들은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

이로부터 왜병이 다시는 유점사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정에서 유정을 승장으로 임명하여 팔도의 승군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유정이 왜군의 진중에 출입하여 유세하는 것은 자신의 임무로 삼았는데, 일찍이 적진에 들어가 왜장 가등청정을 만났다. 청정이 물었다.

“너희 나라에서는 어떤 보물을 가장 귀히 여기는가?”

유정이 대답하였다.

“보물이라 할 만한 것은 없고, 오직 보물로 여기는 것은 바로 장군의 머리다.”

청정이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으나 마음속으로는 그를 두려워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일본에 들어가니 덕천가강이 설명자 2만 근을 그에게 주었다. 유정은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것을 대마도주 귤지정에게 모두 주고 귀국했다. 조정에서 종묘와 궁궐을 중수할 때 유정이 온 나라 안의 승군을 모아 역사(役事)를 도왔다.

내가 묘향산 보현사에서 유정을 상견했는데, 머리는 깎고 수염은 남겨 두어 흰 수염이 허리까지 닿았다. 그 당시에 가선대부였으며, 후에 치악산에서 죽었는데 나이가 아직 70이 안 되었다.

위의 기록은 유몽인이 사명대사를 ‘호걸승 유정’으로 소개한 내용으로, 야담이라기보다는 유몽인이 직접 사명대사를 만난 후 작성한 인터뷰 기록에 가깝다. 또한 사명대사의 신이한 행적이 아닌, 왜적의 기를 꺾은 호걸로서의 면모를 소개하고 있다. 유몽인이 사명대사와 동시대 인물인 데다 보현사에서 직접 만난 인연까지 있었기 때문에 ‘신화적 존재’가 아닌 ‘호방한 인간’의 면모를 소개하였던 것이다.

반면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 속의 사명대사는 도술을 마음대로 부리는 도사의 모습에 가깝다. 왜인들이 10여 장에 이르는 깊은 구덩이를 판 다음 포악한 코끼리와 독사를 집어넣고 유리를 덮고 그 위에 사명대사를 앉게 했으나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태연히 앉아있었다는 일화, 왜왕이 쇠로 된 말을 통로에 세워두고 숯불을 벌겋게 피워서 그 위에 대사에게 올라타게 했는데, 사명대사가 팔만대장경을 외우자 갑자기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와 비가 쏟아져 숯불이 모두 꺼졌다는 일화, 이에 비가 너무 쏟아져 일본이 수몰될 지경이 되자 일왕이 매년 인피(人皮) 300장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는 일화 등이 그것이다. 이 설화들의 결말은 사명대사가 일왕에게 “다시 한번 조선 땅을 침략한다면 1천 부처님이 일시에 나타나 일본 땅을 바다로 만들어버릴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러한 설화들에는 임진왜란 직후 조선 민중들의 염원과 소망이 담겨 있다. 7년간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선 민중들이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폐허가 된 터전을 다시 일구고자 하는 다짐이 설화로 이어진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 수백여 명의 포로들을 데려온 사명대사를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던 군중심리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에 대한 관심과 존경은 비단 민중들 사이에만 널리 퍼져 있는 것이 아니라 유학 교육을 받은 식자층들에게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야휘집》에도 다음의 사론이 실려 있다.

외사씨(外史氏)가 이르기를 예로부터 신법과 기술은 승려들에게 많이 있어 왔다. 비록 우리나라로 말한다면 도선과 무학은 나라를 위해 모두 하나의 큰일을 이루어 천 년 동안 이름을 남기었으니, 어찌 이단이라고 하여 그들을 멸시할 수 있겠는가. 유정이 국난에 임하여 정성을 다하였으니 그 공로는 비록 무신의 아래에 있지 않다. 또한 드물고 신기한 일이다.

《동야휘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 이원명이 민간에 떠도는 야담을 묶어낸 책이다. 이원명은 이야기의 말미에 종종 자신의 견해를 실었는데, 사명대사의 일화를 소개한 글 말미에는 도선과 무학이 신통한 능력으로 고려와 조선의 개창에 기여하고, 유정이 임진왜란에 세운 공로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승려들에 대한 유학자들의 시각이 상당히 우호적으로 바뀌었던 시대적 분위기를 보여준다.

2) 신선이 된 승려들

조선시대 야담집에는 신선이 된 승려, 혹은 신선과 만난 승려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오늘날까지 사찰 내에 산신각이 존재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살아남은 명산대찰이 모두 깊은 산속, 그중에서도 경관이나 기운이 수승한 명당에 있다 보니, 일반민들에게 승려는 신선과 함께 노니는 혹은 신선이 되어 날아가 버린 존재들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어우야담》에는 이원익이 만난 신선을 소개한 일화가 실려 있다. 이 신선은 한계산의 노승 모습으로 등장한다.

상국 이원익이 젊은 시절 한계산에서 놀다가 절 안으로 들어갔다. 모습이 기이하게 생긴 한 노승이 방장실에서 졸고 있다가 이원익을 보더니 자못 예를 갖추어 대하였다. 한참 동안 앉아 있었는데 노승이 작은 종이를 집더니 몇 글자 써서 뜰에 던졌다. 그러자 조금 지나 선학이 뜰에 내려와 빙빙 도는 것이었다. 이원익이 기이하게 여기고 그 연유를 묻자 노승이 놀라며 말했다.

“서생은 함께 이야기를 나눌 만하군요. 많은 사람이 보지 못하는데 그대 혼자 이를 보는구려. 기이한 광경을 보고자 하면 나를 따라오시오.”

노승은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가고, 이원익이 그 뒤를 따랐다. 드디어 뒷산 봉우리를 오르는데, 걸음마다 패옥(貝玉)이 땅에 깔려 있고 길을 따라 옥빛이 찬란하게 빛났다. 이원익이 물었다.

“어찌하여 보옥이 이리 많습니까?”

노승이 말했다.

“어찌 보옥이 없겠습니까? 오직 탐욕이 없는 자만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대는 가르칠 만하구려.”
조금 있자 생황과 퉁소 소리가 오색구름 속에서 들려오는데, 눈 덮인 산봉우리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노승이 고개 위에서 눈 덮인 산봉우리를 바라보면서 머뭇거리기만 할 뿐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지 않았다. 이원익이 가서 보려고 하자 노승이 말하길, “이는 상선(上仙)들이 모여 연회하는 곳입니다. 인간 세상의 재상이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지요.”라고 하고는 아래로 돌아 내려갔다.

훗날 이원익은 과거에 급제해 승지에 이르렀는데, 관직을 그만두고 한가히 노닐게 되었다. 다시 한계산을 찾았는데 예전의 노승은 볼 수 없었으며, 뒷산 봉우리를 다시 찾고자 했으나 길을 잃고 찾을 수 없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원익은 ‘오리 대감’이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선조~인조 대의 문신이다. 이원익이 만난 노승은 승려라기보다는 신선의 모습에 가깝다. 당시 승려들에 대한 신비주의적 시각이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야담집에 신승에 관한 설화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불교가 출세간의 종교이며, 승려들이 세속을 초월하려 하는 집단이라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 기이한 승려, 이승(異僧)

조선시대 승가는 어떠한 모습으로 유지되었을까. 사실 그 정확한 내막을 알 수 있는 사료들은 매우 제한적이다. 《경국대전》에 승려도성출입금지(僧侶都城出入禁止) 조항이 수록되면서 승려들은 도성출입이 금지되었고, 정업원 비구니처럼 왕실의 보호를 받는 소수의 승려를 제외하고 승려 대부분은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 이러한 현상은 지방 중소도시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입지 조건이 좋은 사찰들은 대부분 지역의 유생 혹은 토호들에게 내어주고 산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야담에서 승려가 민중과 가까운 존재가 아닌 ‘기이하고 이상한’ 존재로 등장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조선 후기 야담에서는 승려들이 종종 예언자와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하였다가 홀연히 사라진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고승들에 얽힌 이야기들이 자주 나왔던 것에 비해 조선 후기에 이르면 고승들의 모습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기이한 승려들의 모습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도교의 도사처럼 양생술과 점술을 부리거나 풍수에서 탁월한 안목을 지니고 있다.

1) 풍수에 능한 승려

조선시대 야담에서는 풍수에 능한 승려들의 이야기를 흔히 접할 수 있다. 대부분의 줄거리는 유사하다. 어떤 승려가 사대부 혹은 일반민으로부터 작은 은덕을 입었는데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천하명당을 가르쳐주었더니 훗날 그 집안에서 문과 급제자가 대거 배출되었다거나 큰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청구야담》의 〈길지로 점친 땅의 석함 속에 고기가 놀다(占吉地魚遊石函)〉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이판서 정운의 조부가 젊었을 때, 한겨울 절에서 글을 읽었다. 이때 걸식하던 한 승려가 누더기옷을 입고 절에 와서 걸식하였는데 이 절의 동자승이 저녁 한 그릇 먹이고 하룻밤 잔 후에 내치려 하자 이판서의 조부가 측은히 여겨 “지금 내치면 반드시 동사하리니 양식은 내가 준비하여 줄 것이므로 며칠 뒤에 날이 따뜻해진 후에 보내라”고 하였다. 그 후 몇 년 뒤에 이판서 조부가 상을 당하였는데, 그때 그 걸중이 찾아왔다. 걸중은 그때의 은혜를 갚겠다며 명당 묘터를 알려주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가 가리킨 곳은 낮고 습한 밭고랑 사이였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반대하니 이판서 조부가 “내가 대사의 말을 믿고 묘를 쓰려고 하였으나 사람들 의견이 분분하니 어찌하면 좋을꼬.”라고 하였다. 이에 걸중이 “길지의 증거를 목도하면 어찌 쓰리까?” 하면서 안타까워하였다. 이판서 조부는 “작은 증험이라도 보게 되면 어찌 사람들이 두말을 하겠소?”라고 하며 그 증험을 보여달라고 하였다. 걸중이 가리킨 땅을 파보니 반듯한 돌함이 하나 있고, 맑은 물이 함중에 가득한데 그 속에 금붕어 세 마리가 놀고 있었다. 그곳을 급히 흙으로 덮고 그 위에 묘를 썼다. 그 걸중이 하직 인사를 하며 “소승이 상주의 은덕을 갚고자 극길지지를 택하여 상주의 당대에 발복현달하고자 했으나 불행히도 길지가 누설한지라. 이제 40년 후에야 길한 기운이 완전히 모여 발복하면 문과 셋이 현달하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이후 40년 뒤에 이판서 조부의 손자 셋이 모두 등과하여 맏손자는 옥당에 이르고, 나머지 두 손자는 정경에 이르렀다.

위의 이야기에 나오는 승려는 탁월한 지관의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은덕을 베푼 이판서의 조부에게 복을 갚고자 하였으나, 길지에 대한 그의 의혹이 자신의 복이 아닌 손자 대의 복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어우야담》의 〈은혜를 갚은 풍수 중과 여종의 지혜〉 《청구야담》의 〈풍수 중 성 거사의 보은〉도 거의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전개된다. 풍수를 보는 능력이 탁월한 승려가 보은의 방법으로 길지를 점지해준다는 것이다.

이처럼 풍수에 얽힌 설화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풍수지리설이 매우 크게 유행한 조선시대의 세태와도 무관하지 않다. 풍수지리에 대한 당대인들의 관심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왕실은 물론 양반이나 일반 백성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상장례 의식을 불교식으로 치렀기 때문이기도 하다. 승려들이 상장례 절차를 주도하다 보니, 자연히 묘터에 얽힌 이야기에 승려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또한 승려들이 매골승으로 역할을 했던 풍습과도 무관치 않다. 조선 초 동 · 서활인서에는 각각 8명의 매골승이 배치돼 있었는데, 이들은 버려진 시신을 수습하고 사자의 명복을 빌어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중앙의 활인서뿐만 아니라 지방의 관아에도 매골승들이 배속되어 있었다.

이처럼 죽은 이의 장례를 치러주는 역할을 승려들이 담당하다 보니, 조선시대 야담집에는 지관승들이 빈번하게 등장하였다. 더구나 명당에 대한 높은 관심은 묘터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2) 미래를 예측하는 승려

조선시대 야담집에는 이승의 또 다른 모습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승려들이 등장한다. 앞날을 예언하는 선지자의 모습이다. 이들은 절에서 공부하는 유생들 혹은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난 나그네의 미래를 예언하는 선지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진다. 《청구야담》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인조 대에 유생 4명이 북한산의 절에 가서 회시 공부를 하였다. 어느 날 한 승려가 말하기를 “이 절에 신승이 있으니 당신들의 등과 여부를 물어보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유생들이 승려를 불러 자신들의 관상을 물어보았다. 그 승려는 첫 번째 유생에게는 백자천손을 할 것이라 하였고 두 번째 유생에게는 적장이 될 것이라 하였고 세 번째 유생에게는 신선이 될 것이라 하였고 네 번째 유생에게는 등과 후 반드시 3인을 만나리라고 예언하였다.

이에 유생들은 일장대소를 하고 허망한 중이라고 하였다. 그 후 네 선비는 뿔뿔이 흩어졌다가 병자호란을 겪은 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중 네 번째 유생은 과거에 합격하여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가 순시를 하기 위해 안동에 들렀는데 두 번째 유생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산적 두목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산사를 떠난 후 (병자호란을 만나) 가속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나 홀로 도망하였는데 이 산에 들어와 피난하니 이곳에 전부 피난민들이라, 나는 조금 문자를 안다는 이유로 두목으로 삼으니 도적질한 물건을 모두 공평하게 나누어 크게 인심을 얻었다. 난이 끝난 후에도 녹림당이 되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토로했다.

그 후 네 번째 유생은 어느 고을에 이르렀는데 촌락이 거의 수백 집에 달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첫 번째 유생의 마을이었다.

그가 말하기를 “병자호란을 당하여 집을 버리고 영남 땅을 떠돌아다니다 한 산골짜기에 들어가니 피난민 여성들이 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의 모든 여인이 크게 기뻐하며 나를 가장으로 삼고 동거한 지 여러 해가 흘렀다. 이 여인들이 낳은 아들이 100여 명에 가깝고, 그 아들들이 일가를 이루어 서로 나를 공양하매 영욕에 관계없이 조금도 세상에 부러운 바가 없다”고 하였다.

경상도 관찰사는 이어 하동 땅을 지나 지리산에 이르렀는데, 공중에서 관찰사의 자(字)를 부르는 사람이 있어 돌아보니, 한 사람이 층암절벽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바로 세 번째 유생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병자호란을 만나 산속으로 들어가 수일 동안 굶었으나 먹을거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냇가에 이상한 풀이 있어 따먹으니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옷을 입지 않아도 더웠으며, 산속에서 야숙을 하여도 질병이 없고, 걸음걸이가 나는 듯하여 명산대산을 두루 노닐고, 수도한 신선을 만나 장생불사를 논하였다고 하였다.

결국 북한산의 그 승려 말대로 네 명의 운명이 갈렸으니 참으로 이인이라 하겠다.

위의 이야기 배경은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 전에 절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유생들이 전란을 만나 뿔뿔이 흩어진 후 살아간 모습에서 당시 병자호란이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삶의 행로를 겪게 되는데, 그 운명을 이미 병자호란 이전에 이들이 공부하던 산사의 승려는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이승들의 이야기는 산속에서 도를 닦는 수행자의 모습이 외부인들에게는 미래를 예측하고 명당의 기운을 느끼는 비범한 이미지로 수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4. 타락한 승려, 요승(妖僧)

조선시대 야담은 민중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인 동시에, 당대의 유학자들이 글로 옮긴 이야기라는 특징을 함께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유학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도덕적 관점이 투영되기 마련이다.

조선시대 야담에 자주 등장하는 세 번째 유형의 승려는 타락한 승려들이다. 이들은 권력이나 색욕에 굶주린 모습으로 등장한다. 숭유억불을 기치로 내걸고 500여 년 성리학 이데올로기를 주창해온 조선 사대부들에게 승려들은 이단을 신봉하는 천한 무리로 간주되었다. 특히 국정에 참여하거나 왕실에 불교를 전파한 승려는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승려들의 독신 생활을 비꼬아 색욕에 굶주린 부류로 취급하는 경향도 자주 확인된다.

1) 색을 탐하는 승려

성에 관한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인기 있는 소재이다. 이 같은 이미지는 조선시대에 와서 생겨난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 불교 유입 초기부터 나타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삼국유사에서도 궁 안에서 간통을 하다가 들켜 죽임을 당한 승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승려들은 독신 생활을 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자연히 이들은 ‘이성을 갈애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민중들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야담에는 여성을 탐하는 승려의 모습이 매우 해학적이고 풍자적으로 묘사되었다.

《고금소총》이나 《용재총화》에 실린 야담들은 대부분 성(性)과 관련된 내용이 많기 때문에 여기에 등장하는 선비나 승려들도 대부분 성을 밝히는 인물들로 묘사되고 있다. 이들은 용케도 여인을 만나 거사를 치르거나, 여인을 탐하려다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혼쭐이 난다. 이러한 야담들은 조선시대 민중들이 선비나 승려들에게 얼마나 도덕적인 삶을 기대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2) 나라를 어지럽힌 요사스러운 승려

조선왕조실록에는 요승(妖僧)이라는 표현이 약 130회 등장하는데, 이는 대부분 고려 말의 신돈과 조선 명종 대의 승려 허응보우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요사스러운 승려는 이상한 술법을 부리는 이도, 민중들을 현혹하여 재물을 갈취하는 이도 아닌, 정치에 참여한 승려였다. 오늘날에는 신돈과 보우의 불교중흥책을 재평가하는 연구성과들이 나오고 있지만,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 보우는 국가를 문란케 하고 문정왕후를 앞세워 권력을 탐한 타락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한 인식은 야담집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어우야담》에는 ‘요승 보우와 고승 일선’이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보우는 요승인데, 여러 불경에 대해 많이 알았고 시에도 능했으며 문장도 잘 지었다. (중략) 보우가 봉선사에서 무차회를 열었는데, 찐쌀 수백 석으로 중들을 먹이고 사방의 중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보우는 구름 빛 비단 기사를 입었는데, 모든 중이 에워싸고 호위하며 윗자리에 받들어 모셨다.

한 노승이 다 해진 승복을 입고 얼굴빛은 마른 나무 같았는데 석장을 끌고 끝자리에 이르렀다. 보우가 멀리서 그를 보고는 달라 나가 절하고 엎드려서 얼굴을 땅에 묻고 감히 올려다보지 못했다. 좌우의 사람이 힐끗 보니 보우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땅에 떨어졌고, 엎드린 채 오래도록 일어나지 못하였다. 노승은 그대로 선 채 석장으로 그를 두드리며 말했다.

“슬프도다! 나는 네가 이 지경에 이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구나. 나는 네가 이 지경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그러고는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가버렸다. 보우는 허탈해하며 즐거움을 잃은 지가 여러 날이었다. (중략)

보우는 고승 일선(一善)이 도가 있다고 생각하고 후한 예를 갖추고 묘향산에서 맞이했는데, 일선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큰 글씨를 써서 그에게 주었다.

“구름이 진령을 빗겼으니 집은 어디에 있는가? 눈이 남관에 쌓여 말도 나아가지 못하네.”

그러고는 일선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훗날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보우는 한계사 바위굴에 몸을 숨겼다가 발각되어 제주로 유배를 갔고, 마침내 힘센 무인들의 주먹질을 당해 죽었다.

일선은 묘향산에서 일생을 마쳤다. 입정할 때는 탑상에서 내려오지 않았으며, 비록 대관들이 이를지라도 문밖으로 나가 영접한 적이 없었다.(하략)

위의 글에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승려들을 바라보는 이중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 산에서 내려와 불사를 크게 벌이고 국사에 참견하는 승려는 요망한 승려, 산속에서 평생토록 수행만 하는 승려는 존경할 만한 승려라는 인식이다.

이처럼 산속에서 은둔하는 승려에 대한 높은 평가는 조선시대 야담집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시각이다. 이들은 승려들의 은둔성을 치켜세우며 산에서 끝끝내 내려오지 않는 승려들을 신선으로까지 묘사했다.

하지만 산에서 내려와 크게 불사를 일으키고 왕실불교를 주도하는 승려에게는 요승, 권승(權僧), 간승(奸僧) 등 갖가지 불명예스러운 칭호들을 붙였고, 공공의 적으로 규정해 이들을 사회에서 축출하기 위한 추문을 양산해냈다. 이러한 추문은 야담을 통해 민중들에게 유포되었다.


5. 신비롭거나 혹은 타락했거나, 승려에 대한 극단적 시선

조선시대 야담집에 등장하는 승려들의 유형은 크게 신승, 이승, 요승으로 나눌 수 있다.
신승은 신통력을 발휘한 승려들이다. 주로 역사적 실존 인물들이 주인공이며, 신비한 이적행위를 벌이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신승에 얽힌 이야기는 조선시대에 높이 평가받은 고승들의 일화가 민간 설화와 섞여 흥미진진하게 각색된 경우가 많다.

이승은 기이한 행적을 보인 승려들이다. 대부분 유명한 인물이나 관료들 혹은 그들의 친인척에게 도움을 준 이름 없는 승려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양반층에게 길지를 선사한다거나 절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의 미래를 예견하는 선지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불교는 신선 세계와 유사한 출세간의 종교라는 인식이 짙게 깔려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요승은 권력이나 여색 등에 굶주린 승려이다. 국가권력과 결탁해 불교 부흥정책을 펼치는 승려들에 대한 당대 유학자들의 날 선 비판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특히 허응보우는 요승의 대표적 인물로 묘사되었다. 또한 여색에 굶주린 승려는 독신 생활을 하는 승려들을 바라보는 당대 사람들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 실제 민중들의 삶에 영향을 준 승려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삼국유사》나 일본의 불교 설화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비행을 실천하는 승려는커녕 민중들을 교화하는 승려의 모습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일반민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승려들의 모습도 발견할 수 없다.

이 같은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일차적으로는 조선시대 야담집이 지닌 한계점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현전하는 야담집은 모두 한문으로 쓰인 단편 설화집이다. 따라서 이를 집필한 이들은 대부분 유학 교육을 받은 식자층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어우야담》의 편찬자인 유몽인과 《용재총화》의 편찬자 성현은 대사간을 역임한 중앙관료들이었고, 《동야휘집》의 편찬자 이원명도 이조판서를 지낸 고위관료였다. 비록 이들이 성리학 교조주의에 빠진 동시대 유학자들에 비해 불교에 상당히 우호적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승려들을 타자로 여기며, 승려 집단을 낮은 계층으로 바라보는 양반층의 시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성만으로 불교와 백성들 사이의 괴리를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 조선시대 승려들은 실제로 민중들과 상당한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경국대전》에 승려 도성출입금지, 부녀자 상사금지(上寺禁止)가 명시된 후로 승려들이 민중들과 접촉할 기회는 매우 적었다. 이에 따라 도성 내에서는 보살할미라 불리는 재가 여성들이 시주를 거두어 사찰에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직접 만나는 승려들은 대부분 떠돌이 중이나 걸식하는 탁발승, 장례식에서 염불을 외우던 ‘재받이중’ 등 낮은 계층의 승려들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중기를 거쳐 조선 후기로 갈수록 야담에 등장하는 승려들의 모습이 점점 더 세속화되어 가던 현상에서도 확인된다.

이에 따라 불교는 일반민들의 삶과 점점 괴리된 채 산중에서 영위될 수밖에 없었고, 야담 속의 승려들은 신비롭고 기이한 존재 혹은 타락한 존재라는 양극화된 이미지로 나타났다. ■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 〈조선 전기 정업원의 성격과 역대 주지〉 〈조선 초기 능침사의 역사적 유래와 특징〉 〈19세기 불교계의 동향과 송광사의 위상〉 〈15~16세기 정업원의 운영실태〉 등이 있고, 저서로 《회암사와 왕실문화》(공저), 《대법사지》(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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