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로힝야족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가?

흔히 불교국가로 알려진 미얀마(옛 버마)에서 소수종족이며 무슬림인 로힝야족과 미얀마 중앙정부 및 일부 배타적인 불교도 사이에 오랫동안 쌓여온 갈등이 지난 2012년부터 고조되어 심각한 ‘인종청소’ 양상으로까지 치닫게 되면서 국제 사회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미얀마 밖의 무슬림들도 이 사태에 개입하고 있고, 아직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스리랑카의 일부 극단적 불교민족주의자들이 미얀마의 무슬림 탄압을 응원하는 집회까지 열고 있으며, 이런 분위기 때문에 무슬림 국가인 방글라데시의 불교도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이런 사태가 계속되면 자칫 여러 나라가 관계된 ‘불교-이슬람’ 갈등 양상으로 확대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 글은 정식 학술 논문이라기보다는 로힝야족 사태가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遠因]과 현대 미얀마 정치 · 종교 상황[近因]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이것이 ‘국제 문제’가 되는 과정 그리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 나가게 될지 예측해보는 보고서 형식을 취하고자 한다.


1. 로힝야족 문제의 역사적 배경

언론 보도를 통해서도 알려졌지만, 로힝야족 문제의 근원은 과거 아시아 여러 나라를 식민지배했던 제국주의 영국이 뿌려놓은 악연(惡緣)이 그 씨앗이다. 영국인들이 식민 통치의 편의를 위해서 현재의 방글라데시에 거주하던 로힝야족을 대거 미얀마로 이주시켜 쌀, 무역 등에서 특혜를 주면서 미얀마 지배 수단으로 이용하다 미얀마 독립 시에 그 갈등의 원인을 버려둔 채 떠나간 것이다.

스리랑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얀마에서도 제국주의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독립 운동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불교와 민족주의가 결합하여 불교 민족주의가 탄생하는데, 그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20년대부터 두 차례에 걸쳐 전쟁을 치르며 영국이 미얀마 내부로 깊숙이 침략하는 과정에서 영국의 지배를 거부한 승려들은 이라와디강 북쪽 지역으로 대거 이동했다. 1885년 미얀마와 영국 사이에서 벌어진 제3차 전쟁으로 만달레이에 남아 있던 미얀마의 마지막 왕국이 무너지고, 영국은 마지막 왕 띠보우 민(Thibaw Min)과 그의 일가족을 만달레이에서 2,600km나 떨어진 곳, “육로로 닿기 어려웠고 우기에는 길이 끊겨 외부 세계와 단절될 만큼 고립된” 인도 서남부 마하슈트라주의 외진 마을 라트나기리(Ratnagiri)에 유배시켰다.

구엔터 르위(Guenter Lewy)의 연구보고서 《전투적 불교민족주의: 버마 사례》에서는 영국의 이 행위를 이렇게 설명한다. “미얀마는 왕이 존재하지 않는 종교를 상상하지 못한다. 왕실의 종말은 이 나라에 종교가 사라졌음을 의미했다.(식민세력은) 왕과 왕에 의해 이루어지던 통치의 모든 흔적을 파괴했는데 이는 민족성(nationality)을 말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국의 식민 지배 이전에는 미얀마 승가의 최고 지도자인 승왕(僧王)을 왕이 임명하였지만, 1885년 버마의 마지막 승왕 통도우 사야도(Taungdaw Sayadaw)가 사망하자 후계자를 임명할 왕이 없었고, 승단에서 새로운 승왕을 선출해도 영국 식민 당국이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승가 질서를 유지해온 불교계 입장에서 볼 때, 미얀마를 강점하여 왕정을 폐지하고 직접 지배하면서 전통적인 승왕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영국은 침략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인 불교에 적대적인 오만한 세속주의자들이었으므로, 승려들이 영국 식민지배에 저항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영국 식민 세력이 국왕을 내쫓고 도심을 장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시골 소작농들과 연계한 승려들의 반란이 거셌던 시골 변방 지역에서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들의 항쟁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영국은 약 5년간 10만에 가까운 영국군과 인도 식민지에서 동원한 인도 군인들을 투입하였는데, 바로 이 항쟁 시기에 승려들이 변방에서 게릴라 전투를 벌이면서 미얀마의 ‘전투적 불교민족주의’가 본격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대영(對英) 항쟁 전쟁 당시 게릴라 대장 역할을 하는 승려가 많았던 사실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미얀마 승단의 대영 항쟁에서 활약했던 라카인(Rakhine) 출신 우 옥뜨마(U Ottama)는 라카인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무한한 자부심이고 미얀마 전역에서 독립운동가의 대부로 남아 있다. 2014년 그의 130번째 탄생일은 미얀마는 물론 방글라데시 동남부의 불교도 지역인 콕스 바자르(Cox’s Bazar)에서도 기념했을 정도로 그는 국경을 넘어 라카인족 공동체에서 널리 추앙받고 있다.

인도에서 교육받으며 마하트마 간디의 영향을 받은 우 옥뜨마는 ‘납세거부 운동’ 등의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을 주도했다. 1921년 그가 인도 · 일본 · 프랑스 등에서 긴 해외 생활을 마치고 미얀마로 돌아왔을 때, 양곤대학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불붙기 시작했는데, 이 학생운동에 우 옥뜨마를 따르는 승려들이 동참하면서 그는 대영 투쟁의 상징적 인물로 부상했다.

우 옥뜨마와 비슷한 시기 유명해진 또 다른 민족주의적 승려로 우 위자라(U Wisara)가 있는데, 그는 1929년에 감옥 안에서 사프란(노란 승복)을 입을 권리를 달라며 166일간 단식투쟁을 하다 옥사하였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영국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미얀마불교와 승려들의 모습은 전투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때 형성된 미얀마 승단의 정치 지향적 성향은 독립 이후 장기간 이어진 군부독재 과정에서 어떤 때에는 ‘저항’과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면서 계속 이어졌으며, 2010년 이후 군부가 대외 개방정책을 펼치면서 배타적 민족주의 그룹에서는 주로 로힝야족을 대상으로 한 극단적인 ‘이슬람 포비아’ 현상을 널리 확산시키는 데에도 역할을 하게 되었다.

2. 미얀마는 다른 종교에 적대적이었나

1990년대 조사에 따르면 미얀마 안에는 135개 종족이 함께 살고 있다. 국민 대다수가 불교도이지만 무슬림과 기독교도도 수백만 명에 이른다. 제국주의 영국의 식민 지배를 겪으며 배타적 · 전투적인 ‘불교민족주의’가 뿌리를 내리기 전의 미얀마 불교도들은 이처럼 다양한 종교 배경을 가진 여러 종족과 어울려서 살아왔다.

한국보다 300여 년 앞선 500년 전에 가톨릭이 유입되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어서 옛 수도 양곤(랑군)에는 수백 년 된 성당이 있고 신도들은 별 어려움 없이 가톨릭 신앙 활동을 할 수 있다. 로마 교황청에서도 그 중요성을 감안하여 추기경을 임명하고, 금년(2017년) 5월 미얀마 최고지도자(공식 명칭은 국가자문역) 아웅 산 수 치의 바티칸 방문 때에 정식 수교에 합의한 뒤 교황 프란치스코가 곧 미얀마를 방문하여 아웅 산 수 치를 비롯한 정치 지도자 및 불교 지도자들과 만남을 계획하고 있다.

교황 방문을 앞두고 지난 9월에 미얀마 주교단은 “이 나라에서는 로힝야 문제가 민감한 이슈이므로 교황 방문 중에 이 말을 안 쓰는 것이 낫다”면서 교황에게 ‘로힝야’라는 단어 사용을 피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 10월 말에는 미얀마 가톨릭계가 “로힝야 난민 문제로 미얀마에 대한 국제 제재가 펼쳐지면 미얀마가 다시 중국의 품 안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고” “아웅 산 수 치의 개혁을 주저앉히는 장애가 될 것이며, 수십 년에 걸친 군사 통치가 끝난 지금 수많은 가난한 이들이 다시금 해를 입을 것”이라는 이유를 내세우며 국제사회의 미얀마 제재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기도 하였다.

미얀마 가톨릭의 이런 움직임은 ‘민주화 정착을 위한 아웅 산 수 치의 안착 필요성’ 등 겉으로 내세운 명분보다 다수 불교도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갈등에 휘말려 자칫 ‘불교-가톨릭’ 사이의 평화를 깨뜨려 자신들이 살아남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생존 전략일 가능성이 크며, 이것은 로힝야족 사태를 지켜보면서 미얀마 가톨릭이 얻은 교훈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가톨릭뿐 아니라 이슬람교도 중에서도 로힝야족을 제외한 다른 종족들은 주류인 불교도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미얀마 밖 사람들은 미얀마의 무슬림들이 모두 로힝야족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어긋나는 오해이다. 미얀마 무슬림의 대다수는 바마르어(Bamar)를 모어(母語)로 사용하고 도시에 거주하면서 무역과 통상 분야에 종사한다.(미얀마 무슬림 중 중국계인 판타이족(Panthays)은 관습 · 전통 · 문화에서 이들과 다르다.)

근현대 시기에 미얀마 무슬림들은 사회활동 · 행정기구와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들 중 우 라시드(U Raschid)는 1930년대 대영 항쟁에 참여한 학생운동의 저명한 지도자로 1948년 독립 이후에는 여러 부처의 장관을 역임하였다. 저명한 정치인이었던 우 라작(U Razak)은 1947년 7월에 아웅 산 등과 함께 암살당하였으며, 무함마드 바시르(Ba Galay alias Mohammed Bashir)는 코미디언으로 이름을 날렸다. 페킨(Pe Khin)은 1947년에 아웅 산과 산(Shan) · 카친(Kachin) · 친(Chin)족 등 소수종족 대표자들 사이에서 역사적인 팡롱(Panglong) 협정을 이끌어낸 산파 역할을 해서 버마연방 수립의 길을 닦았던 인물로 평가받았고, 정부 수립 후에는 외교관으로 활약하였다. 유명 작가로 1988년 민주주의 전국연맹(the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의 창립 멤버 중 하나인 마웅 타우 카(Maung Thaw Ka)도 있고, 만달레이 출신의 인기 높은 만화가 칸 춘(Kan Chun)도 있다. 아웅 산 수 치의 오랜 동지로 금년 1월 29일 암살당한 저명한 변호사 코 니(Ko Ni)도 무슬림이다. 이처럼 몇 년 전 로힝야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까지 무슬림들은 미얀마 전역에 흩어진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 자기 역할을 하며 사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무슬림이 다수인 미얀마 서북부 라카인주에서 벵골어의 치타공 방언을 쓰고 스스로를 ‘로힝야’라고 부르는 종족이 현재 미얀마 사태의 핵심이 되어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 이들은 미얀마 도시 지역에 넓게 퍼져 있는 다른 무슬림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무슬림들과 달리 대부분 방글라데시 접경의 시골에 거주한다.

1948년 미얀마가 독립한 뒤에 로힝야족은 민병대를 조직해 동파키스탄(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인도가 승리하면서 방글라데시로 분리 독립)에 합류하고자 하였으나 이 운동은 1950년대에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에 급진적인 ‘로힝야연대조직(RSO; Rohinya Solidarity Organization)’에 이어 ‘로힝야애국전선(The Rohinya Patriotic Front)’이 생겨났으며 최근에는 군사 활동이 강화된 ‘아라칸로힝야해방군(Arakan Rohinya Salvation Army)’이 조직되어 미얀마 중앙정부와 갈등을 키워가고 있다.

이처럼 미얀마가 다른 종교, 그중에서도 무슬림에 대하여 적대적이기보다는, 로힝야족 무슬림들이 특수한 사례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3. 미얀마는 로힝야족 문제에 왜 강경 대응할까

미얀마가 독립을 이룩하기까지는 불교민족주의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독립 이후에도 국가가 안정을 확보하는 데에 기여하였으므로, 미얀마와 스리랑카에서 불교민족주의의 등장과 전개는 당연한 역사 발전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 다른 일들이 모두 그렇듯이,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과거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독립을 열망하며 출발한 ‘불교민족주의’ 운동의 긍정적인 역할은 사라지고, 이제 불순한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정치 입지를 강화하거나 사회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데 불교민족주의를 악용하여 부정적인 역할만 남게 되었다. 이 불순한 지도자들에게 대중이 속아서 미얀마에서는 로힝야족, 스리랑카에서는 타밀족에 대한 타도와 절멸(絶滅)을 외치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미얀마 군부독재 체제 아래에서 잠잠했던 로힝야족 문제가 본격적으로 외부 세계에 크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2년 무슬림과 불교도 간의 유혈 충돌로 100명 이상이 사망한 뒤부터였다. 그 뒤로 불교도-무슬림 사이의 갈등이 더욱 깊어졌고, 이에 따라 무슬림에 대한 차별과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지난해(2016년)에는 일부 불교도들이 이슬람 사원을 습격해 불태우는 사건도 잇따랐으며, 지난해 10월 로힝야족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경찰초소 습격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는 미얀마군이 ‘무장세력 토벌’을 빌미로 로힝야족에 대한 인종청소에 나섰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 뒤로 서구 언론에서 전하는 로힝야 관련 소식은 대부분 ‘다수 불교도가 소수 무슬림을 탄압 · 학살하고 인종청소까지 감행한다’는 내용을 되풀이하고 있었고, 거의 모든 국내 언론이 이를 그대로 받아서 전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런 폭력을 지휘하는 승려들이 있다. 마 바 타(Ma Ba Tha; 인종과 종교 보호위원회)로 알려진 미얀마 불교도 조직의 고위급 지도자인 아신 위라투(Ashin Wirathu)는 극단적인 반(反)로힝야 선동 때문에 아웅 산 수 치가 이끄는 민주 정부와 미얀마 승단의 기피 인물이 되었다. 그는 지난해 11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반무슬림’ 열정을 막는 정부에 비난을 퍼부으면서 자신과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반무슬림’의 동지라고 하였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하지만, 우리는 우리 국민과 나라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미국의 반이슬람 조직도 우리와 협력할 필요가 있다. 미얀마는 다른 나라의 조언을 들을 필요가 없지만 그들은 미얀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갈 수 있다”며 자신이 펼치는 반무슬림 운동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미얀마 안에서 그의 영향력은 지난 몇 해 동안 크게 약화하였다.

아웅 산 수 치가 이끄는 민주연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 관계자도 지난해 7월 “마 바 타가 필요 없다”고 말하였고, 미얀마의 공인된 승단 관계자들도 마 바 타와 거리를 두고 있다고 밝혔다.

오랫동안 아웅 산 수 치의 정치적 동지였던 저명한 무슬림 변호사 코 니(Ko Ni)가 지난 2월 암살당한 직후부터 위라투에게는 이미 대중을 상대로 한 연설 제한 조치가 내려져 있었는데, 미얀마 최고위급 승려들의 모임(The State Sangha Maha Nayaka)에서 2017년 3월 10일부터 2018년 3월 9일까지 1년 동안 그가 미얀마 전역에서 일체의 설법을 하지 못하게 금지하는 징계를 내린 것이다.

방글라데시 등으로 떠나간 로힝야족은 5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며, 가까운 시일 안에 이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미얀마 내부의 복잡한 정치 · 종교 상황뿐 아니라, 정부와 승단이 과격 극단주의자들의 활동을 막으려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선동으로 어린 동자승이 포함된 수많은 승려가 해외로 떠났던 로힝야족의 귀환에 반대하는 시위를 펼치고 있어서 사태 수습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처럼 복잡하게 얽힌 문제의 바탕에는 미얀마 군부와 ‘전투적 불교민족주의’ 그룹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정치 상황이 깔려 있다. 민주화 이전 미얀마의 군부 권위주의 정권은 다수 국민의 분노와 좌절감이 소수 무슬림을 향하도록 조장하며, 때로는 전면에서 무슬림 추방과 학살을 주도하였다. 또한 민간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여전히 큰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미얀마 승단의 극단적인 불교민족주의자들과 결탁하여 로힝야 사태를 자신들의 목적에 맞추어 이용 · 악용하고 있다. 반면에, 이들 극단적 불교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군부를 활용하는 것으로 진단된다.


4. 로힝야 사태는 국제 문제로 확대되는가

미얀마에서 벌어진 이 일의 파장은 외국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이웃의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에서 비행기를 급파해 난민을 자국으로 데려가기도 하였는데, 이런 소식은 다른 무슬림들을 자극해 언제 어떤 상황이 터져 나올지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실제로 2013년 8월 10일에는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 시내 중심가의 이슬람 사원을 불교도들이 습격하고, 주변 집들을 불태우며 무슬림들을 공격했다. 지난달에는 승려들이 “이 모스크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며 시위를 했고, 한 승려가 이슬람에 반대하며 분신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스리랑카는 인구 2,000만 명 중 4분의 3이 불교도인 싱할라족으로 구성돼 있다. 소수민족인 타밀 분리운동이 2009년 정부군에 진압된 뒤 다수 불교도의 횡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지난 9월 26일에도 콜롬보에서 극단적인 승려가 이끄는 불교 집단이 “미얀마의 불교도들이여, 스리랑카 국민은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테러리스트들이 모두 다 무슬림은 아니지만, 테러리스트들은 대부분 무슬림”이라고 쓴 펼침막을 들고 UN이 운영하는 난민 캠프에 있는 “로힝야족들을 해외로 추방하라”는 시위를 하는 장면이 외신으로 전해졌다.

미얀마 군부와 일부 불교도들이 로힝야족에 대하여 방화 · 살인 등의 탄압을 이어가고 수십만 명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 등 이슬람 국가의 난민캠프로 몰려드는 사태 앞에서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집단은 방글라데시 콕스 바자르(Cox’s Bazar) 지역에 거주하는 라무(Ramu) 불교도 공동체일 것이다. 이들은 지난 이미 2012년에 다수 무슬림의 공격으로 사찰이 불에 타는 등 큰 피해를 당하였는데, 그때 방글라데시 정부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로힝야 무슬림을 포함한 300여 명을 구금하였다.

그 뒤로 방글라데시 경찰이 정기 순찰을 하면서 라무 공동체 거주 불교도들은 평화롭게 살아가며 불교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미얀마 로힝야 사태의 불똥이 언제 어떻게 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 공동체 지도자들은 “우리는 일체의 폭력을 반대한다. 로힝야족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에 대해 우리도 죄의식을 느낀다. 현재 미얀마 정부의 행동은 기본 인권을 어기는 것이며 따라서 불교도인 우리는 결코 그런 행동을 지지할 수 없다”고 말하며 사태의 불길이 자신들에게 옮겨오는 것을 막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들은 TV 화면에서 로힝야족들이 당하는 고통을 보면서 “우리도 언제든 당할 수 있는 일”이라는 공감과 연민을 느끼는 것이다. 지난 8월 이후 미얀마 로힝야 무슬림들의 해외 탈출이 이어지면서 라무 공동체에서는 로힝야 난민 1,500여 명에게 먹을 물과 식량을 공급하고 미얀마 군경의 총격으로 부상당하여 입원한 난민을 돕는 헌혈 운동을 펼쳤다. 또 지난봄에는 웨삭데이 연등축제 규모를 축소하여 절약한 돈을 성금으로 내기도 하였다. 현재 라무 불교 공동체 지역에는 무장 군경이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어서 겉으로는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언제 어떤 사태가 터질지 예측할 수 없어서 지역민들은 불안감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한편 인도에서도 무슬림들이 로힝야족 탄압을 중단하라며 항의 집회를 열고 있는 가운데,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9월 6일 미얀마의 실권자 아웅 산 수치를 만나 “최근 라카인주에서 벌어진 ‘극단주의자들의 폭력 행위’에 대한 미얀마의 우려에 공감한다”면서 미얀마 정부 편을 들어주었으며, 인도에 머물고 있는 로힝야족 난민 4만 명의 추방 계획을 밝혀서 이슬람권 국가들과는 상반되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한편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는 무슬림들의 불교에 대한 테러가 벌어졌다. 2013년 8월 4일 수도 자카르타의 에카야나(Ekayana, 一乘) 불교센터에서 폭발물이 터졌는데 조악한 폭발물 옆에는 “미얀마 로힝야 무슬림 탄압에 대한 보복”이라고 적힌 문서가 있었다. 2002년 발리 테러 등을 일으켰던 이슬람 극단주의 지도자는 그에 앞서 7월 22일 옥중에서 미얀마에 ‘보복공격’을 경고한 바 있다.

전 국민의 3%가 불교도로 그동안 평화롭게 공존해온 인도네시아에서는 앞으로 불교 사원과 불교도들이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고, 1969년 종족 분쟁 이래 조용했던 말레이시아에서도 위기 발생 가능성이 있으며, 북쪽의 태국에서도 오랫동안 잠복해 오면서 간헐적으로 폭발하는 ‘불교-이슬람’ 갈등이 더욱 깊어갈 것이다.


5. 로힝야 사태 해결을 위한 세계 불교계의 노력

현재 벌어지는 미얀마의 로힝야족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은 다양한 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전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이 최근 미얀마를 방문하여 라카인주의 현장을 살펴본 뒤 보고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뚜렷한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보디 스님(Bhihhku Bodhi) · 잭 콘필드(Jack Kornfield) · 민규르 린포체(Yongey Mingur Rinpoche) · 페마 최드론(Pema Chödrön) · 조셉 골드스타인(Joseph Goldstein) · 담마차리 로카미트라(Dhammachari Lokamitra) · 타라 브랙(Tara Brach) · 수미 런던(Sumi Loundon) · 로버트 셔먼(Robert A. Thurman) 등 전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승려와 불교학자 · 수행자 200여 명이 ‘미얀마불교 지도자들이 인종청소 문제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취지의 성명서에 서명하고 이 문건을 미얀마의 최고 승가 조직인 국제승가위원회(State Sangha Maha Nayaka Committee) 의장에게 보냈으며 그 사본을 아웅 산 수 치 · 종교문화부 장관 · 대통령 · 합참의장 · 유엔 난민문제 고등판무관 · 라카인 문제 특별위원회 의장 코피 아난 · 미국 국무장관 · 미얀마 주재 미국대사 등에게 보냈다. 한편 11월 중 미얀마를 방문하게 되는 로마 교황 프란치스코도 미얀마의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에게 로힝야 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촉구할 것으로 보인다.


6. 로힝야족 사태와 아웅 산 수 치의 책임 문제

로힝야족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국내외 언론과 대중 여론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웅 산 수 치에게 책임을 물으며, 그의 “노벨 평화상을 박탈하라”는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미얀마 가톨릭 주교단의 목소리에서도 “아웅 산 수치를 궁지로 몰아가면 오히려 민주정부의 안착을 해쳐서 다시 군부독재가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고 있는데, 이런 주장은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펼쳤던 이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88년 미얀마의 ‘88민주항쟁’을 이끌었던 ‘전국버마학생연합’ 의장으로 활동하다 20년 형을 선고받고 2007년에 다시 65년형을 선고받아 수감되었다가 2012년 석방된 ‘88세대 평화와 개방사회’ 지도자 민 코 나잉의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아웅 산 수 치가 물러나면, 석유 매장량이 많은 것으로 추정되는 아라칸 지역에 이해관계가 있는 군부와 중국 정부가 이득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실제로 지난 2월에 아웅 산 수 치가 로힝야족 거주 지역인 아라칸주에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군대를 보내라고 했을 때도 군부는 그 지시를 따르지 않는 등 사태 수습에 실패하면 언제라도 군부가 재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얀마의 영자지 〈이라와디(The Irrawaddy)〉도 최근 논평에서 “사태가 악화되어 선거로 집권한 수치 정부가 붕괴되면 다시는 민주정의 회복이 어려울 것”이라며 같은 견해를 밝히고 있다.

4 · 19혁명 이후 1년이 채 안 되는 민주정부 시절, 일시적 혼란을 이유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그 뒤 수십 년 동안 군부독재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로힝야족 사태가 악화되고 그것을 빌미로 미얀마에서 다시 군부독재 정권이 득세하지 않을까 하는 이들의 우려를 이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서구인들이나 무슬림들의 시각은 우리와 다를 것이다.


7. 한국불교, 로힝야족 문제에 관심을

다른 사안과 마찬가지로, 역사 · 정치 · 종교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미얀마 로힝야족 사태에 대해 일직선을 긋고 어느 쪽은 정의[善]이고 그 반대쪽은 불의[惡]라고 단칼에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의 언론에서는 이 사태에 대한 심층 분석 없이, “다수인 불교도들이 소수자인 무슬림들을 탄압 · 추방 · 인종청소하고 있다”고 보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스라엘 군인들이 유아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비무장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데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던 모 신문에서는 기사 제목을 “로힝야 사태, 인종청소 교과서적 사례”라고 뽑아서 마치 불교의 폭력이 일반화된 현상인 것처럼 보도하여 독자들을 오도(誤導)하고 있어서 안타깝다. 앞으로는 한국 언론에서 이 사태를 이처럼 선정적으로 전하며 화약고에 부채질하는 짓은 멈추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불교계가 앞장서서 로힝야족 사태가 하루빨리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간절히 기원해야 한다. 더 나아가 미얀마 · 스리랑카 ·태국 · 인도네시아 · 파키스탄 · 말레이시아 등 남아시아의 불교와 이슬람 국가의 주한 대사관을 통하여 각 정부와 국민에게 ‘평화를 간절히 희망하는 한국 불교도의 발원’을 전해주면 좋겠다. 조계종 총무원의 새 집행부가 이 나라 대사들을 동시에 초청하여 대화 모임을 주선하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다.

반무슬림 시위를 주도한 스리랑카의 일부 사이비 불자들처럼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히고 세상을 ‘내 편, 네 편’으로 가르는 진영(陣營)의 족쇄에 묶여서 허우적대는 이들, 나와 남을 함께 사랑하는 자비의 마음을 망각한 이들이라면, 그들이 설사 승복을 입고 매일 절에 가서 예불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없다. 미얀마와 스리랑카 사태를 보면서, 우리 안에는 이런 잘못이 없는지 다시 점검해 볼 필요도 있다. ■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태리어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석박사 과정 수료. 오산대와 명지대 강사, 파라미타청소년엽합회 사무총장, 문화체육관광부 종무관 역임. 주요 저서로 《지혜로운 삶의 교훈 채근담》 《북한산성과 팔도사찰》 불교평론집 《향기로운 꽃잎》 등과 역서로 《조선불교통사(근대편)》 《영어로 읽는 법구경》 《담마난다 스님의 불교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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