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어떤 사람과 마주칠지 모르니 악연(惡緣)은 만들지 말자고 다짐했던 적이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 20세기 때 일이다.

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돼 시인이 되고, 그해 말쯤 한 중앙 일간지의 출판국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사람들을 만나 내 소개를 하다 보면 직장을 밝히고 문학잡지 한두 곳에 오르는 이름을 알려줘야 했기에 스스로 반공인(半公人)으로 여겼다.

2001년 신문사를 그만두며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나는 잠시 일산에서 라이브카페를 운영하다 밤낮이 뒤바뀐 생활로 심신이 피폐해졌다. 송충이는 역시 솔잎을 먹어야 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 2004년에 출판사를 차렸다. 그러면서 10여 년 접었던 시를 다시 쓰기 시작한 시인이기도 했고 출판사 대표였으니, 앞선 다짐은 여전히 반복되고 유효했다.

2015년 11월 초쯤 어느 날 아침, 페이스북에서 말을 걸어온 스님과 친구가 되었다. 낯설지 않은 이름 혜범. 그는 1990년대 초반 불교소설 《반야심경》을 쓴 베스트셀러 소설가이며 시와 음악, 서예 등 다방면에 재능을 지닌 스님이었다. 그 시절 문인들의 놀이터였던 인사동 술집과 카페 등에서 선배 문인들과 함께 있던 혜범 스님과 여러 번 마주쳐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스님과의 그때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시 쓰기를 멀리했고 문인들 행사나 모임에도 발을 끊다시피 했다. 혜범 스님은 그 후에도 몇 권의 장편소설과 산문집을 펴내 여전히 베스트셀러 작가로 인기를 누렸다.

혜범 스님과 다시 페이스북에서 만나 전화번호를 주고받으며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너무 오랜 시간 연락이 닿지 않아서인지 묻고 싶고 알고 싶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이심전심이었을까, 아니면 잘 나갔던 베스트셀러 작가를 필자를 모시고 싶었던 출판사 대표의 욕심이었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내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산문집 하나 내셔야죠”라고 제안했고, 스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몇몇 잡지와 신문에 연재했던 원고가 있는데 단행본 한 권 분량이 될지 모르겠다면서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의기투합한 결과, 지난해인 2016년 5월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해 《행복할 권리》라는 산문집을 출간했다. 그리고 스님이 주지로 있는 강원도 원주 문막읍 부론면의 송정암에서 산문집 출간 기념 법회를 열었다.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회를 마친 오후 느지막이 수십 명의 신도와 원주에 사는 문인과 내빈들, 또 여러 곳에서 초대된 문인들이 참석해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난 여름날, 저녁 약속으로 술 한잔 걸치고 얼큰하게 취해 집으로 들어와 샤워하고 나왔을 때, 책상 위에 놓아둔 핸드폰 액정화면에 카톡이 왔다는 알림 문자가 눈에 띄었다.

“낙타가 사막을/ 길 안 잃고 가는 건/ 울음을 따라 가기/ 때문입니다/ 낙타가 사막을 갈 땐/ 피를 흘린답니다/ 선연한 핏자국 따라/ 가는 길/ 낙타가 사막을 나오면/ 뵐 수 있을런지요/ 저지르고 싶은 밤”(2016년 7월 21일 오후 10:00)

갑자기 날아온 선문답(禪問答) 같은 카톡 메시지에 나는 술이 깨는 듯 정신이 뻔쩍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고 잘 되면 영화화까지 될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게 얼마 전인데, 집필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인가. 아님 보고 싶으니 송정암에 한번 들르라는 말인가 싶었다. 문자를 몇 번을 되풀이해 읽고 답장을 보냈다.

“그 낙타 울음소리 어디서든 들리는 듯해요/ 컴컴한 도시 불빛이 모두 오아시스 같은데/ 단봉 물혹 마르기 전에 뵈러 갈게요”(2016년 7월 21일 오후 10: 04)

문자를 보낸 후 얼핏 잠이 들었다 생각했는데 새벽 4시 반쯤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처를 확인한 나는 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버지가 누워 계시는 요양병원이었다. 집중치료실에 있던 아버지가 곧 숨을 거두실 것 같으니 빨리 오라는 다급한 전갈이었다.

홀로 사시던 아버지의 몸이 점점 쇠약해지고 치매기가 심해지는 것을 느끼고 경기 양주 감악산 아래 시설이 괜찮은 노인요양병원에 모신 것이 일 년 반 전쯤이었다. 그 후 매주 수요일 오후에 부친의 안부를 확인하러 갔었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도 잘 지내고 계시는 것을 보고 왔는데 마음이 아려왔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보름 전쯤 혀가 검게 변하고 식도로 점점 말려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 곁에 오래 계시지 못하겠구나 하는 짐작을 했다.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했었지만 이별의 시간이 이리도 빨리 다가올 줄 몰랐다.

양주 감악산 아래로 차를 몰고 가면서 혜범 스님께 부음 소식을 알렸다. 그로부터 열두 시간 후 빈소가 차려진 일산병원 장례식장에서는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비는 독경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아침 예불을 올린 혜범 스님은 행장을 꾸려 부친상을 당해 슬픔에 잠긴 후배 시인의 상가로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다.
혜범 스님은 장례를 치르는 사흘 동안 상식(上食)을 올릴 때는 물론이고 중간중간 문상객이 많을 때도 망자(亡子)를 위해 부처님 세계에서 고이 잠들라는 독경을 낭랑하게 들려주었다. 장례 첫날밤 문상객이 거의 돌아가고 스님과 마주 앉아 임종 전날 보낸 문자 메시지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스님은 그저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날마다 페이스북에 올리는 나의 일상을, 최근에 올린 아버지와 관련된 글과 사진을 보면서 대충 짐작했을 수도 있다고 여겨졌다.

수목장을 치른 아버지는 지금 원주 송정암 대웅전 앞 잣나무 아래 조용히 누워 계신다. 시간이 날 때마다 가까운 절을 찾아 25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명복을 빌던 한 사내의 아들과 한 스님의 절묘한 인연으로 고즈넉하고 경치 좋은 곳에 누워 있으니 망자는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살아가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선연(善緣)은 아니라도 악연(惡緣)은 남기지 말라, 얼마나 좋은 다짐이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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