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국
한국작가회의 시조분과위원장
나는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덕정에서 태어났다. 전쟁이 지나간 후이기도 했고 휴전선이 가까운 지역이었던 탓에, 동두천에 주둔하게 된 미군의 훈련과 이동이 나의 고향인 덕정에서 활발하게 펼쳐졌다. 그런 까닭에 기독교의 교세가 갑자기 크게 이곳을 중심으로 확산하였다. 특히 연말이 다가오면 미군들과 교회를 중심으로 성탄절 행사가 거창하게 펼쳐졌고 그러한 분위기는 동리 전체를 왁자지껄하게 하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주변의 상황과는 달리 우리 집안은 연말이라 해도 조용했는데 그것은 어머니가 오랜 세월을 불교 신앙에 기대어 살아오셨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회천면 천보산에는 회암사(檜巖寺)라는 거대한 사찰의 유적지가 있었다. 초등학교 6년 내내 소풍을 가는 장소였던 그곳에는 보기에도 엄청난 절터가 오랜 역사의 그늘에 가려 폐허처럼 누워 있는 곳이었다. 현재는 발굴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제법 절의 유래와 역사가 박물관에 잘 보존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그냥 흙더미에 가려진 채 버려져 있었다. 그 대신 절터 위로 조그만 암자가 회암사의 거대한 이름을 빌려 지어진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 옆에 나옹선사 부도와 석등, 지공선사 부도 그리고 무학대사탑과 석등 등이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 사라진 회암사의 위용을 지켜주고 있었다.

삶이 가파르고 궁핍했던 시절을 넘어가며 어머니는 늘 절에 의지하여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형님을 본 이후로 아들 하나를 더 보고 싶어 했던 어머니는 회암사 석탑에 금가락지 하나를 보시한 후 부처님의 가피로 나를 낳았다고 늘 말씀하셨다. 정초와 초파일 그리고 백중 등의 크고 작은 절의 대소사에 늘 나를 데리고 다니셨기 때문에 나는 절 마당이 아주 친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또한 어머니의 고향인 동두천 소요산에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인연이 서리서리 담긴 고찰 자재암(自在庵)이 있어서 일 년에 몇 번쯤은 더위를 피해 원효폭포 아래로 물을 맞으러 가곤 했다. 이 거대하고 창연한 두 사찰에 대한 기억들은 어머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내 뇌리 깊이 박혀 있다. 크고 작은 난관과 기쁨을 만날 때마다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전쟁과 궁핍의 시절을 용하게 헤쳐 온 것이 그저 ‘의지와 기복’의 차원을 떠나 ‘신심과 발원’으로 나아갔다고 나는 믿고 싶다.

해탈문 풍경 끝에 매달아 둔 눈물 한 점
사나흘 날 찾아와 들창문을 흔들었다
다 말라 살피도 흐린 그 알량한 기억들

바람에 멍이 들고 속정에 부대끼며
포도시 감추어 둔 내 좁은 바자울에
소요산(逍遙山) 붉은 단풍만 나뒹굴고 있구나

드러난 상처에다 소금을 뿌려 놓고
쌩하게 돌아섰던 깜깜절벽 그 시름을
이제사 여기 놓는다 우리들의 보풀들

— 졸시 〈겨울, 자재암)〉 전문

나이 육십이 되어 이러한 시를 쓰게 된 배후에는 아마도 어머니가 그토록 의지했던 자재암의 기억들이 오랜 시간을 건너 찾아와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불교와의 인연은 그치지 않고 이어졌다. 결혼하고 나니 나의 장인 어른과 장모님은 천태종 구인사를 지극정성으로 다니는 열혈 신도들이었다. 묵호 바닷가에서 거친 삶을 지켜온 두 분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천수경》을 틀어 놓고 게송을 외우며 하루를 시작했는데, 딸이 여섯이나 되었지만 우연인지 모두 기독교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두 분은 이것을 끝내 아쉬워했다.

하루는 장모님이 《금강경》을 세 번 필사하면 큰 은덕이 자손들에게 있을 것이라는 어느 스님의 말씀을 듣고 필사를 시작하셨는데, 이미 기력이 쇠한 장모님은 수전증으로 글씨 하나 쓰기가 어려운 지경이었다고 했다. 이에 크게 낙담한 장모님은 그 스님께 이런 사실을 토로했더니 자식이 《금강경》을 대필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누구에게 이것을 부탁할 것인가 걱정했다고 했다. 교회에 다니는 딸들에게 부탁을 해보아야 구시렁 답변이나 들을 것이 뻔하니 고민 끝에 친불교적인 나에게 어렵사리 《금강경》 필사를 대필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나는 회사에 일찍 출근하여 시간을 만들었고, 짬짬이 틈을 내어 그 길고 긴 《금강경》 세 벌을 대학 노트에 필사하여 드렸다. 장모님은 무척이나 기뻐하시며 그것을 보자기에 곱게 싸서 천태종 종찰인 구인사 부처님 앞에 올리시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였다.

지금은 모두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이렇게 부모님들이 내게 맺어주신 불교와의 크고 작은 인연은 늘 내 곁에 가까이 맴돌고 있다. 현재 살고 있는 우이동 산자락에서 도선사를 찾아 청담 스님의 법문을 가슴에 새기며 대웅전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일주문을 나설 때, 잠시 염할 줄 아는 엉터리 신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애틋한 씨앗 하나 또 다시 받은 아침
무겁고 섬뜩해도 내치지 못 하겠네
기꺼운 목숨의 무게 지켜주실 한 그릇

나물이면 그냥 나물 간장도 그냥 간장
양념의 사치쯤은 애초에 접어 두고
날된장 쿰쿰한 맛에 조바심을 여미지만

웃자란 식욕대로 한 숫깔 더 담으면
혀끝에 눌어붙은 소태 같은 뉘우침이
잽싸게 딴지를 걸며 종지 위에 앉는다

— 졸시 〈도선사 아침 공양〉

주말에 도선사에 올라가 아침 공양을 먹어본 이는 안다. 그릇에 담긴 밥과 찬 몇 가지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를. 어떤 조미료도 첨가되지 않은 순수한 밥과 채소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우리가 먹는 음식들이 얼마나 사치하고 과다한지를 단박에 깨달을 것이다. 씁쓸하지만 구수한 도선사 된장국을 뜨며 나는 한없이 깊고 깊은 어머니의 사랑과 부처의 은덕을 생각한다.

요즘에는 불어난 몸을 추스르려고 108배 절 운동을 하고 있다. 절 한 번 올릴 때마다 스님이 붙여주시는 게송은 감미롭고 겸허하다.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한 모든 인연을 생각하며 절을 올립니다’ 두 손을 모으고 오체투지하며 다시 한번 인연을 생각하는 아침이 다디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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