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도가 법당에 들어가 삼배를 하는 것은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여 삼독을 제거하겠다는 다짐의 의미가 있다. 이는 스님이나 일반 불자나 다 마찬가지다.

한 가지 짚어볼 일은 재가불자가 스님들에게 삼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 스님이 봉암사 결사 때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수행자의 위상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을 회복하기 위해 재가불자에게 삼배를 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이치에 맞는 것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재가자가 출가자에게 예배하는 것은 청정한 지계를 갖춘 수행자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라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남방불교의 신자들이 탁발 나온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면서 무릎을 꿇고 합장 공경한다. 아마도 이런 예가 스님들에게 예배하는 인사법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 역시 스님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동국대 부총장이셨던 법안 스님은 재가불자가 찾아와 인사를 하려고 하면 늘 1배의 맞절을 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법정 스님도 ‘삼배는 여름철에 입는 옷감[삼베]’이라고 하면서 극구 사양했다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모두 수행자의 제일 덕목인 하심과 겸양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겸손의 미덕을 보이는 분들이 별로 없다. 젊은 스님이 나이 많은 불자의 삼배를 받은 모습은 사회적 상식으로 볼 때 아무래도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불교는 모든 사유와 행동 규범을 부처님 가르침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종교다. 전통이 그러하다고 해서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행위가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것이냐를 따져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일찍이 깨달으신 연기(緣起)의 법칙에도 나타나고, 용수가 ‘중론’에서 강조한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에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에 따라 불교의 인사법인 삼배(三拜)를 논리학적으로 분석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불교야말로 논리에 바탕을 둔 바른 견해로 사고하는 것을 강조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팔정도의 첫 번째 덕목인 정견(正見)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견해로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논리학은 바른 사고가 지켜야 할 형식과 법칙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정확한 사유를 위해서 세 가지 공리를 강조한다.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이 그것이다.

동일률(同一律)이란 올바른 사고를 하는 데 필요한 사고의 확정성에 관한, 라이프니츠가 확립했다고 알려진 법칙이다. 동일한 사유과정에서 판단은 동일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제시한다. 동일률은 긍정판단의 기초가 된다. 이 원리가 지켜지지 않으면 엄밀한 사고가 설립될 수 없다. 예를 들면 이렇다. ‘부처님은 부처님이고, 스님은 스님이다.’

모순율(矛盾律)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창안한 것인데 동일한 주장은 참인 동시에 거짓일 수 없다는 뜻이다. ‘A는 A가 아니다’일 수는 없다는 것은 항상 옳은 명제이고, 이것은 올바른 사고에서는 모순되는 두 가지 판단은 동시에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한 예로 중국 고사에 나타나는 ‘나의 이 창은 모든 방패를 다 뚫을 수 있다’와 ‘나의 이 방패는 모든 창을 다 막을 수 있다’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 된다. 이것은 논리학 근본 규칙의 하나로 부정판단의 기초가 된다.

배중률(排中律)은 동일한 주장은 참이거나 허위이거나 둘 중 하나이지 중간일 수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논리적인 사고를 하기 위하여 긍정판단을 할 때는 동일률의 형식으로, 부정판단을 할 때는 부정형식의 모순율로, 선언(選言)판단을 할 때는 배중률로 나타내야 한다. 모두 증명이 필요 없는 당연한 논리이나, 그럴듯한 비논리가 끼어드는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법칙으로 만든 것이다.

이 같은 논리학의 틀로 삼배에 관한 주장을 분석해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어떤 분은 ‘스님께 올리는 삼배는 실은 부처님께 하는 것이지 스님께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 말은 논리학 제일 법칙인 동일률에 위배된다. 출가수행자는 부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모순율은 어떠한가? 《승만경》에서 ‘여래의 태아’로 표현되는 여래장 사상은 《법화경》 《열반경》 그리고 《대승기신론》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주된 사상적 흐름으로서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라는 말로 서술된다. 《화엄경》에서는 모든 중생, 처처물물 만유가 모두 부처라고 한다. 따라서 스님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이 모두 부처이니, 그렇다면 스님께 올리는 삼배는 부처가 부처에게 절하는 모양이 된다. 따라서 위의 명제는 두 번째 모순율에도 벗어난다. 실제로 삼배를 스님에게 하는데도 ‘아니다’라는 것은 참이 아니므로 모순이고, 모순되는 두 가지 판단은 중간일 수 없고, 동시에 허용이 안 되므로 배중률에도 어긋난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견해는 어떠할까. 경전에 나타난 바로는 부처님께서는 자신을 결코 ‘신앙의 대상이나 예배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금강경》 사구게인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능히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는 말은 모양이나 음성에 집착하는 그 순간 여래의 진실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짐을 경책하는 말이다.

상윳따니까야의 《박칼리경》에는 임종할 때가 가까워진 박칼리라는 수행자가 부처님께 예배를 올리려고 하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박칼리야, 썩어 없어질 몸을 보고 절해서 무엇하겠느냐.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볼 것이다.” 요컨대 유한한 육체를 가진 현상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진리에 귀를 기울여 법에 의지하라는 것이다. 형식논리상으로도 육체는 육체이고 법은 법이다. 따라서 육체가 법일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탄복할 동일률 · 모순율 · 배중률에 정확히 준한 말씀이라고 할 것이다.
삼배를 할 때 진정한 불자는 부처님의 간곡한 가르침이 무엇인지 늘 점검해야 할 것이다. 수행을 잘하는 덕 높은 스승에게 올리는 삼배는 저절로 우러나오는 존경의 표출이지 강요나 권고의 대상은 아니다. 한편 하심수행으로서 삼배는 절하는 사람한테는 수행에 도움이 되겠지만 앉아서 받는 사람에게는 실은 심각한 도전이 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절을 받을 때 알게 모르게 아상(我相)이 증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가장 좋을까. 불자라면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상호교례(相互交禮)의 방식이 좋다고 본다. 그래야 논리적으로도 모순되지 않고 서로 존경하고 하심하는 불자의 도리에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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