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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나 / 이숭원
[72호] 2017년 12월 01일 (금) 이숭원 문학평론가, 서울여대 교수

일본의 문예비평가 중에 에토 준(江藤淳)이라는 사람이 있다. 영문학을 전공한 그가 2년간 미국에 유학하고 낸 책이 《미국과 나》다. 자식이 없는 그는 개를 키웠는데 개와 함께 지낸 6년의 사연을 기록한 수필집이 《개와 나》다. 50대에 발간한 그의 비평집 제목은 《비평과 나》다. 1998년 그와 평생을 함께한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아내를 간병하고 영결한 과정을 글로 썼는데 그 책의 제목은 《아내와 나》다. 나는 이런 책 제목을 보면서 어떤 소재를 두고 글을 쓸 때 적당한 제목이 생각나지 않으면 이런 식의 명명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것을 이번에 처음 실행하게 되었다.

내가 불교를 접한 것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인 아주 어릴 때였다. 우리가 사는 집 근처의 사찰에 친척 할머니가 기거하고 계셔서 자주 놀러 갔다. 친구들은 절 입구의 사천왕상이 무섭다고 발을 들여놓지 않았지만 나는 할머니가 계신 곳이어서 그런지 아주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법당의 향 냄새도 좋았고 목탁 소리도 듣기 좋았다. 집에 작은 목탁이 있어서 무서운 꿈을 꾸거나 속상한 일이 있으면 뒤꼍에서 혼자 목탁을 두드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전생에 불교와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 사춘기 때 이런저런 책을 접하며 인생과 세상에 대해 사색하다가 《불교입문교리》라는 책에서 불교가 자력종교라는 설명을 듣고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것은 참으로 매력적인 사상이었다. 그 후 불교 관련 서적을 여러 권 읽으며 지식을 넓히고 마음의 눈을 열어 갔다. 문학을 전공하고 비평 활동을 하면서 불교 공부를 더 많이 하게 되었다. 내 전공이 시 비평인데 많은 시 작품이 불교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불교에 젖어 들게 되었다.

그러나 일종의 지식에서 출발한 나의 불교 이해가 신앙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불교 의식에서 빼놓지 않고 행하는 것이 사홍서원(四弘誓願)이다. 조계종에서는 이것을 한글로 바꾸어 쉬운 내용으로 음송하고 있는데, 원문의 뜻을 제대로 옮기면 “한없는 중생을 맹세코 제도하겠습니다./ 끝없는 번뇌를 맹세코 끊겠습니다./ 무량한 법문을 맹세코 배우겠습니다./ 무상의 불도를 맹세코 이루겠습니다.”가 된다. 이 네 가지 서원 중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법문을 다 배우겠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어떻게 세상의 번뇌를 모두 끊고 불도를 이루어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내게 불가능한 일이다.

파키스탄의 박물관에 가면 간다라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거기 석가모니 고행상이 여럿 있다. 그 불상들은 뱃가죽이 등에 붙고 살가죽이 뼈에 달라붙어 힘줄과 핏줄이 다 드러난 앙상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극단적 고행으로 기진맥진한 싯다르타가 수자타의 우유죽을 먹고 회복하여 몸을 학대하는 고행이 옳지 않다고 여겨 중도의 수행을 했다고 하지만, 나는 이런 정도의 극한적 수행이 있었기에 부처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런 철저한 수행 없이 어떻게 평범한 중생이 세상의 번뇌를 모두 끊고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단 말인가? 석가모니의 전생담이라는 《본생경》을 보면 현세에 싯다르타로 태어나기 전 아득한 전생에서부터 상상을 초월한 노력을 계속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 한 몸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처지에 어떻게 그런 수행을 하여 번뇌를 끊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나에게 희망을 안겨 준 복음은 ‘방편설법(方便說法)’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는 법문이었다. 부처님은 대중의 수준에 맞게 여러 가지 방편을 사용하여 가르치고 제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8만4천 가지 법문 중에 나처럼 내 몸 하나 감당 못 하는 사람도 받아들여 실행할 만한 가르침이 있지 않겠는가.

《유마경》의 주인공 유마 거사는 세속에 거처하면서도 일체 사회생활에 조화를 이루어 경제적 이익을 얻어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대중들과 생활을 같이 하면서 그들을 이롭게 했다고 한다. 음란한 집에 가서도 욕망의 그릇됨을 드러내고 술집에 가서도 올바른 뜻을 굳게 세웠다고 한다. 유마는 부처의 제자들이 상대하기를 꺼려할 정도로 학식과 도력이 높았다. 그런데도 그는 몸을 낮추어 시정의 상인들과 친하고 술집에서도 바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니 상구보리(上求菩提)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보살도를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이 점에서는 원효도 마찬가지다. 남아 있는 자료에 의하면 원효는 당시 동아시아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학승이었다. 지금 전하는 자료에서 중국과 일본의 승려들이 경전을 논하면서 원효의 저술을 인용하는 것을 보면 원효의 경전 해석이 당대 최고 수준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최고의 선지식이 대중과 어울려 지내면서 〈무애가〉를 지어 춤추고 노래하며 대중에게 불교를 쉽게 전하려는 노력을 보였다고 한다. 이것 역시 상구보리하고 하화중생하는 대승불교의 진수를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도덕경》에서 기원한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말을 보살의 중생제도와 관련지어 사용하는데, 그야말로 이 두 사람은 자신의 빛을 온화하게 낮추어 세속의 중생들과 하나가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접하면서 나는 불경의 어려운 구절을 내 나름대로 해석하여 마음의 양식으로 삼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 경전의 본래 뜻이 무엇이든 근기와 인연에 따라 내게 부합하는 뜻으로 다가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를 들어 《금강경》에 나오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경우, 아상을 제외한 나머지 셋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설명을 하고 있어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이해할 수 있는 ‘아상’만 받아들여 나를 중심으로 한 집착을 없애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도 교리적 설명을 떠나서 그저 ‘세상은 끝없이 변하므로 고정된 실체가 없다’ 정도로 이해하고 내 마음을 다스린다. 《금강경》의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起心)”도 ‘잠시도 머물지 않고 내 존재를 내가 만들어간다’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실천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크게 공감하는 어구는 《화엄경》에 나오는 “약인욕요지(若人慾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功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物性心造)”다. 해설서의 어려운 설명을 떠나 나는 이 구절을 ‘세상의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현상계의 모든 것이 온통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임을 제대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로 이해하고 모든 것이 마음의 장난이라고 수시로 되뇌며 세상을 살고 있다. 이러한 해석과 이해가 불법에 어긋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이 근기에 맞게 다양한 설법을 하셨다고 하니, 자신의 근기에 맞게 받아들이는 것도 중생의 몫이 아닐까 스스로 합리화해 본다.


nanan3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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