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의 계절이라 그럴까, 미당의 시가 향기로 사방에서 스며든다. 생전의 스승님 모습, 특유의 미소까지 다가온다. 미당은 젊었었고 우리는 푸르렀던 옛날 어느 강의실에서 ‘존재의 영원성’을 힘주어 열강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때 예문으로 시 〈춘향유문(春香遺文)〉을 읽어주신 것 같다.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중략)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어요?
(하략)

강의실은 뜬금없는 ‘이 도령, 춘향’이란 이미지에 조용해졌다. 시를 읽어주신 스승은 만족한 듯 미소까지 지으시며 죽어간 춘향의 죽지 않은 세계를 설명해주셨다. 인체의 모든 존재요소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며 생명의 종말이 결코 소멸이 아님을 거듭 일러주셨다.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온갖 세포와 물질은 이 세상의 같은 성분 속에 합류한다는 것이다. 몸속의 수분은 강물이 되어 흐르고 뼈와 살은 흙이 되어 산과 들에 덮인다고 하셨다. 그때 스승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영생주의’를 거듭 제시했던 것 같다.

그 무렵의 흔적인가 낡고 오래된 나의 노트 끝자락엔 ‘영원’ ‘영생’ ‘님은 갔지만 나는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같은 글자들이 뒹굴어 다녔다.

최근 출판된 법념 스님(경주 흥륜사)의 《봉암사의 큰 웃음》을 읽으며 향곡 큰스님의 모습에서 놀랍게도 미당의 면모를 발견하고 가슴 뭉클하였다. 미당의 언어는 호남 토박이의 들척지근한 가락에서 흐르고 있지만, 향곡 큰스님을 시봉하던 법념에겐 귀에 못이 박이듯 들어온 카랑카랑한 악센트, 영남 특유의 깎아지른 작대기 발음이었다.

어느 해 경주에서 열린 신라문화제에 흥륜사의 유엽 큰스님을 모셔 강연을 들었는데, 향곡 큰스님은 유엽 스님의 달변을 부러워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아아, 멋의 어원이 ‘무엇’이라 카데. 화두 하는 거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찾아가는 거이께, 참선은 멋을 찾는 거나 마찬가지라 카더라. 듣고 보이 고개가 끄덕거려지더라 카이.”

그 말씀을 적극 공감하며 법념 스님이 ‘멋을 찾아 나서는 나그네’가 되려고 입산했다고 스님의 길을 걷게 된 동기를 풀어놓았다. 큰스님은 “아아, 그래 아아, 그래”라는 말을 반복하시면서 그 뜻을 같이 표해주셨다.
향곡 큰스님은 20대에 당시 수행정진하고 있던 형님을 찾아 부산 범어사에 들렀다가 그길로 입산하였다. 뒤돌아보지 않고 십여 년 고행 끝에 계를 받고 득도하신 분이다. 한국전쟁 직후 부산 시절 이야기는 거의 ‘전설의 고향’을 닮아 있다.

스님은 평생 외국 여행 한번 다녀오지 않으셨고 승용차 한 대 소유하지 않으셨다. 남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부러워하거나 비방하는 일조차 없으신 분이었다. 그러나 선방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에게는 적극적으로 영양식을 챙겨주고 건강과 몸조심을 일깨워 주셨다.

“공부를 힘써 할라 카몬 뭐든 동 묵어야 되느니라. 밥 안 묵는 기 무슨 공부가?”

큰스님의 자상하던 성품과 일상을 차근차근 적어서 생각하고 분석하던 법념 스님이 어느 날 조용한 기회를 틈타 여쭈어보았다.

“스님, 열반하시면 다시 사바세계로 오실 건가요?”

“아, 나는 사바세계에 다시는 안 올끼다. 나는 부처들이 사는 화장세계에서 놀고 부처들과 어울리민서 살아갈끼라.”

단호한 결심처럼 스님은 말씀하셨다. 스님을 아끼는 많은 불자들은 이 같은 스님의 마음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언젠가 이 땅을 떠나는 날이 와도 스님은 보내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따뜻하고 부드럽게 자연과 인간을 함께 다독이며 사랑하셨던 스님이 홀연히 떠나가셨다. 오래 고생하시지도 고생 시키지도 않고 조용히 가신 것이다. 그리고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고 아쉬워한다.

옛날 미당의 집이 마포 지역이던 시절, 시골서 올라온 자취생 제자들은 스승님 밥상에서 자주 더운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당시 문예지 신인 등단은 신춘문예 당선만큼 어려웠고 다만 스승의 추천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선생님 집 마당과 마루엔 시인으로 추천받으려는 지망생들이 전국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선생님을 개별적으로 만나기 이전 현상문예공모에 당선한 나의 경우는 조금 다르긴 했지만 대체로 수삼 년 습작기 작품을 들고 다니며 따끔따끔 지도를 받기 일쑤였다.

지금은 저명한 어느 원로 여성 시인도 시 창작노트 몇 권을 선생님께 내밀었다가 돌려받게 되자 새빨간 얼굴로 “선생님, 저 낼 모레 시집가요!” 하고 하소연하였다. 마음 약한 미당은 “아아, 내 결혼 선물로 1회 추천을 해주지!” 하셨다. 그 시인은 직장을 얻었다고 2회 추천을 받았고 아기를 낳았다고 마지막 3회 추천까지 받았다. 듣기에 따라서는 살짝 납득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이미 충분한 수준의 평가를 해놓고 뜸 들이는 기간에 있었던 여담으로 들린다. 어느 스승이나 자신의 문하에서 키운 제자를 험한 세상에 날려 보내기 이전, 단련과 훈련을 야무지게 해주려는 깊은 뜻이 있었으리라.

미당의 마지막은 온 나라가 병상을 지키듯이 애타는 가슴으로 쾌유를 빌었다. 그러나 수많은 제자에게 따뜻한 끼니를 챙겨주던 시인의 아내가 가고 뒤따라 시인도 너무 빨리 떠나가셨다.

시인이 남긴 시 속에는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같은 ‘푸르른 날’이 너무 많이 펼쳐져 있다. 선생님은 이미 도솔천 물굽이를 시 속의 춘향이처럼 흐르고 계실까.

미당 서정주 선생님과 향곡 큰스님은 분명 고통 없는 서방정토에서 만나셨으리라. 그리고 큰 웃음으로 화평한 나날을 보내고 계시리라.

이 가을, 국화 향기 그윽한 하늘 아래 ‘봉암사의 큰 웃음’이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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