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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세속화 시대와 새로운 불교의 길 / 이도흠
특집 | 촛불 이후, 한국사회와 불교
[72호] 2017년 12월 01일 (금) 이도흠 ahurum@hanmail.net

1. 머리말

광화문 광장에서 연인원 2천만 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촛불을 든 지 어언 1주년이 되었다. 대통령이 물러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다. 집단이나 개인에 따라 속도와 강도에 괴리가 있겠지만, 적폐 청산과 개혁이 진행 중이다. 낙엽이 뒹구는 광장에 서서 우리는 이제 지난 길을 돌아보고 가야 할 길을 올바로 정립할 필요가 있다.

불자들에게 촛불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촛불의 정신은 부처님의 뜻과 어느 만큼 부합하는가. 불자로서 지난 정권에서 성찰할 것은 무엇인가. 탐진치가 있는 곳이 적폐일 터인데, 개인의 차원이든 집단의 차원이든 얼마나 이를 지멸하려 했고 앞으로 할 수 있는가. 중생의 고통과 신음 소리에 대해 얼마나 공감하고 자비를 행했는가. 촛불을 계기로 정립해야 할 진정한 불자상은 무엇이고, 우리는 과연 어떤 불교로 이 땅에 정토를 구현할 것인가.

그럴 때 우리는 포스트세속화 시대의 맥락이라는 조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맥락과 결합한 분석과 해석을 하지 않으면, 이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현실과 부합하지 못하는 공리공론으로 귀결될 것이다.


2. 촛불 항쟁에서 불자의 참여

연인원 2천만 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바쁜 일상을 뒤로하고 광장으로 나섰다. 세월호 참사, 백남기 농민의 국가폭력에 의한 타살, 개성공단 폐쇄,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밀실야합, 국정교과서의 강행, 사드 배치, 블랙리스트 등의 연이은 패정(悖政)에 대한 울분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도화선으로 폭발한 것이다. 하지만, 그 심층에는 극심한 노동배제와 탄압, 장기불황과 경제위기, 실업 증대, 언론통제 등 이 나라를 ‘헬조선’으로 전락시키고 민주주의를 형해화한 데 대한 분노가 자리한다. 모두가 더불어 행복하고 평등한 새로운 대한민국에 대한 염원이 빛이 되어 인도하였다. 신념에 따르고 조직에 충실한 아날로그 세대와 공감에 이끌리고 유목민이고자 하는 디지털 세대가 함께 어깨동무하였다. 그리하여 폭력 없이, 어떤 이도 피 흘리는 일이 없이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정권교체까지 이루었다.

불자들도 함께하였다. 2016년 10월 25일 대한불교청년회, 바른불교재가모임, 불교환경연대, 신대승네트워크,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정의평화불교연대, 참여불교재가연대 등 19개 불교단체가 모여 ‘박근혜 퇴진 불교행동’(공동대표: 법일 스님, 이도흠)을 발족하여 시국선언과 기자회견을 하고, 토요일의 광화문 촛불집회에 매주 무대 오른편에 참여하고 청와대나 헌법재판소 등으로 행진하였다. 이어서 늦게나마 2016년 12월 1일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조계종 승려 2,684명이 서명한 ‘박근혜 퇴진 및 국민 주권 수호 대한불교조계종 승려 시국선언’이 발표되었다. 12월 6일에는 ‘한국사회 대전환을 위한 박근혜 퇴진 및 국민주권 수호 범불교시국회의’(공동대표: 법일, 일문, 혜용 스님, 이도흠, 전준호)가 출범하였다. 여기에는 동국대학교 석림회, 자비신행회, 불교생명윤리협회,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등 34개 불교단체가 연대하였다. 범불교시국회의는 불교행동과 참여와 행진을 같이 하였다.

그중 몇 차례는 5대 종단 몫으로 트럭이 따로 배정되어 법일 스님, 필자, 서광태 등이 트럭에 올라 불교를 대표하여 발언했다. 1월 4일부터 헌법재판소 앞에서 탄핵 선고일까지 매일 단체별로 돌아가며 박근혜 퇴진 릴레이 108배를 진행하였다. 불교환경연대의 대표인 법일 스님과 한주영 처장 등 운영위원과 활동가들은 촛불집회에 참여하면서 광화문 광장에 한 자리를 마련하고 대중으로부터 탈핵 서명을 받았다.

범불교시국회의는 ‘야단법석 탄핵시국 대중공사-탄핵 이후 새로운 사회 만들기-불교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불교여성개발원 자비실에서 열어 담론투쟁을 펼쳤다. 제1회(1월 17일, 이도흠, ‘내가 살고 싶은 대한민국’), 제2회(2월 2일, 유승무, ‘민심(촛불)과 정치, 그리고 종교(불교)의 역할’), 제3회(2월 14일, 박재현, ‘이행기에서의 불교의 과제와 역할’), 제4회(3월 2일, 박재현, ‘탄핵 이후 한국사회와 불교의 과제와 역할’) 등 네 차례에 걸쳐서 발제하고 참여 대중과 토론하였다.

이처럼 불자들이 5대 종단의 한 단체로 참여하여 촛불집회, 행진, 토론회, 1인 시위, 기자회견, 성명서 발표, 108배, 발언 등을 수행하였지만, 상당수 신부님들이 5대 종단협의체에서 이탈하면서 5대 종단의 역할이 축소되었다.

촛불집회를 이끈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에는 불교행동과 범불교시국회의의 공동대표인 필자가 불교계를 대표하여 운영위원과 정책기획팀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운영위원회의, 전국대표자회의, 정책기획팀 회의, 워크숍에 참여하여 주로 퇴진운동의 전략과 전술, 진로 등에 관련하여 발언/발표하였다.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양한웅 위원장도 운영위원으로 회의에 참여하여 세월호 등의 문제에 대하여 발언하였다.

정원 스님이 1월 7일 광화문 광장 바로 옆 열린시민공원에서 박근혜의 탄핵과 중생구제를 외치며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으로 소신공양을 하여 이틀 만인 1월 9일에 입적하였다. 이에 불자들은 1월 13일에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추모문화제를 지냈으며, 1월 14일에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을 하고 조계사, 청와대 앞, 광화문 광장, 열린시민공원으로 행진하며 노제를 지내고, 벽제 화장터에서 다비식을 한 후에 법안 스님의 배려로 삼각산 금선사에서 안치식을 가졌다. 그 후 매주 토요일에 49재를 봉행하여 2월 25일에 광화문 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7재를 지냈다.

불교행동 19개 단체, 범불교시국회의 34개 단체 등 겹치는 11단체를 제외하고 42개 불교단체와 스님과 재가불자들, 그리고 이 단체에 소속되지 않았지만 자비로운 분노를 표출하려는 수많은 불자가 박근혜 퇴진운동에 동참하여 연대의 토대를 형성하고 촛불의 정신을 실천하였다.


3. 촛불의 빛

촛불의 빛은 얼마나 어둠을 몰아낼 것인가. 과연 우리는 인류 최초로 ‘피 없는 혁명’을 달성할 것인가. 훗날에 역사학자가 평가하겠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혁명이 되려면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항쟁의 주체가 권력을 획득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구체제(앙시앵 레짐)가 무너져야 한다. 민주주의의 목적은 왕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왕이 되는 것이다. 박근혜는 물러났지만, 자본-국가-보수언론-종교권력층-사법부-어용 전문가 및 지식인 집단으로 이루어진 지배동맹체는 견고하다. 집권 여당은 유무형으로 이들과 얽혀 있으며, 자유한국당과 조중동을 중심으로 한 수구세력은 보수적인 개혁조차 ‘종북’으로 매도하며 방해하고 있다. 신고리 원전 공론위에서 잘 드러나듯 숙의 민주주의를 수용하고 있지만 아직은 미미하다. 참여민주주의는 말만 무성하다.

좀 더 시간이 걸려야 하는 것이겠지만, 아직 구체제를 해체하고 새 체제로 전환하지 못하였다. 촛불에 모인 시민들이 대통령의 탄핵 다음으로 열망한 것이 불평등의 해소였다. 하지만 1% 대 99%의 사회를 만든 신자유주의 체제는 순탄하게 작동하고 있다. 1단계 탄핵, 2단계 정권교체로 나아갔지만, 3단계 사회 대개혁이나 4단계 새로운 민주공화국 건설을 향한 진전은 요원하며, 촛불이 요청한 사회 대개혁 가운데 입법화한 것은 아직 한 가지도 없다. 적폐 청산도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지만, 그 강도나 속도는 국민의 기대와 괴리가 크다. 이명박 · 박근혜와 마름과 하수인 역할을 한 이들이 저지른 온갖 실정과 악행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철저한 진상규명과 심판까지는 가야 할 길이 멀다.

촛불 이후 광장은 푸르던 잎들이 모두 조락한 숲보다 더 을씨년스럽다. 주권자로 각성한 시민들이 대통령을 몰아내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자고 연대한 것은 큰 성과다. 하지만, 시민사회로 조직화하지는 못하였다. 광장은 크게 열리거나 긴밀하게 엮이지 않았다. 진보정당의 대통령 후보의 득표율은 별로 오르지 않았으며,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의 가입률도 의미를 지닐 만큼 나아지지 않았다. 자신들이 진정한 주인이 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에는 정작 나서지 않은 채 이를 정치인이나 정권에 위임해버렸다. 촛불이 불교계에서도 타올라야 한다는 마음이 기존의 운동에 더해지면서 종단의 적폐 청산과 개혁 운동으로 전개되기도 하였지만, 아직 바깥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변화는 없다.

앞으로 시민과 정권의 행보에 따라 촛불은 혁명이 될 수도, ‘1987년 체제의 조금은 진전된 반복’이 될 수도 있다. 6월 항쟁의 가장 큰 한계는 그 주체가 권력을 잡지 못하고 노동자 민중 중심을 구현하지 못했다는 것과 구체제를 일소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가장 큰 성과는 그것이 30년의 ‘시간의 주름’을 거쳐서 촛불로 타올랐다는 것이다. 항쟁의 주체들이 기득권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을 때, 촛불이 각 부문에서 타올라 모든 적폐를 청산하고 사회 대개혁을 완수할 때, 신자유주의를 해체하고 노동 중심의 평등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할 때 촛불은 혁명의 들불이 될 것이다.


4. 촛불 불자의 길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새로운 인간형, 새로운 불자상이 필요하다. 물론, 불자는 무상과 무아와 공(空), 연기법을 깨달아 탐진치를 지멸하고 팔정도를 수행해야 한다.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이다. “불교의 수행은 깨달은 내용을 실천하기 위한 수행이고, 부처로서 살기 위한 수행이고, 열반을 완성하기 위한 수행이어야 하”며, 그 열반은 나와 타인의 동시 열반을 뜻한다.

여기에 더해야 하는 것은 시민사회 일원으로서의 각성과 실천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절과 재가불자의 일터, 마을, 학교에 시민사회를 조직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근대는 신성과 교회에서 벗어나 공공영역을 형성하고 이곳에서 공론을 형성하며 시민사회와 세속화를 추구하는 과정이었다. “세속화는 초시간적인 것에 의존하는 종교와 연관된 이전의 신앙 중심의 삶의 양식을 해체하고 세계 내 존재인 인간 이성에 기초한 삶으로의 변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국가와 종교의 분리, 공적 담론에서 신성보다 이성과 과학에 의한 검증과 논증, 종교적 상징과 교리의 초월성 박탈과 세계 내적 문화현상으로의 해석, 예술에서 신(성)의 종속에서 탈출, 부당하고 부조리한 것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서구화와 기독교화가 근대화로 대체되었고, 불교는 ‘일제에 의하여 만들어진 전통’을 실제 전통으로 착각하며 이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중세적이고 가부장적인 봉건성과 권위적인 질서를 답습하고 있으며, 승려와 재가불자는 시민적 주체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촛불에서도 주권자로 각성한 시민이 있었지만 시민사회의 조직화나 정치적 주체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불자들은 시민으로서 절과 일터, 마을과 학교에서 공론장으로서 광장을 건설한다. 그곳에서 ‘성찰이 없는 과거는 미래가 된다’라는 생각으로 종단의 차원에서 자기가 소속한 집단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잘못된 전통과 적폐를 조사하고 이를 청산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한다. 모든 갑은 권력을 부리지 말고 아랫사람을 섬기고 모든 을은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것을 삶의 지표로 삼고 실천하고 그럴 수 있도록 제도화한다. 곳곳에 사찰운영위원회 등 시민자치 조직을 구성하여 아래로부터 협치를 통하여 권력을 견제하고 정책을 결정하고 가치를 분배하는 데 참여하는 정치적 주체로 나선다.

하지만, “주체가 동일성에 사로잡히면, 타자를 배제하고 폭력을 강화하며 동일성을 강화하려는 속성을 지닌다. 근대가 이성과 상식이 가장 증대된 사회임에도 대량학살이 끊임이 없이 일어난 것은, 한나 아렌트의 ‘평범한 악’이나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복종’만이 아니다. 백인 아이에게는 자비로운 유럽인이 마야나 잉카족의 아이는 별 죄책감이 없이 죽이고 대량학살 이전에는 대상자들을 타자로 구분하는 혐오발언(hate speech)이 선행하는 데서 잘 나타나듯, 근본 이유는 ‘유색인, 이교도, 장애인’ 등으로 타자를 설정하고 이를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한 때문이다. 이에 주체의 동일성을 해체하는 차이와 타자성의 사유가 필요하며, 이를 매개하는 것이 바로 공감과 자비다.”

《유마경》 〈문수사리의 병문안품〉의 가르침대로 “중생이 병을 앓으면 보살도 병을 앓으며,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의 병도 낫는다. …… 보살이 아픈 것은 큰 자비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원효는 진속불이(眞俗不二)를 말한다. “내가 부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고통받는 중생이 있다면 나는 아직 부처가 아니다. 그를 부처로 만들 때 그 순간에 비로소 내가 부처가 된다.”

필자는 21세기의 맥락에 부합하고 동일성을 해체하는 새로운 인간상/불자상으로 눈부처-주체를 내세운다. 이 세계의 의미를 올바로 파악하고 그 모순과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성과 주체가 필요하다. 하지만, 20세기에 주체는 동일성에 포섭되어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을 자행하였으며, 이성은 도구화하였다. 이에 비판적이고 계몽적인 이성을 가지고 사고하고 실천하는 주체인 동시에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여 상생하고 연대하며 그의 구원을 통하여 주체를 완성하는 ‘눈부처-주체’를 대안의 사유로 제시한다.

눈부처는 원효의 화쟁사상을 중심으로 들뢰즈의 차이(differe-nce)와 레비나스의 타자성(alterity)을 종합하여 필자가 창안한 개념이다. 눈부처의 사전적 의미는 두 사람이 서로 똑바로 마주 볼 때 상대방의 눈동자에 맺힌 내 모습을 가리킨다. 이의 심층 의미는 첫째, 주/객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대대(待對)다. 눈부처는 상대방의 몸에 새겨진 내 이미지다. 상대방의 눈부처를 보는 순간에 내 눈동자에도 상대방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서로 바라보는 순간 주체와 객체, 너와 나의 이분법이 해체되고 상대방을 내 안에 서로 모시는 대대적 관계를 형성한다.

둘째, 내 안의 불성(佛性)과 타인 안의 불성의 서로 드러남이다. 인간은 세계의 의미를 해석하고 실천하고 세계의 부조리에 맞서서 세계내존재나 단독자로서 실존하는 존재이자 서로 영향을 미치고 조건과 인과를 형성하면서 서로를 생성하는 상호 생성자(inter-becoming)이다. 상대방에게 폭력을 행하러 간 사람이라 할지라도 눈부처를 보는 순간 멈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눈부처는 내 마음속에서 타인과 공존하고 섬기려는 불성이 드러난 것이다.

셋째, 동일성에 포획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차이 그 자체’다. 내가 동남아 노동자를 타자로 설정하고 차별하는 것이 동일성의 사유와 실천이라면, 그들을 한국인과 똑같이 존엄한 존재로 포용하고 톨레랑스로 대하는 것은 차이의 사유와 실천이다. 하지만, 이것이 눈부처의 차이, 혹은 차이 그 자체는 아니다. 그들에게서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 죽은 내 삼촌을 발견하고, 나 자신에게서 일하다 손가락을 잘렸는데도 불법체류 외국인으로 신고하여 한 푼도 보상하지 않고 추방한 한국의 악덕 기업주를 발견하여 동체대비심이 일어나는 순간, 그 차이에 이르는 것이다.

이처럼 나와 타자 사이의 진정한 차이와 내 안의 타자, 타자 안의 나를 발견하고서 자신의 동일성을 완전히 버리고 타자와 공감과 자비, 더 나아가 타자와 연대와 구원을 통해 나를 완성하는 것이 눈부처의 차이다. 눈부처의 차이의 사유로 바라보면,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 무너지며 그 사이에 내재하는 권력,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의 담론은 서서히 힘을 상실한다.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타자와 내가 깊은 연관 관계 속에 있음을 깨닫고 타자를 보듬고 그를 자신의 몸과 마음에 품는 길이 바로 자신이 완성되는 길임을 깨닫는다. 그처럼 진정으로 타자를 사랑하는 이는 그에게서 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그 순간 그도 신이 된다.
눈부처-주체는 세 가지 자유를 구현한다. 곧 소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 대자적 자유를 추구한다.

소극적 자유(freedom from)는 모든 구속과 억압, 무명(無明), 탐욕, 화에서 벗어나 외부의 장애나 제약을 받지 않은 채 생명으로서 생의 환희를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누리면서 자신의 목적을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적극적 자유(freedom to)는 수행과 노동, 학문 도야를 통하여 자기 앞의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해석하면서 모든 장애와 소외를 극복하고 세계의 부조리에 맞서며, 자신의 의지와 목적대로 개조하고 팔정도를 실천하면서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는 동시에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뜻한다. 대자적 자유(freedom for)는 자신이 타자와 사회관계 속에서 밀접하게 관련된 사회적이고 연기적인 존재임을 깨닫고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여 타자를 더 자유롭게 하여 나 자신이 자유로워질 때 환희심에 이르는 경지이다.

이처럼, 눈부처-주체는 이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자신의 지향성에 따라 의미를 구성하고 이 의미를 따라 실천하며 결단하는 자이자, 내 안의 탐진치를 지멸할 뿐 아니라 타자와 나의 연기를 깨닫고 그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여 그를 자유롭게 하여 자신의 본성과 자유를 완성하는 존재를 뜻한다. 때문에, 눈부처-주체는 혈연 이타성(kin altruism)만이 아니라 호혜적 이타성(reciprocal altruism), 집단 이타성(group altruism)을 넘어 윤리적 이타성(ethical altruism)을 추구하고, 고통을 느끼는 모든 생명의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한 이익평등 고려의 원리(principle of equal consideration of interests)를 따르는 것을 넘어서, 생명을 가진 모든 중생과 나 사이의 연기를 깨달아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동시에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여 그를 구제하는 순간에 자신의 불성을 깨닫는 존재이다.

곧, 시민으로서는 효율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를 행하지만 불자로서는 이를 넘어서서 무한한 자비행을 실천한다. 생멸문에서는 타자와 나와 연기적 관계와 이익평등 고려의 원리를 깨달아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자비행을 하고, 진여문에서는 설혹 내가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아직 부처가 아니며 고통 속에 있는 중생을 구제하는 순간에 비로소 부처가 된다는 진속불이(眞俗不二)를 실천하는 주체다.

이타행은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왜 이기적 인간이 이타행을 행하며, 이타행이 오히려 나를 위한 길이 될 수 있는가. 인류학에서 보면, 상대방을 도우면 그도 언제인가 자신이나 가족을 돕는다는 호혜적 보상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인지과학에서 보면, 두뇌의 보상체계가 작동하여 그러는 순간에 도파민 등이 발생하여 환희심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보면, 그것이 실존과 자기완성의 길이다. 불교에서 보면, 그와 내가 서로 조건으로 작용하고 의지하며 인과를 이루는 연기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눈부처-주체로 산다는 것은 모두가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늘이는 길이다.


5. 포스트세속화 시대에서 새로운 불교의 좌표

촛불 이후 불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깨달음과 열반에 이르고 중생구제를 달성할 것인가. 이를 제대로 짚어내려면 포스트-세속화라는 맥락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해 먼저 논하고 그 틀에서 불교의 지향점을 찾아야 한다.

신화와 경전을 바탕으로 종교의 의미를 발생이나 기원의 측면에서 추측해 보면, 대략 열 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첫째, 인간이 자연의 공포, 또는 (선한 자가 자연의 재해, 사고, 권력에 의해 죽는 것과 같은) 세계의 부조리와 횡포에 맞서서 두렵고 불안하기에 절대자에 귀의하거나 의존해서 이걸 벗어나려 한다(불안과 공포로부터 탈출과 위안으로서 종교).

둘째, 고대의 신화를 보면 매일 조금도 오차 없이 뜨고 지는 태양과 달과 별 등 천체의 작용, 농경 생활 이후 오곡백과를 안겨주는 바람과 비와 태양 등의 자연에 대한 경이로 가득하다. 이는 자연과 우주의 기원과 이를 관장하는 주재자, 미생물에서 우주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의 작용과 조화, 아름답고 위대한 자연, 인간의 모든 사유와 행위에 관여하거나 임재하는 절대자에 대한 경이와 신비에 대한 믿음과 섬김으로 이어졌다(자연에 대한 경이와 우주의 주재자와 절대자에 대한 믿음과 섬김으로서 종교).

셋째, 인지혁명 이후, 인간은 자신 앞에 놓인 모든 대상에 대해, 하늘과 땅을 오고 가는 새를 신의 사자로 생각하여 신격화하거나 그런 신화와 의례를 행하는 것에서 잘 드러나듯 유사성의 유추인 은유(metaphor)를 행하거나 ‘밤-어둠-검은색-저승’처럼 인접성의 유추인 환유(metonymy)를 행하여 신과 신화, 의례를 구성한다(은유와 환유로서 종교).

넷째,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라는 인간은 절대자에 의지하여 소망을 실현하려는 집단적 열망을 갖는다(소망실현으로서 종교).

다섯째, 언제인가 죽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인간의 유한(성)에서 기인한 실존적 성찰과 불안에서 천국과 극락 등 내세에서 영생을 누리며 영원과 무한을 추구한다(내세지향, 영원과 무한으로서 종교).

여섯째, 일상에서 세계내존재로서 자각하고 더 나은 의미를 좇아 실천하며 주관과 객관, 유한과 무한을 통합하고 총체성이나 진여(眞如)에 이르려는 귀의다(의미의 실천과 총체성으로서 종교).

일곱째, 인간의 죄와 악, 분노, 탐욕, 어리석음을 없애고 거듭나면서 몸과 마음 모두 인격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완성된 인간에 이르고 비천한 삶에서 벗어나 지극히 거룩한 세계로 초월하려 한다(인성과 신성의 종합과 윤리와 초월로서 종교).

여덟째, 인간이 무지함에서 벗어나 이 우주와 모든 생성과 작용의 근본, 궁극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려 한다(깨달음으로서 종교).

아홉째, 타인이나 중생에 대한 자비와 사랑을 통하여 그와 나를 구제/구원하려 한다(구원으로서 종교).

열째, 기원전 800년에서 200년 사이의 기축시대(Achsenzeit, Ax-ial age)에 이르러 붓다, 공자, 예수, 마호메트 등의 성인이 나타나자 이들을 신의 아들이나 초월적 존재로 간주하고 그들의 말씀과 가르침을 따르는 역사에서 종교가 이루어졌다(성인의 가르침으로서 종교).

근대에 들어 첫째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탈출과 위안으로서 종교, 둘째의 자연에 대한 경이와 우주의 주재자와 절대자에 대한 믿음과 섬김으로서 종교, 셋째의 은유와 환유로서 종교, 넷째의 소망실현으로서 종교는 약화하였고, 다섯째의 영원과 무한으로서 종교, 여섯째의 의미의 실천과 총체성으로서 종교, 일곱째의 인성과 신성의 종합과 윤리와 초월로서 종교, 여덟째의 깨달음으로서 종교, 아홉째의 구원으로서 종교, 열째의 성인의 가르침으로서 종교가 강조되었다. 하지만, 의미와 공동체가 상실되고 극단적인 경쟁과 불안, 소외를 겪으면서 대중 사이에서 다시 첫째, 둘째, 셋째와 넷째의 면을 추수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응으로 여섯째의 의미의 실천과 총체성으로서 종교, 일곱째의 인성과 신성의 종합과 윤리와 초월로서 종교, 아홉째의 타인의 구원으로서 종교의 면이 포스트세속화의 과제로 요구되고 있다.

지금은 두통이 걸린 사람에게 악마가 깃들었기 때문이라며 면죄부를 판매하거나 악마가 나가도록 머리에 구멍을 뚫는 행위가 효력을 상실하였듯, 근대는 계몽의 빛에 의하여 ‘주술의 정원’에서 벗어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근대가 완성되기 전에 기독교를 비롯하여 여러 종교에서 근본주의 종교의 확대, IS의 테러에서 보듯 재주술화도 상당한 세를 얻고 있다.

이로써 전체로서 삶은 분열되었다. 대중은 의미와 연대적 삶, 공동체를 상실한 채 각자도생의 무의미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생활 세계가 제도와 체계에 철저히 식민화함으로써, 권력(주권권력, 훈육권력, 생명권력)과 시장에 의해 의식은 물론 무의식마저 억압당하고 관리당하면서 대중은 전체와 의미를 상실한 채 실존보다 소유를 지향하고 타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보다 경쟁에 내몰리며 서로를 ‘주변인’으로 만들거나 ‘악마화’하고 있다.

이에 세속화로부터 상실한 것을 복원하고 치유하는 포스트세속화, 종교와 공론장 사이의 변증법적 종합이 필요하다. 종교를 공론장에서 억압만 할 것이 아니라 의미의 원천으로서 시민사회의 담론으로 구성하고, 대신 종교는 공론장으로 들어와서 ‘이성적’이기 위해서는 “타인의 종교를 인정하고, 세계와 관련된 지식에 관한 한 과학의 권위를 인정하고, 세속적 권위에 기초하고 있는 헌법국가를 인정하는 삼중의 반성을 수행하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체제에 포섭되거나 그 탐욕과 경쟁심, 이기심을 내면화한 삶을 성찰하고 이를 극복하는 지향을 해야 한다.

근대는 철학적으로 ‘신의 죽음’을 선언하였고 계몽적 이성과 과학의 발전과 집단학살을 통하여 신에 대한 회의를 대중적 담론으로 부상시켰다. 우리는 신께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바친 기도에 응답이 없으면 신을 원망하기도 한다. 유태인 학살과 같은 극히 사악한 일이 벌어지고 이에 대한 정의가 구현되기는커녕 악한 자들이 계속 권력을 유지하고 부귀영화를 누릴 때 신의 존재에 의심을 품는다. 과학자들은 우주와 생명의 창조에 신이 개입하지 않았다며 신을 부정한다.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진화생물학자들은 생명의 창조와 진화에 신의 개입이 전혀 없었다고 하며, 로런스 클라우스와 같은 물리학자들은 우주의 창조와 작용이 철저히 과학적 원리와 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신의 죽음’ ‘계몽적 이성과 과학에 의한 신비와 주술의 퇴출’ ‘정의의 지연이나 배반’ 등을 경험한 근대 이후의 종교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신을 부르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이다. “신을 믿거나 부정하는 것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이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는 거울로 작용할 뿐이다.” 이제 죽어야 할 것은 인간의 실존과 의미, 초월, 타자와 연대와 별 관련이 없는 실체로서, 초월적 절대자로서, 우주와 생명의 창조자로서 신이다.

반면에, 새롭게 다가와야 할 신은 ‘내재적 초월’과 ‘눈부처 내지 타자성(alterity)의 원천과 힘’으로서 신이다. “신의 존재는 믿음이나 실재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이 자신에게 던지는 결단의 문제로 다가온다. 그것은 인간이 전 실존을 걸고 던지는 존재의 결단이다. ……신은 인간존재의 완성과 초월을 가능하게 만드는 존재다.” “인간의 현재는 신의 ‘이미 벌써’ 주어져 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아니’ 다가온 신 사이의 시간이다. …… 내 안에 없음에도 초월적으로 신의 존재를 체험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신은 그러기에) 내재하면서 초월한다.” 아울러, 우리는 타자에게 진정으로 다가가서 그와 하나가 될 때 그에게서 신의 모습을 본다. “인간이란 만날 때마다 이 만남 자체를 상대방에게 늘 표현하는 유일한 존재다.” 만나서 얼굴을 대할 때 두 사람은 인간관계에 들어간다. 더욱 가까이 다가가서 얼굴을 바라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그 순간 타자 속에 진실로 신이 현존한다. 나와 타자의 관계 속에서 나는 신의 음성을 듣는다.”
신은 모든 존재자의 본성을 느낄 때의 떨림, 초월적 힘에 대한 감수성, 존재자로서 인간 존재의 심연에서 우러나는 울림, 존재의 소리를 듣는 영적인 지평,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여 타자의 눈동자 안에서 눈부처를 마주할 때 느끼는 원천과 힘에 관계된 개념이다. 신은 유한한 존재로서 한계가 많고 불안하고 고독한 인간이 초월하고자 할 때,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여 연대하고자 할 때 그 사이에서 체험하는 무엇이다.

포스트세속화 시대를 맞아 종교는 3차 서비스산업으로 전락하여 명상 또한 상품이나 개인적 치유의 방편으로 이용되고 있다. 종교는 의미와 실존, 공동체와 연대, 구원/구제라는 본래의 가치를 상실하였다. 이에 승/재가 모두 내재적 초월과 입전수수(入廛垂手)의 화쟁이 필요하다. 승려들은 절 안에서 삼독을 지멸하는 수행을 통하여 내재적 초월, 깨달음, 열반을 지향해야 한다. 또한, 절 밖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이에 공감하여 입전수수라는 말대로 다시 사회로 들어와 중생구제를 수행하여야 하며, 이럴 때 시민으로서 각성이 필요하다. 재가불자 또한 공공영역에서 시민 주체로서 삶을 영위하되, 깨달음과 열반을 지향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절이나 모이는 광장이나 마당을 시장과 신자유주의 체제가 포섭하지 못하는 의미와 지혜, 윤리와 덕성의 원천으로서 수행 공동체인 동시에 공론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승/재가자들은 절이나 마당에서 자신의 탐욕과 경쟁심, 이기심을 지멸하는 성찰과 수행을 행하고 깨달음과 열반을 지향하며, 동시에 타인에 대한 공감/자비와 연대를 바탕으로 탐욕스러운 세계에 저항하는 공론장을 형성해야 한다.

필자는 “신자의 마음이 아니라 외부의 명령에서 온 신앙,”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과 주체성을 억압하는 신앙, 시민사회의 소통적 합리성과 결합하지 못한 채 ‘주술의 정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종교, 마음의 평안보다 물질적 풍요를 약속하는 종교, 종단이 권력/자본과 유착관계를 맺은 종교, 교리의 새로운 해석을 거부하는 종교, 사적 이익과 소망실현에 급급하는 종교, 대중구제를 뒤로 한 채 개인의 수양에만 집착하는 종교, 권위적인 종교집단, 이웃종교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를 거부한다.

그렇기에 이와 반대의 지향을 하는 불교, 특히 공감과 자비가 모든 실천의 동력이 되고 개인의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종합한 불교, 사부대중이 주체적인 시민으로서 모두 평등하게 권력을 가지고 ‘차이의 공동체’를 추구하는 불자의 집단을 지지한다. 과학과 대량학살, 인공지능과 생명복제가 신을 회의하게 하는 탈종교화와 포스트세속화의 시대에서도 ‘내재적 초월’로서, ‘타자성과 의미의 원천과 힘’으로서 불교는 필요하다. 소욕지족의 눈부처-주체들이 서로를 자유롭게 하고 깨닫게 하는 연대와 공동체를 구성하여 내 안의 탐진치와 탐욕스러운 세계를 모두 혁파하는 마당으로서 절은 필요하다.

다양한 가치와 존재들이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차이의 공동체’는 화쟁을 전제로 한다. 화쟁을 통섭으로 보는 것은 오독이며 소통, 화회, 개시개비(皆是皆非)로 보는 입장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장님 코끼리 만지기’처럼 화쟁의 한 단면만 본 것이다. 그 무엇보다 화쟁은 연기론에 충실한 방편이다. 화쟁은 소통과 회통(會通)이되, 문제의 핵심은 당위적이고 윤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대립과 모순, 딜레마를 ‘어떻게’ 해소하여 회통(會通)시키느냐에 있다. 화쟁은 사상이나 목적이 아니라 방편이고 방법론이다. 화쟁은 일심(一心)의 본원으로 돌아가서 요익중생하려는 목적을 향하여 ‘대립물 사이의 연기적 깨우침에 따른 대대적(待對的) 전환과 공존’의 방편이고, 이문(二門)의 현실을 긍정하면서도 이를 초월하여 일심(一心)을 지향한다. 화쟁은 불교 교리나 교파 사이의 대립, 모순, 딜레마[諍]를 인정하고 이를 치열하게 분석하는 동시에[二門], 양자의 연기적 관계를 묘파하여 소통하면서 대대적으로 전환하여, 일심과 진여, 중생 구제[一心]를 지향하면서 둘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고 하나로 아우르는 수평적 방편이다[和].

이렇게 하여 원효는 반야와 유식의 대립을 불일불이(不一不二)로, 언어와 진여(眞如)의 딜레마를 인언견언(因言遣言)론을 넘어서 선령언구 후령의리(先領言句 後領義理)론으로, 부처/깨달음과 중생/깨닫지 못함의 대립을 진속불이(眞俗不二)로 화쟁을 하고, 사(事)와 이(理) 등 그 밖의 대립과 모순에 대해서도 순이불순(順而不順)이나 변동어이(辨同於異)를 통하여 회통(會通)을 한 것이다.

화쟁은 본래 불교 교리와 교파 가운데 서로 대립, 모순, 딜레마 사이의 회통을 의미하므로 이를 현대에, 사회문제 등 다른 분야에 적용하는 것은 비약이다. 그럴 경우 신라와 현대의 양 맥락에서 읽기와 텍스트의 해석 사이에 끊임없는 종합을 하여야 하며, 권력 등 수직적 연기에 대한 분석과 매개가 필요하다. 아울러, 쟁(諍)에 대한 치열한 분석과 논증의 과정 없이 화(和)에 초점을 맞추면 유신체제를 옹호한 이데올로기, 분단모순을 은폐하거나 독재체제를 옹호하는 남북통일론, 도법 스님의 화쟁위원회처럼 모순을 은폐하고 ‘강요된 화해’, 혹은 ‘포장된 화회’로 귀결된다. 4대강이나 쌍용자동차 사태처럼 권력이 절대적으로 비대칭 곳에서 진영의 논리를 벗어나 화쟁하라는 것은 권력자의 편을 드는 것이다.

이처럼 화쟁은 서로 철저하게 대립하던 양자가 실은 연기적 관계, 서로 작용하며 의지하고 조건을 맺고 있으며 원인과 결과가 역동적으로 오가면서도 일심(一心)을 지향한다고 깨우쳐서 대립 사이에 끊임없는 소통을 하다가 양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혁신적인 새로운 지평을 열거나 중도와 대대를 통해 하나로 어울리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자면, 정화비용을 아끼기 위하여 폐수를 몰래 강에 버리면서 환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치부하였던 대기업의 회장이 자신이 버린 폐수에 오염된 물고기를 먹은 아들이 기형아를 낳는 연기적 관계를 깨닫고 환경친화적 기업으로 전환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기에 구성원들이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하면서도 타자와 대립했을 때 그와 차이를 인정하고 자신의 연기를 깨닫고 대대적으로 전환하여 타자에 대한 공감과 자비를 바탕으로 자신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여 그에게 이익과 자리를 양보하는 데서 더 나아가 타자를 자유롭게 하고 본래 면목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서로 노력하는 사회가 바로 차이의 공동체다.


6. 촛불이 지향하는 사회

적지 않은 불자들이 촛불을 계기로 이 땅에 정토를 구현하기를 원한다. 우선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양적 발전보다 삶의 질, GDP보다 국민의 행복지수, 경쟁보다 협력, 개발보다 공존,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지향하는 대한민국으로 전환한다. 이제 우리나라의 무역량보다 이 땅의 강과 숲에 얼마나 다양한 생명이 살고 있는지, GDP보다 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이 얼마나 미소를 짓고 있는지, 국부를 늘리기보다 얼마나 가난한 이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고 있는지, 기업 이윤을 늘리기보다 얼마나 노동자들이 행복하게 자기실현으로서 노동을 하는지, 뛰어난 인재를 길러내기보다 못난 놈들이 얼마나 자신의 숨은 능력을 드러내는지, 내기하고 겨루기보다 얼마나 모두 함께 모여 신나게 마당에서 노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국가를 경영하고 정책을 구사해야 한다.”

“불교는 어떤 종교나 신앙보다 강력한 생명사상과 연기관을 가지고 있다. 불교는 성장신화를 해체하고 느리고 여유로운 삶, 타인을 위하여 나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삶,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을 제시한다. 불교는 일체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불성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중생은 모두가 존엄하고 평등하다. 장아함의 가르침대로 사람의 출신과 신분이 어떻든 중생은 모두 석가모니의 아들로 평등하다. 거기에 더해 불교는 공화주의, 혹은 공화국의 정치 형태인 부족국가를 뜻하는 승가(僧伽)는 모든 안건을 대중의 동의를 통하여 처리하는 민주주의 전통인 갈마(karma)를 행하고 있다.”

이에 불자들은 생명평화의 가치를 지향하는 정의롭고 평등한 민주공화국을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상상하고 실천할 수 있다. 무엇보다 불교는 무소유를 지향하고 소욕지족의 삶을 추구하기에 마을의 단위에서는 공동으로 생산하고 분배하며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연대체로서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다. 이를 더욱 튼실하게 하기 위하여 깨달음의 사회화와 자비로운 분노, 공업(共業), 사회적 고(苦) 등 교리에 대한 혁신적 재해석이 필요하다.


7. 맺음말

역사의 기관차라지만 혁명은 늦게 올 수도, 빨리 올 수도, 끝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저항의 동력 없이는 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또 하나, 그 방향은 과거의 영광이 아니라 미래의 비전-정의롭고 평등한 생태복지국가로서 민주공화국과 한반도평화체제, 모두가 더불어 행복한 공동체-을 향하여야 한다.

촛불이 혁명을 완성하기 전에 우리는 다른 태풍을 맞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유토피아든 디스토피아든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일자리를 없애고 로봇-봉건시대를 도래하게 하고, 더 나아가 인류의 문명을 종말로 치닫게 할 수도 있다. 반면에, 사물인터넷과 3D프린터를 연결하여 한계비용이 제로인 공유경제의 영역을 확대하고 태양에너지가 화석연료를 대체하여 환경문제가 절로 해결되는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 촛불의 정신을 깊이 간직하고서 4차 산업혁명의 도전들에 슬기롭게 대응하면서, 깨달음이 집착이라며 부단히 해체와 정진을 거듭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마음과 이 땅에 철저히 실현할 때, 중생들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아파하고 연대할 때, 정토구현은 가능할 것이다. ■

 

이도흠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양대 국문학과, 동 대학원 졸업. 한국학연구소 소장, 계간 《문학과 경계》 주간,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상임의장 역임. 주요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등이 있다. 현재 한국기호학회 회장,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지순협 대안대학 이사장. 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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