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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에 대한 불교윤리적 분석과 제안 / 장승희
특집 | 촛불 이후 한국사회와 불교
[72호] 2017년 12월 01일 (금) 장승희 inhundang@jejunu.ac.kr

1. 머리말

하나의 대상[사물이나 사건]은 보는 관점(觀點)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 하나의 관점만으로는 결코 그 대상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으며, 여러 관점에서 보는 다른 모습들이 종합될 때 비로소 대상의 본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러한 종합이 불가능할 때가 있다.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면서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경우, 혹은 대상이 보이는 것 자체를 부정하거나 본질을 왜곡하는 경우이다.

촛불집회를 바라보는 관점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이 촛불집회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촛불을 조망하고 분석하고 평가하고 있지만, 보고자 하는 관점에서만 보는 경향이 많다. 이번 《불교평론》 기획은 촛불집회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종합적 기회가 아닌가 여겨진다. 윤리교육을 전공한 필자는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선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 그들의 의식 저변의 분노에 깔린 윤리적 지향, 촛불집회 이후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가치의식이 이전과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궁금하였다. 평상시 연구주제였던 불교윤리와 교육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분석해 보고자 한다. 우선,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윤리적 지향을 살펴보고, 촛불집회의 원인을 불교윤리의 관점에서 업(業)과 공업(共業), 연기(緣起), 화쟁(和諍) 개념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촛불 이후의 윤리적 대안을 찾아보자.


2. 촛불집회에 나타난 윤리적 지향

최근 한국 대통령이 민주주의에 기여한 공로로 ‘세계시민상’을 수상하였다. 이것은 대통령 개인에 대한 수여라기보다는 촛불집회를 이룬 한국 국민에 대한 수여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소의 아쉬움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촛불집회에 참여한 한국의 1,000만 국민이 ‘2017 에버트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대통령 한 사람을 넘어 전체 국민에 대한 상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는 듯하다. 이들 모두는 촛불집회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 수상으로, 한국의 촛불집회는 사회적 · 정치적 갈등상황에 처한 세계의 많은 사람에게 평화적 해결을 위한 하나의 전형(典型, archetype)으로 제시되고 있는 듯하다.

세계인들이 촛불집회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로 시민들이 자발적이고도 전혀 폭력이 없었던 평화적인 시위였다는 점, 둘째 자발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셋째는 정당한 절차와 과정에 따라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정권교체의 성공이라는 결과적 의미도 크지만 불의(不義)에 대한 저항 과정을 일상의 삶 속에서 구현하였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뿐만 아니라 집회 과정을 일종의 축제로 승화시켜 시위의 품격을 높였다는 촛불시위의 성격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당시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유모차에 아기를 태운 엄마와 아이의 손을 잡은 아빠, 교복을 입은 학생과 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 주말을 기다리던 퇴근길의 회사원과 대학생, 심지어 동창 모임에 참석한 사람도 있었다. 광장에서는 참여자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무대가 있었고, 촛불의 의미를 높여주는 가수들의 노래가 있었으며, 자발적으로 봉사하던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었다. 집회가 끝난 후에는 어느 한 사람 빠지지 않고 함께 뒷정리하여 주변 상인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배려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밤이면 어떠하였던가. 몇백만의 사람들이 주관단체의 주도하에 광화문을 촛불의 물결로 만들었으며 그런 촛불의 장관을 보는 사람들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 정도였다. 당시 시민들은 평상시에는 자신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다가 주말이면 모여서 집회를 하곤 하였는데 모두 23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이전의 최루탄 속에서 이루어지던 투쟁과는 다르게 가족들과 함께 손잡고 노래하고 춤추며 저항과 비판을 표현하는 성숙한 시민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3인의 법칙’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 많이 모인 데서 길을 가다가 2명만 하늘을 쳐다볼 때는 다수 중 몇 명만이 하늘을 쳐다보고 가지만, 3명이 하늘을 쳐다보면 대부분의 사람이 함께 하늘을 쳐다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상황을 지배한다’는 유명한 심리 실험으로 많은 사례에서 증명된 바 있다. 촛불집회는 그야말로 3인의 법칙이 확산하여 파급된 결과이며, 그것이 천만 이상의 힘으로 결집한 것이다. 실패한 최고지도자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분노와 저항 및 변화의식이 촛불의 결집으로 드러난 것이다. 촛불시위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시민들의 마음에는 실패한 지도자에 대한 혐오 이상의 그 무엇인가를 내포하고 있었다. 2016년 후반 한국에서 이루어진 촛불집회를 이루어낸 시민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가치의식은 무엇일까?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서게 한 의식의 저변에 깔린 생각들, 즉 그들이 추구한 윤리적 지향을 살펴보자.

첫째, 국정농단에 직면하면서 우리 민족의 올바름[義]에 대한 지향이 드러났다. 이것은 우리 역사 전반에 흐르고 있던 정의(正義)에 대한 추구로, 선비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하였던 가치의식과도 상통한다. 그 연원은 《맹자》에 드러나는 “삶[生]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는 소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현실과 도덕의 갈등상황에서 비록 쉽지는 않지만 결국 올바른 가치를 추구하겠다는 신념이 발현된 결과이다. 시대가 변하여 자본주의 사회로 패러다임이 바뀌었음에도 면면히 이어온 선비정신은 촛불집회로 이어져 민주적 실천으로 드러난 것이다.

둘째, 이것은 또한 불의(不義)에 대한 저항이자 비판의식의 결과이다. 위의 올바름 추구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데, 유교적 가치와 민주주의적 가치의 교묘한 접합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맹자》에서는 혁명을 긍정한다. 왕이 왕답지 못할 때 천명(天命)에 의한 역성혁명(易姓革命)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근저에는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며, 하늘의 뜻에 따라 최고지도자의 교체도 가능하다는 논리이며, 그것은 시민혁명의 가능성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집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비폭력 가치의 추구와 실현이다. 일반적인 저항과 시위에는 폭력이 따랐던 것이 우리의 역사였다. 어쩌면 촛불시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러한 집회와 시위의 경험에서 얻는 교육적 효과로, 폭력이 폭력을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끝까지 평화 시위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민주화 과정이 성숙하면서 비폭력의 가치에 대한 추구는 점점 강화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 가치관에 영향을 미쳤던 유교와 더불어 불교의 사상적 기치인 불살생(不殺生)과 비폭력의 가치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책임윤리를 추구하는 시민성의 구현이다. 우리 사상은 유교와 더불어 불교적 사유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데 특히 인과응보의 원리에 의한 업(業)의 논리와 연기(緣起)의 세계관을 들 수 있다. 시민들은 선출된 최고지도자의 악행에 대해 당연한 과보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내가 지금 이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또 이 업이 쌓여 미래세대에게 나쁜 과보를 줄 것이라는 공업(共業)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현재 이루어진 비윤리적 행위들이 단순히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된 업들이 쌓여서 이루어졌으며, 그것에 대한 실존적 자각과 실천이 없이는 악업의 고리를 끊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을 찾아볼 수도 있다. 이러한 인식들이 역사의식과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연계되어 촛불을 들게 한 동인이 되었다.

다섯째, 이와 같은 저항과 비폭력의 촛불집회를 가져올 수 있었던 동인으로 필자는 도덕 · 윤리교육의 효과를 강조하고 싶다. 1980년대 도덕 · 윤리교육의 정체성에 대한 비판을 딛고 스스로 비판과 성찰을 거듭한 도덕 · 윤리교육은 교육과정의 변화를 거듭하면서 비판적 성찰 교육에 초점을 두고 있다.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 과목에서는 시민불복종에 대해 “정의롭지 못한 법이나 정부 정책을 변혁시키려는 목적으로 행하는 의도적인 위법 행위이다.”라고 제시하였고, 시민불복종이 정당화하려면 행위 목적이 정당해야 하며 비폭력적이어야 하고, 최후의 수단이어야 하며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는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1970, 80년대 비판을 받았던 도덕 · 윤리교육의 역사는 1990년대 이후 비판적 성찰을 통해 교육과정 변화를 거듭하면서 윤리교육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고 있다. 이전에 윤리교육을 받았던 기성세대들에게 이러한 교육 내용들은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일 것이다. 올바른 비판과 저항의 가치를 통하여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교육하였고 구체적 실천으로 드러난 것이 촛불집회였다.

이러한 윤리적 지향은 촛불집회의 동인인 동시에 동전의 양면처럼 촛불집회의 원인 혹은 결과와 직결되기도 한다. 올바름의 추구는 불의와 비리(非理)의 존재에 근거하며, 평화적 시위는 폭력적 시위라는 역사적 경험에서 결과했으며, 책임지는 정치의 결여 때문에 역사의식과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의식이 더 강화되었고, 도덕 · 윤리교육의 성공도 교육계의 뼈아픈 자기비판과 성찰로 이루어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인과론에 따라 원인에 따른 결과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이론이나 논리처럼 명확하게 전자와 후자가 구분되고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삶은 찰나마다 선택의 연속이자 그 과정에서 여러 변수가 작용하여 유기적 관계를 맺는 복잡한 상황들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3. 불교윤리의 관점에서 촛불집회의 원인 분석

불교윤리의 관점에서 촛불집회의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불교의 논리와 윤리의 위상을 간략히 살펴보자. 불교의 목적은 이고득락(離苦得樂)이다. 인간의 실존을 괴로움이라 보고 이를 극복하여 행복해지기 위함이다. 불교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상의(相依) 상관(相關)에 의하여 연기적 속성을 갖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따라서 연기적 속성을 지니는 모든 것들은 공(空)이다. 또한 인(因)과 연(緣)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관계성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여 행위 할 수 있는데 의도에 의해 이루어지는 잠재력이 바로 업(業)이다.

자신의 의도에 의해 이루어진 업의 결과가 보(報)이며 인간은 결국 과보(果報)를 피할 수 없다. 특히 악업(惡業)의 과보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이 업의 논리이다. 불교는 다른 어떤 사상이나 종교보다 윤리적이다. 초기불교는 인간이 해로운 마음[不善法]을 극복하여 유익한 마음[善法]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중시하며, 선(善)과 불선(不善)의 구분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행복은 선의 심리에 있기 때문에 수행을 통하여 올바른[윤리적] 지향을 하도록 한다. 이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불교의 연기, 업, 화쟁의 개념을 통해 촛불집회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 대안을 찾아보자. 연기는 불교 논리의 가장 핵심 되는 개념이자 이 세상의 존재 이치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개념이고, 업은 불교의 윤리적 실천 근거가 되는 개념이며, 화쟁은 원효사상의 핵심으로 서로 다른 것들을 어떻게 조화 상생하게 하는지 그 원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1) 연기(緣起)의 원리: 유기적 관계성 인식의 부족

촛불집회의 첫째 원인을 묻는다면 당연히 잘못된 리더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 하나만이 촛불집회의 원인이라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국정농단을 초래한 많은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존재 양상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의 상호 관계에 의하여 전개되며, 모든 것은 변화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로서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연기론이다. 연기(緣起, pratīitya-samutpāda)란 말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로, ‘의존하여(pratīitya) 함께(sam) 일어난다(utpāda)’는 뜻이다. 일체는 서로 의존하여 함께 일어나고 소멸하고 나타나고 흩어지며,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며,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 연(緣)이란 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으로,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을 뜻하는 인(因)도 포함한다.

2016년 가을에 본격적으로 촛불집회가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그 원인이 단순히 한 시점에서 이루어진 국정농단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여러 원인이 쌓여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이것은 주역의 원리와도 상통한다.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궁즉변(窮則變)의 논리이다. 부조리(不條理)가 극에 달하여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할 정도까지 되었고, 미디어가 끈질긴 추적으로 단서를 제공하자 실타래가 풀리듯이 그동안 얽혔던 사회 · 국가적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치적 부도덕과 부조리는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부분이 없었을 정도이다. 그 과정에서 비윤리적 사회구조와 부도덕한 개인의 실체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한 나라의 이해관계와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합리적 제도와 윤리적 규제들이 작동되지 못하도록 만든 실체가 정점에 결정권자가 있었고 그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들은 파동처럼 전체 공동체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촛불집회 원인의 하나로 세월호 사건을 무시할 수 없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으며 그에 대한 부당한 처리에 분노가 쌓이고 있었다. 특히 세월호 사건은 이후 온 국민을 ‘죽음 현저성(Mortality Salience)’ 상태에 놓이게 함으로써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켜 놓았다. 죽음 현저성이란 사람들이 죽음을 인지하면 평소와는 다른 판단과 행동을 하게 되는 현상을 말하는 심리학적 용어이다. 예를 들면 어니스트 베커는 이를 활용하여 ‘공포관리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을 정립했는데, 그는 대부분의 인간 행위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무시하거나 회피하려는 의도로 행해진다고 주장한다.

공포관리이론은 우리의 행동과 믿음 대부분이 죽음에 대한 공포에 의해 유발된다는 전제 아래,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직면했을 때 표출되는 정서적 반응을 이론적으로 설명해준다. 예를 들면,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직면하게 되면 나타나는 정서적 반응을 보면, 성적 충동이 낮아지고 자존감을 높여주는 소비를 하는 경향이 있으며, 내집단 편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내집단이란 자기와 가치관, 행동양식 등이 비슷하여 구성원 간의 애착과 일체감이 느껴지는 집단을 의미하는데, 죽음이 현저해지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내가 속한 집단이 무조건 옳고 바르다고 생각하는 내집단 편향성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심리는 ‘만약 내가 죽더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로 인해 마치 나의 존재가 영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심리적 안정감을 내집단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집단 경향성이 가장 강화되었던 사례가 미국의 9 · 11테러였는데 내집단 편향성은 기본적으로 재앙이나 테러를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는 인재라는 점에서 외집단과 내집단이 우리 사회 내에서 구분되고 부패한 정부, 무능한 공무원들이 외집단이 되는 결과가 되었다. 즉 우리 내부에서 내집단과 외집단이 구분되고 내집단 결속력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사람들은 죽음 현저성에 놓이게 되면서 외집단으로 구분된 사람들의 부도덕성과 잘못된 권위의식과 무책임에 주목하게 되었다. 불합리한 판단과 선택에 대한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사회구조의 부조리, 리더들의 무책임, 공무원들의 부패와 무능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든 죽음을 목격하게 되면 도덕적 민감성이 발달하게 되는데 심지어 꿈 많은 10대들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자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감과 역사의식을 자각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세월호 사건을 초래한 근저에 자본주의의 물질적 가치에 대한 숭배가 있었다는 비판에서 오히려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게 되고 단기적 즐거움보다 장기적 의미에 더 가치를 두는 경향성이 높아졌다. 세월호 사건 이후 사람들은 무엇이 진리이고 본질인지 묻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연기의 관점에서 정부나 지도자들은 이러한 상관적인 관계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다. 즉 세월호에 대한 무책임한 대응은 이후 지도자와 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는데, 궁극적으로 정부나 정치권은 우리 사회 공동체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논리로만 이해하고자 하였던 듯하다. 그 결과 세월호의 죽음 현저성으로 인해 나타나기 시작한 시민들의 역사의식과 공감의식이 확대되고 지도자나 정부는 이에 둔감하게 되었으며 내집단과 외집단의 간격이 더 벌어지게 된 것이다.

2) 업(業)과 공업(共業)의 원리: 인과응보와 자업공득(自業共得)

불교에서 인간의 의지적 작용이 ‘업(業, Karma)’이라면, 이에 대한 대상의 필연적 반응이 ‘보(報, vipāka)’이다. 주체적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선 혹은 악을 선택할 수 있으며, 인(因)을 만들어내는 주체는 바로 자신이다. 업 개념은 불교사상의 본질적 개념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현실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이냐는 윤리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성립된 개념이다. 인도철학사의 초기에는 초월적 신의 의지에 부응하고자 하는 대가성의 업이었다면, 초기불교에서는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단순히 일회성 · 단멸성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으로 인하여 초래될 결과를 의식한 결과로서 업을 자각하고 있다. 결국 업 개념은 윤회와 결부되든 아니든 선한 혹은 악한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는다는 윤리성을 전제로 함에 윤리적 범주를 벗어날 수 없고, 궁극적으로는 윤리적 실천을 이끌어내기 위한 원리로 작용한다. 초기의 업 개념이 불교에 무리 없이 수용된 이유는 불교가 추구하는 본질적이고 철저한 윤리적 지향성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도 윤리와 무관한 것이 없지만 불교처럼 철저하게 윤리적인 종교나 사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초기불교의 마음 이해를 보면, 불선(不善)은 정신적으로 건전하지 못하거나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하여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기 때문에 해롭다고 하였고, 선(善)은 이와 반대로 정신적으로 건전하고 도덕적으로 칭찬받을 만하여 즐거운 과보를 가져오기 때문에 유익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심리구조는 업과 업의 내용과 직결된다고 보았다.

업은 원래 행위를 뜻하던 말이 윤회와 결부되고 윤리적 의도를 포함하는 가치적 개념이 불교에 정착한 개념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업은 의도적인 작위이자 자신의 하는 직업으로도 인식된다. 불교에서 업의 원리는 인과응보와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의 업에서 우리는 자신의 의도를 가지고 한 말과 뜻과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아야 한다는 것, 팔정도의 정업(正業)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직업으로서 일도 바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의도에 따른 결과를 받을 뿐만 아니라 바른 직업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명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촛불집회 이전과 이후의 정치를 분석할 때, 이와 같은 인과응보의 업과 정업으로서 업을 동시에 떠올리게 된다. 우선 전자의 업에 대해서는 대통령과 주변 권력자들의 업에 대한 인과응보이다. 이것은 어쩌면 한국 역사의 업보(業報)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960, 70년대의 독재자의 딸로 권력의 정점에서 보고 듣고 알고 느낀 것이 이른바 장식(藏識, 아뢰야식)이 되고, 그것이 말나식(末那識)의 과도한 작용으로 인하여 결국은 잘못된 인식에 의해 비도덕적 리더십으로 작동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최고 통치자에게 우선적인 죄를 물을 수 있다 하여도 그렇다고 그것을 비판하고 견제하지 못한 정치권의 잘못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업의 원리는 기본적으로 자업자득이지만, 연기(緣起)의 메커니즘에 의하면 자업공득(自業共得)일 수밖에 없다. 또한 현대사회의 유기적이고 복잡한 구조에서 더 이상 자업자득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늘날 사회구조는 자업공득의 논리에 의해 업의 원리가 변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연관된 직업을 가지는 경우 더욱 그러하다.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 또한 사람들의 인기를 먹고 살아야 하는 연예인이나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하는 의도적인 업의 결과는 결코 자신에게만 과보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단체는 물론 사회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갈등의 원인을 많은 사람은 정치 부재에서 찾는다. 정치(政治)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통치자나 정치가가 사회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고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시키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통제하여야 할 정치가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심지어 갈등을 조장하는 원인이 되곤 한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인들의 특권, 명예와 권력은 그들만의 리그로 구성되어 견고한 성이 되어 있다. 심지어 촛불집회 1주년을 맞이하여 국회의 역할에 대해 비판하며, 촛불이 국회로 가야 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정치인들의 업(業)으로서의 바른 직업관이 정립되지 않았고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고 듣고자 하는 것만 들으며 자신에 대한 성찰도 없으며 국민의 비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동일한 영화, 예를 들면 〈남한산성(南漢山城)〉을 보고서도 그들이 보고 말하는 것은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의 자아집착식(自我執着識)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팔정도의 정견(正見) 자세이다. 그들은 촛불집회와 그 이후의 우리 현실에 대해 결코 여실지견(如實知見)하지 못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상(相)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진실을 보지 못하고 진리에 미혹한 것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팔정도의 실천이며 무엇보다 정견이 필요한 시점이다.

3) 화쟁(和諍)의 원리: 힘의 균형과 상생

원효의 화쟁은 한국불교에서 전통적으로 계승되어온 화회(和會)와 회통(會通)의 논리체계를 말한다. 단순히 논쟁을 조화시키는 방법적 원리를 넘어 다른 것들을 조화롭게 하나로 구성하는 원리로 파악해도 무리가 없다.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포용하지 못하는 편협함이다. 또한 서로 다른 주장들 속에서 합의를 끌어내는 조화의 절차와 방법에 대한 합의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화쟁을 공부할 때 한 학생이 제기했던 질문이 기억에 남는다. 절대적 힘의 균형이 무너진 관계에서도 화쟁이 과연 가능한가였다. 이른바 갈등이나 투쟁의 상황에서 조정이 필요할 때, 권력이 절대적으로 강한 자와 절대적으로 약한 자가 대립한다면 그 경우에도 과연 화(和)가 가능하냐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화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진정한 화라고 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필자의 관점에서 관계성에서 견제가 가능할 때에만 진정한 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갈등 혹은 대립이 어느 정도 균형이 맞추어지지 않는다면 진정한 조화나 화해가 아니라 지배 혹은 복종이 될 경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절대적 강자와 절대적 약자의 쟁(爭) 혹은 쟁(諍)이 가능한가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불의(不義)에 대해 한 명의 시민이 목숨 걸고 싸울지라도 절대권력 앞에서는 그것이 달걀로 바위 치기 격인 경우를 수도 없이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화쟁의 관점에서 촛불집회를 분석해보면, 촛불의 물결은 막대한 권력에 균형을 맞추기 위한 노력의 과정으로 여겨진다. 세월호 사건 이후 정부의 독단적인 판단과 행위 및 지배는 국민을 파트너로 보기보다는 절대 약자인 피지배자로 판단하여 군림하였고, 이에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보여주었다. 진정한 화(和)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시민들의 힘의 결집이 바로 촛불집회였던 것이다.

필자가 담당한 교양과목에서 ‘역사의 주체, 엘리트일까 민중일까?’라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엘리트라고 주장하는 학생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긴 리더들을, 민중이라고 주장하는 학생들은 다양한 혁명과 민중항쟁들을 논거로 제시하였다. 전자의 경우는 강력한 리더십이, 후자의 경우는 대다수 민중의 목소리가 변화를 주도하는 핵심이라는 주장이었다. 역사를 이끌어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과연 소수의 리더인지 아니면 다수의 민중인지 답을 내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논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가, ~인가?’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고민한 지점이 바로 ‘엘리트는 누가 되는가?’ ‘민중=엘리트는 불가능한가?’의 문제였다.
우리의 사고는 역사적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엘리트와 민중, 리더와 시민을 분리하여 선을 긋고 칸을 만들어온 역사인 듯하다. 이러한 논리야말로 구시대적 지배의 논리가 아닌가 여겨진다. 시민이 새로운 주체로 등장한 이래 이제 리더는 하나의 시민이자 시민들 속에 공존하는 리더가 되어야 하는 사회이고 그런 시대이다.

권위주의 역사에 익숙한 사람들은 탈권위의 리더십을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 ‘답지 못하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다. 그러나 유교의 ‘정명(正名)’의 ‘∼답다’의 본질은 결코 권위주의적 권위에 대한 옹호가 아니다. 전통적으로도 제대로 된 권위와 권력은 인격적 · 능력적 권위에서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능력 있는 리더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대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하는 데서 나오는, 대중이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데서 나오는 제대로 된 권위이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시민사회에서는 더욱 유효하다. 촛불 이후의 권위는 이른바 정명을 어떻게 정립하고 정부와 시민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가가 관건이다. 이러한 힘의 균형에 의해 상생의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4. 촛불 이후의 윤리적 대안 모색

촛불 이후 나아가야 할 윤리적 방향을 국가 · 제도적 측면, 민주 시민성, 개인의 도덕성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 세 가지는 연기의 관계에 의하는 요소들이다. 개인의 도덕적 신념, 사회윤리, 제도의 운영, 지도자의 리더십 등은 마치 갈대가 서로 맞대어 서 있는 것과 같아서 서로 상호관련성을 맺고 있다. 도덕(道德)의 개념은 사람이 걸어가야 할 바른 길[道], 그것을 생활 속에서 체화하는 것[德]이다. 윤리(倫理)는 무리 속에서 지켜야 할 원리 혹은 도리를 말한다. 개인적 도덕성과 사회의 윤리성은 함께 서 있는 갈대와 같다. 국가의 제도적 지원은 그 갈대를 받쳐주는 힘이자 뿌리이다.

한국사회는 문명의 변화에 더하여, 내부적으로 남과 북의 대립, 지역적 갈등, 보수와 진보, 세대 간 갈등, 성별 갈등 등 해결하여야 할 갈등들로 산적해 있다. 갈등 조정 역할을 할 정치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시민윤리에 의한 변화이자 노력이다. 촛불집회도 시민윤리의 발산이며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끌어낼 힘은 시민의 힘에서 찾아야 할 듯싶다. 시민성의 발휘는 작은 사안에서 발휘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확산되면 촛불집회 같은 역사적 의미의 사건일 수도 있다. 이처럼 시민성의 결집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역사적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추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자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일종의 시민들의 역사의식이고, 그것은 결국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의식이 있기에 힘을 얻는다. 현세대에서 현재의 부조리와 모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에서는 더 변화가 어렵고 더욱이 이미 고착된 문제들은 잘못 끼워진 첫 단추처럼 되돌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제4차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고 급변하는 미래 사회에 대응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하지만, 한국의 정치와 제도적 장치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다가올 윤리적 문제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것으로 이에 대한 윤리적 해결 방안을 위한 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새로운 리더십이 요구되지만 정치권의 모습은 여전히 실망스럽다. 새로운 리더십의 정립을 위해서는 올바른 지도자를 선출해야 하는데, 시민들의 비판의식과 감찰 정신이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새로운 사회변화에 따른 시민교육을 위한 교육적 대응이 요구된다. 변화하는 사회와 문명에 적합한 인재상을 제시하고 육성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변화하는 사회에 제도의 정비는 물론 이를 합리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철저한 감시가 필요하다. 이러한 것들을 위해서는 정치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다수 시민의 결집이지만 시민들의 각성된 시민성은 각자의 도덕성과 시민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개인의 도덕성 함양을 위한 노력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첫째, 학교 도덕 · 윤리교육의 정상화이다. 현재 학교 도덕 교과는 이전의 교육 내용과는 다르게 변화하였고, 특히 2015년 개정 교육과정은 ‘도덕함’을 중시하여 도덕적 실천을 중심에 놓고 내용을 구성하였다. 특히 도덕적 내용에 대한 성찰과 토론을 강조하여 개개인의 도덕성에 대한 성찰은 물론,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한 토론 과정을 거쳐 합리적이고 타당한 대안을 마련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둘째, 자신과 사회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고등학교 학교생활기록부의 대입에의 활용은 학생들로 하여금 모든 행동을 점수화하거나 평가자인 교사 혹은 교육, 학교에 대한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게 만드는 경향이 많다. 부조리와 오류에 대한 비판도 망설이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이런 점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성찰과 함께 비판적 사고를 함양할 필요가 있다.

셋째, 사회구성원으로서 개개인이 기본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바른생활의 내용만 실천하여도 우리 사회가 바르게 될 것이라는 지적도 존재할 정도로 도덕적 기반이 허약하다. 학교에서 배우는 기본 도덕은 삶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이자 예의이기 때문에 그것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중요하고, 누구나 기본 태도와 예절을 지킨다면 그것이 확대되어 사회 시민성으로 확대될 수 있다.

개인적 측면에서 보면, 아무리 공동체의 성원이라 해도 도덕적 판단과 선택을 하는 주체는 결국 개인이며, 촛불집회에 참여할 것을 고민하고 선택하고 실천한 것도 개인이다. 자각한 개인들이 모여 3인이 되었고, 천만이 되었던 것이다. 촛불 이후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사회변화에 미치지 못한다고 좌절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변화 과정에 있는 현실을 지켜보고 있다. 한국사회의 도덕적 문제점은 인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들의 도덕적 실천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촛불의 원인인 국정농단의 책임자들만 해도 그들의 도덕적 기준은 사회적 정의나 국가적 이익이 아닌 개인의 입신양명과 권력 쟁취에 있었고, 그 결과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촛불집회에서 보듯이 외집단에 대한 거부를 통한 내집단의 단결은 가능하겠지만, 사회 전반적인 개인 간의 갈등과 분노의 조절을 위해서는 개인적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시민윤리교육과 더불어 개인적 도덕성에 대한 교육이 병행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5. 맺음말: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위하여

인간의 실존을 고(苦)라고 보는 불교에서 그 고를 극복하는 방법은 업(業)의 원리에 따라 선업(善業)을 쌓는 것이며 자신의 의도적인 생각과 말과 행위에 따르는 과보를 받는 것이다. 생로병사의 실존을 경험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나의 업이 한 것이지만 그것이 결코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자업공득(自業共得)의 이치를 파악하는 것이 바로 시민성을 확보하는 것이며 개인의 도덕성을 넘어 시민윤리의 자각이 이루어질 때 연기의 관계성에 대한 인식과 상통하게 된다.

불교의 목적은 괴로운 현실을 극복하여 행복을 찾고자 함이다. 불교가 인간의 현실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인식한다거나 그러한 괴로움을 수동적으로 수용하게 한다거나 괴로움이 가득한 현실을 회피하고자 한다는 주장은 불교를 잘못 이해한 것이거나 단면만 보고 판단한 것이다. 불교는 매우 긍정적인 에너지를 강조하는 행복의 종교이다. 촛불집회 이후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것은, 우선 ‘과연 우리 사회가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해 답을 찾는 것이다.

행복은 결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여 얻는 것이며 촛불집회는 그 노력의 한 과정이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행복을 찾기 위해 아니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불교도 부처님 이후 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변화하여 왔다. 시대적 요구와 시대정신에 부합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시대적 요구와 시대정신은 과연 무엇일까? 거기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행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장승희 
제주대학교 교육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 박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 국역연수원 수학. 서울대학교, 동국대학교 출강. 주요 저서로 《다산 윤리사상 연구》 《유교사상의 현재성과 윤리교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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