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촛불 이후, 한국사회와 불교

‐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시각

1. 촛불과 문재인 정권의 등장

촛불집회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이어져 문재인 정부로 정권이 교체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되었고 이어서 대통령 조기 선거를 통해서 드디어 문재인 정권이 탄생했다. 이 정부는 적폐를 청산하고 갑을 억누르고 을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 자신의 과제라고 믿는다. “새 정부는 촛불 혁명의 정신을 이을 것”이라며 “국민이 주인으로 대접받는 국민의 나라, 모든 특권과 반칙, 불공정을 일소하고, 차별과 격차를 해소하는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촛불집회, 탄핵 등과 관련하여 다양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가 정말로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였는가,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국회의 탄핵소추 결정 및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과 관련하여 법 논리나 사실판단에서 볼 때 정말로 정당했느냐의 논쟁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 글에서 다룰 문제는 아니다.

이 글에서 주목할 것은 촛불집회로 등장한 문재인 정권이 한국경제를 번영의 길로 이끌 수 있는가의 문제다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한국경제가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3%대의 성장률이 현재는 2%대로 추락했다. 저성장시대다. 청년실업은 10%를 넘어섰다. 분배격차는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빈곤층도 늘었다고 한다.

그 같은 경제문제는 자본주의 탓이라고 주장하면서 번영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정부의 광범위한 규제와 통제가 필요하다고 믿는 문재인 정권이 집권한 지 5개월이 되었다. 시장개입과 규제의 청사진은 개인의 삶을 책임지는 국가, 더불어 잘사는 경제 등 분배와 복지에 치중하는 사회주의적 국정철학이다. 이 국정철학이 한국경제를 번영의 길로 이끌 것인가의 문제는 중요하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불교윤리의 정치 · 경제학, 또는 자유시장, 법치, 작은 정부의 자유주의가 번영을 안겨주는 대안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도 흥미롭다.

이 글의 주제는 번영의 길은 문 정권의 국정철학도, 불교의 정치 · 경제학도 아니고 자유주의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오해와 왜곡에서 비롯된 문 정부의 국정철학은 한국경제가 처한 경제문제를 해결하기는 고사하고 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라는 것이 첫 번째 주제다(제2장). 두 번째 주제는 문 정권의 국정철학과 비교할 때 큰 차이가 없는 불교적 대안도 복잡한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검토할 것이다(제3장). 제4장에서는 자유주의가 한국사회에 지속적인 번영을 안겨주는 유력한 대안이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제5장에서는 전체 내용을 요약할 것이다.


2. 문재인 정권의 국정철학: 번영의 길인가?

문재인 정부가 촛불집회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작성한 것이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이다. 이는 문 정부의 국정철학을 담은 그릇이다. 5대 국정목표와 100대 국정과제로 구성된 그 계획서를 보면 적폐청산이 5대 국정목표 중에서 첫 번째 국정과제이다. 나머지 네 개의 국정목표들 중 다섯 번째 안보 관련 목표를 제외한 더불어 잘 사는 경제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 그리고 복합·혁신과제 등이 경제정책과 관련된 국정목표다. 국정목표의 실현을 통해서 ‘사람이 중심이 되는 경제’ 또는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것이 문재인 정부의 야심이다.

정책의 내용을 보면 대기업은 규제하고 중소기업 보호와 재분배와 복지확대가 핵심이다. 시장경제는 실업, 빈곤, 분배 불평등, 저성장 등 모든 악이 구조화되어 있는 체제이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서 경제와 복지 고용 등을 계획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정신이 각인된 것이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번영을 안겨줄 국정철학인가의 문제다.

소득주도 성장의 허구

가계의 소득을 증대시키고 늘어난 소득으로 소비가 증가하며, 활성화된 내수가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소득주도 성장의 논리다. 오늘날 저성장은 소득이 낮아서 소비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문재인 정부는 믿고 있다. 소비성향이 높은 저소득층의 소득이 낮다는 것이다.

소득주도 성장을 위한 정책은 저소득층의 소득을 올리는 것, 따라서 재분배 정책 그 이상이 아니다. 재정을 통한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최저임금 인상, 복지확대 등은 저소득층의 소득을 늘리는 정책이다(〈표-1〉 참조). 납품단가 부당인하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도 중소기업이 임금인상 여력을 가질 수 있도록 대기업이 납품단가를 넉넉히 쳐주라는 주문이다. 그러나 소득주도 성장론은 치명적 오류가 내재해 있다

첫째로 소비가 경제의 추진력이라고 보는 문 정권의 시각은 틀렸다. 경제의 추진력은 소비가 아니라 기업투자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경기가 살아나야 소비가 늘어난다. 경제가 침체하면 소비가 줄고 회복단계에 접어들면 소비지출이 증가하는 것이 경기변동의 실상이다. 소비는 경제적 번영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경제를 살리는 건 소비보다 기업투자다. 기업투자가 많아야 경제가 살아나고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 투자를 현재 소비의 직접적인 함수라고 믿는 문재인 정부의 투자관은 너무 단순하다. 현재의 소비가 늘면 소비를 충족하기 위한 투자가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소비에 따른 투자는 먹거리 초코파이 오락기구 가구 가전제품과 같이 당장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소비재생산을 위한 투자일 뿐이다.

소득주도 성장론의 두 번째 치명적인 오류는 현재의 소비와 관련이 없는 투자를 무시해버렸다는 점이다. 신소재 개발, 병원 건설, 암 연구, 가스 · 에너지 개발, 철강산업 개발 등에 대한 투자는 현재의 소비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생산과 직접 관련이 없다. 그런 투자는 현재의 욕구를 충족하기보다 미래 소비를 위한 투자이기에 현재의 소비증가로는 전혀 늘어날 수 없는 투자다. 오히려 현재의 소비를 절약하고 저축이 있어야 가능한 투자라는 걸 직시할 필요가 있다.

소득주도 성장론의 세 번째 오류는 경제 자유의 중요성에 대한 무지다. 기업들의 투자가 활성화되려면 정부지출 조세 부담을 줄이고 노동시장, 상품시장, 기업부문의 규제를 없애야 한다. 경제 자유라야 기업가정신이 활성화되어 창의와 혁신 그리고 경제성장도 가능하다. 의료서비스 관련 규제가 없어야 병원도 건설할 수 있고, 의학 의료기술도 발전할 수 있다. 아이패드, 인터넷의 발견, 고든 무어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스티브 잡스 개인용 컴퓨터 등은 자유의 토양에서 활성화된 기업가정신의 산물이다.

기업들이 투자를 못 한 것은 투자할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소비 수요가 부족했기 때문도 아니다. 출자규제라는 이유로 자본투자를 가로막고 중소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대기업으로 커나가는 길을 막고, 의료는 공공재라며 의료산업을 규제하고, 과밀억제라는 이유로 수도권엔 공장도 못 짓게 하는 등 첩첩이 누적된 각종 규제 때문이었다. 기업들이 투자할 수 있으려면 규제를 풀어야 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규제개혁의 목소리가 거의 없다.

최저임금 인상의 문제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도입한 최저임금 인상도 문제다. 임금이 생산성보다 크게 오르면 기업의 부담이다. 투자가 줄어들거나 기업이 해외로 탈출한다. 그 결과는 실업의 증가다. 따라서 임금 상승이 소득불평등의 개선이 아니다. 임금이 오르면 이미 고용된 노동자의 몫은 증가하여 국민소득 중 임금의 비중인 노동소득분배율이 증가할 수 있다. 그러나 신규고용이 저조해 계층별 소득분배가 악화된다.

이런 현상은 노무현 정부 시절이 잘 입증한다. 당시 노동소득분배율이 크게 높아졌지만, 지니계수가 말해주듯이 계층별 소득분배가 크게 악화됐다. 5년간 평균임금 상승률이 예년보다 높은 6.6%였다. 이미 고용된 노동자의 몫은 크게 증가했지만 신규고용이 저조한 탓이었다. 반면에 2008년 금융위기 여파와 2011년 유럽재정 위기에도 불구하고 2010년부터 2016년 사이 노동소득분배율이 증가하면서 계층별 소득분배도 개선(지니계수 하락)됐다. 그 기간 임금상승률이 연평균 3.4%를 유지해 안정적이었다. 그래서 고용이 늘면서 노동소득분배율도 증가하고 계층별 소득분배도 개선(지니계수 하락)되었다.  

비정규직 제로 정책의 헌법 위반

계약의 자유, 기업의 자유는 헌법이 보호하는 가치다. 누구나 다양한 고용 형태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공존하는 것은 계약자유의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비정규직 제로 정책은 계약자유의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정책이다. 왜냐하면 계약 당사자들이 자유의사로 체결한 계약관계를 무효로 할 뿐만 아니라 강제로 새로운 계약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제로 정책은 기업들이 계약의 자유를 남용한 나머지 생겨난 비정규직의 과다한 남용 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과도한 차별을 억제한다는 취지로 이해될 수는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심각하다. 정규직 근로자를 해고하기 어렵게 만든 노동시장의 경직성 때문에 기업들은 불가피하게 비정규직 고용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강력한 노동조합에 의한 노임의 인상도 비정규직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인상된 노임으로 생겨난 손실을 피하기 위한 방책이 값싼 비정규직 고용이다.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몰아내는 것,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노임 격차를 야기하는 것도 노동조합의 권력 때문이다. 계약자유의 남용과 비정규직 남용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노동시장 유연성 확립과 노동조합 권력의 제한이다.

개인의 삶 책임지는 국가의 위험성

문재인 정부가 ‘정의로운 대한민국 만들기’의 기치를 내세우고 개인의 삶을 책임지는 정부가 되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세웠다. 핵심 내용은 노후복지, 청소년복지, 공공주택, 보육, 교육 등, 복지확대다. 개인들의 행복증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복지확대야말로 정의로운 국가의 과제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국정목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재인 정부는 정의로운 대한민국이 아니라 오히려 불의(不義)가 판치는 대한민국을 만들 우려가 있다. 시민들의 삶을 책임지려면 우선 돈이 문제다. 1만 원 최저임금 실현, 공공주택 아동수당 등만 고려한다고 해도 77조 원 이상이 든다고 한다. 더불어 잘사는 경제 등, 다른 국정목표의 예산까지 합하면 향후 5년 동안 소요 예산이 178조 원이라는 게 여당의 공식 발표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돈을 마련하려면 국가는 불가피하게 ‘강제로’ 즉 조세의 형태로 누군가의 부(富)를 보상 없이 수용해야 한다. 이는 국가가 특정 계층의 행복증진을 위해서 다른 계층의 재산을 빼앗아야 한다는 뜻이다

남의 부를 빼앗는 약탈국가를 정의로운 국가라고 큰소리치는 건 정의라는 신성한 말의 오 · 남용이다. 그런 정부야말로 불의의 정부다. 불의의 정부를 가진 사회의 말로(末路)는 역사적 경험이 또렷하게 보여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 경제의 미래로 불렸던 브라질은 흥청망청 복지파티를 벌이다가 추락했다. 남미 좌파벨트의 리더 격이던 베네수엘라 경제도 정의롭지 못한 정부 때문에 처절하게 망했다.

진정으로 정의로운 정부란 오로지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과제만을 수행하는 작은 정부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 작은 정부만이 빈곤, 실업,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고 번영할 수 있는 유일한 정부다.

개인의 삶을 국가가 책임지기 때문에 개인 스스로와 가족에 대한 책임윤리가 훼손된다. 독립심을 갉아먹고, 복지 의존심만 강화하며, 절약 인내심 기업가정신 등, 개인과 사회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덕목도 위축시킨다. 개인의 삶을 정부가 책임질 수 있으려면 정부는 개인들에게 어떤 삶이 좋고 나쁜가를 알고 있어야 하고 또 정부는 사심 없이 시민들의 행복에 헌신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시민들 각자의 좋은 삶에 대한 지식을 갖는 건 불가능하고 정부가 이타적이라는 것도 옳지 않다. 그래서 시민들의 삶을 정부가 책임지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건 아는 척한다는 의미에서 지적 자만이요, 도덕적인 척한다는 의미에서 위선이다.
정부 책임론은 시민들은 스스로의 삶은 물론 자신의 가족을 책임질 지적 능력이 없고 이기적이고 반(反)사회적이기 때문에 정부의 규제가 없이는 혼란에 빠진다는 논리다. 시장경제는 구조적으로 악(惡)이라는 게 국정철학의 인식이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개인의 자유와 재산이 효과적으로 보호되기만 하면 시장경제는 혼자서 실업 빈곤 양극화 저성장을 깔끔하게 해결하는 자생적 질서라는 걸 망각한 결과다. 시장에 거스르는 국정과제를 밀고 갈 경우, 한국경제가 남미 상황으로 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이 두려운 이유다.

사회주의의 치명적 자만

정부는 경제에 대한 계획과 규제를 통해서 고용, 성장, 분배 등과 같은 목적을 달성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 사회주의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치명적 자만이다.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실패한 이유가 지식의 문제 때문이었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물론 어느 누구도 복잡계에 속하는 시장참여자들의 행동을 통제할 충분한 지혜나 지식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간 정신은 스스로를 완전히 알 수 없다. 하물며 수천만의 정신들이 상호작용을 미리 알고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대기업의 진입으로 중소기업의 경영이 어렵다는 이유로 그 진입을 막아서 중소기업을 보호하려는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를 보자. 이 제도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품목과 업종이 어떤 기업 규모에 적합한가를 알아야 한다. 적합성, 즉 효율적인 공급방법을 알 수 있으려면 소비자들이 원하는 상품 종류 · 품질, 디자인, 상품 수요량, 생산기술, 필요한 노동의 양과 질과 생산성, 필요자본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 관료, 학자 등 누구도 그런 지식을 전부 습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이유는 그런 지식은 각처에 분산되어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암묵적 지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지식의 문제 때문에 어떤 품목과 업종이 중소기업에 적합한가를 정하기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적합성 여부의 판단은 시장에 맡기는 것이 온당하다. 시장에서 기업들은 무엇을 어떤 규모의 공장으로 생산하는 게 적합한가를 부단히 테스트한다. 테스트 결과는 가격을 경유하여 이윤으로 표현된다. 적 · 부적합성은 시장을 통해서 비로소 알려진다.

오늘날 대기업과 중소기업 품목과 업종은 그런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들의 분업적 역할은 시장의 자율규제 메커니즘의 산물이다. 기업들이 제각각 소비자들에게 값싸고 질 좋은 상품을 찾아내려는 발견의 과정에서 최적기업 규모가 발견된다.

시장과정에서 생겨난 중소기업 업종과 품목을 보호하고자 대기업의 진입을 경제민주화법을 통해서 금지하려고 한다. 대기업은 자금력을 포함하는 경쟁력이 중소기업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그래서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경쟁은 불공정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 대기업의 진입을 막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경쟁력은 경쟁을 통해서만이 향상된다는 원리를 무시하는 논리다. 경쟁을 제한하여 대기업으로부터 중소기업들을 보호하면 중소기업들이 현재에 안주하려는 성향이 강화된다. 그 결과 소비자들의 선호와 긴급한 욕구, 이들의 변화, 가장 효율적인 생산방법 등을 끊임없이 선별해가는 경쟁의 발견 과정이 훼손된다. 중소기업 스스로 기술개발이나 품질향상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품질개선과 원가절감 등 혁신하려는 동기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장기적으로 중소기업의 생산성과 경쟁력이 떨어진다. 중소기업 매출과 영업이익률이 낮아졌다는 조사결과가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중소기업의 임금은 낮을 수밖에 없다. 대기업과의 임금 격차를 심화시킨 것도 보조금과 과보호로 넘쳐나는 중소기업 지원제도 때문이다.

경쟁력과 생산성 향상은 경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보호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또한 소비자들은 고품질의 제품을 공급받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소비자 이익의 감소는 그래서 필연적이다. 지식의 문제는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하도급법, 기업지배구조 등 경제민주화 명분으로 도입된 모든 규제와 계획은 실패의 운명이 예정되어 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시장 결과를 개선하기보다는 나쁘게 만들고, 심지어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컴퓨터나 인공지능이 제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그들을 통해 시장을 통제하고 규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처에 분산된 지식은 물론 각처에서 새로이 생겨나는 지식의 이용을 경제주체들에게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시장경제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시장은 어떤 정신도 전부 수집 불가능한 지식을 이용할 수 있게 한다. 시장은 사람들이 가진 상품, 기술, 생산성 선호들에 관한 의견, 환경변화에 대한 생각들을 서로 주고받는 거대한 소통체계다. 그래서 시장은 정부보다 현명하다.


3. 불교 패러다임이 대안인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실업, 저성장, 빈곤 등 경제문제는 자본주의 탓이라는 문재인 정부의 진단부터가 틀렸다. 오히려 대기업은 억제하고 중소상공인, 노동자는 보호하는 내용의 규제가 첩첩이 쌓인 탓이다.
이런 규제에다가 소득주도 성장의 명분으로 도입하는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복지확대, 공공부문 일자리 확충 등은 경제를 번영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업, 빈곤, 불평등, 저성장 문제를 심화시킬 뿐이다.

그러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불교적 패러다임이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유감스럽게도 불교 패러다임도 한국경제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진단과 처방을 제시하지 못한다.

불교 패러다임과 국가의 과제

불교의 기본윤리는 배려, 연대감, 우정을 중시한다. 그런 가치와 나란히 개인의 자유와 이기심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부지런히 능력껏 재물을 버는 것은 용납된다. 돈놀이도 허용된다. 그러나 탐욕은 금물이다. 양적 발전(경제성장)보다 삶의 질을, 경쟁보다 협력을 중시하는 것이 불교윤리다. 그래서 극단적인 불교윤리학에서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키워드를 즐겨 사용하기도 한다.

불교철학은 인간의 끝없는 이기적 욕망에 뿌리를 내린 것이 자본주의라고 믿는다. 큰 도시와 큰 기업은 경제를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고갈시키고 인간을 물질주의로 만든다고 쓰고 있다. 작은 인간에 맞는 작은 기술이 아름답다고도 한다.

오늘날 실업, 빈곤, 불평등, 저성장, 불황, 경제위기의 원인도 탐욕에 근거한 자본가의 몸집 부풀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서로 보듬고 기쁨을 함께하고 슬픔을 나누는 의리와 공동체 정신도 파괴했다고 주장한다. 경제성장의 결실은 부자만 차지할 뿐,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배려와 유대감 우정의 가치를 함양하고 탐욕을 억제하기 위해서 불교철학자들은 도덕교육을 중시한다. 도덕교육을 넘어서 국가의 재분배 정책, 탐욕을 억제하기 위한 규제 등, 제도화도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문 정권의 국정철학과 불교의 정치 · 경제학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과 불교 패러다임은 시장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경제를 정부가 계획하지 않으면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 대량실업, 비정규직의 확대, 경제력 집중, 저성장, 불황, 위기 등을 야기한다는 것이 문재인 정부의 시장관이다.

문재인 정부에게 시장경제는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세상이다. 시장은 구조적 악(惡)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해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 게 문재인 정권의 인식이다. 따라서 시장경제의 문제를 경제적 권력의 문제로 보고 있다. 분배의 불평등에서부터 실업 불황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제문제가 생겨나는 이유가 경제적 권력의 불평등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정치 · 경제학에서는 인간의 탐욕을 문제시하고 있다. 실업, 빈곤, 불평등, 저성장, 불황, 경제위기의 원인을 탐욕에서 찾고 있다. 특히 대기업, 대자본가의 탐욕이 문제라고 여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불교윤리는 중소기업을 중시한다, 그래서 불교윤리는 대기업은 규제하고 중소기업은 보호하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 기조를 정당화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시각이 문재인 정부와 불교철학이 다르다고 해도 그들이 추구하는 국정목표와 정책은 유사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더불어 잘사는 경제, 개인의 삶을 책임지는 국가라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목표에 대하여 불교철학은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배려와 유대감의 도덕을 법적으로 실현할 경우, 그런 도덕의 정책적 목표는 더불어 잘사는 경제, 개인의 삶을 책임지는 국가로 표현해도 무방하다. 경쟁보다는 협력을 중시한다는 불교윤리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경제를 만들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과 일치된다.

불교 패러다임의 정치 · 경제학적 문제

불교의 정치 · 경제학은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다. 두 가지만을 지적한다면 하나는 탐욕을 취급하는 방법과 관련된 오류다. 두 번째는 윤리적 측면에서의 오류다.

배려의 정치 · 경제학: 배려는 애덤 스미스의 선행 도덕이다. 두터운 호의와 우정, 애착심의 인간관계다. 이런 도덕적 가치는 매우 소중하다. 현실의 일상생활에서 그런 도덕은 다양한 정도의 인간행동으로 표현된다. 배려는 가족, 친구 사이에서처럼 견고하거나 회사의 사장과 직원 사이처럼 비교적 느슨한 경우도 있다. 극단적인 경우 제3자처럼 그것이 전혀 없는 경우도 있다.

주목할 것은 배려와 호의의 강도는 사회의 규모에 반비례한다는 점이다. 가족들, 친구들, 동업자, 종교 교우 등과 같은 공동체적 집단 내에서처럼, 서로의 처지를 잘 알 수 있고 잘 알고 있는 소규모 사회에서는 배려심이 매우 크다. 이 집단을 넘어서면 그 강도는 점차 줄어들어, 마침내는 서로 배려와 호의의 나눔은 고사하고 전혀 낯모르는, 그래서 그 강도가 제로가 된다.

불교철학자들은 자유주의에서는 탐욕의 논리만 지배하고 배려의 윤리가 소멸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비판은 틀렸다. 자유사회에서 배려의 도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가족, 친구들, 종교 교우 등 소규모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거대한 시장사회는 소규모의 공동체만큼 그렇게 견고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배려의 윤리가 살아 있다.

성실성과 호의를 가지고 고객들을 대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제품, 파손된 제품을 지체하지 않고 교환해주고 또 판매한 후에도 일정 기간 무료로 사후관리도 해준다. 백화점은 고객들을 배려하기 위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업들은 소비자들의 선호를 최대한 배려한다.

탐욕의 문제: 불교 사회철학은 인간의 탐욕을 비판한다. 이것이 환경위기, 경제위기 등을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실천적 원칙은 탐욕 억제를 위한 정치적 개념이다. 인간의 탐욕 또는 이기심이 무제한적이면 그것은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특히 대기업의 탐욕을 심각하게 여긴다. 탐욕의 반대는 타인에 대한 배려다

그런데 만약 탐욕을 억제하고 배려의 도덕을 실현할 목적으로 정부가 예를 들어 거래 관계에 개입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예를 들면 대기업의 탐욕을 막고 납품업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하도급법에 의해서 강제로 납품가격을 인상하면 부품 조달을 외국에 의존한다. 이는 하도급 분업 · 시장의 축소로 이어져 중소기업에도 매우 불리하다.

주목할 것은 자생적으로 형성되는 하도급 시장에서 자유로운 시장거래는 다른 모든 상품시장과 마찬가지로 부품 거래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 하도급 시장에는 대기업의 착취 또는 무제한의 탐욕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가 많다.

예를 들면 2002~2011년 대기업 매출액이 2.78배, 협력업체 매출액은 3.08배 증가했다. 대기업 성장으로 인하여 협력업체의 매출이 증가하고 투자도 확대되었다. 이런 예들은 자본주의에서 탐욕이 억제되고 결과적으로 상생이 가능한 배려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협력 vs. 경쟁: 불교윤리는 경쟁 대신에 협력을 선호한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에서 ‘사람 중심의 경제’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것도 경쟁을 대신하는 협력의 다른 뜻이다. 자본주의라고 해서 협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분업이야말로 협력의 다른 뜻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경쟁 없는 협력이 아니라 경쟁 속의 협력이다. 경쟁 없는 협력은 목표가 무엇이든 협력자들이 공동으로 달성할 목표를 전제로 한다. 경쟁이 없는 협력체제의 전형이 동유럽과 옛 소련 사회주의의 계획경제다.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공동으로 추구할 목표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경쟁을 기반으로 하는 시장에는 시장참여자들이 공동으로 협력하여 추구할 인간 중심 목표 또는 다른 어떤 공동의 목표가 없다. 개개인들이 제각각 추구할 목표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시장경제를 ‘자생적 질서’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들은 자유로이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지식을 동원한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경쟁을 싫어한다. 그러나 문명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무의도적으로 생성된 것이 문화이고 이에 속하는 것이 경쟁이다. 시장을 구성하는 경쟁은 생산적인 분업과 협력방식을 찾아내고 또한 충족해야 할 긴급한 욕구 그리고 이를 충족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는 절차다. 경쟁이야말로 새로운 지식의 발견을 유도하여 빈곤과 질병, 수명연장 등에서 인간을 탈출시킨 유일한 문명화된 제도임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한 협력 목표 또는 인간 중심적 목표가 없다고 해도 시장은 결과적으로 대단히 인간 중심적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간을 중심으로 내걸었던 체제들이야말로 가장 비인간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대표적인 예가 사회주의 체제다. 오늘날 베네수엘라, 1970~1980년대의 유럽의 복지국가도 한통속이다. 사람 중심의 경제라는 구호 또는 경쟁 없는 협력은 자생적 질서로서 시장경제의 역설에 대한 이해 부족이거나 우리나라에 팽배한 반기업 정서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심히 우려스럽다.

불교윤리와 석기시대의 정신: 불교 사회철학의 가치들은 욕구의 다양화에서 문명의 핵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특성의 순수성에서 그것을 보고 있다. 그러나 순수성은 이상주의적 가치일 뿐이다. 이 가치가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소규모 사회이다. 작은 것을 아름답다고 보는 태도는 인류가 장구한 기간 동안 살아온 원시사회에서 습득한 정신이다.

연대와 유대감을 기반으로 형성된 사회질서의 전형적인 것이 원시 부족사회라는 것은 인류학자가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당시 호모 사피엔스들은 소규모의 그룹을 지어 수렵과 채취를 하면서 삶을 영위했다. 부족국가를 형성하여 정착 생활을 하던 시기도 그 같은 도덕이 지배했을 터이다. 진화심리학들은 그런 가치를 ‘석기시대의 정신(stone age mind)’이라고 말한다.

문화적 진화는 그 같은 원시 부족사회를 극복하고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익명의 사회를 탄생시켰다. 이 같은 사회는 시장경제와 광범위한 개인적 자유를 가진 사회다. 거대한 열린 사회의 도덕은 특정의 행동을 금지하는 추상적인 행동규칙이다. 이것은 약속이행, 재산의 존중, 개인적 책임과 같은 도덕이다. 이것은 연대나 유대와 같은 공동체 도덕과는 성격상 전적으로 상이하다.

주목할 것은 사회의 규모에 따라 사회의 기초가 되는 도덕도 다르다는 점이다. 연대감이나 이타심 도덕 같은 소규모 사회의 공동체 도덕을 거대한 열린 사회에 적용할 수 없다.


4. 번영의 길: 자유주의와 국가의 과제

문재인 정권의 국정철학과 불교의 정치 · 경제학은 자본주의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시장은 구조적 악(惡)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해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 게 문재인 정권의 인식이다. 불교철학은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탐욕을 비판한다. 탐욕이 빈곤 실업 위기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국가가 탐욕적 행동을 규제하지 않으면 저성장 불황 위기 등을 야기한다는 것이 불교철학의 인식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옳지 않다.

시장경제와 자생적 질서

시장경제는 국가의 개입이 없이도 혼란이 아니라 오히려 균형이 잡히는 질서가 자생적으로 형성된다. 시장은 자율 시스템이기 때문에 국가의 규제와 계획이 불필요하다. 경제적 자유만 보장되면 시장경제는 빈곤, 성장, 고용 등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자생적 질서다.

정부가 간섭하면 오히려 경제문제의 해결은 고사하고 더욱 악화된다. 오늘날 실업, 빈곤, 저성장의 위기는 개인과 기업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방해하는 첩첩이 쌓인 규제 때문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광범위한 경제적 자유가 허용될 경우 시장은 어떻게 자생적으로 질서가 가능한가?

첫째로 모든 인간은 거래 상대방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들을 거래 상대방과 계약을 통해서 서로 자율적으로 조정한다. 둘째로 시장은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그들의 행동을 통제한다. 잘못된 행동은 가격을 통하여 손해의 형태로 가차 없이 처벌하고, 잘하는 행동은 이윤의 형태로 관대하게 보상한다. 능력 없는 기업은 도태되고 저질 상품을 비싸게 판매하여 소비자를 착취하는 기업은 도태된다. 소비자들의 욕구를 저렴한 방식으로 충족하는 기업은 번창한다. 중소상공인을 착취하는 기업도 오래가지 못하고 도태되고 만다.

자율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기업들의 경쟁이다. 이는 소비자들에게 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서비스와 상품을 발견하고 이들을 저렴하게 생산 · 공급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경쟁을 통해서 자생적으로 빈곤 실업 저성장 위기 등의 문제를 해결한다. 하도급 제도, 대형백화점 등 경쟁을 통해 생겨나서 번창하는 것들은 사회적으로 유익하기 때문에 등장하고 번창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으로 쓸모가 없으면 도태되기 마련이다.

개인들이나 기업들이 전체사회를 위해 행동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결과적으로 빈곤 실업 저성장의 문제를 해결한다. 시장이 자율조정 시스템으로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개인이나 기업이 자유분방하게 활동할 경제적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탐욕을 견제하는 것이 시장경제

불교철학에서 가장 우려하는 것이 탐욕이다. 그 탐욕을 국가의 직접적인 규제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한다. 자유주의자들도 인간의 탐욕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다. 타인들을 해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 탐욕을 다스리고 규제하는 것을 시장에 맡긴다.

시장에는 탐욕의 문제를 해결하는 세 가지 장치가 있다. 첫째로 예의범절, 직업윤리, 인격 · 소유의 존중, 약속이행, 책임윤리 등 수많은 행동규칙을 통해서 탐욕이 억제된다. 시장 바닥에는 그런 종류의 행동규칙들이 겹겹이 두텁게 깔려 있다. 그런 행동규칙들 중에는 정의감, 법 감정과 같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암묵적 초의식적 행동규칙, 말로 표현되어 있는 행동규칙들, 그리고 소유권법, 계약법, 책임법, 형법처럼 성문화된 법 규칙들이 있다.

탐욕을 억제하는 두 번째는 행동규칙의 틀 내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이다. 예를 들면 나쁜 상품을 비싼 값으로 파는 기업은 시장에서 도태된다. 왜냐하면 좋은 상품을 값싸게 공급하여 이윤을 추구하려는 경쟁기업이 당장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쟁이야말로 인간의 탐욕을 가장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메커니즘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절약, 자기절제, 신중과 같은 행동규칙을 통해서 탐욕이 억제된다.

이들 세 가지가 이기심과 탐욕을 통제하는 자유주의 원리이다. 그들 때문에 시장은 스스로 질서가 형성되고 그 결과가 풍요로운 번영이다.

자유사회와 국가의 과제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사회에서 국가가 할 일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첫째로 외적으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과제가 있다. 이는 국토방위 안전보장이다.

둘째로 시장에서 사람들이 자유로이 행동하고 자생적으로 질서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최소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들 중에서 국가가 해야 할 중요한 것은 건강 · 인격침해 금지, 폭력 · 사기 금지, 재산보호, 계약집행의 과제다.

셋째로 공동체의 공동 욕구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도량형 토지등기, 통계공급 등이다. 이는 특수한 이익단체의 이익이 아니다. 이 밖에도 민자유치를 통한 항만, 도로 등의 공급을 주선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과 불교철학이 강조하는 재분배 · 고용 · 혁신 · 성장 · 복지정책 · 창조혁신 같은 산업정책은 국가의 과제가 아니다.

그러나 극빈자를 위한 국가의 복지정책은 필요하다. 시장은 복지의 최대의 산실이지만 빈곤을 완전히 없애주지는 못한다. 빈곤자를 종교단체나 자선단체에 맡길 수도 없다. 기부문화가 발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 정책이 없으면 송파구 세 모녀처럼 자살하거나 굶어 죽을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많다. 가난의 실상을 보면 참으로 가슴 아프고 괴롭다.


5. 맺는말

촛불집회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은 사회주의다. 최저임금 대폭 인상, 공공일자리 확충,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복지확대, 대기업은 규제하고 중소기업은 보호하는 경제민주화 그리고 소득주도 성장정책을 통해서 실업, 분배개선, 성장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틀렸다. 오히려 경제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시장은 구조적 악(惡)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해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재인 정부의 믿음부터가 잘못이다.

불교를 진보적으로 해석하는 정치 ·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의 탐욕을 비판한다. 탐욕이 빈곤, 실업 위기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국가가 탐욕적 행동을 규제하지 않으면 저성장, 불황 위기 등을 야기한다는 것이 불교철학의 인식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옳지 않다. 예의범절, 직업윤리, 인격 · 소유의 존중, 약속이행, 책임윤리 등 수많은 행동규칙을 통해서 탐욕이 억제된다. 경쟁도 탐욕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자유사회에서 국가의 역할은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고 극빈자에 대한 정부의 호구 대책을 세우는 일뿐이다. 국가는 모든 규제를 없애고 경제적 자유를 확대하면 시장은 실업, 저성장, 빈곤, 양극화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다. 시장은 그래서 ‘자생적 질서’라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야말로 번영의 길이다. ■


민경국 
강원대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문리대,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경제학과 졸업(석사 · 박사). 강원대 교수,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 한국제도경제학회 회장 등 역임. 주요 저서로 《자유주의의 도덕관과 법사상》 《자유의 길: 하이에크의 자유주의 사상연구》 《자유주의와 시장경제》 등과 역서로 하이에크의 《감각적 질서》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공역) 등이 있다. 현재 자유주의경제철학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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