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촛불 이후, 한국사회와 불교

1. 들어가며

일반적으로 이성적인 존재로서 인간이 추구하는 올바른 가치를 정의라고 한다. 정의(正義)의 한자적 개념을 살펴보면, ‘정 시야(正 是也)’라는 것이 《설문해자》의 첫 번째 언급이다. 또 ‘종지(從止)’라고 하며 ‘지선(至善)’에 ‘지(止)’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의(義)에 대해서는 ‘기지위의야(己之威儀也)’라고 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정의를 사회적 공공성으로서 지극한 선[至善]을 의기양양하게 지니고 있는 모습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의미들을 공평하게 나눈다는 의미의 ‘justice’의 번역어로 채택한 셈이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통해 만들어지는 사회질서에서는 이를 구성하는 다양한 윤리적 문제들과 직면하게 마련이다. 이를 설명하는 데에 지극한 선에 머무른다는 말보다 더 어울리는 말은 없을 것이다. 《법구경》의 〈불타품〉에 나오는 칠불통계(七佛通誡)에서 이러한 불교의 정의관의 단초가 그대로 관통되며 나타나고 있다.

諸惡莫作 모든 악을 짓지 말고
衆善奉行 뭇 선을 받들어 행하며
自淨其意 스스로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
是諸佛敎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를 통해 살펴보면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至善]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불교정의론의 기초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불교적 정의의 실천방안이자 실천윤리가 육바라밀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2,000년대 초반부터 얼마 전까지 서점가에서 열풍을 지속하며 불황을 모르는 책 중 하나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였다. 철학 관련 책이 200쇄를 넘어 출판되고 있다는 것은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상 ‘정의’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사회에서 ‘정의’를 주제로 한 서적이 200쇄를 넘었다는 것은 정말 흥미로운 사실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열풍에 대해 혹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척되면서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정의’에 대한 열망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는 점을 들기도 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부조리와 부정의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정의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높여주고 있다는 평가도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그의 강의가 하버드대에서 가장 잘나가는 강의였다며, 유명한 강의이기 때문에 인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샌델의 인기는 그를 한국에 초청하도록 만들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농성장을 비롯해 많은 대학에서 특강도 했다. 심지어 야구장에서 시구를 하기도 했다. 야구장에 초청받은 철학자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장면들은 한국의 천민자본주의와 결합한 상업주의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렇다면 2016~17년의 촛불시민의 민주주의 혁명은 이러한 《정의란 무엇인가》의 열풍에 영향받은 바 크다고도 주장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 이러한 주장을 공개적으로 하는 이가 없었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그러나 주목되는 것은 태극기를 온몸에 감고 백악관에서는 무엇 하고 있느냐며 미국의 관심과 지지를 바라는 보수 친박들의 집회에서는 태극기와 성조기의 비중이 똑같이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에 시선을 멈추게 된다. 존 롤스나 샌델의 정의론이라기보다는 친박들의 기호에 부합하는 내용으로서의 ‘정의로운’ 미국을 상징하는 성조기가 드러내는 아이러니는 한국에서 정의에 대한 관념과 이해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득, 마치 한국 근대사의 몇몇 장면들에서(부마민주항쟁, 5 · 18 광주민주화운동 등) 미국의 역할이 어떠했느냐에 대한 논쟁을 떠올리게 된다. 5 · 18에서 수백 명의 광주 민중들이 피를 흘리고 난 뒤에야 정의의 이름과 얼굴을 가진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앞세우는 유력한 무기가 ‘정의’라는 가면이었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뚜렷하게 확인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상식적인 국가에 대한 염원을 가진 260만의 민중들이 끌어내린 부패, 타락한 권력의 뒤안길에서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내세우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성조기와 정의의 미국에 대한 지지의 확신일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친박과 한미동맹을 통해 모여드는 군중의 뒤에는 정의라는 가면을 쓴 신자유주의와 제3세계 국가로서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대내외적 관계가 뚜렷이 투영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특히 샌델의 논의는 롤스의 《정의론》에 대해 가장 체계적인 비판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공화주의에 근거한 ‘자유주의 비판’이며, 보수적 공동체주의를 통해 사회적 부정의를 치유하자는 논리의 전형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오히려 이러한 정의의 박근혜를 비판하자고 해야 되는 것 아닐까? 이유가 무엇이든 한국사회에서 ‘정의’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높아진 것은 흥미로운 분석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2. 현대사회의 정당성 위기와 롤스의 진단

현대사회의 사회적 삶은 항상 정당성의 문제들과 마주한다. ‘국가권력’이나 ‘법’ 또는 다양한 차원에서 만나는 ‘규범’이나 ‘규칙’들은 일상생활의 다양한 장면에서 만나게 되는 것들이다. 사실상 ‘타인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웨버(Weber)가 언급했던 권력의 논리가 작동할 수 있는 곳에서는 항상 정당성의 문제가 제기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성에 대해 도전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라는 사회적 형식과 제도라는 틀을 운영원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를 이루고 사는 곳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규범, 규칙이 존재한다. 전 구성원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았던 전근대적인 사회의 규범에서는 권리의 형태가 없는 강제적 규범의 상황이었다. 이에 반해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의 사상과 자유에 기초한 가치 선택의 자유와 같은 인간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기본권은 민주주의라는 사회를 이루는 근본적인 토대이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나 계약에 근거해서 이루어진 것이 근대 국가의 등장이었다. 그러므로 사회적 구성원들의 합의와 동의에 기초해서 권력이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은 민주공화국으로서 헌법적 가치의 가장 우선적인 가치이자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의의 과정에서 사회적인 합의와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 지지의 철회, 저항이 시작된다.

국가권력이 합법적인 폭력의 수단으로서 공권력을 독점하고 있을지라도 정당성이 취약하면 그 정권은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합법성을 부여하는 방식이자 정당성을 제공하는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서 또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선거라는 제도적 형식을 빌리게 된다. 여기서 수많은 집단과 세력들의 구축을 위한 주장과 선언들의 각축장이 전개된다. 다양한 가치와 주장들은 다양하게 표출되고 자신들 논리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한 경쟁이 선거의 과정과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양한 가치를 둘러싼 갈등의 문제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회피하기 어려운 모순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치갈등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제시되는 논리가 상대주의적 태도의 견지 또는 다원주의적 관점에 대한 존중 정도이다. 계몽주의 이래로 진행되어 온 이성적 개인들의 다양한 주장의 합리적 행위 이면에는 이러한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통한 토론과 공적인 공동체적인 합의를 도출해 내기 위한 노력이 전제되어 있었다. 이것이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켜내는 민주주의의 핵심원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동체의 합의가 정당성의 원천이라는 것이 자유주의적 관점의 핵심 주장들이었다.

결국 자유주의의 고유한 딜레마인 가치갈등과 충돌은 극복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고 해결하기 위한 방식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 실현할 수 있으며, 민주적 절차에 따른 ‘다수결의 원리’를 통해 합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다수결의 원리를 실현할 수 있는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당선된 입법자들이 대중을 대표하여 의견을 수렴하고 정책을 만들고 법안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적 다수가 합의하여 만들어진 내용에 대해서는 ‘그 내용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이루어진 공적인 합의이기 때문에 사회 전체가 이에 따라야 한다는 ‘절차적 정의’의 실현이 바로 민주주의의 핵심원리라는 것이다.

롤스는 이러한 절차적 정의의 실현을 통해 다양한 주장들의 각축장인 가치갈등과 같은 다원주의의 딜레마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도달한 최후의 합의점이다. 물론 롤스는 이러한 절차만 제대로 지켜져도 사회적 합의는 이루어질 것이라고 본다. 이를 위해 제시하는 것이 바로 ‘자유 우선의 원칙’과 ‘평등의 원칙’을 통한 자유주의적 평등주의이다. ‘절차가 정의다’라는 주장은 ‘이것이 옳다’가 진리인지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옳다’라는 것에 합의하자는 논리이다. 이것이 《정의론》에서 주장하는 핵심 내용이다. 그러나 이런 ‘절차적 정의’가 갖는 설득력에 대한 비판의 여지가 있음은 분명하다. 서로의 상대성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궁극적으로 합의한 ‘근본적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롤스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3. 사회적 합의와 자유주의의 딜레마

롤스의 《정의론》은 1971년에 발간된 이후 28개국 이상에서 번역되었다. 출간된 지 10여 년 만에 롤스와 관련한 글이 2,500개나 발표될 정도로 그의 영향력과 그에 대한 관심은 사실상 《정의론》이 고전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느낌까지 들게 한다. 결국 롤스의 정의론에 따를 경우, 사회적인 가치나 갈등이 나타났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민주적 절차에 따른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합의에 이르는 길이 있을 뿐이다. 대화와 토론을 거치면서 합의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결국 거수로 결정되는 것이 바로 ‘정의’라는 논리이다.

이렇듯 자신의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보편적 합의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면 자유주의적 딜레마는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적 삶에서 가치 간의 충돌이 발생하거나 다원주의적 주장들이 상충할 때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만으로 사회적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일상생활에서 보편적으로 마주하는 사람들은 합리적인 상황에서 의견 갈등이 생기면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강력하게 주장하기 마련이다. ‘목소리 높은 사람의 말이 더 먹힌다’는 힘의 논리가 더 귀에 익숙하게 들린다. 이해관계가 걸려 있으면 더 사활을 걸고 주장을 펼친다. 대부분의 토론이 합의와 협력을 이끌어내기보다는 자신들만의 주장을 확인하는 선에서 마무리되는 것을 경험한 적이 많을 것이다. 이는 정당이나 노동, 학계, 시민사회를 막론하고 이러한 갈등상이 보다 일반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롤스가 자유주의의 딜레마를 넘어설 수 있다며 강조하는 절차적 정의의 논리가 맞이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현대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적인 모습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 대중사회는 기본적으로 전체 다수의 직접 참여에 의한 민주주의 실현이 불가능한 대규모 조직사회이다.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실시하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는 많은 문제를 노정하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의 형식들은 기본적으로 대중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 공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주체는 형식적으로는 평등한 시민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대사회 역시 분화와 분업을 통해 발전하고 있으므로 대중의 관심과 주목의 대상도 분화한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결과적으로 심화되어 가는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과 참여 배제는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실현하기 위해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즉, 절차적 과정은 충분히 민주적이지만 만들어진 법은 민주적이지 않은 정책들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결정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절차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 법들이 대량생산되는 현대사회의 위기는 바로 ‘대의제 민주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이다.

또한 현대사회는 고도로 복잡하게 조직된 사회이며 전문화된 사회이다. 전문화된 사회에서는 시민들의 참여와 관심을 통해 어떤 사건의 실체적 내용을 파악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정보습득과 판단에서도 전문화된 역량이 필요하게 된다는 사실을 회피하기는 어렵다. 이는 입법과정에 참여하는 전문직이나 법조인의 수가 이상하리만치 많은 현실과도 부합된다. 이렇듯 대의제 민주주의의 문제가 거꾸로 전문직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필연적 현상인 관료제화이다. 행정관료들이 특정한 분야를 오랫동안 다루면서 만들어진 전문성은 이미 한국 정치의 다양한 과정에서도 뚜렷하게 관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테크노크라트들이 절차적 정의의 과정이나 결정적인 장면에서 의사결정의 영향력을 절차적으로 틀어쥐고 그들의 이해를 실현시키고 있다.

이러한 대의제의 위기는 대중으로 하여금 익명성의 그늘에 숨는 것을 권장한다. 익명적인 현대인들이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속성은 이러한 현대사회의 위기와 관련하여 만들어지는 기질이자 성향이다. 일상의 재생산을 위해 먹고사는 것도 버거운 현실에서 돈도 안 되는 가치나 쟁점에 신경 쓰기 싫다는 소시민적 삶의 방식이 더없는 위안이 되는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회정의나 민주주의는 시대착오적이라는 대중의 냉소는 오늘날 민주주의가 처한 본질적인 문제들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현재 이뤄지고 있는 입법의 과정이 자신의 윤리나 가치관에 배반되고 상충되거나 불만감이 있더라도 다수의 대중은 얼마든지 침묵할 수 있는 것이다.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며 만들어진 법은 충분한 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문제가 있더라도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민주적 시민의식이라고 주장하는 롤스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이 절차적 정의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아무리 문제가 있고 비합리적이더라도, 생명력을 부여받고 대중의 일상을 지배할 수 있는 실체적 힘이 있다는 것이 법 실증주의자들의 태도이다. 결국 악법도 법이므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이러한 법체계에 기초하여 행사되는 통치권과 권력의 정당성에 대해서도 비판하면 안 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적어도 민주적 절차를 거쳐 정부를 장악한 권력은 이미 그 정당성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선거를 통해 선출되지 않는 이상, 그 통치권의 정통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박정희의 유신체제나 전두환의 쿠데타 이후의 체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들 체제도 절차적 정당성을 갖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대중이 새로운 헌법을 통해 기존의 체제를 바꾸기 전까지는 기존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대로라면 민주적인 절차를 거쳤다는 명분으로 진행되는 무수한 사회적인 부조리나 부정의에도 우리는 어떠한 저항이나 반대도 불가능하다. 또 불의한 집단이나 정권이 비민주적이고, 아무리 부패 타락한 정권이라 하더라도 정당하다는 논리로까지 확장된다. 왜냐하면 다수의 합의에 의해 민주주의를 부정하게 될 경우, 그러니까 민주적 절차를 거쳐 민주주의의 원리를 부정하게 되면, 대중은 그러한 원리에도 복종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논리의 강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에 대한 비판은 ‘저항권’을 통해서 충분히 비판할 수 있다.


4. 롤스의 자유주의에 대한 샌델의 비판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공화주의-공동체주의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전제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샌델의 공화주의적 관점은 윤리를 판단함에서 자유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윤리의 상대성을 인정한다. 개인은 자율적으로 윤리를 판단하고 국가와 정치는 되도록 개인들의 도덕적, 윤리적 판단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화주의는 다르다. 모든 공동체는 고유한 윤리적 선이 있으며, 이는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기본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들이다. 조국에 충성하는 것(애국), 다른 구성원에게 책임을 지는 것(연대), 공동체의 의무를 능동적으로 수행하는 것(책임의식) 등이야말로 공화주의가 옹호하는 윤리의 기본적 토대(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2014:308)라는 것이다. 공화주의 내에서 정의란 단지 사회적 계약이나 개인들의 자발적 합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윤리적 선에 기초하고 있어야 하며,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개인들의 선택을 넘어서는 객관적 도덕이 존재해야 하고, 사회는 이런 보편적 도덕의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을 때 강한 연대의식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는 이런 객관적 도덕, 보편적 윤리를 구성원들에게 적극 교육하고 이끌어 나감으로써 시민들의 덕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민들의 덕성이 제대로 갖춰져 있어야만 그들이 주체가 된 민주사회가 공화국의 이상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법은 자유주의자들과 다르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들은 각자 자신의 윤리를 간직한 채 공동으로 합의한 법을 존중하면 삶의 지속성은 보장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샌델은 이런 식의 다원주의를 옹호하지 않는다. 윤리는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좋은 삶’이라는 보편적 지평 속에서 논의되어야 하며, 그에 따른 사회 정책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정의란 올바른 가치측정의 문제(샌델, 2014: 362)이기 때문이다.

롤스가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혜택이 되는 불평등만 정당화’하고 있을 때, 이들 모두는 ‘공리주의’에 대해 정당화될 수 없는 윤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그러나 “자유지상주의는 오늘날 가장 파렴치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이다. 하이예크, 프리드먼, 로버트 노직으로 연결되는 이들 자유주의에서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로크의 소유권적 기본권이다”(샌델, 2014:90)라고 하며, 민주주의 원리로도 소유권의 절대성은 공격할 수 없다고 보는 오늘날의 자유지상주의는 미국 공화당 우익의 철학적 토대라며 비판적인 자세를 취한다. 세금은 단 한 푼도 낼 수 없다는 공화당의 논리나 티파티 운동과 같은 풀뿌리 보수주의의 이념적 토대가 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샌델이 직접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칸트와 롤스와 같은 근대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사회계약론에 대한 비판이다. 롤스의 그 유명한 ‘정의의 두 원리’는 공정한 절차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며, 롤스가 무엇이 도덕적 선인가, 무엇이 정의인가를 논하기에 앞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공정한 절차만 구성된다면 그에 따라오는 합의가 정의의 원칙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롤스가 절차적 과정을 새롭게 함으로써 사회계약론을 현대화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롤스의 입장은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철학을 핵심적으로 대변한다. 자유주의는 도덕적으로 무엇이 옳은가를 논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들 선택의 몫으로 놓아둔다. 대신에 ‘공정한 절차를 통해 다수의 구성원을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시킴으로써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합의된 것에 대한 복종이 시민의 의무라는 것이다. 그러나 샌델에 따르면 공정한 절차를 거쳐서 합의된 내용이 언제나 정의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이며, 또한 공정한 절차를 거쳐 합의했더라도 반드시 윤리적인 것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다. 합의라는 이름으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다른 공동체를 공격하거나 내부의 소수자들을 제거하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절차 그 자체를 통해 사회적 위악을 더 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샌델은 자유주의는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답변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공동체는 무엇이 좋은가를 기꺼이 제기하고, 시민들을 이와 같은 좋은 방향으로 선도하는 것을 통해 성숙해지는 것이지, 윤리적 선에 대한 개인들의 취향을 존중하는 것만으로 사회적 질서와 유대가 구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좋은 삶과 시민적 미덕을 정치를 통해 능동적으로 구성하고, 윤리적 쟁점에 대해 보편적 입장을 만드는 것만이 이런 자유주의의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다.(샌델, 2014:343).

샌델은 자유주의 정치철학에 토대를 둔 미국식 진보주의가 사회의 윤리적 타락에 대해 아무런 제어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위와 같이 주장하고 있다. 물론 샌델의 롤스에 대한 비판 내용이나, 자유지상주의적 관점에 비해 공동체의 공동선에 대한 관심으로 시민적 덕목을 형성할 수 있는 가치를 키워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좋은 삶과 덕목을 과연 ‘정치’를 통해서 능동적으로 구성해 갈 수 있다는 그의 논리가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할까? 샌델의 논리대로라면 나름대로 공공선의 합의를 통한 애국심과 공동체의 민주적 통제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의 윤리적 기준을 사회경제적 재화의 배분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러한 논리가 결과적으로는 한국사회에서는 기득권층의 논리를 대변하는 방향으로 변질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샌델의 논리대로라면 친일 행위나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 사회 곳곳에서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가능해야 한다. 또한, 문어발식 기업확장과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하며 편법증여를 통해 부를 대물림하는 독점 재벌들의 반칙과 특권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샌델이 추상적인 방식으로 제시하는 공동체의 이념과 정의의 기준은 불평등과 차별의 구조화를 통한 양극화가 구조화되어 가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기본적인 복지혜택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소외계층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있을 때야 적용될 수 있는 논리일 뿐이다. 이주노동자와 불법체류자, 대학이나 기업을 망라하여 모든 곳에서 양산되는 비정규직의 문제나 복지의 불균형 문제 등에 대해 샌델의 논리는 아무런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2016년 한국사회의 촛불혁명은 최고 권력의 자리에 있는, 살아 있는 권력을 끌어내렸다. 이는 절차적인 합법성의 가면을 쓰고 ‘가만히 있으라’고 강요하던 사람들과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조차 무시하던 무책임한 관료와 부패 타락한 행정 담당자들이 얼마나 기울어진 넓은 운동장의 축을 부정의한 방식으로 차지하고 있었던가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실례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인가?


5. 민주주의를 위해 민주주의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

합법적인 절차를 빌미로 진행되고 있는 타락한 기득권 세력은 정치권력과 경제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날 수 있다. 불교계도 마찬가지이다. 합법적인 절차를 거쳤다는 것만으로 정당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인가?

존 로크(J. Locke)나 루소(J.J. Rousseau)의 논의에서처럼 대중의 ‘저항권’에 대한 정당성은 권력이 인민의 ‘일반의지’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자신의 이해관계를 실현하려 하거나 여론을 무시하고 인민의 자유를 억압하려 할 때 행사되는, 당연하게 부여되는 권리로 설정되고 있다. 아무리 민주적 원리나 절차적 정의를 통해 만들어진 합의나 결론일지라도 다수의 대중이 윤리적으로, 정치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결정이라면 대중은 이에 대해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문제는 발생한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다수의 합의에 기초하고, 절차적 하자도 지니지 않은 결정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아이러니가 그것이다. 사회계약론자들의 주장에서처럼 민주적 절차를 거쳐 합의된 내용에 기초하여 이뤄진 입법은 인민의 의지를 배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합의에 기초한 권력의 행사이다. 그런데 이렇게 합의된 내용이 윤리적으로 정당하지 못하다면 어쩌겠는가? 그것도 사회적 다수는 그 결정이 윤리적으로 옳다고 하는 반면, 소수자들의 입장에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렇게 절차적 정의가 해결의 답을 제시하지 못할 때 많은 사람은 자신들의 논거를 ‘내용적 정당성’에서 찾는다. 비록 민주적 절차를 거쳐 결정된 내용일지라도 윤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옳지 못하다면 내용적 정당성을 결여한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길이라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군사독재정권이나 명백한 민주주의의 파괴자들에 대해서는 인민의 일반의지를 위배한 권력자들이 자기 이해를 추구하는 행태를 민주주의의 파괴라며 비판하는 것은 수월하다. 쿠데타와 같이 정당성이 없는 권력을 논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절차적 정의를 통한 정당성의 부여 과정이 결여되었다는 논증이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반독재투쟁이라는 선언적인 명제만으로도 대중적인 지지를 획득하는 데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대개의 소수파는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절차적 동의를 거쳐서 이뤄진 다수자의 결정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를 부정한다는 논리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이 윤리적으로 선한 것이기 때문에 다수자들로 하여금 이를 수용하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형식적 차원에서 고려한다면, 민주주의적 원리에 위배된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결과적으로 다수결의 원리를 거부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 발목을 잡는 것이다.

즉, 소수파들의 저항권에 대해, ‘민주주의를 위해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소수파가 이렇게 민주주의적 절차를 거부하게 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자신이 권력을 잡았을 때, 과거에 권력을 잡은 이들이 마찬가지로 민주적 절차에 따른 합의를 거부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의 권력이 그와 같은 선례를 남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드워킨 같은 법철학자는 ‘시민불복종’의 한계를 아주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다. “대중이 권력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입법자들의 입법에 대해 시민불복종을 조직하는 것은, 헌법적 질서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정당성을 지닌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즉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 그 하위법인 법률의 반민주성이나 입법자들의 부당한 입법에 대해 불복종을 행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를 흔히들 ‘소극적 저항권’이라고 한다. 이런 논리가 가능한 것은,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은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합의한 국체의 기본적 근거이고, 법이나 통치자들이 이를 어겨가며 입법을 시행하는 것은 국체의 기본적 원리를 거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한하여 저항권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불복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 사회 구성원이 합의한 내용인가를 둘러싸고 여전히 논쟁이 진행될 수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절차적 동의’와 ‘내용적 동의’를 함께 유지하는 가운데 입법적 원리가 적용되는 사회일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내용적 민주주의가 통일될 때만 진정한 사회적 합의가 구성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가치의 다원성이 존재하는 것을 수용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다원성의 근저에 근본적으로 동의하는 공동체적 운영원리가 존재해야 함을 의미한다. 결국 무엇이 내용적으로 타당한가에 대한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기본적 합의가 없다면 내용적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내용적 타당성의 최소강령적 합의는 인간의 보편적인 생명권으로서 ‘인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인권의 보편성은 헌법의 기본정신에서도 표현되어 있듯이 ‘시민권적 기본권’을 의미한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어떠한 가치도 이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보편성의 기초 위에 다원적인 정책이나 다양한 가치의 다양성이 존재할 수 있을 때, 내용적 타당성에 기초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통한 민주사회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6. 불교계는 ‘정의론’ 논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회정의에 대한 샌델의 논의에 비해, ‘정의론’에 대한 관심사의 폭증이 상업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되물릴 생각은 없다. 샌델조차도 이러한 대중적 열기에 대해 “한국에서도 정의에 대한 배고픔과 갈증이 있는 것 같다”(〈한국일보〉 2010. 8. 19)라고 언급할 정도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정의사회의 첫 이미지가 전두환 정권의 등장과 함께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광주에서 무고한 민중들에 대해 공권력을 통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며 등장한 전두환 정권에 대해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제시하며 법적인 정의를 정면으로 무력화시킨 바 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부정의한 정권의 군홧발에 짓밟혔던 불교계가 사회정의의 이름으로 당해야 했던 정화조치에 대한 치욕과 암울한 기억을 되새김해 보면 더욱 무력감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러한 사회정의론의 다양한 쟁점들을 불교계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1)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는 절차적 정의를 무너뜨리는 데서 비롯

위에서 현대사회에서 정당성의 위기 문제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위기와 관련된다고 보았다. 물론 현대사회의 합리성의 증대 과정에서 나타나는 관료제화와 과두제의 철칙의 문제를 회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 있었던 수많은 공기업의 채용 비리가 한두 곳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사실에서 한국사회에서 ‘정의’ 문제의 본질은 단순히 ‘기울어진 운동장’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절차적 정당성을 빌미로 한 부정의의 잔재들과 버티기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KBS, MBC의 언론권력이 대표적이다. 우리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있는 것처럼 사회적 정당성의 실질적 내용을 담당하고 있는 언론에서 내용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내용이 될 것이다. 언론에 대한 제자리 잡기는 사회적 공공성의 척도이다. 정의의 기준과 관념의 사회적 확산과도 비례하는 핵심 영역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적 공공성의 담지자로서 언론권력에 대한 적폐청산 노력과 공공성 확보를 위한 노력은 불교계 내부로도 돌려져야 한다. 불교계 언론에 의해 제기되는 실질적 정당성 확보를 요구하는 담론의 확산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기득권의 편이 아니라 정의의 기준에 의한 논의들이 있어야 한다. 최소한의 사회적 기대수준의 정당성과 최소한의 윤리의식이 견지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불교계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내용들도 정의의 논리에서 본다면 절차적 합법성의 문제, 바로 계율의 문제로부터 위기가 비롯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계율’은 불교의 근본을 정의하는 규범적 명령이다. 정법구현을 위한 실천적인 최소강령인 계율의 파계 행위조차 외면하며, 승가 공동체의 최소한의 절차적 정의도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행태들은 사회적 기대와 최소한의 정의 기준마저 지키지 못하는 윤리적 패닉 상태에 다름 아니다. 공동체의 상식적인 가치와 기준이라는 최소한의 윤리의식도 없는 교계 지도자들에게 어떻게 사회적 존경과 정당성이 부여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교단이 만족할 만한 개선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럴 조짐은 여러 분야에서 감지되고 있다.

이미 우리가 경험한 바와 같이 절차적 정당성은 내용적 정당성의 문제를 쉽게 덮어버리고 만다.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적 관념들이 소유권에 기반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관철시키고 있는 것과 똑같은 모습이야말로 불교계가 극복해야 할 과제다. 촛불혁명은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사화하고 타락한 권력이 절차적 정당성을 무기로 한국사회를 희화화할 때 수백만의 촛불 시민이 적폐청산과 절차적 정의의 실현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 힘은 권력을 탄핵하고, 구속 수감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불교계는 이 꺼지지 않는 촛불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바람직한 불교정의를 말할 수 있는 시발점은 여기에 있다.

2) ‘정의’에 대한 다양한 불교정의론적 해석 필요

최근 한국사회의 사회정의론에 대한 담론의 광범위한 확산에는 기독교 복음주의와 긴밀하게 결합하고 있는 세력들의 정치 · 사회적 맥락과 친박 집회의 주요 장면들이 절묘하게 겹쳐지고 있다. 근대성에 대한 논의가 자본주의의와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의 결합에서 시작되었듯이 오늘날 세계화의 논의는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자본주의의 논리와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와도 분리하여 사고할 수 없는 지점이다.

자유주의는 항상 자신의 윤리적 규범으로서 ‘정의’의 논리를 제시해왔다. 오늘날의 근대성과 세계화의 기준이 미국의 신자유주의라고 보았을 때, 정의론적인 관념의 확산과 세계화를 통한 양극화의 현실은 반비례하는 양상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차피 현대 자본주의의 양상과 다국적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흐름을 되돌리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윤리적 주체로서 개인을 중요시하는 자유주의적 윤리가 자본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인식론적 원천이 되고 있다. 이러한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개인 간의 사회계약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적인 소유권적 권리의 원천에 대해 자유주의나 공동체주의적 정의론으로서 해결의 답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소유관계와 주권적 존재로서 개인주의는 현대 자본주의의 주요한 물질적 기초가 되고 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의 발견을 통해 만들어진 윤리는 그 주체의 내적인 모순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정의와 합리성의 논리를 통한 사회 개선이 사회발전이라는 데에서 정의론의 다양한 논리들은 새로운 자유주의, 신자유주의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감시와 감독의 체계화를 통한 합리성의 증대 노력들은 기득권 세력의 자기재생산의 주요한 기반이자 자본주의의 이윤율 증가와 효율적 정치 감시의 안정화를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이 된다. 기득권을 유지, 재생산하기 위하여 정치나 경제, 종교, 언론에서 다양한 권력 장치들과 새로운 규제, 규칙들이 만들어진다. 사회정의에 대한 논의들이 신자유주의적 논의와 부합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의라는 윤리로 포장하고 있는 사적인 소유체제에 기반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정면비판으로 나아가야 한다.

철학 전공자가 아닌 사회학자로서 보다 엄밀한 철학적 논리로 논의를 이어가는 것은 한계가 많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과 삶 그리고 미래에까지 드리워진 음울한 그림자를 벗겨내기 위해서는 현대인들의 일상생활과 삶에 대한 성찰적 인식이 절실히 요청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를 열었던 소유의 관념으로서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는 무소유의 논리와 공(空)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불교정의론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을 것이며, 불교의 윤리와 정의의 담론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삶에 대한 불교정의론적 관점과 성찰적 인식의 확산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인 주체, 윤리관을 도출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사물이 극에 도달하면 되돌아온다는 물극필반(物極必反)의 논리는, 역사와 문명을 비롯한 인간의 삶 전체 영역에서 관철되고 있다. 이에 대한 가장 간단한 언명은 무소유(無所有)의 논리이다.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마음, 무언가를 갖고 싶은 마음,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영원하지 않다는 법정 스님의 일상 담화의 울림이 더 강하게 와 닿는다. 자본주의적 소유의 관념을 넘어서 내려놓을 수 있는 물질에 대한 ‘공(空)’ 사상은 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이기적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모습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관에 바탕한 자본주의를 넘어선 공공선 관념은 기득권체제와 지배집단에 대한 가장 단순한 비판의 무기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적 의미의 사회정의론은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한다(諸惡莫作 衆善奉行)”라는 가장 단순한 언명 안에 다 들어 있다 하겠다.


7. 나가며

현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한국사회는 끊임없이 욕망하는 사회이다. 정의의 문제는 사실상 공동체적 규범과 불평등, 양극화와 이로 인한 공동체의 가치지향 문제와 직결된다. 경제학적 인간들의 교환가치에 근거한 공리주의적 가치에서는 욕망의 크기와 양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가치 기준 충족을 위한 욕구와 욕망을 추구하는 현대사회는 또 다른 충동과 욕망의 사회로 나아간다. 쾌락의 평등을 추구하기 위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욕망하는 사회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불교정의론의 관점에서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시대의 욕망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정의를 요구하는 다양한 사회적 요구들에 대응하는 논리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행되고 실현되는 다양한 사회적 삶과 과정에 대한 불교계의 적극적인 관심과 사회적 참여를 필요로 한다. 시민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한 개신교의 활동에 비해 불교계의 활동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회정의에 대한 불교적 관점을 선뜻 제시하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중생들에 대한 무한한 이타심과 사회적 불의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다양한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사회적 정의와 불교적 정의가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체득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과정에서 얻어진 사회적 정의에 대한 불교공동체의 합의와 공론이 다양한 활동과 영역으로 확산하여 자리이타의 사상으로 거듭날 때, 불교정의에 대한 윤리가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 공동체의 실천윤리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자리이타의 보살정신을 통한 사회적 실천들이 불교적인 사회정의의 관념과 가치들을 기준으로 재해석되고 논의될 필요가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16~17년 촛불 시민의 민주주의 혁명 성과를 불교개혁의 과제로 전환하려는 다양한 시도와 노력이 확산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실현이 중요한 과제이듯이 앞으로도 더 많은 불교 사회운동의 참여와 확산을 통해 불교와 사회의 만남이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절차적 민주주의와 내용적 합리성이 함께 조화될 수 있는 불교적 정의론에 대한 공감의 장이자 담론 확산의 장이 될 것이다. 보살정신과 사회정의를 향한 이타행은 불자들로 하여금 시민으로서 참여의식과 정체성 형성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정승안 
동명대 자율전공학부 교수. 비판적 사회학의 맛에 흠뻑 빠져들었다가 대학원에서는 일상생활의 사회학과 사회사상에 관심을 두었다. 실천적 사회과학의 한계에 대한 인식은 동양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불경과 사서삼경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사회학과 동양사상의 만남 및 이론적 결합을 화두로, 연구하며 나름대로의 대안적 실천을 모색하고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