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철 현대불교신문 취재부 기자

‘가장 이상적인 경전번역은 어떤 것인가?’ ‘널리 읽히기 위한 경전번역인가 역경사업을 위한 번역인가?’ 경전연구소(이사장 돈연)는 우리나라의 경전번역 현주소를 파악하고 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해 2월 25일 ‘세계 각국의 경전번역 실태 및 체계에 관한 연구’ 발표회를 열었다.

이번 발표회는 각국의 경전번역 실태를 파악해 우리의 역경시스템을 점검하고 역경사업의 바람직한 모델을 제시하기 위한 최초의 학술발표회란 점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았다. 이 자리에 모인 발표자들이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이해도가 높은 번역이 가장 이상적인 번역”이라고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은 앞으로의 역경사업의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될 전망이다. 이날 발표된 ‘각국의 경전번역 실태 및 체계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요약 소개한다.

한국의 경전 번역 실태-이진영(동국역경원 역경위원)

1964년 동국역경원의 설립과 함께 우리나라는 본격적으로 역경사업의 체계를 갖추고 2000년에는 한글대장경 완간이라는 큰 결실을 이뤄냈다. 그동안 역경의 필요성, 역경을 위한 재정 확충 등 역경 사업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여기서는 우리나라 경전 번역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역경원의 한글대장경 간행 과정과 역경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역경원 개원 후 운허스님은 국고보조를 받을 길을 모색하던 중 한글대장경 제1집 『장아함경』을 1964년에 간행할 계획을 세웠다. 정부가 인정하는 실적이 있으면 국고보조에 유리했기 때문에 이 계획을 더욱 서둘렀다. 조계종 총무원은 간행비 1백만 원을 보조하기로 하였으나, 그 이듬해 56만원이 지급되어 한글대장경 제1집 『장아함경』은 1965년 6월 30일 국판 800면 양장본으로 초판 2,000부가 간행되었다. 이후 1994년에 26책의 한글대장경이 간행된 것을 비롯해, 1995년에 28책, 96년에 32책, 1997년에 30책 등 4년간 총 116책이 간행되었다. 1998년과 1999년의 추가 지원으로 1998년에 33책, 1999년과 2000년에 걸쳐 35책을 발간하였다. 이 동안 국고 지원 19억여 원, 동국대학교 및 후원회 지원, 자체 자금 등 31억여 원을 투자하여 한글대장경 184책을 발간하였다. 1965년 제1집 『장아함경』으로 시작된 한글대장경은 36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318책으로 완간됨으로써, 마침내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말로 된 대장경을 갖게 되었다.

한글대장경은 불교학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대지도론(大智度論)』등을 비롯한 논부(論部)의 번역과 『사분율(四分律)』 『십송율(十誦律)』등 율부(律部)의 번역, 그리고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등의 사휘부(辭彙部)의 번역은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36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한글대장경을 완간하긴 했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점들이 있어, 빠른 시간 내에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와 있다.

첫째, 정확한 대장경 분류체계에 따라 간행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한역 대장경의 대승 경ㆍ율ㆍ논, 소승의 경ㆍ율ㆍ논, 현성집전(賢聖集傳)으로 이루어진 순서를 택하지 않고, 그때그때 번역되는 순서대로 간행했기 때문에 일련번호도 부여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한글대장경에는 전 세계 불교학계가 공인하는 대장경분류법에 따른 체계적인 분류와 함께 전체 일련번호를 부여해야 한다.

둘째, 한글대장경은 한정된 예산과 촉박한 시간으로 급하게 번역되었고, 오역(誤譯)과 누락된 부분이 많은 채로 간행된 실정이다. 또한 “언어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천(變遷)한다”는 사실이 한글대장경의 개역을 요구하게 된다.

셋째, 역경 전문가의 양성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이다. 역경원 발족 당시 구성되었던 역경위원들이 대부분 이미 타계해 버리거나 고령일 뿐만 아니라, 현재 경전 번역에 참가하고 있는 역경 전문가는 소수에 불과한 실정이다.
넷째, 지금까지 역경이 한글화 작업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이제는 정보화 시대에 걸맞는 전산화 작업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에 역경원에서는 지난 2001년부터 정부의 지원과 자체 예산으로 동국대 전자불전연구소와 함께 대장경의 전산화 사업을 펴고 있다.

역경은 일반적인 번역이 갖는 문제를 공유하지만, 일반 문학작품이나 학술서적의 번역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경전은 불교의 정수가 표현된 것이어서, 이것을 번역할 때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시대와 대중에 따라 계속 변화의 과정을 겪는 것이며, 일반 대중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히 알려주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경은 불교 교육과 포교가 맞물려 있는 불교 대중화의 핵심이다. 역경 없이는 불교학 기초가 튼튼하지 못할 것이며, 포교의 실효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도외시되어 있는 것이 역경의 현실이다. 앞으로 역경사업은 역경원뿐만 아니라 사찰, 종단 등 한국 불교계가 관심을 가지고 장기적인 계획 아래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티베트의 범어불전 번역 실태-안성두(금강대 국제불교문화연구소 연구원)

티베트에서의 범어불전 번역은 서기 700년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보이며, 대략 850~970년 사이 120여년의 혼란기를 제외하고 13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간헐적인 번역작업, 예를 들어 17세기 타라나타 등에 의해 범어로부터 밀교문헌이 번역되고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티베트에서의 불전번역과정 중, 초기 전파기(8세기말~9세기 중순)에는 왕가의 전폭적 후원을 받아 매우 집중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8세기 초에 몇 가지 경전이 티베트어로 번역되었다고 티베트의 전승은 말하고 있지만, 전승자로 언급된 티베트인 학승 중 9세기에 활동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어 그 전승을 역사적 사실로서 신뢰할 수는 없다. 814년 편찬된 2권본의 『이권본역어석』의 서문에 티송데짼(Trisong Detsen. 755~797) 왕의 시기에 행해진 번역의 교정만을 과제로 한다고 설해지고 있다. 따라서 그 이전의 번역은 거의 없거나 있다고 해도 그 수가 극히 한정되어 있었으리라고 보인다.

물론 티베트가 군사적으로 팽창함에 따라 이웃의 여러 나라와 교류가 있었고, 그때 통역자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송짼감포(Songtsen Grmpo. 618~649) 왕의 시기에 이미 범어와 한문에 능숙한 사람들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료에는 통역자로 활동한 티베트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또 779년 샨타락시타로부터 범어를 배운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그들은 번역자로서 활동했고 그들의 번역은 현존 대장경 중에 수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북경판 No 5840-1, No 5842, No 5839에 언급된 번역자의 명이 그것이다. 그러나 경전은 보통 여러 차례 개정되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번역과 그들의 원래의 번역은 달랐을 것이다.

돈황자료의 일부에는 현존의 대장경 중에 포함되지 않은 문헌이나 전래 자료와 비교해 보면 전혀 다른 이역(異譯)의 문헌 등이 있다. 예를 들어 돈황본 『수습차제(修習次第)』[초편](Stein No 648; Pelliot No 682, 825)는 삼예사의 논쟁 무렵 번역되었다고 보이지만, 이에 대한 번역본(북경판 No 5310)은 9세기에 예세데(Ye shes sde)가 신흠정어에 따라 번역한 것이다. 이 번역이 돈황본의 재역이라는 증거는 없다. 돈황본 『수습차제』와 유사한 경우가 돈황본 『해심밀경(海深密經)』(Stein No 194)이다.

이 문헌을 북경판과 비교해 보면 돈황본 『수습차제』에도 사용되지 않은 더 오래된 번역어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른 시기에 번역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돈황본 『보운경(寶雲經)』(Stein No 161-2)과 『무진의보살경(無盡意普薩經)』(Stein No 48)도 같은 계통의 번역어를 사용하고 있다.

9세기 초 범어로부터 번역된 문헌들에 있어 용어의 혼란과 오역이 문제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왕의 칙령이 내려졌고, 그에 따라 인도학승과 티베트 학승의 공동작업에 의해 『이권본역어석』이 814년 무렵에 편찬되었다. 이 어휘집의 제정에 따라 확정된 신흠정어에 따른 교정이 행해지게 되었다.

『이권본역어석』은 범어의 티벳 역어를 결정하는 근거를 약 413개의 범어단어에 대한 해설어휘집으로서, 티베트 번역어는 『번역명의대집』(북경판 No 5832)의 용어와 거의 일치한다. 일반적으로 번역용어의 확립은 『번역명의대집』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이권본역어석』의 편찬을 통해 어떻게 번역어를 확정하는지가 결정되었다고 보인다. 다만 『이권본역어석』에 사용된 용어가 『번역명의대집』의 확정된 용어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후자의 편찬이 약간 후대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반면 그것은 『번역명의대집』의 어려운 용어에 대한 해설집으로서 조금 후에 편찬되었다고 하는 학자도 있다.

범어의 한글 번역과는 달리 범어의 티베트어 번역은 범어의 구문을 비교적 충실히 반영할 수 있었다. 또한 문화사적으로 보면 중국불교의 경우와는 달리 ‘격의적’ 문제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직역이 가능했을 것이다. 범어를 번역함에 있어 번역자 자신의 팀에 의해 여러 차례 수정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사실은 티베트대장경 편찬에서의 교정작업과 비교해 보면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 여러 사본이 남아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티베트장경의 특징은 어떤 판본이 정해지면 그 이전의 다른 번역은 제외된다는데 있다. 따라서 이본(異本)의 존재는 동일한 대장경 속에서는 확인될 수 없고 다만 별도의 사본이나 다른 대장경을 통해서만 확인된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확정된 판본을 만들기 위해 티베트인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후기 전파기에 있어 중관학의 이해를 둘러싸고 벌어진 많은 학자들의 번역과 재번역의 과정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인도에서 유가행 중관파와 자립행 중관파, 귀류중관파의 논서가 번역되었을 때, 최고의 실재를 설하는 논서를 확정짓는 것이 필요했다. 이런 작업을 통해 비로소 티베트불교의 독자적 이해가 확고히 구축될 수 있었다.

중국의 경전 번역 시스템-박상준(동국역경원 역경위원)

일반적으로 중국의 역경사는 번역가를 중심으로 구분짓는 것이 유력설이다. 구마라집 이전의 고역(古譯), 구마라집 이후부터 현장 이전까지의 구역(舊譯), 현장 이후의 신역(新譯)시대가 그것이다.

고역은 후한부터 서진(西晋) 말에 이르는 160년으로 『사십이장경』『수행본기경』『중본기경』등과 같은 석존의 전기류, 『보살본연경』처럼 인과업보설을 구체적으로 설한 이야기를 모은 『비유경』, 교훈적인 격언시라고 할 『법구경』등이 번역됐다.

구역은 동진으로부터 남북조에 이르는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는 역경의 성숙기로 불교의 전법이 보다 활발히 전개되었다. 구마라집ㆍ진제ㆍ도안ㆍ보리유지ㆍ구나발타라 등이 역경사에 발자취를 남겼다. 이 시기는 국가의 조직적 지원 아래 전문적인 역경기구가 설치되어 체계적인 번역이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신역은 수ㆍ당ㆍ송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 있어서 역경은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역경의 일대 비약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번역가는 현장ㆍ의정ㆍ불공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현장은 경전 번역의 양적인 측면에서 단연코 뛰어나다. 예를 들면 현존하는 한역경전은 대정신수대장경의 32책 정도인데, 이중에서 현장이 번역한 것은 약 7책에 달하고 있으므로 한역경전 전체의 5분의 1 이상을 현장이 번역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구마라집의 역경과 비교하면 4배정도 되는 양이다.

다음은 고대 중국의 역경시스템을 살펴보자. 현재로서는 당시 번역 과정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고 다음과 같은 추측이 가능하다. 우선 불편한 교통으로 물자 조달이 쉽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범본 원전을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소량이나마 역경자들이 중국에 들어올 당시 가지고 온 범본이 있었을 것이다. 중국에 들어와 일정 기간 머문 서역인들은 안세고 처럼 중국어에 능통한 사람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혼자 필사할 정도는 아니어서 대개는 중국어로 구술번역을 하고 중국인 조수가 받아 적어 윤문하는 방식을 취했을 것이다. 범본은 있으나 중국어를 모르는 경우는 서역의 언어로 구술을 하였으며 서역 언어에 능한 중국인 조수가 이를 알아듣고 중국어로 해석하여 적었을 것이다.

당시 최대 번역가였던 서진의 축법호는 중앙 아시아의 돈황 출신이었는데, 인도나 중앙 아시아의 36개 국어에 통달해 있어서 150여 부 3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을 혼자 번역했고, 필수자가 조금 도움을 주었을 뿐이라고 한다. 또한 남북조의 양ㆍ진 전란 시대에 각지에서 유랑하면서 번역을 했던 진제도 거의 혼자서 한역했던 것 같다.
이에 반해 육조 시대에 이르면 남북조의 통치자들이 불교를 많이 믿고 받들었기 때문에, 그들의 지지 아래 마침내 대규모의 번역소가 세워졌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점은 번역소가 경전을 번역하는 한 가지 기능 이외에도 동시에 교학의 연구기구로서의 역할도 했다는 점이다. 나아가 구마라집ㆍ현장 이후에는 국가적으로 체계적인 번역이 이루어지고, 여기에 수십 수백 명의 학자가 동원되었다. 현장의 번역문은 화려하고 유창한 구마라집의 번역과 대조되면서 정확하고 정밀한 번역으로 유명하다. 구마라집의 번역문에는 의역과 원문을 수정한 부분이 많이 있으나 현장의 번역문은 매우 정밀하다.

끝으로 인도의 언어로 되어 있는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발생한 부수적인 성과를 몇 가지 정리하면서 맺음말을 갈음하고자 한다.

첫째, 번역과정 중에서 비교적 체계 있는 번역 이론이 완성되었다. 경전 번역은 경건한 종교사업이며 일반적으로 매우 엄숙한 것이다. 역대 경전을 번역한 역경사들은 번역의 원칙과 방법에 관하여 진지하게 탐구하고 검토하였으며, 아울러 번역이론을 총정리 하였다. 번역문의 충실성, 표현상의 신빙성, 정확한 전달의 상관관계, 외래어의 음역원칙, 역자의 수양 등과 관련하여 수많은 문제들을 총정리 하였으니 이는 번역사에서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번역 과정에서 중국인들은 외래어문의 성분을 수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국어의 풍격을 유지하면서 중국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중국어와 범어를 결합하고 운문과 산문을 혼용하여 누구나 감상할 수 있는 문체, 즉 역경체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점이 중국어문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니 문체사에서 하나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경전의 번역을 통하여 대규모의 종교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이들이 경전 번역에 큰 역할을 하였을 분만 아니라 일부는 불교교리 전문가로 성장하여 중국 불교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스리랑카의 국가적인 경전 번역 사업 -정준영(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전임강사)

스리랑카 경전번역의 출발점은 『빠알리 삼장』의 싱할리 번역과 출판을 목적으로 1965년 국가사업으로 진행된 ‘스리랑카 불자회의’의 설립부터다. 1965년 스리랑카ㆍ인도ㆍ미얀마ㆍ태국 등의 남아시아 국가들은 부처님의 대반열반 2,50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루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이 국가들은 부처님의 열반일을 기원전 544년이라고 정의하고 불교승단이 존재한 2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보다 의미 있는 작업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스리랑카 정부 역시 이 의미 있는 해를 위해 공헌할 수 있는 일을 위해 고민하였고, 정부는 ‘붓다자얀띠(Buddha-Jayanti, 부처님 聖年)’라고 부르는 위대한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두 가지 주요 사업을 정부주도하에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의 목표는 빠알리 삼장을 싱할리로 완역, 출판하는 것과 『불교대백과사전(Encyclopedia of Buddhism)』을 영문으로 제작하는 것이다.

『빠알리 삼장』의 번역계획은 1954년 최초로 논의되어 ‘Buddha Jayanti Tripitaka Granthamala(BJT)’라는 공식이름으로 준비되었고 2년 후인 1956년, ‘붓다자얀띠’의 ‘부처님 오신 날(Vesak day)’을 기념하여 국가사업으로 공식 선포되었다.

‘붓다자얀띠’와 관련된 모든 역경사업은 정부에서 지원하는 국가사업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법적효력을 지니는 특별위원회가 필요했다. 이에 1954년 국회에서 공식적인 정부사업으로 인정돼, 특별위원회를 설립하여 모든 작업이 정부의 지원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특별위원회는 ‘스리랑카 불자회의’라고 불렸으며 『빠알리 삼장』의 싱할리 번역과 출판에 대한 모든 권한은 이 위원회의 관리 하에 진행하게 되었다.

‘스리랑카 불자회의’라는 빠알리 삼장번역 특별위원회의 조정과 후원 아래, 빠알리 삼장의 직접적인 번역과 출판을 담당하는 편집위원회와 그 구성원이 선정되었다. 이는 ‘삼장의 번역과 편집위원회(The Tip- itaka Translation and Editorial Board)’라는 이름으로 24명의 구성원이 중심이 되어 위원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편집위원회의 구성, 구분, 편집위원, 지도부, 역자 그리고 편집자는 필요와 상황에 따라 변화했다. 편집위원회는 대표와 편집장이 주축이 되었고 필요에 따라 새로운 역할이 창조되었다. 예를 들면 고문, 편집운영, 간사 등의 역할은 설립시기에는 없었던 것으로 진행에 따라 새롭게 추가된 것이다.

최초의 번역은 각각의 승려들이 개별적, 경전별로 구분하여 진행했다. 편집위원회는 위원들의 특성에 맞춰 적절한 역자를 선정하고 분량을 할당하였다. 주로 24명의 편집위원들이 분량을 할당하여 역경을 진행해 나아갔으며 필요에 따라 위원회에 속하지 않은 외부의 역자들 역시 신중히 선별하여 분량을 할당하였다. 경전의 번역과 편집을 맡은 승려들은 필사본을 통하여 빠알리어를 확인하고 이를 싱할리로 번역하는 과정으로 진행했다.

개별적으로 맡은 경전이 완역되면 번역물은 편집위원회에 제출되었다. 편집위원은 제출된 작업물을 숙독하고 문제여부에 따라 편집대표에게 전달한다. 편집대표는 다른 편집위원들이 번역물의 정확도를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편집대표의 확인을 거친 번역물은 평가와 제언을 위한 마지막 최고기관인 ‘최고 편집심의회’에 보고한다. 이곳에서 문제가 없으면 곧바로 출판으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스리랑카의 부처님 성년기념 삼장 번역시리즈(Buddha Jayanti Tripitaka Granthaml)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스리랑카 경전번역의 특징은 몇 가지로 간추려질 수 있다.

먼저 빠알리 경전의 번역이 국가사업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스리랑카 정부는 ‘붓다자얀띠’라는 의미 있는 해를 기념하기 위해 정부주도하에 역경사업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번역을 위한 적절한 연구비를 지급하지 않았고 실질적인 역자들을 전임연구원으로 고용하지 못했다. 따라서 작업을 촉진시키기 위한 특별한 시간계획을 세우기가 어려웠으며, 이와 같은 상황은 번역의 속도가 느려지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결국 빠알리어에 능통한 스님들이 빠알리 삼장을 싱할리로 번역하는데 33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붓다자얀띠판의 특징은 제작과정 뿐만 아니라 출판 후의 평가를 통해서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붓다자얀띠판은 한쪽 면에는 빠알리 원전이, 마주보는 다른 한 쪽에는 싱할리 번역을 담고 있어 원전과 번역내용이 동시에 확인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이와 같은 형식은 빠알리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대중보다는 학문적 용도라는 좁은 범위로 활용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왜냐하면 번역에 사용된 용어가 사찰에서 사용하던 오래된 싱할리로 많은 사람들의 이해를 돕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스리랑카에서 번역된 붓다자얀띠판은 그 나름대로의 장ㆍ단점을 지니고 있다.

미국의 실용적인 경전 번역 현황-심재관(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미국의 경전 번역의 특징은 일반인을 위한 경전번역 출판물과 학자를 위한 경전번역 출판물이 명확히 구분돼 있다는 것이다. 즉 ‘다양성ㆍ실용성ㆍ실험성’ 이란 세 단어가 미국불교의 성격뿐만 아니라 학문의 성격까지 포괄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불경번역 역사를 범박하게 세단계로 구분해 보면, 첫 단계로 2차 대전 이전의 유럽계 지식인들, 오리엔탈리스트에 의한 불경번역이 있을 것이고, 두 번째 단계로 2차 대전 이후 동아시아 및 동남아 이주민 환경과 50년대를 전후한 젠붐(Zen Boom), 그에 따른 일본ㆍ중국 원전들의 번역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선 열풍에 뒤이어 60년대의 미국 내 티베트 승려들의 점차적인 정착과 함께 이루어진 티베트불교의 관심과 티베트경전의 번역기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이루어진(이루어지고 있는) 불경번역의 사례 가운데 장기적인 대규모 번역의 사례는 대표적으로 ‘B아 영역대장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BDK(Bukkyo Dendo Kyokai), 즉 불교전도협회(佛敎傳道協會)는 누마타 예한(沼田惠範)이 1965년 설립한 비영리, 비종파적인 국제적 불교포교재단이다. BDK 불경번역총서는 10여개국 출신의 약 80여 불교학자들이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에서 찍어내고 있다. 버클리의 누마타 센터에서는 그 외에도 영어불교서적을 출판해 포교하는 일을 맡고 있다.

버클리에 누마타 센터를 건립하기 전, 1982년 봄 ‘영역대장경 번역위원회’를 공식적으로 결성한 후, 한달에 한 번 꼴로 모임을 갖고 1차 번역시리즈로 들어갈 139가지의 경전을 선별하고, 이들을 100권으로 찍어내기로 했다. 처음 예상대로라면, 이 번역은 20년 정도 소요될 것으로 추측했으나 아직 번역이 끝나지 않은 것이 많다.

처음에는 이 100권의 번역이 진행되는 동안 다시 차후 20여년간 번역될 2차분의 경전을 선발할 계획이었다. 이렇게 번역하자면, 신수대장경의 영역은 모두 백여년이 소요될 일이다. 실지로 이 사업의 발의 후, 10년이 지난 1992년 9월말에 편집위원회는 역자들로부터 1차분 139권 가운데 45권의 번역을 받았다.

영역대장경의 서문에서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듯이, BDK 영역대장경의 목적은 전세계인들을 대상으로 누구나 불경을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역하고자 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복잡하고 전문적인 주석과 해설이 붙는 학술적 번역형태를 배제하고 있다.

그러나 형태나 구성상의 단점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1) 우선 책을 하드커버 형태로만 제작하는 것이 그렇다. 이것은 독자에게나 제작자에게는 좋은 것이 아닌 듯 싶다.

    (2) 특히 아시아인들에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점은, 책명이나 한역자의 명칭을 영어로만 표기했기 때문에 책명만 보고 본래 해당 한문경전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울 때가 있다.

    (3) 불교전문용어를 번역하면서 통일된 번역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번역자들마다 동일한 개념을 달리 사용할 수 있고, 이 때문에 이 시리즈를 자주 읽는 심도있는 독자는 혼동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의 경전 번역 실태에 있어서 협회뿐만 아니라 개인의 불경 번역의 경향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지극히 학술적인 번역이라 대중이 읽기에는 부적합 것들이 있고, 또 하나는 학문적인 도구들(주석, 참고문헌, 등)을 포함시켰지만 대중들이 읽기에 편한 번역들이 있다.

전자의 경우를 예로 들면, 최근 하와이 대학출판사에서 출판되고 있는 소위, ‘불교전통시리즈(Studies in the Buddhist Traditions)’에 포함된 연구ㆍ번역서들이 그렇다. 이 시리즈는 미시건 대학 동아시아언어와 문화학과가 1988년에 설립한 불교전통연구소(The Institute for the Study of Buddhist Traditions)에서 펴내는 것으로 인도, 티베트, 중국을 포함하는 대승불교전통을 중심으로한 전문적 경전 번역과 연구(논문)이 중심을 이룬다.

협회의 지원 못지 않게, 불교서적을 전문적으로 출간하는 출판사의 존재도 경전번역의 활성화에 일익을 담당한다. 다양한 언어로 인한 편집상의 기술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전문적인 불교분야는 거의 수익이 없으므로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출판을 시도해야한다는 것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 불교출판물을 많이 내는 출판사 가운데, 대표적으로 위즈덤 퍼블리케이션(Wisdom Publications)이나 스노우 라이언(Snow Lion)이 있고, 대학 출판사로는 하와이 대학 출판사가 가장 많은 불교연구물을 출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콜럼비아 대학 출판사와 캘리포니아 대학 출판사 등이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위즈덤 퍼블리케이션은 불교전문 출판사이지만, 비영리로 운영되는 곳이다. 소위, ‘대승전통의 계승을 위한 재단(FPMT: the Foundation for the Preservation of the Mahayana Tradition)’의 일부로서 비영리로 판매기금, 후원이나 보시에 의존해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재단이나 협회 또는 선량한 취지의 출판사가 한 개인의 심도있는 번역과 만나서 현재 미국의 불경번역사업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학술적인 경전 번역 실태-강성용

독일어권 학계의 불교학 연구는 문헌학적 연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제도권 내에서는 대학 혹은 연구기관의 조직상 ‘인도학’의 간판 아래서 연구되어 왔으며, 불교의 삼장을 완역하겠다는 등의 조직적 번역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 학술번역의 경우 가장 흔하게 출간되는 것들이 다름 아닌 학위 논문들이다. 수많은 문헌학적 작업들이 그러하듯, 광대한 분량의 특정한 문헌(들)이 한 단행본으로 출간될 만큼 개인이 작업을 한다. 또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것은 의무 사항에 속하는 학위논문의 출간이 아닌 경우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불교문화권에 속하는 우리가 흔히 불경 번역이라는 이름 아래 기대하는 그런 출간물들은 박사학위 논문의 단행본 출간인 경우가 많은 것이 당연할 것이다. 불교학의 연구가 제도권, 즉 대학이나 공공기관인 연구소 혹은 학술원, 박물관 등의 기관에서 이루어져 온 것이 독일어권 학계의 일반적인 관행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직접적인 이윤동기가 개입되지 않는 번역 작업이 학위논문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어권 학계가 불교문화권에 속하는 국가의 학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적은 인력으로 세계 학계를 주도하는 수준 높은 번역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본적인 학문적 기초구조(infrastructure)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단 박사학위 논문들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여러 인도학, 불교학 관계 부서를 갖추고 있는 학술원들에서 출간되는 서적들은 대부분 그 출판비용을 학술원에서 부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구체적인 판권료 지급에 관한 계약내용은 경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일반적인 출판계의 관행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또한 학술원이 아니고 사설 재단들이 출판비용을 보조해 주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이런 경우도 대부분 마찬가지 방식으로 출판을 한다.

또 대중번역이라고 해야 할 불교 경전번역들이 일반적인 불교관계 서적들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가 않다. 이유인 즉 대중적인 판매와 이에 따른 이윤동기를 근거로 출간이 되는 서적들은 대부분 불교에 대한 소개나 불교 입문서가 차지하기 때문이다. 불경 자체의 번역을 읽는 사람들을 상대로 형성된 시장이 크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인지 불경 자체에 대한 번역은 불교신자이거나 혹은 불교승려가 된 독일어권 사람들에 의해 번역, 출간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중번역은 대략 신앙에서 구체적인 동기를 가지고 이루어진 번역들과 출판시장에서의 이윤을 추구해서 이루어진 번역의 두 양극 사이 어딘가에 놓인 번역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 대한 입문서는 물론이고 불교 경전의 번역까지를 포함하는 불교 관련 서적들의 출판이 양적으로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불교에 대한 독일어권 일반대중의 관심증가에 힘입은 것이다.

하지만 경전 번역의 출판 자체는 그 투자비용이 크고 또 상대적으로 시장성도 좋지 않다 보니 주로 예전에 이루어진 번역들을 다시 재판(reprint)하거나 다시 편집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음으로는 번역어를 선택하는 문제에 대하여 독일 학계에서 이루어졌던 논쟁을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의 빠알리 혹은 산스크리트 용어를 하나의 한국어 단어로 일관되게 번역할 것인가 아니면 문맥에 따라 적절한 번역어를 바꾸어 가면서 번역을 수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불교 경전번역의 맥락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1878년부터 독일어권의 인도학계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심도있는 논쟁이 있었는데, 이것은 불교 경전보다는 훨씬 더 언어학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나 현대의 독자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릭베다의 연구에 가담했던 당시 인도학계를 주도하던 학자들이 벌인 논쟁이었다.

올덴베륵(Oldenberg)은 질서(Ordnung)라고만 일관되게 번역하고 있으며 뤼더스(Lders)는 진리(Wahrheit)라고 항상 번역하고 있다. 즉 후자의 사람들은 한 개념에 대한 하나의 적확한 번역어를 찾아내고 그 번역어를 일관되게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여러 가지 번역어를 받아들이고 또 그런 번역어들을 이용하여 번역을 하는 진영에는 페터스붉 사전(PW)의 저자들과 그라스만(Grassmann)이 속하고 그 뒤로는 피쉘(Pischel), 겔트너(Geldner), 르누(Renou), 학커(Hacker) 등의 학자들로 이어지면서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따라서 필자가 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이러한 일관된 번역의 진영에 속하는 학자들이 비교언어학적인 연구방법을 동원하여 수많은 인도 고전어의 단어들, 특히 베다어에 속하는 고층의 단어들의 의미를 규명하는 선구적 작업들을 해냈다는 것이다.

미얀마의 경전 결집과 번역-강종미

미얀마에 불법이 전해진 시기는 부처님께서 대열반에 드신 뒤 230년이 지난, 아쇼카 왕 시대에 수완나부미라 불리는 미얀마 따통 지역과 수맛따라, 자바 섬 등 아홉 지역으로 불법의 전파를 위해 사절단을 파견할 때라고 전하고 있다.

미얀마에 불법이 전해졌을 때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인 『빠알리 삼장(三藏)』, 그 빠알리 경의 주석서인 『앗타까타』, 주석서를 해설한 『띠까』『간띠(gai)』 등의 문법서들 또한 스리랑카에서 전해져 보급되어 있다. 이러한 경을 배우고 가르치는 노력으로 인해 항따와띠, 바간, 인와, 꽁바웅 시대에 따라 경학을 숙달한 무수한 빅쿠들과 사람들이 배출되어 많은 저술을 남겼다.

다음은 과거 이루어졌던 결집들을 간략히 요약해 보이겠다.

1차 결집: 부처님께서 대 열반에 드신 뒤에 3개월이 지나 인도 라자가하 도시의 웨바라 산 동굴에서 마하 가섭이 주도하는 오백의 아라한 빅쿠들이 아자따삿뚜 왕의 옹호 하에 일곱 달에 걸쳐 결집을 거행하였다.

2차 결집: 불기 일백 년이 지나, 인도 웨살라 국의 왈리까 사원 숲에서 마하야사 존자께서 주도하는 아라한 칠백 명이 추종하는 십만 명의 빅쿠들에 둘러싸여 깔라소까 왕의 옹호 하에 여덟 달에 걸쳐 두 번째 결집이 이루어졌다.
3차 결집: 불기 235년 인도 빠달리뿟따 국의 아소까 사원에서 마하목갈리뿟따띳사 존자가 주도하는 일천의 아라한 존자들이 아소까 왕의 옹호 하에 아홉 달에 걸쳐 3차 결집을 거행하였다.

4차 결집: 불기 450년 스리랑카 말라야 지역의 아로까 동굴에서 마하담마락키따 존자가 주도하는 오백 아라한 빅쿠들이 왓따가미니 왕 집권 시에 4차 결집을 올렸다. 이 결집은 ‘패엽 위에 글자를 새겨 넣은 결집’라고 부른다. 기간이 얼마나 소요되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발견할 수 없었다.

한편 5차 결집은 14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1857년 미얀마에서 이뤄졌다. 과거와는 다른 형식으로 진행된 이 결집은 미얀마 왕의 후원하에 궁전에 건설된 망갈라마하삐따까 홀에서 대장로들의 주도로 일반인들에 의해 금, 잉크, 철필로 기록하도록 하였다.

이어 1951년 2월 15일 거행된 승단 장로회의에서는 보다 큰 규모로 6차 결집을 거행하기로 하고, 결집을 수행할 승단의 조직원을 선별하였다. 삼장법사이신 위찟따사라비왐사 등의 25분의 대장로 스님들을 중심으로 하고, ‘결집을 준비하는 협회(sgtividhyaka)’, ‘경호 협회(rakkha)’, ‘불법의 일을 해답하는 협회(kathvisajjaka)’, ‘승단의 일을 보살피는 협회(veyyvaccakara)’를 만들었다. 이 결집은 다음과 같은 많은 결실을 남겼다.

⑴ 철자, 단어, 구절 등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었다. ⑵ 숫따(sutta), 왁가(vagga), 빤나사(pasa) 등의 장이 체계적으로 됨. ⑶ 각자 연관된 서문을 체계적으로 붙임. ⑷ 연관된 경들의 서로 다른 빨리어를 아래 주석에서 비교하여 보임. ⑸ 앗타까타, 띠까들에 나오는 실례가 되는 빨리 경을 지시하여 주석에 기록함. ⑹ 동일한 경(經)이나 구절들이 다른 빨리 니까야 어느 부분에 나온다고 지시하여 기록함.

또 1951년에 삐다까 빨리 경의 미얀마 번역 작업에 들어가 1956년 출간된 사사나야웅치 월간지 5권, 2호 29번지에서 ‘현재 삐따까 빨리 경을 미얀마 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완결되어 앗타까타들을 미얀마어로 번역하고 있다’라는 글을 보게 됨으로써 미얀마어로 번역한 기간은 6년 정도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미얀마의 경전번역이 이루어낸 결과는 매우 놀랍다. 6차 결집을 올린 것과 같이 빨리 경전이 미얀마 어로 번역되어 출판됨으로써 빨리 어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단지 미얀마 어만으로 삐따까 삼장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과거 빨리어에 능통한 사람들만이 삐따까 삼장 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미얀마 번역본들이 쉽게 적혀진 것은 아니다. 매우 여러 차례 심형을 기울여 힘들게 번역되었다. 이 번역 작업은, 처음 이 작업을 구상하고 추진한 이들의 높은 뜻과 불법에 대한 신심으로 시작되어,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재원이나 인력의 완전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점은 불법을 열망했던 무수한 미얀마 사람들의 염원으로 인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6년의 짧은 기간 안에 이룬 이 성과는 과거 오랜 시간 충실하게 다져진 선현들의 꾸준한 경전 번역[닛사야 등]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처님의 불법은 인간의 근원적 존재의 탐구 이전에, 인간들의 삶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보시와 지계, 사마타 수행은 인간계, 천상계, 범천의 세속의 행복을 가져오고, 궁극적 진리의 깨달음은 윤회의 해탈이라는 근원적 고통의 종식을 가져온다. 이렇듯 세간과 출세간의 행복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제시된 불법의 미얀마 번역은 오랜 세월 한결같은 신심으로 불법을 보존한 미얀마인들의 공덕의 결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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